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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 의 이야기

김재진의『얼마를 더 가야 그리움이 보일까』를 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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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에의 권유, 혹은 내 마음과 몸의 노래

ㅡ김재진의『얼마를 더 가야 그리움이 보일까』를 읽고

 

 

 

  1.시인은 왜 여행을 떠났던 것일까

  역마살이 끼어 있든 그렇지 않든, 사람은 여행을 통해 성장하게 마련이다. 

자신의 정체성 확인도 여행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 다반사이다.

 

 문학인의 독서와 저술은 결국 골방에서 이루어지는 것이지만 골방에 있는 한 그는 우물 안 개구리일 수밖에 없다. 

우물을 벗어났을 때, 비로소 하늘이 동그랗지 않고 끝간 데 없이 펼쳐져 있음을 알게 된다.

 더구나 숲을 거닐어본 시인이라면 사막의 바람을 맞아보아야 한다. 산을 넘어본 시인이라면 바다를 건너보아야 한다. 

 

비를 맞아본 시인이라면 눈을 만져보아야 한다.

 상상과 체험의 정교한 교직이 시라고 할 때, 상상력을 더욱 풍성하게 키워주는 일이 바로 체험일 것이다.

 의도적인 체험으로 여행 이상 가는 것은 없다.

 

 여행을 해본 적 없는 칸트의 철학에는 향기가 없지만 이탈리아 여행을 한 뒤의 괴테 작품이 이전 작품에 비해

 얼마나 사상적 품격과 시적 향취를 갖추게 되었는지를 생각해 보라.

 여행은 그런 것이다. 

세상을 달리 보게 하고 나 자신을 달리 생각하게 한다. 

 

다른 세계에서 다르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내가 살아온 데와 완전히 다른 풍광이 펜을 쥔 시인의 손에 힘을

 불어넣어 줄 것이다. 

『얼마를 더 가야 그리움이 보일까』의 시는 약 반수가 해외 여행의 산물이며 국내 사찰과 산에 갔다와서 

쓴 시도 여러 편 포함되어 있다. 

 

낯선 세계를 여행하는 동안 시심이 꿈틀거리지 않았다면 그를 어떻게 시인이라고 부를 수 있으랴. 
  여행은 언제 떠나는 게 좋을까.

 시간적 여유가 있을 때? 혹은 경제적 여유가 생겼을 때? 

아니면 같이 갈 사람이 나타났을 때?

 

 여행을 떠날 찬스는 그런 때가 아니라 바로 이런 때라고 시인은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독자에게 권유한다. 

“낯선 이들 속에 앉아 맛없는 음식을 먹거나/보내기 싫은 사람을 보내야 할 때”,

 “마음이 저절로 움직여/모르는 여인을 안고 싶을 때”, “한때는 내 눈이 진실이라 믿었던 것/초처럼 녹아내려

 지워질 때”(<여행은 때로>) 하는 것이라고 시인은 말한다. 

 

하지만 “여행은 때로 행복한 도망일 때” 있다는 것이야말로 적절하고도 절묘한 표현이다. 

몸 고달파지고 마음 외로워지는 것이 여행이지만 일상의 온갖 사슬을 끊어버릴 수 있기에 행복한 도망인 것이다. 

  그런 것이다 여행은 
  천년 전 내 전생이 살아 있던 곳

  복잡한 바자르와 골목길 지나
  하늘은 강을 끌어당겨 장작 위에 눕히는데
  떠내려가는 저 촛불은
  언젠가 내가 흘린 눈물인 건 아닐까.
  …(중략)…

  (…) 여행은
  원색의 사리 걸친 오랜 생애가 먼지 속에 육탈되듯
  나마스떼, 나마스떼, 두 손 모아 합장하며
  양은그릇처럼 덜그럭덜그럭 흔들리거나
  벗어나는 것이다.
                          ―<여행> 부분

  시인 자신이 붙인 각주에 나와 있는데, ‘바자르’는 시장이며 ‘나마스떼’는 인도식 인사말이다.

