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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과 시사

미얀마 군부 쿠데타의 역설…74년전 아웅산 꿈 이뤄질수도

 

 

 

 

ⓒ 미얀마 CDM







[양곤=AP/뉴시스]21일(현지시간) 미얀마 양곤에서 반 쿠데타 시위대가 민주화 투쟁 포스터를
붙이고 있다. 2021.04.21.







[양곤=AP/뉴시스]21일(현지시간) 미얀마 양곤에서 반 쿠데타 시위대가 세 손가락 경례를
하며 시위에 참여하고 있다. 2021.04.21.






지난달 7일 미얀마 냥우에서 시위대가 군경의 진압에 맞서 방패로 몸을 보호하고 있다.
미얀마에서는 군경 진압으로 48명 이상이 숨졌다. [로이터]



미얀마 군부 쿠데타의 역설…74년전 아웅산 꿈 이뤄질수도



 군부 쿠데타로 헌정중단 사태를 맞은 미얀마의 비상 상황이 80일 넘게 지속되고 있다.국민들의 격렬한 쿠데타 반대 시위와 군부의 무자비한 유혈 진압으로 700명 넘는 사망자가 나왔다.
체포·구금·실종된 사람도 3000 명을 훌쩍 넘었다.  
사망 700명 넘으며 내전 치달아/카친,카렌족등 연방군 참여할 듯/연방군 승리하면 74년전 아웅산의 꿈 가능해져
수치 측 임시 정부 "소수민족 반군들과 연방군 창설"
과거 두 차례 쿠데타의 경험을 통해 쉽게 통치권을 잡을 수 있으리라고 기대했을 군부(이하 반란군)의 기대와 달리 자유와 민주주의의 맛을 본 미얀마 국민들의 저항은 예상외로 거세다.

해외로 탈출하거나 국내에 은신하고 있는 민주주의민족동맹(NLD) 소속 국회의원 당선자들이 세운 임시 정부 '연방정부대표위원회'(CRPH)가 지난 16일 아웅산 수치와 우윈민을 최고 지도부로 하는 '미얀마 연방공화국 국민통합정부'(이하 국민통합정부) 를 정식으로 출범시켰다. 국민통합정부는 반란군의 무력에 맞서기 위해 “소수민족 무장세력과의 연대를 통한 연방군 창설을 모색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 연방군에는 미얀마민족민주주의동맹군(MNDAA), 타앙민족해방군(TNLA), 카친독립군(KIA) 외에 카렌민족해방군(KNLA)도 참여할 것으로 예상된다. 카친 독립군과 카렌민족해방군은 이미 반란군과의 전투를 시작했다.  
이번 사태가 국민통합정부의 연방군과 반란군 사이의 대규모 내전으로 치닫게 되면, 미얀마는 참혹한 살륙의 현장으로 변모하게 될 공산이 크다. 

 다민족국가 미얀마,소수민족 갈등의 역사 깊어 

미얀마는 135개의 민족으로 구성된 다민족 국가다.
소수 민족간의 정치·역사적 역학 관계가 향후 정국을 좌우할 결정적 변수다.
이들 소수 민족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다.
미얀마는 1962년 쿠데타 이후 지속적인 민족 갈등에 시달려 왔다.

갈등이 표면화되기 시작한 것은 독립을 눈앞에 둔 1946년 말부터다.
당시 영국은 미얀마를 여러 개의 민족국가로 분리 독립시키려 했으나 독립의 영웅 아웅산 장군 중심의 정치인들은 ‘하나의 버마’ 를 원했다.

아웅산 장군은 샨· 카친 등 소수 민족 지도자들과 협상, '소수민족에 대한 평등한 대우'를 핵심으로 하는 역사적인 ‘팡롱 협정’을 체결하고,영국으로부터 버마 연방 독립 약속을 받아낸다. 아웅산-애틀리 협정이다.

팡롱 협정은 미얀마 근세사의 위대한 사건이었다. 미얀마가 2월 12일을 '연방의 날'로 기념하는 이유다.

그러나 독립을 준비하던 중 1947년 7월 아웅산이 암살된다. 이듬해 독립한 미얀마는 샨 주의 소왕국 국왕인 사오 쉐 타익이 초대 대통령, 아웅산의 동지였던 우 누가 초대 총리를 맡게 된다.

 
 네윈의 쿠데타로 반군들 무장 투쟁 격렬해져
우 누는 12년 임기 동안, 소수 민족들에게 한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소수 민족들의 불만이 터져나왔고, 카렌·샨 족 등은 무장투쟁에 나섰다.
우 누 정부의 국방장관이었던 네윈은 1962년 3월 소수민족 반란으로 인한 국가위기 해소를 명분으로 쿠데타를 일으킨다.

이후 50년 가까이 미얀마 군부는 소수 민족을 연방 구성원으로 대우하지 않고, 군부의 존재와 군사독재를 합리화시켜 주는 수단으로 이용해 왔다. 소수 민족과 군부와의 갈등과 대립이 미얀마 정정 불안의 불씨를 잉태해온 셈이다.

미얀마 소수 민족 중에서 군사정부에 강한 무장투쟁을 해온 민족은 샨·카렌·카친·라카인 족 등이다.

샨(Shan) 족은 버마족에 이어 두 번째로 큰 민족으로 1947년 아웅산과 함께 팡롱협정을 성사시킨 주역이었으나, 약속 위반을 이유로 일부 세력은 1958년 중반부터 정부에 대한 소규모 무장투쟁을 전개했다. 
샨 주는 전통적인 소왕국들의 결합체로서 '샨주남부군'과 '미얀마민족민주주의동맹군'등의 무장조직이 있었다.

1962년 쿠데타 직후 네윈의 군부는 샨 주를 침공, 연방의 초대 대통령 샤오쉐타익을 비롯한 핵심 지도자들을
체포하여 살해한다. 







군부 쿠데타에 항의하는 미얀마 시민들이 지난 28일 최대 도시 양곤에서 실탄 사격을 하는
경찰에 새총으로 대응하고 있다. [AP=연합뉴스]


군부,'황금의 삼각지대' 아편 거래 이권 노려 샨족 탄압 
군부는 1988년 이후까지 샨 족 군사조직의 씨를 말리려고 집요하게 시도해 왔는데, 태국과의 국경인 '황금의 삼각지대'에서 재배되는 아편거래 이권을 장악하기 위한 의도도 있었던 것같다.
1970년대 이후 세계적인 마약밀매업자로 군림했던 전설적인 마약왕 '로싱한'과 '쿤사'는 1980년대 이후 미얀마 군부의 비호를 받으며 승승장구했고, 그의 자녀들은 미얀마 굴지의 재벌로 성장했다.

