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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과 시사

'즐거운 사라'의 마광수 교수, 불화했던 세상 떠나다

                                                                                         



`시대의 광마(狂馬)` 마광수, 생의 마지막 페이지를 덮다





마광수 전 교수 “성이란 주제 파헤치려 애썼는데 남는 게 없어 착잡”







'즐거운 사라'의 마광수 교수, 불화했던 세상 떠나다




과감한 성적 묘사가 담긴 시집 ‘가자 장미여관으로’와 장편소설 ‘즐거운 사라’ 등으로 1990년대 사회적 파장과 함께

표현의 자유 논란을 일으킨 작가 마광수 전 연세대 국문과 교수가 5일 서울 용산구 동부이촌동 자택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향년 66세.

이날 낮 1시51분쯤 마 전 교수가 베란다 숨져 있는 것을 가족이 발견해 경찰에 신고했다.


경찰은 마 전 교수가 목을 맨 채 숨진 점을 미뤄 스스로 목숨을 끊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보고 자세한 경위를

 조사 중이다.

현장에서는 자신의 유산과 시신 처리를 시신을 발견한 가족에게 맡긴다는 내용의 유서가 발견됐다고 경찰은 전했다.


1951년 서울에서 태어난 마 전 교수는 연세대 국문과를 졸업하고 1983년 연세대 대학원에서 ‘윤동주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고 같은 해부터 모교 국문과 교수로 일했다.

1977년 박두진 추천으로 시인으로 등단하고, 이듬해 27세에 홍익대 조교수로 임용돼 ‘천재 교수’라고 불리며 학계의

기대를 받았다.


첫 시집 ‘광마집’(1980)에 지식인으로서의 자괴감, 사회 모순에 대한 분노를 담았다.

 윤동주와 상징시학, 놀이로서의 예술을 조명하는 등 연구 활동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이런 면모는 ‘가자 장미여관으로’와 에세이 ‘나는 야한 여자가 좋다’ 등으로 문단에서 ‘에로티시즘의

기수’로 떠오르면서 일반에 잊혀졌다.


1992년 소설 ‘즐거운 사라’ 필화 사건은 큰 사회적 파장을 일으키며 수십 년에 걸쳐 그의 인생을 파멸로 몰아넣었다.

한 여대생이 자신이 다니는 대학의 교수와 관계를 맺는다는 내용의 이 소설은 1991년 서울문화사에서 출간됐으나

외설적이라는 이유로 당시 간행물 윤리위원회 고발로 자진 수거됐고 이듬해 8월 개정판이 청하출판사에서 출간됐다.


그 해 10월 마 전 교수와 장석주 청하출판사 대표가 음란물 제작 및 배포 혐의로 구속됐고, 같은 이유로 소설은 문화부에 의해 판매금지됐다. 마 전 교수는 강의 중 긴급체포 돼 파장은 더 컸다.

 성균관과 유도회(儒道會) 등 6개 유림 단체, 소설가 이문열, 10개 종교단체는 마 전 교수를 구속한 검찰 조치를 환영한 반면, 고은, 김병익, 유안진 등 문인 수 백 명은 ‘표현의 자유 침해와 출판탄압에 대한 문학ㆍ출판인 공동성명서’를 발표하고 시위를 벌였다. 









마광수 전 교수가 1994년 연세대 교수 시절 강의하는 모습.




마 전 교수는 1992년 12월 1심에서 징역 1년 집행유예 2년을 선고 받았고, 구속 파문으로 1993년 연세대로부터 직위

해제 됐다.

1995년 대법원 확정 판결로 해직됐다가 1998년 사면 복권되며 복직했다.


우울증 때문에 휴직과 복직을 반복했다 작년 8월 퇴임했다.

 마 전 교수는 해직 경력으로 명예교수 직함을 얻지 못했고 필화 사건 후유증으로 심한 우울증에 시달렸다.

‘즐거운 사라’ 개정판을 출간해 마 전 교수와 함께 구속됐던 장석주 문학평론가는 “한국 사회에서 출연하기 힘든 독특한 천재 작가”라며 “마광수만큼 솔직하게 자신의 문학세계를 펼친 작가는 보기 드물다.


사회 경직성 때문에 소외되고 따돌림 당했다는 점에서 불운했다”고 평했다.

 1985년 12월 연극학 교수와 결혼한 마 전 교수는 1990년 1월 합의이혼했다.

자녀는 없다.

 노모는 2015년 별세했고, 유족으로는 누나 조재풍, 조카 한옥미(가톨릭대 작곡과 교수)씨가 있다.


빈소는 서울 용산구 순천향병원 장례식장 7호실. 발인 7일. (02)797-4444













필화.. 구속.. 해직, 혁명가처럼 산 로맨티스트 '마광수'



소설가 마광수씨는 1989년 ‘나는 야한 여자가 좋다’라는 수필집으로 한국사회에 파문을 던졌다.

당시 연세대 국문과 교수였다. “솔직하게 본능을 드러낸 야한 작가”라는 수식어가 붙었다.


강의 중 학생들에게 “너희 섹스 해봤어? 사랑하니까 섹스 하는 거야.

 섹스 해봐야 사랑을 알아” 등의 말을 거침없이 했다.

