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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과 시사

1) 대한민국의 위기적 성격 2) 정책의 철학과 노선, 3) 변화와 개혁의 보수주의 , 4) 안보의 미래




한반도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THAAD·사드) 배치가 속도를 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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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나라에서 발간하는 신문들





현시국의 위기적 성격






경향신문

장기화된 촛불시위의 의미를 이해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말할 것도 없이 그것은 정부가 의학적·정치적 영향에

 대한 신중한 검토 없이 광우병 위험이 있는 미국산 쇠고기 수입을 결정한 것에 의해 촉발되었다.

그러나 반대 의견에 대한 정부의 반응이 불충분하고, 지연된 까닭이라고 하겠지만, 이제는 시위의 구호와 요구가

 달라졌다.


사태는 쇠고기 문제의 해결로만, 또는 그에 대한 일정한 타협안의 제시로만 풀릴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정치적 열기에 찬 시위 현장은 우리 정치와 사회에 대한 일반화된 불만의 성토장이 되었다.

요즘 쓰이는 비유로 ‘아고라’가 된 것이다. 불만과 문제의식의 표현은 민주주의 정치 과정의 일부이다.


 그러나 어떻게 하여 그로부터 구체적인 결과가 나오는 것일까? 이것이 문제다.

현실적 행동에는, 일반적 정치의식 이상의 실천 항목, 그리고 목표의 명확한 정의가 있어야 한다.


불시위가 표현한 것은 정부 정책의 시정에 대한 요구였다. 이에 대한 답변은 현실 조건하에서 무엇이 가능한가를

생각하면서 주어질 수밖에 없다.

 거기에 대하여 대중이 수용할 수 있는 답변은 ‘가부’ 둘 중 하나의 절대적인 선택, 그것도 무조건적인 ‘가’이기 쉽다.


어떤 경우나 문제는 그것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지금 나오고 있는 가장 구체적이면서 극단적인 요구는 이명박

 대통령의 사임이다.

이 요구는 그 다음의 결과로서 실현될 수 있는 어떤 장기적인 목표를 가진 것일까?


그것은 민주주의 제도의 발전에 도움이 될 것인가?

새로운 정치체제의 수립이 지향이라고 한다면, 그것이 참으로 현실적인 의미를 갖는 것일까?










- ‘역사의 역전’에 갈등 불가피 -

20세기 초에 레닌이 쓴 ‘무엇을 할 것인가?’는 소련 공산 혁명의 이론을 발전시키는 데 기초적인 문서가 된 책이다.

이 책에서 그는 사회 혁명은 대중의 자연 발생적 열기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것을 조직화할 수 있는 혁명적 정당,

다시 말하면, 지도부의 선도(先導)에 의해서라는 점을 강조했다.


그렇게 하여, 공산당의 전위 정당으로서의 역할을 이론적으로 정립한 것이다.

이것은 말 할 것도 없이 사회주의 혁명도 배제한다고 할 수 없는, 민주주의의 이상에 모순된다.

 그리고 이것은 공산주의 체제의 여러 모순을 정당화하고 프롤레타리아 독재까지도 프롤레타리아에 대한 독재로

 변질시키려고 한 이론이라고 비판된다.

여기에서 레닌의 이러한 생각에 언급하는 것은 그것을 논하자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 옳고 그름을 떠나서, 현실적으로 의미가 있는 정치 행동의 요건이 분명하게 알아 볼 수 있는 목표와 방법,

조직과 계획 그리고 이것들의 일관성(물론 전략적 유연성을 가지고 있는)이라는 것은 부인하기 어렵다.


이것이 배타적인 지도부를 요구하는가 어떤가는 조금 더 복잡한 문제이다.

어떤 경우에나 정치를 생각하는 것은 목적하는 바와 그것의 성취를 위한 계획을 생각하는 것이다.

그 것과의 관계에서, “무엇을 할 것인가?”를 묻는 것은 핵심적인 질문일 수밖에 없다.

위에서 말한 것은, 그러한 관점에서, 촛불시위의 끈질긴 지속을 정확히 이해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폭발하고 있는 대중적 정치 열기는 우리 정치 현실을 이해하는 데에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촛불시위의 요구는 그간에 쇠고기 수입 반대로부터 더 일반적인 정치적 요구들로 바뀌었지만, 처음부터 쇠고기 문제

아래에는 넓은 정치적 불만이 깔려 있었다고 하는 것이 옳다.

 거기에는 이명박 정부의 여러 정책(경제 일변도의 그리고 부자들에게 일방적으로 유리한 것으로 보이는)에 대한 깊은 불만이 있다.


 또 근년에 심화된 빈부 격차에서 오는 계급적 불만이 있다.

그리고 갈등의 요인으로 여러 다른 정치 세력과 집단들의 이익이 개입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지금의 난국을 풀어가는 데에는 이러한 불만의 바탕을 총체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지난번 선거와 관련하여 우리가 놓치기 쉬운 것의 하나는 그 엄청난 정치사적 의미이다. 문민정부, 국민의정부,

참여정부 등 군사 정권 붕괴와 민주화 운동 후 성립한 6공화국의 여러 정부는 모두 민주혁명을 계승했다.

이 정부의 기반이 된 것은 큰 역사적 기운이 된 민주화 혁명의 흐름이었다.


이에 대하여 이번의 정부는 처음으로 그 흐름을 벗어난 비교적 무색무취한 선거에 의하여 성립한 정부이다.

