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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과 시사

30년전 '쉬쉬'하며 감췄던 일본식 고분..이제는 말할 수 있다

 

 

 

 

 

1991년 장고분 가운데 처음으로 내부구조를 밝힌 전남 함평 신덕고분. 전형적인

일본식 고분(장고분 혹은 전방후원분)으로 알려져 학계의 비상한 관심을 모았다.

그러나 발굴조사보고서는 나오지 않았다.|국립광주박물관 제공

 

 

 

 

 

 

국립광주박물관의 ‘함평 예덕리 신덕고분’ 특별전에 전시된 신덕 1호분 출토 ‘연리문

구슬’. 색색의 유리판을 이어 붙여 줄무늬처럼 만드는 기술의 난도로 인해 희귀

유물로 꼽힌다. 국립광주박물관 제공

 

 

 

 

 

 

 

 

시를 찾은 관람객들이 무덤에서 출토된 쇠비늘 갑옷을 살펴보고 있다.

광주=박영철 기자 skyblue@donga.com

 

 

 

 

 

 

 

30년전 '쉬쉬'하며 감췄던 일본식 고분..이제는 말할 수 있다

 

 


“아니 이건….” 1991년 3월 26일 전남 함평 신덕고분을 찾은 국립광주박물관 조사팀이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고분의 원형부 서쪽에 드러난 도굴구덩이가 보인 것이다.

더욱이 이 도굴구덩이는 불과 며칠 전에 판 흔적이 분명했다.

 

팠다가 다시 메운 구멍에는 부러뜨린 소나무 가지가 채 마르지도 않은 상태로 들어있었습니다.

주변에서 갓 베어진 소나무가 나뒹굴고 있었습니다.

도굴 구덩이 주변에는 약간의 철기 부스러기와 도자(刀子·작은 칼)편이 흩어져 있었습니다.”

(성낙준 당시 국립광주박물관 학예연구관의 회고)

 

 

 

 

 

 

 

 

함평 신덕고분의 도굴흔적. 국립광주박물관이 실측조사하기 불과 며칠전 도굴당한

흔적이었다.|국립광주박물관 제공

 

 

 


■생생한 도굴 흔적

 

그야말로 ‘따끈따끈한’ 도굴 흔적이었다. 당시 이어령 문화부장관이 직접 검찰총장에게 전화를 걸어 검찰 수사를 의뢰했다.

강도높은 검찰 수사가 계속되던 어느 날이었다.

 

신원을 밝히지 않은 관람객이 서울의 국립중앙박물관 동문에 포장상자를 잠시 맡겨놓고는 사라졌다. 맡긴 사람은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하도 이상해서 그 포장상자를 뜯어보니 고분에서 출토된 것으로 보이는 ‘철기류’ 였다.

도굴범들은 2년 6개월 뒤인 1993년 9월 검거됐다.

 

그러나 이미 도굴품 중 상태가 좋은 65점은 600만~2000만원을 받고 팔아넘긴 뒤였다.

당시 신문은 ‘신덕고분은 1971년 발굴된 무령왕릉을 방불케하는 엄청난 규모이며, 도굴범이 팔아치운 유물 중 5~6점은 국보급’이라고 소개했다.

 

 

 

 

 

 

 

 

 

함평 신덕고분의 원경. 신덕고분은 1980년대부터 존재가 알려졌다. 도굴이 됐지만

1991년 장고분으로서는 처음으로 내부구조가 밝혀졌다.|국립광주박물관 제공

 

 

 

 


■처음 조사된 일본식 고분

 

검찰수사와는 별도로 국립광주박물관 등은 4월부터 40여일간 본격 발굴을 펼쳤다.

그런데 좀 이상했다.

발굴이 마무리되면 학술자료 축적을 위해 발굴조사보고서를 펴내는 것이 당연했다.

 

하지만 국립광주박물관은 고심 끝에 신덕고분의 발굴보고서를 내지 않기로 한다.

다만 보고용 행정보고서만 만들었을 뿐이다.

왜 그런 일이 벌어졌을까.

 

신덕고분이 처음으로 공식 조사된 이른바 장고분(전방후원분)이었기 때문이다.

일본에서는 ‘전방후원분(前方後圓墳)’이라 한다.

‘앞은 네모나고’(前方) ‘뒤는 둥근’(後圓) 형태라 해서 이름붙은 무덤(墳)이다.

한국에서는 ‘장고’와 닮았다고 해서 ‘장고분(長鼓墳)’이라 한다.

 

서기 3세기 중엽∼6세기 후반에 걸쳐 일본에서 유행한 무덤형식이다.

일본 전역에 2000기 넘게 분포하고 있다.

