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미가 담긴 말
한시 속에는 어떤 단어 안에 사전에 나오는 의미 외에 다른 뜻이 담긴 말들이 많다.
하나의 단어가 특별한 의미를 담고 반복적으로 노래되다 보니 새로운 뜻을 갖게 된 것이다.
이런 새로운 의미를 정운의(情韻義)라고 한다.
정운의를 잘 알아두면 시를 감상하는데 아주 편리하다.
또 이를 통해 옛 선인들이 자신들의 생각을 사물을 통해 어떻게 담아내고 있는지도 살펴 볼 수 있다.
조선시대 홍랑이란 기생이 함경도에 벼슬 살러 온 최경창(崔慶昌)이란 시인을 사랑했다.
임기가 끝나 최경창이 서울로 돌아가게 되었다. 홍랑은 최경창에게 시조를 한 수 지어주며 이별하였다.
멧버들 가려 꺾어 보내노라 님의 손대
주무시는 창 밖에 심어 두고 보소서
밤비에 새잎이 나거든 날인가도 여기소서
버들가지를 하나 꺾어서 떠나가는 님께 드립니다.
서울로 가시면 창가에다 이 버들가지를 심어 주십시오.
밤비를 맞아 버들가지에 새잎이 돋아나면 그게 바로 저라고 생각해 주십시오.
홍랑은 이런 마음을 담아 위 시조를 써서 사랑하는 임에게 드렸다. 간절한 마음이 새록새록 느껴지는
아름다운 작품이다.
옛날에는 친구나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질 때 이별의 정표로 버들가지를 꺾어
주는 풍습이 있었다.
왜 그랬을까? 버들가지는 꺾은 가지를 땅에 심어도 다시 뿌리를 내리는
특이한 성질을 지닌 나무이다. 다시 말해 버드나무는 꺾꽂이가 가능하다.
나뭇가지가 줄기를 떠나면 말라서 죽는다.
붙어있던 가지가 끊어진 것은 두 사람이 이별한 것과 같다.
그런데 끊어진 버들가지는 죽지 않고 다시 뿌리를 내려 새 잎을 돋운다.
헤어졌지만 그것으로 끝나지 않고 다시 새로운 만남으로 이어진 셈이다.
헤어지는 친구에게 버들가지를 꺾어 준 것은 우리가 지금 비록 이렇게
헤어지지만 훗날 반드시 다시 만나자는 바램을 담은 것이다.
여기에는 또 다른 재미있는 생각이 담겨 있다. 버드나무는 한자로
‘류(柳)’자를 쓴다.
머물러 달라는 뜻을 지닌 머물 ‘류(留)’자와 발음이 같다.
그러니까 버들가지에는 가지 말고 있어달라는 만류의 뜻도 담기게 된다.
◀ 박유성1745~1805
이별하는 사람들 날마다 버들 꺾어
천 가지 다 꺾어도 가시는 님 못 잡았다.
어여쁜 아가씨들 눈물 때문일까
안개 물결 지는 해에 근심만 가득하다.
離人日日折楊柳 折盡千枝人莫留
紅袖翠娥多少淚 烟波落日古今愁
조선시대 임제(林悌)가 지은 〈대동강 노래(浿江曲)〉 가운데 한 수이다.
한자로 된 부분을 보면 1구의 끝에 버들 ‘류(柳)’자가 있고, 2구의 끝에 머물 ‘류(留’자가 있다.
여기서 버들가지를 준 것은 다시 만나자는 다짐 보다 가지 말라는 만류의 뜻이 더 많았던 것을 알 수 있다.
대동강은 평양을 감돌아 흐르는 강물이다.
옛날 조선시대에 평양의 기생은 노래 솜씨도 뛰어나고 아름답기로 유명했다.
풍류 있는 선비들은 평양에 놀러 가서 기생들과 흥겨운 술자리를 갖곤 했다.
헤어질 때가 되면 차마 그냥 헤어지지 못하고 다시 만날 다짐을 나누곤 했는데
, 그 정표로 준 것이 바로 이 버들가지였다.
날마다 대동강가에서는 사랑하는 사람들이 헤어진다.
헤어지는 사람마다 버들가지를 꺾어주며 가지 말라고 붙든다.
그래도 사랑하는 사람은 모두 다 떠나가 버렸다.
평양의 아가씨들은 매일 강변에 나와서, 돌아오지 않는 사람을 그리워하면서 한숨 쉬며 눈물을 흘린다.
강물 위에는 그녀들이 흘리는 눈물과 내쉬는 한숨 때문에 안개가 저렇게 자옥하다고 시인은 과장해서 말했다.
버드나무는 봄이 오는 소식을 제일 먼저 알려주는 나무다.
진달래나 개나리가 피기 전에 버들가지에는 벌써 파랗게 물이 오른다.
버드나무는 또 봄의 설레임을 나타내는 나무이기도 하다. 한시 속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나무가 바로 이 버드나무다.
버드나무는 봄날의 설레임과 사랑하는 사람과 다시 만날 희망을 나타내는 나무이다.
이런 뜻은 사전에는 나오지 않는다. 한시에 보면 가을 부채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왜 가을에 부채를 부칠까? 먼저 다음 한시를 한 수 읽어보자.