이것은 민주화 혁명의 관점에서 볼 때, 그 이전으로 복귀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 복귀가 구체제에의 완전한 복귀라는 말은 아니다. 자유민주주의를 받아들인다는 점에서는 새 정부도 민주화의

여세를 타고 태어난 정부이다.

그러나 그 민주주의는 민주화 세력의 주류가 생각한,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는 민주주의와는 다른 것이라 할 수 있다.


 새 정부는 그 성장 우선 정책에 있어서, 그리고 그 지지기반과 인적 구성에 있어서 복고적 성격을 가졌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이번의 정권 교체는 투표에 의한 정권 교체이면서도 민주화 이후의 역사적 추세를 크게 바꾸어 놓은

것이다.

 이 20년 만의 역사의 역전에, 또는 최초의 비폭력 정권 교체에, 저항과 갈등의 풍파가 없을 수 없다.

군사정권으로부터 민주 정권으로 옮겨갈 때에, 화두의 하나는 보수 세력과 진보 세력의 ‘대타협’이었다.

공식 절차가 어떻게 되었든, 피차에 여러 측면에서 현상을 인정하고 그것에 타협하면서 민주정부가 출발한 것은

사실이다.

지금의 난국을 타개하는 데 다시 한 번 대타협이 필요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 진보·보수 다시 대타협 필요 -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지난 선거가 통상적 민주적 절차에 따른 선거라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정치적 대전환을 나타낸다고 하면, 우선 이 전환이 잠재적으로 혁명적 또는 반혁명적 위기를 구성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에 따른 대처가 있어야 한다.


그렇게 보면, 정부는 그 정책이나 인적 구성 그리고 전체적인 정치 노선을, 조금 더 적극적으로 지난 20년간의

 민주화 정부의 노선과 정책과 민주화 세력들의 이해관계를 참작하고 존중하는 쪽으로 수정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번 정부의 목표가 무엇이 되었든지간에, 이념적으로나 현실로나 기존 질서가 된 민주화 과정의 과거를 흡수

 동화하면서 그 목표를 실천하는 것이 현실 효율적인 일이 될 것이라는 말이다.


민주화 혁명의 계승 세력은(그 세력도 세대나 정치 문화의 측면에서 그 전의 민주화 세력은 아니지만) 지지하는 정치

이념과 현실을 완전히 해체하는 것이 아닌 한, 타협을 모색하는 것이 그 업적으로서의 민주체제를 보존하기 위한

합리적이고 애국적인 결단이 될 것이다.

지금 시점에서 민주적 헌정질서를 대신하는 다른 혁명적 대안은 역사적 후퇴를 의미할 것이 분명하다.

이러한 현실적 대타협을 이루어낼 수 있는 곳이 국회이다.

지금의 정치적 난국을 벗어나가는 데에 있어서 국회의정상화가 하나의 방편인 것은 틀림이 없다.

 야당 책무의 하나는 국회로 돌아가는 것이다.


또 시국의 위기적 성격을 이해한다면, 여당은 이것을 위하여 적절한 양보를 준비해야 한다.

현실적으로 의미를 갖는 정치 행동은 언제나, 장기적인 목표와 현시점에서의 실천 가능성이라는 기준에 비추어,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답변을 찾고, 그것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다.



<김우창 | 고려대 명예교수>












2)정책의 철학과 노선





새누리당 원내대표가 주장한 현재 보수주의 정당의 위기에 대한 해법인 ‘계보 없는 정치’는 문제의 본질을 잘못

본 것이다.

문제는 계보가 아니라 한국 보수정당의 철학과 노선의 부재에서 찾아야 한다.

미국의 서양 사상사가인 크레인 브린턴은 그의 저서 <서양사상의 역사>에서 “이상은 식욕과 마찬가지로 사람들을

행동으로 나아가게 한다. 이점에서 강점을 지니고 있다.


그런 면에서 사람은 사상과 이해관계-또는 욕구, 충동, 물질적 요인-라는 두 요소 모두가 있지 않으면,

생기 있게 움직이는 인간 사회, 그리고 인간의 역사가 성립될 수 없다”고 서문에서 말하고 있다.

브린턴은 이해관계와 사상이 인간을 행동하게 하는 힘이라고 설파했다.


한국의 보수주의 정당은 한국의 유권자들에게 사상-철학과 노선-이라는 동력을 제공하고 있는가 하는 문제를

심각히 되돌아봐야 한다. 현재의 위기는 철학과 가치관, 노선 없이 정파적 이해에 이리저리 휘둘리는 한국의 보

수 정당에 실망했다는 것이 훨씬 정확한 표현일 것이기 때문이다.


지난 총선에서 한국 보수주의 정당은 철학과 노선, 정책은 없이 개인과 정파의 이해관계에 따라 상대방을 쳐내는,

처절하게 대립하는 민낯을 적나라하게 보여줬다.


상대방을 공격해도 최소한의 예의와 노선을 가지고 공격해야 한다.

유승민을 공천에서 탈락시키고자 했다면,유승민의 철학과 노선이 보수주의 정당의 노선과 철학에 맞지 않다고

정면으로 공박하고 나서야 했다.

 그리고 신속히 결정해야 했다.


유승민의 대표연설과 그가 앞장서서 법제화를 하려 했던 사회적경제기본법은 분명히 보수주의 정당의 노선과는 거리가 있는 것이었다.

또 그가 야당과 합작하여 통과시켰던 국회법 개정안은 야당의 행정부에 대한 무제한적 사보타주가 가능하게 하는

 악법(惡法)이었다.