카렌(Karen) 족은 중남부 카인 주와 카야 주의 산악지대에서 살아온 민족으로 인구의 약 7 %를 점한다. 식민지 시절부터 버마족과 사이가 좋지 않았던 카렌 족은 팡롱협정에 참여하지 않았고, 카렌민족동맹(KNU)을 중심으로 반정부 투쟁을 지속했다.

 네윈의 군부가 카렌 족에 대한 대대적 인종청소를 시도,수 천명이 살해 되었으며, 약 30만명이 국경을 넘어 태국의 산악지대로 피난했다. 태국의 치앙마이 북부 산악지대에서 볼 수 있는, 여성들이 목에 놋쇠링을 끼우고 생활하는 종족이 바로 1960년대에 군부에 의해 쫓겨 온 카렌족의 후예들이다.

카렌 민족의 무장조직인 '카렌민족해방군'(KNLA)은 군부에 대한 저항을 지속해 왔다.

카친(Kachin) 족은 오랜 세월에 걸쳐 최북단 카친 힐에서 살아 온 산악민족이다. 카친 민족도 1947년 팡롱협정에 참여하여 연방국가로의 독립에 일조를 했지만, 당초의 약속대로 평등한 대우를 해 주지 않고, 오히려 탄압받는 상황이 되자, 1960년대 초반 '카친독립군' (KIA)을 결성하고 군사정부에 대한 무력투쟁을 시작했다.  

카친독립군과 정부군과의 최대 전투는 2012년에 벌어졌는데, 이 때 카친독립군과 주민 2500여 명이 살해되었으며, 10만 명 이상이 보금자리를 떠나야 했다.   
라카인(Rakhine) 족은 미얀마 서북부의 라카인 주에서 살고 있는 소수민족이다.
이들은 아웅산의 팡롱협정에 참여하지 않았고, 지속적으로 연방에 대해 적대적인 입장을 취해 왔다.

라카인 족은 2009년에 7000명 규모의 아라칸 군대(AA)를 창설했는데, 정부군과 싸우는 것 말고도 이슬람 세력인 로힝야(Rohingya) 족을 견제하려는 목적도 있었다.  

 
 2016년 반군 연합체 '북부동맹' 결성되기도
1988년 제2차 쿠데타 이후로도 군사정부는 소수민족을 연방의 구성원으로 대우하는 대신, 지속적으로 반군의 거점들을 초토화시키는 전략을 사용해 왔다.
그러자 각각 정부군에 저항하던 아라칸군(AA), 카친독립군(KIA), 미얀마민족민주주의동맹군(MNDAA), 그리고 북부 샨 주를 근거지로 활동하던 타앙민족해방군(TNLA)이 2016년 11월 북부동맹(Northern Alliance)을 결성하여 정부군에 대항하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2016년 3월 출범한 아웅산 수치의 민주정부는 모든 반군 세력을 아우르는 평화회의를 소집했다.
수치는 미얀마 독립의 영웅이자 자신의 부친인 아웅산 장군이 1947년 소수민족 대표들과 체결했던 '팡롱 협정'을 되살린다는 의미로, 이 회의에 '21세기 팡롱'(21st. Century Panglong)이라는 이름을 붙이기도 했다.

20여 개의 미얀마 주요 민족 중 17개 민족대표가 참석한 이 협상은 2016년 8월에 시작되어 2019년 까지 지속되었는데, 협상의 주요 고비마다 2011년 군최고사령관 직을 걸머 쥔 민 아웅 흘라잉의 군부는 크고 작은 무력 을 휘둘러 판을 깨고는 했다.

수치 여사는 금년 초, 재집권을 눈 앞에 둔 상황에서 “모든 정당과, 지역사회를 아우르는 국가적 평화 구축 작업에 박차를 가하겠다” 고 밝혔다.
하지만 새로운 국회가 출범하는 2월 1일 새벽에 일어난 군부 쿠데타는 연방의 평화를 위한 모든 노력을 수포로 만들었다. 

 
군부가 우세하나 내전 발발하면 승패 장담 못해 
그 이후의 미얀마의 정치상황은 앞에서 언급한 그대로다.현재는 인원이나 무력 등에서 절대적으로 반란군 측이 우세하지만, 내전이 일어나면 승패를 속단할 수 없을 것이다.
내전이 장기화하면 반란군 내부의 자중지란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다.현재 반란군은 연방군 결성을 방해하기 위해 다양한 협박과 회유를 하고 있는 상황이라고 한다.  







아웅산 수지 미얀마 국가고문. [로이터]

 

 

 

만약 내전에서 연방군이 승리하면, 미얀마 국민들과 세계의 자유민들은 1947년 아웅산이 구상했던 진정한 연방국가가 70여 년 만에 재탄생되는 기적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를 위해 얼마나 더 많은 피를 흘려야 할지는 아무도 모른다. 자유와 민주주의를 지키려는 미얀마 국민들의 투쟁을 고독한 투쟁으로 만들어서는 안된다.앞으로 미얀마에서 펼쳐질 상황은 유엔이 진정한 국제평화기구인지, 그리고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진정한 자유세계의 지도자인지를 가늠하는 시금석이 될 것이다.  




 
조용경 전 포스코엔지니어링 부회장
[출처: 중앙일보] 

 

 

 

 

 

 

[양곤=AP/뉴시스]21일(현지시간) 미얀마 양곤에서 반 쿠데타 시위대가 민주화 투쟁 포스터를
붙이고 있다. 2021.04.21.Copyright © NEWSIS.COM, 








잔혹한 탄압에도 저항은 계속되고 있다 군경을 공격을 피해 오토바이를 몰고 게릴라
시위를 벌이는 만달레이 노동자들ⓒ출처 Myanmar Now







만달레이에서 시위대를 죽이고 시체를 가져가는 경찰들



코로나 때보다 더 어렵다" 쿠데타로 곤두박질치는 미얀마 경제

 

[경향신문]
지금 당장은 어떤 미래도 볼 수 없다.
할 수 있는 일은 먹고 살기 위해 노력하는 것 뿐”

 

 

미얀마의 의류봉제공장에서 일하고 있는 수 폰 치트는 20일 현지매체 미얀마 나우에 이 같이 말했다.
그는 지난해 코로나19가 창궐하면서 한 차례 직장을 잃었다. 지난 2월 군부 쿠데타 발생 이후 상당수 봉제 노동자가 시민불복종운동에 동참해 업무를 거부하고 고향으로 돌아갔지만 그는 공장에 남았다.

