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isoner Of Your Love
My heart fell into the palm of your hand
내 마음은 당신의 손바닥으로 곱게 스며들고
This love made me understand
이런 사랑으로 난 이해할 수 있게 되었지요
I've waited all my life for you
내 일생 내내 당신을 기다려왔어요
Thought I'd live and die alone
그러면서 생각했어요, 난 이렇게 기다리며
살다가 결국은 혼자 죽게 될거라고
Encaptured by the beauty, I'm a prisoner of your love
당신의 그 아름다움에 반해 당신의 포로가 되어 버렸죠
Enslaved by the passion, I'm a prisoner of your love
당신을 향한 열정의 노예가되어버리고선
당신의 사랑의 포로가 되어 버렸어요
I'm wrappped around your finger like the ring on your hand
당신 손가락에 끼워져있는 반지처럼 나 역시 그렇게
당신 손가락을 감싸고선 그렇게 당신의 사랑에 묶여있지요
I'm trapped by your love, I'm yours, please understand
당신 사랑에 갇혀 꼼짝 못하고 있어요. 난 당신의 것, 제발 날 이해해줘요
I've waited all my life for you
내 일생 내내 당신을 기다려왔어요
Thought I'd live and die alone
그러면서 생각했어요, 난 이렇게 기다리며
살다가 결국은 혼자 죽게 될거라고
Encaptured by the beauty, I'm a prisoner of your love
당신의 그 아름다움에 반해 당신의 포로가 되어 버렸죠
Enslaved by the passion, I'm a prisoner of your love
당신을 향한 열정의 노예가 되어버리고선
당신의 사랑의 포로가 되어 버렸어요
Save Our Love
Once we were one
Now we’re worlds apart
Deep inside you know you are my other heart
My memories seem like yesterday
Can’t believe it’s all so far away
All these years
All our tears
Still we sing the same old song
Let’s make right all that went wrong
There’s no beginning there’s no end
There is no reason to pretend
Crying for help from above
We’ve got to save our love
You said to me
That we hold the key
Eternal love we give and take
It was meant to be
My love for you
Was always true
Still we sing the same old song
Let’s make right all that went wrong
There’s no beginning there’s no end
There is no reason to pretend
Crying for help from above
We’ve got to save our love
All these years
All our tears
Still we sing the same old song
Let’s make right all that went wrong
There’s no beginning there’s no end
There is no reason to pretend
Crying for help from above
We’ve got to save our love
Far beyond the sun
Far beyond the sun
많은 영어 단어들 가운데 영혼이 통하는 사람이라는 뜻을 가진 <소울메이트(Soulmate)>라는 단어가 있다.
이를 우리말로 바꾸어 우아하고 제법 그럴싸하게 다듬어서 표현하자면 <영혼의 동반자> 쯤이 되는데 이 말을
우리는 죽고 못살 정도로 친한 친구나 연인 혹은 부부 사이를 가리킬 때 주로 사용하고 있다.
그런데 주지하듯이 죽고 못살 정도로 서로를 아끼고 사랑하며 찰떡 궁합을 자랑하던 연인과 부부 사이라고 할지라도
드물지 않게 어느 순간 부터 그 친밀도가 서서히 떨어지는 것을 우리는 직접 경험했거나 또는 간접 경험으로 알고 있다.
왜 그럴까? 단순하게 생각하자면 친구 사이의 우정에는 유효기간이 따로 없지만 연인과 부부 사이의 사랑에는 유효기간이 정해져 있기 때문에 그런게 아닐까? 물론 내 생각이 그렇게 연결된다고 해서 사랑과 우정이라는 감정을 신의 저울에 올려 놓고 저울질을 했을 때 우정 쪽으로 급격히 기운다는 의미는 결코 아니다.
