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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과 시사

朴정부 4년. 1970년대로 되돌린 민주주의 시계




© News1 장수영 기자


© News1 장수영 기자


(서울=뉴스1) 유기림 기자 = 임기 4년 내내 박근혜 전 대통령을 따라다녔던 꼬리표는 '불통'이었다.

이는 결국 '원칙과 신뢰'의 정치인이 헌정 사상 첫 탄핵 대통령이 된 계기가 됐다.

특유의 폐쇄적 소통 방식이 발단된 최순실씨 국정 농단 사태는 박 전 대통령이 내세운 신뢰에 치명타를 줬다


. 각종 정책과 관련해 원칙으로 포장했던 강경 드라이브는 민심이 떠나는 이유가 됐다.

박 전 대통령은 1979년 아버지인 박정희 전 대통령 사후 18년간의 은둔 생활 영향으로 소수 측근들에만 의지했다.

일각에선 양친인 박정희 전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의 암살과 이후 고립된 상황 탓에 누군가를 신뢰하는 일이

박 전 대통령에게 힘든 일이 됐을 것이란 분석도 나온다.


문제는 이러한 개인적 성향이 통치 방식까지 이어져 국가적 불행이 됐다는 점이다.

청와대는 이른바 '문고리 3인방'(이재만·정호성·안봉근 전 청와대 비서관) 아래 굳게 닫혔고, 급기야 지난해 9월엔

수십년간 음지에 있었던 '비선 실세' 최씨 존재가 드러났다.


인사가 만사라고 하지만 박근혜 정부 인사는 '코드·회전문·비선 인사'라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2013년 취임 초 당시 허태열 대통령비서실장은 잇따른 고위직 인사 참사에 대국민 사과까지 했다. 그럼에도 인사 잡음은 멈추지 않았다.

가까운 예로, 박 전 대통령은 국회로부터 탄핵되기 한 달여 전인 지난해 11월 정국 수습 차원에서 김병준 국무총리·

임종룡 경제부총리·박승주 국민안전처 장관 후보를 발표했지만 일방적 인사 추진에 또다시 지적받았다.

결국 박승주 후보는 자진 사퇴했고 내정 자체가 없던 일이 됐다.


"그게 필요하다고 생각하세요?"(2015년 신년 기자회견)라고 할 정도로 대면 보고를 선호하지 않은 박 전 대통령은 끝내 검찰 조사와 특별검사팀의 대면조사, 헌법재판소 출석마저 피했다.

헌재가 탄핵 선고를 하게 된 결정적 이유 중 하나였다.

불통이 박 전 대통령의 발목을 잡은 것이다.


탄핵안 가결 전에도 박 전 대통령은 세 번의 대국민 담화로 의혹을 일방적으로 부인하기만 했다.

지난 11월29일 3차 담화에선 일부 기자의 돌발 질문에 "이번 사건에 대한 경위는 가까운 시일 안에 소상히 말씀을

드리겠다"고만 하고 춘추관 브리핑룸에서 본관으로 발길을 돌리기도 했다.


직무 정지 중이었던 지난 1월1일엔 청와대 상춘재에서 기자들과 만나 질문들에 답하는 시간을 가졌지만, 파면될 때까지 그리고 그 이후에도 기자회견은 이뤄지지 않았다.

단지 지난 1월25일 보수 성향 인터넷 방송인 '정규재TV'와 인터뷰를 가진 게 전부였다.


이 자리에선 탄핵에 반대하는 '태극기 집회' 참가자들을 향해 "촛불 시위의 2배도 넘는 정도로 열성을 갖고 많은 분들이 참여하신다고 듣고 있다"고 지지층만을 겨냥한 말을 남겼다. 이것이 박 전 대통령 취임 이후 첫 국내 언론과의 단독

 인터뷰라는 점은 바라보는 이들을 씁쓸하게 했다.


2014년 세월호 참사 당시 박 전 대통령의 비어 있는 7시간 행적이 논란에 휩싸인 것도 불통이 자초한 꼴이다.

대형 재난 상황을 제어하지 못한 책임도 컸지만 박 전 대통령이 당시 보고와 지시 상황 등을 투명하게 공개하지

않았기에 국민적 의심을 샀기 때문이다.


박 전 대통령은 지난 1월10일 헌법재판소에 문제의 7시간 행적을 담은 답변서를 제출했지만 허술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제 공을 넘겨받은 검찰이 3년 동안 이어온 의문을 해소할지 시선이 쏠린다.


보수 정권인 박근혜 정부의 정책 추진 과정도 불통의 연속이었다.