그의 책은 당시 베스트셀러가 됐다.


마광수의 성(性)담론은 수필을 넘어 문학의 영역으로 확장됐다.

대표시집 ‘가자, 장미여관으로'에 이어 1991년 소설 ‘즐거운 사라'를 발표했다.

이 소설은 출판되자마자 8만부가 팔려나갔다.

 하지만 언론과 문학계에서 음란소설로 규정하면서 결국 그는 검찰에 의해 ‘음란문서유포죄’로 전격 구속됐다.


전례를 찾기 힘든 필화사건으로 그는 연세대에서 면직조치까지 당했다.

구속과 면직 등 일련의 일을 겪으면서 “문학은 상상력의 모험이며, 금지된 것에 대한 도전이다.

문학은 기존의 가치체계에 대한 창조적 불복종이요, 창조적 반항이어야 한다”는 주장을 폈다.

 “나는 반항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그러므로 나는 외롭다”라는 말을 남겼다.


야한 작가는 문학계의 외로운 ‘왕따’가 됐다.

일각에서는 ‘시대를 너무 앞서간 로맨티스트’라고 그를 표현했고, ‘예술과 외설의 경계인’이란 말도 나왔다.








1951년 서울에서 태어난 마광수는 종군기자였던 아버지가 한국전쟁에서 전사한 후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다.

연세대 국문과와 동대학원을 나왔고 ‘윤동주 연구’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75년 25세에 대학 강의를 시작해 28세에 홍익대 국어교육과 교수를 지낸 후 1984년부터 연세대 국문과 교수로

재직했다.


92년 10월 ‘즐거운 사라’ 필화사건으로 전격 구속돼 두 달간 수감생활을 한 뒤 95년 최종심에서 유죄가 확정됐다.

연세대에서 면직됐다가 98년 복직했다.

이후에도 2000년 재임용 탈락 등 우여곡절을 겪었다.

억척스럽게 그를 키워 교수로 만든 90세 노모를 줄곧 모시고 살았다.


1977년 박두진 시인의 추천으로 문단에 데뷔한 이후 그는 시, 소설, 에세이, 평론 등 여러 장르를 아우르는 40여권의

 저서를 쏟아냈다. 다음과 같은 저술을 남겼다.


◇문학이론서= ‘윤동주 연구’ ‘심리주의 비평의 이해’ ‘마광수 문학론집’ ‘카타르시스란 무엇인가’ ‘문학과 성’ ‘삐딱하게 보기’ ‘연극과 놀이정신’


◇시집= ‘광마집(狂馬集)’ ‘귀골(貴骨)’ ‘가자 장미여관으로’ ‘야하디 얄라숑’ ‘빨가벗고 몸 하나로 뭉치자’ ‘일평생

연애주의’ ‘나는 찢어진 것을 보면 흥분한다’ ‘모든 것은 슬프게 간다’ ‘천국보다 지옥’


◇에세이집= ‘나는 야한 여자가 좋다’ ‘사랑받지 못하여’ ‘열려라 참깨’ ‘자유에의 용기’ ‘마광쉬즘’ ‘나는 헤픈 여자가

좋다’ ‘더럽게 사랑하자’ ‘마광수의 뇌구조’ ‘나의 이력서’ ‘스물 즈음’


◇소설= ‘권태’ ‘광마일기’ ‘즐거운 사라’ ‘자궁 속으로’ ‘알라딘의 신기한 램프’ ‘광마잡담’ ‘로라’ ‘귀족’ ‘발랄한 라라’

‘사랑의 학교’ ‘돌아온 사라’ ‘미친 말의 수기’ ‘세월과 강물’ ‘2013 즐거운 사라’ ‘아라베스크’ ‘인생은 즐거워’ ‘나는 너야’ ‘사랑이라는 환상’


◇문화비평집= ‘왜 나는 순수한 민주주의에 몰두하지 못할까’ ‘사라를 위한 변명’ ‘이 시대는 개인주의자를 요구한다’

‘모든 사랑에 불륜은 없다’ ‘육체의 민주화 선언’ ‘마광수의 유쾌한 소설 읽기’ ‘생각’


◇전시회= ‘마광수·이목일·이외수·이두식 4인의 에로틱 아트전’ ‘색(色)을 밝히다 전’ ‘꿈꾸는 삼총사전: 마광수·

한대수·변우식’ 등









그의 긴 약력은 마광수의 글이 얼마나 큰 사회적 파장을 일으켰으며 동시에 얼마나 많은 관심을 모았는가를 보여준다. ‘구속’ ‘수감’ ‘항소심’ ‘해직’ ‘복직’ 등의 단어가 등장하는 이력은 민주화 운동가의 그것처럼 극적이다.

하지만 그는 자신을 ‘무슨 운동가’로 규정하지 않았다.


자신은 하고 싶은 말, 옳다고 생각한 말을 했을 뿐이고 그것이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는 한 자신은 처벌받을 일을 한 적이 없다는 입장이었다.

운동가라기보다 전형적인 자유주의자의 길을 걸었다.

그럼에도 이런 파장을 몰고다닌 것은 그의 생각이 갖고 있는 ‘솔직함’ 때문이었다.


