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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과 시사

역사속으로 사라진 '풍운의 정치인' 김종필 전 국무총리가 걸어온 길

 







김종필 전 국무총리. 사진=이수길 기자.



▲ 김종필 전 국무총리. ⓒ데일리안



김종필 전 국무총리 별세,


한국 정치사의 거목인 김종필 전 국무총리가 노환으로 23일 오전 별세했다. 향년 92세.
고인이 한국 현대사에서 고 김영삼, 김대중 전 대통령과 열었던 3김 시대가 종언을 고했다.
김종필 전 국무총리의 빈소는 현대아산병원에 마련될 예정이다.

23일 연합뉴스에 따르면 김종필 전 국무총리는 이날 오전 순천향병원에서 별세했다.
김 전 국무총리의 가족들은 이날 오전 119를 통해 김 전 총리를 자택에서 순청향병원으로 옮겼다.
 병원 측이 심폐소생술을 진행했지만 별세한 것으로 전해진다.

김종필 전 국무총리는 고 김영삼, 김대중 전 대통령과 함께 ‘3김’으로 불리는 한국 정치사 거목이다.
지난 1926년 충남 부여에서 태어난 김 전 총리는 공주중학교와 서울대 삽점대,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했다. 
김 전 총리는 1961년 처삼촌인 박정희 전 대통령의 5·16 쿠데타에 가담하면서 현대 정치사의 전면에 등장했으며,
 같은 해 중앙정보부를 창설해 초대부장에 취임한 것을 시작으로 줄곧 영원한 '제2인자의 길'을 걸어왔다.

지난 1963년 공화당 창당을 주도하고 그해 치러진 6대 총선에서 당선된 뒤 7·8·9·10·13·14·15·16대를 거치며 9선
국회의원을 지냈다.
김 전 총리의 서거로 1960년대부터 우리 정치권을 풍미해 온 '3김 시대'는 실질적 종언을 고하게 됐다.
유족으로는 아들 진씨, 딸 복리씨 1남1녀가 있다. 빈소는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에 차려질 예정이다.



이어진 기자
lej@




▲지난 4월 서울 신당동 자택에서 김종필 전 총리. 연합뉴스



▲지난 4월 서울 신당동 자택에서 김종필 전 총리. 연합뉴스






역사속으로 사라진 '풍운의 정치인' 김종필 전 국무총리가 걸어온 길





1926년 충남 부여에서 태어난 김 전 총리는 공주중·고등학교와 서울대 사범대,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했다. 

1961년 처삼촌인 박정희 전 대통령의 5ㆍ16 쿠데타에 가담하면서 정치계에 등장, 1963년에는 공화당 창당을 주도, 6대 총선에서 당선됐다. 




▲1973년 박정희 대통령컵 아시아 축구대회 선수입장식에서 박수를 보내는 박정희 대통령과 김종필 전 총리. 연합뉴스


▲1973년 박정희 대통령컵 아시아 축구대회 선수입장식에서 박수를 보내는 박정희
대통령과 김종필 전 총리. 연합뉴스




공화당 창당과정에서 증권파동을 비롯한 이른바 ‘4대 의혹사건’에 휘말리며 63년 2월 ‘자의반 타의반’ 첫 외유를 떠난 데 이어 대일 청구권 문제와 관련된 ‘김종필ㆍ오히라 메모’ 파동으로 6ㆍ3사태가 일어나자 1964년 또다시 2차 외유길에 올랐다. 


이후 민주공화당 부총재를 거쳐 1971년부터 1975년까지 제11대 국무총리를 지냈으며, 결과적으로 7·8·9·10·13·14·15·

16대를 거치며 9선 국회의원을 지냈다.

역대 최다다.

아울러 자유민주연합(자민련) 총재를 지냈고, 김대중 정부 시절 두 번째 국무총리를 지냈다.





▲1988년 서울 수유리 아카데미하우스에서 만난 3김. 왼쪽부터 당시 김종필 공화당 총재, 김영삼 민주당 총재, 김대중 평민당 총재. 연합뉴스


▲1988년 서울 수유리 아카데미하우스에서 만난 3김. 왼쪽부터 당시 김종필 공화당 총재, 김영삼 민주당 총재, 김대중 평민당 총재. 연합뉴스





김 전 총리는 고(故) 김대중·김영삼 전 대통령과 함께  '3김(金) 시대'를 이끌며, '풍운의 정치인'으로도 불리기도 했다. 

