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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DERNISM 음악

Kenny Rogers-Coward Of The Country

 

 

 

 

 

 

 

 

 

 

 

 

 

 

 

 

 

 

 

 



Coward Of The Country

 

Ev'ryone considered him the coward of the county.
He'd never stood one single time to prove the county wrong.
His mama named him Tommy, the folks just called him yellow,
but something always told me they were reading Tommy wrong

 

 

모든 사람들이 그를 보고 마을의 겁장이라 여겼지요.


그는 그들이 잘못 알고 있음을 증명하기 위해 단 한 번도 나서지 않았어요.
그의 이름은 토미였지만 사람들은 겁장이라고 불렀어요.
하지만 난 사람들이 토미를 잘못 알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지요.



He was only ten years old when his daddy died in prison.
I looked after Tommy 'cause he was my brother's son.

I still recall the final words my brother said to Tommy:
"Son, my life is over, but yours is just begun.
Promise me, son, not to do the things I've done.

Walk away from trouble if you can.
It won't mean you're weak if you turn the other cheek.
I hope you're old enough to understand:
Son, you don't have to fight to be a man."

 

 

토미 나이 겨우 열 살 때 그의 아빠가 감옥에서 돌아가셨지요.


토미가 내 남동생의 아들(=조카)이기에 그를 지켜봤어요.

난 아직도 동생이 토미에게 했던 마지막 유언을 기억하고 있지요.
"아들아, 내 인생은 끝났지만 넌 이제 시작이란다.
내게 약속해 주려무나 아들아.
내가 저질렀던 잘못을 똑같이 반복하지 않겠다고...

문제가 생기면 어떻게든 피하거라
.다른 뺨을 내민다고 네가 약하다는 의미는 아니니까 말이다.
난 네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아들아, 남자라고 싸움질 할 필요는 없단다."


There's someone for ev'ryone and Tommy's love was Becky.
In her arms he didn't have to prove he was a man.
One day while he was workin' the Gatlin boys came callin'.

They took turns at Becky.... There was three of them!
Tommy opened up the door and saw his Becky cryin'.
The torn dress, the shattered look was more than he could stand.

He reached above the fireplace and took down his daddy's picture.
As his tears fell on his daddy's face,
he heard these words again:


짚신에도 짝이 있듯이,


토미에게도 베키라는 연인이 있었어요.
그는 그녀에게 자신이 남자임을 증명할 필요가 없었지요.
어느날, 토미가 일하던 중, 개틀린 소년들이 왔어요.

그들은 차례로 베키를 향했어요.
개틀린 아이들 세명이었지요.
토미가 문을 열자 베키가 울고 있었어요.
찢어진 옷, 베키의 창백한 얼굴표정을 보자
토미는 더이상 참을 수가 없었죠.

토미는 벽난로 위쪽으로 손을 내밀어,
아빠의 사진을 내렸어요.
그의 눈물이 아빠의 사진 위로 방울방울 떨어질 때,
토미는 아빠의 목소리를 또다시 들었지요.
  

 

 

 
 

 

 

 

 

 

 

 

 

1938년 태어난 미국의 컨트리 뮤직 가수. 싱어송라이터이며 사진작가이기도 하다. 배우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70개의 히트 싱글을 냈으며 총 420주 동안 빌보드 싱글차트 1위에 이 곡들을 올렸다.

그의 히트앨범인 'The Gambler','Kenny'는 온라인 통신회사인 어바웃 컴에서 '가장 영향력있는 컨트리 뮤직 앨범

 200선'에 올랐다.

 

또한 그는 70년대 받은 2번의 그래미 상을 포함해 지금까지 수많은 미국 음악차트의 상을 받아왔으며 2012년인 지금도 왕성하게 활동중이다.

또한 유명 TV 시리즈인 The Gambler에 출연하기도 하였다.

 이 시리즈가 상당한 인기를 끌었으며, 총 5개 시즌이 제작되어 방영되었다.

