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7월 오바마 미국 대통령 재임 시절, 철군 계획에 따라 아프가니스탄 바그람
공군기지에서 미군들이 수송기에 탑승하고 있다. ⓒAP Photo
아프가니스탄에서 복무했던 미군. (사진제공=플리커)
1일(현지시간) 아프간 남부 칸다하르 외곽 고속도로에서 탈레반의 퍼레이드 행렬 위로
헬기가 날아가고 있다. [트위터 캡처]
1일(현지시간) 아프가니스탄 남부 칸다하르에서 미국산 군용차를 타고 퍼레이드
중인 탈레반 전사들. [트위터 캡처]
미군의 아프간 철수, '다 계획이 있었구나
미국이 주한미군의 분산배치 등을 검토하는 기준은, 보수 매체의 주장과 달리 '한국 정부가 미국 정부가 시키는 대로 따르는지 않는지'와는 관계가 없다.
북한의 위협 여부가 기준이다.
한국행을 희망한 아프간인 협력자 391명을 구출한 한국 정부의 ‘미라클 작전’에 웬디 셔먼 미국 국무부 부장관의 도움이 컸다고 한다.
지난 8월22일 열린 아프간 관련 20여 개국 외교차관회의에서 한국행을 희망하는 아프간 협력자 전원을 버스에 태워 카불 시내를 통과시키는 해결책을 셔먼 부장관이 제시했다는 것이다.
미국과 거래하는 아프간 버스회사의 차량을 대절해서 미군과 탈레반이 함께 근무하는 검문소를 통과한 뒤 카불 공항에 이르는 방법이었다.
카불 공항까지 협력자들을 데려갈 수단을 찾지 못하던 암담한 상황에서 셔먼 장관의 제안은 결정적이었다.
셔먼 장관으로서도 자신이 힘들었던 순간 한국 정부로부터 받았던 ‘특별 선물’에 대한 답례를 톡톡히 한 셈이다.
지난 7월25~26일 셔먼 장관의 중국 방문은 그에게 매우 치욕적인 여행이 될 뻔했다.
미·중 관계가 최악인 상황에서 중국에 북한과의 대화를 주선해달라고 부탁하러 가야 했다.
중국 외교부는 “미국은 부탁할 일이 있을 때만 우리를 찾는다”라는 볼멘소리와 함께 3월17일 알래스카 회담의 복수혈전을 벼르는 듯했다.
그런데 대반전이 일어났다. 그가 중국에 굳이 북한과의 관계를 부탁하지 않아도 된 것이다.
셔먼 장관은 7월22일 청와대로 문재인 대통령을 예방했는데 그 자리에서 문 대통령이 남북한의 통신선 복원 추진을 귀띔했다고 한다.
원래는 두 사람의 면담 일정이 잡혀 있지 않았는데 대통령이 직접 그를 부른 것으로 알려졌다.
셔먼 장관은 문 대통령과의 면담에서 “한국은 미국의 본격적인 파트너이자 진정한 파트너”라고 강조했다는 것.
7월26일 중국 톈진에서 열린 미·중 회담은 중국의 예상과 다르게 전개됐다.
중국에 더 이상 부탁할 게 없어진 웬디 셔먼 부장관이 알래스카에서 토니 블링컨 국무장관보다 더 강경하게 중국을 몰아붙였다.
북한이 중국에 통신선을 복원키로 했다는 사실을 통보한 것은 공식 발표 하루 전이었다.
셔먼 장관이 미국으로 돌아간 직후다. 중국은 영문도 모른 채 당한 셈이다.
7월27일의 남북 연락 통신선 복원은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총비서가 친서를 통해 큰 그림을 그린 것이다. 김 총비서로서는 8월부터 본격화될 식량난으로 속이 타들어가는 마당에 정작 돕겠다던 중국은 미적대기만 했다.
더 이상 중국만 바라볼 수는 없었을 터이다.
그러자 중국이 바빠졌다.
남북 통신선이 복원된 7월27일부터 7월31일 사이에 중국산 식량과 정제유가 평양 시내에 쫙 깔렸다고 한다.
중국이 5월 말부터 주겠다던 식량 10만t이 이때에야 비로소 북한에 들어간 것으로 알려졌다.
그리고 곧바로 8월1일, ‘김여정 담화’가 나왔다. 그는 통신선 연결에 대해 ‘끊어졌던 것을 물리적으로 다시 연결했을 뿐, 남북 정상회담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며 확대해석을 경계했다.
한편으론 8월의 한·미 연합훈련이 재개되는지 지켜보겠다고 말했다.
이어서 8월6일에는 중국의 왕이 외교부장이 아세안 지역안보포럼(ARF) 외교장관회의에서 한·미 연합훈련의 중단을 촉구했다.
거의 같은 시기 중앙아시아에서 러시아와 합동 군사훈련을 하고 있는 중국의 외교부장이 할 소리는 아니었다.
7월22일 서울 외교부를 방문한 웬디 셔먼 미국 국무부 부장관(왼쪽)과 정의용
외교부 장관. ⓒ연합뉴스
비로소 북한에 전달된 중국의 식량
이 같은 왕이의 무리한 발언은 사실 북한을 겨냥한 것이다.
7월 말 중국의 쌀을 받았으니 ‘밥값을 하라’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자 한·미 연합훈련 시작일인 8월10일에 다시 ‘김여정 담화’가 나왔다.
한·미 연합훈련을 거론하며, “미국이야말로 지역의 평화와 안정을 파괴하는 장본인이다.
조선반도에 평화가 깃들자면 미국이 남조선에 전개한 침략무력과 전쟁장비들부터 철거해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당시 언론들은 북한이 주한미군 주둔을 용인할 것처럼 행세하더니 드디어 본색을 드러냈다며 흥분했다.
그러나 전후 맥락을 따져보면 북측은 중국의 밥값 요구에 립서비스를 해준 것에 지나지 않는다.
밥값으로 폭탄을 요구했는데 폭탄 대신 ‘말 폭탄’으로 갈음한 형국이다.
그러나 ‘말 폭탄’도 폭탄인 만큼 남북 통신선으로 겨우 이어놓은 남북 채널이 또다시 동력을 상실할 위기에 처했다.
이때 등장한 것이 바로 성 김 미국 국무부 대북정책 특별대표와 이고리 모르굴로프 러시아 북핵 수석대표 겸 외무차관이다.
두 사람은 주말인 8월21일 인천공항을 통해 입국해 월요일인 8월23일 바쁜 일정을 소화했다.
한·미 북핵 대표회담 결과는 자세하게 알려진 반면 그날 오후 있었다는 성 김 대표와 모르굴로프 대표 사이의 회담에 대해서는 일절 알려진 사실이 없다.
공식적으로는 한 번 만난 것으로 돼 있지만 소식통에 따르면 한 번 더 만나기로 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즉, 미국이 북한을 다시 대화 테이블로 끌어내기 위해 한·미 채널과 미·러 채널을 동원했는데 한·미 채널을 통해서는 공개적인 메시지 발신에 주력하고 미·러 채널을 통해서는 비공개적인 대북 직접 설득에 주력하겠다는 모양새가 된 것이다.
공개 메시지의 효과를 증폭하기 위해 미국 국무부가 한·미 북핵 대표회담이 진행된 8월23일 월요일에 맞춰 ‘미국과 북한 관계 성명’이라는 이례적인 문건을 발표하기도 했다.
북한과 미국 관계를 5가지 주제로 나눴다.
문건은 첫 번째 항목인 ‘북한과의 관계’에서 미국의 궁극적 목표는 ‘한반도의 평화와 번영’이라고 규정했다. 두 번째 항목에서는 미국의 대북 원조에 대해 ‘과거 북한이 기근과 자연재해를 겪을 때 북의 요청에 따라 식량과 긴급 지원을 제공했다’는 사실을 환기시켰다.
대북 지원은 성 김 대표의 최근 두 차례 방한과도 연결되는 대목이다.
미국 바이든 정부는 대북 인도적 지원에 관심과 의지를 보여왔다.
사실 대북한 인도적 지원에 대해서는 지난 5월21일 한·미 정상회담에서 양 정상이 합의한 바 있다.
그 뒤 6월21일 서울을 방문한 성 김 대표가 국내의 대북 인도적 지원 단체 대표들을 만났다는 얘기가 있었다.
이번에도 8월23일 그와 노규덕 한반도평화교섭본부장과의 회담 내용을 보면 “한·미 양측이 보건과 감염병 방역, 식수 위생 등 분야에서 북한과의 인도적 협력 방안을 논의했다”라고 되어 있다.
바이든 행정부가 대북 인도적 지원에 관심을 가진 이유는, 그것 말고는 마땅히 북한을 끌어낼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일각에서는 바이든의 대북정책이 제재 완화 등 선제적 조치를 시도하지 않는다는 점을 들어 사실상의 ‘전략적 인내’ 전략이라고 비판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는 미국 의회의 견제라는 현실적 제약을 과소평가한 주장이다.
8월 초 미국 의회조사국(CRS)이 발간한 대북 외교 현황 보고서는 “바이든 행정부가 북한의 점진적 비핵화에 상응해 부분적 제재 완화를 추진할 것”으로 전망하면서 “관련 법안에 담긴 제한을 감안할 때 의회의 지지 없이는 점진적 제재 완화는 쉽지 않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의회의 지지 없이 대통령이 독단적으로 제재 완화를 강행하려 할 경우 거센 저항에 부딪힐 것이란 얘기다.
7월28일 왕이 중국 외교부장(오른쪽)이 톈진에서 탈레반 2인자 물라 압둘 가니
바라다르와 만났다. ⓒAFP PHOTO
이런 상황에서는 인도적 지원조차 마음 놓고 하기 힘들다. 대신 한국의 대북 인도적 지원을 미국이 뒷받침해주는 게 최대치인 것으로 보인다.
바로 2018년 모델이다.
먼저 남북 채널이 열리고 대북 인도적 지원 문제가 떠오르면 미국이 자연스럽게 참여해 북·미 채널을 열어가는 방식이다.
남북 간 인도적 지원 문제가 떠오르면 한·미 간, 북·미 간 대화가 동시에 굴러가게 된다. 이때 미국은 뉴욕 채널과 베이징 채널을 가동할 수 있다.
김정은 노동당 총비서가 7월27일 통신선을 복원하는 ‘플랜 B’를 시작했을 때도 미국의 예상되는 움직임을 염두에 두었을 것이다.
지난 4월까지만 해도 북한의 시야에는 오직 중국뿐이었다.
한국과 미국은 없었다.
그러나 중국이 약속했던 지원은 않고 무리한 요구만 계속하자 중국과의 관계는 김여정 선에서 대응(플랜 A)하며 김정은 본인은 보다 큰 그림에 주력하는 것으로 보인다.
러시아 등장의 각별한 의미
바로 이 시점에 러시아가 등장했다는 것은 각별한 의미가 있다.
김여정의 두 번째 담화로 인해 한·미 연합훈련 이후에도 남북 채널 재가동이 쉽지 않은 상황에서 러시아가 촉매제 역할로 등장한 것이다.
