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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과 시사

5·18 유혈 진압’ 침묵으로 일관… 전두환, 사죄 없이 떠났다

 

 

 

 

더팩트

 

 

 

 

 

 

전두환이 숨진 23일 오후 광주 북구 망월동 옛 5·18묘역에 비가 내리고 있다. 광주/김혜윤 기자
unique@hani.co.kr
 
 
 



 

 

전두환 장군 퇴역식. (1980년)  oh.byungsang@joongang.co.kr

1979년 당시 전두환 계엄사 합동수사본부장이 박정희 전 대통령 사망 관련 수사 결과를

발표하고 있다. 연합뉴스

 

 

 

 

 

 

 

 

 

전두환 전 대통령. 연합뉴스

 

 

 

 

 

5·18 유혈 진압’ 침묵으로 일관… 전두환, 사죄 없이 떠났다

 

 

광주 무력 진압 핵심 책임 당사자
발포 명령 인정 않은 채 세상 떠나
야당·언론 탄압… ‘비리공화국’ 악명


호헌철폐 거부하다 ‘역풍’ 내리막길
재임 중 경제성장률 年 9.3% 기록
88올림픽 유치 등 문화발전도 업적

 

 

 

 

대한민국 제11·12대 대통령을 지낸 전두환 전 대통령이 23일 별세했다.

향년 90세.

전 전 대통령은 지난 8월 악성 혈액암인 다발성 골수종 확진 판정을 받고 투병 생활을 하다가 이날 오전 8시45분쯤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 자택에서 숨졌다.

 

이날은 공교롭게도 33년 전인 1988년 11월 23일 그가 재임기간 중의 독재와 비리에 대한 책임으로 백담사로 향했던 날이다.
그는 현대사의 비극인 1980년 5·18광주민주화운동 유혈 진압과 그 과정에서 수많은 광주 시민을 학살한 과오에 대해서 끝내 사과하지 않았다.

 

오히려 5·18 발포 명령과 관련한 진실 규명을 거부하고 역사에 씻을 수 없는 과오와 상처를 남긴 채 세상을 떠났다. 이 사안은 영구 미제로 남을 가능성이 커졌다.

전 전 대통령 측근 민정기 전 청와대 비서관은 이날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 고인의 자택 앞에서 기자들과 만나 “전 전 대통령이 아침에 자택에서 화장실을 가려다가 쓰러졌다.

이순자 여사만 계셨고 외부에 연락할 틈도 없이 운명하셨다”며 소식을 전했다.

 

경찰은 이날 오전 9시12분쯤 현장에 도착해 사망 사실을 확인했고, 시신은 서울 서대문구 세브란스 병원으로 옮겨졌다.
민 전 비서관은 “2017년 회고록 3권 648쪽에 사실상 유서를 남겼다”며 “‘북녘 땅이 보이는 전방의 고지에 백골로 남아서라도 통일을 맞고 싶다’는 게 유서였다”고 했다.

 

이어 “평소에도 ‘나 죽으면 화장해서 그냥 뿌려라’라고 말씀을 가끔 하셨다.

가족들은 유언에 따라 그대로 하기로 했다”며 “장지가 결정될 때까지 일단은 화장한 후에 연희동에 모시다가 옮길 것”이라고 말했다.

 

 

 

 

 

 

 

 

전두환 전 대통령이 사망한 23일 오전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 자택 입구에서 민정기

전 비서관이 사망을 공식 발표하고 있다. 연합뉴스

 

 

 

 

 

 

1931년 1월23일 경남 합천군에서 태어난 그는 1955년 육사 11기를 졸업한 뒤 승승장구했다.

1979년 10월26일 박정희 전 대통령 피살 사건 당시 합동수사본부장을 맡아 사건 수사를 담당했다.

군대 내 사조직인 ‘하나회’를 중심으로 한 신군부 세력을 이끌며 같은 해 12·12 군사 쿠데타로 정권을 찬탈했다. 계엄령을 선포한 뒤 ‘서울의 봄’으로 표출된 시민들의 민주화 열망을 짓밟았다.

 

이어 1980년 광주 5·18 민주화운동을 유혈진압했다. 같은 해 9월 간접선거를 통해 대통령에 취임한 뒤 직선제 개헌 등 민주화 요구를 억누르다가 1987년 6월 민주항쟁으로 물러났다.

퇴임 후인 1996년 내란, 내란목적살인죄, 뇌물 수수 등 혐의로 1심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대법원에서 무기징역으로 감형됐다.

 

전 전 대통령은 생전 자신의 과오에 대해 끝내 사과하지 않았다.

2017년 펴낸 회고록에서 “5·18 사태는 폭동이란 말 이외에는 달리 표현할 말이 없다”고 밝혔고 12·12 군사 반란에 대해서도 “우발적 사건”이라고 주장했다.

 

민 전 비서관은 이날 ‘5·18에 대한 사죄가 없었다’는 지적에 “기회 있을 때마다 (했다).

33년 전 11월23일 백담사에 간 날에도 성명을 발표하고 미안하다는 뜻을 밝혔다”고 해명했다.

그러면서도 “발포 명령은 없었다”며 기존 입장을 반복했다

 

유족으로는 부인 이순자씨와 아들 재국·재용·재만씨, 딸 효선씨가 있다.

 

 

 

 

 

 

 

 

23일 서울 마포구 세브란스병원 신촌장례식장에 마련된 빈소 앞 전광판에 전두환 전

대통령의 사진이 나오고 있다. 뉴스1

 

 

 

 

 

◆광주 유혈진압 등 인권·민주주의 파괴… 경제 성장은 치적

 

전두환 전 대통령은 현대사에 씻을 수 없는 과오를 남긴 대통령으로 평가된다.

12·12 군사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후 7년간 대통령으로 재임한 그는 ‘신군부 철권통치’로 학생과 야당 정치인, 노동자를 막론하며 민주주의와 인권을 탄압했다는 비판을 받는다.

 

특히 1980년 ‘광주 5·18 민주화항쟁’ 유혈진압은 1950년 6·25전쟁 이후 가장 많은 사상자를 낸 현대사의 비극으로 꼽힌다.

 

◆춘래불사춘… 12·12 이후 얼마 못 간 ‘서울의 봄’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전 대통령 시해사건 이후 계엄사 합동수사본부장 겸 보안사령관이던 전 전 대통령은 그해 12월12일 신군부를 동원, 국방부와 육본을 점거하는 쿠데타를 일으켰다.