연인과 부부 사이에는 뜨거운 사랑의 유효기간이 임박하거나 막 지나치려는 무렵에 우정과는 또 다른 개념의 <정>이 새록새록 생성되어 둘 사이를 끈끈하게 연결시켜 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우리는 가끔 <그 놈의 정 때문에...>라는 말을 주변에서 자주 듣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내게 있어서 혹은 다른 누군가에게 있어서 영혼의 동반자는 평생을 통털어 과연 몇명이나 생기게 될까? 우정을
논외로 놓고 살펴보면 한때 영혼의 동반자라고 스스로 인정했으면서도 만남과 헤어짐을 반복하는 연인들은 물론이고
결혼과 이혼을 반복하는 이들을 발견하는 것이 그리 어렵지 않은 요즘이기에 갑자기 드는 생각이다.
록 음악에 클래식의 요소를 가미시킨 엄청난 속주의 기타 주법으로 일대 혁명을 일으킨 스웨덴의 기타 영웅 <잉베이
맘스틴>에게도 영혼의 동반자라고 불렸거나 혹은 현재진행형으로 남아 있는 이들이 최소한 세명은 있다.
1982년의 어느날, 스웨덴의 스톡홀름에서 태어나고 성장한 열여덟살 소년의 <아메리칸 드림(American Dream)>을 담은 데모 테이프 하나가 바다를 건너 멀리 미국땅으로 향하고 있었다.
1970년에 스웨덴에서 방영되었던 <지미 헨드릭스(Jimi Hendrix)> 추모 특집 방송을 보고 기타에 관심을 갖게 된
그 소년은 바로 잉베이 맘스틴이었으며 그의 데모 테이프를 들고 자신의 고국인 미국으로 향했던 사람은 슈래프넬
음반사(Shrapnel Records) 소속의 음반 제작자인 <마이크 바니(Mike Varney)>였었다.
그리고 이듬해인 1983년에 스웨덴의 잉베이 맘스틴은 마이크 바니의 초청을 받고 마침내 아메리칸 드림의 실현을 위해 미국으로 향하게 된다.
그렇게 비행기에 오른 잉베이 맘스틴이 도착한 곳은 미국 문화의 중심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천사의 도시
로스앤젤레스였다.
낯선 이국땅에서 잉베이 맘스틴을 반겨준 것은 역시 음악이었으며 <스틸러(Steeler)>라는 이름의 헤비메탈 밴드가
그의 첫 번째 보금자리였다. 하지만 새로운 보금자리는 잉베이 맘스틴을 온전히 품어줄 수가 없었다.
결국 같은 해에 밴드를 탈퇴한 잉베이 맘스틴은 막 출범 준비를 하고 있던 <알카트라즈 (Alcatrazz)>로 옮겨가서
본격적인 밴드 활동을 시작하게 된다.
잘 알려진 것 처럼 <그레이엄 보넷(Graham Bonnet, 보컬)>이 이끌었던 알카트라즈에서의 활동을 통해서 큰 명성을
얻은 잉베이 맘스틴은 1984년에 자신의 밴드인 <라이징 포스(Rising Force)>를 결성하고 엄청난 속주로 거침없는
질주를 하기 시작했다.
록 기타리스트들의 과다 속주 경쟁을 불러 일으킨 잉위 맘스틴의 시대가 활짝 열린 것이다.
그리고 1980년대 말에 잉베이 맘스틴은 자신의 첫 번째 영혼의 동반자를 만나게 된다.
그녀는 바로 스웨덴의 팝 가수 <에리카 노버그(Erika Norberg)>였으며 잉베이 맘스틴은 1991년에 그녀와 결혼식을
올리기도 했었다.
하지만 두 사람의 관계는 1992년에 이혼으로 종지부를 찍게 된다.
묘하게도 사랑의 유효기간이 끝나자마자 두 사람의 결혼도 파경에 이르고 만 것이다.
그리고 잉베이 맘스틴에게 두 번째로 찾아온 사랑은 미국인이었다. 하지만 두 사람의 사랑 역시 결실을 맺기는 했지만 결과는 좋지 못했다.
1993년 당시 약혼 관계에 있었던 약혼녀의 어머니가 두 사람 사이를 갈라 놓기 위해서 허위로 폭행 신고를 하는 등의
우여곡절 끝에 결혼까지 이어지긴 했지만 결국 이혼으로 마무리되고 만 것이다.
하지만 두 번의 결혼과 두 번의 이혼 끝에 마침내 잉베이 맘스틴은 진정한 영혼의 동반자를 찾은 것으로 보인다.