소식통들에 따르면, 미·러 북핵 대표회담을 마친 뒤 모르굴로프 차관이 본국으로 돌아가면 러시아가 적절한 시점에 북한에 특사를 파견할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미국이 러시아에 기대하는 비공식 역할이 바로 그것이다.
한·미는 공개 메시지로 북한을 설득하고 러시아는 직접 대면으로 김 총비서를 설득하는 것이다.
미국이 러시아 카드를 쓴 것은 이번이 두 번째다.
첫 번째는 지난 5월19일 블링컨 미국 국무장관이 라브로프 러시아 외무장관을 만나 6월16일 미·러 정상회담까지 북·미 대화에 대한 김 총비서의 전향적 반응을 이끌어내 달라고 부탁한 것이었다.
당시 라브로프 장관이 직접 외교 채널을 동원해 북한을 설득했다고 한다.
북한은 이에 대해 미·러 정상회담 다음 날인 6월17일 김정은 총비서가 직접 “대화에도 대결에도 다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라며 처음으로 대화 가능성을 열어놓았다.
즉 러시아가 움직이면 북한이 반응을 보인다는 사실이 확인된 것이다.
두 번째에 해당하는 이번 러시아 카드는 웬디 셔먼 부장관이 중국을 통해 북한을 끌어내려던 노력이 사실상 무산되면서 본격 가동됐다고 한다.
미국의 요청에 푸틴 대통령이 직접 라브로프 외무장관에게 협조를 지시했다.
라브로프 장관은 이번에 모르굴로프 차관에게 방한을 지시하는 등 적극적으로 움직였다.
미군의 아프간 철군과 탈레반의 재집권 등 급변하는 아프간·중앙아시아 사태에 대해 러시아는 겉보기에 중국과 보조를 맞추는 것 같다.
중앙아시아 일대에서 테러 방지를 위한 중·러 합동 군사훈련을 벌인다.
서방 외교관들이 다 떠난 카불 외교가를 중국 대사관과 함께 러시아 대사관이 지키고 있다.
그러나 아프간 문제에서 러시아는 중국과 보조를 맞출 생각이 별로 없는 듯 보인다.
중국은 7월28일 왕이 외교부장이 톈진에서 탈레반 2인자 물라 압둘 가니 바라다르를 만날 때만 해도 탈레반의 집권이 신장웨이우얼 지역에 미칠 영향에 대해 주로 관심을 보이며 조심스럽게 접근했다.
왕 부장은 직접 ‘동투르키스탄 이슬람운동(ETIM)’을 거명하며 ETIM 등 모든 테러단체와 선을 그으라고 탈레반에 요구했다.
아프간 재건을 위해 중국의 경제지원이 필요한 바라다르는 “어떤 세력도 아프간 영토를 이용해 중국에 해를 끼치는 일을 허락하지 않겠다”라는 극히 외교적인 수사로 몸을 낮췄다.
실제로는 ETIM 등 이슬람 과격단체들의 상당수가 파키스탄 북서부 산악의 근거지에서 아프간 영토를 통과하지 않고 중국을 위협할 수 있기에 하나 마나 한 소리였다.
중국도 그것을 모를 리 없지만 어떻게 된 영문인지 점차 아프간에 발을 들여놓기 시작했다.
겉으로는 아프간의 재건과 평화를 위해서라지만, 1조 달러어치에 이른다는 아프간의 막대한 광물자원과 시진핑의 숙원사업인 일대일로 사업 추진 등을 염두에 두며 점점 더 빠져들고 있다.
반면 러시아는 아프간에 발을 담글 생각이 전혀 없다.
1980년대에 10년간 아프간에서 겪은 혹독한 경험을 통해 끔찍한 교훈을 얻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러시아가 보는 아프간의 미래는 비관적이다.
탈레반이 집권해도 내전이 끝나지 않으리라 본다.
대신 러시아는 미국과의 관계 개선에 관심이 높다.
러시아는 2014년 크림반도 침략으로 인한 미국과 서방의 경제제재로 여전히 고통받고 있다.
2016년의 미국 대선 개입 의혹, 시리아 사태 개입 등으로 트럼프 정부 당시에 이미 미국 의회엔 여러 건의 대(對)러시아 제재 법안이 발의되어 있었다.
공화당 린지 그레이엄 상원의원, 민주당 봅 메넨데스 상원의원 등이 발의한 법안은 ‘러시아 국채 거래 금지, 미국 내 러시아 국영은행 활동 금지, 테러지원국 명단 포함, 대러시아 투자 금지, 푸틴 대통령과 측근들에 대한 개인 제재’ 등 역대 최고 수준의 제재 조치들을 담고 있다.
‘지옥의 제재’ 법안으로 불리는 이 발의안이 그대로 실행된다면 러시아 경제는 파탄에 직면한다.
지옥의 제재 법안은 트럼프 정부에서 대통령의 반대로 채택되지 못했다.
바이든은 트럼프와 다르게 대처할 것이라는 얘기들이 많았다.
그러나 바이든 대통령 역시 북한·이란·아프간 등이 얽힌 지정학적 상황에서 러시아의 협조가 필수적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대통령이 러시아 제재 관련 법안들을 붙들고 버틸 수밖에 없다.
대신 러시아에 강경한 의회의 압력을 버텨내야 한다.
러시아 푸틴 대통령으로서는 바이든이 의회에 맞서 버티게 하기 위해서라도 미국 정부에 손을 내밀 수밖에 없다.
성 김 미국 국무부 대북정책 특별대표(왼쪽)와 이고리 모르굴로프 러시아
북핵 수석대표. ⓒ연합뉴스
미국 바이든 정부 역시 미·러 관계를 개선할 인센티브를 갖고 있다.
이란과 북한 문제가 맞물려 있기 때문이다.
바이든 대통령은 상원의원 시절부터 미군의 아프간 주둔에 회의적이었다.
아프간 전쟁은 9·11 테러를 응징함으로써 미국에 대한 테러 위협을 제거하는 데서 종료해야 한다고 믿었다.
미국이 아프간 국가의 재건까지 감당하려 한 것이 큰 오류였다는 뜻이다.
이 같은 신념은 미군 철수 직후 아프간 정부의 극적인 붕괴를 지켜보면서도 흔들리지 않았다고 한다.
바이든 대통령의 이 신념은 어떤 면에서 러시아의 아프간에 대한 인식과 통한다.
바이든은 블링컨 국무장관과 설리번 안보보좌관에게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여러 차례 강조했다고 한다.
“미국이 뭘 하든 아프간은 또다시 내전에 돌입할 것이 분명하다.
미국은 절대로 아프간의 내전을 막을 수 없다.
아프간으로 끌려 들어가면 안 된다.”
따라서 바이든 대통령에게 아프간 철군은 필연적인 사건이었다는 의미다.
미국 측이 철군을 서두르게 된 배경은 따로 있다. 바로 미국의 대전략 변화이다.
1990년 냉전 종식 이래 미국은 중동과 동아시아라는 두 개 지역분쟁에 비중을 두는 전략을 펼쳤다.
그러나 중국·러시아라는 강대국이 미국에 도전하는 시대가 되었다.
러시아와는 협력관계가 가능하지만 중국과는 이제 돌이킬 수 없는 관계가 되었다.
중국과의 ‘초경쟁(hyper-competition)’이라는, ‘강대국 대 강대국’ 구도의 경쟁에 초점을 둔 대전략으로 전환할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이는 트럼프 행정부에 이어 바이든 행정부가 발표하는 각종 전략문서의 핵심이기도 하다.
두 개의 지역분쟁 대비 전략에서 중국과의 초경쟁 대비 전략으로 전환하려면 당연히 전 세계 미군 배치의 변화가 필요하다.
지난 2월4일 바이든 대통령은 국무부 연설에서 국방부에 ‘전 세계 미군 배치태세 재검토(GPR)’를 주문했다.
이는 아프간과 중동에서 미군을 철수시켜 동아시아 또는 인도·태평양 지역으로 재배치하는 것을 의미한다.
즉 바이든 대통령의 아프간 미군 철수는 미국의 대전략 변화에 따른 GPR에 따른 것이라는 점을 알 수 있다.
당초 미국 국방부는 GPR 결과를 올해 중반까지 발표하기로 했다.
그러나 8월 말 현재까지도 결과가 나온 것 같지 않다.
흘러나오는 얘기들에 따르면 내부 진통이 있는 듯하다.
사실 미군 재배치 검토는 트럼프 정부에서도 진행되어온 일이다.
트럼프 정부에서 논의의 초점은 중동이나 아프간에서 미군을 철수해 동아시아나 인도·태평양으로 집결시킨다는 수준을 넘어선 것이었다.
이 논의의 핵심은 ‘동아시아에 붙박이처럼 전진 배치되는 주한미군과 주일 미군을 중국을 겨냥해 어떻게 재배치할 것인가’였다.
지난해 7월17일 미국 육군대학원 산하 전략연구원(SSI)이 발표한 〈군의 변신:인도태평양사령부의 초경쟁과 미 육군 전역 설계〉 보고서에서도 명확한 결론을 내지 않았다.
그러나 미국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보고서를 통해 짐작할 수 있다.
보고서는 인도·태평양 지역에 대해 “중국과의 초경쟁을 펼치는 시작점이자 가장 중요한 전역”이라며, “중국은 유사시 미군을 패퇴시키는 것을 염두에 둔 군 현대화를 가속화하고 있다”라고 분석했다.
그런데 현재 미군의 전진 배치 태세를 보면 주로 ‘일본과 한국에 집중’돼 있는데 이는 “한국전과 냉전의 유산에 기반한” 배치라는 것이다.
즉 미군의 현 배치 상태가 “중국과 초경쟁 또는 무력충돌을 염두에 둔 전략으로 반드시 유용하다고 볼 수는 없다”라고 한다.
또한 이렇게 전진 배치된 미군 전력이 중국의 미사일과 잠수함, 유인·무인 공중 무력 시스템의 표적 내에 있는 것도 문제라고 지적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보고서는 첫째로 “향후 역내 배치는 훨씬 더 광범위하고 다양한 장소로 분산해서, 선제공격으로부터 회복할 수 있는 재생성, 특정 시간과 장소에 가장 적절히 전력을 투입할 수 있는 기민성, 한 곳의 전력이 완벽히 소멸하더라도 보충할 수 있는 잉여성 등을 확보해야 한다”라고 제언했다.
8월16일 한·미 연합 훈련이 진행 중인 경기도 평택시 캠프 험프리스 풍경.
ⓒ연합뉴스
[카불(아프가니스탄)=AP/뉴시스] 미군 항공기가 30일(현지시간) 아프가니스탄 카불
하미드 카르자이 국제공항에서 이륙하고 있다. 2021.08.31.
미국의 대전략 변화에 따른 아프간 철수
보고서는 특히 “북한은 핵, 생화학무기 등 대량살상무기와 운반체계의 실전배치를 지속하겠지만 재래식 전력은 오히려 위축될 것으로 예상”했다.