하지만, 김 전 총리는 김영삼, 김대중 전 대통령과 달리 대권의 꿈을 이루지 못했다.

1992년 대선에서는 3당 합당과 함께 김영삼 당시 대선 후보를 지원, 1997년 대선에선 자신이 창당한 자유민주연합 후보로 다시 대권에 도전했으나선거 막바지 ‘DJP(김대중·김종필) 연합’을 주도하며 김대중 당시 후보를 지지했다. 




▲김종필 전 총리가 2007년 청구동 자택을 방문한 당시 이명박 한나라당 대선후보와 대화를 하던 모습.  연합뉴스



▲김종필 전 총리가 2007년 청구동 자택을 방문한 당시 이명박 한나라당 대선후보와 대화를
 하던 모습. 

 연합뉴스




2004년 17대 총선에서 자민련 참패의 책임을 지고 은퇴를 선언, 영원한 2인자라는 별칭을 얻기도 했다. 














대화하는 김종필 (서울=연합뉴스) 한상균 기자 =

18일 오전 김종필 전 총리가 신당동 자택에서 자유한국당 이인제 충남지사

후보를 만나고 있다.


2018.4.18 xyz@yna.co.kr 




'어록'에선 1인자 JP.."대통령의 그림자도 밟지 않는다"

자의반 타의반"·"제2의 이완용이 되더라도"·"정치는 허업"
다양한 비유로 변화무쌍한 현실 설명하며 자신의 선택 합리화




(서울=연합뉴스) 김연정 이슬기 기자 = 향년 92세를 일기로 23일 타계한 김종필 전 국무총리는 오랜 정치경험에서
우러나오는 감칠맛 나는 표현들을 적절히 구사하는 탁월한 능력을 지닌 인물이었다.
자연스레 능변가라는 수식어가 뒤따랐다.         

김 전 총리는 정치판에서 온갖 산전수전을 겪으면서도 풍부한 은유와 비유, 고사성어를 이용한 간접화법을 이용해 정치상황이나 자신의 심정을 함축적으로 표현하는 '촌철살인'에 능했다.


다음은 생전에 고인이 남긴 주요 어록.


▲ 제2의 이완용이 되더라도 한일 국교를 정상화시키겠다(1963년. 일본과의 비밀협상이 국민적 반발에 직면하자)

▲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떠납니다(1963.2.25. 4대 의혹 사건과 관련한 외유에 나서면서)

▲ 파국 직전의 조국을 구하고 조국 근대화를 이루기 위해 5·16 혁명과 1963년 공화당 창당이라는 역사적 전기가 마련됐다(1987년 저서 '새 역사의 고동')


▲ 5·16이 형님이고 5·17이 아우라고 한다면 나는 고약한 아우를 둔 셈이다(1987.11.3. 관훈토론회)

▲ 나는 대통령의 그림자도 밟지 않는다(노태우 정부 시절에 한 말)

▲ 역사는 기승전결로 이루어진다. 5·16은 역사 발전의 토양이다. 박정희 대통령은 역사를 일으킨 사람이며 전두환,

 노태우 대통령은 그 계승자이고, 김영삼 대통령의 변화와 개혁은 그 전환에 해당된다(1993.5.16. 5·16 민족상 시상식)


▲ 있는 복이나 빼앗아가지 마시라(1995.1.1. 민자당 대표시절 민주계의 대표퇴진론을 거론하는 세배객이 '새해

복 많이 받으시라' 덕담하자)

▲ 경상도 사람들이 충청도를 핫바지라고 부르는데 이것은 아무렇게나 취급해도 아무말 없는 사람, 소견이나 오기조차도 없는 사람들이라는 의미다(1995.6.13. 지방선거 천안역 지원유세)


▲ 역사는 끄집어 낼 수도, 자빠트릴 수도, 다시 세울 수도 없는 것이다.