1980년 ‘서울의 봄’이 왔다. 민주화에 대한 국민 열망이 분출했다.

 

많은 이들은 박 전 대통령의 사망으로 유신독재가 무너져 곧 민주화가 이뤄질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나 김종필(JP) 전 국무총리는 박 전 대통령 사후(死後) 정치 과도기적 상황을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봄이 와도 봄 같지 않다)’이라고 빗댔다.

1980년 2월 김영삼, 김대중, 김종필 등 소위 ‘3김 회동’에서였다.

 

불길한 예감은 현실이 됐다. 서울의 봄은 얼마 가지 못했다.

군사반란으로 정권을 손에 넣은 전두환 신군부는 그해 5월 18일 비상계엄령을 확대해 김대중·김영삼 등 주요 정치인들을 체포하거나 연금했다. 국회도 폐쇄했다.

민주화를 요구하는 국민들의 목소리는 군홧발에 짓밟혔다.

 

특히 광주에서 군부 쿠데타에 항거하는 민주화운동이 일어나자 군을 동원해 무참하게 시민시위대를 진압했다. 5·18 광주민주화운동 유혈진압이다.

전 전 대통령은 1995년 군형법상 수괴반란 등 혐의로 구속기소돼 1심에서 사형을 선고받은 뒤 감형돼 대법원에서 무기징역이 확정됐다.

 

 

 

 

 

 

 

 

1979년 11월 6일 전두환 당시 계엄사 합동 수사 본부장이 박정희 전 대통령 사망사건

관련 발표를 하고 있는 모습. 연합뉴스

 

 

 

 

 

◆역사의 시곗바늘 거꾸로 돌린 5·18 광주 유혈진압

 

1980년 5월 18일 새벽 2시 전남대와 조선대 등 광주지역 대학에 계엄군이 투입되면서 시작된 5·18 유혈진압은 9일 뒤인 27일 새벽 4시55분 계엄군의 전남도청 진입으로 ‘악몽의 10일’에 종지부를 찍는다. 이 열흘의 기억은 훗날 전두환정권의 반민주적 철권통치를 종식하는 민주화운동의 원동력이 된다.

 

30여년이 지났지만, 실체적 진실 규명과 국가 공권력의 희생자들에 대한 상처 치유는 끝나지 않고 있다.

광주학살의 책임 소재를 가릴 핵심인 최초 발포 및 집단발포 명령자를 여전히 특정하지 못하고 있다. 헬기사격 책임자,

성폭력 가해자, 암매장 장소 등에 대한 조사도 남아 있다.

 

 

 

 

 

 

 

 

 

5·18 민주화운동 당시 시민을 진압하는 계엄군. 연합뉴스

 

 

 

전두환 신군부는 자위권 발동을 내세우며 발포명령자를 부정해 왔고, 1995∼1997년 이어진 검찰수사에서도 발포 명령자를 기소하지 못했다.

5월 27일 이른바 ‘상무충정작전’인 전남도청 무력 진압작전에 개입한 일에 대해서만 내란목적 살인죄로 유죄 판결을 받았을 뿐이다.

 

최근에는 계엄군의 헬기 사격과 전투기 무장출격 대기 사실이 밝혀졌고, 계엄군과 보안사 수사관의 성폭력 등 성범죄 폭로도 이어지면서 진상규명 범위도 넓어졌다.

 

지난해 5월 5·18 40주년에 맞춰 5·18 민주화운동 진상규명조사위원회가 꾸려져 본격적인 조사활동에 돌입했지만 뚜렷한 성과는 없는 실정이다.

전 전 대통령은 2017년 4월 펴낸 회고록에서 5·18에 대한 자신의 책임을 전면 부인하고 발포 명령을 정당화해 논란이 일기도 했다.

 

그는 회고록에서 5·18 당시 헬기 사격을 목격했다고 증언한 고(故) 조비오 신부에 대해 ‘성직자라는 말이 무색한 파렴치한 거짓말쟁이’라고 비난해 사자(死者)명예훼손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1980년 전두환 대통령 취임식에서 취임 선서를 하는 모습.

행정안전부 대통령기록관 제공

 

 

 

 

 

◆신군부 ‘5공화국’ 독재정치의 시작과 끝

 

전 전 대통령은 1980년 9월 1일 선거인단을 동원, 간접선거로 치러진 ‘장충체육관 선거’에서 대한민국 제11대 대통령에 취임했다.

1981년 1월 민주정의당을 창당해 총재에 올랐다.

그해 2월 개정된 헌법에 따라 3월 체육관 간선제를 통해 제12대 대통령에 올랐다. ‘신군부 독재’ 5공화국의 시작이다.

 

그는 선진국으로 발돋움하기 위한 새 질서를 확립한다는 명목으로 삼청교육대를 창설했으나 무고한 일반인을 구금하며 인권을 탄압했다.

동아방송 등 언론기관은 야당 성향이란 이유로 강제 통폐합을 당했다.

 

대학생 등을 용공세력으로 조작해 인권을 탄압했다.

1981년 9월 공안 당국은 부산에서 사회과학독서모임을 하던 학생과 교사, 회사원 등 22명을 불온서적으로 규정됐던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 ‘역사란 무엇인가’ 등 이적표현물 학습했다는 이유로 불법감금하고 잔혹하게 고문했다.

 

‘부림사건’이다.

체포된 22명 중 19명이 국가보안법, 계엄법 위반 등 혐의로 징역 1년6개월∼6년을 각각 선고받았다.

 

당시 변호사였던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은 김광일 변호사 등과 함께 변론을 맡았다.

정치인과 재야인사에 대한 탄압도 가혹했다.

 

고 김근태 전 의원은 1985년 9월 국가보안법 등 위반 혐의로 치안본부 대공분실에서 강제감금·고문을 당한 사실을 폭로하고 수사를 요구했으나 묵살당했다.

 

1987년 1월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으로 전두환정권의 만행이 알려지게 됐다.

경찰은 1987년 1월 14일 서울대 학생이던 박종철군을 불법 체포한 뒤 치안본부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고문하다

사망케 했다.

내무부 치안본부장은 “책상을 ‘탁’ 치니 ‘억’하고 죽었다”며 사인을 ‘단순 쇼크사’로 은폐했다.

 

5개월 뒤인 6월 9일 연세대학교 정문 앞에서 시위를 벌이던 중 이한열군이 경찰에 쏜 최루탄에 맞아 사망 위험에 처한 사실이 알려졌고, 이는 6·10 민주항쟁을 부르는 도화선이 됐다.

