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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과 시사

박근혜의 탄핵은 인용인가 기각인가

◆<一讀>7인의 헌법 재판관들 外1편









헌정 사상 두 번째로 탄핵 소추안이 가결된 꼭두각시 대통령

퍼스트 레이디 에서, 하던 보수정당을 살려낸 역할을 거쳐, 결국엔 국가 권력의 정점인 대통령의 위치에까지

 올라선, 동아시아 근현대사 최초의 여성 지도자가 되었다.

그러나 전무후무한
최악의 국정농단 사태의 주범이자, 부패행위와 협박·뇌물수수 혐의로 헌정 사상 최초로 현직 대통령 신분으로 검찰에 입건된 범죄 피의자이기도 하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차녀이자 육영수 여사의 장녀이며 대구에서 태어났다.

1998년, 한나라당(현 새누리당)소속으로 대구 달성군 제15 국회의원 보궐선거에 나가 국회의원이 되었다.

이후 제16·17·18·19대 대한민국 국회의원으로 활동했다.

2007년 제17대 대한민국 대통령선거후보자 선출을 위한 한나라당 내 경선에서
이명박 후보에게 패배하여 그해 대통령선거에는 출마하지 못하였고, 이후 2012년 대통령 선거에 새누리당 후보로 출마하여 문재인 후보를 꺾고 당선되어

이듬해인 2013년 대한민국의 제18대 대통령이 되었다.

대한민국 최초의 여성 대통령이자, 최초로 2대(父-女)에 걸쳐 대통령직에 오른 인물이며, 최초의 미혼 대통령이다.

또한 최초의 이공계 학부 출신 대통령이기도 하다.

기사 다만 아래 학력 관련 내용에도 작성됐듯, 이산화탄소를 이산화가스라고 잘못 말하거나 센서 달린 신발을

 인공지능의 사례로 혼동하는 등의 박근혜의 발언을 보자면, 학창시절 공부한 지식을 거의 망각한 것으로 보인다.













2016년 12월 9일 오후 4시 10분, 국회에서 발의된 탄핵소추안이 개표 결과 참가 인원 299명중 찬성 234표, 반대

56표, 기권 2표, 무효 7표로[10] 가결되어2016년 12월 9일 19시 3분 대통령으로서의 권한행사가 정지되었다.

1998년 정치에 입문하였으나, 2004년도까지만 해도 정치인 박근혜의 당내 입지는 보수당 텃밭의 흔한 지역구 국회의원 혹은
박정희 시대를 그리워하는 보수적인 유권자들의 지지를 유도하기 위한 얼굴마담에 불과했다.

 그런 그녀를 대권주자이자 보수정당의 핵심주자로 키운 사건이 바로 2004년 노무현 대통령 탄핵 사태였는데,

12년 뒤, 아이러니하게도 대통령 박근혜는 본인이 국회에서 탄핵 소추를 당했다.

2016년 12월 16일, 박근혜 대통령이 헌법재판소에 "탄핵 부당" 답변서를 제출했다














생애



아버지가 서울 충현동(신당동)에 집을 마련한 1956년 4월 전까지 아버지의 부임지를 따라 이곳 저곳 이사를 다녔다.

출생지는 경북 대구시 삼덕동 5번지였지만 첫 돌은 전남 광주시 동명동 셋방에서 맞았다.

 1953년 여름엔 서울 동숭동으로 올라왔지만, 1954년 10월엔 다시 광주로 내려가 1955년 7월 박정희가 사단장을

달기 전까지 자랐다.


 여기에, 충북 옥천군 출신인 육영수 여사의 영향을 받아 대구 방언이 아닌 충청도 사투리 억양이 살짝 섞인

서울말을 구사한다.

서울장충초등학교
- 성심여자중학교 - 성심여자고등학교를 거쳐 서강대학교 전자공학과를 졸업했다.

중학교 진학 때 특혜를 받은 것이 알려졌다.

박근혜는 1964년 3월 성심여자중학교에 입학했다.

당시에는 입시를 치러 중학교에 진학했는데, 전 과목 모두 시험을 보았다.


그런데 박근혜가 중학교 입시를 치를 때는 2과목(국어, 수학)만 보았고, 박근혜는 성심여자중학교에 합격했다.