일본 고대국가 형성기의 일왕 무덤은 모두 이 형태이다.

가장 유명한 장고분은 399년 사망한 닌토쿠(仁德) 일왕의 무덤이다.

 

 

 

 

 

 

 

 

신덕고분은 비록 도굴됐지만 금동관과 금동신발 조각들이 여러 점 확인됐다. 무덤의

주인공 위상이 높았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금동관은 일본풍이 역력하지만 백제의

제작기법도 더러 보인다. 금동신발은 백제산일 가능성이 짙다. |국립광주박물관 제공

 

 

 

 

 

 


■터부시된 장고분 논쟁

 

신덕고분이 처음은 아니었다. 일제강점기 일본학자 일부가 전남 나주 덕산리와 신촌리 등의 고분 중에 장고분(전방후원분)과 유사한 고분이 있다고 주장한 바 있다. 하지만 해방 이후에는 전혀 거론되지 않았다.

고대 일본의 전형적인 무덤인 장고분이 한반도에 존재한다? 국내학계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다 1972년 윤세영 고려대 박물관 주임과 황용훈 경희대 교수 등이 “충남 부여에 장고분이 있다”고 주장했다.

한국고고학계는 벌집을 쑤셔 놓은 듯 들끓었다.

 

긴급 문화재위원회가 소집되어 윤세영·황용훈 두 사람의 발표를 청취했다.

하지만 문화재위원들의 반응은 차가웠다. 허황된 이야기니만큼 발굴 조사할 필요가 없다고 일축했다.

 

 

 

 

 

 

 

 

신덕고분에서 확인된 토기류. 뚜껑 접시 56조가 무덤입구에 깔려있었다. 굽다리 접시와

짧은목항아리 등도 보였다. 영산강 유역에서 제작된 토기가 다수인 것으로 파악된다.

|국립광주박물관 제공

 

 

 

 


그로부터 12년 뒤인 1983년 6월 강인구 영남대 교수가 한발 더 나간다.

“경남 고성 등과, 전남 나주·영암·무안·함평 등 여러 곳에서 장고분이 보인다”고 주장한 것이다.

국내학계에서는 별다른 주목을 끌지 못했다.

강교수의 주장은 오히려 일본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다.

 

특히 강교수가 거론한 고분 중 가야 지역에 존재한 고성 송학동 1호분이 관심의 초점이었다.

물론 강교수는 “‘전방후원분’(장고분)은 일본의 고유묘제가 아니라 한반도에서 건너가 발전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국내학계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일본학계는 두 갈래로 나뉘어졌다.

주로 원로학자들은 일왕 가계의 것으로 신성시되는 무덤형태가 한반도에 존재할 리가 없다고 고개를 내저었다.

 

 

 

 

 

 

 

 

 

신덕고분에서 출토된 고리자루 큰칼과 화살통장식, 나무 널. 손잡이가 꼰 형태의

고리자루큰칼과 관재로 쓰인 나무(금송)는 일본제로 보인다. 화살통 장식의 제작지는

일본일 수도, 백제일 수도 있다.|국립광주박물관 제공

 

 

 

 

 

 

 


그러나 ‘한반도 장고분’을 임나일본부와 연결짓는 이들이 생겼다.

일부 소장파는 장고분이 특히 고성 등 가야 지역에서 확인된다는 강교수의 주장에 흥분했다.

이거야말로 임나일본부의 결정적인 증거가 아닌가.

 

이후 전남 해남의 장고산 고분과 용두마을의 말무덤고분 등 장고형 고분의 존재가 계속 알려졌다.

반전의 과정도 있었다.

1970년대 ‘장고분’ 논쟁의 출발점이 된 충남 부여의 ‘추정 고분’은 자연구릉으로 밝혀졌다.

 

1980년대 일본에서 임나일본부 논쟁을 촉발시킨 경남 고성 송학동 1호분도 1999년 ‘장고분’이 아닌 ‘쌍분’으로 최종 판명됐다.

하지만 1980년대 중반 이후 영산강 유역에서 속속 알려진 장고분은 학계로서는 다루기 힘든 ‘뜨거운 감자’였다.

자칫 임나일본부의 소용돌이에 빠질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신덕고분에서 확인되는 구슬류. 이런 유리구슬류는 백제산이거나 일본에서도 백제관련

유적에서 출토된다. 신덕고분 구슬류는 백제를 통해 유입됐을 것이다.

|국립광주박물관 제공

 

 

 

 

 


■왜색 고분의 충격

 

그런 상황에서 또하나의 장고분으로 알려진 신덕고분이 처음으로 정식 발굴된 것이다.