 

‘4·13 호헌조치’를 통해 대통령 직선제를 거부하던 전 전 대통령은 전국적으로 일어난 시위에 결국 항복한다.

그해 6월 29일, 여당인 민주정의당 노태우 대선 후보는 ‘6·29 선언’을 통해 대통령 직선제를 수용하겠다고 밝혔다.

 

 

 

 

 

 

 

 

 

 

 

 

 

 

◆경제 성장, ‘88올림픽’ 유치는 성과로 평가돼

 

다만 기록적 경제성장과 1988년 서울올림픽 유치 등은 공적으로 평가된다.

김재익·사공일 청와대 경제수석 등 경제 관료에 전권을 위임, 박정희시대 때 정부가 주도했던 경제정책을 시장 중심으로 바꾼다.

 

그가 김재익에게 “여러 말 할 것 없어. 경제는 당신이 대통령이야”라고 했다는 말은 지금도 회자된다. 집권 첫해인 1980년 1714달러이던 국민 1인당 국내총생산(GDP)은 집권 마지막 해인 1988년 4754달러로 2.8배 늘었다.

 

1970년대 말 중동발 경제붐과 1980년대 중반 저달러·저유가·저금리의 ‘3저 호황’도 영향을 미쳤지만, 집권기간 연평균 성장률은 9.3%로 역대 정부 중 가장 높다.

 

전 전 대통령이 유치한 1986년 아시안게임과 1988년 서울올림픽은 한국을 세계에 널리 알렸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러나 고도성장 과정에서 기업과 정치권의 정경유착은 만연해졌고, 재임 중 ‘통치자금’ 명목으로 대기업들로부터 약 7000억원대의 비자금을 조성했다.

 

의료보험과 산재보험의 적용 범위를 확대하기도 했다.

1982년 프로야구를 출범하고 1983년 프로축구와 프로씨름을 차례로 도입했다.

 

 

 

 

 

 

 

 

애증의 ‘쿠데타 동지’ 12·12 군사반란과 5·18 민주화운동 당시 내란 및 내란 목적 살인,

뇌물 등 혐의로 구속기소된 전두환(오른쪽)·노태우 전 대통령이 1996년 8월26일

서울지법에서 열린 선고공판에 출석한 모습. 연합뉴스

 

 

 

 

◆“전 재산 29만원”… 추징금 956억 환수 불투명

 

전 전 대통령 미납 추징금 956억원을 환수할 길은 사실상 사라졌다.

5·18 광주민주화운동 관련 사자명예훼손 혐의 항소심 재판도 중단될 전망이다.

서울중앙지검 범죄수익환수부에 따르면 전체 추징 대상 금액 2205억원 중 이날까지 1249억원(57%)이 추징돼 956억원이 남았다.

 

현행법상 미납 추징금 집행은 당사자가 사망하면 절차가 중단된다.

형사소송법은 예외적으로 상속재산에 대한 집행을 규정하고 있지만 전 전 대통령의 경우 해당하지 않는다.

 

오는 29일 광주지법에서 결심공판이 예정된 전 전 대통령 항소심 재판도 공소기각이 불가피해졌다.

그는 2017년 회고록에서 5·18 당시 군부의 헬기사격 사실을 부정하며 이를 증언한 고 조비오 신부를 비난한 혐의(사자명예훼손)로 기소돼 지난해 1심에서 징역 8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이현미 기자, 장혜진·박미영 기자, 광주=김동욱 기자

[ⓒ 세계일보 & Segye.com, 

 

 

 

 
 
 
 
 

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전두환 빈소 23일 서울 마포구 세브란스병원 신촌

장례식장에 마련된 전두환씨 빈소.연합뉴스

 

 

 

 

 

 

[서울=뉴시스] 백동현 기자 = 23일 서울 서대문구 신촌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고 전두환 전 대통령 빈소에 영정이 놓여 있다. (공동취재사진) 2021.11.23. photo

@newsis.com

 

 

 

 

 

 첫날 300여명 조문... 북한침투설, 빨갱이 공성 난무한 전두환 빈소

 

 

 
 

 
전직 대통령 고 전두환씨의 빈소는 '학살에 사죄하지 않았다'는 시민들의 싸늘한 시선과 '그에게도 공이 있다'는 측근들의 애도가 뒤섞인 풍경이었다.

현장은 여느 유명인들의 장례식장과 달리 취재진을 제외하곤 조문객의 수가 많지 않아 썰렁함이 느껴질 정도였다. 

전씨가 사망한 23일, 유족은 서울 서대문구 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 지하 2층 특1호실에 빈소를 차리고 오후 5시께부터 조문객을 받았다.

아침 기온이 영하권으로 떨어지고 낮 동안에도 칼바람이 계속됐던 이날, 전씨의 시신을 옮기는 운구차량은 그가 사망한 지 6시간여 만인 오후 3시 15분께 세브란스병원에 도착했다.

운구차량은 취재진을 피해 가듯 장례식장 정문 옆 주차장 입구가 아닌 병원 본관 입구로 에둘러 진입해 안치실로 향했다.

 

이 때문에 정문 앞에서 운구차를 기다리던 기자들 40여 명이 한꺼번에 차량 뒤꽁무니를 따라 뛰어가는 진풍경이 벌어지기도 했다.
빈소 관계자는 이날 밤 10시까지 5시간 동안 조문객 300여 명이 빈소를 찾았다고 밝혔다.

 

자녀 재국·재용·효선씨와 배우자 이순자씨가 상주로 손님을 맞았다. 고인의 최측근인 장세동 전 안전기획부장, 민정기 전 청와대 비서관 등은 유족보다 먼저 도착해 빈소를 마련했다.

미국에 거주 중인 삼남 재만씨는 귀국 중인 것으로 전해졌다.

 

 



빈소 밖 "역사 반성 없는 자 살 가치 없다"
  

 
 
 
 
      손가영
 
 
 
 
 
 
 
 
 

손가영

 
 
 
 

   
전씨를 규탄하는 시위는 빈소가 차려질 무렵부터 열렸다.

올해 수능을 치렀다는 청년 안아무개(20)씨는 밤을 꼬박 새울 심정으로 오후 5시 반께 장례식장을 찾아 5시간 가량 1인 시위를 했다.

오후 10시에 빈소가 문을 닫지 않았다면 자정엔 내부에 들어가 시위를 이어 나갈 예정이었다.

안씨는 스케치북에 직접 '반성하지 않는 자는 살아갈 가치가 없다'는 문구를 써서 들었다.