 인도에 가 시장과 주택가 골목, 갠지스 강가를 돌아다니면서 시인은 여행의 의미를 생각해본 모양이다.

 

 시인에게 여행은 미지의 세계를 찾아가는 공간상의 여행이면서 동시에 전생의 내가 살았던 곳을 탐방하는 시간상의

 여행이기도 하다. 

 

그 세계에서는 “똑딱거리던 시간이 발을 멈추어” 선다.

 시공을 초월하여 미지와의 조우를 이룩한 시인에게 여행의 의미는 “양은그릇처럼 덜그럭덜그럭 흔들리거나

/벗어나는 것”으로 와 닿는다.

 

 즉, 덜그럭덜그럭 흔들리는 것은 미지의 세계에 동화됨을, 벗어난다는 것은 현실로부터 일탈함을 뜻하는 것이리라. 

그렇다면 시인은 내가 몸담고 사는 현실세계에서 벗어나 다른 세계(혹은 시간대)로 가서 거기에 몰입해보고자 

먼 이국으로의 여행길에 나선 것이 아닐까. 

 

윤회 전생(轉生)을 설하는 불가의 가르침을 믿는 시인은 “나는 또 무엇이 환생한 결과인가”(<세라 사원>) 하고 

중얼거리면서 발걸음을 재촉한다. 
 
  둥근 지구나 둥근 양파,
  휘어버린 지평선 끝쯤에서 떠오르는
  세상의 아침은 다 불운하기에 신선하다.


  금속의 양광이 길 위로 꽂히고 
  남루한 날짜 위를 걸으며 누가 여행을 
  일탈이라 부르는가. 

                          ―<행복한 여행> 부분

 

 

 

 


  여행은 단순한 현실 일탈이 아니다. 고생을 사서 하는 것이며, 때로는 고생을 넘어 고행이다. 음식도 언어도 숙소도 낯설기 때문이다. 

 

따뜻한 내 집 안방에서 맞이하는 아침이 아니라 불편하기 짝이 없는 여행지에서의 아침인데 시인은 역설적으로

 그런 아침이 “다 불운하기에 신선하다”고 한다.

 

 또한 “불운을 이유로 행복하다”고 한다.

 보들레르가 <여행에의 초대>에서 거기 미지의 세계에는 모든 것이 질서요 아름다움이요, 화사함과 고요와 쾌락이

 있다고 노래했던 것처럼 김재진은 여행을 힘주어 예찬한다. 

  세상이 내다버린 생의 이력들이 
  끓어오르며 파랗게 청산가리 같은 날


  낡은 악기에 기대어 노래하며 나는
  가야 할 길이 있어 행복하다.


                          ―<행복한 여행> 부분
  
  시 <행복한 여행>의 마지막 4행이다. 

내 생의 이력은 청산가리 먹고 죽어버리고 싶은 나날의 연속이었지만 “가야 할 길”이 있으므로 나는 얼마든지 

행복해질 수 있다.

 

 그러므로 지금 곧 떠나야 한다. 

돈을 세고 명예와 권력을 꿈꾸는 동안 나의 목숨은 소진될 것이다. 

더 늦기 전에 일단 떠나고 보는 것이다. 

 

그런 뜻에서 <구두에게 물어보네>의 몇 행은 의미심장하다. 

  시간은 가고, 세월도 갈 거야.
  우리가 걸을 수 있는 날들이 얼마나 남았는지 나도 몰라.
  사실은 아무 것도 알 수 있는 것이 없어.
  눈물인지 기쁨인지, 아니면 그 모든 것 다인지.


  알고 있는 사람은 없어.
  또 알면 뭐해. 그냥 그렇게 떠다니면 좋은 걸 뭐.


                          ―<구두에게 물어보네> 부분

  여행의 이유는 여기에도 밝혀져 있다.