그러나 그 역시도 먹고 사는 문제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쿠데타 이후 주문 물량이 줄면서 공장의 가동률도 저하됐기 때문이다. 일하는 시간이 줄고 초과 근무 수당이 사라지면서, 많지 않은 기본급으로만 생활을 유지하고 있다.








군부 쿠데타에 저항하는 미얀마 시민들이 지난 8일 만달레이 한 거리에 꽃을 꽂은 신발을
줄지어 세워뒀다. 만달레이|AFP연합뉴스



미얀마 전체 수출의 25%를 차지하는 의류산업은 쿠데타 이후 수렁에 빠졌다.
주요 수출시장인 유럽연합(EU)이 미얀마 관련 산업에 대한 각종 제재를 강화하면서 스웨덴의 H&M, 이탈리아의 베네통 등 주요 패션 기업들이 신규 주문을 중단했다.
이는 급격한 일자리 감소로 이어지고 있다. 미얀마의 노동운동가 예 나잉 윈은 미얀마 나우에 “의류 분야의 유명 기업들이 미얀마에서 철수했다”며 “쿠데타 이후 의류업계에서 약 20만개의 일자리가 사라졌다”고 말했다.
코로나19 이전 의류업계에는 70만명의 노동자가 종사했는데 전체 30% 가량의 노동자가 산업을 떠났다는 얘기다.









지난 7일 미얀마 양곤 산업단지에 위치한 한 의류봉제공장에 화재가 발생했다.
양곤|로이터연합뉴스




경고등이 켜진 것은 의류산업 뿐이 아니다. 일부 업종은 코로나19때보다 더 큰 어려움을 겪고 있다.
양곤에서 식당을 운영하는 한 자영업자는 월스트리트저널에 “쿠데타 이후 매출이 70% 감소했다”고 말했다.
코로나19가 유행하던 시기에도 그의 식당은 온라인 주문으로 매출을 유지했다.
하지만 군부가 인터넷 접속을 차단하면서 온라인 주문도 뚝 끊겼다.

현재 군부는 정보 통제를 위해 야간에는 완전히 인터넷을 차단하고, 낮동안에는 모바일 기기를 통한 인터넷
접속을 차단하고 있다.
시민들의 시위와 군경의 유혈진압이 반복되면서 영업자체가 어려운 가게들도 늘고 있다.

양곤의 거리에서 찻집을 운영하는 한 남성은 블룸버그에 “양곤의 많은 찻집 주인들이 이 위기가 계속된다면 얼마나 오랫동안 살아남을 수 있을지 확신하지 못하고 있다”며 “매일 가게 문을 열수 없는데도 임대료와 세금, 임금은 꼬박꼬박 지급해야 한다”고 했다. 그는 시위대가 군경을 피해 그의 가게로 들어올 때마다 자신도 총에 맞거나 체포될 수 있다는 불안에 시달린다.

그렇다고 시민들을 가게 밖으로 내몰 수도 없다. 시민들을 내몬 사실이 소셜미디어를 통해 퍼지면 향후 영업자체가 불가능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시장조사업체 IHS마킷에 따르면 지난달 미얀마의 구매관리지수는 사상 최저치인 27.5로 떨어졌다.

이 지수가 50 이상이면 수요 확장에 대한 기대 심리가 높다는 것을 의미하고, 50 이하면 수요가 줄어들 것으로 예상하는 사람이 많다는 것을 의미한다. 2015년 12월부터 최근까지 미얀마의 구매관리지수는 평균 48.9였다.
경제의 혈관 역할을 하는 은행들이 사실상 기능을 정지하면서 상황은 더욱 악화되고 있다.

은행은 공공기관, 병원, 봉제공장 등과 함께 시민불복종운동에 참여한 노동자의 비율이 높은 곳 중 하나로 꼽힌다. 은행 직원들이 군부 쿠데타 발생 이후 업무를 거부하면서, 미얀마에 있는 은행 지점의 상당수가 문을 닫았다.
군부 대변인인 조 민 툰은 지난 9일 “미얀마 소재 은행 지점의 약 10%만이 영업을 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ATM(현금입출금기)를 통해 돈을 인출하는 것이 어렵다는 것도 알고 있다”고 했다.







미얀마 KBZ은행의 한 지역 점포가 지난 18일 폭발에 휩싸였다. 트위터 갈무리

 

 

 


미얀마의 민간은행 중 가장 규모가 큰 KBZ는 21일 자사의 홈페이지에 500개의 지점 중 24개의 지점이 현재 가동중이라고 공지했다. 문을 연 지점들도 인터넷 접속 장애 등으로 입출금 등 가장 기본적인 서비스만을 제공하고 있다.
군부의 유혈진압에 사망자가 늘고 사회불안도 커지면서 고객들이 대규모로 예금을 인출하는 ‘뱅크런’ 조짐도 보이고 있다.

이에 일부 은행들은 인출한도에 제한을 두고 있다.
KBZ의 경우 개인은 한 주에 200만짯(한화 약 158만원), 기업은 2000만짯(한화 약 1580만원) 이상을 인출할 수 없도록 제한을 뒀다.
이 제한으로 인해 일부 기업들은 직원들의 급여를 지급하는 데도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쿠데타는 미얀마가 2010년 민주주의로 전환을 시작한 이후 쌓아올린 경제적 성과도 빠르게 잠식하고 있다.
미얀마는 민주화와 함께 시장을 개방하면서 지난 10년간 연평균 6% 이상의 경제성장률을 기록한 바 있다.
지난해 세계은행은 코로나19 여진이 지속되는 상황에도 불구하고 올해 미얀마 경제가 2% 성장할 것으로 내다봤다.
하지만 올해 군부 쿠데타가 일어나면서 예상은 완전히 뒤바뀌었다.