과연 일본의 고분형식이라는 장고분이 맞았다.

무덤 내부에서도 일본색이 보였다.

 

천정과 4벽, 문의 안쪽에 모두 주칠(朱漆)이 되어 있었다.

빨갛게 칠했다는 얘기다.

출토된 대형 칼의 경우 손잡이 구멍이 일본 후나야마(구마모토현·熊本縣) 고분의 유물과 유사한 형태이다.

 

무덤에서는 무령왕릉에서 쓰인 금송제 관의 흔적이 보였다.

금동관과 금동신발의 파편도 여러점 출토됐다.

국내에서 처음 내부구조가 밝혀진 일본식 장고분인 것도 모자라 대단한 위상까지 갖췄다니….

아니 그런 무덤이 왜 영산강 유역에 존재했다는 것인가.

 

이런 판국이었으니 발굴조사를 맡은 국립광주박물관 등은 쉬쉬하며 발굴조사보고서를 내지 못했던 것이다.

뭐 시쳇말로 두려웠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따지고 보면 국내에는 장고분, 즉 전방후원분 연구자가 전무한 형편이었다.

‘선무당이 사람 잡는다’는 말이 있지 않은가.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덜컥 보고서를 냈다가 일본 학계에 이용만 당할 수 있지 않은가.

 

 

 

 

 

 

 

 

 

 

신덕고분에서 출토된 말갖춤새. 웅진기 후반을 대표하는 백제산인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국립광주박물관 제공

 

 

 

 

 

 


단적인 예가 있다. 1994년 5월 20일 일본 아사히 신문 1면 주요기사가 눈에 띄었다.

“한국 광주의 명화동 고분에서 전방후원분과 흡사한 고분이 발굴되었다. …

봉분 주위에 일본 전방후원분에서 특징적으로 나타나는 하니와(埴輪·원통형 토기)와 유사한 토기가 줄지어 세워졌다.”

 

기사는 “6세기 당시 고대 일본은 백제와 가야로부터 상당한 문화적인 영향을 받았지만 활발한 인적교류를 통해 일본 문화 또한 한반도에 유입됐다는 걸 입증한다”고 덧붙였다.

무슨 말인가. 장고분인 명화동 고분의 주위에 50㎝ 간격으로 원통형 토기가 세워져 있다는 것에 주목한 기사다.

원통형 토기(하니와)는 고분 주위에 세운 토기로 일본식으로 알려진 무덤조성방식이다.

 

아사히 신문의 기사가 보도 된 다음날(21일) 명화동 고분을 발굴한 국립광주박물관은 큰 곤욕을 치렀다.

청와대 교육문화수석이 전화를 걸어 “그러면 우리가 저쪽(일본)의 지배를 받았다는 얘기냐”면서 “뭔가 대응책이 필요한 게 아니냐”고 주문한 것이다.

 

당시는 일본의 근·현대사 왜곡 때문에 죽을 노릇이었던 때였다.

그런데 이번에는 일본이 임나일본부설을 주장할 거리가 생겼고, 그걸 기다렸다는 듯이 일본 언론이 주요 기사로 다뤘으니 예민한 반응을 보일 수밖에 없었다.

 

 

 

 

 

 

 

 

신덕고분에서 확인되는 다양한 철기와 갑옷 등 철유물들.|국립광주박물관 제공

 

 

 


■속속 확인되는 장고분의 존재

 

이후 신덕 및 명화동 고분 뿐이 아니라 전남 영암 자라봉, 함평 장고산, 영광 월산리, 광주 월계동 등 영산강 유역에서 장고형 고분이 속속 발견됐다.

장고형 고분은 결국 영산강 유역을 중심으로 한 전라도 지역에서만 나타나는 ‘일본식 묘제’였던 것이다. 그것도 5세기말~6세기초까지 딱 50여년간….

 

장고분 발굴이 이어져 자료가 축적되면서 본격적인 논의가 진행됐다.

이 무덤의 기원은 한반도냐, 아니면 일본이냐, 또한 무덤을 쌓은 사람은 일본인(왜인)이냐, 백제인(혹은 마한 출신의 토착세력)이냐 하는 것이었다.

일본학계는 “네모 지고 주위에 구덩이 시설을 갖춘 방형주구묘(方形周溝墓)의 돌출부가 ‘전방후원분’으로 발전했다”면서 일본 자생설을 주장했다.

 

일본에서는 이 주구묘가 기나이(畿內)지방을 중심으로 확산됐고, 한국과 가까운 규슈(九州)에서는 고훈(古墳) 시대(3세기 중반~7세기) 초기에 축조되기 시작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하지만 기원 전후에 조성된 주구묘(주변에 구덩이 시설을 두른 묘)가 한반도 전라도 지방에서도 잇달아 발굴되고 있다.