 역사는 그냥 거기서 배우는 것이다(1996년 김영삼 대통령의 역사 바로세우기에 대해)

▲ 요즘 세대교체를 자꾸 말하는데 이스라엘의 골다 메이어 총리는 74세에 총리가 돼 4차 중동전을 승리로 이끌었다

(1996.5.18. 대구 신명여고 강연)


▲ 줄탁동기(1997년 자신의 대선 후원조직인 민족중흥회 회보에 사용한 신년휘호로 중국 송나라 선종의 대표적 전적인 벽암록에 나오는 글귀. 병아리가 건강하게 부화하고자 알 속에서 두드려 나갈 때가 됐음을 알리고 어미닭도 이때를

 놓치지 않고 밖에서 알을 쪼아 껍데기를 깨줘야 하는 것처럼 모든 일은 시기가 적절히 맞아야 한다는 뜻으로 당시

대선 정국에서 적절한 시기의 결단이 필요함을 간접적으로 나타냈다는 해석이 나옴)


▲ 내가 제일 보기 싫은 것은 타다 남은 장작이다. 나는 완전히 연소해 재가 되고 싶다(1997.5.29. 자민련 중앙위원회

운영위)

▲ 이인제 후보가 우리를 늙었다고 하는데 나와 함께 씨름 한 번 했으면 좋겠다.

내가 결코 이 후보에게 뒤지지 않을 것이다. 나는 아직도 젊다(1997.12.3. 충북 괴산 정당연설회에서)


▲ 서리는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슬금슬금 녹아 없어지는 것이다(1998.6.27. 총리 서리 당시 '서리' 꼬리가 언제 덜어질 것 같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 시인 프로스트가 '잠들기 전 가야 할 몇 마일이 있다'고 한 것처럼 저도 앞으로 가야 할 몇 마일을 위해 발걸음을

 재촉하겠다(1998.10.16. 동의대 명예박사학위 수여식 특강)


▲ 대통령중심제 하에서 총리의 위치라는 게, 아무리 공동정권이라지만 '델리키트'하다(1998.10.25. 총리가 안다고

앞장서거나 무리하게 밀어붙이는 행동은 바람직하지 않다며)

▲ 봉분 같은 것은 필요 없고 '국무총리를 지냈고 조국 근대화에 힘썼다'고 쓴 비석 하나면 족하다(1998.11.18. MBC

시사매거진 인터뷰)


▲ 미리 왕성한 상상력과 편협한 시각을 가지고 스스로의 행보를 좁히거나 의지를 약화시키는 일을 자초해서는 안 된다. 때를 맞춰야 하고 그러고도 안 될 때 몽니를 부리는 것이다(1998.12.15. 김대중 대통령의 내각제 약속 불이행 우려 관련 자민련 중앙위원회 연수에서)


▲ 백날을 물어봐, 내가 대답하나(2000.5.2. 일주일만에 당사에 출근하면서 김대중 대통령과의 회동 가능성을 묻는

 질문에)


▲ 나이 70이 넘은 사람이 저물어 가는 사람이지 떠오르는 사람이냐. 다만 마무리할 때 서쪽 하늘이 황혼으로 벌겋게

물들어갔으면 하는 과욕이 남았을 뿐이다(2001.1.9. 민주당 이인제 최고위원이 4·13 총선 때 자신을 '서산에 지는 해'

로 표현한 것을 두고)

▲ 노병은 죽진 않지만 조용히 사라지는 것이다. 43년간 정계에 몸담으면서 나름대로 재가 됐다(2004.4.19 정계은퇴를 선언하며)


▲ 박정희 전 대통령을 깎아내리려는 못된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당신들이 오늘날 사람답게 사는 것은 박 대통령이 기반을 굳건히 다져 그 위에서 마음대로 떠들고 춤추고 있는 것이라고(2005.10.28. 박정희 전 대통령 26주기 추도식)

▲ 정치는 허업(虛業)이다. 기업인은 노력한 만큼 과실이 생기지만 정치는 과실이 생기면 국민에게 드리는 것"

(2011.1.6 안상수 당시 한나라당 대표에게)


▲ 민주주의와 자유도 그것을 지탱할 수 있는 경제력이 없으면 있을 수 없다. 배고픈데 무슨 민주주의가 있고 자유가

있나.(2013.12.10 운정회 창립총회에서)

▲ 국민에게 나눠주는 게 정치인의 희생정신이다. 정치인이 열매를 따먹겠다고 그러면 교도소밖에 갈 일이 없다.(

2015.2.23 부인 박영옥 여사의 장례 사흘째 빈소에서 조문객과 만나)