그에게 찾아온 세 번째 사랑이자 영혼의 동반자는 바로 <에이프럴(April Malmsteen)>이었다.
두 번의 결별을 경험한 끝에 마침내 찾아온 행복한 결혼 생활은 잉베이 맘스틴에게 큰 위안이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기에 아내에게 바치는 노래인 <Like an Angel>을 만들게 되었을 것이며 이 곡은 1997년 2월 23일에 발표된
열 번째 음반 <Facing the Animal>에 수록되어 많은 사랑을 받았었다.
그리고 2009년 3월 10일에는 아예 아내를 위한 음반 <Angels of Love>를 발표하여 아내인 에이프럴에 대한 지극한
사랑을 과시하기도 했었다.
잘 알려진 사실이지만 1987년 6월 22일에 잉베이 맘스틴은 자신이 몰고 가던 승용차로 가로수를 들이받는 대형 사고를 일으켜 8일간이나 의식불명 상태에 빠졌던 적이 있었다.
당시 사고의 후유증으로 오른손 기타리스트에게는 생명과도 같은 오른손이 마비되어 힘든 재활을 거치기도 했었다.
그 때문에 사고 이후로는 세밀함과 기교를 요구하는 기타 속주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이며 이런 이유로 최근의
잉베이 맘스틴은 기교 보다는 감성을 자극하는 기타 연주에 더욱 집중하는 것으로 보인다.
2009년에 발표된 음반 <Angels of Love>에서도 이런 점을 확인할 수 있다. 일렉트릭 기타를 앞세운 속주 보다는
어쿠스틱 기타를 중심으로 한 섬세한 감정 표현에 최선을 다하고 있기 때문이다.
미발표곡인 <Ocean Sonata>를 제외하고는 <Like an Angel>을 포함한 모든 곡이 이미 기존에 발표되었던
곡들이지만 새로운 편곡 과정을 통해서 전혀 새로운 얼굴로 등장한 수록 곡들이 그래서 더욱 섬세하게 여겨진다.
아울러 어쿠스틱 기타를 포함한 모든 악기를 잉베이 맘스틴 혼자서 연주한 음반의 수록 곡들은 기존의 곡들과는
또 다른 섬세함과 아름다움으로 가득하다.
아내에 대한 지극한 사랑이 음악적 감성을 자극하여 잉베이 맘스틴으로 하여금 한편의 아름다운 음반을 만들어내게
한 것이다. 참고로 음반의 표지에 등장하고 있는 여인이 바로 잉베이 맘스틴이 사랑하는 아내 에이프럴이다.
좋은만남 좋은음악에서
팝 음악을 지탱하는 두 가지 커다란 줄기인 뮤지션십(Musicianship, 음악적 숙련도와 완성도)과 애티튜드(Attitude,
음악을 하는 태도)는 항시 반목과 암묵적 화해를 거듭하며 대중 음악의 역사를 쌍끌이 해왔다.
핑크 플로이드(Pink Floyd)가 대변자였던 프로그레시브 록과 섹스 피스톨즈(Sex Pistols)로 대표되었던 펑크(Punk)
간의 대립이 절정에 이르렀던 1970년대만 생각해봐도 이는 명백하다.
이런 상황은 펑크가 지하 세계에서 숨죽이며 기회를 엿봤던 1980년대를 거쳐 얼터너티브라는 얼터 에고(alter-ego)로 재림(再臨)했던 1990년대에도 그대로 재현되었다.
그런지와 함께 주류 록 네트워크를 잠식한 다수의 모던 러버들은 테크닉 위주의 헤비 메탈에 맹공을 가하며 세력을
위축시켰던 것. 재빨리 시류를 탔던 메탈리카(Metallica) 정도만이 예외의 대상이었을 뿐이다.
하지만 속주 기타의 대명사 잉베이 맘스틴은 이런 위급한 사태 속에서도 느긋하기 그지없었다.