만약 주구묘가 장고분의 전신이라면 외려 한반도 기원설이 설득력을 얻게 되는 셈이다.

 

그러나 한반도에서는 지금까지 14기만 확인됐지만 일본 전역에는 2,000기가 넘게 분포하고 있다.

따라서 한반도에서는 반짝(5세기말~6세기초)했지만 일본에서 300년 넘게 대유행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왼쪽은 1972년 7월18일 동아일보에 실린 전방후원분 관련 기사. 부여에서 전방후원형

구릉이 발견됐다는 내용이다. 오른쪽은 1983년 7월11일 경향신문 기사. 강인구 영남대

교수가 경남 고성 송학동 고분 등 영산강과 낙동강 유역에서 전방후원분이 보인다고

주장했다.

 

 

 

 

 

 

■무덤 주인공은 한국인, 일본인?

 

무덤의 주인공을 둘러싸고도 치열한 논쟁이 벌어졌다.

5세기말 6세기초 마한 출신의 토착세력 수장이 왜(일본 규슈 지방)와 교류를 강화하면서 왜의 묘제(장고분)를 썼다는 주장도 있다.

 

5세기 말이라면 475년(개로왕 21년) 고구려의 침공에 백제 한성이 함락되면서 백제의 국세가 약화되었던 시기와 맞물린다.

혹은 한성에서 웅진으로 천도한 백제의 남하에 어필하는 의미에서 마한 출신 토착세력이 왜의 묘제를 썼다는 견해도 있다.

 

무덤 주인공이 아예 일본인이라는 주장도 있다. 즉 영산강 유역에 왜의 무역센터 같은 곳이 있었다는 것이다.

이곳에서 종사하는 유력한 왜의 상사 주재원이 고향의 무덤인 ‘전방후원분’을 쓰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이다.

또는 영산강 유역에 살고 있다가 백제 귀족으로 편입된 왜계 백제 관료라는 설도 있다.

 

다른 설도 있다.

일본 열도로 이주해간 한반도계 사람들 중 가야인들이 왜와 야마토 정권을 세우자 격변기에 북규슈에 살고있던 마한 출신 이주민이 망명객의 신분이 되어 본향(전남)으로 돌아왔다는 것이다.

 

한가지 분명한 사실이 있다.

무덤 주인공이 한국인이든 일본인이든 임나일본부와는 전혀 관계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국인(백제인이든 마한 출신이든)이라면 원천적으로 임나일본부와는 상관없는 일이다.

일본인이라도 마찬가지다.

 

임나일본부는 4세기말~6세기초까지 2세기 가량 한반도 남부에 경영했다는 식민지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장고분은 50년여간 반짝 유행했다.

그것도 겨우 14기 정도만 확인된다.

 

이 정도로는 왜가 장기간 지배한 흔적이라 할 수 없다.

게다가 그들이 주장하는 임나일본부의 주무대인 영남 지방에서 장고분은 보이지 않는다.

또 백제가 외국인 채용 방침에 따라 조정에 출사시킨 왜인의 무덤이라 해도 임나일본부와는 관계가 없다.

 

 

 

 

 

 

 

 

광주 명화동 고분에서 확인된 원통형 토기열. 1994년 5월 20일 일본 아사히 신문 은

“한국 광주의 명화동 전방후원분에서 봉분 주위에 일본 전방후원분에서 특징적으로

나타나는 하니와(埴輪·원통형 토기)와 유사한 토기가 줄지어 세워졌다”고 보도했다.

|국립광주박물관 제공

 

 

 

 

 


■촌스러워진 국적논쟁

 

최근 흥미로운 소식이 들렸다.

1991년 기껏 조사해놓고도 ‘쉬쉬’하며 보고용 행정보고서로 만족해야 했던 신덕고분 발굴보고서가 30년만에 발간됐다.

 

이에 발맞춰 10월24일까지 국립광주박물관에서 ‘함평 예덕리 신덕고분, 비밀의 공간, 숨겨진 열쇠’라는 제목으로 특별전까지 열리고 있다.

필자는 2000년대 중반에 장고분을 다룬바 있다.

 

당시 몇몇 연구자가 복사본으로 갖고있던 행정보고서를 입수해서 그걸 토대로 학계의 입장을 취재한 바 있다.

그런 인연 때문에 ‘신덕고분 발굴 조사 보고서’의 발간 소식이 매우 반가웠다.

 

필자는 보고서에 실릴 한·일 연구자들의 논문을 미리 받아보고 20년 남짓만에 장고분 공부를 다시 해봤다.