▲ 미운사람 죽는 걸 확인하고 죽을 때까지 아프지 않고 편안하게 있다가 편안히 숨 거두는 사람이 승자다. 대통령하면 뭐하나. 다 거품같은거지. (2015.2.23 부인 박영옥 여사의 장례 사흘째 빈소에서 조문객과 만나)

▲ 애석하기 짝이 없어. 신념의 지도자로서 국민 가슴에 영원히 기억될 분이야.(2015.11. 김영삼 전 대통령의 빈소를

찾아)


▲ (박근혜 대통령은) 하야 죽어도 안 한다. 누가 뭐라도 해도 소용 없다. 5천만 국민이 달려들어서 내려오라고 해도

 거기 앉아 있을 것이다.


(2016.11. 시사저널과의 인터뷰에서 '최순실 사태'와 관련해 박근혜 대통령을 언급하며)











김종필



김영삼, 김대중과 함께 3김으로 불리는 인물이며 이들의 정치 시대를 삼김시대라고 부른다.

 3김 중 유일하게 대통령에 오르지 못했던 인물이지만, 박정희 정권부터 김대중 정권까지 장기간 정권의 핵심에 있기도 했으며, 김영삼 및 박준규 등과 함께 최다선 국회의원(9선)의 기록을 가진 인물이다.[


 그래서 1990년도 말에서 2000년 초만 해도 "3김이 그 사람 빼고는 다 대통령 했는데 이제 그 사람 차례 아니겠는감?"

이라고 나이드신 어른들이 말하면 비교적 나이가 어린 중년이나 젊은 층에서 "전혀 그렇게 생각 안하는데요?"라고

 반박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다만, 당시에도 이러한 김종필 대망론에 회의적이었던 이들은 김종필 대망론 자체가 실제의 정치적 상황을 기반으로

 제기된 것이 아니라 삼김시대 라는 조어에 의한 착시현상을 통해 나타난 것에 불과하다고 비판하기도 하였다.

삼김시대라는 표현 못지 않게 양김시대라는 표현이 널리 사용된 것에서도 알 수 있는 것처럼 애초에 김종필 자체가

김대중이나 김영삼과 동등한 지지기반이나 영향력을 가진 대선 수권후보였던 적이 없다는 것.


실제로 3김과 노태우가 대격돌하여 전체 표의 99.8%를 나눠가졌던 제13대 대통령 선거를 보더라도 김종필은 득표율

 8.1%로 득표율 0.2%의 사실상 거품후보였던 신정일 후보를 제외하면 꼴찌나 다름없는 4위를 기록했고, 이는 각각

 28%. 27%로 2위와 3위를 기록한 김영삼, 김대중 후보의 1/3 수준에 불과했다.


더구나 양 김의 경우 민주화 운동 지도자라는 공통점에 기반하여 단일화를 거쳐 지지기반을 통합할 경우 안정적인 1위도 가능할 수 있다는 기대를 받았던 데 비해, 김종필에게는 그런 가능성조차 없었다.


김종필 자신도 이런 현실을 인식하여 13대 대선 이후부터는 직접적인 대선 도전을 포기하고 캐스팅보터로써 입지를

다지는 데 매진하였으나 결국 자민련(과 그 후계격인 정당들)이 사실상 몰락하여 거대 양당에 흡수되고 말았다는 점

까지 생각해야 한다.


즉, 세 명의 대권 수권후보를 묶어 3김이라고 부른 것이 아니라, 수권후보였던 양김과 수권후보는 못 되지만 캐스팅

보터의 역할을 하던 김종필을 묶어 3김이라고 부르다 보니 같이 묶여 불리는 김종필까지도 나머지 둘과 같은 주요 수권 후보라는 착시가 일어났다는 것이다.

 사실 당연하다면 당연하지만 김종필은 박정희 집권 시기 2인자였다.


그렇기 때문에 60년대만 해도 김영삼, 김대중보다 인지도가 훨씬 있는 편이었고, 70년대 국무총리 사임 이후 존재감이 많이 희석되었다 하더라도 여전히 박정희의 잠재적 후계자, 잠재적 라이벌로 보일 정도로 영향력은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10.26 이후 박정희의 뒤를 이어 민주공화당 총재로 올랐고, 10대 대선에 출마 이야기가 나올 정도였다.