 뚜렷한 목적 없이, 그냥 그렇게 떠다니면 좋은 것이 여행이다. 

구두 가는 대로 가면 된다는 여행, 아아 얼마나 부러운 여행의 이유인가.

 

 KBS와 불교방송국 PD로 다년간 일하다 자발적 실업자가 된 이후 시인은 중국과 티베트 및 인도 여행을 

다녀왔다고 한다. 이 또한 부러운 일이다.

 현실의 온갖 구속을 훌훌 떨쳐버리고 여행길에 나설 수 있었던 그의 용기가.

 


  2.중국과 티베트 여행지에서 

  시인은 해외 여행을 해보지 않은 독자를 위해 가이드의 설명을 들으며 여행하고 있다는 느낌을 줄 정도로

 아주 친절하게 각주를 달아 길 안내를 하고 있다.

 

 이 시집에서 중국 여행의 수확물임이 확실한 것은 <고창고성> <얼마를 더 가야 그리움이 보일까 (2)> 

<오랑캐의 가을> <천산> <명사산> <비 맞는 시안> <돈황 가는 길> 등이다. 

 

그리고 히말라야와 카트만두 등 티베트 일대 여행의 수확물도 10여 편에 이른다. 
  한창 더운 7월 하순, 실크로드를 따라 여행해보았던 날들이 기억의 회로에서 새롭게 떠오른다.

 

 실크로드는 이름 그대로 무역로 내지 대상로(隊商路)였다. 

한의 무제가 중국 변방을 위협하는 흉노를 정벌하려고 장건을 중앙아시아로 파견한 것이 실크로드 개척의 시발점으로,

 한나라는 장건 이후 ‘서역’이라고 칭해지던 중앙아시아 및 서방 여러 나라와 사절을 교환하게 되고, 뒤이어 동서양의

 상인이 왕래하게 된다. 

 

당나라 태종이 안서도호부와 북정도호부를 설치하여 천산남로와 천산북로를 관장하게 되면서 비단을 중심으로 한 

동서무역이 활발히 전개되고, ‘실크로드’라는 이름도 당나라 때 얻게 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이 여행자에게 크게 중요한 것은 아니리라. 

가서 무엇을 보고 무엇을 들었는가, 그 무엇이 내 마음을 움직였는가를 떠올리며 시를 쓰면 되는 것이다. 

  한 시절의 영화(榮華)래야 바퀴 자국으로 구를 뿐
  사나운 당나귀 울음소리 노을처럼 밟히고 
  몇 위엔의 지전(紙錢) 따라 채찍을 드는
  고창은 이제
  비루한 마부들의 눈길에나 남아 있다.


                          ―<고창고성> 부분

  느지막히 시작되는 위구르의 아침은 
  뒤꼭지에 얹혀 있는 회교식 모자 속에 숨어 있고
  청진사 들러 향비 묘 가는 길
  흑백영화같이 아스라한 마차 길 밟아보면
  점자를 읽어내듯 더듬거리던 추억이 
  초라한 풍경 되어 눈시울에 맺힌다. 


                          ―<오랑캐의 가을> 부분

  무릎 꺾어 나를 태우는 낙타는
  어느 날 내가 배운 치욕이다.


  잠시 누군가 깃들이다 간
  인간의 몸을 하고 있는 육체
  회오리 불어 모래 날리면
  이쪽에서 저쪽으로 옮겨가는 산처럼

  너에게 깃들이다 내게로 옮겨 온
  치욕의 이 단백질
                          ―<명사산> 부분

  어느새 체온 빼앗긴 여수(旅愁)가 
  푸르르, 진저리치다 가라앉는
  3천년 전의 옛 도시
  시안빈관 건너 당락궁에 앉아
  파안대소하며 바라보는 
  가무와 음주의 아, 옛 날이여……


                          ―<비 맞는 시안> 부분
  
  실크로드 여행의 결과 얻게 된 시들은 이처럼 음습하고 우울하다. 