세계은행은 최근 보고서에서 쿠데타 이후 가중된 혼란으로 올해 미얀마의 국내총생산(GDP)이 10% 감소할 것으로 전망했다.
세계은행의 아시아지역 수석 이코노미스트 아디탸 마투는 블룸버그에 “우리는 깊이 우려하고 있다”며 “가난한 나라에서 성장률이 10% 줄어든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재앙”이라고 말했다.
미얀마의 경제상황이 더 나빠질 수 있다는 예상도 있다. 신용평가사 피치는 올해 미얀마의 GDP가 20% 감소할 것으로 전망했다. 소비자들의 구매가 줄어들 뿐 아니라 세금이 덜 걷히면서 정부 지출도 줄어들 것으로 예상한 것이다.
쿠데타를 일으킨 군부도 이 같은 상황은 예상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다. 군정에서 투자장관을 맡고 있는 아웅 나잉 우는 지난달 쿠데타가 외국인 투자자에 “작은 영향”만 미칠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미얀마 기업인들의 생각은 다르다.

마웅 마웅 레이 미얀마 상공회의소 선임 부회장은 블룸버그에 “정상적인 상황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마나 시간이 걸릴지는 아무도 예측할 수 없다”고 했다.
싱가포르 동남아연구소(ISEAS)의 모 뚜자르는 “군부는 쿠데타를 일으키면서 큰 오산을 저질렀다”며 “그들은 기존 정부보다 기업 친화적인 태도를 보여주고 싶었고, 이 점에 있어서는 민주화를 추진하는 민주주의민족동맹(NLD) 정부보다 우위를 점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큰 역효과를 내고 있다”고 했다.








미얀마 소수민족 카렌족 가족이 군부의 공습 이후 함께 모여 식사를 하고 있다.
AFP연합뉴스

 

 

 

 

 

미얀마의 빈곤층이 최대 피해자가 될 가능성이 있다. 미얀마에는 하루 3.2달러(한화 약 3500원) 미만으로 생활하는 빈곤층이 600만명 존재한다. 군부가 정권 이양을 약속하고 총선을 실시한 2010년 42.2%에 달했던 빈곤율은 민주정부의 집권 이후 지속적으로 줄어 2017년에는 24.8%까지 감소했다.

그러나 세계은행은 군부 쿠데타 이후 빈곤율이 30% 증가할 수 있다고 내다봤다. 최저 생계선에 놓인 사람이 180만명 증가할 수 있다는 얘기다.
유엔 세계식량계획(WFP)은 쿠데타로 촉발된 이번 경제위기가 “가장 빈곤하고 가장 취약한 사람들이 식탁에 충분한 음식을 차릴 능력을 심각하게 약화시킬 것”이라고 말했다.



이효상 기자 hslee@kyunghyang.com
ⓒ 경향신문 & 경향닷컴(www.khan.co.kr),







트위터 캡처



우리도 한국처럼”… ‘1961년 서울’ 공유한 미얀마 국민

 

 

지난 2월 1일 미얀마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켰다. 민주적으로 선출된 정부는 순식간에 무너졌다.
시민들은 쿠데타에 항거하며 거리로 나섰다. 미얀마 군부는 시민들에게 실탄을 발포했다.
20일 기준 738명의 시민들이 민주주의를 외치다 군경의 총과 폭력에 숨졌다.


민주주의를 원한다는 이유만으로 피를 흘리고 있는 미얀마 국민들의 모습은 과거 5.18 광주민주화 운동과 6.10 민주항쟁을 떠올리게 한다.
한국 사회 곳곳에서 미얀마 군부를 규탄하는 성명이 발표됐고, SNS에는 미얀마의 민주화를 응원하는 메시지가 줄이었다.








트위터 캡처



이에 미얀마 시민들은 ‘한국어’로 한국에게 고마움을 표현했다.
게시글에는 “응원해줘서 감사하고 우리에게 큰 힘이 됐습니다”
“항상 감사합니다” “미얀마 국민들을 도와준 대한민국에 너무 감사드립니다” 등의 내용이 담겼다.


특히 미얀마 시민들은 5.16 군사쿠데타가 일어났던 1961년의 서울과 민주주의를 되찾은 2021년 서울을 비교하며 ‘미얀마도 한국처럼 독재를 물리치고 민주주의를 이룰 것’이라고 희망했다.








미얀마 국민이 SNS에 올린 1961년, 2021년 서울의 모습. 트위터 캡처

 

 

 


또 계엄령이 내려진 미얀마 현지 상황을 보도한 한국 언론의 기사를 SNS에 공유하며 “보도해줘서 고맙다”고 했다.
한국에서는 쿠데타를 통해 정권을 장악한 미얀마 군부를 규탄하는 성명 발표가 전국 곳곳에서 이어지고 있다.
경기도는 미얀마가 투쟁·학살 없는 평화로운 일상을 되찾길 기원하는 의미에서 미얀마 민주주의 네트워크(미민넷)이 추진하고 있는 사진전을 경기도청에서도 개최할 수 있도록 협조할 계획이다. 긴급구호 물품을 지원하는 방안도 검토 중이다.

경기도는 지난달 14일엔 미얀마 상황을 알리기 위해 재한 미얀마 학생회가 마련한 ‘미얀마의 봄’ 공연을 지원한 바 있다.
광주광역시는 종교계, 인권단체 등 시민사회단체와 함께 연대를 구성해 미얀마 민주화 지지 모금 운동과 의료물품 및 생필품 지원, 미얀마 응원 영상 제작 등에 나섰다.
전남도도 모금 운동과 의료물품 지원 등은 물론 미얀마 민주화 촉구 집회 지원도 검토하고 있다.