그렇지만 여당도 아닌 야당도 아닌 상황에서 민주화 운동을 치열하게 해온 김영삼, 김대중이 5.17 이전까지 왕성하게

 활동하면서 삼김시대가 확실하게 형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5공화국 시절에 김영삼, 김대중 양 김은 여전히 치열하게 민주화 운동을 하며 국민들의 지지를 이끌어낸 반면

 김종필은 미국에 있으며 어쩌면 자신의 이미지를 바꿀 수 있었을 지 모르는 민주화 참여를 거부하면서 완전히 삼김이긴 하나 레벨 떨어지는 급으로 인식될 수 밖에 없었다.


박정희와는 정말 친했고 군 복무도 같이 했으며 심지어는 박정희의 형인 박상희의 장녀 박영옥과 결혼했다

그리고 상당한 애처가였고 아내가 사망하자 정말 크게 슬퍼했다.

이회창의 선배격인 인물로 대통령 빼고 다해본 사람이라는 매우 적절한 별명을 갖고 있다.

 콩라인의 원조인데, 진짜 정치계의 콩라인이라 불릴만한 2인자 속성의 캐릭터. 다만 이회창과의 관계는 냉랭했던 편.


'몽니' 등의 낯선 단어를 구사하는 등, 순우리말과 고사성어를 막론하고 어휘 구사력이 풍부한 정치인이기도 했다.

상술한 '자의 반 타의 반'도 그렇고, '유구무언'이란 사자성어도 유행시킨 장본인.

고령임에도 17대 총선 출마를 감행할 땐 "해는 저물면서도 서쪽 하늘을 붉게 물들인다"는 말도 남겼다.


일본어에도 능하여 일어로 연설이나 인터뷰를 소화한 적도 많았다.

 한 예로 한일 수교 40주년을 맞아 2005년에 일본 NHK에서 제작한 한일협약에 대한 다큐멘터리출연일본어

인터뷰한 사례가 있다.


 수준급의 수채화 실력, 아코디언, 골프, 피아노, 바둑 등 예술적 소양이 대단히 풍부한 정치인으로도 꼽힌다.

한마디로 예인(藝人).


예인(藝人)이라는 별칭처럼 그림, 글씨, 음악, 문학 같은 예술 분야에 관심과 조예가 깊었다.

 7.4 남북 공동 성명 당시 이북을 방문한 사람들이 북한에서 우리 것의 묘미를 잘 살린 창극을 공연하더라는 증언을

 접하고는, 배비장전같은 해학 넘치는 판소리를 현대화하여 공연할 수 있도록 후원한 것을 위시해, 시민회관에서 좋은 공연이 이뤄질 수 있도록 지원해주기도 하였다.


 이 외에 전쟁사의 극적인 장면을 그린다는 명분으로, 국내의 이름있는 화가들에게 수입해온 양질의 화구들을 지원

하기도 했다는 후문.


한학에 조예가 있었으며, 심계도 깊은 김종필이었기 때문에, 취재하는 기자들이 JP의 말을 나름 유추했다가 낭패를

 보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고 한다.

말을 운치있게 하면서도, 그 안에 담긴 의미가 여러가지로 해석될 여지가 있었기 때문. 또한 김종필의 멋들어진 휘호

정치와 예술에 대한 일가견 있는 면모가 중국 언론이나 정가에서 줄곧 호의적인 시선으로 다뤄졌기 때문에, 중화권

외교에도 도움이 되었다는 후문.


아내와의 금슬이 매우 좋았다고 한다.

 실제로도 수많은 정치인들이 스캔들, 혼외자 등으로 논란을 빚을때 JP는 그런 소문이 전혀 없었다.

2015년 아내가 숨졌을 때, 거물급 정치인답게 오자와 이치로를 비롯, 한일 양국의 정치 거물들로 구성된 조문객들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숱한 유력 정치인의 배우자와 아들딸들이 각종 부정부패 사건이나 여러가지 구설수에 오르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김종필의 가족들은 이런 사례가 없다.

부인 박영옥도 평생 내조에만 힘썼으며, 딸 김예리, 외아들 김진 모두 사회적으로 드러날 만한 행적이 전무하다.


박영옥 장례식에 모습을 드러낸게 거의 유일한 사례.