2012년 대선 당시 51.6%라는 득표율을 얻어 취임한 박 전 대통령은 주요 정책을 추진할 때 반대 진영을 설득하기보다 고집스럽게 제 갈 길을 갔다.

국정 농단 사태 속에서 불거진 소위 문화계 '블랙·화이트 리스트' 혐의는 자신을 지지한 절반의 국민만 바라본 극단적 결과인 셈이다.


세월호 참사 진상 규명, 동남권 신공항, 사드 배치, 한일 위안부 합의, 역사교과서 국정화, 누리과정 예산 편성 문제,

개성공단 폐쇄 등도 대표적 사례다. 박 전 대통령이 지난해 1월 경제 활성화 및 노동개혁 법안 통과를 위해 주로

권력이 없는 국민들이 참여하는 서명운동에 직접 나선 장면은 그로테스크한 느낌을 주기까지 했다.

박 전 대통령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한 국회법 개정안에 거부권을 두 번 행사한 일도 마찬가지다.


특히 박 전 대통령은 2015년 당시 모법을 위반한 정부 시행령에 국회가 수정 변경 요청권을 행사할 수 있게 한 국회법 개정안을 거부하면서 '배신의 정치 심판' 발언을 했다.

특정 정치인을 찍어내기 한다는 비판이 일었으며 야당은 물론 여당과도 소통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당시 유승민 새누리당 원내대표를 겨냥해 한 이 말은 이듬해 총선을 앞두고 새누리당 공천 사태까지 이어졌고, 박 전

대통령은 민주주의 원칙을 훼손했다는 비판을 피하지 못했다.






박근혜 대통령. (청와대 제공) © News1 이광호 기자






빛 바랜 '시대적 과제'



박근혜 전 대통령이 헌정사상 최초의 탄핵 대통령이라는 불명예와 함께 퇴장함으로써 그가 추진했던 경제정책들도

 '미완'에 그쳤다. 

2012년 대선에서 시대적 '화두'로 등장한 경제민주화는 박근혜 후보 역시 핵심 공약으로 제시했다.

 정부 출범 후에도 박근혜정부 경제정책의 3대 핵심과제중 하나로 당당히 '경제민주화'가 포함됐다.

그러나 보수 후보가 내세운 공약치고는 의외라는 평가 속에 임기 4년 동안 가시적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는 게 대채적

시각이다. 특히 대기업에 특혜를 준 '국정농단'이 탄핵의 주된 사유가 되면서 '박근혜표' 경제민주화도 빛이 바래게

됐다.
 
박근혜 정부의 경제민주화 추진 의지는 김종인 전 더불어민주당 비상대책위원회 대표를 통해 대중에게 처음 각인됐다. 박 전 대통령의 경제민주화 교사로 불린 김 전 대표였지만 정부 출범 이후 권력 핵심에서 배제됐다. 
박근혜 정부 출범 첫해인 2013년에는 8개의 입법과제가 국회를 통과하면서 성과를 내는 듯 했으나 그 이후로 추진

동력이 현저히 떨어졌다.

지난해 불거진 최순실 국정농단 사건은 박 전 대통령의 경제민주화에 대한 의식이 어떤 수준인지를 알게 해주는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특히 최순실 게이트의 핵심인 미르·K스포츠재단에 출연금과 일감을 몰아주기 위해 대기업 총수를 직접 만나는 등

유착한 사실이 밝혀져 박 전 대통령의 경제민주화 공약이 '허언'임을 보여줬다.

박 전 대통령 본인은 "일절 사익을 추구한 적이 없다"고 주장했지만 헌법재판소는 "박근혜 대통령이 최순실의 이익을

 위해 대통령의 지위와 권한을 남용해 헌법, 국가공무원법, 공직자 윤리법 등을 위배했다"고 판단했다.

김진영 건국대 경제학 교수는 "현 정부의 경제민주화 정책 자체에는 큰 문제가 없어 보인다"며 "결국 중요한 것은

대통령과 정부가 얼마나 진정성을 가지고 실천의지를 보이느냐 인데 그런 부분이 크게 부족했다"고 평가했다.

정부가 경제민주화 실패를 인정하는 것은 아니다. 공정거래위원회는 대기업집단 지배주주의 사익편취행위 근절,

 신규 순환출자 금지, 하도급 법 개정 등 포함 전체 20개 입법과제 중 13개를 이행해 65%를 달성했다고 자평한다. 

그러나 금융소비자보호법 제정, 소비자권익증진기금 설치, 다중대표소송제 도입을 비롯한 상법개정 등 무게감이 상당한 정책들은 아직 남아 있다. 