이 때문에, 일부 사람들은 케니 로저스가 배우인 줄 아는 경우가 있었을 정도.

 

1991년 KFC의 과거 오너였던 존 브라운 Jr.와 위의 케니 로저스가 함께 자기 이름을 딴 치킨 브랜드를 런칭했다.
1998년 본사는 파산하고 그 권리를
말레이시아의 기업이 사가서 아시아에서 여전히 영업중이다.

주로 동남아시아 지역에서 영업중이며, 말레이시아, 필리핀 등에서는 쉽게 볼 수 있는 치킨 레스토랑 중 하나.

물론 가수 케니 로저스와의 관계는 끊어진지 오래이다.

 처음부터 경영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이며, 케니 로저스 본인부터가 사업 막바지에 이른 1997년에 TV쇼에 출연하여 자기는 "치킨은 별로고 햄버거가 좋다(...)"라는 발언을 하여 빈축을 사기도 했다.

 

피자헛을 한국에서 열었던 사업가 성신제 씨가 1994년 한국에서도 열었다가 호되게 망했다.

당시 케니 로저스가 직접 나와서 TV광고까지 했음에 도 강동구의 짜투리 땅을 사서 들어온 뒤 공세적으로 지점을

늘려오다 1997년 외환 위기를 맞고 철수했다.

 

여기서 파는 컵케잌의 평이 좋았다고 한다.

 파파이스의 비스킷과 포지션이 비슷하다.

 

국내에서는 미국 음악이라 하면 팝이나 힙합음악이 잘 알려져 있으나, 컨트리 역시도 무시 못하는 마켓쉐어를 가지고 있다.

한국에서의 로트를 생각하면 될 듯.정확히 말하자면 5개의 TV 영화이지 시즌별로 방영되는 시리즈가 아니다.

 

앞에서도 서술된 로저스의 최고 히트곡 The Gambler의 내용을 기초로 한 서부극.

사실 닭이 메인이긴 했지만 햄버거류도 팔았다.

 로저스는 당시에도 국내에서 전혀 듣보잡이 아니었다

(전성기는 지났을지언정).

 

애초에 국내 정서와 거리가 있는 정통 컨트리가 아닌 크로스오버 성향의 노래들을 선보였기 때문에 해외 팝에 대한

수요가 본격적으로 태동하기 시작한 80년대 한국에서도 상당한 인지도가 있었으며 내한 공연도 가진 바 있었다.

 80년대 히트곡 레이디 (lady)는 CF 광고 음악으로 여러 쓰이며 추억의 팝송으로 인기가 많았다.

여기는 케니 로저스 치킨과 비슷한 시기에 들어와 지금도 국내에서 명맥을 잇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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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초반 우리나라에서 컨트리 음악의 인기 몰이에공을 세운 가수는덥수룩한 수염으로 유명한 Kenny Rogers

입니다.

 

그는 분명 컨트리 아티스트지만 1980년대초반 당시 국내에서 사랑 받았던 "Lady", "Islands in the stream",

"We've got tonight", 그리고"Don't fall in love with a dreamer" 등은 정통 컨트리 음악과거리가 멀었습니다.

 

1980년 6주간 정상의 자리를 지키면서 그의 대표곡이 된"Lady"는 Commodores 출신의 흑인 싱어 송라이터 Lionel

Richie가 작곡했고, 1983년 Dolly Parton과 듀엣으로 녹음해 2번째로 1위에 등극한 "Islands in the stream"은 디스코의 지존 Bee Gees의 맏형 Barry Gibb 이 만들어 준 곡 이었으며 Sheena Easton과 함께 한 "We've got tonight(1983년

3위)"은 미국의 록큰롤 싱어 송라이터 Bob Seger의  노래를 리매이크 한 것입니다.