일단 본인들이 언론 노출을 매우 꺼려하며, 특히 외아들 김진의 경우 1990년 미국 유학 도중 만난 과테말라계 미국인

리디아와 국제결혼을 하면서 더더욱 외부노출을 꺼리게 됬다고 알려져 있다.


이들 부부는 한국에서 결혼식을 하기 전 이미 미국에서 결혼을 올리고 같이 살고 있었는데 김종필이 아들의 결혼을

 반기지 않았다고 하며 이후 정치 재개 이후 바쁘다는 이유로 한동안 피해다니다가 결국 '자기들이 좋다는데

 어쩔꺼냐'면서 결혼을 허락해줬다고 한다.


2015년 4월에는 국정원이 정치에 개입하는 현상의 원인은 자체 수사권이 매우 강하기 때문이라고 주장하며, 자체 수사권을 검찰에 양도하고 대북정보 수집 등 정보기관 업무만 수행하도록 조직을 개편할 것을 제안했다.

 김종필 본인이 국정원의 전신인 중앙정보부의 창설자라는 것을 감안하면 아이러니.






김종필 전 총리 별세...3당 합당 발표 당시       





김영삼의 민주당, 김종필의 공화당, 박태준의 민정당 3당이 합당키로 결정한 후

1990년 1월 22일 노태우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합당 성명을 발표하고 있다. 왼쪽은

 김영삼 당시 민주당 총재, 오른쪽은 김종필 당시 공화당 총재.


 (한국사진기자협회 보도사진연감) 2019.6.23/뉴스1 









김종필 전 국무총리가 23일 향년 92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1960년 5·16을

일으키기 전 육군본부 정보국의 한 사무실에서 동료들과 회의하고 있는

김종필(사진왼쪽). (운정김종필기념사업회 김종필 화보집) 2


018.6.23/뉴스1










두 차례 국무총리를 지낸 정치가. 1926년 충청남도 부여에서 태어나 1947년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교육학과를 2년

수료했으며 1948년 육군사관학교(이하 육사)를 졸업했다.

육사 8기 졸업생인 그는 군에서 주로 정보관계 업무에 종사하다가 1958년 중령으로 육군본부 정보참모부 기획과장에

임명되었다.


1961년 박정희 장군이 주도한 5·16군사정변에 적극 가담했다.같은해 중앙정보부(지금의 국가정보원) 창설을 주도하고 1963년까지 중앙정보부 초대부장으로 재임했다.

 중앙정보부장 재임시 한일국교정상화를 위한 회담에 특사로 파견되어 '김·오히라[大平] 메모'라는 비정상적인 외교

방법을 통해 한·일회담의 결말을 짓기도 했다.


1963년 준장으로 예편하고 민주공화당(공화당) 창당준비위원장에 취임해 제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충청남도 부여

지역의 공화당 후보로 출마, 당선되고 공화당 의장에 취임했다.

 1967년 제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당선되었으나 극심한 부정·타락 선거라는 이유로 그 이듬해에 의원직을 사퇴했다.


1970년 공화당 총재 수석상임고문을 역임한 후 1971년 공화당이 겨우 과반수를 얻은 제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3선 의원(전국구·공화당)이 되었다.

제8대 국회는 초반부터 여야가 심하게 격돌하게 되었고, 또한 공화당 내의 김종필계와 4인체제 간의 갈등이 10·2항명

파동으로 표면화되자 공화당은 심각한 내부 분열 양상을 보였다.


이에 박정희 대통령은 4인체제의 세력을 누르고 강력한 친정체제를 구축했으며, 김종필은 1971년 5월말에 공화당

부총재 그리고 6월 국무총리에 임명되어 박정희 친정체제의 공고화에 핵심적 역할을 수행했다.

 유신체제하의 1973년 제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유정회(維政會) 국회의원으로 다시 국회에 진출했다.

 국무총리 재임기간중 초기 유신체제 유지에 커다란 역할을 담당했다.


1976년 한일의원연맹 한국측 회장에 취임했고, 1977년 한일친선협회 중앙회장을 맡았다.

1979년 제10대 국회의원 선거에 역시 공화당 후보로 당선되었다(부여·서천·보령). 그 해에 공화당 총재 수석상임고문을 지내다가 박정희 대통령의 사망 후 공화당 총재 및 의장을 맡아 공화당을 이끌었다.