새누리당이 철학과 가치가 있는 정당이라면 이 문제를 정면으로 거론하고 당당하게 나서야 했다.

그러나 새누리당 지도부의 모습은 비겁하기 짝이 없었다.

 누구도 “왜?”라는 이유를 설명하지 않고, 아무도 책임지지 않고, 마지막 시한에 몰려 유승민 스스로 탈당하도록 했다.

새누리당은 유승민에게 스스로 결정할 기회를 준 것이라고 강변했다. 이것은 유권자들을 모욕하는 행위다.


이런 비겁한 모습을 보며 보수주의 정당 지지자들이 새누리당을 외면한 것이다. 아니 부끄러웠던 것이다.

한국의 보수주의 정당과 보수주의 운동은 보수주의 본래의 철학과 노선, 정당성 면에서 다시 시작해야 한다.

그 길만이 끝없는 낭떠러지로 추락한 보수주의 운동과 정당을 다시 세우는 근본적인 해결책이고, 실망한 유권자들에게 꿈과 희망의 근거를 제공하는 길이다.


꿈과 희망은 이상에서 나온다. 이상은 사상의 다른 모습이기도 하다.

이상, 사상이 없는 정당은 결코 유권자들에게 꿈과 희망을 줄 수 없다. 인간은 욕구적 존재이면서 이상을 추구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 한국의 보수주의 정당과 보수주의 운동은 본래의 철학과 정당성 면에서 다시 시작해야 한다.

 사진은 국내 보수주의 운동 본격화의 도화선이 된 노무현 정부시절인 지난 2004년 10월 4일 서울시청 광장에서 반핵반김 국민협의회 등 보수단체가 정부의 국보법 폐지 움직임에 반대하여 국민대회를 개최한 모습.











대한민국의 성공과 발전, 그리고 좌익의 도전


대한민국의 역사는 세계적 유래가 없는 성공의 역사였다.

 제1세계와 제2세계를 제외하고 대한민국의 성취를 아직 추월한 나라는 없다.

중국이 근접하고 있지만 아직 경제적 정치적으로 지켜봐야 한다.


미국의 정치학자 로버트 달은 각 나라가 국민소득 4000달러에서 7000달러 사이에 정치적 고도화와 민주주의 혁명이

 있었다고 분석하고 있다.


대한민국이 산업화와 민주화를 동시에 달성한 것에 비해 중국은 아직 ‘정치적 민주화’라는 과제를 안고 있다.

정치학자 김광동은 “대한민국 보수의 성공은 구한말 및 대한제국 시대에 있었던 문명개화라고 하는 커다란 방향성,

가치, 사고의 흐름의 연장선이며, 이러한 가치와 정신을 이어 받은 것이 이승만의 자유당이고 박정희 민주공화당이다.


그리고 이 보수 40년의 역사가 만들어낸 것이 근대 산업화, 민주공화제, 시장가치, 특히 근대 산업화를 중심으로

하는 번영이었다”라고 말하고 있다.

한국의 보수주의자들은 한민족과 한반도의 문명개화와 실력양성이라는 가치를 지향했고 그 연장선상에

민주공화제와 자주독립이 추구되었다. 대한민국은 지켜나갈 가치가 있는, 성공한 나라다.


그러나 대한민국의 성공 스토리는 곳곳에서 부정당하고 있다. 지난 30여 년간 좌익사상은 곳곳에서 대한민국의 성공

스토리를 부정했다.

대한민국 건국의 정당성이 부정당하고, 민주주의적 발전을 거듭한 것이 아니라 퇴보한 나라이며, 정의가 상실된

나라로 묘사되었다.


보수주의 세력은 좌익과의 철학적·역사적 전쟁에서 패배했다. 그 결과 보수주의 세력은 한편의 경제적 성공에 비춰

정치적 사상적 정당성을 잃어버렸다.

 반공주의는 수구골통으로 공격당하고 있고, 보수주의 세력은 정치적으로는 독재를 정당화하는 것으로 매도당했다.


사상적 철학적 각성의 뒷받침이 없는 경제적 성공은 그 객관적 성과에도 불구하고 정치적 투쟁에서 항상 좌익에게

정당성을 상실하고 있는 것이다.

경제적 성공에 버금하는 사상적 철학적 자각과 각성이 필요한 이유다.



오늘 우리가 다시 보수주의를 주목하는 이유는 좌익의 도전이라는 문제에 여전히 직면해 있기 때문이다.

좌익은 사상적으로 계몽주의, 자유주의의 전제에 전체주의를 가미한 것으로, 그 뿌리는 같은 것이다.

현대 보수주의의 선구자인 에드먼드 버크가 프랑스 혁명을 보고 느꼈던 위험성이 우리 사회에도 여전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설계에 의한 유토피아의 건설의 다른 모습이 공산주의이기 때문이다.


현대 보수주의의 출발점은 전체주의, 이상주의에 대한 명백한 반대에서 시작되었다.

 버크가 느낀 위험성을 우리도 느끼고 있다.

우리는 여전히 공산 봉건주의인 북한과 마주하고 있고, 대한민국 내부에서 반(反)자유민주적, 반(反)대한민국적인

 사고를 하는 전(前)근대적 세력과 마주하고 있다.








 

스스로 철학적 정당성과 가치 증명해내야

 

이승만은 그의 저서 <일본내막기>(Japan Inside Out)에서 군국주의가 전체주의임을 논증하고, 필연적으로 자유통상을 주장하는 미국과 대립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또 동일한 이유에서 공산주의에 반대했다.