이는 결국 한국군이 전시작전권 인수 및 군 현대화를 통해 좀 더 큰 책임을 맡아야 한다는 이야기로 귀결된다.
즉 주한미군이 현재처럼 붙박이로 한국에 주둔하는 것보다는 “대중국 전략에 대해 공동의 인식을 공유하면서 당장 전략의 통합이 가능한 오스트레일리아, 일본, 타이완 등 3개국”으로 분산하거나 최소한 전략적 유연성을 발휘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보고서 작성을 주도한 네이선 프레이어 미국 육군대학원 교수는 당시 이 문제를 취재한 VOA 방송 측에 “주한미군 철수나 감축을 옹호하는 건 아니다”라면서도, “한정된 예산과 자원을 고려할 때 중국의 위협에 초점을 둔 전력 운용의 최적화는 반드시 필요하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런데 2021년 들어 분위기가 좀 바뀌었다. 주한미군의 분산배치와 통합적 운용 그리고 전략적 유연성에 대한 얘기는 원론적으로 나오지만 지금이 이런 조치를 실행할 시기인지에 대해서는 신중해졌다.
미국 측이 볼 때 지난해까지는 트럼프와 김정은 간의 우호적 관계로 한반도 긴장 상황이 많이 누그러졌기 때문에, 주한미군을 그대로 두기보다는 중국 견제에 효과적인 곳으로 분산배치하거나 유연성을 발휘하자는 주장이 쉽게 나올 수 있었다.
그러나 바이든 정부 들어 북한이 어디로 튈지 모르는 상태에서는 그런 얘기를 할 수 없게 된 것이다.
‘북한이 미국에 대한 핵과 대륙간 탄도미사일 위협을 강화하고 있다.
긴급히 대처해야 할 사안’이라는 목소리가 워싱턴에서 다시 등장했다.
미국의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중국에 초점을 둔 국방전략이 주한미군 배치와 역할에 어떤 영향을 줄지 현 시점에서는 불명확한 부분이 많다’라는 식의 원점 회귀적 얘기들이 많다고 한다.
다시 말해 미국이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이나 분산배치 등을 검토하는 기준은, 이른바 보수 매체나 거기에 단골로 출연하는 전문가라는 사람들의 주장과 달리 ‘한국 정부가 미국 정부가 시키는 대로 따르는지 않는지’와는 관계가 없다.
아프간에서 봤듯이 미국은 오히려 그런 단세포적인 태도를 좋아하지 않는다.
주한미군의 유연성과 분산배치 기준을 판단하는 기준은 바로 한반도에 대한 북한의 위협 여부라 할 것이다. 미국 처지에서는 북·미 관계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지난해 미국 대선까지만 해도 김정은 총비서와 북한에 대해 극도로 비판적이었던 바이든 행정부가 북한을 협상 테이블로 끌어내려고 노력하는 이유가 분명해진다.
미국으로서는 문자 그대로 한반도의 긴장을 완화해야 주한미군을 ‘중국과 초경쟁하는 대전략의 현장으로 분산배치’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중국이 왜 필사적으로 북한으로 하여금 분란을 조성케 하는 데 매달리는지도 이해할 수 있다.
그렇게 해야 주한미군을 앞으로 타이완이나 오스트레일리아에서 맞닥뜨리지 않고 한반도에 묶어놓을 수 있기 때문이다.
남문희 기자 bulgot@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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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가니스탄인들이 탈레반을 좋아하지 않음에도 지지한 것은 미국의 점령이
더 끔찍했기 때문이다
아프가니스탄, 점령의 종식
8월 17일에 발표된 이 글의 필자 낸시 린디스판 런던대학교 SOAS대 인류학 교수와 미국인 마르크스주의 생태학자 조너선 닐은 1970년대에 아프가니스탄에서 인류학 조사를 한 이후 반 세기 가까이 아프가니스탄에 주목해 왔다.
이를 바탕으로 두 사람은(둘 다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이다) 아프가니스탄의 역사와 현지 상황을 풍부하게 전하며, 널리 퍼진 편견과 잘못된 주장을 효과적으로 반박한다.
다만 이 글은 아프가니스탄 상황과 미국 제국주의의 후퇴에 관해 지나치게 낙관적인 면이 있다.
이 문제에 관해서는 ‘9·11 20년,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전쟁 패배 ─ 의미와 파장’, ‘상처 입은 위험한 야수 ─ 제국주의의 실패’를 읽어 볼 것을 권한다.
영국과 미국에서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터무니없는 얘기가 많다.
대부분의 경우 다음의 중요한 진실을 감추고 있다.
첫째, 탈레반이 미국을 패퇴시켰다.
둘째, 탈레반이 승리한 것은 국민의 지지를 더 많이 받았기 때문이다.
셋째, 이것은 아프가니스탄 사람 대부분이 탈레반을 좋아해서가 아니다.
미국의 점령이 견딜 수 없을 만큼 잔인하고 부패했기 때문이다.
넷째, ‘테러와의 전쟁’은 미국 내에서도 정치적으로 패배했다.
현재 미국인 대다수는 아프가니스탄 철군을 원하고 더는 미국이 해외에서 전쟁을 벌이지 않기를 바란다.
다섯째, 미국의 이번 패배는 세계사적 전환점이다.
세계 최대 군사 강국이 지독하게 가난한 약소국의 사람들에게 패배했다.
이것은 전 세계에서 미국 제국의 힘을 약화시킬 것이다.
여섯째, 아프가니스탄 여성을 구원한다는 미사여구가 점령을 정당화하는 명분으로 널리 동원됐고, 아프가니스탄의 많은 페미니스트들이 점령을 지지했다. 이것은 페미니즘에 비극을 안겨 줬다.
이것이 이 글의 핵심 논지다.
이 글은 단편이기에 많은 경우 증명하기보다는 언명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거의 50년 전 아프가니스탄에서 인류학자로서 현장 연구를 한 이래 아프가니스탄의 젠더·정치·전쟁에 대해 많은 글을 썼다.
우리 주장을 더 자세히 살펴볼 수 있도록 글 말미에 우리의 저술을 참고문헌으로 제시해 놓겠다.
아프가니스탄을 장악한 이슬람 무장 세력 탈레반이 8월 19일(현지시각) 탈레반 기를
꽂은 차를 타고 카불 시내를 순찰하고 있다. 사진 AP연합
군사적 승리
탈레반은 군사적·정치적으로 승리했다.
군사적 승리인 이유는 탈레반이 전쟁에서 승리했기 때문이다.
적어도 지난 2년 동안 아프가니스탄 정부군 병력(군대와 경찰)은 매달 모집하는 것보다 더 많은 사상자를 내서 그 규모가 줄고 있다.
지난 10년 동안 탈레반은 갈수록 더 많은 마을과 소도시를 장악해 왔다
. 지난 12일 동안에는 모든 도시를 차지했다.
날벼락처럼 도시들을 점령하고 카불로 진격한 것이 아니었다.
각 도시를 점령한 탈레반은 오래전부터 도시 인근의 마을에서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결정적으로, 탈레반은 북부 전역에서 꾸준히 타지크인·우즈벡인 등을 모집했다.
탈레반은 정치적으로도 승리했다.
지구상의 어떤 게릴라 반군도 대중의 지지 없이는 그러한 승리를 거둘 수 없다.
“지지”라고 하는 것은 정확한 표현이 아닐지도 모른다.
아프가니스탄 사람들이 어느 한 쪽을 편들어야 했다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그리고 탈레반 편을 든 아프가니스탄 사람이 미 점령군 편을 든 아프가니스탄 사람보다 많았던 것이다.
전부는 아니었고 더 많았을 뿐이다.
또, 아슈라프 가니가 이끈 정부 편을 든 아프가니스탄 사람보다 탈레반 편을 든 사람이 더 많았다.
다시 말하건대, 전부는 아니었지만 가니보다는 많았던 것이다.
그리고 옛 군벌 편을 든 아프가니스탄 사람보다도 더 많았다.
셰베르간시(市)의 군벌 지도자 도스툼의 패배와 헤라트시(市)의 군벌 지도자 이스마일 칸의 패배가 이를 강렬하게 입증했다.
2001년 탈레반은 압도적으로 파슈툰족이었고 그들의 정치는 파슈툰족 우월주의였다.
반면, 2021년에는 여러 종족으로 이뤄진 탈레반 전사들이 우즈벡인이나 타지크인이 다수인 지역에서 권력을 잡았다.
중요한 예외는 하자라인이 다수인 중부 산악 지대다. 이 예외에 관해서는 뒤에서 더 다루겠다.
물론 모든 아프가니스탄 사람들이 탈레반 편을 든 것은 아니다.
이 전쟁은 외국 침략자들과의 전쟁이기도 했지만 내전이기도 했다.
많은 아프가니스탄 사람들이 미국, 아프가니스탄 정부, 군벌 편에서도 싸웠다.
더 많은 사람들은 생존을 위해 양측에 협력했다. 그리고 다른 많은 사람들은 어느 편을 들지 확신하지 못했고, 이제 저마다의 두려움과 희망을 안고 어떤 일이 일어날지 지켜보고 있다.
미국이 군사적으로 패배했기 때문에 바이든에게 이래라저래라 요구하는 것은 어리석다.
미군이 아프가니스탄에 남아 있었다면 항복하거나 죽어야 했을 것이다.
미국의 패권에 그것은 지금의 낭패보다 더 큰 굴욕이 됐을 것이다.
전임자인 트럼프처럼 바이든도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많은 아프가니스탄 사람들이 탈레반 편을 든 이유
탈레반을 편든 사람이 더 많았다고 해서 아프가니스탄 사람 대부분이 탈레반을 지지한 것은 아니다. 선택할 게 별로 없는 상황에서 내린 선택일 뿐이다.
왜 이런 선택을 했는가?
간단한 답은 유의미한 정치 조직 중 탈레반만이 미국의 점령에 맞서 싸웠고 대부분의 아프가니스탄 사람들이 점령을 증오하게 됐다는 것이다.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미국은 9·11 공격이 벌어진 지 한 달 만에 아프가니스탄에 폭격기와 소규모 병력을 투입했다. 미국은 북부의 비(非)파슈툰족 군벌 연합인 북부동맹의 지원을 받았다.
그러나 북부동맹 병사와 지도자들은 사실 미국과 나란히 같은 편에서 싸울 태세가 돼 있지 않았다. 그러는 것은 어마어마하게 부끄러운 일이었을 것이다.
외세 침략, 특히 당시 마지막으로는 1980~1987년 소련 점령에 맞선 아프가니스탄 사람들의 기나긴 저항의 역사를 감안하면 말이다.
그러나 당시 탈레반 정부를 방어하려고 싸우려는 사람도 거의 없었다.
북부동맹군과 탈레반군은 ‘전투 없는’ 전쟁을 벌였다.
그러다가 미국, 영국을 비롯한 외국 연합군이 폭격을 시작했다.
파키스탄 군부와 정보기관의 중재로 교착 상태가 끝났다.