이듬해부터는 다시 전과목 모두 시험보는 것으로 바뀌었고, 중학교 입시는 1969년에야 폐지되었다. #

박근혜가 서강대학에 입학하면서 누군가의 힘으로 종합대학서강대학교가 되었다는 말도 있지만 이는 잘못 알려진 내용이다.

서강대학교 종합대 인가는 1969년 12월에 이미 이뤄졌고, 박근혜는 1970년 1월에 서강대 시험을 응시했다.

 종합대학교 개교는 신학기 시작에 맞춰 1970년 3월에 이뤄진 것을 박근혜 입학 후 종합대학교 인가가 난 것으로

알려진 것이다.

학부 졸업시 학점은 4.0 만점에 3.82로 상당히 높았다.

그러나 최근 들어서는 이산화탄소를 이산화가스라고잘못 말하거나 센서 달린 신발을 인공지능의 사례로 혼동하는 등

과학기술에 무지해 보이는 박근혜의 발언들을 보자면 아무래도 그 때의 지식을 모두 망각한 듯. 게다가 박근혜의

학점은 3학년 1학기까지 대개 A를 받으면서 B, C가 더러 섞여 있었으나, 유신 이후부터 전과목 A를 받는다.


그 밖에 박근혜를 수석 졸업자로 만들기 위해 졸업하던 때에 수석 졸업자 선정 방식이 바뀐 정황도 존재한다.

다만 이는 정확한 근거가 있는 건 아니다.


이후 프랑스어학연수를 떠났으나, 재학 도중 어머니 육영수가 피격으로 사망하자 귀국, 공석이 된 퍼스트 레이디를 대행했다.

퍼스트 레이디가 되기 전부터 대통령의 딸로서 여러 외교 행사에 참가해, '소녀 외교'라는 말을 듣기도 했다.

(
문세광 한테서의) 육영수 여사의 피살 이후, 육영수 여사가 자신에게 빙의되어 딸을 도와주란 말을 들었다고 주장하는 최태민과 인연을 맺었다.

박근령&신동욱 부부의 증언에 따르면, 박근혜는 육영수 여사 피살 전부터 최태민과 알고 지냈다고 한다.

.

10.26 사건으로 청와대에서 나온 뒤[16] 1980년 영남대학교, 한국문화재단 이사장 자리에 올랐고 영남대 이사장에서는 1988년 사임했다.

한국문화재단은 2012년 해산될 때까지 줄곧 이사장 자리를 유지했다.

영남대학교 이사장으로 재임 중이던 1982년,육영재단 이사장을 지냈고 1990년 사임했다.

어머니에 이어 아버지가
부하의 총에 맞아 사망하고 전두환의 5공 시절은 정통성이 부족한 정부에서 흠을 메꾸기 위해 독재자인 박정희를 비난하던 상황이였다. 박근혜는 이 때를 자신의 인생 최대 암흑기였다고 말하기도 했다.

여담으로, 1981년 경에 현재
장로회신학대학교 교육대학원의 석사과정(M. A. in Ch.Ed.)을 한 학기 다녔던 것이 당시 재직하던 교수들로부터 확인되어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발발 이후, 재학생들 가운데 화젯거리가 되기도 했다.









14차 변론 주재하는 이정미 헌재소장 권한대행


파일:실실 쪼개는 박근혜.jpg


© News1 최진모 디자이너




정치 경력


1997년[17] 한나라당 대선 후보 이회창 지지 선언들 통해 한나라당에 입당하고 이듬해 대구 달성군 국회의원

재보궐선거에 나가 국회의원이 되었다.


 2000년, 부총재에 올랐지만, 이회창과의 갈등으로 2002년 제3회 지방선거를 앞두고 탈당을 하여 선진 여성정책의

구현과 양성평등을 기본정책으로 하는 신당, '한국미래연합'을 창당하였다.

하지만 오래 가진 못했고 2명의 광역자치의회의 의원 당선자를 낸 뒤 그 해 대선 직전에 한나라당과 합당하였다.

당시
북한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초청을 받아 방북하여 김정일 위원장과 면담하기도 했는데# 무단 방북이란 논란

(사실이 아니다)에 시달리기도 했다.