그런데 기원 및 국적논쟁이 그때나 지금이나 크게 달라진 것은 없었다.

딴은 그렇다. 무령왕릉처럼 주인공을 알 수 있는 명문이 나온다면 또 모르겠다.

 

그렇지 않다면 국적 논쟁은 영영 평행선을 그리게 될 것이다.

아닌게 아니라 장고분 주인공의 국적을 따진다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

요즘 학계의 분위기도 달라진 것도 같다.

한국인이니, 일본인이니 하고 국적을 딱 잘라 주장하는 것을 약간 촌스럽게 느끼는 듯하다.

 

 

 

 

 

 

 

 

일본의 대표적인 장고분(전방후원분)인 닌도쿠(仁德)왕릉. 서기 3세기 중엽∼6세기

후반에 걸쳐 일본에서 유행한 무덤형식이다. 일본 전역에 2000기 넘게 분포하고 있다.

 

 

 

 

 

 


보고서 논고 가운데 김낙중 전북대 교수의 글(‘신덕고분의 분구와 석실’)은 “신덕고분은 일단 왜의 규슈(九州) 세력과 관계가 깊은 것”으로 서술했다.

고분 형태나 매장시설로 보아 그렇다는 것이다.

그러나 무덤 주위를 두른 도랑(주구)과 돌뚜껑을 덮은 무덤길 항아리, 띠모양으로 얇게 깐 돌(즙석), 원통형 토기(하니와)를 두르지 않은 점 등은 또 전형적인 일본식이 아니다.

관대나 관고리가 부착된 목관 등은 백제 중앙의 영향으로 볼 수 있다.

 

출토유물은 어떤가.

다카타 간타(高田貫太) 일본 국립역사민속박물관 교수는 신덕고분의 유구와 출토 유물을 왜계와 백제계, 왜+백제계, 재지계(마한 출신 토착세력) 등으로 도식화했다.

 

다카타에 따르면 왜계는 장고형 분구와 규슈계 돌방, 그리고 꼰 모양의 둥근고리큰칼(환두대도) 등이다.

백제계는 장식 목관과 말갖춤새 세트, 구슬류와 신발 등의 장신구, 그리고 목관의 안치방식 등을 꼽을 수 있다.

 

또 ‘왜+백제’는 금동관과 은제장식, 삼각형 철모(긴 나무 자루 끝에 날을 물려 찌르거나 던지는 무기) 등이다. 이밖에 무덤길 제사에 사용된 토기류는 마한 출신 토착세력의 요소가 보인다.

그러나 다카타의 견해 중 금동관의 경우는 전형적인 일본식이라는 견해(이한상 대전대 교수)도 있다.

 

게다가 검찰 수사 과정에서 도굴범이 팔아넘긴 유물 중에는 중국제 자기와 초두(조리기구·솥)가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한·중·일 3국의 요소가 다 들어있는 것이다.

 

 

 

 

 

 

 

 

 

1980년대 임나일본부 논쟁을 촉발시킨 경남 고성 송학동 고분. 장고분, 즉 전방후

원분일 가능성이 제기되어 일본학계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임나일본부와 관련된

논쟁이 일었다. 그러나 이 고분은 1999년 장고분이 아닌 쌍분으로 판명되었다.

 

 

 

 

 

 

 

 


■아직 회수되지 않은 신덕고분 유물들

 

비단 신덕고분만이 아니다.

고분을 구성하는 이런 복잡한 속성이야말로 영산강유역 ‘장고분’ 뿐 아니라 나주 복암리 3호분과 정촌고분 등 토착세력의 고분에서도 그대로 보이는 특징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이번에 신덕고분 출토 금동관과 금동신발을 분석한 다카다 교수는 “영산강 유역의 장고분(전방후원분)이 특정 정치체의 정치·경제적 의도가 강하게 반영됐다는 식으로 해석하면 안된다”고 마무리했다.

 

당시 영산강 유역 사회의 다각적인 대외교섭과 적극적인 외래 묘제 수용의 움직임을 읽어내야 한다는 것이다. 30년 만에 펴내는 보고서 내용이 성에 차지 않을 수 있다.

그래서 결론이 뭐냐.

한국인이라는 거냐, 일본인이라는 거냐 분명하게 언급하라고 채근한다면 할 말은 없다.

오히려 그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다는 것이 정답일 수 있다.

5세기 말~6세기 전반 영산강 일원은 상상보다 훨씬 개방적이었을 수도 있다.

 

일본을 방문한 백제인이 거대한 일본의 장고분(전방후원분)을 보고 돌아와 그와 비슷한 무덤을 조성했을 수도 있다.