이준구 서울대 경제학과 명예교수는 13일 열린 서울대 행정대학원 '정책&지식 포럼'에서 "본질적으로 보수 성향을 가진 정부가 경제민주화나 복지정책 같은 진보적인 프로그램을 내걸었기 때문에 뚜렷한 방향성을 제시하지 못했다"며

정부 성향상의 태생적 한계가 있었다고 분석했다.

유일호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박근혜 정부는 순환출자 해소 등 출범 당시 약속했던 여러 법안을 통과시켰다"며 "박근혜 정부가 경제민주화를 백지화했다는데 동의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김 교수는 "경제민주화는 시대적인 과제였던 만큼 지난 대선 당시 모든 후보가 구분이 되지 않을 정도로 비슷한 공약을 냈었고 지금도 여전히 중요한 과제"라며 "차기정부 또한 같은 우를 범하지 않으려면 공약용 정책을 제시하는데 그쳐서는 안 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박근혜 4년 ‘만신창이 대한민국’



“저에 대한 찬반을 떠나 국민 여러분의 다양한 의견을 수렴해 나가겠습니다.

과거 반세기 동안 극한 분열과 갈등을 빚어왔던 역사의 고리를 화해와 대탕평책으로 끊도록 노력하겠습니다.

” (2012년 12월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 당선인사)

박근혜 전 대통령의 집권 4년은 당선인사 속 다짐과 정반대로 질주해 온 시간이었다. 국내에선 집권 기간 내내

‘우리’와 ‘그들’을 나누는 갈라치기 정치에 나섰고, 강경하고 일방적인 외교로 한반도를 격랑에 몰아넣었다. 국

민의 대의기관인 국회를 행정부의 거수기로 전락시켜 정치의 ‘정쟁화’를 야기했고, 무엇보다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키는 기본적 책무도 수행하지 못했다.




한겨레


지난 2013년 2월 25일 오후 18대 대통령 취임식을 마친 뒤 청와대에 도착한

박근혜 대통령(가운데)이 허태열 비서실장(뒷줄 오른쪽), 김장수 국가안보실장과

함께 청와대 본관 집무실로 가기 위해 계단을 오르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박근혜 대통령이 24일 청와대 영빈관에서 열린 2016년 장·차관 워크숍에서 모두발언을 하고 있다. (청와대)2016.09.24/뉴스1 © News1 이광호 기자


한겨레






국민 생명 못지킨 무능 정부

2014년 4월16일 오전 대한민국을 충격과 비탄에 잠기게 한 세월호 참사가 발생했지만, 박 전 대통령은 오후 5시15분에야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에 처음 모습을 드러냈다.

“학생들은 구명조끼를 다 입었다고 하던데, 발견하기가 그렇게 힘듭니까?

” 당시 사고 상황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던 박 전 대통령은 해경 해체 뒤 국민안전처를 신설한다는 대책만 내놓았을 뿐, 책임자 처벌과 진상규명에는 소극적인

태도로 일관했다.


 세월호 유족을 위로하기는커녕 면담 요구조차 거부했고, ”외부 세력이 (유족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일이 없어야

한다”며 세월호특별법 제정 및 운영을 사실상 ‘방해’했다는 것이 김영한 전 민정수석의 비망록에서도 드러났다.






한일 ’위안부 합의’ 1주년이자 2016년 마지막 수요일인 28일 낮 서울 종로구 중학동

주한일본대사관 앞에서 제1263차 수요시위가 열렸다.

올해 별세한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을 추모제를 겸해 열린 수요시위를 마친

참가자들이 한일합의 무효를 촉구하며 외교부까지 행진하고 있다.


이정아 기자 leej@hani.co.kr









세월호 참사 1년 뒤 발생한 중동호흡기증후군(메르스) 파동은 박근혜 정부의 무능과 무책임함을 재확인시킨

사건이었다.

2015년 5월20일 첫 감염자가 발생한 이후, 메르스가 병원 응급실 감염자를 통해 사방으로 번져나가는 동안

박 전 대통령은 보이지 않았다. 박 전 대통령은 첫 확진환자가 나온 지 엿새 만에 국무회의 자리에서 처음 대면보고를 받았고, 6월3일에서야 대통령 주재 ‘메르스 대응 민관 합동 긴급 점검회의’를 열었다.


메르스는 공식적으로 종식이 선언된 같은해 12월23일까지 ‘186명 감염, 38명 사망’이라는 비극을 남겼다.

박 전 대통령은 당시에도 이후에도 메르스 사태에 대해 사과하지 않았다.




 



사드 강행, 외교 헛발질…불안해진 한반도

올초 부산 ‘평화의 소녀상’ 추가설치로 불거진 일본과의 갈등 악화, 중국의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 체계 배치 철회 요구 등으로 한국 외교는 ‘사면초가’의 위기에 빠져있다.