최민우 기자 cmwoo11@kmib.co.kr

GoodNews paper ⓒ 국민일보(www.kmib.co.kr)








양곤의 의류공장에서 일하는 미얀마 노동자 [미얀마 나우 사이트 캡처]






김석 기자 (stone21@kbs.co.kr)




미얀마 소수민족 “군부 완전히 끌어내려야 민주주의

 

한국 유학생 찬 빅 재(30)는 미얀마 소수민족 친족이다.
2017년 한국으로 와 인천대 정치외교학 석사 과정을 밟고 있다.
지난 2월 1일 미얀마에서 쿠데타가 일어나자 그는 2월 7일 미얀마 민주화를 지지하는 친족 유학생 모임인 ‘친족 청년단체(Chin youth organization)’를 만들었다. 단기간에 전세계 친족 유학생 500여명이 가입했다.
불교도가 90%에 가까운 미얀마에서 친족은 주로 기독교를 믿는 소수민족이다.
전체 인구는 150만명으로 미얀마 서부 친주에 많이 산다. 주류 민족인 버마족과는 언어도 다르다.
찬 빅 재는 “한국인들은 로힝야 문제만 알지만, 친족을 포함한 다른 소수민족도 군부에 학살당했다”고 말했다.
찬 빅 재는 2016년 아웅산 수지 국가고문이 이끄는 문민정부가 들어섰을 때도 소수민족을 배제하는 ‘반쪽짜리’ 민주 정부라고 봤다. 군부에 상당한 권력을 보장하는 2008년 헌법을 그대로 두는 한 “군복에서 민간인 복장으로 옷만 바꿔 입은 정부”라고 했다. 2008년 헌법은 군부에 전체 의석의 25%를 자동 할당하고, 군 통수권과 비상사태 선포권을 군 최고사령관에게 부여한다.
찬 빅 재는 쿠데타 이후 수지 고문이 이끌던 민주주의민족동맹(NLD)이 소수민족들과 연합해 만든 민족통합정부(NUG·National Unity Government)를 지지한다. 친족 청년단체 대표 자격으로 21일 국회와 청와대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한국 정부에 NUG를 인정해달라고 촉구했다. NUG는 소수민족과의 연방연합을 추구하고, 2008년 미얀마 헌법 무효를 선언했다.
찬 빅 재는 미얀마 민주주의를 위해 국제사회와 시민사회가 힘을 합쳐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군부를 끌어내리고 헌법을 개정해야 진짜 민주주의”라면서 “새 정부는 소수 민족에게 평등권을 부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찬 빅 재를 21일 전화로 인터뷰했다.







찬 빅 재(chan bik ceu) ‘친족 청년단체’ 대표가 21일 청와대 앞에서 한국 정부에 미얀마
국민통합정부(NUG)를 인정해달라고 촉구하는 기자회견에 참석한 뒤 ‘세 손가락 경례’를
하고 있다. 찬 빅 재 대표는 친족 전통의상을 입고 있다. 찬 빅 재 제공



쿠데타에 왜 반대하나.
“이전에도 미얀마는 온전한 민주국가가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과도기를 거쳐 언젠가는 민주국가가 되리라는 희망이 있었는데, 쿠데타로 민주주의로 가는 길마저 중단됐다.”
-2016년 문민정부 출범 당시에 든 생각은.
“2016년 아웅산 수지 국가고문이 이끄는 첫 문민정부가 들어섰지만, 헌법을 바꾸지 않고 집권했기에 한계가 있었다.
군복에서 민간옷으로 옷만 바꿔 입은 정부라고 생각했다.
지난해 총선에서 일부 소수민족들은 투표권을 박탈당했다.

NLD가 질 것 같은 지역에는 투표소를 설치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많은 친족이 NLD에 지지를 보냈다. 소수민족에게 평등권을 부여해야 한다.”
-친족도 군부의 탄압을 받았나.
“한국인들은 로힝야족 학살 문제만 알지만, 로힝야 학살은 가장 최근 사건이고 그 전엔 친족도 학살당했다.
내가 5살이던 1996년 아버지가 친족 탈영병을 도왔다는 이유로 군부가 우리 집에 들이닥쳐 총을 쏜 적이 있다.
온 가족이 이사해야 했다. 미얀마 경찰이던 외삼촌도 친족 반군을 몰래 도왔다는 이유로 박해받았다.
외삼촌 가족은 2000년대 초반 인도로 도망쳤고, 현재 스웨덴과 노르웨이에서 난민 지위를 인정받았다.”
-스스로 차별받은 경험이 있나.
“내가 만달레이대학에 다녔는데, 택시 기사가 나한테 ‘미얀마 사람인데 왜 미얀마 말도 잘못하냐’고 따지더라. 친족 중에는 기독교도가 많은데, 기독교도는 차별받는다.
정부는 불교 사원 허가는 쉽게 내주지만, 교회 건설은 허가를 잘 내주지 않는다.
인간적으로 모멸감을 주기도 한다.”
-NUG를 왜 지지하나.
“NUG는 소수민족 자치권 인정, 연방연합 민주주의 국가 건립, 평등권 보장이라는 세 가지 소수민족의 요구사항을 받아들였다. 다만 CRPH나 NUG의 약속에 의구심을 보내는 소수민족도 있다.
수지 고문은 로힝야족을 미얀마 시민으로 인정하지 않은 전례가 있다. 구금된 수지 고문이 나중에 돌아와서 ‘나는 연방연합에 동의한 적 없다’고 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수지 고문을 카리스마 있는 지도자로 높이 평가하지만, 우리는 수지 고문이 있든지 없든지 민주주의 국가를 만들어야 한다. 지도자 한 사람에게 너무 의지해선 안 된다. 한 사람만 따르면 평등권은 요원해진다.”
-쿠데타 이후 가족이나 친구들은 어떻게 지내나.
“미얀마에 있는 여동생은 목숨을 걸고 쿠데타 반대 시위에 나간다.
의대생인 남동생은 다친 시위대를 몰래 치료하고 있다. 친구들은 속속 반군에 입대했다.
군부가 쏜 총에 맨몸으로 맞고 죽느니 조잡한 무기라도 들고 시위대를 지키겠다고 한다.
걱정으로 밤에 잠도 못 이루는 상황이다.”
앞으로 계획은.
“국제사회에서 NUG를 인정하라는 요구를 해나가겠다.”

김윤나영 기자 nayoung@kyunghyang.com











1일(현지시간) 군사 쿠데타를 반대하는 시위가 계속되는 미얀마 양곤에서 시민들이
2008년 헌법 책자를 불태우고 있다. © AFP=뉴스1 © News1 우동명 기자




 미얀마 군, 국가 지도부 체면 완전히 내려놨나


시민들에게 서슴없이 총탄을 쏴 대며 죄의식은 죄다 잃은 것처럼 보이던 미얀마 군이 이제는 적게나마 남아있던 국제사회에서의 체면마저도 내려놓은 듯 하다.
8일 영국 런던의 주영미얀마 대사관에서 정식 인가를 받은 미얀마 대사가 쫓겨났다. 쫓겨난 쪼 츠와 민 대사는 허망한 발걸음으로 런던의 대사관 앞을 배회하며 들어가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마치 말 안듣는 아이더러 집 나가라고 윽박지르고 맨몸으로 대문 밖으로 내쫓는 아동 학대 가정에서나 일어날 법한 일이 한 나라의 입과 손을 대신하여 다른 나라에 파견된 대사에게 일어난 것이다.
외신들은 앞다투어 쿠데타를 일으킨 미얀마 군부의 악랄한 손길이 영국 런던에까지 뻗친 것이라고 보도했다.