과감한 발언은 대중에게 호소력 있게 전달됐고, 또 지탄의 시선을 불러 모았다.

그는 소설을 쓸 때 문장에 가장 신경을 쓴다고 토로했다.

가장 친근감 있고 가벼운 문장이 되도록 애썼다.

또 “작가는 ‘상상의 자유’를 마음껏 누릴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태원준 기자 wjtae@kmib.co.kr












 
올 1월 마광수 교수의 모습. 이미 우울증을 앓고 있었다. [중앙포토]




올 1월 마광수 교수의 모습. 이미 우울증을 앓고 있었다.


 [중앙포토]



우리들의 우울한 영웅 마광수의 마지막 가는 길


 ‘마광수’가 죽었다. 그것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외람되게도 부고에서 이름 석 자만 쓴 것은 마광수라는 이름이 우리의 한 시대를 상징하는 기호였기 때문이다.
소설가 김연수가 “대뇌의 언어로 말하던 사람들이 갑자기 성기의 언어로 말하던 시절”이라고 회고했던 1990년대
들머리, 마광수는 스스로 시대를 드러내는 아이콘이었다.  

 명문 대학 교수가 “야한 여자가 좋다”고 떠들고 다녀서, 또는 “장미여관으로 가자”고 뭇 여성을 꼬여서 마광수에 열광했던 것은 아니다.
 고지식하고 점잖은(혹은 그러한 척만 하는) 사회와 혼자만의 방식으로 맞장을 뜬 혈혈단신이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응답하라’로 시작하는 TV 드라마가 동화처럼 어여쁘게 그려낸 그 시절, 마광수는 문화 게릴라였고 민주화
투사였다. 마광수를 기억하는 세대에게 그의 황망한 부고는 씁쓸하다.
하필이면 페미니즘 열기가 뜨거운 즈음이어서 얄궂다고 할 수도 있겠다.
이렇게 또 한 시절이 모퉁이를 돌아갔다.  

 ◇유언장 남겨=5일 서울 용산경찰서에 따르면 마광수 전 연세대 국문과 교수는 서울 동부이촌동 아파트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그는 이 낡은 아파트에서 20년 넘게 살았다.
 경찰은 “목을 멘 것 같다. 오후 1시51분쯤 현장에 도착해보니 이미 숨진 상태였다”고 전했다.  

 마 전 교수의 방에서 지난해 작성한 것으로 추정되는 A4 용지 한 장 분량의 유언장이 발견됐다.
 유언에는 재산을 이복누나에게 부탁한다는 내용이 담겼다고 한다. 그
는 오랜 세월 어머니와 둘이서 살았다. 어머니는 지난해 돌아갔다.

 경찰은 마 전 교수가 지난해 8월 정년 퇴임한 뒤부터 우울증 증세를 보였다고 발표했지만, 마 교수의 병력은 오래됐다. 2000년에도 그는 “우울증과 대인기피증을 앓고 있다”고 털어놓은 적이 있다. 그때도 그는 심하게 낯을 가렸고 손을
 떨었다.  

 퇴임한 뒤에는 생활고에 시달렸다.
 “연금을 받고 있지만 집안일을 봐주는 아주머니에게 월급을 주고 나면 남는 게 없다고 투덜댔다”고 한다.
출판사도 더 이상 원고 청탁을 하지 않아 그는 틈틈이 그렸던 그림을 팔려고 내놨다.
 그러나 화랑에서도 마광수는 외면당한 이름이었다. 

 그는 지난해 본지 인터뷰에서 “중간에 8년을 놀아(교수직에서 해임됐던 기간) 연금도 얼마 안 된다”며 “외로운 독거
노인”이라고 신세 한탄을 하기도 했다.
그는 올해 예순여섯 살이었다.
 
 ◇야한 여자 사라=지금은 뜨악해 할지 모르겠다.
마광수가 ‘야한 여자론’을 들고 나온 80년대 끄트머리 여성운동가 상당수는 여성운동의 하나로 길거리에서 담배를
물었다.
민주화 열기가 문화 영역으로 확장되던 시절이었다. 마광수는 바로 그 시대의 아이콘이었다.

 89년 1월 발표한 에세이집 『나는 야한 여자가 좋다』로 그는 유명인사로 떠올랐다. 대가도 혹독했다. ‘프리섹스가
나쁜 것은 아니지만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니 프리페팅을 즐기자’는 식의 주장은 여성을 성의 도구로 인식한다는
비판에 직면했다. 비난 여론이 들끓자 그는 전공과목 강의에서 배제됐다.





마광수 교수의 즐거운 사라.



마광수 교수의 즐거운 사라.




 생전의 마광수는 “한 여자 때문에 인생을 망쳤다”고 여러 번 얘기했다.
그의 인생을 망친 여자가 ‘사라’다. 마광수는 92년 여대생 사라의 문란한 성생활을 다룬 소설 『즐거운 사라』를 발표
했고, 그해 10월 29일 음란물 제작 및 배포 혐의로 『즐거운 사라』를 발간한 ‘청하’ 출판사의 장석주(62) 당시 대표와 함께 구속 수감됐다.