하기야 원체 자신감을 넘어 천상천하 유아독존 사상으로 똘똘 뭉친 그였으니,
눈 하나 깜짝할 리가 만무했다. 인터뷰에서도 탐구 정신이 실종된 당시 록 신을 비난하며 그의 외고집이 정도(正道)임을 수 차례 설파했다. 자신의 음악이 비주류 중의 비주류로 전락했고 오직 마니아들의 충성 속에 유지된다는 사실에도
불구, 꾸준히 닦아놓은 길의 항로를 바꾸려 하지 않으며 마이 웨이를 부르짖었다.
그것은 바로 클래식으로부터 차용해온 대위법과 하모닉 마이너 스케일을 중심으로 쉴새없이 쏟아내는 음표의 향연,
속주 기타 제왕으로서의 길이다.
From Guitar Kid to Guitar Zeus
잉베이 맘스틴은 1963년에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태어났다.오페라 명가 출신인 어머니의 우산 아래 3살부터 피아노를 수학했던 그는 7살 때, 지미 헨드릭스의 공연을 보고 크게
감명 받아 기타리스트를 인생의 방향 지표로 삼았다.
이후 10대 초반 시절에 3년 동안 하루 8시간씩이라는 고된 수행을 거치며 내공을 축적했고, 영향 받은 아티스트들인
지미 헨드릭스와 리치 블랙모어를 뛰어넘어 독자적인 스타일을 개발해냈다.
오페라 단원이었던 누나로부터 독보력과 스케일 이론을 사사 받아 이론과 실제를 겸비한 것도 이 즈음이었다.
이 기타 키드는 16살 때 밴드 라이징 포스(Rising Force)를 결성해 4트랙 짜리 데모 테이프를 완성, 이것을 슈라프넬의 대표이자 그 당시 많은 속주 기타리스트를 발굴했던 혜안(慧眼)의 소유자 마이크 바니에게 보냈다.
이를 듣고 단번에 반한 마이크 바니가 구애의 손길을 뻗친 것은 자연스런 수순이었다. 그는 당시 자신의 정기 기고매체였던 기타 플레이어(Guitar Player)지에 잉베이 맘스틴을 소개해주었다.
킬(Keel)의 보컬리스트였던 론 킬(Ron Keel)이 이끌었던 스틸러(Steeler)에 가입시켜준 것 역시 마이크 바니였다.
1983년 단 한 장의 앨범에 참여하고 스틸러를 떠난 잉베이 맘스틴은 그레이엄 보넷(Graham Bonnet)을 만나
알카트라즈(Alcatraz)에 새 보금자리를 틀었다.
1984년의 데뷔작
널리 알렸다.
그리고 1984년, 부활한 라이징 포스와 함께 처녀작
'Far beyond the sun', 'Black star', 'Evil eye', 'Icarus dream suite Op. 4'등, 전곡이 보석이었다.
잉베이 맘스틴은 이 시기에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명성을 쌓아나갔다.
1960년대의 지미 헨드릭스, 1970년대의 에디 밴 헤일런에 뒤를 잇는 기타사의 히어로로 그가 지목된 것도
이 때부터였다.
허나 1990년대에 접어들면서 헤비메탈 신 전체의 하락세와 함께 그의 음악도 구시대의 유물 취급을 받기 시작했고
수많은 애호가들이 그에게 비난의 화살을 날리기 시작했다.
'음악이 항상 똑같고 새로운 맛이 없다.', '왼손의 서커스에만 몰입하는 한심한 연주자'라는 등의 혹평이 잇달았다.
그러나 기타를 쳐본 사람이라면 느끼겠지만, 속주 기타는 왼손만으로 해결될 성질의 것이 아니다.
핑거링과 피킹이 합일(合一)되지 않고서는 제대로 구사할 수 없기에 그러하다.
주위의 입방아와는 무관하게 잉베이 맘스틴은 연달아 음반을 발매했지만 피드백 효과는 미미하기 그지없었다.
1990년의
이에해당된다.
베스트 콜렉션으로 구매 동기를 유발시킨
기타 인스트루멘탈 팬들의 환호성을 이끌어냈던 1994년의 수작
특히 후자는 그가 오랜 기간 갈망했던 소원을 성취했다는 점에서 더욱 의미가 깊은 본격적인 클래식과의 만남이었다.