전체주의의 위험성을 인식한 것이다.

이승만의 공산주의의 위험성에 대한 자각은 선구자적인 것이다.


1930년대 공산주의가 미국 뿐만 아니라 각 식민지 나라의 지식인들에 열렬히 옹호되었다는 사실에 비춰 보면

 이승만의 반공주의는 이례적이다.

이승만은 공산주의, 전체주의의 위험성을 누구보다 먼저, 가장 정확히 인식한 지식인이었다.

그는 또한 통상이 부(富)의 증대 뿐만 아니라 평화를 가져다준다는 것을 일찍이 간파했다.


  통상을 통해 약소국과 강대국이 서로 필요한 것을 교환하여 평화공존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통상이 평화를 가져온다”는 이승만의 명제는 그 후 대한민국의 역대 정권이 계승하여 오늘날 평화 속의 통상대국인

 한국 경제 발전의 사상적 배경이 되었다.


대한민국의 성공신화는 세계적인 공산화의 위협 속에서 이룩된 것이다. 대한민국을 둘러싼 대륙 어느 곳도, 심지어

반도의 반쪽도 공산주의에 점령당했다. 대한민국의 건국은 반공노선과 분리될 수 없었다.

대한민국은 6·25 전쟁을 겪으며 공산주의의 실체를 직접 경험했다. 덕분에 반공주의는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지난 30여 년간 집요한 좌익의 공세와, 이에 대한 철저한 무시가 오늘날 성공 스토리를 부정당하는 현실과

마주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의 보수주의는 문명개화, 실력양성의 가치로 무장하여 민주공화제를 지향한 구한말 지식인의 철학적 자각과

진취성을 다시 회복해야 한다.


역사는 본인이 스스로 규정하지 않으면 상대편에 의해 규정 당한다는 사실을 증명해 왔다. 

 한국의 보수주의는 스스로를 향한 규정에 게을렀다.

그 결과 상대방이 규정한 꼴통, 수구 등으로 매도당했다.

대한민국의 근대적 진보는 보수주의자들의 공이다.


전 세계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압도적 공이다. 세계사적 성공 사건이다.

그럼에도 현실 인식에서 한국의 보수주의는 매도당하고 있다.

한국의 보수주의는 스스로 철학적 정당성과 가치를 증명해내야 한다.

 







 






3) 변화와 개혁의 보수주의


 

철학으로서의 보수주의는 신(神)의 권위를 인정하고, 전통적 사회질서를 존중하며, 인간 이성의 한계를 인정하는 데서 출발한다. 특히 보수주의 철학에서 중요한 점은 인간 이성의 한계에 대한 철저한 자각이다.


보수주의는 이성의 한계 때문에 인간이 사회를 완벽하게 재구성하거나, 일거에 개조하고자 하는 시도는 절대적으로

실패할 것이라는 점에 주목한다.

유토피아이즘, 공산주의, 전체주의 등이 인간의 이성으로 사회를 개조하고자 하는 시도들이다. 보수주의는 이런

시도들에 대한 반대로 시작되었다.


인간은 완전하지 않다. 따라서 완전하지 않은 인간이 구성하는 사회 또한 불완전하다. 불완전한 인간은 오랜 시간을

통해 어떻게 하면 보다 나은 사회를 구성하고 운영할 것인가에 대해 무수한 대가를 지불하면서 경험해 왔다.

인간은 오랜 시간 동안 경험을 통해 인간 사회를 보다 더 안전하고 평화롭게 만드는 방법을 깨닫게 되었다.


본래 인간은 멈출 줄 모르는 욕망을 지니고 있다. 인간의 욕망이 원하는 대로 놔둘 경우 인간 사회는 약육강식이 판치는 정글이 될 것이다.

인간이 구성하는 사회가 평화와 안전을 유지하기 위한 지혜들이 예의범절, 관습, 전통, 법률 등에 녹아 있다.

오늘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안전한 삶을 영위하는 것은 이러한 것들의 도움에 기인한다.

철학적 보수주의는 현실 안주만을 강조하지 않는다. 현재의 사회가 완벽하지 않다는 것을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다.


불완전한 사회에 그대로 있을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사회는 보다 더 안전하고 평화적인 방향으로 개선되어야 한다.

실현 가능하고, 예측 가능한 방법을 동원하여 개선되어야 한다.

이것이 철학적 보수주의가 지향하는 개혁의 방향이다.

수주의 개혁은 이상주의적 개혁과 근본적으로 다르다.


 전통과 관습, 기존 사회의 구성 원리들을 존중하는 가운데 그 중 시급히 개선을 요하는 것을 구분하고, 실현 가능하고 그 효과가 예측 가능한 방법을 사용한다는 것이다.

무지한 이성을 사용하여 아무도 모르는 방향으로 사회 전체를 내몰 수는 없다.


그 길은 몰락의 길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보수주의는 전체주의적, 이상주의적 개혁을 거부한다.








 

70년 사회주의 실험의 결과는?

 

현대 보수주의 철학의 아버지인 에드먼드 버크는 <프랑스 혁명에 관한 성찰> (Reflections on the Revolution in

France, 1790)에서 프랑스 혁명에 대해 다음과 같이 비판했다.

“저들이 앞으로 나아가 고장 난 굴뚝을 고치고, 허물어진 바람벽을 다시 세우고, 지붕을 든든하게 하려 하지는 않고,

그 대신 집을 온통 헐어 버리고는 저들의 선생인 철학자들이 그들에게 준 청사진대로 아주 새로운 집을 지을 것을

제안했다는 점이었다.