두 달 만에 집행유예로 풀려났지만 대학에서는 쫓겨났다.
 장 전 대표는 “감옥에 갔다온 뒤 회복할 수 없어 출판사를 정리했다”고 말했다. 
 98년 그는 사면 복권됐다. 대학에도 돌아갔고 『즐거운 사라』도 재출간됐다.

그러나 시장의 반응은 냉담했다. 마광수가 죄인이었던 시절 『즐거운 사라』가 일본에서 번역 출간됐다.
일본에서 『즐거운 사라』는 8만 부 이상 팔렸다. 그러나 “표현 수위에 실망했다”는 독후감이 대부분이었다.




 

마광수 교수의 그림.



마광수 교수의 그림.




 ◇우리들의 우울한 영웅=마광수는 2005년 ‘13년 만에 내놓은 야한 소설’이라는 요란한 광고 문구와 함께 소설

 『광마잡담』을 발표했다. 그러나 기대 이하였다. 소설은 야하지 않았다.

표현의 수위나 상상력의 문제가 아니었다. 마광수에 따르면 ‘야하다’는 표현은 일탈과 모반의 기운을 동반해야 했다.

 소설은 다만 음란할 뿐이었다.  


 마광수가 변한 것은 아니었다. 변한 것은 사회였다.

젊은 여성의 반짝이는 긴 손톱에서 성적 상징을 읽어냈던 90년대 초입 마광수는 ‘변태’ 소리를 들었다.

그러나 네일아트는 젊은이들의 지배적인 문화 코드가 된 지 오래다.

아무도 섹스를 말하지 않던(또는 못하던) 시절이어서 마광수는 야했다.


 2007년 그는 제자들의 시를 거의 그대로 제 시집 『야하디 알라숑』에 실어 물의를 빚기도 했다.
 올해는 시인 마광수가 등단한 지 40주년이 되는 해다.

 그는 77년 청록파 박두진의 추천으로 등단했다.


마광수는 국내 윤동주 박사 1호이기도 하다. 83년 윤동주 연구로 박사 학위를 땄다.

마광수는 올 1월 ‘중앙선데이’와의 인터뷰에서 “나와 윤동주 모두 솔직한 시인”이라고 말했다.  


 마광수는 한국 문학 최초로 여성에 성 주체성을 부여한 작가였다.

90년대 여성단체 대부분이 마광수를 비난했지만 검찰은 사라가 끝내 도덕적으로 반성하지 않았다며 유죄를 주장했다. 무엇보다 그는 한국의 지식인 사회가 거대 담론에서 허우적거릴 때 개인의 가장 내밀한 욕망에 관하여 발언했다. 


 마광수를 시대를 앞서간 지식이었다고 기억하는 것은 무책임하다.

마광수는 죽기 전까지도 야한 여자를 찾았다.

그는 다만 획일적이고 답답한 세상이 싫었을 뿐이었다.

그의 넥타이 맨 모습이 기억에 없다. 그의 가는 목을 감싼 건 늘 스카프였다.


 


 손민호ㆍ한영익 기자 ploveson@joongang.co.kr



[








마광수의 작품들. © News1





          

소설가 마광수

[연합뉴스 자료사진]




마광수




마광수(馬光洙, 1951년 4월 14일 ~ 2017년 9월 5일[1])는 연세대학교 교수를 지낸 대한민국의 국어국문학자이자

저술가이다.

 본관은 목천이다.


연세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수석으로 입학·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윤동주 시인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제5·6공화국 시절부터 한국 문학의 지나친 교훈성과 위선을 적나라하게 비판하고 풍자하였다.


1991년 출판한 《즐거운 사라》의 외설 논란으로 1992년 강의 도중 구속되고, 1995년 대법원에서 징역 6월에 집행유예 2년이 확정되어 연세대학교 교수직에서 해직됐다가 1998년 특별사면을 받았다.

2007년 연세대학교 국어국문학전공 정교수로 복직하였고, 2016년 1학기를 마지막으로 정년퇴임하였다.










1951년 서울에서 1·4 후퇴 당시 피난 중에 태어났다.

종군사진작가였던 아버지가 6.25 전쟁 중 전사하고 홀어머니 밑에서 어렵게 자라며 불우한 유년기를 보냈다.

 초등학교 1학년 때 서울에 정착, 병약하고 가난한 성장기를 보냈다.

독서를 즐겼으며, 미술에 재능을 보였다.


1963년 2월 서울 청계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대광중학교에 입학했다.

 1966년 대광고등학교로 진학했다.

고등학교 3학년 무렵 대학 진학 직전 미대와 국문학과 사이에서 고민하다 국문학과로 진학할 결심을 한다.

1969년 연세대학교에 진학하였다.


연세대학교 재학 중 학과내 연극부의 창설을 주도했고, 연세 문학회, 교내방송국 PD, 교지 기자, 등으로 활동했다.

 1973년 연세대학교 문과 대학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했다.

곧이어 대학원에 진학, 대학원 재학 중에는 한국 최초의 마당극 《양반전》을 각색, 연출했다. 1975년 국문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마광수 교수는 어떤 인물? 대표작 '가자 장미여관으로'
마광수 교수는 어떤 인물? 대표작 ‘가자 장미여관으로’




등단과 교육 활동


1975년 연세대학교 국문학과 박사 과정에 들어가면서 모교인 연세대학교 국문학과 강사가 되었고, 이후 1978년까지

연세대학교, 한양대학교, 강원대학교에서 강사로 활동했다.