2000년 들어 그는
다시 찾아올 예정에 있다.
마지막으로 잉베이 맘스틴의 음악 철학을 파악할 수 있는 뱀발 하나.
“테크닉에 미치는 것은 불필요하고 바보짓일 뿐이다. 내가 언제나 주장하고 싶은 바는 그루브감을 지닌 뮤지션이
되라는 것이다.”
배순탁 (greattak@izm.co.kr) / 오이뮤직
테크닉에 미치는 것은 바보짓이고 불필요하다. 내가 언제나 주장하고 싶은 것은 그루브(Groove)감을 지닌 연주인이
되라는 것이다.”
80년대 록계에 클래시컬 속주기타의 열풍을 몰고온 슈퍼 기타리스트 잉베이 맘스틴은 1963년 6월 30일
스웨덴의스톡홀름에서 태어났다.
수백 년이나 이어지고 있는 오페라 명가 출신 어머니의 영향으로 3살 때부터 피아노 레슨을 받은 잉베이가 기타를
잡기 시작한 것은 5살 때부터이다.
그러다가 7살 때인 70년 TV에서 방영된 지미 헨드릭스 추모특집을 보고 감동 받아 본격적으로 기타에 몰두하였다.
이때부터 잉베이의 실력은 크게 향상되어 먼저 시작한 형이 자신의 일렉트릭 기타를 잉베이에게 물려주고 자신은
드럼으로 포지션을 바꿀 정도였다.
그리고 형제는 Burn And Power 라는 그룹을 만들었다.
75년에 잉베이는 마침내 펜더 스트라토캐스터를 입수하게 된다. 이 기타를 가지고 그는 4년 여에 걸친 맹연습을 하며
모든 테크닉을 정복해 갔다.
뿐만 아니라 오케스트라의 멤버였던 누나로부터 독보력과 스케일 이론을 배우며 이론과 실제를 착실히 쌓았다.
77년 의무교육을 마친 잉베이는 자신의 작품을 발표하기 위해 4트랙의 MTR을구입하고 데모테입 제작에도 많은 시간을 소비하게 된다.
이후 그는 라이징 포스(Rising Force)라는 밴드를 조직하게 되는데, 잉베이와 라이징 포스에 대한 소문은
스웨덴 국내에 퍼져 스웨덴의 CBS 레코드로부터 계약제의도 들어왔다. 그러나 레코드 회사측의 ‘스웨덴 내에서의
히트를 유도’하는 제의가 마음에 안 들어 이를 거부했다.
당시 잉베이의 목표는 세계시장이었기 때문이다. 82년에 그는 마이크 바니의 눈에 띄어 기타 플레이어지에 소개되고
곧이어 LA로 가, 론 킬이 이끄는 스틸러(Steeler)에 가입하였다.
스틸러에서 1장의 앨범을 발표하고 탈퇴한 잉베이는 그래험 보넷의 알카트라즈에 가입, 'Island In The Sun',
'Too Young To Die', 'Jet To Jet', 'Kree Na Koorie' 등의 명곡을 만드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하지만 멤버간의 갈등과 음악적인 견해차이로 이 그룹에서 2장의 앨범에 참여한 후 그는 곧 자신의 독자적인 새 그룹
라이징 포스를 결성해 'Far Beyond The Sun', 'Black Star', 'Evil Eye', 'As Above So Below',
'I’ll See The Light Tonight' 등등 록기타사에 길이 남을 작품을 만들었다.
잉베이 맘스틴이 연주하는 프레이즈는 클래식적인 발상이 대부분이다. 내추럴 마이너, 하모닉 마이너, 디미니쉬드 스케일을 사용해 속주 애드립을 만들어 가는 게 그 대표적인 예다.
그리고 그는 같은 줄 위에서 7∼8 잇단음 이상의 긴 프레이즈를 매우 빠르게 연주하는 경우가 많다.
물론 이것은 바이올린을 켜는 주법에서 힌트를 얻은 것이며, 이외에 그가 대중화시킨 아르페지오 스윕피킹도
바이올린 연주를 응용한 것이다.