 그리고 2005년에 대표 명의로 김정일에게 보냈다는 편지가 공개되면서 통일부 허락의 문제와 북한에서 쓰는 주체라는 연호를 써서 국가보안법 위반까지 문제가 번지고 있다.편지 전문


한나라당 이회창 총재가 노무현에게 패하고 정계 은퇴를 선언하자, 한나라당에는 박희태 체제, 최병렬 체제 등이 들어섰고 하지만, 한나라당차떼기 파동(불법 대선 자금)으로 몰락의 길을 걸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노무현 대통령의 지역 구도 타파와 전국 정당을 표방한 열린우리당한나라당 내 개혁파 인사

 김부겸, 이우재, 김영춘, 이부영, 안영근 등이 가담하면서한나라당 소속 박근혜 의원 또한 정치적 위기에 빠지게

되었고 이를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공격으로 극복하고자 하였다.


 박근혜 대통령의 복심 김기춘청와대 비서실장[21]은 이 당시 탄핵 서류를 제출하였고, 박근혜는 노무현 대통령

탄핵소추안 가결에 참여하였다.



하지만, 노무현 대통령 탄핵은 '우리가 뽑은 대통령인데 너희가 무슨 자격으로 탄핵을 하느냐'는 수많은 국민들의 격노를 불러 일으켰고 새천년민주당에 이어 한나라당까지 엄청난 여론의 역풍에 휘말려 17대 총선열린우리당이 단독

 과반은 따놓은 당상이고, 잘 하면 180석~200석까지 차지할지도 모른다는 상황에 이르게 되었다.

결국 최병렬 대표가 사퇴하고, 박근혜 의원이 당대표에 올라 사태 수습과 선거 지휘에 나섰다.[24] 차떼기로 모금한\ 돈을 되갚기 위해 당사를 매각하고 '천막당사'를 차렸다.

또 당내 소장파들이 탄핵 찬성 철회를 주장했으나, 이를 거부하여 지지층 이탈을 막는 한편, 거대 여당 견제를 부동층에 호소했다.


정동영 열린우리당 의장은 이를 막고자 하였으나[25] 오히려 한나라당의 지지율은 반등했다.

그 결과 열린우리당은 국회 전체 의석 299석 중 152석을 얻어 처음으로 원내 제1당 자리를 차지하는 기쁨을 안았으나,

 180석~200석까지도 기대해볼 만하다는 분위기로 볼 때 솔직히 실망스럽다는 평가를 받았고, 80석이라도 확보하면

 다행이라던 한나라당은 기대 의석을 훨씬 웃도는 121석을 확보하며 기사회생했다.

이후 박근혜 대표는
참여정부의 모든 정책에 반대하며 참여정부를 가열차게 공격하였고, 전국적인 촛불집회를 통해

지지층을 결집시켰다.


이로써 그는 한나라당을 장악하는 데에 성공하고, 가장 유력한 대권 주자로 떠오르게 된다.

그러나 그녀가 노무현 대통령을 비판하면서 했던 그 구구절절 옳은 비판들이 본인에게도 똑같이 적용된다는 건,

참 아이러니한 일이기도 하다.

2007년
참여정부레임덕이 왔다.

노무현의 지지율은 상향세였지만, 야당이나 대권 주자들의 지지도가 그보다 더 높았던 것이다.


한나라당은 박근혜 대표가 잡고 있었으므로 그녀가 다음 대통령이 될 것이 유력할 상황이었으나, 독재자의 딸이라는

거부감, 참여정부와의 대립 과정에서 보인 강경함은 지지율 외연 확장에 방해가 되고 있었고, 당내 지지는 다소

부족했지만, 국민적 인기가 높았던 이명박 당시 서울시장이 강력한 경쟁 상대로 떠올랐다.


 이 당시 분위기는 한나라당의 대선 승리가 거의 확실했기 때문에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로 결정된 사람이 곧 다음

 대통령이나 다름 없었던 그런 분위기였다.

둘은
제17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를 선언했고, 박근혜 대통령과 관계가 안 좋기로 유명한 김무성 전 대표와 유승민

원내대표도 이 당시에는 박근혜 후보 캠프에서 각각 조직 담당, 정책 담당으로 일했다.

그런데 이때 한나라당은 각 후보를 지지하는 정치인을 중심으로 친이계친박계로 갈라져 살벌하기 짝이 없는

폭로전을 이어갔다.