1977년 잡지 《현대문학》에 〈배꼽에〉, 〈망나니의 노래〉, 〈고구려〉, 〈당세풍(當世風)의 결혼〉, 〈겁(怯)〉, 〈장자사(莊子死)〉 등 여섯 편의 시를 발표, 박두진 시인에 의해 추천되어 문단에 데뷔하게 되었다.


1977년 2월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1979년부터 1983년까지 홍익대학교 사범대학 국어교육학과 조교수로 재직했다.

 "윤동주 연구" 논문으로 1983년 연세대학교 대학원 문학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이 해부터 연세대학교로 돌아와 국어

국문학과 조교수로 재직하기 시작했다.


이후 제5공화국·제6공화국 시절부터 대한민국 문학의 지나친 교훈성과 위선을 적나라하게 비판하고 풍자하여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이후 연세대학교 문과대학 국어국문학과 부교수를 거쳐 정교수로 재직하였다.


1989년 장편 소설 《권태》로 소설계에 데뷔하였고, 《나는 야한 여자가 좋다》 를 출간하였다.

그러나 이 책이 출판되고 얼마 뒤 언론의 혹평을 받았고, 6개월 뒤 강의가 취소되는 시련을 겪었다.


1992년 장편 《즐거운 사라》가 외설적이라는 이유로 1심에서 징역 8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 받았다.

 1992년 12월 28일 징역살이를 끝내고 석방되었다.

구속 파문으로 1993년 연세대학교로부터 직위해제되었고, 1995년 대법원에서 상고 기각 후 해직되었다









《즐거운 사라》 필화 사건

그가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은 1990년 초였다.

 이후 1991년 작품 《즐거운 사라》를 출간하면서, 외설논쟁에 휘말리게 되었다.


《즐거운 사라》의 내용 중 여대생이 자신의 대학 교수와 관계를 갖는다는 것이 문제가 되어 보수적 언론과 문인들,

대학 교수들의 반발을 초래했고, 대학교수들 중에는 마광수가 현직 대학 교수의 신분으로 쓴 책이라 하여, 대학교수의 자질 여부를 문제삼기도 했다.


 이문열은 신문 사설에서 그의 작품을 ‘구역질을 동반한다,

보잘것없다’며 노골적으로 비판하기도 했다.

소수의 진보주의, 자유주의적 문인만이 마광수를 옹호하는 가운데, 1992년 10월 29일 《즐거운 사라》 가 음란물로

분류되어 음란물 제작 및 배포 혐의로 전격 구속되었다.


검찰은 작가의 표현의 자유도 인정해야 하나, 사회적인 통념에 어긋나고, 특히 청소년 독자들에게 모방심을 부추겨

 정서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판단하였다.

 뿐만 아니라 이전에도 경고 조치를 취하고, 각종 제재를 가했음에도 불구하고 자발적인 정화의 여지가 없는 것은 물론 오히려 더 노골적으로 선전했기 때문에 마 교수를 구속했다고 밝혔다.


그는 법학자 출신의 국무총리 현승종이 그를 잡아 넣으라는 특별지시하여 영장도 없이 강의실에 체포되었다고 알고

있다고 밝혔다.

그가 구속되자 사람들은 내용에 대한 호기심 때문에 이 책을 사기 위해 노력하였고, 결국 《즐거운 사라》는 매진되기까지 하였다


 마교수를 구속한데에 대하여 성균관, 유도회(儒道會) 등의 유림 6개 단체[8] 와 작가 이문열, 10개의 종교단체는

마광수 교수를 구속한 검찰의 조치를 환영하였다

 반면, 마광수 교수를 옹호하는 쪽에서는 고은, 김병익, 유안진등을 비롯한 문인 200~300여 명이 문학작품의 표현의

 자유 침해와 출판탄압에 대한 문학·출판인 공동성명서를 발표하고, 시위를 벌였다.


11월 2일에는 문인들과 연세대학생 50명이 서초동 서울지검 앞에서 마교수의 구속을 규탄하는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그러나 6공화국 정권은 이를 용공으로 몰아 진압해버렸다.

 마광수는 항소하였고 이때마다 기각되었다.

이유 없이 그렇게 썼겠어요. 문학의 품위주의, 양반주의, 훈민주의 이런 것들에 대한 반발이지. 우리나라에서는 아무리 야한 소설을 쓴다고 해도 어법이나 전체적 틀은 경건주의를 유지하려 애를 쓰고 꼭 결론에 가서 권선징악적으로 맺는다거나 반성을 한다거나 그런 식으로 글을 맺잖아요.
 저는 그런 것에 대한 반발로 사라를 부각시키려고 했어요. 우리나라 소설에 사라 같은 여자 있나요. 다 자살하거나 반성하거나 그러지.

- 언론과의 인터뷰 중에서



재판 과정에서 문학 탄압, 정부와 검찰에 의한 예술의 자유, 표현의 자유 침해라는 문학계와 문화 언론계의 불평 불만이 터져나오기도 했다.