미국은 아프가니스탄 중앙 정부를 넘겨받아 자기 입맛에 맞는 사람을 대통령 자리에 앉힐 수 있게 됐다.
그 대가로 탈레반 지도부와 조직원들은 고향으로 돌아가거나 파키스탄 국경을 넘어 피신할 수 있었다.
이 합의는 당시 미국과 유럽에서 뻔한 이유로 널리 알려지지 않았지만 우리는 이를 보도했다.
아프가니스탄에서는 이 합의가 널리 알려져 있었다.
그 뒤에 일어난 일이 이런 합의의 존재를 가장 잘 입증한다.
미군 점령 첫 2년 동안에는 저항이 없었다.
어느 마을에서도 저항이 벌어지지 않았다.
수많은 옛 탈레반 전사들이 마을에 있었는데도 말이다.
이것은 놀라운 일이다. 이와는 대조적이었던 이라크를 떠올려 보라.
이라크에서는 2003년 점령 첫날부터 저항이 광범했다.
1979년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도 똑같은 분노의 벽에 부딪혔다.
저항이 없었던 이유는 그저 탈레반이 싸우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다.
남부의 탈레반 본거지에서조차 평범한 사람들은 미국의 점령이 아프가니스탄에 평화를 가져오고 경제를 발전시켜 지독한 빈곤을 끝내지 않을까 감히 희망했다.
평화가 핵심이었다. 2001년까지 23년 동안 아프가니스탄은 전쟁에 휩싸여 있었다.
처음에는 공산주의자와 이슬람주의자 사이의 내전, 그다음에는 이슬람주의자와 소련 침략자 사이의 전쟁, 그다음에는 이슬람 군벌끼리의 전쟁, 그다음에는 북부에서 이슬람 군벌과 탈레반 사이의 전쟁이 벌어졌다.
23년간의 전쟁으로 많은 아프가니스탄 사람들이 죽거나, 불구가 되거나, 고향을 잃고 난민 수용소 신세를 지거나, 곤궁하게 살았다.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온갖 슬픈 일과 두려움과 불안이 끝없이 이어졌다.
그 경험을 가장 잘 묘사한 책은 클라이츠와 굴마나도바 클라이츠가 쓴 《아프가니스탄에서의 사랑과 전쟁》(2005)일 것이다.
사람들은 평화를 갈망했다.
2001년이 되면 탈레반 지지자들조차도 그릇된 평화가 옳은 전쟁보다 낫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미국은 엄청나게 부유한 나라 아니던가.
아프가니스탄 사람들은 점령 덕에 경제가 발전해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믿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8월 24일(현지시각) 화상으로 열린 G7 회의에 참석한 뒤
발언하고 있다. 사진 EPA연합
아프가니스탄 사람들은 기다렸지만, 미국이 가져온 것은 평화가 아닌 전쟁
미군과 영국군은 파슈툰족이 주된 남부와 동부의 탈레반 본거지 마을과 소도시 전역에 주둔했다.
이 병력은 미국과 탈레반 사이의 비공식 합의를 전혀 알지 못했다.
미국 부시 정부의 체면을 손상시키는 일이었기에 그에 관해 들은 바가 있을 수 없었다.
그래서 그곳의 미군 부대들은 명백히 아직 거기에 남아 있는 “악당들”을 색출하는 것을 임무로 삼았다.
미군은 야간에 집을 습격해 가족을 모욕하고 공포에 질리게 하고, 남자를 데려가 고문해서 다른 ‘악당’에 대한 정보를 캐냈다. 바로 여기에서, 그리고 세계 각지의 비밀 시설에서 미군과 미국 정보기관은 새로운 고문 방식을 개발했다.
이것은 이후 이라크에서 미군이 운영한 아부 그라이브 교도소를 통해 잠시나마 세상에 알려지게 됐다.
억류자 일부는 비전투원 탈레반이었다.
일부는 단지 현지의 앙숙들이 땅을 노리거나 원한을 품고 미군에 넘긴 사람들이었다.
그다음에 일어난 일은 미군 병사 조니 리코의 회고록 《피는 잔디를 푸르르게 한다》에 잘 묘사돼 있다. 분노한 친척과 마을 주민들은 어둠 속에서 미국인들 쪽으로 총을 몇 발 난사했다.
미군은 더 많은 집을 습격하고 더 많은 사람들을 고문했다. 마을 주민들도 더 많이 총을 난사했다.
미군은 공습을 요청했고 폭격으로 일가족이 하나하나 몰살당했다.
아프가니스탄 남부와 동부 전역에 전쟁이 다시 찾아왔다.
20일(현지시간) 아프가니스탄 카불의 하미드 카르자이 국제공항에서 아프간
어린이들이 가족과 함께 탑승할 비행기를 기다리며 밝게 웃고 있다.
[사진=뉴시스 ]
걷잡을 수 없는 불평등과 부패
아프가니스탄 사람들은 부자와 빈자 모두의 처지를 개선할 경제 발전을 희망했다.
당연하고 쉬운 일로 보였다. 그러나 그들은 미국의 대외 정책을 몰랐다.
그들은 미국의 상위 1퍼센트가 자기 나라 미국에서도 불평등을 심화시키는 데 얼마나 몰두하는지 알지 못했다.
미국 돈이 아프가니스탄에 쏟아져 들어왔다.
하지만 이 돈은 하미드 카르자이가 이끄는 새 정부의 인사들에게 갔다.
또, 미국이나 다른 나라에서 온 점령군에 협조하는 사람들에게도 갔다.
일부는 미국 중앙정보부(CIA)와 파키스탄 군대가 부추긴 아편·헤로인 수출에 깊이 관여한 군벌 지도자들과 그 측근들에게 돌아갔다.
또 다른 일부는 카불에서 외국인 직원에게 임대하는 호화롭고 방비가 잘 된 주택을 소유할 만큼 운이 좋은 사람들에게 돌아갔다.
해외 자금으로 운영되는 NGO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도 돌아갔다.
물론 이 집단들은 서로 겹쳤다.
아프가니스탄 사람들은 오랫동안 부패에 익숙해 있었다.
그러려니 하면서도 혐오했다.
그러나 이번에 그 규모는 전례가 없었다.
그리고 빈민과 중산층의 눈에, 이 터무니없는 새로운 부는 어떻게 벌어들인 것이든 부패로 보였다.
지난 10년 동안 탈레반은 온 나라에서 두 가지를 내세웠다.
첫째는 2001년 이전에 집권했을 때나 지금이나 자신들이 부패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탈레반은 실제로 이 나라에서 유일하게 그렇다고 할 수 있는 정치 세력이었다.
결정적으로 탈레반은 자신들이 장악한 시골 지역에서 반듯한 사법 체계를 운영했다.
그 명성이 어찌나 높았던지 도시의 여러 민사소송 당사자들이 벽지의 탈레반 판사를 찾아가기로 합의할 정도였다.
큰 뇌물 없이도 신속하고 저렴하게 공정한 판결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판결이 공정했기에 양 당사자는 그 판결을 인정할 수 있었다.
탈레반이 장악한 지역의 주민들에게 공정한 판결은 자신들을 불평등에서 보호하는 수단이기도 했다. 판사를 매수할 수 있다면 부자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다.
토지는 매우 중요한 문제였다.
부자·유력자·군벌·관리는 소농의 땅을 강제로 빼앗거나, 몰래 훔치거나, 속임수로 갈취하고, 소농보다도 가난한 소작인을 억압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모두가 인정했듯이 탈레반 재판관들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판결도 기꺼이 내렸다.
부패·불평등·점령에 대한 증오가 하나로 결합됐다.
불평등 2009년 아프가니스탄 바그람 지역의 한 아파트
ⓒ출처 Eric Kanalstein/UN PHOTO
20년 후
2001년 9·11 공격 이후 탈레반이 미군에 패배한 지 20년이 지났다.
20년 동안 전쟁과 위기를 거치면서 정치적 대중 운동에 엄청난 변화가 일어났다.
탈레반은 배우고 변했다.
그러지 않을 수 있었을까?
많은 아프가니스탄 사람들과 여러 해외 전문가들이 논평한 바다.
주스토지는 ‘신(新)탈레반’이라는 유용한 표현을 썼다.
공표된 바에서 드러난, 탈레반의 변화에는 여러 측면이 있다.
탈레반은 파슈툰족 우월주의가 큰 약점임을 깨달았다.
탈레반은 이제 자신이 무슬림이며 다른 모든 무슬림의 형제임을 강조하고, 다른 여러 무슬림 종족에게 지지를 구하고 그런 지지를 이미 누리고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러나 지난 몇 년 동안 탈레반 내에서 날카로운 분열이 있었다.
소수의 탈레반 전사와 지지자들이 ‘이슬람국가’(ISIS)와 동맹을 맺었다.
그런데 이슬람국가는 시아파, 시크교도, 기독교도에게 테러 공격을 한다.
파키스탄 탈레반도 그런 공격을 하고, 파키스탄 정보기관이 후원하는 아프가니스탄 내의 소규모 하카니 네트워크도 그런 공격을 한다.
그러나 탈레반 다수는 어느 정도 일관되게 이런 공격을 모두 규탄했다.
이 분열은 미래에 미칠 영향이 있을 것이므로 뒤에서 다시 다루겠다.
‘신탈레반’은 또한 자신들이 여성의 권리를 신경쓴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들은 음악과 비디오를 환영하며, 자신들이 예전에 집권했을 때 보인 가장 가차없고 금욕적인 면들을 누그러뜨렸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들은 이제 구질서 사람들에게 복수하지 않고 평화롭게 통치하고 싶다고 거듭 강조한다.
어디까지가 선전에 불과하고 어디까지가 진실인지는 알기 어렵다.
더욱이, 다음에 일어날 일은 경제 상황과 외세의 행보에 크게 달려 있다.
이에 대해서는 뒤에서 더 다루겠다.
여기서 말하고자 한 것은, 아프가니스탄 사람들이 미군, 군벌, 가니 정부가 아닌 탈레반을 선택한 데에는 이유가 있다는 것이다.
8월 15일 아프가니스탄 무장 반군 탈레반이 아프가니스탄 수도 카불에 위치한
대통령궁을 장악한 모습
아프가니스탄 여성의 구원은?
많은 독자들은 이제 참지 못하고 이렇게 물을 것이다.
“그럼 아프가니스탄 여성은?”
답은 간단하지 않다.
논의를 시작하려면 1970년대로 돌아가야 한다.
세계 어디서든 특정한 성차별 체제는 특정한 계급 불평등 체제와 엮여 있다. 아프가니스탄도 다르지 않았다.
이 글의 공저자인 낸시는 1970년대 초반 아프가니스탄 북부 현지에서 파슈툰족 여성과 남성의 삶을 인류학적으로 연구했다. 그들은 농사를 짓고 가축을 쳤다.
낸시의 후속 저서 《팔려간 신부: 부족 사회의 정치와 결혼》은 당시 계급 분단, 성별 분업, 종족간 분단 사이의 연관성을 설명한다.