여기에 칫 윈 부대사가 미얀마 대리대사를 맡아 쪼 츠와 민 대사의 대사관 출입을 통제하고 있다는 사실이 로이터통신을 통해 알려지면서 ‘런던 한복판의 작은 쿠데타’라는 불명예스러운 이름까지 얻었다.
쪼 츠와 민 대사는 지난달 성명을 통해 아웅산 수치 국가고문과 윈 민 대통령을 석방하라고 요구한 바 있다. 또 군사 쿠데타를 비난하면서 미얀마 군부 측으로부터 소환명령을 받기도 했다.
이뿐만이 아니다. 군사 쿠데타를 규탄하며 평화 시위를 벌이던 시민들과 아이들을 가리지 않고 실탄을 사격하며 세계적인 비난을 받았던 미얀마 군은 이제 그런 것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는지 급기야 중화기를 꺼내드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달 8일 밤부터 다음날 아침까지 미얀마 군은 시위대를 향해 총격을 가했다. 외신에 따르면 80명 이상이 사망했으며 현장에서 보내온 사진 속 곳곳에서 박격포 파편과 같은 중화기를 사용한 정황들이 발견됐다. 군은 이에 더해 시신을 쌓아놓고 이를 수습하지 못하게 했다.
사망자 수는 이틀이 지난 상태에서야 겨우 집계됐다.
자국민들을 향해 중화기를 꺼내든 것도 통탄할 일인데 9일 군 측은 뻔뻔스럽게도 대량학살 의혹을 부인하면서 사람들의 분노를 더욱 크게 만들었다. 조 민 툰 미얀마 군 대변인은 군이 사람들을 죽이려 했다면 단시간 내에 그보다 더 죽었을 것이라며 같잖은 변명을 늘어놓기도 했다.
그간의 무수한 국제사회의 비난과 제재 따위는 쇠 귀에 읽은 경일 뿐이었던 것이다.
쫓겨난 쪼 츠와 민 대사는 런던 북서부 햄스테드에 있는 대사관저에서 15일 현재 가족과 함께 머물고 있다.
그러나 주영 미얀마 대사관은 이날까지 대사관저를 비워달라는 내용의 서한을 전달하며 전 대사의 취급에 있어 한 자락의 자비도 보이지 않고 안하무인한 태도로 일관하고 있다.
한 국가의 지도부로서의 체면도, 품위도 내려놓은 미얀마 군부에게 더 이상의 대화가 필요할까. 국제사회의 적극적 개입이 고려돼야 할 때다.


[박정은 기자 / 행동이 빠른 신문 ⓒ스카이데일리]







뉴스파워▲ 미얀마 민주화 투




 

 

 

투쟁 모습▲ 미얀마 민주미얀마 민주화시위.화 투쟁미얀마 민주화시위.모습    
©뉴스파워



미얀마의 총성,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



[내가 만드는 복지국가] '포스코 OUT', 실질적이고도 명확한 연대 방안


총성이 울리고, 미얀마 민주주의를 외치던 19세 소녀(미야 트웨 트웨 카잉)가 죽었다.
머리를 관통한 총상, 입가에 흐르는 핏물이 소녀의 마지막은 아니었다. 그녀의 죽음은 미얀마 시민의 민주화 의지를 일깨웠다.
총성이 울리고, 또 다시 19세 소녀(치알 신)가 죽었다. 모든 것이 잘 될 것이라고. 그녀가 입었던 티셔츠 문구는 세계인의 부끄러움을 일깨웠다.

총성이 울리고, 집 안에서 아빠 품에 안긴 7살 아이(킨 묘 칫)가 죽었다

. 군부는 중화기를 들었다. 수백 명이 죽어가도 미얀마 시민들은 거리에 선다. 이 순간도 총성이 울린다.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
2월 1일 미얀마 군부의 쿠데타로 아웅산 수치는 구금되고, 선출 권력은 한순간 몰락했다. 2015년 미얀마에 문민정부가 들어섰지만, 군부에 관리된 민주화는 한계가 명확했다.

미얀마 군부는 권력이 흔들리자 총을 들었고, 뒷배가 되어주고 있는 중국, 세력균형을 맞추려는 미국, 무능한 국제사회로 인해, 미얀마 군부의 국가 살인이 장기화될 조짐을 보이고 있다.
미얀마 시민은 사투를 벌이고 있다. 미얀마 시민이 원하는 것은 민주주의의 최소한이다. 권력은 시민을 해하지 말 것이며, 인민의 의지로 선출된 권력을 존중하라는 것이다.
'포스코 OUT', 실질적이고도 명확한 연대 방안

국제정치 역학에 의해 못 이기는 듯 군부의 살인을 방치하고 있는 UN과 국제사회의 개입을 기대하기 어렵다.
미얀마 현지 상황은 너무나도 다급하다.
공허한 국제사회의 성명보다 더 명확한 연대 방안이 있다.
미얀마 군부의 밥줄을 옥죄는 것이다.

미얀마 군부가 무소불위일 수 있는 것은 미얀마 군부와 끈끈한 관계를 유지하며 군부의 자금줄 역할을 하는 초국가적 기업이 있기 때문이다. 대표적으로 한국의 포스코가 있다.
포스코인터내셔널은 군부의 영향력 아래에 있는 미얀마 국영석유가스회사(MOGE)와 함께 미얀마 슈웨(Shwe)에서 가스전 개발 사업을 벌이고 있고, 군부에 막대한 이익을 안겨주고 있다

. 사업수익 15%를 MOGE에 배당하는 데, 그 규모가 2천억 원을 넘어선다.
최근 국제사회의 여론을 인식하는 듯 포스코C&C는 미얀마 군부와 관계를 정리한다며, 발 빼려는 모양새를 취하지만, 실질적으로는 강판 사업 수익이 적어 사업을 정리하는 것에 가깝다. 핵심은 MOGE의 가스전 사업이다.
MOGE에 대해서는 UN 미얀마 인권특별보고관이 나서 표적 제재를 이야기할 정도다.
포스코와 미얀마 군부의 유착관계는 이것이 전부가 아니다. 포스코는 2017년 미얀마 군부의 로힝야족 학살로 국제사회의 제재 움직임이 활발할 때, 미얀마 군부의 핵심 인사를 한국에 초대하고, 군부의 군함 구매까지 대행했다.