그러나 낡은 집은 이 세상에 현존하는 유일한 집이었으며, 설사 사람들이 이론가의 청사진을 쫓아 새 집을 지을 것에

 합의할 수 있다 해도, 그 집을 짓는 데는 시간이 걸려야 할 것이었다. 

 그러나 사실에 있어서 사람들이 합의를 본 것은 아니었다.

마침내 낡은 집은 아주 잘 헐렸고, 프랑스 국민들은비바람에서 피하여 쉴 곳을 잃게 되었다.”


버크는 새 집은 결국 낡은 재료들을 주워 모아 세워질 수밖에 없었다고 예언했다.

인간은 비바람을 막아주는 휴식처없이는 살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철학자들은 ‘새롭고-낡은 집’을 짓지는 않았다.


‘새롭고-낡은 집’의 의미는 기존의 관습과 전통을 허물었다는 뜻에서 새롭고, 그러나 집은 짓는 방식은 허물어

진 집보다 더 낡은 방식을 사용했다는 뜻이다.

이상주의자들은 파괴만을 선동했을 뿐 어떻게 건설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다.


때문에 ‘새롭고-낡은 집’은 버크가 예언한 대로 무자비한 건축가, 즉 필요하다면 권위주의자들이 쓰는 수단으로 모든

 일을 처리할 수 있었던 사람에 의해 세워질 운명에 있었다.

버크는 새로운 독재자의 출현을 예고했다. 1799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출현함으로써 그의 예언이 실현되었다.


버크에 따르면 프랑스 혁명은 인간이 쉴 집을 모두 헐어버렸기 때문에 쉴 곳을 잃게 되어 다시 과거의 방식으로

지어진 집에 들어가 살게 되었다는 것이다.

현실적 안전과 평화를 약속하는 독재자에게 자신의 삶을 맡긴 것이다.

수만 년간 인간이 가꿔온 사회의 전통들을 한꺼번에 모두 폐기한 결과 프랑스는 퇴보의 방향으로 나갔다는 것이

버크의 분석이다.


우리는 지난 70여 년간 사회주의 실험의 결과에서 버크의 주장의 정당성을 확인했다.

사회주의적 실험은 전 세계 곳곳에서 예외 없이 모두 실패했다.

현실 사회주의는 인간 이성의 한계를 무시하고 오만했으며, 현실적 인간에 대해 무지했다.


계몽된 군주보다 훨씬 전체주의적이고, 독재적인 사회가 현실 사회주의였다.

버크는 반동분자가 아니었다.

그는 새로운 것 실험적인 것의 가능성, 또 필연성을 믿었다. 


 그는 인류가 이제까지 쌓아온 긍정적인 것들을 ‘보존하기 위하여 개혁하려’ 했다.

지금 우리는 버크의 시대만큼이나 심각한 도전에 직면해 있다.

대한민국이 그동안 쌓아올린 위대한 성취는 곳곳에서 부정당하고 있다.

보수주의 정당은 철학과 노선이 없는 정당으로 무시당하고 있다.








대학



 

대한민국 위기의 본질

 

보수주의 운동은 철학과 가치로서 대중을 효과적으로 설득하고 있지 못하다. 현재 대한민국이 처한 위기의 본질은

 한국 보수주의 운동과 보수주의 정당의 사상의 정당성의 위기인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도전에 정면으로 맞서야 한다. 자유민주주의를 파괴하려는 온갖 책동과 선동에 결연히 싸워야 한다.


그리고 현대 보수주의가 나가야 할 방향을 설득력 있게 제시해야 한다. 대한민국은 건국 이래 옳은 방향으로 나아갔다. 대한민국이 채택한 자유시장경제와 자유민주주의는 역사상 최고의 번영을 가져왔다.

 역사가 이를 증명한다.


우리는 우리가 선택한 방향이 옳았다고 자신 있게 말해야 한다. 이상주의자들은 파괴만을 이야기한다.

 그들은 현실 대한민국의 약점을 말할 뿐이다.

 그들이 제시하는 대안은 하나같이 실패한 것들뿐이다.

 사회주의 나라에서 실패했고, 서구 사회민주주의가 실패한 것들이다.


다만 시대가 바뀌어 그 효용가치가 다한 것들이 존재할 뿐이다. 이를 대체하는 작업이 우리에게 필요하다.

보수주의적 방식의 접근만이 그간 대한민국의 성취를 지켜내고, 발전의 방향으로 이끌 것이다.

지금 보수적 유권자들이 싫증내는 것은 한국 보수주의 정당의 철학과 정책, 정당의 운영시스템이다.


우리가 머리를 맞대고 그 개선책을 강구해야 한다.

 보수주의 정당의 미래를 위해 정당의 공천 시스템을 바꿔 젊고 새로운 인재들을 많이 발굴해야 한다.

그리고 대한민국이 현실적으로 당면하고 있는 경제적 위기와 경제적 불평등의 심화, 청년 실업 등에 대해 보수적인

철학과 방법에 의한 해결책을 제시해야 한다.

나아가 통일에 대한 비전과 방법을 가져야 한다.



북한에 대해서는 공세적으로 나아가야 한다.

왜 북한 정권의 붕괴를 공개적으로 말하지 못하는가? 왜 헌법이 규정한 자유민주적 체제에 의한 통일을 주장하지

 못하는가.