1992년 10월부터는 군사정권에서 그의 구속을 사주했다는 의혹이 터져나오기도 했다.

1992년 12월 28일에는 서울형사지방법원에서 징역 8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고 석방되었다


.





마광수 교수.




문학계와 충돌

마광수는 이문열의 성공을 비판하기도 했다.

그는 1990년 1월에 언론에 발표한 글에서 이문열의 상업적 성공의 근본적 원인을 ‘대한민국 독자들의 교양주의 선호

현상’에서 찾아볼 수 있다고 말했다.

한편 그는 제5공화국 전두환 정권의 교육정책 중의 대학교 학생수 정원을 무조건 늘린 것을 비판하기도 했다.


특히 1980년대 초부터 문교부에서 대학교의 정원을 대폭 늘임에 따라 대학생 숫자가 엄청나게 불어났다. 그래서 그들은 고등학교 때 미처 못 배웠던 여러 가지 교양적 지식들에 대하여 게걸스럽게 탐식하는 쪽으로 나아갔는데, 아무래도 딱딱한 이론서적 보다는 소설을 통해 교양을 습득하는 것이 더 재미있기 때문에 교양주의 소설이 많이 읽히지 않았나 싶다. 이문열 뿐이 아니라 대한민국의 많은 작가들이 본능적 표출 욕구에서 보다는 교사적 지식인의 사명가므로 교양주의 소설을 많이 생산해 내고 있다.


전두환 정권의 무조건 대학교 정원 늘리기가 수준 낮은 대학생들을 대량 생산해낼 수 있다는 경고였다.

이때에도 마광수는 현직 교수의 신분으로 교육 정책을 정면 비판했고, 이는 학계와 지식인들 사이에서도 논란거리가

 되었다.


이에 이문열은 마광수에 대해 "교육적인 효과는 포기한 듯함에도 불구하고 대학교수라는 신분을 애써 유지하려는 점"이 못마땅하다고 비판하였다.

논란은 확대되었고, 후에 강준만은 이것이 이들 두 사람의 교육자 관의 불화였다고 해석했다.


마광수의 비판은 곧 '문학의 교양주의'를 극복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한편 노태우 대통령1988년의 신년사에서 대통령과 정부를 예술 작품의 소재로 활용해도 된다는 언명을 하였으나

정부와 통치자에 대한 비판이 조심스러웠던 1990년대 초에 정부 당국(제5공화국)의 정책을 비판하면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


그는 문학의 비현실성과  국민계몽성 등을 비판하였고 현실에 맞지 않는 이상주의적인 문학관을 비판하기도 했다.

이문열 비판 이후 권위주의, 도덕주의, 엄숙주의, 국민 계몽주의적 문학, 위선 등에 대한 비판을 발표하면서 보수적

문학가들의 비판을 받기도 했다.


작품 즐거운 사라에서 대학교수가 여대생과 벌이는 환락과 향락의 향연은 사회적으로 충격을 주기도 했다.

이는 정비석의 자유부인 사건과 1960, 1970년대 한국 건설근로자 파견 후 파견근로자 부인들의 카바레, 스탠드바 등


출입, 1980년대의 자유부인, 애마부인, 젖소부인 바람났네 사건 이후 꾸준히 불거져 나왔던 것임에도 불구하고 처음

대하는 것처럼 날이 선 공격을 받게 됐다.

특히 작품 즐거운 사라에 등장하는 인물이 대학교수라는 점에서 다른 대학교수들의 불만을 몰고 왔다.


1993년 12월 서울대학교 교수 손봉호는 "마광수 씨는 교수라는 칭호 없이 마광수 씨로 불려야 된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강준만은 "성 표현에 대해선 “다른 의견에 귀 기울이는 아량”이 필요없다는 것인가? 손 교수가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것으로 보이는 <조선일보>에 대해서만 그런 `아량'이 필요하다는 것인지, 또 조선일보가 과연 그런 `아량'

이 있는 신문이라고 생각하는지, 분명하게 밝혀주시기 바란다.[18]"고 반박하기도 했다.


대학교수 이태동은 “즐거운 사라에 나오는 여대생과 그를 가르치는 교수 사이에 문란하고 변태적인 성 관계가 성실한 노력의 상징인 학점의 흥정 대상이 된다는 것은 커다란 사회적인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라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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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속 사태 이후

1993년 초부터 표현의 자유와 예술의 자유를 주장하는 문학계와 문화연예계의 비판과 함께 ‘마광수 교수 복직 서명’과 ‘복권운동’이 꾸준히 꾸준히 전개되었다.

군사정권의 몰락과 문민정부 출범 이후 마광수 복권 여론은 점점 고개를 들게 되었다.


문화일보 1993년 11월 26일자 기사는 검찰 관계자가 밝힌 내용을 근거로 마광수의 구속 배경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밝혔다.

최근 연세대 교수와 학생들 사이에 마 교수의 복직운동이 일고 있는 가운데 지난해 10월 검찰이 마 교수를 사법처리 하게 된 배경이 밝혀져 관심을 끌고 있다. 당시 중립내각의 현승종 국무총리는 평소 원로교수들 사이에서 평판이 극히 나쁜 마 교수의 사법처리를 법무부장관에게 간접적으로 암시, 구속사건으로 확대된 것으로 알려졌다.