사실이 드러나자 연이은 거짓말로 상황을 면피하기 바쁘다.
수익을 위해서라면, 인권도 기업윤리도 국제규범도 괘념치 않은 것이다.
포스코는 미얀마 군부의 자금줄을 유지해주며, 자체로도 괴물이 되었다.
포스코가 군부와의 유착관계를 끊도록 하는 것이 미얀마 시민과의 실질적이고도 명확한 연대 방안인 이유다.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기업 옹호 논리
포스코의 이 같은 행태는 한국적 기업 옹호 논리에서 성장했다.
경제와 기업 논리면 민주주의도 인권도 유보되는 한국적 분위기가 기업의 부정의를 합리화했다.
시민사회가 브레이크 없이 질주하며 만행을 저지르는 미얀마 군부와 동력이 되어주는 포스코를 규탄하자 어김없이 기업 옹호 논리가 등장한다.
포스코인터내셔널이 가스전 사업을 중단하면, 전력 생산이 중단돼 군부가 아니라 국민이 피해를 입게 될 것이며, 경제난으로 인해 종국적으로는 미얀마 서민이 피해를 입게 될 것이라는 주장이다.
그러나 거리에 나가기만 해도 저격수에 의해 피격되고, 집 안에서도 총탄에 맞아 죽어가는 미얀마의 현지 상황을 두고, 미얀마의 전력난을 언급하는 것은 부박한 친기업 논리일 뿐이다.
뿐만 아니라 미얀마는 1인당 국민소득이 1,000달러를 겨우 넘는 가난한 나라다. 미얀마는 2010년대부터 7%에 육박하는 고도성장을 이루었지만, 여전히 높은 빈곤율을 유지한다.
미얀마의 경제 성장이 군부 이권 챙기기로 전락한 이유다. 성장률 지표라는 숫자에 매여, 현장의 실상을 바라보지 못하는 한국 사회의 친기업 논리는 으레 그러하듯이 마땅히 지켜야 할 기업 윤리를 요구하는 데, 부작용을 언급한다.

경제에 미칠 부정적 영향을 언급하며 공포감을 자극한다.
나아가 기업 윤리를 지켜서는 사업하기 어렵다며 무용론을 펼친다.
그러나 일본 맥주 생산기업 기린 홀딩스 등 기업들은 발 빠르게 미얀마 군부와의 관계를 정리하고 있다.

기업 경영에 ESG(Environmental, Social and Governance)가 중요한 부분으로 부각되기 때문이다.
포스코를 두둔하는 논리의 이면에는 인권을 유린하는 군부와 계속 사업하고 싶다는 욕망만 적나라하게 드러날 뿐이다.




 

ⓒ미얀마 민주주의를 지지하는 한국시민사회모임(101개 시민사회단체 연대)


미얀마 민주주의는 한국의 민주주의다
한국 사회를 관통하는 친기업 논리가 미얀마 시민의 민주화 열망을 파괴하고 있다.
포스코는 친기업 논리 뒤에 숨어 국제적 비판 여론의 소나기가 지나기를 기대해서는 안 된다.
한국 정부 또한 기업에 응당한 요구를 해야만 한다. 문재인 정부는 지난 3월 12일 미얀마 사태에 대한 한국 정부의 대응 조치를 발표하며, 미얀마와 국방 및 치안 분야 교류 및 물자 군용수출을 중단하겠다고 발표했다.

반가운 행보다.
그러나 실효성은 알 수 없다.
미얀마 군부와 관계 맺는 한국 기업에 대한 조치가 결여되어 있다.

국가 정의가 기업 논리 아래 복속해 있는 한국 사회의 단면이다.
미얀마 슈웨(Shwe) 가스전 사업에 지분 8.5%를 보유하고 있는 한국가스공사와 포스코의 지분 11.75%를 가지고 있는 최대 주주 국민연금은 왜 미얀마 시민의 고통 앞에서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는 것인가?
민주주의와 정의가 기업의 이윤 추구보다 우선할 때 복지국가로의 이행도 사회 진보도 가능하다.
미얀마 민주주의는 한국 민주주의의 질을 결정한다.
미얀마 군부의 생명줄인 포스코에 응당한 기업 윤리를 요구하지 못하면, 한국 민주주의가 병든다는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

절차적 민주주의는 최소한이다.
인민의 의사 아래 선출 권력을 복속시키는 최소한을 위해 미얀마 시민들은 사투를 벌이고 있다.
그들과 연대하는 방법은 한국 민주주의가 기업 논리보다 우선한다는 사실을 알리는 것이다.
미얀마 군부는 지난 3월 27일 하루 114명의 시민을 살해했다. 현재 희생자는 700명을 넘었다.
경제도 중요하다.
그러나 생명과 인권만큼은 아니다.

수전 손택이 <타인의 고통>에서 언급하듯이 전쟁과 같은 비극적인 현실의 문제가 사망자 수로 단순히 수량화 되고, 지속적으로 생산되는 참혹한 이미지 또한 어느 순간 익숙해지게 되면, 우리의 연대가 연민에서 멈출 수 있다.
국가 살해의 위협 앞에 선 미얀마 시민의 공포와 절박함이 감춰지는 것이다. 연민을 넘어서는 연대가 우리의 과제다.
한국의 시민들이 연대할 것이다. 한국 정부와 포스코는 당장 미얀마 민주화를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하라.