과격한 이상주의자들과 좌익분자들에게 대한민국의 미래를 맡길 수는 없다. 그들은 그들이 가고자 하는 방향을

 스스로도 알지 못한다.

 그럼에도 그들은 목소리 높여 외친다.


 대한민국이 무책임한 자들의 선동에 휘말려 쇠락으로 빠지게 방관할 수는 없다. 한국 보수주의 운동이 좌절할 수

없는 이유다.







대한민국 미국  



 4) 안보의 미래




사실 그 어떤 위대한 목적도 수단을 정당화시킬 수는 없다.

어떤 사람에게는 수단이라 여겨지는 것들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목적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양심과 도덕과 책임의 문제에서 생각해 본다면 수단과 과정이라는 것은 없으며 모두가 목적이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개처럼 벌어 정승처럼 쓴다는 말은 애시당초 언어도단이다.

개처럼 번 돈은 이미 개의 돈이지 정승의 돈이 아니기 때문이다.

 개처럼 얻은 부와 권력으로 우아한 세계의 정승처럼 살아간다면, 그 자체로 죄악이고 위선일 뿐임을 영화 우아한

세계는 잘 보여준다.


그러므로 잘못된 수단으로 이룬 우아한 세계는 사실은 추악한 세계일 뿐이다.

외고 문제 유출 사건으로 합격 취소 처분을 받은 어느 학생은, 방송 인터뷰에서 '저희는 정말 열심히 공부했어요.

그저 합격만을 위해 최선을 다 한 것 뿐이예요.


어른들의 그런 행동이 정말이지 치사하고 더러워요.'라고 말했다

. 그렇다 참으로 더럽고 치사한 어른들의 욕심이다.

하지만 그것이 더럽고 치사한 일인 줄 알고 있으니,


그런 부정한 수단으로 얻은 성과를 스스로 받아들이지 않고 거부하는 것이 바른 자세이다.

자신들은 몰랐으니 불합격 처분은 부당하다고 말하는 것이야 말로 올바른 자세가 아닌 것이다.


우리 사회는 연좌제를 헌법으로 금하고 있다. 과거 수 천 년 동안 연좌제라는 올가미는 우리 사회의 합리적 발전을

가로막는 적이었다.

 천민 신분의 어머니를 둔 허균과 홍길동은 자신의 능력과는 관계 없이 출세할 수도 호부호형(呼父呼兄)할 수도 없었다.


대역죄인의 집안은 삼족을 멸하였으며, 그 후손들의 출세길도 모두 막혔다. 월북한 아버지를 둔 작가 이문열은

평생의 삶을 자기검열 속에 가두어 두어야 했다.

하지만 이제 연좌제는 사회가 허용하지 않는 악습이 되었다.


범죄자나 범법자 가족을 두었다고 해서 다른 가족들이 같이 처벌받거나 불이익을 당하는 일은 더 이상 없다는 말이다. 하지만 우리 사회가 금해야 할 것은 법적인 연좌제일 뿐이라고 나는 믿는다.

그런데 지금 대한민국의 불행은 사람들이 '마음의 연좌' 혹은 '반성의 연좌'까지 모두 연좌제 금지의 대상이라

착각하고 있는 데서 시작된다.


게다가 더 나아가서 '과실의 연좌'를 통해 죄로 얻어진 결실에 대해 죄의식 없이 누리고 차지하려 하는 추악함이

발생하고 있다.

대다수 복일매국노들의 후손들은 왜 비난을 당해야 하는가? 그들의 부모나 조상이 복일매국노이기 때문이 아니다.


자기 가족이 저지른 복일매국 행위에 대해 마음으로의 '죄값의 연좌'를 그들이 느끼지 않기 때문이다.

반성이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않으며 오히려 그 더러운 재물로 호의호식하고 살아가기 때문이다.

나는 지금 우리 사회가 혼란과 도덕성 망각, 책임감 상실로 고통받고 있는 것은 이러한 '책임의 연좌'가 상실되었기

때문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지난 몇 년 간 전 국민의 절반이 부동산 투기의 행렬에 동참하였었다. 대통령과 정부에서 투기는 범죄이고 조금만

참으면 집값이 안정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지만 절반 이상의 국민들은 준법과 양심을 거부하고 투기꾼이 되었다.

그러다가 결국 큰 손들의 돈지랄을 당해낼 수 없다는 것을 알아채고는, 그 때부터 그 투기 동참자들은 갑자기 피해자가 되고 선량한 시민이 되어 정부를 향해 억울함을 호소하며 손가락질을 하기 시작했다.


카드 대란 사건도 마찬가지이다.

너도 나도 카드로 신용 대출을 받고 대책 없이 소비하다가 문제가 터지자, 그제야 카드 발급을 장려한 정부가

신용불량자 양산의 주범이라며 적반하장의 태도를 보인 것이 일반 국민들이었다.


공약 없는 정치, 흠집내기와 막무가내를 일삼는 정치인들을 비난하지만 결국 그러한 정치와 정치인을 만들어 낸

괴물은 바로 우리들 자신이 아니었던가 말이다.

 잃어버린 10년을 말하고 싶고, 양심과 정의가 무너져 버린 대한민국의 위기를 말하고 싶은가?


그렇다면 먼저 우리 자신의 책임부터 따져보아야 옳지 않은가? 질서와 룰이 사라진 부패 공화국 대한민국, 꿈과

희망이 사라진 대한민국, 건전한 정책의 토론이 사라진 대한민국의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한국인은 과연

 얼마나 될 것인가?