그 여성들이 자신의 삶과 고난, 기쁨에 대해 어떻게 인식했는지 알고 싶다면 낸시와 그녀의 전 배우자 리처드 태퍼가 최근 출판한 《아프가니스탄 마을의 목소리》를 읽어 보라.
이 책은 아프가니스탄 현지의 수많은 여성과 남성의 구술을 녹취해서 엮은 것이다.
그 현실은 복잡하고 쓰라리고 억압적이며 사랑으로 가득했다.
그런 의미에서 그것은 미국의 성차별과 계급 차별의 복잡다단한 현실과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이후 반세기 동안의 비극이 많은 것을 바꿔 놓았다.
이 오랜 고통은 탈레반 특유의 성차별을 낳았는데, 이는 아프가니스탄 전통에서 자연스럽게 생겨난 게 아니었다.
이 새로운 전환의 역사는 1978년에 시작된다. 공산당 정부와 이슬람주의 무자헤딘 저항 세력 사이에서 내전이 시작된 해다.
이슬람주의자들 쪽으로 전세가 기울자 1979년 말 소련은 공산당 정부를 지원하려고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했다.
소련과 무자헤딘은 7년간 격렬한 전쟁을 벌였다.
결국 1987년 소련군이 패배해 아프가니스탄을 떠났다.
1970년대 초 필자들이 아프가니스탄에 있었을 때 공산주의자들은 가장 뛰어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세 가지 열정에 따라 움직였다. 나라를 발전시키기를 원했고, 대지주의 권력을 무너뜨리고 토지를 나눠 주기를 원했으며, 여성의 평등을 원했다.
1978년 공산주의자들은 진보적 장교들이 이끈 군사 쿠데타로 권력을 잡았다.
그들은 시골이 압도적인 나라에서 시골 주민 대다수의 정치적 지지를 얻지 못했다.
정부가 시골 이슬람주의 저항 세력에 대처하는 방법은 체포, 고문, 폭격뿐이었다.
공산당 군대가 그런 잔혹한 짓을 하면 할수록 반란은 더욱더 커졌다.
그러자 소련이 공산당을 지원하려고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했다.
그들의 주요 무기는 공중 폭격이었고, 아프가니스탄의 많은 지역이 무차별 사격 지대가 됐다.
아프가니스탄인 50만~100만 명이 사망했다.
적어도 100만 명이 평생 불구가 됐다.
600만~800만 명이 이란과 파키스탄으로 피난했고 수백만 명이 국내를 떠도는 실향민이 됐다.
인구가 겨우 2500만인 나라에서 일어난 일이다.
공산당이 집권하면서 맨 먼저 시도한 것은 토지 개혁과 여성의 권리를 인정하는 입법이었다.
소련이 침공하자 대다수 공산주의자는 소련 편에 섰다. 당시 많은 공산주의자는 여성이었다.
그 결과로 고문과 학살에 대한 지지로 페미니즘이라는 대의가 더럽혀졌다.
미국이 외세의 침략을 받아 1200만~2400만 명이 죽고 모든 거주 단지의 사람들이 고문당하고 1억 명이 고향을 잃었다고 상상해 보라.
그런데 미국의 거의 모든 페미니스트들이 이 침략자들을 지지했다고 상상해 보라.
이런 경험을 한다면, 대부분의 미국인은 또 다른 외세의 침공과 페미니즘을 어떤 눈으로 바라보겠는가?
아프가니스탄 여성을 구한다는 명분으로 이번에는 미국에 의해 자행된 침략을 대부분의 아프가니스탄 여성이 어떻게 보겠는가?
소련 점령기 동안의 사망자, 불구자, 난민 통계는 추상적인 수치가 아님을 기억하라.
그들은 살아 있는 여성들과 그들의 아들, 딸, 남편, 형제, 자매, 어머니, 아버지인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소련이 패배하고 떠났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러자 공산당과 침략자들에 맞서 싸웠던 무자헤딘 저항 세력의 지역 지도자들이 지역 군벌 지도자가 돼 전리품을 놓고 다퉜다.
무자헤딘을 지지했던 대다수 아프가니스탄 사람들은 이제 탐욕, 부패, 끝없는 무익한 전쟁에 신물이 났다.
미국 점령 하에서도 아프가니스탄은 여성이 살기에 최악인 나라였다
ⓒ출처 Eric Kanalstein/UN PHOTO
탈레반의 계급적·난민 배경
1994년 가을, 탈레반은 파슈툰족이 주된 아프가니스탄 남부에서 가장 큰 도시인 칸다하르에 입성했다. 탈레반은 아프가니스탄 역사에서 완전히 새로운 세력이었다.
탈레반은 20세기의 정수가 담긴 두 혁신, 즉 공중 폭격과 파키스탄 난민 수용소의 산물이었다.
그리고 이전까지 아프가니스탄을 통치했던 엘리트들과는 다른 사회 계급에 속했다.
공산당원들은 도시 중간계급이나 자기 땅이라 할 만한 것이 있는 중농의 자녀였다.
카불에 있는 유일한 대학에 다닌 사람들이 이 공산당원들을 이끌었다.
이들은 대지주의 권력을 무너뜨리고 나라를 현대화하기를 원했다.
공산당과 싸운 이슬람주의자도 계급 배경이 비슷했고 대부분 같은 대학 출신이었다.
그들도 현대화를 원했지만 그들은 다른 방식을 원했다.
그들은 무슬림형제단의 사상과 이집트 카이로에 있는 알아즈하르대학교를 우러러봤다.
탈레반이라는 단어는 공립 학교나 대학교가 아닌 이슬람 학교의 학생을 뜻한다.
1994년 칸다하르에 입성한 탈레반 전사들은 파키스탄의 난민수용소에 있는 무료 이슬람 학교에서 공부한 젊은이들이었다.
가진 것 없는 어린 시절을 보낸 사람들이었다.
탈레반 지도자들은 아프가니스탄 출신의 시골 물라[종교 교사]였다.
그들은 도시 모스크의 여러 이맘[종교 지도자]과 달리 엘리트 인맥이 없었다.
시골 물라는 글을 읽을 수 있었고 마을 주민에게 어느 정도 존경을 받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사회적 지위는 지주나 관공서에서 일하는 고졸자에 한참 못 미쳤다.
탈레반은 12명으로 구성된 위원회가 이끌었다.
12명 모두 전쟁에서 소련의 폭탄에 손이나 발, 또는 눈을 잃은 사람들이었다.
탈레반은 무엇보다도 파슈툰족 중하층 시골 주민들의 정당이었다.
20년 전쟁으로 칸다하르는 무법 상태였고, 서로 싸우는 무장 집단들의 손아귀에 있었다.
전환점은 탈레반이 소년 한 명과 여성 2명(어쩌면 3명)을 강간한 현지의 군 지휘관을 수배했을 때였다. 탈레반은 그를 붙잡아 교수형에 처했다.
그들의 개입이 눈에 띄게 된 것은 수많은 인명을 앗아가던 내부 다툼을 종식시키고 사람들의 존엄과 안전을 회복시키려는 그들의 결의 때문만이 아니었다.
그들이 다른 이슬람주의자들의 위선에 치를 떨었기 때문이었다.
탈레반은 처음부터 사우디, 미국, 파키스탄 군부에게서 자금을 지원받았다.
미국은 중앙아시아에서 끌어온 석유·가스 파이프라인을 설치해 놓고 안심할 수 있는 평화로운 나라를 원했다.
탈레반이 두각을 나타낸 이유는 그들이 강제하려는 법률을 집행하는 데 예외를 두지 않았고, 그 법률을 가차없이 집행했기 때문이었다.
많은 아프가니스탄 사람들은 질서의 회복과 약간의 안전에 안도했지만, 탈레반은 종파주의적이었으며 국가를 통치할 수 없었다. 1996년 미국은 지원을 철회했다.
그러면서 탈레반을 상대로 극렬한 이슬람 혐오를 새로 부추겼다.
하루아침 사이에 아프가니스탄 여성들은 무기력하고 억압받는 존재가 됐고, 아프가니스탄 남성(일명 ‘탈레반’)은 광신적인 야만인, 소아성애자, 가학적인 가부장 또는 거의 인간이 아닌 존재로 그려졌다.
9·11 공격 전 4년 동안 탈레반은 미국의 표적이 됐고, 페미니스트 등은 아프가니스탄 여성을 보호하라고 부르짖었다.
폭격을 시작할 즈음 미국은 아프가니스탄 여성들에게 도움이 필요하다는 점을 다들 이해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뭐가 문제가 되겠어?
[한없는 낙관의 표현 — 번역자]
탈레반 전사들이 1일(현지시간) 아프간 남부 칸다하르 외곽 고속도로에서 승전을
자축하는 퍼레이드를 벌이고 있다. [AFP=연합뉴스]
9·11 공격과 미국의 전쟁
2001년 10월 7일 폭격이 시작됐다. 며칠 만에 탈레반은 피신해야 했다.
또는 [영국의 보수 일간지] 〈데일리 메일〉이 1면 사진으로 요란하게 보도했듯이 말 그대로 거세당하기도 했다.
언론에 실린 전쟁 이미지는 그 폭력성과 가학성 면에서 실로 충격적이었다.
유럽의 많은 사람들은 폭격의 규모에, 그리고 아프가니스탄 사람들의 생명이 완전히 경시되는 것에 경악했다.
그러나 그해 가을 미국에서는 복수심과 애국심이 뒤섞여 반대 목소리가 드물었고 거의 들리지 않았다.
당시 [파키스탄 출신 미국의 인류학자] 사바 마무드가 그랬던 것처럼 자문해 보라.
“[무자헤딘 하의] 전시 상황[실향과 군사화], 굶주림보다 어째서 [탈레반 치하의] 교육·취업 기회 부족, 그리고 특히 언론에서 선전하듯이 서구식 옷차림을 하지 못하는 것이 여성에게 더 해로운 것으로 여겨지는가?”[인용문 안의 대괄호(“[ ]”)는 모두 필자가 삽입한 것]
한 번 더 치열하게 반문해 보라. 민간인을 폭격하면서 어떻게 ‘아프가니스탄 여성을 구할’ 수 있다는 말인가?
거기에는 바로 그 여성들과 그들의 자녀, 남편, 아버지, 형제도 포함돼 있을 텐데 말이다.
이것으로 논쟁은 종결됐어야 했다.
그러나 그러지 않았다.
전쟁이 시작된 지 한 달이 조금 넘자 페미니즘 측의 이슬람 혐오가 가장 가증스러운 형태로 표현됐다. 극도로 일방적인 보복전은 세상 사람들 눈에 그다지 옳은 것으로 보이지 않을 것이고, 뭔가 옳은 것처럼 보이는 일을 하는 것이 더 나았다.
2001년 11월 17일 미국 추수감사절을 앞두고 대통령의 부인 로라 부시는 베일을 쓴 아프가니스탄 여성들의 곤경을 크게 한탄했다.
영국 총리의 부인인 체리 블레어도 며칠 후 로라 부시의 발언을 되풀이했다.