 

 

그리고킴 칸스가 만들고 함께 호흡을 맞춘 "Don't fall in love with

a dreamer(1980년 4위)"도 컨트리팝이라기 보다는 어덜트 컨템포러리 발라드입니다.

 

케니 로저스가 이렇게 컨트리뿐만 아니라 대중적인 성인 취향의소프트 팝도 막힘 없이 잘 소화할 수 있었던 이유는

196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 팝그룹 The First Edition과 포크 밴드 

New Christy Minstrels에 몸담은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죠.
노래를 부른 케니 로저스는 컨트리 가수였지만

국내에서 인기를 얻은 그의 노래들은 정통 컨트리가 아니었습니다.

 

케니 로저스의 사례는 정통적인 컨트리보다 팝적인 감성을 살린 컨트리팝이  사랑 받는다는 사실을 증명합니다.

 

1938년 8월 21일 미국 텍사스주의 휴스톤에서 Kenneth Donald Rogers란 본명으로 태어난 케니 로저스는 대부분의

 컨트리 스타들이 그랬듯이 궁핍한 생활을 했습니다.

 

 

고등학교 재학시 기타와 피들을 배우기 시작한 그는 고교생 그룹 The Scholars에 가담,

 

로큰롤을 부르며 음악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1950년대에 이들이 싱글로 내놓은 "Carazy feeling"이란 노래는 밀리언 셀러를 기록해서 텍사스 지방 최대의 히트곡이 되기도 했습니다.

 

졸업 후 Texas 대학에 다니며 그는 재즈 그룹 The Bobby Doyle Trio에서 베이시스트 겸 싱어로 활동했고 또

, The Kirby Stone Four라는 포크 그룹에 가담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케니 로저스가 후에 크게 도약할 수 있던 계기는 역시 미국 모던 포크 음악의 가장 큰 그룹으로 꼽히는

The New Christy Minstrels에 가담하면서 였습니다.

 

 

이 그룹은 1842년에 Edwin Pop Christy가 조직한 포크 그룹으로 100년이 넘게 전통을 이어온 그룹이었기 때문에

케니 로저스가 여기 가담하게 된 것은 대단한 행운이었죠.

 

케니 로저스가 1960년대 중반까지 머물렀던 이 그룹에는 그 당시 멤버로 Randy Sparks, Kim Carnes, Barry McGuire:(1965년 Eve of destruction으로 스타덤에 오른 가수) 등이 함께 했었죠.

그러니까 뉴 크리스티 민스트럴스에서 활동했던 사람들은

나중에 대부분 솔로 가수로 성공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로큰롤, 재즈, 포크 등을 골고루 섭렵한 케니 로저스는 1960년대 중반 자신의 그룹을 조직하겠다는 욕망에

불타기 시작했습니다.

 

 드디어 그는 1967년 대망의 자기 그룹 The First Edition을 출범시켰습니다.

 

 

케니 로저스는 이 그룹의 음악적 방향을 포크와 팝의 퓨전, 그리고 그 당시 막 싹트기 시작했던 컨트리 록 스타일로

 잡았습니다.

 

그리고 컨트리 뮤직 중심지, 내시빌에서 활동하고 있는 작곡가, Michkey Newbury:(우리나라에서는 TV 연속극배경

음악 "All my trial"의 가수로널리 알려진 인물)의 곡"Just dropped in (to see what condition my condition was in)"을 받아첫 히트곡으로 내놓았습니다.

 

그 외에도 케니 로저스는 컨트리 싱어 송라이터 Mel Tillis로부터 Ruby, don't take your love to town을 그리고 Alex

Harvey로부터는 Ruben james 등을 받아 퍼스트 에디션의 이름으로 히트시켰습니다.

 

그러나 1974년 이후 이들에게서 히트곡이 나오지 않자 케니 로저스는 솔로 활동을 결심하고 그룹을 해체합니다.