 

  당신은 국가과 민족에 대한 근심으로 밤을 지새워 본 적이 있는가? 당신은 건강하고 정직한 대한민국을 위해 자기

자신을 희생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슬픈 일이지만 그런 국민이 많지 않다는 것이 진실일 것이고 그래서 대한민국은 지금 슬픈 위기에 처한 것이다.


투표율과 득표율을 감안해 보았을 때, 노무현 대통령이 2002년 대선에서 얻은 지지는 30% 전후라고 보면 맞을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지지율은 꾸준히 유지되어 왔다. 그런데 지난 5년 간 나는 많은 사람들의 거짓말과 위선을 목도하였다. 정작 노무현 대통령을 지지하지도 않은 자들이, 혹은 투표조차 하지 않은 자들이 자신이 노무현을 선출한 것을 후회한다는 거짓말과 유언비어를 터뜨리는 행위를 나는 참으로 많이 보아왔다.


진정성을 갖고 노무현에게 표를 던진 대부분의 유권자들은 지난 5년 간 비판적 지지자로서 노무현 대통령의 성공을

 바랐고 책임감을 견지해 왔다.

부동산 투기와 주식(펀드) 광풍, 바다이야기 같은 사행 도박에 가장 열심히 참여하고 한탕을 노리던 자들,


또는 실제로 한탕을 건진 자들이 경제와 도덕의 위기를 떠들고 서민의 몰락을 말하는 것을 바라보며 나는 도대체

 대한민국 사회의 뻔뻔함과 위선이 어디까지인지 궁금할 때가 한 두 번이 아니다.

대한민국 사회 구석구석 아무리 샅샅이 뒤져보아 '우아한' 구석은 별로 없고, 썩지 않은 구석이 없더란 말이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 또 무엇이 맞고 틀린지를 아는 것은 숙지(熟知)와 무지(無知)의 문제이다.

그러나 그러한 앎이 현실의 세계에서 행동으로 드러나는가 하는 문제는 책임(責任)과 무책임(無責任)의 영역에 속한다. 숙지가 책임으로 이어지고 무지가 무책임으로 이어진다는 도식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나는 살아오면서 배웠다.


정의와 양심에 대해 책임을 가진 무지인은 자신의 무지를 인정하고  정의와 양심을 갖춘 숙지인에게 무엇이 맞는

것인지 묻고 실천한다.

지금 우리 사회의 싸움은 좌파와 우파의 싸움이 아니며, 진보와 보수의 싸움도 아니다.

지금 우리 사회의 진정한 대립각은 책임감(양심) 있는 자들과 책임감(양심) 없는 자들의 싸움이다.


지금 우리 사회는 숙지하고 있는 무책임한 사람들이 지배층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그리고 그들은 무지하고 무책임한 사람들을 부추겨 거짓 선동을 일삼으며 권력과 부를 유지하고 있다. 각 개개인의

사정을 떠나, 55세 이상의 중, 장년 층 상당수가 정치적 비난을 받아 마땅한 이유는 그들 대부분이 보수우파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 대부분이 무지와 무책임으로 무장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미래는 그들의 것이 아니며 더 젊은 세대들의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고집스런 무지와 비뚤어진 무책임으로 인해 그들의 자식들은 엄청난 고통을 당하고 있으며 또 불안한

 미래로 두려움에 떨어야 한다.

 

  그들의 무지와 무책임으로 인해 숙지하고 있으면서도 무책임한 자들의 기만과 사기와 착취와 부패는 유지되고 있으며 단죄되지 못하고 있다. 나는 이제 좌파나 진보라는 말이 적어도 대한민국에서는 진정성을 상실했음을 알고 있다.

노동자(프롤레타리아)가 주인 되는 세상은 인류 역사에서 단 한 번도 없었고 앞으로도 영원히 없을 것이다.


그런데도 민주노동당은 여전히 낡은 구호와 헛된 망상을 부추기고 있다.

지난 몇 년 간의 민주노동당의 무책임한 선동은 귀족노동자나 조폭노조 같은 또 다른 계층을 탄생시켰을 뿐이며

양극화 해소나 서민 생활 개선, 비정규직 문제에 있어 원론적인 대안 제시 조차 못하였다.


요컨데, 대한민국 사회에서 좌파나 진보는 희생이나 양보, 책임과 양심을 대변하는 말이 아니라 '무능력하고 게을러도 잘 살수 있는 권리'를 외치는 단어로 변질되었다는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진보나 좌파를 자부하는 세력들 역시 보수나 우파를 자부하는 사람들 못지 않게, 이 사회의 혼탁과

부패에 대해 '죄악의 연좌'를 통감해야 하는 것이다.

 이제부터 시작될 우리 사회의 싸움은 아마도 책임과 무책임, 즉 양심과 비양심의 싸움이 될 것이다.

 

  물론 숙지하고 책임을 갖춘 사람이라면 진보나 좌파가 될 가능성이 더 높다는 것을 인정하지만, 적어도 책임감이 있는 사람이라면 보수나 우파가 되어도 사회에는 해악이 되지 않을 것이다.

유력한 대선 후보가 도덕성 시비에 휘말려 대선 정국이 어지럽다.


그런데 정작 후보 자신은 그 사건과 논란에서 한 발 비켜나 민생 장정이라는 우아한 세계에만 머무르고 있다.

그러나 후보 자신이 정말로 우아한 세계에 머무르고 싶다면, 추잡한 세계로 돌아와서 자기 자신은 그곳에 발을 담은

적이 없다는 것을 명명백백하게 밝힐 수 있어야 한다.