또한 ‘외국인 우대정책’을 편 백제의 조정에 출사해서 백제 관료 혹은 귀족이 된 왜인의 무덤일 수도 있다.

 

그 어떤 경우든 지금 이 순간의 민족 감정으로 1400년 전을 재단하는 것이 얼마나 편협한 일인가.

또하나, 검거된 신덕고분의 도굴범들은 도굴품 중 최상품 65점을 팔아넘겼다고 진술했다.

 

수사과정에서 국보급 유물도 포함된 것으로 밝혀졌다.

그러나 점 당 600만~2000만원을 받고 판 유물들은 30년이 지나도록 나타나지 않고 있다.

도굴품인줄 알고도 사들였다면 그것은 장물이 분명하다.

물론 몇단계를 거쳐 유통되었다면 지금 소장자는 도굴품인지도 모르고 샀을 수도 있다.

 

그 경우 ‘선의취득’을 주장할 수 있겠다. 그러나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도굴품은 이제 유통자체가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불안에 떨면서 그와같은 도굴품을 소장할 필요가 있을까.

지금 신덕고분 도굴품을 소장하고 있다면 1991년 도굴범이 국립중앙박물관 정문에 갖다놓았던 전례를 따라주기를 바란다.

1400년전의 수수께끼 같은 영산강 유역의 역사에 한발 더 나아갈 수 있게….

 

 

 

 

(이 기사 작성을 위해 박경도 국립광주박물관 학예연구실장, 성낙준 전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장, 조현종 전 국립광주박물관장, 권오영 서울대·이한상 대전대·김낙중 전북대 교수가 도움말과 자료를 제공해주었습니다.)

 

 

 

 

 

이기환 경향신문 선임기자 lkh@kyunghyang.com

ⓒ 경향신문 & 경향닷컴(www.khan.co.kr), 

 

 

 

 

 

 

 

발굴 조사가 진행 중이던 전남 함평 ‘신덕 1호분’ 전경(왼쪽 사진). 위는 둥글고 아래는

각이 진 열쇠구멍 모양은 전형적인 전방후원분 형태다국립광주박물관 제공

 

 

 

 

 

30년 만에 임나일본부 망령서 벗어난 신덕 고분

 

 

 

함평 신덕 1호분 왜인 아닌 지역수장 무덤 가능성 높아”
30년 미공개 발굴조사 결과 이달 말 발표

 

 

 

임나일본부설에 이용될 우려로 인해 30년간 공개되지 않은 삼국시대 ‘신덕 1호분’ 발굴조사 결과가 이달 말 발표된다.

동아일보가 미리 입수한 발굴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고분 출토 유물에서는 백제와 왜(倭)의 문화가 혼재된 양상이 확인됐다.

 

조사 결과를 분석한 한일 고고학자들은 20, 30대 남성으로 추정되는 이 무덤의 주인이 지역 수장일 가능성이 높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는 한반도에 진출한 왜인이 묻혔을 것으로 보는 임나일본부설의 시각과 배치되는 것이다.

1991년 3월 도굴 흔적이 발견돼 첫 조사가 이뤄진 신덕 1호분은 일본의 고대 무덤에서 흔히 발견되는 열쇠구멍 모양의 전형적인 ‘전방후원분(前方後圓墳·앞은 네모지고 뒤는 둥근 봉분을 가진 무덤)’이다. 신덕 1호분은 이런 봉분 모양 탓에 고대 일본이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다는 임나일본부설의 근거로 쓰일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됐다.

 

하지만 조사 결과 부장 유물들에 백제와 왜 문화가 혼합돼 있어 이들과 교류한 영산강 일대 지배세력이 무덤을 만들었을 가능성이 큰 것으로 분석됐다.

 

 

● 무덤 주인은 20, 30대 남성

 

 

신덕 1호분에서 출토된 유리구슬. 국립광주박물관 제공

 

 

 

 

 

 

국립광주박물관이 일본 연구자들까지 참여시킨 신덕 1호분 발굴조사 보고서를 전격 발간키로 한 건 6세기 영산강 일대 지배세력의 독자성을 보여주는 다양한 고고학 증거들이 최근 발견된 데 따른 것이다. 임나일본부설의 한계가 명확해졌다는 얘기다.

앞서 박물관은 이 무덤을 1991년부터 2000년까지 네 차례 조사했지만 당시에는 조사 결과를 공개하지 않았다.

 

김낙중 전북대 교수(고고학)는 “6세기 전엽 영산강 유역의 현지 세력이 중요한 역할을 한 사실이 밝혀져 임나일본부설에 의해 왜곡 해석될 여지가 줄었다.