 

퍼스트 에디션은 7년간의 활동을 통해 8개의 골드 싱글과 4개의 골드앨범을 냈으니

그 인기가 어땠는지는 쉽게 짐작이 갑니다.

케니 로저스가 그룹 생활을 청산하고 솔로 결심을 하면서 이주한 곳은 컨트리 뮤직의 메카 내시빌이었습니다.

 

그는 1970년대 초반을 지나며 존 덴버, 크리스 크리스토퍼슨, 레이 스티븐스, 맥 데이비스 같은 싱어 송라이터들에

 의해서 컨트리 뮤직이 팝적인 성향으로 크로스오버하고 있다는 사실에 착안, 팝 성향을 지닌 자신의 음악 스타일을

 

컨트리에 접목시켜 보겠다는 결심을 굳혔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예상은 적중했습니다.
 




물론 케니 로저스가 1975년 내시빌에서 UA 레코즈와 계약을 맺고 976년에 내놓은첫 싱글 "Love lifted me"는 \실패였습니다.

 

그러나 그가 대중들로부터 눈에 띄기 시작한 것은 1972년 솔로 아티스트로서 활동을 개시 한지 5년이 지난 1977년 싱

글 "Lucille"을 발표하면서 부터입니다.

 

 

농부인 남편과 4 자녀를 버릴 수밖에 없었던 한 여인의 인생사를 담은 이 진솔하고 구슬픈 곡은 당시를 평정하고 있던 신경 말초적인 가사로 유흥 지향적인 디스코에 카운터 펀치를 날려 대단한 성공을 일궈 냈습니다. "Lucille"은

케니 로저스의 운명을바꾸어 놓았습니다.

 

이 노래는 나오자마자 컨트리 차트 1위에 올라 컨트리 뮤직계를 뒤흔들었고 곧 이어서 팝 차트 5위까지 오르는 빅 히트곡으로 떠올랐습니다.

 그는 이 노래로 갑자기 미국내 최고의 인기 가수로 부상 했습니다.

 

 

1978년에서 1980년사이 그는 "Love or Something Like It", "The Gambler", "She Believes in Me", "You Decorated My Life", "Coward of the

County" 다섯곡의 싱글을 연속으로 힛트시켰습니다.

 그리고 그가 시작한 사업들도 모두 번창, 갑부 가수라는 호칭이 그에게 붙어다니게 되었습니다.

 

 

특히 "The gambler" 같은 노래가 히트하던 시절 케니 로저스의 인기는 절정에 이르렀고 재력도 엄청나게 쌓여 그는

 베벌리 힐스에 최고가 저택-그 당시 가격이

4,500만 달러였다는 소문이 나돌기도 했습니다.

 1970년대 후반부터는 스크린에도 손길을 뻗쳐 <갬블러>, <카워드 오브 더 카운티> 등의 영화에 출연하고

 

주제가도 직접 불러 지속적인 인기를 유지했습니다.

 

 

절정의 인기에 있던 1980년대 초반에는 많은 여가수들과 듀엣 곡들을 취입했습니다.

킴 칸스, 시나 이스턴, 돌리 파튼 외에도 자기보다 연상의 컨트리 싱어 Dottie West와 짝꿍을 이뤄 "Everytime two fools

collide"를 불러 여가수와 가장 잘 어울리는 남자 가수라는 명예를 재확인했습니다.

 

케니 로저스는 1980년대 중반 전후까지 거의 모든 음악 시상식에서 큰 상을 독식했고 수많은 행사의 사회자로

불려다니면서 미국 최고 연예인으로 우뚝 섰습니다.

 

그의 인기는 재력을 바탕으로 영화에까지 미쳐 텔레비전 영화 시리즈 등에서 주연을 맡기도 했습니다.

 

케니 로저스는 인기가 높아지면서 여성 편력도 늘어나기 시작했는데, 우선 어려운 시절 함께 고생해온 세 번째 아내와 헤어진 것이 1977년의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곧바로 네 번째 아내 Marianne Gordon을 맞아 들였습니다.