중국의 경제보복이 거세지는 상황에서도 정부는 뾰족한 대책도 내놓지 못하고 있다.


갈등의 자초한 이는 박근혜 전 대통령이다. 박근혜 정부는 지난해 7월 중국·러시아의 반대를 무릅쓰고 사드 배치를

 공식화했다. 러시아와 중국은 그동안 미국의 미사일방어 체계의 일환인 사드가 한국에 배치될 경우, 동북아 지역

전체의 전략적 균형이 훼손될 수 있다며 강력히 반대해왔다. 양국에 대한 설득작업 없이 사드 배치가 속전속결로

이뤄지면서 중국은 사회·문화·경제 등 전방위적인 압박책을 구사하고 있다.


2015년 12월28일 타결된 한-일 일본군 ‘위안부’ 합의는 박근혜 정부의 외교 참사로 기록된다.

박근혜 정부는 위안부 피해자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일본에게 일방적으로 유리한 “최종적·불가역적인 합의”를 타결해버렸다.


 일본 정부의 공식 사과와 배상을 받을 기회를 한국 정부가 앞서서 차단한 셈이다. 2015년 8·25 남북 고위급 합의로

해빙기를 맞았던 남북관계는 이후 북한의 핵실험과 장거리 미사일 발사, 정부의 개성공단 가동 전면중단 조처 등으로

 2000년 6·15 남북공동선언 이전의 냉전기로 회귀했다.





한겨레


정세균 국회의장이 2016년 12월9일 오후 국회 본회의에서 박근혜 대통령 탄핵소추안을

가결을 선포하고 있다.

국회사진취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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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로 되돌린 민주주의 시계

전 대통령을 대통령직에서 끌어내린 결정적 계기는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지만, 이런 최악의 국정농단이 발생하게 된 배경에는 박 전 대통령의 시대착오적 리더십이 자리하고 있다.


공조직이 아닌 ‘비선실세’에 의존한 통치는 집권 첫 해의 인사참사로 징후를 드러냈다.

‘수첩인사’, ‘불통인사’라는평가 속에 취임 한달 동안에만 5명의 장·차관 후보들이 줄줄이 낙마했다. 또 국무총리

후보자 가운데 김용준·안대희·문창극 후보자는 인사청문회 전에 자진사퇴했고, 이완구 전 총리는 성완종 전 경남기업 회장에게 돈을 받았다는 혐의가 제기되면서 자진사퇴했다.


 반면 자신에게 불리한 이슈가 발생하면 정면대응이 아닌 다른 이슈로 치환하는 ‘국면전환의 정치’로 판을 주도해왔다. 정권의 정통성 문제로 비화될 뻔한 국정원 댓글 사건 기소는 채동욱 검찰총장 ‘혼외자 문제’로 비화됐고, ‘정윤회

 비선실세’ 문건 파동 때는 ‘문건 유출사건’으로 호도하며 위기를 넘겼다.


우병우 전 청와대 민정수석의 횡령·직권남용 혐의를 감찰하던 이석수 특별감찰관을 ‘기밀 누설’로 공격한 것도 같은

맥락이었다.




한겨레


황교안 국무총리가 2015년 11월3일 오전 11시 서울 세종로 정부서울청사에서

중·고등학교 역사교과서의 국정화와 관련해 ‘국민께 드리는 말씀’을 발표하고 있다.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대선 과정에서 ‘100% 대한민국’을 외쳤던 박 전 대통령은 취임 뒤 통합진보당 해산, 역사교과서 국정화 추진 등을

 여론이 첨예하게 맞서는 사안에 드라이브를 걸며 ‘2개의 대한민국’ 전략을 구사했다.

 박 전 대통령의 국정운영 기조에 반대하는 야당을 ‘민생 대 정쟁’ 구도에서 공격하며 정치혐오를 부추겼다.


집권 4년을 관통하는 ‘갈라치기’ 정치는 탄핵심판 막바지까지 이어졌다. 박 전 대통령의 탄핵 찬성-반대를 두고

‘촛불집회’와 ‘태극기집회’가 극렬히 벌어지고 있지만, 박 전 대통령은 탄핵반대 집회를 주관하는 ‘박근혜를 사랑하는

 모임’(박사모) 쪽에 감사메시지만 보냈을 뿐 국론통합을 위한 어떠한 노력도 하지 않았다.

최혜정 기자 idun@hani.co.kr






Rostropovich/Benjamin Britten - Schubert, Sonata for Arpeggione and Pian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