이미 옛 영화가 모두 사라져버린 고도(古都)를 보고서 쓴 시들이기 때문일 것이다. 

 

중국 서북쪽은 오랫동안 변방 내지는 오지였다.

 신강위구르 자치구의 어느 도시도 우리나라 경주처럼 고대 유적이 잘 정비되어 있지 않다. 

개발이 덜 되어 좋은 점도 있지만 교통도 기후도 음식도 불편할 여행이었을 테니 시인의 불편한 심사가 

시를 이렇게 어둡게 한 것이리라. 

 

그러고 보니 내 기억 속 중국 서북부 일대는 자연마저도 황량하기 이를 데 없는 곳이었다. 

‘꺼비 탄’(갈벽)이라고 하는 돌밭이 끝없이 이어지기도 했고 옥수수 밭이나 해바라기 밭이 몇 시간씩 이어지기도 했다.

 

 아마도 시인은 역사 유적지의 쇠락한 모습과 황량한 주변 풍경에서 받은 인상을 그대로 지닌 채 시를 써 분위기가 

그만 어두워지고 만 것이리라. 

 

사실 실크로드라는 지명의 인상과는 달리 지난날의 흥성함이 남아 있는 곳이 거기에는 거의 없다. 

중국 당국이 서북지역 개발을 외치고 있는 이유는 그만큼 미개지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시인은 돈황 막고굴을 보고서도 “모래바람 거센 롭 사막과 타클라마칸 사막을 헤치며 나는 무엇을 찾고 

싶었던가요. 

몇 날 며칠 모래비만 퍼붓다 매몰되고 만 누란쯤 가면 찾아볼 수 있을지.

 

 막고굴에 앉아 있던 그 많은 불상들이 한낱 돌덩이로만 보이던 날, 돈황은 영하 12도였습니다”(<돈황 가는 길>)라고

 쓰고 있다. 

 

1974년에 발견된 진시황제 능묘의 병마용갱(兵馬俑坑)을 소재로 해서 시를 썼더라면 좀 다른 이미지의 시를

 보여줄 수 있었을까. 


  하지만 세계의 지붕 티베트 일대를 돌아보며 쓴 시들에는 회한만 깃들어 있지 않다. 

광대한 자연 앞에서 자신의 초라한 모습을 자각하고 비탄에 잠기기도 하지만 자아를 성찰하고 명상에 잠기며, 

종교적 깨달음도 얻는 등 정신적 고양 상태를 경험하기도 한다. 

여행을 통해 무엇을 구하고 무엇을 얻었는지는 아무래도 티베트를 배경으로 한 시편에서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집요한 욕망이 마침내 놓치고 만 끈질긴 내 자아의 유체이탈
  아무 것도 사실은 
  사라지는 것은 없다. 

 

아무 것도 존재한 것이 없었던 만큼.
  찢어질 듯 새파란 저 물빛 또한 빛이 만들어낸 착각일 뿐
  파란 것이 아닐지 모른다.
  모든 게 허구일지 모른다.


                          ―<얌드록초> 부분

  좌탈입망한 채 석양에 다비되는 저
  산들의 연화장 세계
  지금까지 나는 내가 살아 있다고 생각했다.


  미소를 짓거나 눈물을 흘릴 때 
  그 미소 속에 또는 흐르는 눈물 속에 내가
  살아 있는 것이 틀림없다고 믿었다.

  그러나 지금
  개금 벗겨져 맨몸 드러나는 저 순백의 연꽃 앞에 나는
  살아 있었던 게 아니라 단지 생존하며
  아무 것도 모르면서 그저
  연명하고 있었던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히말라야> 부분

  티베트에 있는 빙하호 얌드록초를 보고 쓴 앞의 시에는 내 존재의 허구성에 대한 진지한 사색이 담겨 있다.