 

마리안 고든은 1970년대 인기 컨트리 텔레비전 쇼 에서

귀부인으로 나오는 고정 배역을 맡아 연기했던 여성입니다.

 

그런데 1976년, 케니 로저스가 잘 나가던 시절 이 프로에 출연 했다가 마리안 고든에게 반해 전격적으로 전처와 이혼

구속을 밟고그대로 그녀와 네번째 결혼에 골인했던 것이죠.

 

그래도 케니 로저스와 마리안 고든의 결혼 생활은 비교적 길게 간 편입니다.

10년 가까이 이어졌으니까요.

 그가 마리안 고든과 처음 결혼했을 때는 영원한 짝을 만난 것으로 생각했고 두 사람간의 금슬은 미국 연예계에서도 보증

수표였습니다.


그러나 1980년대 중반에 들어서면서 여가수 돌리 파튼과의 염문설로 부터 바람 피운 얘기들이 나돌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1990년대 들어서면서 마리안 고든이 이혼 수속을 밟는다느니 케니 로저스가 손이 발이 되도록 빌고 다시 화합했다느니 얘기가 오가더니 1996년

두 사람은 결국 이혼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니까 꼭 십년을 채우고 케니 로저스의 네 번째 결혼 생활이 깨진 것이었죠.

 

1980년대 후반 이후 캐니 로저스는 자선사업과 콘서트, 패스트 푸드 체인인 Kenny Rogers' Roasters, TV,

영화 출판 등으로 바쁜 나날을 보냈습니다.

 

또한 꾸준히 앨범을 발표하였으나, 1984년 킴 칸스, 흑인 싱어 James Ingram과 화음을 맞춘 "What about me(15위)"를 끝으로 지금까지 이렇다 할 싱글 히트곡을 생산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

 

이웃 아저씨처럼 후덕한 인상에 바리톤 음색을 소유한 남부 출신의 케니 로저스가 부르는 노래들은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슬프고 기쁜 일들을 가감없이 진실하게 전합니다.

 

그래서 이 턱수염 가수의 노래를 들은 사람들은 그 곡에 자신의 감정을 이입하고 그것에 동화되는 마력에 빠져듭니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미국의 컨트리 가수이자 사진작가이며 배우이기도 한 케니 로저스(본명: Kenneth Ray Rogers)

다방면에 걸친 재능으로 사랑받는 가수이다.
 미국의 텍사스주 휴스턴에서 태어난 케니 로저스는 제프슨 데이비스 고교(Jefferson DavisHigh School)에 재학중이던 1956년에 스칼러스(The Scholars)라는 이름의 로커빌리(Rockabilly: 미국 남부의 백인 뮤지션들에 의해 시작된 초기 록 음악)밴드를 결성하여 두장의 싱글 음반을 발표하면서 음악적 경력의 첫발을 내딛게 된다.

1966년에는 포크 그룹 '뉴 크리스티 민스트럴스(New Christy Minstrels)'에 가수겸 베이스 주자로
가입하면서 음악 인생의 전환기를 맞게된다. 뉴 크리스티 민스트럴스에서의 활동으로 자신감을 얻은 케니 로저스는 1967년에 '퍼스트 에디션(The First Edition)' 이라는 이름의 밴드를 결성하여 싱글 'Just Dropped In (To See What Condition My Condition Was In)'을 발표하였다.


이 곡은 케니 로저스의 첫번째 히트 곡이었으며 계속해서 'Ruby, Don't Take Your Love To Town' 과

'Reuben

 James', 등의 곡을 팝과 컨트리 차트에 연속해서 올려놓으며 성공적인 활동을 이어가게 된다.