정부에서 법무부검찰에 압력을 넣어 마광수의 사법처리를 지시했다는 의혹이 제기되던 중, 보수적 법학자 출신이며 군사정권국무총리였던 현승종 등이 비밀리에 법무부검찰에 그의 구속을 암시했다는 것이 기사로 보도되면서

그의 구속에 대해 정치적 탄압 의혹은 계속되었다.


 그는 항소했고 1995년 6월 16일 대법원은 마광수의 상고심을 기각하고 원심을 확정지었다[21][22]. 1995년 8월 8일

 연세대학교는 마광수 교수를 면직조치하였다.

이후 1998년 다시 교수직에 복직하였다.

그러나 그는 한동안 우울증을 앓기도 했다.













2000년대 이후

2000년 6월 연세대학교 교수 재임용 심사에서 논문 실적 등의 문제로 탈락하였고, 이 과정에서 국문학과 동료교수들의 집단따돌림으로 재임용이 거부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학생들의 거센 반발로 연세대학교 당국은 임용탈락을 보류하였으나, 마광수는 극심한 배신감으로 인한 외상성(外傷性) 우울증으로 정신과 병원에 입원하게 되어 학교에 휴직계를 제출한다. 2


002년 다시 복직되었다.

한 학기 동안 연세대학교로 복직하여 강의하던 중, 우울증이 악화하여 학기 말에 다시 휴직하였고, 2004년 건강을

회복하고 연세대학교에 복직, 강의와 강연활동을 하였다.


2000년대 중반에 다시 마광수의 구속이 정치적 탄압이라는 주장이 다시 제기되기도 했다.

2006년 강준만은 그자신의저서 한국현대사산책:1990년대 편 1권에서 대학교수 출신 현승종 국무총리가 법무부장관과 검찰 쪽에 마광수의 사법처리를 암시했다는 것이다.


1990년대 후반 이후, 보수주의 언론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마광수의 작품은 음란하지 않았다는 평가도 나타나고 있다. 한편 시대를 앞서간 작가라는 시각도 있다.

 이후 2003년 공식 변론서격인 책 《마광수 살리기》가 출간되었다.


그러나 대한민국 검찰은 2006년 11월 24일 개인 홈페이지에 음란물을 게시한 혐의(정보통신망 이용촉진 및 정보보호 등에 관한 법률 위반)로 마광수를 불구속 입건시켰다.

 이때 그를 구속시켜야 된다는 언론들의 대응에, 문화예술계에서는 표현의 자유, 예술의 자유 탄압이라고 반발하였다.


2006년 발표한 다섯 번째 시집 《야하디 얄라숑》에 실린 〈말(言)에 대하여〉와 〈바이올린〉이 각각 제자와 지인의 작품을 자신의 작품인 것처럼 발표한 의혹이 제기되었고, 실제로 마광수의 잘못임이 드러나 시집을 전량 회수하는

사태가 벌어진 적도 있다.


2009년 연세대학교의 '연극의 이해'와 '문학과 성'이라는 교양 수업을 맡고 있다.

전공 수업은 맡고 있지 않다. 기타 여러 강연에 연사로 초빙되기도 했다.

또한 tvN의 토크쇼 <백지연의 피플 Inside>에 출연하였다.


마 교수는 한국 사회와, 젊은 작가들, 연세대 교수들, 자신을 구속시킨 검사들과 자신을 재판한 판사들에 대해 불만을 토로하기도 했다

2010년 4월에는 마광수의 에세이 《나는 야한여자가 좋다》(원본-1989, 개정판 2010)가 연극으로 각색되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이 연극에는 이파니가 ‘사라’ 역할로 출연한다.

제목과는 달리 《즐거운 사라》의 주인공인 여대생 ‘사라’가 주인공으로 나오며, 원작자인 마광수가 ‘마교수’라는

캐릭터의 모티브가 되기도 했다

2017년 9월 5일 1시쯤에 시신이 발견돼 2017년 9월 5일 별세했다 .







문학관


현 사회의 지배적이고 유용한 가치가 정말 옳은 것인지를 질문하는 것이 바로 작가의 책임이라고 규정하였으며,

 “기성도덕과 가치관을 (맹목적으로) 추종하며 스스로 ‘점잖은 교사’를 가장하는 것은 작가로써 가장 자질이 나쁜 자들이나 하는 짓이다.”라고 주장했다.


그는 또한 “문학은 무식한 백성들을 가르치고 훈도하여 순치시키는 도덕교과서가 되어서는 절대로 안된다.

문학이 근엄하고 결백한 교사의 역할, 또는 사상가의 역할까지 짊어져야 된다면 이는 문학적 상상력과 표현의 자율성은 질식되고 만다.

 문학의 참된 목적은 지배 이데올로기로부터의 탈출이요, 창조적 일탈인 것이다.”라고 보았다.








고(故) 마광수 전 연세대 국문과 교수


고(故) 마광수 전 연세대 국문과 교수




논란

사회비판 의식

그는 지식인의 위선을 공격하였으며, 맹목적인 체제 옹호성 어용 문인들을 비판, 풍자하기도 했다.