전쟁광들의 이 부유한 부인들은 오리엔탈리즘의 세계관을 한껏 이용해 희생자들을 비난하고 지구상에서 가장 가난한 사람들을 상대로 한 전쟁을 정당화했다.
‘아프가니스탄 여성을 구하라’는 미국의 전쟁을 정당화하는 많은 자유주의 페미니스트들의 끈질긴 외침이 됐다.
여러 인사가 일제히 입에 올린 이슬람 혐오는 2008년 오바마 당선과 함께 미국 자유주의자들 사이에서 대세가 됐다.
그해 미국의 반전 운동 동맹은 오바마의 선거 운동을 돕느라 사실상 자진해산 상태였다.
오바마의 매파 국무장관 힐러리 클린턴을 지지한 민주당원들과 페미니스트들은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가 둘 다 석유를 위한 전쟁이라는 진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끝없는 석유 전쟁을 정당화하는 근거는 하나뿐이었다.
바로 아프가니스탄 여성의 고통이었다.
페미니즘 측의 이런 채색은 영리한 책략이었다.
이런 논법은 명백히 여성차별적인 탈레반의 통치와 미국 내 여성차별 사이의 비교를 불허했다.
훨씬 더 충격적이게도 페미니즘 측의 이 채색은 터무니없이 일방적인 이 전쟁의 추악한 실상을 용인 가능한 것으로 만들고 사실상 논외로 만들었다.
그러면서 그들이 말하는 ‘구원받아야 할 여성’을, 미국의 폭격으로 죽고, 다치고, 고아가 되고, 집을 잃고, 굶주리게 된 수많은 실제 아프가니스탄 여성과 그리고 남성, 어린이와도 — 분리시켰다.
미국에 있는 우리의 여러 친구와 가족은 선한 마음으로 이 선전을 상당 부분 믿는 페미니스트들이다. 그러나 그들에게 지지해 달라고 요구한 것은 얽히고설킨 거짓말이자 뒤틀린 페미니즘이었다.
침략자와 부패한 권력 엘리트의 페미니즘이었고, 고문과 무인 폭격기의 페미니즘이었다.
우리는 또 다른 페미니즘이 가능하다고 믿는다.
탈레반이 매우 성차별적이라는 것은 여전히 참이다.
여성 차별이 아프가니스탄에서 승리한 것이다.
그러나 사태가 이렇게 되는 것은 필연이 아니었다.
공산당이 소련 침략자들의 만행을 두둔하는 바람에 아프가니스탄에서는 페미니즘이 적어도 한 세대 동안 신뢰를 잃었다.
그런 뒤 미국이 침공했고, 새 세대 아프가니스탄 전문직 여성들이 새로운 침략자들의 편에 서서 권리를 인정받으려 했다.
그들의 꿈도 부역과 수치, 피로 끝났다.
물론 그중에는 뻔한 말을 지껄이며 자금을 받는 출세주의자들도 있었다.
그러나 다른 많은 사람들은 정직하고 이타적인 꿈을 좇아 움직였다.
이들의 실패는 비극이다.
1일(현지시간) 탈레반이 미국산 블랙호크 헬기를 조종하고 있는 모습.
[AFP=연합뉴스]
편견과 혼란
아프가니스탄 밖에서는 탈레반에 관해 지난 25년 동안 정교하게 설파된 편견이 많은 혼란을 자아냈다. 탈레반이 봉건적이고 잔인하고 원시적이라는 편견을 상기해 보라.
그들은 노트북도 쓰고, 지난 14년 동안 카타르에서 미국과 협상해 온 사람들이다.
탈레반은 중세의 산물이 아니다.
그들은 20세기 후반 ~ 21세기 초반 최악의 시기의 산물이다.
그들이 더 나은 시대를 상상하기 위해 지나간 시대를 꿈꾸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그들의 삶은 공중 폭격, 난민수용소, 소련 체제, 테러와의 전쟁, 신종 고문 기법, 기후 변화, 인터넷 정치, 신자유주의로 인한 극단적 불평등 속에서 형성된 것이다.
그들도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현재를 살고 있는 것이다.
그들의 부족사회 기반도 혼동을 자아낼 수 있다.
그러나 리처드 태퍼가 지적했듯이 부족사회는 현대와 동떨어진 제도가 아니다.
그것은 오늘날 세계의 한 지역에 살고 있는 농민들이 국가와의 복잡한 관계를 조직하는 방식이다.
그리고 아프가니스탄의 역사는 단지 종족 집단들의 경쟁사가 아니라, 그런 집단들 간의 복잡한 동맹의 역사이자 그 집단 내부의 분단의 역사였다.
편견을 가진 일부 좌파는 탈레반이 “진보적”이지 않은데 어떻게 가난한 사람과 반(反)제국주의의 편에 설 수 있는지 반문한다.
진보라는 말 자체가 거의 무의미하다는 점은 잠시 제쳐놓겠다.
그렇다, 탈레반은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에 적대적이다.
그들 자신 또는 그들의 부모나 조부모가 사회주의자와 공산주의자에게 살해당하고 고문당했기 때문이다.
더구나 20년간 게릴라전을 벌여서 대제국을 패퇴시킨 운동을 반제국주의라고 부를 수 없다면 그 단어에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아야 한다.
탈레반은 가난한 농민들의 운동이자 제국주의 점령에 반대하는 운동이며, 여성을 지독하게 멸시하지만 많은 여성의 지지를 받고, 때로는 인종차별적이고 종파주의적이지만 때로는 그렇지 않다. 역사가 낳은 모순 덩어리인 것이다.
혼동의 또 다른 원천은 탈레반의 계급 정치에 있다.
그들은 분명히 가난한 사람들의 편인데 어째서 사회주의에 그렇게 적대적인가?
그 답은 소련군 점령의 경험으로 인해 계급 문제를 사회주의적으로 명료하게 표현할 가능성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계급 문제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가난한 사람 편으로 여겨지지 않으면서 권력을 장악한 대중 운동이 가난한 농민 사이에서 건설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탈레반은 계급의 언어가 아니라 정의와 부패 척결의 언어로 말한다
. 이런 표현들은 같은 방향을 진술한다.
그렇다고 탈레반이 반드시 가난한 사람들에게 이롭게 통치할 것이라는 것은 아니다.
지난 세기와 그 이전의 역사를 보면 권력을 잡은 농민 반란들은 많은 경우 도시 엘리트의 정부로 전락했다.
그리고 탈레반이 민주주의를 이끌기보다는 독재자가 되려 한다는 사실도 잊어서는 안 된다.
2001년 아프가니스탄을 휘젓고 다니는 미 해병대ⓒ출처 미 해병대
미국 내의 역사적 변화
카불 함락은 미국의 결정적인 국제적 패배다.
또, 미국 내에서도 미국 제국에 대한 국민들의 반감이 깊다는 것을 보여 준다.
한 가지 증거는 여론조사다.
2001년 9·11 직후 미국인의 85~90퍼센트가 아프가니스탄 침공에 찬성했다.
이 숫자는 꾸준히 감소했다.
지난달 미국인의 62퍼센트가 바이든의 완전 철군 계획에 찬성했고 29퍼센트가 반대했다.
전쟁에 대한 이런 반대는 좌우 모두에 공통적이다.
공화당과 트럼프의 노동계급 기반은 해외에서 벌이는 전쟁에 반대한다.
많은 군인과 군인 가족은 트럼프가 강세인 농촌 지역과 남부 출신이다.
그들은 전쟁을 더 벌이는 것에 반대한다. 그들과 그들과 가까운 사람들이 복무하다 전사하고 부상했기 때문이다.
미국의 우파적 애국주의는 군대에 친화적이지만, 이것은 군인을 찬양하는 것이지 전쟁에 찬성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이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하고 외치는 것은 지금 미국이 미국인들에게 그다지 훌륭한 곳이 못 된다는 뜻이지, 미국이 세계에 더 간섭해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민주당을 지지하는 노동계급 사람들도 전쟁에 반대한다.
추가적인 군사 개입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있다. 민주당 내 친(親)오바마 세력, 공화당 내 친(親)롬니 세력, 군 장성들, 자유주의적이거나 보수적인 여러 전문직, 중앙 정부의 거의 모든 엘리트들이 그들이다. 그러나 미국 국민 전체, 특히 흑인, 갈색 인종, 백인을 불문한 노동계급은 미국 제국에 등을 돌렸다.
베트남 사이공이 함락된 후 미국 정부는 향후 15년 동안 대규모 군사 개입을 벌이지 못했다.
카불 함락 이후 그 후유증은 더 길어질 수 있다.
국제적 파장
103년 전인 1918년 이래 미국은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국가였다.
처음에는 독일, 그다음은 소련, 지금은 중국이라는 경쟁자가 있었지만 미국은 계속 지배적이었다.
그런데 그 ‘미국의 세기’가 이제 끝나고 있다.
장기적인 이유는 중국의 경제 성장과 미국 경제의 상대적인 쇠퇴다.
그러나 코로나19 팬데믹과 아프가니스탄 패배로 지난 2년은 전환점이 됐다.
코로나19 팬데믹은 미국 지배계급과 정부가 지키려 하는 시스템이 얼마나 무능한지를 드러냈다.
이 시스템은 사람들을 보호하지 못했다.
이런 어수선하고 수치스러운 실패가 전 세계 사람들에게 밝히 드러났다.
그다음은 아프가니스탄이었다.
군비와 보유 장비로만 보면 미국은 압도적 우위에 있는 군사 강국이다. 이 군사 대국은 가진 것이라고는 끈기와 용기밖에 없는 샌들을 신은 가난한 약소국 사람들에게 패배했다.
탈레반의 승리는 또한 시리아, 예멘, 소말리아, 파키스탄, 우즈베키스탄, 투르크메니스탄, 타지키스탄, 말리에 있는 각양각색의 이슬람주의자들을 고무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더 광범하게도 적용되는 얘기일 것이다.
코로나19 대응 실패와 아프가니스탄에서의 패배 모두 미국의 ‘소프트 파워’를 약화시킬 것이다.
그러나 아프가니스탄에서의 패배는 ‘하드 파워’의 패배이기도 하다.
미국의 비공식 제국의 힘은 한 세기 동안 세 기둥으로 유지돼 왔다.
첫째, 세계에서 가장 큰 경제력과 국제 금융 체계에 대한 지배력이다.
둘째, 민주주의, 경쟁력, 문화적 리더십으로 여러 방면에서 쌓은 명성이다.
셋째, ‘소프트 파워’가 먹히지 않는 경우 직접 쳐들어가서 독재 정권을 지원하고 적들을 응징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그 군사력은 이제 사라졌다.
어떤 정부도 미국이 외국 침략자나 자국민에게서 그들을 구해줄 거라고 믿지 않을 것이다.
드론(무인기)를 이용한 학살은 계속될 것이며 큰 고통을 초래할 것이다.
그러나 어느 곳에서도 무인기 자체가 군사적으로 결정적인 구실을 하지는 못할 것이다.
미국의 세기가 끝나기 시작한 것이다.