이때 싸우면서 생긴 감정의 앙금이 후술할 18대 총선 당시 일어난 친이계친박계 공천 학살과 19대 총선 때 일어난

 친박계친이계 공천 학살로 이어졌고, 그 원한은 20대 총선새누리당을 흔들었던 친박계비박계 숙청으로까지 이어져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또한 두 사람에 대한 의혹은 상당수가 이때 나온 것으로, 여담으로
이명박 대통령의 그 유명한 여러분 이거 다 거짓말인 거 아시죠가 이 17대 대선 후보 경선에서 나온 말이기도 하다.


하지만 북한 핵실험과 보궐선거 패배로 박근혜에게 불리한 요소가 하나 둘 씩 터졌고 경선 룰 공방을 거쳐 결국

 이명박서울시장이 여론조사에서의 우위를 바탕으로 승리했다.

박근혜 전 대표는 경선 결과에 승복하며 다음 대선으로 기회를 미루게 된다.[26]

결국 이명박 후보는 제17대 대통령 선거에서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17대 대선이 끝나고 얼마 안 있어 18대 총선이 시작되자 이명박 대통령의 계파인 친이계는 박근혜 의원을

따르는 친박계 인사들을 공천에서 대거 탈락시켰다.


이에 공천에서 탈락한 친박계 인사들은 한나라당을 나와 친박연대라는 사상 초유의 가설 정당을 만들어 18대 총선

출마했고, 친박연대에 들어가지 않은 사람들은 '친박 무소속 연대'라는 이름으로 출마했다.

이때 박근혜 의원은
한나라당 공천 심사에서 합격했으나 말 그대로 팔다리가 다 잘린 상태였고, 기자회견을 연 뒤

눈물을 보이며 "저도 속고 국민도 속았습니다"라는 말을 남긴다.

또 탈당한 친박계 사람들에게 '살아서 돌아오라'는 메세지를 남기기도 했다.

지난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열린우리당의 압승이 예상되었던 것처럼 제18대 국회의원 선거한나라당의 압승이 예상됐다.

그러나 18대 총선 결과 한나라당은 국회 전체 의석 300석 중 153석을 얻어 턱걸이 과반에 만족해야 했다.

잘 하면 200석도 차지할 수 있을 지 모른다던 기대에서 한참 못 미치는 성적이었다.


반면 친박연대는 박근혜 의원의 본거지인 대구광역시경상북도에서 돌풍을 일으켜 14석을 얻어 원내 제4당이 되는 기염을 토했고, 친박 무소속 연대도 12~16명의 당선자를 내면서[27] 무려 26명의 친박계 인사들이 살아남았다.

예상 밖의 선거 결과에
한나라당은 내부 진통을 겪긴 했지만 탈당해서 생환한 친박계 사람들을 다시 받아들이기로

결정하였고, 거기에 보수 성향의 무소속 의원들까지 더해진 결과 한나라당은 무려 183석에 달하는 절대 다수의

의석을 가진 초거대 여당으로 급성장하게 된다.


이때 박근혜 의원은 '여당 안의 야당' 역할을 하며 세종특별자치시 문제 같은 중요한 이슈가 생겼을 때 이명박 대통령과 정면으로 반목하는 모습을 보여주며 차기 대권 주자로서의 이미지를 굳혀 나갔다.

반면
이명박 대통령은 임기 만료가 다가오면 다가올수록 그의 인기도 덩달아 바닥을 찍어, 땅 속을 뚫기 시작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오세훈 서울시장이 '보편적 급식(무상급식)' 문제로 셀프 탄핵을 하면서 공석이 된 서울특별시장 자리를 채우기 위해서 2011년 10월에 실시된 서울특별시장 재보궐선거 결과 친이계로 분류되던 나경원 후보가 무소속 박원순 후보에게 패배하고 말았고, 이때를 시작으로 친이계의 힘이 상당한 속도로 빠지기 시작했다.


고승덕 의원이 홍준표 체제가 선출된 전당대회에서 돈 봉투가 돌았다는 이야기를 폭로하고, 선거관리위원회에게

디도스 공격을 가한 범인이 한나라당 당직자라는 의혹이 제기되면서 홍준표 체제는 붕괴됐고 한나라당의 분위기는

급격하게 식었다.

결국 당의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유력 대권 주자였던 박근혜 의원을 위원장으로 하는 비상대책위원회가 꾸려졌다.

박근혜 비대위는 한나라당이라는 이름을 새누리당으로 바꾸고, 외부 인사들을 비대위로 영입하였으며, 당의 색깔을

 공산주의의 상징인 빨간색으로 바꾸는 파격적인 변화를 보여주었다.