 또한 문학의 지나친 엄숙주의에 대해서는 “대한민국의 지식인들은 가벼움을 경박함으로 그릇된 인식을 하는 경우가

 많고, 설사 경박하다고 해도 그것이 의도된 경박성이라는 것을 아는 이가 드물다.”


“소설 문장에서 사용되는 단어가 일성어 또는 비속어일 경우 흔히들 그런 인상을 받는 것 같다.”며 한국문학의 위선성과 지나친 엄숙주의를 질타하기도 했다.

한국 문학에 대한 비판 의식

마광수는 조선조식 양반 문학, 그리고 이념과 교훈으로 포장된 위선의 문학에 도전하고자 하는 의욕을 불태워 왔다.

성역 없는 비판을 감행했다.

당연히 그는 민중문학에 대해서도 마땅치 않게 생각했다.


그는 입으로만 구호를 외치고 현장에 투신하지 않는 일부 대학생들과 대학원생들에 대해서도 비판하였다.

그러나 그의 내부성찰론, 자성론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전북대학교 신문방송학교수 강준만은 이를 놓고 “대하소설 가운데 만인이 칭찬해마지 않는 유명 문인들의 대하소설도 포함되어 있지 않는가” 하며, ‘꼭 필요한 대하소설도 있지만’이라는 단어 하나만 달아줘도 좋을 터인데 그는 그런

수고를 할 뜻이 없었다며 아쉬워했다.


교육자와 학생의 관계

그는 한국의 교단이 학생에게 권위적인 것도 비판하였다. 그에 의하면 교육자가 학생을 아랫사람처럼 대하는 것도 문제점으로 지적하였다.

강준만에 의하면 그는 평소 “교수님들, 학생은 아랫사람이 아닙니다.”라고 주장하는 교수였다.


이후 대학교 교수와 학교의 교사들이 학생들을 비인격적, 권위적으로 대하는 풍토에 대한 논란이 지속되었고, 학생들의 인권에 대한 사회적 관심도도 증가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옵서버 지 5월 1991호에 같은 제목의 칼럼을 올리기도 했다






          

5일 자택에서 숨진 채 발견된 마광수 교수는 지난해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즐거운 사라' 필화 사건을 두고 "너무 두들겨 맞은 게 억울하다.

한국이라는 나라였기 때문에 그런 일이 벌어졌던 것 같다"고 심경을 밝혔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평가

한편 마광수의 구속은 언론과 문학계 사이에서 정치적 탄압이라는 의혹이 제기되었으나 곧 묻히고 말았다.

마광수가 구속되었을 때 어떤 신문의 사회부 기자는 마광수의 공판을 참관한 뒤에 오렌지 교수의 항변이라는 상자기사를 쓰면서, 마광수를 향해 오렌지족의 대부 라는 표현을 쓰는 것으로 그를 사회적으로 지탄받고 있는 오렌지족과

연결시켰다. 그러자 소설가 겸 작가 장정일은 이를 저열한 장난이라고 했다.


1993년 초부터 표현의 자유와 예술의 자유를 주장하는 문학계와 문화연예계의 성토와 함께 마광수 교수의 복직운동이 일어나기도 했다.

강준만은 ‘마광수의 죄는 시대를 앞서간 죄였다.‘ 라고 평가하였다.


 마광수는 항소심이 진행 중일 때 한 여성지와의 인터뷰에서 “내 작품이 시대를 5년 정도 앞서갔다고 봐요.

그래서 두들겨 맞는 거지요.”라고 말했다. 강준만은 같은 이유로 소설가 장정일이 1997년 똑같은 봉변을 당한 걸로

 보아선 그가 앞서간 게 5년은 더 될 성 싶었다고 평하였다.


995년 6월 16일 대법원은 마광수의 상고심을 기각하고 원심을 확정지었다.

 95년 8월 8일 연세대학교는 마광수 교수를 면직조치했는데, 강준만은 이를 놓고 이런 마광수 탄압은 ‘아무리 선의로

해석해도 그건 불행한 소식을 전한 어느 메신저의 목을 벤 어느 왕의 부질없는 분노와 다를바 없는 것이었다.’라고

하였다.

한편 이문열은 그를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강준만은 마광수 사건이 한국의 문인들과 대학교수들이 만들어준 사건이며 그 점에서 한국은 세계의 민주국가 중 권력의 권위주의 시대 이전에 지식인의 권위주의가 더 심각한 유일한 국가가 되게 했다고 개탄하였다.









외신의 평가

1992년, 1993년 당시 마광수 구속의 파문은 일본, 미국에도 보도되었다.

 미국과 일본에서는 한국이 작품의 예술성을 체제가 탄압한다고 비판적 시각이 나오기도 했다.


『인터내셔널 헤럴드 트리뷴』 지의 한 기자는 1993년 4월 2일자 〈한국의 외로운 에로티카 장인〉이라는 제목의

인터뷰 기사에서 “마광수 교수의 [15][36] 구속 사건은 한국이라는 나라를 1990년대 민주국가 중 유례없이 허구적

문학작품을 이유로 작가를 감옥에 가두고 작가의 발을 묶는 유일한 국가가 되게 했다.”고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