이 당시 케니 로저스는 히피(Hippie: 미국의 물질 문명에 저항하는 젊은이들의 통칭) 성향의 분위기를

연출하며

활동하여 'Hippie Kenny'라는 애칭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1974년 케니 로저스는 빠르게 변하는 팝음악계에 환멸을 느껴 그룹 퍼스트 에디션을 해체하고솔로로 전향하여 컨트리 가수로 새출발을 하게 된다. 1975년 유나이티드 아티스트(United Artists)와음반 계약을 체결하고 1976년에 음반' Love Lifted Me'를 발표하여 컨트리 차트 20위권에 진출시키며 컨트리 가수로써 비교적 성공적인 출발을 하였다.
1977년에 발표한 두번째 음반 'Kenny Rogers'는 'Lucille' 이라는 대형 히트 곡을 탄생시키며케니 로저스를 세계적인 컨트리 가수로 우뚝 서게 하였다. 싱글 'Lucille' 은 12개국의 팝차트 정상을

차지하였으며 5백만장이 넘는 판매고를 기록하였고 음반 Kenny Rogers 는 빌보드 컨트리 앨범 차트

정상을 차지하였다. 
 Lucille 의 성공이후 케니 로저스는 TV와 영화에도 진출하여 배우로 성공을 거두었으며 TV 영화 'Coward of the County' 의 주제곡을 히트시키는 등 발표하는 음반마다 성공을 거두며

부와 명성을 쌓아나가게 된다.

 

 

1980년에는 킴 칸스(Kim Carnes)와 듀엣으로 'Don't Fall in Love with a Dreamer' 를 발표하여 히트를

하였고 라이오넬 리치 (Lionel Richie)와 공동 작업으로 만든 'Lady' 를 발표하여 빌보드 싱글 차트와컨트리 차트의 정상을 동시에 차지 하였다.Lady 는 한국에서도 대단히 많은 사랑을 받았던 곡으로 한국에서 케니 로저스를 대표하는 곡이다.

 

 

 

 

 

 

 

 

 

 

 

화려하지는 않으나 깊이 있는 남성의 매력을 지닌 Kenny Rogers Country Singer Song Writer이자 사진작가이고

프로듀서이며 배우 겸 기업가로서 말 그대로 만능 연예인이라고 불려질 만한 사람입니다.

그는 1941Texas Houston 에서 태어났다고 합니다.

 10살 때부터 노래에 재능을 보였던 그는 고등학교에 다닐 때에는 The Scholars라는 밴드의 일원으로 있으면서

 ‘That Crazy Feeling’이라는 곡을 발표하여  히트를 하면서 가수로서의 가능성을 보이기도 했다고 합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그는 Houston 대학에 진학을 하였는데, 이때 그 지역에서는 꽤 알려진 재즈 그룹 Bobby Doyle

 Trio에 가입하여 이따금씩 가까운 지방을 순회 공연하기도 하는 등 가수활동을 이어 갔다고 합니다.

그러던 그는 이 그룹과 함께 간혹 레코딩을 하기도 하였으나 별로 반응이 없자 음악스타일이 일치하는 친구들 Mike

 Settle, Terry Williams, Thelma Camacho를 만나 New Christy Minstrels라는 그룹을 조직하게 됩니다.

 

 이들은 주로 포크 송을 연주하는 포크 그룹으로 출발하였는데, 1967 Micky Jonew가 가입하면서 그룹 명을 First

Edition으로 바꾸고 5인조 그룹으로 재탄생을 하게 됩니다.

그들은 간결한 Soft Sound Folk Rock적인 요소를 가미한 음악을 다루면서 1968년부터 1970년까지 활발하게 활동을

전개하였는데, 이때 그들의 히트 곡 중에는 1968년도의 ‘Just Dropped In’을 위시하여 ‘Roben James’, ‘Something's

Burning’, ‘Ruby’, ‘Don't Take Your Love To Town’ 등이 알려져 있습니다.