 그 후 1979년 12·12사태와 1980년 5·17비상계엄 전국확대조치 이후에 정치활동이 정지당한 채 1987년까지 야인생활을 하며 지냈다.


1987년 6·29선언 이후 정치 흐름을 관망하던 중 9월 28일 정계복귀를 선언하고, 잇달아 10월 5일 신민주공화당 창당

발기인대회를 개최, 12월의 제13대 대통령 선거전에 나섰다.

10월 30일 구(舊) 공화당 시절의 각료·의원 출신을 중심으로 신민주공화당 중앙당 창당대회가 열렸고 김종필이 총재 및 대통령 후보에 추대되었다.


그러나 12월 제13대 대통령 선거 결과 충남에서 1위, 충북에서 3위를 했을 뿐 그밖의 지역에서는 거의 표를 얻지 못한 채 총 180만여 표를 획득하여 4위에 그쳤다.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그가 이끄는 신민주공화당은 총35석(전국구 8석 포함)을 차지하여 원내 제4당의 지위에 머물렀다.


김종필은 지지기반 약화라는 상황을 타개하고 정치 입지를 강화하기 위해 1990년 1월 당시 집권여당인 민주정의당,

제2야당인 통일민주당과의 3당합당을 통해 민주자유당(민자당) 창당에 참여하고 공화계의 대표로서 민자당 최고위원직을 맡았다.


1992년 3월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민자당 후보로 부여에서 출마, 당선되었으나 그를 추종하는 공화계가 지지기반이던 충남지역에서 대거 낙선함으로써 그의 정치 입지는 약화되었다.

1992년 5월 민자당의 대통령 후보 경선을 포기하고 김영삼의 후보추대위원회 명예위원장직을 수락했고, 5월 전당대회에서 민자당 최고위원으로 재추대되었다.


그러나 1992년 12월 제14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해 당선된 김영삼 대통령이 3당합당시의 약속을 저버리고 오히려

 자신을 출당할 움직임을 보이자 1995년 2월 민자당을 탈당해 3월 자유민주연합(자민련)을 창당하고 1996년 4월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 자민련 후보로 출마해 당선되었다(부여).


제15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야권 후보단일화 논의가 거듭되는 가운데, 1997년 11월 새정치국민회의(국민회의)와

 집권 후 내각책임제 개헌을 조건으로 김대중 국민회의 총재로 대통령후보 단일화에 합의했다.

 그리고 영남권에 지지 기반을 가진 박태준을 자민련 총재로 영입해 이른바 김대중·김종필·박태준 연합을 성사시켰다. 이로써 국민회의 김대중 후보의 지역적 지지 기반을 충청권·영남권으로 확대해 김대중의 당선에 크게 기여했다.


마침내 유신 정권, 민자당 정권 이래 또다시 집권여당의 실권자로 변신한 그는 1998년 김대중 정부 출범과 함께 김대중 대통령에 의해 국무총리 서리에 임명되었으나 국회의 과반수 의석을 가진 거대 야당인 한나라당의 인준거부 파동을

 겪은 뒤 약 6개월 후에야 국회의 인준을 받았다.


그는 명실상부한 공동정권의 2인자로 실세 총리를 역임한 후 2000년 1월 총리직에서 물러나 자민련 총재로 복당했다. 그러나 같은 해에 실시된 제16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그가 이끄는 자민련은 17석을 얻는 데 그쳐 원내교섭단체 구성에 실패했다.


2001년 9월 국회에서 임동원 통일부 장관 해임안을 가결한 것을 계기로 김대중 정부와 결별하면서 김종필은 소수야당의 총재로 남게 되었다.

그는 2004년 제17대 총선거에서 자민련의 비례대표 1번으로 나서며 헌정 사상 초유의 10선 고지를 노렸다.


그러나 정당득표율이 2.8%에 그치며 그의 마지막 꿈은 좌절되었다. 결국 4월 19일 자민련 총재직을 사퇴하고 정계에서 은퇴했다.

저서로는 〈JP 칼럼〉·〈JP 수첩〉·〈새 역사의 고동〉 등이 있다.

정계에서 은퇴한 후 개인적인 발언 외에는 거의 정치적 활동을 하지 않았다.


2008년 12월 뇌졸중이 발병, 이후 재활치료를 거듭해왔다. 2018년 6월 23일 아침 8시 서울 중구 신당동 자택에서

노환으로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