신덕 1호분 발굴조사 보고서 발간에 일본 학자들까지 참여시킨 건 국내 학계의 자신감이 반영된 결과”라고 말했다.

 

 

 

 

 

 

 

무덤 안에서 나온 ‘쇠비늘갑옷’. 가죽 끈으로 엮기 위해 뚫은 구멍이 나있다.

국립광주박물관 제공

 

 

 

 

 

 

보고서에 따르면 신덕 1호분에서는 무덤 주인의 높은 신분을 보여주는 금동관, 금동신발, 연리문 구슬, 중층 유리구슬, 큰칼, 비늘갑옷, 투구, 말띠꾸미개 등의 다양한 부장품이 출토됐다.

무덤에서 출토된 치아 6점의 크기와 마모 정도를 분석한 결과 20대 후반~30대 중반의 남성이 묻힌 것으로 추정됐다.

 

 

 

● 금동관․금동신발 백제 장인 솜씨

 

 

 

 

 

 

 

 

 

무덤에서는 백제와 왜의 문화가 뒤섞인 양식이 여럿 확인됐다.

백제, 왜, 가야의 문화를 폭넓게 받아들인 영산강 일대 지배세력의 문화수용 양상이 반영된 것.

 

다카타 간타(高田貫太) 일본 국립역사민속박물관 교수는 보고서에 포함된 ‘함평 신덕 1호분 출토 관, 식리에 대하여’ 논고에서 두 매의 측판이 발꿈치와 발등에서 결합된 금동신발 구조를 근거로 백제 공인이 부장된 금동신발을 제작한 것으로 봤다.

 

금동관 역시 귀갑(龜甲·거북 등딱지) 무늬를 새긴 양상이 금동신발과 흡사해 동일한 기술전통을 가진 백제 공인이 제작한 것으로 분석됐다.

이에 비해 전방후원분 구조나 꼰 형태의 둥근고리칼(環頭大刀·환두대도)은 왜계 문화의 속성으로 분류됐다.

 

관테 위로 두 개의 산봉우리가 솟아난 모양의 광대이산식(廣帶二山式) 금동관은 왜와 백제의 요소가 혼합된 양식이다.

그는 “신덕 1호분은 영산강 유역 사회의 주체적인 대외 교섭과 적극적인 외래 묘제 수용의 움직임을 보여준다”며 “이곳에 묻힌 이는 백제, 왜와 밀접한 관계를 지닌 지역집단의 수장층으로 볼 수 있다”고 썼다.

국내 고고학계도 6세기 전엽 백제 왕권이 영산강 유역으로 영향력을 확대하는 과정에서 이를 견제하기 위해 왜, 가야와 활발히 교류한 이 지역 수장의 무덤일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있다.

 

김낙중 교수는 ‘함평 신덕 1·2호분의 분구와 석실’ 논고에서 “취사 선택적 묘제의 도입을 보면 무덤 축조 주체는 현지 세력이었을 가능성이 높다”며 “(무덤 주인은) 영산강 유역권 내 다른 어떤 지역보다 백제 중앙과의 깊은 관계 속에서 지역 지배에 중추적 역할을 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무덤에서는 6세기 전엽 한반도 남부와 일본 열도, 동남아시아를 아우르는 문화교류가 활발히 이뤄졌음을 보여주는 유물도 다수 나왔다.

목관(木棺) 조각의 수종이 무령왕릉과 같은 ‘일본산 금송’으로 판별된 사실이 대표적이다.

 

여기에 유리구슬 41점의 성분을 분석한 결과 이 중 5점(녹색 및 황색 유리)의 원료 산지가 태국일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함평 신덕고분에서 나온 뚜껑접시

[국립광주박물관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함평 신덕고분 발굴 30년만에 보고서…"주인은 여전히 미궁

 

 

 

 

국립광주박물관 발간…1호분에 왜·백제·토착 세력 영향 혼재

한때 '임나일본부설' 근거 우려도…"학계 논의 활발해지길"

 

 

 

 

 

(서울=연합뉴스) 박상현 기자 = 일본의 옛 무덤 양식인 '전방후원분'(前方後圓墳·앞은 네모지고 뒤는 둥근 무덤)과 매우 유사한 전남 함평 신덕고분의 조사 보고서가 발굴 30년 만에 발간된다.

국립광주박물관은 신덕 1호분과 2호분 축조 양식과 출토품 정보를 담은 '함평 예덕리 신덕고분' 보고서를 이달 하순에 펴낸다고 10일 밝혔다.

 

보고서는 신덕 1호분과 2호분 위치·자연환경·조사 경위를 설명하고 무덤 내부 구조와 유물을 풍부한 사진과 함께 상세히 소개했다.