그는 "전두환씨는 자신의 사자명예훼손 사건 재판이 열리는 동안에 광주에 내려오지도 않고, 광주시민에 사과할 기회를 줬음에도 스스로 걷어찼고 또 이렇게 사망했다.

 

이에 대한 내 생각을 표현하고자 왔다"며 "전직 대통령이라는데 기본적인 그 책임을 다 산산조각 냈다"라고 비판했다.
안씨가 시위를 시작한 지 30여 분 후, 맞은편 장례식장 정문에선 '전두환 심판 국민행동' 회원 예닐곱 명이 "그를 명복할, 애도할 마음은 단 1%도 없다"며 기자회견을 열었다.

이들은 전씨가 "5·18 학살과 헌정유린, 삼청양민학살, 형제복지원과 군 강제징집 녹화 선도공작의 참담한 고문 및 인권유린과 탄압, 노동운동 탄압 등 5공화국에서 벌어진 국가폭력의 만행에 단 한 마디 사죄도 없이 떠남으로써 국민을 허탈한 심정에 빠뜨렸다"고 규탄했다.

노동운동가 전태일 열사의 동생 전태삼씨도 회견에 참여해 "전씨의 만행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말했다.

전씨는 "1980년 5월이 오기 전 청계노조 조직부장으로 있을 때 시도 때도 없이 (경찰이) 와서 목에 보자기 씌워서 마음대로 잡고 검거했고, 어머니와 성동구치소에서 함께 있을 때 운동장으로 끌고 나가 각종 가혹행위를 했던 전두환의 만행을 잊을 수 없다"며 "41년 전 아들들의 목숨을 강제로 빼앗기고 시신을 받았던 (광주민주화운동) 부모들의 심정을 꼭 기억해달라"라고 말했다.

 



하나회·육사 출신 조문 행렬, "북한군 침투설" 막말까지

 
 
 
 
 
 

▲ 전두환 빈소 도착한 이순자  연합뉴스

 
 
 
 

 

 
 

조문객들의 발길은 밤 10시까지 계속 이어졌다. 특히 육군사관학교 출신 측근들이 눈에 띄었다.

전씨 군내 사조직인 하나회에 속했던 고명승 전 육군 대장은 조문 후 빈소를 나서려다 두 번이나 발걸음을 돌려야 했다.

 

그는 빈소를 나오자마자 '5·18 유족에 사과할 생각 없느냐'고 질문하는 취재진 십수 명에 둘러싸이자 다시 빈소로 몸을 피했다.

결국 한 시간 가량 후 빈소를 다시 나와서는 기자들의 질문에 묵묵부답으로 일관한 채 건물을 빠져나갔다.

자신을 '육사 19기 후배'라 밝힌 노아무개씨는 전씨의 5·18 광주 학살의 책임에 관한 생각을 묻자 "국민이 생각하는 그대로"라고만 답하며 말을 아꼈다.

조문을 온 박희도 전 육군참모총장은 취재진이 '5·18 피해자에 사과할 마음이 없냐'고 묻자 이들을 밀치고 화장실로 피하기도 했다. 

김진영 전 육군참모총장, 신윤희 전 육군 헌병부단장, 전씨 비서실장을 지낸 이영일 전 의원, 전씨가 2년간 칩거했던 백담사 주지 스님 등도 빈소를 찾았다.
이날 정·재계, 종교계, 언론계 등에서 보낸 조화는 70개가 넘었다.

 

재계에선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 최태원 SK그룹 회장, 조현상 효성그룹 부회장, 임기주 한맥그룹 회장 등이 보냈다.

언론계에선 김민배 TV조선 사장, 홍정도 중앙일보·JTBC 대표, 김재호 동아일보 사장 등이 조화를 보냈다. 원내정당으로선 국민의힘 소속 정치인들의 조화만 확인됐다.

이준석 당 대표, 김도읍 정책위의장, 정진석 국회부의장, 김기현 의원, 강창희 전 새누리당 의원 등이 보냈다.

윤상현 의원은 이날 현역 의원 중 유일하게 빈소를 직접 찾았다.

밤 9시 30분께 모습을 보인 윤 의원은 30분 가량 빈소에 머물다 나갔다.

그는 자기 주변에 몰린 취재진의 질문에 '다음에, 다음에 해요'라는 말만 남기고 장례식장을 벗어났다.
 

 
 
 
 
 
 
 

안희재 sbs기자

 

 

 
 
 

  
빈소 앞은 몰려든 유튜버들이 내지르는 고성에 종종 소란스러워졌다.

취재진이 밤 9시 15분께 빈소를 나서던 이순자씨를 둘러싸고 '5·18 희생자에게 하실 말씀 없으세요'라고 묻자, 현장에 있던 유튜버 네다섯 명이 "어떤 놈이야",

"전두환과 5·18이 무슨 관계냐", "빨갱이들아", "빨갱이가 여기 왜 왔느냐"라고 소리쳤다.

 

유튜버들의 격한 행동은 기자들이 조문객에 5·18에 대한 사과를 언급할 때마다 반복됐다.
조문객 대부분과 유족은 역사적 과오엔 침묵했다.

오히려 정진태 전 한미연합사 부사령관은 5·18진상규명조사위원회가 허위라고 판명한 '북한군 침투설'을 다시 꺼냈다.

그는 빈소를 나서며 만난 기자들에게 "그때 한국에 300여명이나 되는 (북한군이) 남하해 일으킨 사건 아니겠어?"라며 "만일 그걸 수습하지 못했다면 내가 국민 한 사람으로서 대한민국 역사가 어떻게 됐을지 다시 한번 생각해 봐야 한다"고 밝혀 현장이 술렁였다.

한편, 전씨의 장례는 오는 27일까지 5일장으로 치러진다.

유족은 24일엔 오전 9시부터 조문객을 맞이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입관은 25일 오전 10시, 발인은 27일 오후 8시다.

장지는 미정이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손가영 기자.

 

 

 

 

 

 

23일 오후 서울 서대문구 신촌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故 전두환 전 대통령의

빈소에서 유가족이 조문객과 대화하고 있다. 이한결 기자


 

 

정부 전두환 장례식 국가장으로 치르지 않는다

 

 

 

 

 

23일 정부는 전직 대통령 전두환씨의 장례식을 '국가장'이 아닌 가족장으로 치른다고 발표했다.

이날 오후 6시 행정안전부 의정관실은 "전 전 대통령의 장례는 가족장으로 진행한다"고 밝혔다.