 

※ '포스코 OUT' 온라인 서명하기 ☞ http://bit.ly/poscostop

 

 

 

 

 

 

ⓒ미얀마 민주주의를 지지하는 한국시민사회모임(101개 시민사회단체 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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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으로 보는 '미얀마 사태' 석달







 

 

 

 

 

 

 

 

 

 

 

 

 

2월 1일 외신은 미얀마에서 군부 쿠데타가 일어나 아웅산 수치 고문이 군부에 의해 가택 연금
됐다고 보도했다. [AP 뉴시스]








2월 2일 미얀마 양곤에서 한 남성이 군부 쿠데타로 인한 비상사태와 권력 이양에 관한 신문
기사를 읽고 있다.  [AP 뉴시스]





2월 1일 양곤의 술레 파고다 도로에 경찰 차량이 집결해 있다.

[AP 뉴시스]

 

 

 

 

 

 

 

2월 2일 미얀마 군인들이 네피토에서 국회의사당으로 통하는 도로를 장갑차와 바리케이드로
통제하고 있다. [AP 뉴시스]

 

 

 

 

 

 

 

2월 8일 미얀마 네피도에서 군부 쿠데타 반대 시위대가 저항의 상징인 세 손가락을 들고
경찰과 대치하고 있다. [AP 뉴시스]





 

 

2월 8일 미얀마 네피도에서 경찰차가 시위 군중을 향해 물대포를 쏘고 있다. 군부 쿠데타에
반대하는 시위대와 당국의 대립은 경찰이 평화적인 시위대를 향해 물대포를 발사하면서 고조됐다
[AP 뉴시스]







민 아웅 흘라잉 미얀마군 최고사령관이 2월 8일 네피도에서 TV를 통해 대국민 연설을 하고 있다.
. [AP 뉴시스] 









2월 10일 롤러스케이트를 신은 두 어린이가 국가민주주의동맹 기를 들고 반군부 쿠데타
및 아웅산 수치 석방 요구 시위에 참여하고 있다. 군부는 양곤과 만달레이 내에서 이 같은
평화시위를 금지했다. [AP 뉴시스]








2월 9일 미얀마 양곤에서 교복 차림의 학교 교사들이 저항의 상징인 세 손가락을 들고 있다.
[AP 뉴시스]






 

 

2월 14일 미얀마 양곤에서 장갑차 2대가 이동하고 있다. 미얀마 전역에서 군부 쿠데타에
항의하는 시위가 이어지고 있는 가운데 군부가 시위 중심지인 최대 도시 양곤으로 군 병력을 이동해
시위에 강경 대응을 준비하는 것 아니냐는 관측이 나오기 시작했다. [AP 뉴시스]









2월 16일 미얀마 양곤에서 군부 쿠데타 반대 시위대가 눈을 가린 채 바닥에 누워 '군정
아래서의 삶은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는 메시지를 표현하고 있다. [AP 뉴시스]








2월 17일 미얀마 양곤에서 군부 쿠데타 반대 시위대가 민주주의민족동맹(NLD)의 깃발을
흔들고 있다. [AP 뉴시스]








2월 17일 미얀마 양곤에서 군부 쿠데타 반대 시위대가 대규모 시위를 하고 있다. 이날 양곤에
모인 시위대는 최대 규모로 유엔 인권 전문가는 미얀마군 병력이 양곤으로 이동 중이라는 보고를
받았다며 대규모 폭력 사태의 가능성이 있다고 경고했다. [AP 뉴시스]








2월 18일 미얀마 만달레이 법원 앞에서 미얀마 군부가 민주주의민족동맹(NLD) 소속
조민마웅 만달레이 주지사와 예린 만달레이 시장을 체포한 것에 항의하는 시위대가 구호를
외치고 있다. [AP 뉴시스]








2월 19일 미얀마 군부가 발포한 실탄에 맞아 뇌사 상태에 빠졌던 여성 먀 트웨 트웨 킨(20)이
열흘 만에 숨졌다.  [AP 뉴시스]








2월 22일 미얀마 만달레이에서 군부 쿠데타 반대 집회가 열려 시위대가 대로를 가득 메우고 있다.
미얀마 전역에서의 총파업을 촉구하는 시위대를 향해 군부는 '무력진압'을 경고하고 있어
대규모 충돌이 우려되고 있다. [AP 뉴시스]









2월 23일 미얀마 만달레이 텟 나잉 윈의 자택에 그의 시신과 사진이 안치돼 있다.
목수로 알려진 텟 나잉 윈(36)은 지난 20일 군부 쿠데타 반대 시위 도중 미얀마 보안군의 총에
맞아 숨졌다. [AP 뉴시스]








2월 25일 미얀마 양곤에서 '시민 불복종 운동'(CDM)을 지지하는 미얀마 의사들이 군부 쿠데타
반대 행진에 동참하고 있다. 소셜미디어 플랫폼 페이스북은 미얀마 군부의 계정을 유지하는 것은
위험하다면서 "계정을 무기한 차단할 것"이라고 밝혔다. [AP 뉴시스]









2월 26일 미얀마 양곤에서 대학교수들이 군부 쿠데타 반대 시위에 참가자들의 서명이 담긴 '
대형 세 손가락 그림'을 들고 행진하고 있다. [AP 뉴시스]








3월 3일 미얀마 만달레이에서 군부 쿠데타 반대 시위대가 경찰이 쏜 최루탄을 피해
도주하고 있다. [AP 뉴시스]







3월 3일 미얀마 만달레이에서 교복과 미얀마 전통 모자를 쓴 교사들이 군부 쿠데타 반대
시위에 참여하고 있다. [AP 뉴시스]









3월 4일 미얀마 만달레이에서 전날 미얀마 군경의 총탄에 숨진 19세 여성 키알 신의 장례식이
열린 가운데 장례식에 참석한 한 여성이 눈물을 흘리고 있다. [AP 뉴시스]








3월 7일 미얀마 양곤에서 군부 쿠데타 반대 시위대가 경찰이 쏜 최루탄 가스에
휩싸여 있다. [AP 뉴시스]








3월 7일 미얀마 양곤에서 군부 쿠데타 반대 시위대가 임시 구조물 뒤에 모여 경찰과
대치하고 있다. [AP 뉴시스]









3월 8일 미얀마 양곤에서 군부 쿠데타 반대 시위대가 경찰의 시야를 가리기 위해 소화기
가스를 살포하고 있다. [AP 뉴시스]






3월 9일 미얀마 양곤에서 군부 쿠데타 반대 시위대가 '세손가락 경례'가 그려진 방패를
들고 자리 잡고 있다. [AP 뉴시스]




3월 26일 미얀마 양곤에서 반 쿠데타 시위대가 각종 깃발을 들고 행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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