한국 학자 6명과 일본 연구자 3명이 쓴 논고도 게재했다.

6세기 초반에 조성한 것으로 추정되는 신덕 1호분은 국립광주박물관이 1991년 3월 실측조사를 하다 도굴 구멍이 있음을 확인하고 그해 여름에 발굴조사를 시작했다.

박물관은 2000년까지 네 차례에 걸쳐 조사를 시행했으나, 정식 학술 발굴조사 보고서를 펴내지 않았다.

 

그 이유는 시신을 묻는 봉분 주변은 둥글게 쌓고, 앞에 사각형 단을 마련한 무덤 형태에 있었다.

이러한 무덤은 일본 곳곳에 많다.

일례가 2019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오사카의 '모즈 후루이치 고분군'이다.

 

전방후원분이나 전방후원형 고분, 전통악기 장구와 닮아 '장고분'이라고도 하는 무덤은 신덕고분 발굴 전후에 영산강 일대에서 집중적으로 확인됐는데, 한편에서 이 고분들이 고대 일본이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다는 임나일본부설 근거로 이용될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됐다.

하지만 10여 곳에 불과한 전방후원분을 바탕으로 일본이 호남 지역을 점유했다는 시각은 합리적이지 않으며, 이 지역이 왜와 활발하게 교류했음을 보여주는 유적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견해가 힘을 얻었다.

 

김낙중 전북대 교수는 보고서에서 신덕 1호분에 대해 "무덤 형태와 매장시설로 보면 왜 규슈 세력과 관계가 깊은 상황에서 축조됐지만, 관대나 관고리가 부착된 목관에서는 백제 영향도 확인된다"면서 무덤 주변 도랑 형태, 돌 뚜껑을 덮은 무덤길의 항아리 등을 근거로 현지 토착 세력이 만들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주장했다.

 

다카타 간타(高田貫太) 일본 국립역사민속박물관 교수는 신덕 1호분에서 나온 마구 세트, 구슬과 시신 안치 방식은 백제계 속성이지만, 관과 삼각형 철모는 왜와 백제 요소가 섞여 있다고 설명했다.

또 신덕 1호분에서 발견된 구슬이 피장자 위계가 상당히 높았음을 알려주는 유물로 백제를 통해 입수됐을 가능성이 있다는 주장이 나왔고, 목관 재질은 무령왕릉과 같은 일본 특산 나무인 금송이라는 사실도 드러났다.

 

현재 호남 지역 전방후원분은 12곳에 14기가 산재한다고 알려졌으며, 축조 시기는 모두 5세기 후반∼6세기 초반으로 짐작된다.

무덤에 묻힌 주인공이 누구인가에 대해서는 크게 토착 세력 출신이라는 설과 왜인이라는 설로 나뉜다. 왜인이라고 해도 백제가 파견했거나 왜에서 망명한 인물이라는 주장이 존재한다.

게다가 각각의 무덤에 잠든 사람의 성격이 달랐을 가능성도 있어 피장자 신분을 일률적으로 정하기 힘든 상황이다.

 

 

 

 

 

 

 

 

 

 

함평 신덕고분에서 나온 금동관 조각

[국립광주박물관 제공. 

 

 

 

 

 

 

 

이번 보고서도 신덕 1호분을 조성한 세력을 명확하게 규정하지 않아 피장자 출신지와 신분은 여전히 미궁 속에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박경도 국립광주박물관 학예연구실장은 연합뉴스와 통화에서 "신덕고분은 심하게 도굴됐던 대부분의 전방후원형 고분과 달리 유물 구성을 온전하게 알 수 있는 유일한 사례여서 학계의 관심이 컸다"고 말했다.

 

이어 "조사 결과를 보면 왜, 백제, 토착 세력의 흔적이 두루 나타나 무덤을 쌓은 집단과 피장자를 단정하기는 아직 어렵다"며 "보고서 발간을 계기로 학계에서 신덕고분에 관한 논의가 활발해지길 기대한다"고 덧붙였다.

 

 

 

 

psh59@yna.co.kr

 

 

 

 

 

 

함평 금산리 고분의 즙석이 드러나 있는 모습. 무덤의 바깥 전면에 타일처럼 입힌 돌을

뜻하는 즙석 문화는 한반도가 아니라 일본열도의 풍습이었다. 권오영 교수 제공

 

 

 

 

 

 

 

 

한 변의 길이가 60미터에 이르는 전남 함평 금산리 고분의 발굴 모습. 금산리 고분에선

일본식 하니와와 닮은 토제품과 토기 등이 많이 나왔다. 전남문화재연구원 설명 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