이어 "청와대 대변인의 브리핑이 곧 정부 발표로 보면 된다며 행안부에서 별도의 자료 배포와 같은 발표는 없다"고 덧붙였다.

 

이날 박경미 청와대 대변인은 '전두환 전 대통령 사망 관련 브리핑'을 열고 "전두환 전 대통령의 명복을 빌고 유가족들에게 위로의 말씀을 드린다.

끝내 역사의 진실을 밝히지 않고 진정성 있는 사과가 없었던 점에 대해서 유감을 표한다.

청와대 차원의 조화와 조문 계획은 없다"고 밝혔다.

 

노태우 전 대통령 사망 당시에는 문재인 대통령 명의의 조화를 보내고 유영민 대통령 비서실장이 빈소를 조문한 바 있다.

청와대의 입장문도 노 전 대통령 때에는 '추모 브리핑'으로 발표했으나, 이번에는 '전두환 전 대통령 사망 관련 브리핑'으로 차이가 있다.

 

한편 가족장은 가족 및 친족 중심으로 치러지는 장례로 이승만·윤보선 전 대통령의 장례가 가족장으로 치러진 바 있다.

 

 

 

 

송정은 기자 blue1004sje@dailiang.co.kr

 

 

 

 

 

 

24일 오전 서울 종로구 보산각 앞에 철거된 후 남은 전두환 전 대통령 영정 사진이

놓여있다. 연합뉴스

 

 

 

보수단체, 보신각에 ‘전두환 분향소’ 기습 설치…2시간만에 철거

 

 


전두환 전 대통령을 추모하는 분향소가 24일 서울 도심에 보수단체에 의해 기습 설치됐다가 관할 자치구에 의해 철거됐다.
보수 성향 단체인 태극기혁명국민운동본부(국본)가 24일 오전 6시쯤 서울 종로구 보신각 앞에 경찰과 관할 구청의 감시가 없는 틈을 타 제11·12대 대통령을 지낸 전씨의 추모 분향소를 기습 설치했다.

종로구청은 설치 2시간여만인 이날 오전 8시쯤 가로시설정비팀 소속 직원 10여명을 투입해 천막을 철거했다. 철거 과정에서 구청 직원들과 국본 측 사이에 별다른 마찰은 없었던 것으로 전해졌다.
앞서 종로구청은 전날 다른 보수단체들(일파만파애국자총연합, 육군사관학교 전역 군인 모임 등)이 서울 종로구 동화면세점 앞 설치하고 있던 전씨의 분향소를 도로법 위반을 이유로 막았다.

구청 관계자는 “사람이 다니는 도로에 구조물을 설치하려고 해 금지한 것”이라며 “국장(國葬)이 아닌 개인적으로 추진한 분향소인 점도 감안했다”고 밝혔다.

 

 



김용현 기자 face@kmib.co.kr

GoodNews paper ⓒ 국민일보(www.kmib.co.kr)

 
 
 
 
 

 

1996년 2월26일. 전두환씨가 법정에 선 날이다. 12·12 군사쿠데타 주역이자 5·18 광주

민주화운동을 유혈 진압한 전두환씨가 23일 사망했다. 한겨레 자료사진

 

 

 

 
 

전두환 별세에 시민 반응 대립…"사죄하라" vs "공은 인정해야"

 
 

악성 혈액암 투병 중 23일 오전 별세
"결국 사죄 안 하고 갔다" 싸늘한 반응
"공을 제대로 평가 못 받아" 반대 의견도

 
 


[서울=뉴시스] 박민기 이준호 기자 = 대한민국 제11대, 12대 대통령을 역임했던 전두환 전 대통령이 연희동 자택에서 지병으로 사망했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온라인상에서는 긍정적인 반응과 부정적인 반응이 대립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전 전 대통령을 긍정적으로 평가한 시민들은 "공은 인정해야 한다"는 반응을, 부정적으로 평가한 시민들은 "죽기 전에 사죄했어야 한다"는 반응을 보였다.

23일 뉴시스 취재를 종합하면 전 전 대통령은 이날 오전 8시45분께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 자택에서 별세했다. 임종 당시에는 부인인 이순자 여사만 자리를 지켰던 것으로 전해졌다.

전 전 대통령은 악성 혈액암이 다발성 골수종 확진 판정을 받고 통원 치료를 받았으나 최근 상태가 악화한 것으로 알려졌다.

전 전 대통령의 빈소는 이날 오후 서울 서대문구에 위치한 신촌 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됐다. 장례는 5일장으로 치러지며 발인은 오는 27일이다.

전 전 대통령이 사망했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각종 커뮤니티에서는 전 전 대통령이 생전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무력으로 진압하는 등의 과오를 지적하는 등의 싸늘한 반응들이 올라왔다.
한 커뮤니티의 네티즌은 "자신의 잘못에 대해 인정하지 않고 세상을 등져 아쉽다"며 "그곳에서 자신의 죄에 대해 반드시 사죄하시길"이라는 글을 남겼다.

이 외에도 "사과 한마디 없이 죽는구나", "사과는 하고 가지", "억울하게 죽임 당한 영혼들에게 위로가 되길 바라요", "끝까지 사죄는 안 하는구나", "죗값은 누가 받나요" 등 대체로 과오를 지적하는 반응들을 보였다.

 

 

 

 

 

 

[서울=뉴시스] 백동현 기자 = 23일 오후 서울 서대문구 신촌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故 전두환 전 대통령의 빈소에서 조문객들이 고인을 향해 거수경례하고 있다.

2021.11.23. livertrent@newsis.com

 

 


반면 이와 상반된 의견을 낸 네티즌들은 "사람마다 생각이 다른 것 아니겠느냐.

나는 노태우와 전두환은 공을 제대로 평가 못 받고 죽은 것이 조금 안타깝다",

"지금 전두환보다 더 부당이익을 챙긴 대장동 화천대유 관계자들 수사는 제대로 되고 있느냐",

 

"솔직히 말해서 대한민국 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보자면 현 대통령보다 100배 1000배는 더 잘했다" 등의 반응을 보였다.
전 전 대통령은 국가장(國家葬) 대상이 아니라는 반응들도 올라왔다.

한 네티즌은 "전두환씨는 법적으로 국가장 대상에 해당되지 않는다"며 "유족이 국가장을 요청해도 청와대는 법에 근거해서 거부할 수 있다"고 전했다.

이 외에도 "다른 건 몰라도 국가장은 안 된다",

"국가장을 하더라도 누가 가겠느냐" 등의 반응을 보였다.