강인구가 아무리 좋은 집에 살고, 자식들을 훌륭하게 키워내더라도 그가 폭력조직에 몸 담고 타인의 핏값으로 부를

얻었다는 진실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과거와 도덕성에 대해서는 침묵과 변명으로 일관하며 오직 우아한 세계만을 말하는 후보는 대통령이 될

자격이 없는 것이며, 그렇게 도덕성을 상실하고 법을 지키지 않은 자가 대통령이 되어 이룬 성장과 발전은 결코

우아한 세계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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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척간두(百尺竿頭)’이라는 말은 “백 자나 되는 높은 장대 위에 올라섰다”는 뜻으로 매우 위태롭고 어려운 상황을

표현하는 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에 나오는 사자성어다.

어떤 다른 말보다 작금의 대한민국의 처지를 잘 대변하는경구가 아닐까한다.

백 척이라하면 한 자(30.3cm)의 백 배이니 약 30미터로 통상 건물 10층 높이이다.

여기서 떨어지면 거의 치명상을 입거나 죽음일 것이다.

이런 상황을 가리켜서 하는 단어라면 우리의 위기를 표현하는 말로 적합하다고 사료된다.

 

지난 연말부터 최순실게이트로 불거진 국가권력 핵심부의 무능과 부태, 비리로 헌정질서가 위청거리고 있으며,

매주말이면 광화문 광장과 서울광장을 메우는 수십만의 시위가 10여 차례나 지속되는 그야말로 나라의 처지가

‘백척간두’라는 말외에 다른 적확한 단어가 있을까?


 시위현장에서 촛불진영과 태극기진영이 극단적인 충돌이 자제되어 비폭력평화집회로 이어져가고 있는 것은 

 세계인의 경이(驚異)를 넘어선 천우신조(天佑神助)라고 할 것이다.

 

더욱이 대통령탄핵정국이라는 국가원수의 직무정지상황이 장기화되고 있다.

설상가상으로 주요 정치권에서는 사드배치문제의 본질도 잘 모르고 반대를 공론화하고, 심지어 표(票)플리즘을

의식한 장병군복무기간의 단축을 거론하여 병영의 군심(軍心)을 현혹하는 등 기막힌 현상이 연출되고 있다.


그리고 학업에 전념해야할 청소년들을 참정권 연령하향조정이라는 명목하에 진영의 세력으로 이용하려한다.

 심지어 북한도 17세투표권이라는 등 최악의 인권유린병영국가를 마치 정치선진국인양 본받자는 무책임한

교언영색(巧言令色)이 난무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러한 내우(內憂)속에 안보의 외환(外患)은 쓰나미처럼 밀려오고 있다는 것이 적나라한 표현일 것이다.

우선 북한은 2003년 시작된 북핵 6자회담을 기만전술로 이용하고 2006년 제1차 핵실험이래로 2016년 제5차 핵실험에 이르면서 북한의 핵기술고도화가 완성단계에 이르고 있는 현실이다.


더욱이 최근에는 미사일(ICBM)발사 징후까지 노골적으로 도발하는 북한을 바라만 볼 수 밖에 없는 진퇴양난의

심각한 안보위기를 맞고있는 것이다.

어디 그뿐인가?

북한의 사이버테러 능력은 언제 어디로 공격이 될지를 모르는 우려가 항상 있다.

 

중국은 사드문제를 빙자하여 경제제재와 문화관광교류행사를 통제하고 한국에 대한 노골적으로 사드보복을 하고

 있으며, 일본은 위안부 동상설치에 대한 시비로 주한일본대사를 소환하여 외교를 단절시키고 독도영유권주장이라는

 망언을 던지는 등 외교적 도발을 하는 실정이다.

 

지난 20일 미국은 트럼프대통령의 취임을 맞아서 주한미군 방위비 분담문제와 자유무역협정(FTA)에 관한 재협상을

 거론하는 등 자국의 이익우선주의를 앞세운 ‘트럼프 독트린’이라고도 할 수 있는 아메리카 퍼스트(America First)정책이 등장했다는 것은 향후 한미동맹의 미래안보도 결코 평탄하지만은 않을 것이라는 것을 노정한 것이다.

한미동맹의 군사외교채널을 총동원해서라도 안보적 이익을 지켜야한다.

 

2017년도 국방부 업무보고에서 ‘기본이 튼튼한 국방, 미래를 준비하는 국방’이라는 슬로건을 걸었다.

군은 국가안보의 최후의 보루라는 소명의식을 가지고 본연의 임무에 충실하는 것은 물론이고, 전시작전통제권에

의지한 한미연합국방이 아니라 자주국방을 하루라도 앞당기겠다는 투철한 사명감으로 안보를 챙겨야한다.

 

특히 내우외환의 어려운 시기에 북한이 도발한다면 즉각적이고 강력한 응징으로 다시는 도발할 수 없도록 우리군의

의지를 보여주기를 기대한다. 결국 안보의 미래는 남이 해주는 것이 아니라 나의 결정에 달린 것이다.

            




참고로 이 글은 다음 웹 위키백과, 카페. 그리고  사이트의 글을 취합해 올려본 것입니다

현시국의 암울하고 절박한  정권에서 다시한번 희망을 다짐하면서 ..... (도토리)









Schubert-Die Winterreise D 911 (전곡)
Dietrich Fischer-Dieskau: baritone-Gerald Moore: pian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