당의 전권을 거머쥔 박근혜 위원장은 18대 총선 때 겪었던 수모를 고스란히 친이계 공천 학살로 되갚아줬다.

그런 가운데 치러진 19대 총선민주통합당이 승리할 것이라는 모두의 예상을 깨고 새누리당의 승리로 끝나 박근혜라는 이름의 가치를 최대치까지 올려놓았다.

그리고 그 여세를 몰아 박근혜 의원은
18대 대선에 출마할 것임을 공식 선언하였다. 여러 후보들이 경선에 참여했으나 박근혜라는 이름 앞에 모두 듣보잡 취급을 받았고, 새누리당의 대통령 후보 경선은 박근혜 의원의 싱거운 승리로

끝났다.


그리고 2012년 18대 대선에서 민주통합당 문재인 후보와 가열찬 대결을 펼친 끝에 51.6%의 득표율을 얻어 18대

대통령에 당선, 숙원을 풀게 되었다. 역대 대통령 후보들 중 가장 많은 표를 받은 후보였다.

현행 헌법이 탄생한 제9차 헌법개정 후 제6공화국이 출범하며 역대 대통령들이
김영삼 대통령의 '문민정부'를 시작으로 김대중 대통령의 '국민의 정부', 노무현 대통령의 '참여정부' 등 정부의 가치나 목표를 나타낼 수 있는 슬로건적인

정부명칭을 붙여왔다.

이는 사실 대한민국 역사 속에서
이승만 대통령의 제1공화국, 장면 내각과 윤보선 대통령의 제2공화국, 박정희 대통령의 제3공화국, 박정희 대통령의 유신 정권을 의미하는 제4공화국, 전두환 대통령의 제5공화국, 또 후임 정부들이

명칭을 달리하여서 노태우 대통령 정권을 뜻하게 된 제6공화국처럼 새로운 대통령이 선출되어 새로운 행정부가

출범하면 공화국 호칭이 달라지며 별도의 호칭으로 정권을 구분해온 역사와 관련이 있다

그러나 이는 엄연히 말해,
대한민국 헌법이 개정됨에 따라 공화국의 번호가 달라진 것이기에 새 행정부의 출범과는

 관계가 없다.


이처럼 헌법이 달라져서 공화국을 구분해온 것이기 때문에 동일한 헌법질서 하에 있는 정부들이 대통령이 다르다는

이유로 명칭을 달리할 수 없다는 법률적 논쟁이 발생했다. 이러한 흐름에 따라 이명박 대통령 당시에는 '실용정부'라는 명칭이 고려되다가 무산되었다.


후임인 박근혜 대통령 또한 별도의 명칭을 사용하지 않으며 박근혜 정부로 명칭이 결정되었다. (다만, 한동안

 '민생정부'라는 명칭이 고려되었다.)

사실 일반적인 경우에서 특정 정부를 칭할 때,
문민정부, 국민의 정부, 참여정부, MB정부 등으로 칭하는 것은 명확한

의미가 잘 구분되고 의사소통에 어려움이 없다면 제재될 이유가 없다.


다만 헌법학적 관점에서 모두 현행 헌법 질서 하에 있는 제6공화국 정부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정부 별 명칭이

달리 한다는 것을 꺼린다는 것을 명심하자.












선거 이력

박근혜가 당 대표로 선거캠페인을 지휘할 때, 한나라당은 승리를 계속 거두었다.

위의 2004년 제17대 국회의원 선거를 시작으로, 2006년 제4회 전국동시지방선거, 2012년 제19대 국회의원 선거까지

총 3번의 선거를 당대표 또는 비상대책위원장으로 진두지휘하면서 승리를 이끌었다.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한나라당이 121석을 가져서 열린우리당의 과반의석 확보를 막는 데에는 실패했으나,

원래 탄핵정국에서 열린우리당 180석 vs 한나라당 60석까지 밀릴 것으로 예상되던 것을 크게 반등해서 이 정도로

막아낸 것은 천막당사, 거대 여당의 폭주를 막을 야당의 존재 어필 등 박근혜 대표의 캠페인의 역할이 컸다고 평가된다.

제4회 전국동시지방선거는 워낙 열린우리당과 노무현 정권에 대한 반대여론이 커서 이기기 쉬운 선거였지만, 유일한

광역자치단체 접전지였던 대전광역시에서는 열린우리당이 앞서고 있었다.