은등잔에 가을 빛은 그림 병풍에 차가운데
가벼운 비단 부채로 반딧불을 치는구나.
하늘 가 밤 빛은 물처럼 싸늘한데
견우와 직녀성을 앉아서 바라본다.
銀燭秋光冷畵屛 輕羅小扇撲流螢
天際夜色凉如水 坐看牽牛織女星
당나라 때 유명한 시인 두목(杜牧)의 〈가을 밤(秋夕)〉이란 작품이다. 가을밤은 춥다.
오싹한 찬 기운이 느껴진다.
가을밤에 어떤 여인이 혼자 앉아 견우 직녀성을 바라보고 있다.
밤은 벌써 깊었는데도 그녀는 그냥 앉아 있다. 잠이 오지 않는 모양이다.
그녀의 방안에는 은촉불과 그림 병풍이 있다. 손에는 가벼운 비단으로 만든 고급스런 부채를 쥐고 있다.
그녀의 신분이 꽤 높거나 생활이 부유한 것을 알겠다.
시속에는 차갑다(冷)와 싸늘하다(凉)는 표현이 두 번 나온다.
그런데도 그녀는 손에 부채를 쥐고 있다.
추운 가을밤에 왜 그녀는 손에 부채를 쥐고 있는 걸까?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녀는 부채로 방안으로 날아드는 반딧불이를 치고 있다.
열어둔 창문으로 반딧불이가 자꾸만 날아든다.
반딧불이는 원래 황량한 들판에서 날아 다닌다. 그런데 그녀의 방까지 날아 들어왔다.
그녀가 살고 있는 곳이 그만큼 황량해졌다는 뜻이다.
그녀는 그것을 인정하고 싶지가 않았다.
그래서 부채를 들어 반딧불이를 내쫓는다.
무더운 여름철에 부채는 없어서는 안될 소중한 물건이다.
가을 바람이 불어오면 사람들은 부채를 서랍 속에 던져 놓고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한 때는 없어서는 안될 물건이었는데 때가 지나고 나면 쳐다보지도 않는 것이 바로 가을 부채다.
그래서 한시 속에 나오는 ‘가을 부채’는 버림받은 여인을 상징하게 되었다.
내가 사랑하는 임은 나를 벌써 까맣게 잊어버린 것이다.
시 속에 나오는 여인은 사랑하는 사람에게 버림받은 여인이다.
그것을 어떻게 아는가?
그녀가 손에 가을 부채를 쥐고 있기 때문이다.
이 시는 임금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잊혀진 궁녀의 신세를 노래한 것이다.
끝에서 그녀가 우두커니 앉아서 견우와 직녀성을 바라보고 있다고 했다.
견우와 직녀는 은하수를 사이에 두고 일년 내내 떨어져 있다가 칠월 칠석 날 단 하루만 만난다.
이 날에는 은하수 위로 때까치들이 날아와 오작교(烏鵲橋)를 만든다.
견우와 직녀는 이 다리를 건너서 반갑게 만난다.
두 사람은 만남이 반갑고 또 헤어질 것이 슬퍼서 눈물을 흘린다.
그래서 칠월 칠석날에는 늘 비가 온다는 전설이 있다.
그녀는 왜 하필 많고 많은 별 중에서 견우성과 직녀성을 바라보고 있었을까?
이것은 두 가지 풀이가 가능하다.
하나는 우리도 견우와 직녀처럼 헤어져서 만나지 못하니 너무 슬프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견우와 직녀는 그래도 일년에 한번씩은 만날 수 있는데, 나는 영영 사랑하는 님과 다시는
만날 수가 없어 슬프다는 것이다.
아마 나중의 풀이가 더 맞을 것 같다.
시인은 그녀가 임금에게 버림받은 궁녀라는 것을 단지 그녀의 손에 부채를 쥐어줌으로써
독자들이 눈치 챌 수 있도록 했다.
그것이 가능했던 것은 이전부터 많은 시인들이 가을 부채를 버림받은 여인을 나타내는 표현으로 사용해왔기 때문이다.
버들가지를 꺾어서 다시 만나기를 바라는 마음을 표현한다.
가을 부채가 버림받은 여인의 의미를 나타낸다. 이렇게 된 것은 그 물건이 지닌 성질 때문이다.
처음에 어떤 시인이 이것을 시로 쓰자, 그 비유가 너무나 알맞았기 때문에 그 뒤로 많은 시인들이
뒤따라 이 표현을 사용하였다.
마침내 이 비유는 특별한 의미를 지니는 표현으로 굳어지게 된 것이다.
처음 가을 부채로 버림받은 여인을 비유했을 때는 매우 낯설어서 새로운 느낌을 주었다.
그것이 자주 쓰여서 상징이 되면, 일반적인 부채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의미, 즉 정운의를 간직하게 된다.
겉으로 보아서는 별 상관이 없어 보이는 사물들이 생각의 단계를 거쳐 전혀 다른 의미와 연결된다.
한시 속에는 이런 말들이 많다.
이런 말이 지닌 의미를 잘 알지 못하면 그 시를 깊이 이해할 수가 없다.
-정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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