아프간 남부 칸다하르에서 퍼레이드를 벌이던 탈레반 전사들이 포즈를 취하고 있다.
[EPA=연합뉴스]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가?
앞으로 몇 년 동안 아프가니스탄에서 무슨 일이 펼쳐질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몇 가지 요인을 지적할 수 있다.
첫째, 가장 희망적인 것은 아프가니스탄 사람들의 마음 속에 있는 평화에 대한 깊은 갈망이다.
그들은 이제 43년째 전쟁을 겪었다. 5~10년 동안의 내전과 침략만으로도 그토록 많은 나라에서 얼마나 깊은 상처가 남았는지 생각해 보라. 그런데 43년을 그랬다고 생각해 보라.
가장 중요한 세 도시인 카불, 칸다하르, 마자르는 모두 폭력 없이 함락됐다.
탈레반이 그들이 계속 말했듯 평화로운 나라를 원하고 복수를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또한 탈레반을 지지하지 않는, 나아가 그들을 증오하는 사람들이 싸우지 않으려 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탈레반 지도자들은 자신들이 평화를 이룩해야 한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다.
그러려면 탈레반이 계속해서 공명정대함을 지키는 것도 중요하다.
이 측면에서 그들의 성적은 좋다
. 그러나 집권의 유혹과 압력은 전에 여러 나라에서 많은 사회운동을 타락시켰다.
경제가 붕괴할 수도 있다.
아프가니스탄은 경작 가능한 토지가 5퍼센트 미만인 가난하고 건조한 나라다.
지난 20년 동안 도시는 엄청나게 확장했다.
그 확장은 점령을 통해 유입된 돈에 의존해 왔으며, 그보다는 덜하지만 아편 재배에서 나온 돈에도 의존했다.
상당한 해외원조가 없으면 경제 붕괴 위험에 직면할 것이다.
탈레반도 이것을 알기에 미국에 분명하게 거래를 제안했다.
미국이 원조를 제공하면 탈레반은 9·11 공격 같은 일을 벌일 수 있는 테러리스트들에게 거처를 제공하지 않을 것이다.
트럼프 정부와 바이든 정부 모두 이 거래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미국이 약속을 지킬지는 분명하지 않다.
더 나쁜 일도 얼마든지 벌어질 수 있다.
이전 미국 정부들은 장기간의 파괴적인 경제 제재로 이라크, 이란, 쿠바, 베트남을 응징했다.
인권이라는 미명 아래 아프가니스탄 어린이들을 굶겨죽일 제재를 요구하는 주장이 미국에서 많이 제기될 것이다.
그리고 여러 강대국들이 아프가니스탄 내에서 상이한 정치 단체나 종족 세력을 지원하는 국제적 간섭의 위험도 있다.
미국, 인도, 파키스탄, 사우디아라비아, 이란, 중국, 러시아, 우즈베키스탄이 모두 유혹을 느낄 것이다. 이전에도 있었던 일이고, 경제 붕괴 상황에서는 이것이 대리전을 촉발할 수 있다.
그러나 현재로서는 이란, 러시아, 파키스탄 정부가 분명 아프가니스탄의 평화를 원하고 있다.
탈레반은 또한 가혹하게 통치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말은 행동보다 쉽다.
부패와 범죄로 큰 재산을 모은 가문들과 대적하는 시골 출신의 가난한 병사들이 무엇을 하고 싶어 하겠는가?
그리고 기후 문제가 있다.
1971년 북부와 중부 전역에서 일어난 가뭄과 기근은 가축, 농작물과 여러 목숨을 앗아갔다.
기후 변화가 아프가니스탄에 미칠 영향을 보여 준 첫 번째 징후였다.
이후 기후 변화로 50년 동안 더 심한 가뭄이 일어났다.
중장기적으로 보면 농업과 목축업은 더 불안정해질 것이다.
이 모든 위험은 실질적이다.
그러나 꽤나 통찰력이 있는 안보 전문가 안토니오 주스토지는 탈레반 정부나 외국 정부 내부의 논의들을 잘 파악하고 있다.
8월 16일 〈가디언〉에 실린 그의 기사는 희망적이다.
그는 이렇게 글을 끝맺었다.
대부분의 주변국들이 아프가니스탄의 안정을 원하기 때문에 적어도 당분간은 외부 세력에 의해 새 연립 정부 내의 단층선이 균열을 내는 데에 이용될 것 같지 않다.
마찬가지로, 2021년의 패배자들은 그들이 일종의 저항을 개시하는 데 지지와 지원을 보낼 의지나 능력이 있는 사람을 찾는 데서 고전을 면치 못할 것이다.
새 연립정부에 주변국의 주요 동맹 세력이 포함되는 한, 이 시기는 아프가니스탄 역사상 새로운 국면의 시작이 될 것이다.
지난 1일(현지시간) 아프간 칸다하르에서 승전 자축 퍼레이드를 벌이는 탈레반.
[AFP=연합뉴스]
당신이 할 수 있는 일? 난민을 환영하라
현재 서구에서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묻는다.
“아프가니스탄 여성들을 돕기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습니까?”
때때로 이 질문은 대부분의 아프가니스탄 여성이 탈레반을 반대하고 대부분의 아프가니스탄 남성이 그들을 지지한다고 가정한다.
터무니없는 소리다. 그런 사회를 상상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러나 더 구체적인 질문도 있다. 특히, 아프가니스탄 페미니스트들을 어떻게 도울 수 있을까?
타당하고 적절한 질문이다.
답은 그들에게 비행기 표를 사 주고 유럽과 북미에 피난처를 제공하라고 촉구하는 것이다.
그러나 망명지가 필요한 것은 페미니스트들만이 아니다.
점령에 협력한 수만 명이 가족과 함께 망명을 간절히 원하고 있다.
아프가니스탄 정부에서 일한 수많은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일부는 훌륭한 사람들이고, 일부는 부패한 괴물이며, 많은 사람들이 그 사이 어딘가에 있고, 많은 수는 그저 어린아이일 뿐이다.
이들에 대한 도덕적 책임 문제가 있다. 미국과 나토 국가들은 20년 동안 엄청난 고통을 초래했다. 최소한 이들은 자신들이 삶을 망친 사람들을 구출할 의무가 있다.
또 다른 도덕적 문제도 있다.
지난 40년 동안 많은 아프가니스탄 사람들이 익혀 온 것은 지난 10년 동안 시리아의 고통을 통해서도 분명하게 드러났다.
공교로운 배경과 개인사로 어떤 사람들이 특정 행동을 하게 되는 것은 너무나 이해할 만한 일이다.
젊은 여성 공산주의자, NGO에서 일하는 교육받은 페미니스트, 자살폭탄 테러리스트, 미국 해병대원, 마을의 물라, 탈레반 전사, 미국의 폭격으로 아이를 잃은 엄마, 시크교 환전인, 경찰관, 아편을 재배하는 가난한 농민을 우리는 오만한 눈으로 보아서는 안 되며 ‘신의 은총이 없었다면 나도 저 자리에 있었을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미국과 영국 정부가 협력자들을 구하지 않은 것은 정말 염치없고 시사적인 일이다.
사실, 그것은 실패가 아니라 선택이었다.
보리스 존슨과 조 바이든에게는 인류에게 진 빚보다 이민자에 대한 인종차별이 더 중요했던 것이다.
아프가니스탄인을 환영하는 운동은 여전히 가능하다.
물론 이렇게 도덕적으로 강력하게 뒷받침되는 요구도 매 순간 인종차별과 이슬람 혐오에 직면할 것이다. 그러나 지난주 독일과 네덜란드 정부는 아프가니스탄인에 대한 추방을 일절 중단했다.
아프가니스탄 여성 지지를 입에 올리는 모든 정치인들에게, 모든 아프가니스탄 사람들에게 국경을 열라고 요구하고 여기에 답하라고 강요해야 한다.
그리고 하자라인들이 처할 수 있는 위험도 있다.
앞서 말했듯이, 탈레반은 파슈툰족 운동이기를 그만두고 전국적 운동으로 변모해 많은 타지크인과 우즈벡인을 모집했다. 탈레반은 하자라인도 일부 끌어들였다고 한다.
그러나 그 수는 많지 않다.
하자라족은 전통적으로 중부 산악지대에 살았던 사람들이다.
또한 많은 수는 마자르와 카불 같은 도시로 이주해 짐꾼이나 다른 저임금 일자리에서 일했다.
하자라족은 아프가니스탄 인구의 약 15퍼센트를 차지한다.
파슈툰족과 하자라족 사이의 적대는 토지와 방목권을 둘러싼 오랜 분쟁에서 일부 비롯했다.
최근에는 하자라가 시아파이고 거의 모든 다른 아프가니스탄 사람들이 수니파라는 점도 매우 중요해졌다.
이라크에서 벌어진 수니파와 시아파 사이의 격렬한 갈등은 전투적인 이슬람주의 전통에 분열을 가져왔다. 이 분열은 복잡하지만 중요하며 설명이 약간 필요하다.
이라크와 시리아에서 이슬람국가는 시아파를 학살했다.
시아파 민병대가 두 나라에서 수니파를 학살한 것처럼 말이다.
더 전통적인 알카에다 네트워크는 시아파를 공격하는 것에 단호하게 반대하고 무슬림 사이의 연대를 주장해 왔다.
자주 지적된 바이지만, 오사마 빈 라덴의 어머니 자신은 시아파, 더 정확히는 시리아의 알라위파였다. 단결의 필요성이 더 중요했던 것이다.
이것이 알카에다와 이슬람국가가 갈라서게 된 주요 쟁점이었다.
아프가니스탄에서 탈레반은 이슬람의 단결을 강력히 주장해 왔다.
또, 여성에 대한 이슬람국가의 성적 착취는 탈레반이 추구하는 가치를 거스르는 것이기도 하다.
탈레반 또한 매우 여성차별적이지만 그들은 금욕적이고 조신하다.
수년 동안 아프가니스탄 탈레반은 시아파, 기독교인, 시크교도에 대한 테러 공격 일체를 꾸준히 공개 비난했다.
그러나 이러한 공격은 벌어지고 있다. 이슬람국가의 사상은 특히 파키스탄 탈레반에 영향을 미쳤다.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은 하나의 조직이다.
반면 파키스탄 탈레반은 느슨한 네트워크이며 아프가니스탄인에 의해 통제되지 않는다.
그들은 파키스탄의 시아파와 기독교인에게 여러 차례 폭탄 테러를 자행했다.
최근 카불에서 하자라족과 시크교도를 상대로 인종차별적인 폭탄 테러를 벌인 것은 이슬람국가와 하카니 네트워크였다. 탈레반 지도부는 이 모든 공격을 비난했다.
그러나 상황은 유동적이다.
아프가니스탄의 이슬람국가는 탈레반에서 분리해 나온 소규모 세력으로, 주로 동부의 닝그라하르 주에 근거지가 있다.
그들은 시아파를 극도로 배척한다.