그런데 박근혜 대표가 서울에서 유세 도중괴한이 휘두른 커터칼에 얼굴을 피습당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 때 수술

 직후 깨어난 박근혜가 당직자에게 첫마디로 "대전은요?"라고 선거판세를 물은 것이 큰 화제가 되고, 결국 대전시장

판세가 역전되어 한나라당 박성효 후보가 승리하였다.

이 때 한나라당은 호남과 제주를 제외한 광역자치단체 12곳을 모조리 이기는 역대 최고의 승리를 거둔다.



2008년 제1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이명박 대통령과 가까운 친이계가 한나라당 당권을 장악하면서, 친박계 현역 의원이 대거 공천에서 탈락한 이른바 '친박계 공천 학살'이 일어났다.


이에 불복한 친박계 인사들이 대거 탈당하여 이른바 친박 무소속으로 출마하거나 친박연대[30]라는 당을 급조해 출마했고, 박근혜 본인은 탈당은 안 했으나 "저도 속았고 국민도 속았습니다"와 같은 발언으로 은근히 친박세력을

지원했다.

것이 또 한 번 대박을 낸다.


친박연대는 무려 지역구 6석, 비례대표 8석(정당 득표율 13.8%)으로 14석이나 의석을 확보했고, 이와 별도로 친박으로 분류되는 약 16명의 무소속 지역구 의원도 당선되었다.


이들 친박 후보들 덕분에 한나라당은 최대 200석까지도 가능하다는 예상을 뒤엎고 반수를 조금 넘기는 대패를 당했고, 친박 세력은 한나라당 내의 친박 의원 10여 명과 함께 '한나라당 내 야당' 역할을 톡톡히 하게 된다.

제1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박근혜는 한나라당 비상대책위원장으로 추대되었다. 당시 한나라당은 연이은 선거에서의

패배, 정권심판론에 따른 당 지지도 추락의 위기 상황이었다.

이대로는 총선과 대선에서 필패라는 위기감이 고조되면서 대권 주자였던 박근혜에 일시적으로 당권을 쥐어 주고 강력한 쇄신책을 마련해야 한다는 주장이 힘을 얻게 되었다.


그는 당명을 새누리당으로 고치고, 김종인, 이상돈 등 개혁적 인사와 이준석, 손수조, 이자스민, 문대성 등 젊은 인사를 영입하였으며, 경제민주화와 같은 개혁적 공약과 행보를 보였다.

때마침 민주통합당의 당내 공천문제와 통합진보당과의 단일화 갈등까지 겹치면서, 선거 판세는 참패 위기에서 '그래도 제1당은 할 수 있겠다'(과반까진 힘들겠지만) 정도로 회복되었다.

그런데 뚜껑을 열고보니 152석의 단독과반 확보.

이를 기반으로 박근혜의 선거의 여왕 이미지는 확고해졌으며 그후 자연스레 새누리당의 유일한 대선주자로

 발돋움하였으며 아버지 박정희 대통령의 독재에 대해서 사과하며 아버지와 선 긋기에 나서면서 차별화된 모습을

보이며 이미지 쇄신에 성공하여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참고로 대통령이 된 후에도 모든 선거를(재보궐선거 포함)
새누리당을 승리로 이끄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다.

 비록 선거를 직접 지휘하지는 않았지만, 필요에 맞게 자신의 이미지 어필을 잘 조절했다는 평.

그러나
제2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야당이 분열되는 호기를 맞았음에도 새누리당 내부의 공천 파동, 낡아빠진 북풍,

 그간 보여온 무능한 모습 때문에 유권자들의 민심이 돌아서면서 대통령에 당선된 이후 치른 선거에서 새누리당이

유례없는 대참패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는 향후 남은 임기 동안 극심한 레임덕에 시달리게 되는 초석으로 작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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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션 정치, 패션 외교라는 말을 유행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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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최순실 게이트 사건이 터지면서, 옷 색깔도 최순실이 골라줬다는 것이 드러났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터지는 바람에 그 동안 감추어졌던 박근혜의 부정적인 면모가 계속 들춰지고 있다.

영남대학교 문제, 최순실과의 관계, 일부 연예인운동 선수 등과의 관계 등 영 좋지 않은 부분들이 대거 들춰지고

있다.