국가장법에 따르면 전·현직 대통령이거나 국가 또는 사회에 현저한 공훈을 남겨 국민의 추앙을 받는 사람이 사망했을 때 행안부 장관의 제청으로 국무회의의 심의를 마친 후 대통령이 결정한다.

정부는 이날 오후 전 전 대통령 장례 절차를 국가장으로 치르지 않는다는 최종 입장을 밝혔다.

전 전 대통령은 지난 1979년 12·12 군사 쿠데타를 일으켜 대통령에 취임했다.

이후 1980년 5·18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무력 진압으로 많은 시민들을 학살한 혐의 등으로 재판에 넘겨져 1심에서 사형을, 2심에서 무기징역형과 추징금 2205억원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1997년 12월 김영삼 정부의 특별사면으로 풀려난 뒤 이듬해 복권됐다.

 

 

 




◎공감언론 뉴시스 minki@newsis.com, Juno22@newsis.com

 

 

 

 

 

 

 

박상은 기자 pse0212@kmib.co.kr

 

 

 

 

 

 

서울 서대문구 신촌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전두환 전 대통령 빈소에 이명박\ 전 대통령, 반기문 전 UN사무총장 등이 보낸 근조화환이 놓여 있다. 연합뉴스

 

 

 

 

 

 

23일 오후 서울 서대문구 신촌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전두환 전 대통령의

빈소에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 근조화환이 놓여져 있다. 이한결 기자

 

 

 


 

전두환, 내지 않은 956억원…환수 가능성은 '불투명'

 
 


전두환씨가 사망하면서 지난 24년간 내지 않은 추징금 956억원도 전액 환수하지 못할 가능성이 커졌다. 검찰은 추징 대상자의 사망일지라도 환수할 방법이 없는지 검토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하지만 법조계에서는 추가 환수가 쉽지 않을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24일 서울중앙지검 범죄수익환수부(유진승 부장검사)에 따르면, 이날 기준으로 검찰이 환수한 전씨의 재산은 1249억원이다.

전체 추징금 2205억원의 57%로 미납 추징금이 956억원이다.

검찰은 지난해까지 총 1235억원을 환수했다.

 

올해는 7월에 전씨의 장남 재국씨가 운영한 (주)시공사에서 3억 5천만원을, 8월에 임야 공매 낙찰 방식으로 10억원 상당을 받는 등 14억원을 환수했다.

현행 형사소송법상 미납 추징금 집행은 당사자가 사망하면 그 절차가 중단된다.

유산과 함께 상속되는 채무와 달리, 벌금이나 추징금 등은 법무부령인 '재산형 등에 관한 검찰집행사무규칙'에 따라 납부 의무자가 사망하면 '집행불능'으로 처리된다.

 

형사소송법은 예외적으로 몰수 또는 조세, 전매 기타 공과에 관한 법령에 의해 재판한 벌금 또는 추징은 그 재판을 받은 자가 사망한 경우에도 상속재산에 대해 집행할 수 있다고 규정하지만, 전씨의 경우 해당하지 않는다.

 

 

 

 

 



전직 대통령 전두환 씨가 향년 90세로 사망한 23일 서울 신촌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에

전 씨의 빈소가 안내되고 있다. 박종민 기자

 
 
 

다만 전씨의 미납 추징금 환수 절차가 바로 종료됐다고 단언하기는 어렵다.

검찰이 향후 미납추징금 집행 가능성에 대해 관련 법리 검토에 돌입한 까닭이다.

중앙지검 범죄수익환수부는 "당사자 사망이지만 추가 환수 여부 등에 대해 단정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면서 "검토 결과가 확정되면 추후 내용을 전달하겠다"고 밝혔다.

한 검찰 관계자는 "추징도 형벌의 일종이라 피고인이 사망하면 추징 집행은 안되는 게 원칙"이라면서도 "공무원범죄몰수법 개정안으로 인해 제3자 명의의 재산이 있고 그것이 이 개정안의 적용을 받는 경우 살펴볼 여지가 있어 검토해볼 수 있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원칙적으로 전씨가 사망해 추징이 어렵지만, 제3자 명의로 해둔 재산에 관해 추가 집행이 가능한지 살펴보겠다는 취지다.

 

 

 

 

 

 

 



 
 

전씨는 1997년 4월 군사반란, 5·18 광주 학살, 비자금 조성, 뇌물수수 등의 죄로 무기징역과 함께 추징금 2205억원을 확정 선고받았다.

하지만 그는 당시 313억여원을 낸 뒤 "전 재산이 29만원"이라는 말과 함께 계속해서 완납을 미루며 국민의 공분을 샀다.

 

전씨의 추징금 집행이 장기화하면서 2013년 대규모 규탄 시위가 벌어지는 등 여론이 악화되자, 같은 해 6월 이른바 '전두환 추징법'인 '공무원범죄몰수법 개정안'이 통과됐다.

개정법의 핵심은 기본적인 추징 시효를 3년에서 10년으로 늘리고, 직계가족뿐만 아니라 불법 취득한 자산임을 알고 사용한 제3자에게도 추징이 가능하도록 했다.  

법조계에서는 검찰이 사후 추징방법을 찾는 게 쉽지 않을 것이라는 관측이 적지 않다.

한 법조계 관계자는 "직계가족 뿐 아니라 불법 취득한 제3자의 자산을 찾아도 추징이 가능하기 때문에 제3자의 재산을 찾으려고 하겠지만 생전에도 어려운 일이 사후에 갑자기 쉬워질리 만무하다"면서 "전씨의 가족들도 상속을 포기할 것이기 때문에 더 이상의 재산 추징이 쉽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헬기사격에 대한 재판을 받고 있는 전두환

 

 

 

 

 

 

 

5.18관련 자료사진

 

 

 

 

 

사죄 없이 숨진 전두환…들끓는 호남 민심

 

 

 

 

5·18민주유공자유족회, 5·18민주화운동부상자회, 5·18구속부상자회, 5·18기념재단은 23일 공동 입장문을 내고 “국가 전복과 5·18 학살 주범 전두환이 사과 없이 사망했다”면서, 전 씨의 죽음으로 대한민국 헌정사를 유린하고 무고한 시민을 학살한 책임자에게 엄중한 법적 책임을 묻는 ‘역사적 심판’마저 기대할수 없게됐다며 허탈함을 내 비쳤다.

이어 “우리는 오월학살 주범들에게 반드시 책임을 묻고, 전두환의 범죄행위를 명명백백히 밝혀 역사정의를 바로 세워나가겠다”고 밝혔다.