 

그들의 인기가 점차 절정에 오르면서 1972년에는 TV시리즈인 Rollin' on The River에 출연하는 등 활동 영역을 넓혀

나가기도 하였지만 그 동안의 인기를 유지하지 못하고, 결국 Kenny Rogers 마저 돌연한 활동을 중지하면서 이들

그룹은 1976년 해체되는 운명에 처하게 됩니다.

 

그러나 솔로로 전향한 Kenny Rogers는 이듬해인 77‘Lucille’이란 곡을 내놓으며 공전의 대히트를 기록하게 됩니다.

 싱글 앨범 LucilleKenny Rogers 에게 Grammy상의 Country최우수 남성가수 상을 안겨주었을 뿐만 아니라 빌보드

선정 1977년 최우수 크로스오버 아티스트로 선발되기도 하였는데 이러한 인기의 요인은 Kenny Rogers 의 노래 스타일

PopCountry를 알맞게 혼합하여 구수하고도 텁텁한 목소리로 훈훈한 감정을 담아 냈기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그는 노래 ‘Lucille’에 그치지 않고 ‘Sweet Music Man’ ‘The Gambler’ 등 밀리언셀러 싱글 곡들을 계속 내놓았는데

78년에는 Dottie West와 듀엣 앨범 Every time Two Fools Collide를 발표하여 톱10에 올렸으며, 79년에는 Love Or

 Something Like It The Gambler 등 끊임없이 앨범을 발표하게 됩니다.

 

전통적인 Country Song이라기보다는 Outlaws라 지칭 받고 있는 음악을 다루었던 Kenny Rogers Outlaws

선두 주자로 Country Music의 변화에 나름대로 개성을 살려 미국 Pop 계의 변화에 일익을 담당하기도 하였습니다.

80년 그는 Kim Carnes와의 듀엣 곡 ‘Don't Fall In Love With A Dreamer’를 발표하여 끊이지 않는 정열을 과시했고, 81년에 발표한 ‘Lady’는 명예와 부와 인기를 한 몸에 누리게 해준 대히트 곡으로 미국 내에서 발표하는 각종 음악상을 모두 휩쓸었다고 합니다.

이 노래 ‘Lady’는 흑인 작곡가 Lionel Richie(그룹 The Commodores의 멤버)가 작곡하고 제작한 곡이기도 하였는데,

 PopCountry 만을 혼합한 것이 아니라 흑인음악 R & B까지도 가미를 한 Kenny Rogers의 폭넓은 음악영역을 말해

주는 곡이기도 합니다.

 

Lady’곡은 Kenny Rogers 뿐 아니라 Lionel Richie의 커리어에도 영향을 미칠 만큼 대단한 성공을 거둔 곡이었습니다.

 1981년에 발표되어 빌보드 컨트리 차트, Hot 100 차트, Adult Contemporary차트에서 모두 1위에 올라, Kenny

Rogers 의 최대 히트곡 중 하나가 된 노래로 노래의 배경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을 것입니다.

 

중세 유럽 기사들은 이른바 기사도 정신 아래 무술을 연마하면서 명예와 예절, 약자 보호 등을 최고의 덕목으로

삼았다고 합니다.

이와 같은 기사도 정신을 가지고 기사들은 자신이 좋아하거나 흠모했던 여인을 위하여 목숨까지 걸었다고 하는데,

이 노래에 등장하는 Lady는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단순한 숙녀나 교양 있는 여성 정도가 아니라, 중세 유럽 기사들이

 숭배 대상으로 삼았던 여인들 즉 귀족의 아내나 딸을 가리키는 말이었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여성을 목숨 바쳐도 좋은 숭배와 흠모의 대상으로 생각한다는 그런 뜻일 겁니다.

 

언제나 구수한 목소리로 다정다감하게 노래를 불러준 Kenny Rogers 는 발표하는 노래마다 히트를 기록하여 그 누구도

 넘볼 수 없는 확고한 스타의 자리를 굳힌 20세기 말 최고의 가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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