베트남 국빈방문 중 직접 패션쇼에 출연. 베트남 전통 복장을 입은 모델들 사이로 한복을 입고 출연하여 화제가 되었다.


박근혜 특유의 헤어 스타일은 실핀 10개 이상으로 고정 시켜 만든다고 한다.

 이 머리 모양은 어머니 육영수 여사와비슷한 인상을 준다는 평이 많다. 젊은 시절부터 해왔는데, 최근에는 보기

힘들지만 젊은 시절이나 비교적 최근인 2000년대 초반 단발 머리라던지 잠깐씩 다른 헤어 스타일을 한 적이 있다.


대통령 선거 연설 중 배경에 있는 새누리당 로고 앞에서 묘한 위치선정으로 사진이 찍히자 고양이귀가 연상되어 화제가 된 적이 있었다.


이용하는 관용차 중에는 특수 제작한 2세대 현대 에쿠스 방탄 리무진이 있다.

시판되는 에쿠스 리무진과는 길이 등에서 큰 차이가 난다. 여담으로 취임식에서 국산차를 의전용 차량으로 사용한

최초의 대통령이기도 하다.


운전은 대통령 당선 전까지는 직접 하였던 듯하다.

 강남 면허장에서 2011년 면허증을 갱신하는 동영상이 찍히기도 했다.


박근혜 대통령을 지지하는 친박연대는 2008년 제18대 총선에서 많은 의석을 확보하는 쾌거를 맛봤으나, 박근혜 팬클럽인 박사모가 기자회견장을 점령하면서 갈등을 빚었다.

이 과정에서 난투극이 벌어졌고 한나라당 의원이 출동하는 소란이 일어났다.

 무엇보다 같은 정치인을 지지하는 두 단체에서 일어난 싸움이라 주목을 받았다.


박정희이명박이 생전에 로 불렸고 김대중펭귄으로 불렸던 것처럼 박근혜 또한 으로 생전에 불리고 있다.

노무현이 코알라로 표현된 것은 죽은 뒤이기 때문에 이와는 다른 경우다.

 아버지가 왜소한 체구와 얼굴 생김새로 인해 쥐라고 불렸다면, 박근혜는 아버지 박정희의 창씨개명박근혜 화법

 같은 어둔한 말투와 행동을 조롱하는 의도로서 닭이라 불린다.


박정희는 성씨를 박씨에서 닥카키(타카키)로 바꿨으므로 박을 닥으로 바꾸며 이와 발음이 똑같은 닭[닥]이 우둔한

사람을 놀림조로 이르는 말인 새대가리의 의미로서 채택된 것이다.

 이명박 대통령의 기억용량 2MB 드립과 함께 엮이는 닭대X리 드립은 덤이다.


이 때문에 디시위키에서는 박근혜 문서가 동결처리되자 모두들 닭 문서로 달려가 박근혜 디스 글들을 적어놓았다.

 김성근 문서가 동결되자 대신 초토화된 가네바야시 세이콘 문서와 비슷한 맥락. 박근혜 탄핵소추가 가결되자 디시

위키에서도 박근혜 문서 동결이 풀렸다.


가족으로는 여동생 박근령, 남동생 박지만이 있다.

박근령은 최근 친일 관련 실언으로 논란이 된 적이 있었고, 박지만은 예전에 마약으로 여러번 구속된 흑역사가 있었다. 박근혜는 자신에겐 가족도 형제도 없다 말하며 이들과 선을 그었다. 또한 이복언니로 박재옥이 있다.


젝스키스 멤버이자 가수인 은지원과 친척관계이다.

박정희의 누나 박귀희의 친손자, 즉 5촌 관계로서 은지원 입장에서는 진외당고모, 약칭으로 고모라고 부르는 사이다.

2011년 같이 찍은 사진이 SNS에 올라와 화제가 된 적이 있었으며, 박근혜가 대선 후보였던 시절 선거운동에서 지원

 유세를 했던 적도 있었다.

 대통령의 8촌 이내의 가족 및 친척들은 특별관리대상이 됨으로서 은지원도 그 덕택을 누리게 되었다.


박근혜의 가톨릭 세례명은 '율리아나'이며, 불교 법명은 '해당화'이다. 믿는 종교는 불교지만, 종교 활동을 한 이력이

 다소 독특하다.

가톨릭을 믿은 적도 있고 불교를 믿은 적도 있는데, 둘 다 세례 및 수계만 받았다.