호남지역 국회의원 27명도 이날 국회에서 긴급 기자회견을 열고 "고인에 대한 애도보다는 허망하고 분한 마음이 앞선다"며 "전두환은 마지막 순간까지 반성도 사죄도 없었고 법원이 이제 처벌조차 할 수 없다는 사실에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고 밝혔다.

의원들은 “역사의 책임은 반드시 물어야 한다”며 “법원에서 '공소 기각'으로 끝내는 것이 아니라, 엄정한 진실 찾기를 통해 대한민국 역사에 정의의 판결을 내려달라"고 촉구했다.

특히 "국가보훈처가 국립묘지법에 따라 내란죄 등 실형을 받은 경우 국립묘지 안장 대상에서 제외된다는 입장을 밝혔다"며, 전 씨에 대한 국립묘지 불가 입장을 ‘당연한 조치’라고 평가하고, 국가장 예우도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강조했다.

김영록 전남도지사도 이날 “5‧18과 역사에 대한 사죄 없이 숨진 전두환에 대해 광주‧전남 지역민과 함께 깊은 분노와 유감을 표한다”고 밝혔다.

김 지사는 이날 ‘죽음이 진실을 덮을 수는 없습니다’라는 제목의 발표문을 통해 “자신의 과오를 인정하기는커녕 오히려 5‧18의 가치를 폄훼하고 왜곡해온 그에게 어떤 애도도 적절치 않다”고 강조했다.

또 “전두환은 갔어도 5‧18의 아픔과 상처는 여전하다”며 “이를 온전히 치유하기 위해서는 그날의 진실이 반드시 밝혀져야 하고, 이는 시대적 소명”이라면서 “미완으로 남아있는 오월 그날의 진실을 밝혀내기 위해 끝까지 매진하겠다”고 다짐했다.

 

 

 

 

 

 



 

 

 

전두환씨 사망을 두고 ‘사과 없는 죽음’, ‘규명되지 않은 진실’에 호남 민심이 들끓고 있다.

국가정보원이 공개한 5‧18 관련 자료사진.이용섭 광주광역시장도 “역사의 죄인 전두환에게는 죽음이 면죄부가 될 수 없다”고 밝혔다.

이 시장은 성명을 통해 “오월 영령들과 민주시민들에게 끝내 사과 한마디 없이 5·18 진실에 대해 굳게 입을 닫은 채 생을 마감했다”면서 “반성과 사과 없는 죽음에 광주시민은 울분과 분노가 앞선다”고 강조했다.

이어 “전두환이 역사와 국민에게 지은 무거운 죄는 죽어서도 벗어날 수 없다”며 “150만 광주시민은 전두환의 국가장 등 어떠한 국가적 예우도 반대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뿐만 아니라 “5‧18진상규명은 거스를 수 없는 시대의 명령이다”며 “살아있는 5‧18책임자들은 그의 죽음을 교훈으로 받아들여 이제라도 5·18진실규명에 앞장서길 바란다”고 강조했다.
전남도의회도 이날 전 씨에 대한 국가장 및 예우를 절대로 반대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성명에서는 또 “일부 정치권에서 국가장을 언급하는 등 그의 흔적은 여전히 남아있다”면서 “역사와 함께 그를 심판하고 역사의 정의를 실현해 나가겠다”고 다짐했다.

민점기 진보당 전남도지사 후보도 논평을 내고 “우리는 지금 민주주의를 가치로 생각하는 국민 누구에게도 조문받지 못하는 독재자의 쓸쓸한 죽음을 보고 있다”면서 “마지막 순간까지 참회는커녕 진실을 왜곡했던 전두환에 대한 국가장과 그 어떠한 예우도 단호히 반대한다”고 밝혔다.

정의당 전남도당도 논평을 통해 “전 씨는 자신의 과오를 증명하는 수많은 죄목에도 불구하고 끝내 사과나 반성은 커녕, 오히려 2017년에는 회고록을 출판하며 자신의 죄를 부정하고 희생자들을 비난했으며 2019년 피고인 신분으로 온 광주에서조차 외려 큰소리를 치는 모습으로 5‧18유가족과 희생자들을 농락했다”고 비판하고 “앞으로도 우리의 역사는 그를 영원히 용서하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전교조 전남지부도 이날 “전두환이 살았을 때 죗값을 묻지 못한 것이 너무나 한스럽고 치욕스럽다”며 “영원히 사과받을 길을 잃어버린 오월 영령들께 고개 숙이며, 민중들이 피로 쓴 5‧18 민중항쟁의 역사를 바로 세우고, 학생들에게 오월 정신을 제대로 가르칠 것임을 다짐한다”는 논평을 냈다.

논평에서 “정부는 죗값을 치르지 않고 사망한 학살자 전두환에 대한 어떠한 예우도 검토해선 안 된다. 학살자 노태우에 대한 국가장에 얼마나 많은 국민들이 참담함을 삼켜야 했는지 똑똑히 알아야 한다”면서 “또다시 국가장 운운한다면 국민적 저항에 직면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무안=신영삼 기자 news032@kuk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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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전 대통령이 23일 별세했다. [중앙포토]

 

 

 

 

 

 

용서받지 못하고 떠난 전두환 전 대통령

 

 

 

전두환 11·12대 대통령이 어제 별세했다. 한 달 전 노태우 전 대통령에 이은 전 전 대통령의 별세로 ‘군인 대통령’의 기억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됐다.

대개 시간이 흐르면 공과를 논할 객관적 거리가 생겨난다.

 

고인은 그러나 여전히 논쟁적 인물로 남아 있다. 전직 대통령으로서 이례적인 가족장, 조문을 둘러싼 정치권 논란 자체가 깊디깊은 단층을 드러낸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18년 철권통치가 급작스레 막을 내리면서 만들어진 권력의 진공 공간을 고인이 12·12 군사쿠데타란 완력을 통해 차지했을 뿐만 아니라 이 과정에서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유혈 진압했고, ‘체육관 선거’란 간접선거로 선출된 대통령이란 명확한 한계 때문이다. 바로 정통성 문제다.

 

특히 5·18 책임 문제는 고인이 숨을 거둘 때까지 따라다녔다. 몇 차례 단죄도 받았다.

자신이 후계자로 지명한 노 전 대통령에 의해 강원도 백담사로 내려가 769일간 은둔 생활을 해야 했고, 김영삼 전 대통령 때엔 반란수괴죄 및 살인·뇌물수수죄로 기소돼 무기징역형이 확정됐다.