 신비로운 풍경이 산다는 것은 무엇이며 죽는다는 것은 또 무엇인가라는 철학적 질문을 유도한 것일까.

 

 태어나는 것이야 타인의 의지가 개입된 일이지만 누구나 내 의지로 살다가 불가항력적인 운명의 힘에 지펴 죽음을

 맞이한다. 그 모든 생의 여정은 일회적이다. 

 

게다가 지상의 모든 숨탄것들은 누군가가 죽은 덕분에 살아갈 수 있지 않은가.

 나 김재진은 어느 해에 태어났으니 어느 해에 죽게 될 터인데, 이 일회적인 삶의 기간은 우주적 시간에 비추어본다면

 ‘눈 깜박할 새’이다. 

 

그래서 시인은 해발 4,500미터나 되는 높은 곳에서, 즉 공기가 희박한 얌드록초 앞에서 몽롱한 상태로 생사의 경계를

 넘나드는 신비체험을 해본 것이리라. 

  뒤의 것은 히말라야 산맥을 노래한 시가 아니다.

 만년설에 뒤덮인 히말라야를 본 내 마음을 그리고 있다.

 저 높고 깊은 산, 변화무쌍한 산, 태곳적부터의 산 앞에서 나를 생각하니 나는 살아 있었던 게 아니라 

단지 생존해 있었던 것이다. 아무 것도 모른 채 그저 연명만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랬으리라. 

 

무한 앞에서 유한을 깨달았으리라.

 거대한 산 앞에서 왜소한 자신을 자각했으리라. 

히말라야가 침묵으로 가르친 것을 시인이 온몸으로 받아들였음을 나는 알 수 있다. 

 

석양빛을 받은 히말라야의 고봉들을 “좌탈입망한 채 석양에 다비되는/산들의 연화장 세계”로 묘사했듯이 시들이 

상당수 불교적 상상력에 입각해 있지만 심각하거나 심오하지만은 않다. 

 

꽤나 어려운 철학적 사색의 결과물을 쉽게 풀어 써 이해에 큰 어려움이 없는 것이 김재진 시의 특징이 아닐까 한다. 

아무튼 설산 히말라야 앞에서 시인은 아예 말문을 잃기도 하고(<고독한 방랑자>), 잠을 못 이루기도 한다

(<고레파니>). 

한편 히말라야는 시인을 그리움으로 다시 태어나게 한다. 

 

 



  우비를 꺼내 입으며 함께
  그리움도 꺼내 입는다.


  아, 다시 살면 나는
  그리움 하나로 서 있으리라. 
  그리움, 그 갈매빛 갈고리를 네게 걸어
  눈부신 정상을 오르리라. 


                          ―<안나푸르나> 부분

  ‘그리움’은 추상명사이며 대상이 있어야 성립할 수 있다.

 김재진의 시에서 그리움은 실체가 없다.

 누가, 무엇을, 왜 그리워하는지 막연하기만 하다. 

 

그러나 시인은 바로 이것을 노린 것이 아닐까.

 사랑과 그리움이 난무하는 이 세상에서 시인은 스스로 그리움 하나로 서 있고 싶어한다. 

저 안나푸르나처럼. 

설산 없는 곳에서 설산을 그리워하다 정작 설산 앞에 와서는 그리움이 되어 서겠다고 한다.

 

 화두 같기도 하고 역설 같기도 하다. 

강원도 노추산을 노래한 시에서 이 점은 보다 구체적으로 설명된다. 

왜 산을 오르느냐는 질문을 받고 에베레스트산 최초의 정복자 힐러리 경은 “산이 거기 있으니까”라고 대답했다지만

 시인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산다는 것은 문득
  산을 지고 있는 것과 같다.
  등짐 가득 산을 지고 또 다른 산을 향해
  올라가는 것과 같다. 


                          ―<노추산> 부분

  어제 올랐던 산을 다시 오르는 건
  산이 인간을 비워내기 때문인데
  비울 수 없는 나는 자꾸
  눈앞에 서 있는 신화를 확인하려 애쓴다.