대체로 파키스탄군 정보 기관이 통제하는 오랜 무자헤딘 단체인 하카니 네트워크도 시아파를 배척한다. 그러나 현재 하카니 네트워크는 탈레반 조직의 일부로 통합됐으며 그들의 지도자는 탈레반 지도자의 하나다.
그러나 아무도 미래를 장담할 수 없다.
1995년 마자르에서 일어난 하자라 노동자들의 봉기는 탈레반이 북부을 장악하는 것을 막았다.
그런데 하자라의 저항 전통은 그보다 훨씬 더 깊고 더 먼 과거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웃 나라들의 하자라 난민도 지금 위험에 처해 있을지 모른다.
이란 정부는 탈레반과 동맹을 맺고 평화를 요청하고 있다.
이미 이란에 약 300만 명의 아프가니스탄 난민이 있기 때문이다.
대부분은 이미 여러 해 동안 이란에 있었고 가난한 도시 노동자들과 그 가족인데, 그들의 다수가 하자라족이다. 최근 이란 정부는 이란 자체가 심각한 경제적 곤란에 빠진 가운데 아프가니스탄 난민을 다시 아프가니스탄으로 추방하기 시작했다.
파키스탄에도 약 100만 명의 하자라 난민이 있다.
지난 몇 년 동안 쿠에타시(市) 주변 지역에서는 특정 종파를 겨냥한 암살과 학살로 5000명 이상이 사망했다. 파키스탄 경찰과 군대는 수수방관했다.
파키스탄 군부와 정보기관이 오랫동안 아프가니스탄 탈레반을 지원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그 사람들은 지금 더 큰 위험에 처하게 될 것이다.
아프가니스탄 밖에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대부분의 아프가니스탄 사람처럼 평화를 기원하자.
그리고 국경을 개방하라고[난민을 전원 받아들이라고 — 옮긴이] 요구하는 시위에 참가하라.
그레이엄 나이트의 말로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그의 아들인 영국 공군의 벤 나이트 중사는 2006년 아프가니스탄에서 사망했다.
이번 주에 그레이엄 나이트는 영국 정부가 민간인 구조에 신속하게 나서야 한다고 AP 통신에 말했다.
“미국과 영국이 떠나겠다고 하자마자 탈레반이 아프가니스탄을 장악한 것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탈레반은 우리가 나가자마자 들어가겠다는 의도를 분명히 했습니다.
승산 없는 전쟁에 사람들이 목숨을 내놓은 것 아니냐는 물음에 저는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문제는 우리가 그 나라 토착민들과 싸우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테러리스트와 싸운 것이 아니라 실제로 거기에 살면서 우리가 거기 있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과 싸웠던 것입니다.”
낸시 린다스판 조너선 닐
번역 박이랑
[카불(아프가니스탄)=AP/뉴시스]아프가니스탄 카불 주민들이 은행 앞에서 돈을
인출하기 위해 긴 줄을 서서 대기 중이다. 2021.08.31.photo@newsis.com
미국, 아프가니스탄 인도적 지원 일부 재개
[서울=뉴시스] 유자비 기자 = 조 바이든 미국 행정부가 탈레반이 장악한 이후 중단됐던 아프가니스탄의 인도주의적 지원 프로그램에 대한 자금 지원을 재개했다고 월스트리트저널(WSJ)가 3일(현지시간) 보도했다.
미 국제개발처(USAID)는 탈레반 집권 이전에 아프가니스탄에서 계획했던 2억6000만달러(약 3008억원) 규모를 아프가니스탄의 식량, 의약품 등 인도적 지원을 위해 보내고 있다고 관리들이 전했다.
자금은 유엔식량계획(WFP), 세계보건기구(WHO), 국제이주기구(IOM)와 다른 국제구호단체들에 제공된다.
고위 관리들은 미 국무부의 44억달러 규모 국제재난지원기금과 34억달러 규모의 이주 및 난민 지원 프로그램과 같은 다른 프로그램에서 사용할 수 있는 계좌도 고려하고 있다고 밝혔다.
아울러 구호품을 배포하는 현지 직원들에 대한 탈레반의 대우가 미국과 동맹국이 곧 출범할 아프가니스탄 정부를 바라보는 시각에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말했다.
USAID 대변인은 "원조는 독립적인 조직들을 통해 진행될 것"이라며 "이런 노력이 탈레반이나 다른 누군가에 의해 방해받지 않을 것으로 기대한다"고 했다.
◎공감언론 뉴시스 jabiu@newsis.comCopyright © NEWSIS.COM,
아프가니스탄 시민들을 태운 버스가 지난달 27일 오후 임시 수용시설로 지정된 충북
진천 국가공무원인재개발원에 도착한 가운데 한 아이가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창밖
을 바라보며 손인사 하고 있다. [프리랜서 김성태]
캐슬린 스티븐스 전 주한 미국대사·
한미경제연구소장
아프가니스탄, 한국 그리고 미국
2021년 8월은 끔찍한 달이었다.
코로나19는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기후변화 문제도 시작에 불과하다는 현실이 거침없이 드러난 여름이었다.
게다가 미국이 지난 20년 동안 기울여 온 아프가니스탄 재건 노력의 급격한 붕괴는 장단기적으로 새로운 도전과 불확실성을 안겨주었다.
탈레반이 아프간을 장악한 가운데 미국과 전 세계는 즉각적인 인도주의·이주·안보 문제에 직면해 있다. 미국의 수치스러운 패배로 보이는 이번 일이 장기적으로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될지도 아직은 불확실하다.
바이든 미 대통령은 아프간 철군이 여론의 지지와 국내외 전략적 우선순위를 고려한 옳은 결정이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는 사전 조율과 협의 없이 강행해 유럽과 다른 동맹국들의 분노를 샀다.
더욱이 미국은 아프간 군과 정부의 빠른 붕괴와 탈레반의 진격을 예상치 못했다.
혼란스러운 대피 과정은 바이든 대통령의 역량과 판단력에 흠집을 냈다.
지난달 미군 13명과 수백 명의 사상자가 발생한 카불공항 테러는 아프간 미군 주둔 최근 10년 중 가장 치명적인 날이자 바이든 대통령에게 가장 암울한 날이었다.
부실한 계획과 현지 혼란 속에서도 고무적인 것은 공수작전 자체가 성공적이었다는 점이다.
바이든 정부는 초기 실수를 바로잡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세계 각국 정부와 민간인들도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총동원되고 있다.
이런 노력은 계속돼야 한다.
아프간 철수작전 바이든에 흠집내
한국, 아프간 재건에 20년간 헌신
한국의 신속한 구출과 환대 인상적
미들파워 한국의 존재감 주목해야
외교·안보 분야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아프간 계획 전반, 나아가 미국이 세계에서 차지하는 과거와 미래의 역할에 대한 논쟁이 뜨겁다.
미국이 20년 전 아프간에 들어간 것이 문제였나.
국가 건설 과정이 너무 과하거나 부족했나, 아니면 처음부터 불가능했나.
아프간 문화·역사에 대해서도 너무 무지했나.
이런 논의에서 한국은 성공적인 ‘국가 건설’ 모델로 자주 언급된다.
미군 주둔으로 수십 년간 안보 태세를 유지하고 있는 불완전하지만 성공적인 모델로도 거론된다.
미국의 상대적 쇠퇴와 신뢰도 하락, 동맹국들에 대한 미국의 책무와 관련된 인식도 자주 거론된다.
‘서울은 카불이 아니다’ ‘미국의 또 다른 영원한 전쟁터인 한국은 아프간 철수를 어떻게 바라보는가’ 같은 제목의 글들은 “주한미군을 감축할 생각이 없다”라는 제이크 설리번 미 국가안보보좌관의 발언과 맞물려 있다.
한국 언론 보도를 접하면서 느낀 점은 미군 철수에 대한 우려가 한국보다는 미국과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에 대한 불안이 극심한 유럽에서 더 심각하게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도 미국은 한국의 다양한 목소리를 경청해야 한다.
지난 20년 동안 우여곡절 속에서도 추진됐던 한국의 아프간 파병이 보여준 미국과의 보다 성숙한 파트너십과 ‘글로벌 미들파워’로 떠오르고 있는 한국의 존재감도 주목해야 한다.
2001년 9·11테러 이후, 김대중 정부는 정치적으로 민감한 상황에서도 아프간에 공병 및 의료부대를 신속하게 파견했다.
2003년 노무현 정부는 이라크전에 의료지원단과 건설지원단을 보냈다.
이것도 정치적으로 매우 중요하고 어려운 결정이었다.
한국은 2008년 이라크 파병 임무가 평화적으로 종료되기 전까지 연합군 중 세 번째로 많은 병력을 지원한 국가였다.
그러나 2007년 분당샘물교회 교인 23명이 선교활동을 하러 아프간에 갔다가 탈레반에 납치돼 2명이 살해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나는 미국 외교관으로서 납치된 민간인 구출과 더 많은 인질극을 조장할지 모를 위험 사이에서 균형을 맞춰야 했던 당시 한국 정부의 난처함에 공감했다.
결국 인질 석방은 성공했지만 그 여파로 한국 파병 인력 주둔지는 바그람 미군기지에 자리 잡았던 작은 한국병원으로 축소되었다.
2009년 한미 의제로 다시 아프간이 떠올랐고, 2010년 한국은 군인·경찰·구호요원들로 구성된 지방재건팀(PRT)을 파견하는 등 지원을 확대했다.
아프가니스탄은 계속 성장하고 있는 한국의 공적개발원조(ODA) 초창기 주요 수혜국이었다.
한국은 2002년 카불에 코이카(KOICA) 사무소를 개설하고 각종 위협과 어려운 여건속에서도 지원활동을 이어갔다.
2013년에는 한국의 최대 양자간 원조수혜국이었다.
지난해 12월 한국의 나토 외무장관 회의 참석에서 보듯이 나토와 동반자 관계를 계속 확대하고 있는데 그 인연이 시작된 곳도 아프가니스탄이다.
2001년부터 나는 미국이 주도하는 아프간 재건 노력에 한국이 보여준 헌신을 지켜봐왔다.
세계적으로 부상하고 있는 한국의 자신감과 정체성, 급성장하는 소프트파워와 하드파워, 특히 중앙아시아에서의 인적 네트워크의 확대도 눈여겨봐왔다.
태권도가 아프간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것에서도 이를 알 수 있다.
아프가니스탄이 역대 올림픽에서 딴 유일한 메달 두 개가 이란에 있는 아프간 난민 수용소에서 태권도와 사랑에 빠진 선수에게 돌아갔다.
한국 정부의 신속하고 효과적인 아프간인 구출과 그들이 한국에서 받은 따뜻한 환대도 인상적이었다.
한국이 앞으로도 아프간 국민들, 특히 여성과 소녀들에게 교육 기회를 제공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할 수 있길 기대한다.
캐슬린 스티븐스 전 주한 미국대사·한미경제연구소장
탈레반, 카불 거리 순찰 아프가니스탄 무장반군 탈레반 대원들이 16일(현지 시간) 수도
카불의 하미드카르자이 국제공항 앞을 지키고 있다. 카불=AP 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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