 다만 한나라당 불자회의 회장이 정적인 김무성이던 시절에도 빠지지 않고 한나라당, 새누리당의 불자회는 물론

다른 불교 행사에도 나갈 정도로 불심은 있다.


어떤 기자가 박근혜 대통령이 한 말 중 지금의 정치 상황과 관련이 있는 말에 자신의 촌평을 붙여 놓았다.

국회의원 재직 시절 본회의장에서 잠을 자거나 볼펜을 세우는 행동을 해 반대파의 빈축을 샀다



  • 5개 국어를 할 수 있다고 했지만, 중국어 말하는 것을 들으면 매우 초보적인 수준으로 기본적인 4성조차 흉내내지

     못하고 있다.

    영상 2분 45초부터 젊은 시절에 5개 국어를 익혀서 국제적 감각을 길렀다고 자랑한 적이 있다.


     그런데 중국 칭화대에 방문해 한 중국어 연설을 보면, 기본적인 문장 암기는 고사하고 보좌관이 미리 써준 연설문을

     힐끔힐끔 보고 읽는데다가, 그나마 성조도 전혀 지키질 않아서 여러모로 큰 웃음을 선사했다.


    영어와는 다르게 중국어는 성조가 틀리면 알아듣기 힘들다.

    박근혜의 어학능력 부족 자체가 외교적 결례가 될 수 있다. 그리고 이미 많은 이들이 알다시피 외국어 실력은 둘째치고 우리나라 말도 제대로 못한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과 공동기자회견 중 오바마 대통령 질문에 대답을 하지 못하고 어리버리하다가 엉뚱한 대답으로

     넘어가서 뉴스가 되었다. 당시 상황은 다음과 같다.

    오바마 대통령이 10여분간 기자의 질문에 답을 한 뒤, 박 대통령이 차례가 되자 머뭇거린 것.


    이 상황에서 오바마의 발언은 "Poor President Park dosen't even remember what the other question was" 이게

    농담이었는지 진담이었는지는 각자 알아서 판단하도록 하자. 어찌됐든 북핵위기에 대한 질문에 답변은 '중국이 강한

     조치로 해결해 주기를 기대한다' 이었다.


    미국대통령을 옆에두고 중국의 리더쉽을 기대한다라....

    이것이 의전, 외교를 잘한다고 뽑힌 대한민국 대통령의 클래스.



    2016년 5월 1일에 이란을 방문하게 되었는데 이때 히잡을 착용하겠다고 해서 논란이 일었다.

    박근혜는 상대문화 존중이라는 명목으로 착용하겠다고 했는데, 일각에서는 "대한민국이슬람 국가가 아니며 이란의 속국도 아니다"라는 반응과 "굴욕적이다"라는 반응이 공존하고 있다.


     참고로 히잡이슬람교의 유입이 시작되는 나라나 사우디아라비아 수준의 극렬 이슬람 국가가 아닌 좀 강도가 약한 이슬람 국가에서는 적지않게 반대운동을 벌이고 있는 물건 중 하나다. 영화배우 이자벨 아자니는 아예 히잡 반대 운동을 주동하기까지 한 적이 있었다.


    2016년 4.13 총선 선거운동 당시 박근혜 대통령 존영 논란이 있어 화제가 되었다.

     "새누리당, 탈당한 4인은 대통령 '존영' 반납하라" 실질적인 재산가치도 없는 사진 가지고 반납하네 싫네 하는 것도

     화제가 되었지만, 왕조시대나 독재시대에나 나올법한 특정 인물의 사진에 대한 극존칭인 존영이라는 말을 사용한

     것이 더 화제가 되었다.


    존영이 뭐길래 그밖에 7월 14일 주한미군 사드 배치를 한마디 상의도 없이 경북 성주에 배치하겠다고 발표하자,

    고령 박씨 문중에서 대통령 사진을 떼어 버렸다.

    경북 성주군은 박 대통령 선영(조상의 묘소)이 있는 마을로, 증조부 때까지 그곳에서 살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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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심판 선고를 앞둔 헌재. 이정미 소장 권한대행 모습.


    위의 원문은 다음 위키백과의 출처로 소수의 사진으로 편집했음을 알립니다







    hr-Sinfonieorchester (Frankfurt Radio Symphony Orchestra) «
    Paavo Järvi, Dirigen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