                          ―<건포체> 부분

  등짐을 가득 지고 또 다른 산을 향해 올라가 본들 그리움이 보이지는 않을 것이다. 

시집의 제목에는 그렇기 때문에 어디론가 떠날 수밖에 없었던 자신의 영적 갈망이 담겨 있다. 

그 옛날 대상(隊商)이 미지의 세계를 향해 낙타를 몰고 갔듯이 그리움이란 신기루를 찾아 시인은 떠나야 했던 것이다.

 

 산이 인간을 거듭 비워내는데, 어제 올랐던 산이라고 하여 다시 오르지 말라는 법은 없다. 

보고 돌아서면 곧바로 다시 보고 싶은 것, 그 그리움의 실체가 무엇인지 알아보고자 떠난 순례자가 시인 김재진이 아닌가. 

  투르판, 선선, 미아, 돈황,
  얼마나 더 가야 그리움이 보일까.
  천산산맥 끝나는 하미 지나면
  꾸지람 듣듯 가만가만 물러가는 어둠
  얼마나 더 가야 산 아래 닿을 수가 있을까. 

                          ―<얼마나 더 가야 그리움이 보일까 (2)> 부분

  3.몸과 마음을 갈고 다듬기 위하여

  이번 시집에서 가장 많이 만나게 되는 시어는 특정 지명이 아니라 ‘몸’과 ‘마음’일 것이다. 

이 둘 사이의 관계 탐색이 이번 시집의 또 하나의 핵심이 아닐까 한다. 

마음과 몸의 관계를 그린 다음과 같은 시에서 별달리 어려운 어휘나 표현은 발견할 수 없지만 그 의미의 깊이는 결코 만만치 않다. 


  마음이 마음을 만져 웃음 짓게 하는 
  눈길이 눈길을 만져 화사하게 하는
  얼마나 더 가야 그런 세상
  만날 수가 있을까.


                          ―<얼마나 더 가야 그리움이 보일까 (1)> 부분

  이쪽과 저쪽에서 잡아당기듯
  팽팽하게 긴장되어 있던 마음이
  화르르 떨리며 소리를 낸다.

  딸랑거려라 내 마음,
  날마다 잡고 있는데도
  마음을 잡는다는 것은 문득
  허공을 보는 것과 같다. 


  물위에 글 새기듯 돌멩이 하나
  허공에 던지는 것과 같다. 

                          ―<노추산> 부분

 

 

 

 

 

 



  시인은 혹여 자신의 마음을 다잡기 위한 구도 행각으로 여행을 택했던 것이 아니었을까. 

김재진 시인이 꿈꾸는 이상세계는 마음이 마음을 만져 웃음 짓게 하는 연화국(蓮花國)일 것이다. 

자비로운 세상은 그저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몸과 마음을 일치시키려는 끈질긴 노력 끝에 이루어질 수 있다. 

 

암이나 에이즈 등 죽음에 이르는 병은 따지고 보면 마음과 몸이 따로 놀기 때문일 것이다. 

시인이 불교적 세계관을 갖고 있음을 알게 하는 시편에는 종종 ‘마음’이 등장한다. 

  마음이 더 무거워 넘지 못하는
  절은 세간에 있답니다.
  출세간의 편액
  부도 사이로 감추고
  편편히 누옥으로 남아 있답니다.

                          ―<누옥> 부분

  몸 적응하도록 기다리지 못한 내 마음
  저 혼자 구경 가고 없다.
  여기까지 뭐 하러 왔나.
  허락도 없이 놀러나간 내 마음, 여기까지 왜 왔나.
  세월도 불성도 몸 끝나면 없는 것
  놀러나간 마음을 몸이 누워 원망한다.