본질적으로 권위주의 통치자였다. 내내 민주화운동을 억압했고 노동운동을 탄압했다.

 

이는 1987년 서울대생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과 연세대생 이한열씨 사망 사건을 계기로 거센 민주화운동을 불러왔다. “독재 타도”는 넥타이부대를 거리로 불러낸 함성이었다.

그러나 여느 제3세계 군 출신 통치자들과 다른 선택을 했다.

 

스스로 단임을 결심했고 이행했다는 점에서다.

87년 민주화운동 때도 진압보단 타협(직선제 수용)을 택했다.

“전두환·노태우에 의한 민주화 과정이란 게 세계적으로 보면 유일하게 성공하다시피 한, 군사정권의 자진 후퇴”(이홍구 전 국무총리)였다.

 

경제 분야에선 한국 경제에서 불가능한 꿈이었던 성장·물가·국제수지란 세 마리 토끼를 잡았다.

박정희 시대로부터 물려받은 부실기업을 정리하고 만성적 인플레이션을 퇴치했다.

그래서 3저(저달러·저유가·저금리)에 올라타 ‘단군 이래 최대 호황’을 누릴 수 있었다.

개방경제와 시장 중시 방향을 잡았고 예산 동결과 같은 파격적 조치로 재정 건전화를 이룩했다.

 

지금도 한국의 재정 상태가 양호하다는 평가를 받는 기틀이 됐다.

“유능한 전문 인력을 발탁해 믿고 맡겼으며 본인 스스로 열심히 경제공부를 해나갔기에”(『대통령의 경제학』) 가능했다. \1986년 아시안게임과 1988년 올림픽 유치는 달라진 한국의 위상을 알리는 계기였다.

고인은 2017년 회고록에서 “나의 허물은 덮어버릴 수도 없는 것이고, 국민의 채찍도 피할 생각이 없다… 나로 인해 생겨난 증오와 분노가 한때의 증오와 분노로 사라지고 그 자리에 관용과 진실에 대한 믿음이 채워지기를 바라는 바람이 간절하다”고 썼다.

그러나 5·18 등에 대해 책임을 인정하지도, 그렇다고 사과하지도 않았다.

자신을 ‘정치적 책략의 희생물’로 여겼다.

진정한 용서는 진정한 사과를 전제로 한다.

 

그가 제대로 고개를 숙이지 않고 떠났기에 제대로 용서하기도, 제대로 평가하기도 어렵게 됐다.

그의 불행이자 우리의 불행이다.\ 전두환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우리에겐 쉽지 않은 숙제로 남았다.

 

 

 

 

중앙일보 오피니언 사설에서

 

 

 

전두환 전 대통령이 23일 별세했다. 향년 90세. 지병을 앓아온 전 전 대통령은 이날 오전

8시40분께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 자택에서 숨졌다. 사진은 지난 8월 9일 광주에서 열린

항소심 재판에 출석한 전씨가 25분만에 건강 이상을 호소하며 퇴청하는 공식 석상에 노출

된 마지막 모습. 연합뉴스

 

 

 

 

 

[사설] 참회 없이 떠난 전두환… 역사의 심판이 남았다

 

 

 

전두환 전 대통령이 23일 지병으로 사망했다. 끝내 사죄와 반성은 없었다.

쿠데타를 일으킨 정치군인, 민주주의를 짓밟은 독재자, 민간인을 학살한 범죄자, 권력을 이용해 수천억원을 챙긴 부정축재범이라는 오명만을 남겼다.

 

내란의 공모자였던 노태우 전 대통령이 가족을 통해서나마 용서를 구했던 것과 달리 그는 마지막까지 5·18 민주화운동과 관련된 재판을 받으며 수많은 무고한 죽음의 책임을 부인하다가 세상을 떠났다.

 

“전 재산이 29만원”이라면서 추징금을 회피하고, “시대적 상황이 나를 역사의 전면에 끌어냈다”며 쿠데타를 정당화하고, 광주 학살 증언자를 “새빨간 거짓말쟁이”라고 모욕하는 등 국민을 우롱하는 행태로 일관했다. 이제 그는 역사라는 심판대에 서게 됐다.

말년에 보였던 비루한 모습까지 더해지면 그 심판은 더 냉엄할 듯하다.

사망 직후 그의 측근은 기자들과 만나 “33년 전 백담사 갈 때와 청문회 증언 때 사과를 했다.

그 이상 어떻게 하느냐”고 반문했다. 그 이상으로 참회해야 할 이유는 넘치도록 많다.

전두환 정권은 무력을 앞세워 국민을 학살하며 등장했다. 민주화의 고통스러운 터널을 연장해 한국 사회 발전을 가로막았다.

 

정의사회 구현 등 번지르르한 구호를 내세웠지만 실상은 정치 활동에 대한 탄압이었고, 기업인을 겁박해 ‘통치자금’을 뜯어내는 것이었다.

언론을 통폐합하고, 학원을 사찰하고, 감시와 고문을 자행하면서 국민의 자유를 억눌렀다.

 

그에게 사형을 선고했던 판결문에는 “국민에게 막강한 권력 앞에선 순응할 수밖에 없다는 무력감과 좌절감을 갖게 했다”고 적시돼 있다.

 

그 좌절감에서 벗어나기 위해 한국인은 너무나 큰 비용을 치러야 했다. 인권을 유린당하고 생명을 잃어가면서 저항과 항쟁의 지난한 과정을 겪게 만든 책임으로부터 그는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한국 현대사를 굴곡지게 했던 전두환과 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이 한 달 사이에 나란히 세상을 떠났다. 그들과 맞섰던 김영삼 김대중 전 대통령도 이미 고인이 됐다.

군사정권이나 3김 시대 같은 용어는 이제 역사책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어휘로 남겨졌다.

 

고통스러웠던 한 시대가 마침내 저물었지만, 그 시대가 주는 교훈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

민주주의를 지키고 자유와 인권을 누리는 것은 당연하게 주어지는 혜택이 아니었다.

사회에 균열이 생기고 틈이 보이면 언제든 침탈될 수 있음을 그 시절의 역사가 말해준다.

힘겹고 불행한 과정이 다시는 되풀이되지 않도록 늘 돌아보는 지혜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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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 12월 2일 전두환 전 대통령이 서울 연희동 자택 앞에서 검찰의 소환 요구를

거부하는 ‘골목 성명’을 발표하는 모습. 국민일보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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