                          ―<라싸> 부분

  아무도 미워하지 않고 아무도 원망하지 않는
  잔잔하고 따뜻하며 비어 있는 그 마음이
  앉거나 걷거나 서 있을 때도 
  미소처럼 온몸에 퍼질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사랑의 기도> 부분

  몸은 지상에 잠시 머무는 것, 곧 시간에 의해 속박되는 것이다. 

한편 ‘심안’ 혹은 ‘지혜의 눈’(<카트만두>)까지를 

포함한 마음은 나를 자유롭게 하여 놀고 싶을 때 놀러나갈 수 있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할 수도 있다. 그렇다고 하여 몸이 마음을, 마음이 몸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마음이 미소처럼 온몸에 퍼지기를 희구하는 것으로 보아 시인에게는 몸도 마음도 다 중요한 것이다.

 마음과 몸의 이분법적 구분에서 벗어나 둘의 일치 내지는 조화를 위해 그는 여행을 떠난 것이며 시를 쓴 것이리라. 

 

몸과 마음의 조화가 사람을 가장 사람답게 한다는 시인의 철학은 충분히 설득력을 갖는데, 하지만 그 일은 결코

 쉽지 않다. <면벽 9년> 같은 시를 보면 몸에 집착하는 나를 경계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가가 잘 설명되어 있다.

 

 세속 도시에서 번잡한 일에 둘러싸여 사는 우리들은 사실 그렇지 않은가. 몸이 마음을 따라가지 못하고, 

마음이 또한 몸을 제압하지 못한다. 

그래서 인간은 자책하고 자학하고, 때로는 자살도 하는 동물이리라.

  몸이 없으면 나는 
  어디에 가 있을까.


  끈질기게 살아나 꿈틀거리는 
  욕망은 몸에서 나오는 것일까 아니면
  몸을 숙주로 하는 정신, 또는 영혼
  하여간 그렇게 이름 붙은 몸 밖, 아니면 몸 안의
  어떤 것들에서 나오는 것일까.

  몸에 세 들어 살며 나는
  몸이 나인 줄 착각하며 저지르며
  저 온갖 
  삼라만상 받들어 면벽한다. 


                          ―<면벽 9년> 부분

  이제 분명히 알겠다. 시인이 왜 여행길에 나섰던가를. 

먹고사는 문제로 부대끼다가 시인은 마침내 마음과 몸을 일치시키기로 했다. 

몸을 움직여 산을 넘고 강을 건너 전국의 여러 산과 사찰을 순례하였고, 산맥을 넘고 사막을 건너 먼 이역에 가서

 새로운 세계를 본 뒤 마음을 다스렸다.

 

 자연의 품에 안겨보지 않고서 어찌 다음과 같은 시를 탄생시킬 수 있으랴. 지고지순한 마음은 곧 불성이요,

 불성은 우주 만물 속에서 만행하고 있다. 날아가는 홀씨가 별빛임을 모르는 것은 현대인의 비극이다. 

  날아가는 홀씨는
  민들레의 우주다.
  꽃 속을 들여다보면 그 속에 별이 있다.


  꽃은 다 우주다.
  걸릴 데 없이 만행하는
  꽃씨는 불성이다.

  천지간에 만개해 있는 식물의 불성
  꽃이 피어도 사람들은 꽃 핀 줄을 모른다
  날아가는 꽃을 봐도
  별빛인 줄 모른다.

                          ―<민들레> 전문

  마음이 현실에 집착하면 몸이 아파온다.

 몸이 현실에 집착하면 마음이 불편해진다. 

나도 『얼마나 더 가야 그리움이 보일까』 한 권 지니고서 몸 피곤하고 마음 외로운 여행길로 어서 나서고 싶다.

 

 일상적 삶에서는 몸과 마음이 따로 놀지만 여행지에서는 그럴 수 없다. 

곧바로 병이 나기 때문에. 자연의 품에 안겨 내 내면의 목소리를 들어보면 나 참 어리석게 살아왔다고 거듭 외치고

 있으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