또한 얼터네이트 피킹만으로의 연결시 나타나는 속도와 부드러움의 한계를 소위‘2현 스윕’으로 극복,
스피디한 프레이즈를 좀더 유연하고 힘을 안 들여 연주할 수 있게 한 것도 그의 공로였다.
위와 같은 그의 면모가 여실히 나타나고 있는 것은 솔로 프레이즈를 할 때이다. 그의 애드립에서 엿볼수 있는
스케일 프레이즈-마치 스케일 연습을 하듯 음을 차례로 늘어서게 하며 연주하는 속주-는 그가 기타를 위해 얼마나 많은
시간을 투자했는지 알 수 있게 한다.
그는 코드 하나 하나에 맞추어가며 연주하는 기타리스트이므로 매우 세밀하고 규칙적인 솔로라인을 만들어낸다.
잉베이 맘스틴의 등장으로 수많은 기타리스트들이 연습실로 직행했고
클래시컬 속주기타의 새 지평을 열게 되었다.
글/조성진
스웨덴 출신의 기타리스트인 잉베이 맘스틴(Yngwie Malmsteen)은 1963년 스톡홀름에서 태어났다.
그는 자유분방한 가정에서 자라났고, 7세 때 이미 기타를 연주하기 시작하였다. 기타를 배우면서 그는
지미 헨드릭스(Jimi Hendrix)나 파가니니(paganini)와 같은 기타리스트가 될 것을 꿈꾸었다.
10대 후반에 이르자 그는 자신만의 독특한 연주기법을 고안해냈다. 1983년 로스엔젤레스로 가서 헤비메틀 밴드인
스틸러(Steeler)에 가담하였고, 그 이후에는 알카트라즈(Alcatrazz)에 참여해 활동하였다. 그 이듬해에는
자신의 첫 솔로 앨범인 [Rising Force]를 발표하여 그래미 Best Rock Instremental Performance 부분에서
수상하였으며, 최고의 팝-메틀 기타리스트로서의 명성을 확고히 했다.
1987년 6월 잉베이 맘스틴은 자동차 사고로 뇌를 다치게 되었다.
1주 이상이나 계속되던 혼수상태에서 가까스로 벗어나긴 하였으나, 오른쪽 손에 치명적인 손상을 입게 되었다.
고통스러운 회복기간을 거쳐 그는 다시금 재능을 선보이게 되었으며, 결국 1988년 [Odyssey]라는 앨범을 발표하였다.
러시아 공연을 마친 후 그는 다시 미국으로 돌아와 스웨덴 출신 음악가로 구성된 밴드를 결성하였다.
1990년 마이애미에서 녹음된 [Eclipse]는 해외에서는 성공을 거두었으나 정작 미국에서는 그리 반응이 좋지 않았다.
1993년에 맘스틴은 일본 포니 캐년(pony Canyon)레이블로 옮겨가 그 이듬해에 [The Seventh Sign]을 발표하였다.
일본에서 미니 앨범 2장을 더 발표한 후 전세계로 투어를 다니다가, 1995년 [Magnum Opus]를 발표하였다.
1996년에 그의 마지막 앨범 [Inspiration]을 발표하였다.
- 음악창고 -
바로크 메탈의 제왕, 불뿜는 듯한 기타 등등의 수식어를 달고 '80년 등장했던 잉베이 말름스틴은 누가 뭐래도
1948년 리오 펜더에 의해 개발된 일렉트릭기타의 역사에 혜성처럼 등장했던 천재 기타리스트의 계보에 들어가기에
모자람이 없다.
1963년 스웨덴의 스톡홀롬에서 태어난 잉베이는 클래식에 정통했던 어머니의 영향을 받아 세살 때부터
피아노를 치면서 클래식의 세계에 빠져들었다.
그가 기타를 접한 것은 5살 때라고 알려져 있지만 1970년 TV에서 방송되던 지미 헨드릭스의 추모공연과의 조우는
결정적으로 그를 기타의 세계로 끌어들인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그 이후 꾸준한 기타에 대한 열정과 연습을 거쳐 1975년 그렇게도 갖고 싶어했던 팬더 스트라토캐스터를 손에 넣고부터는 5년 동안 하루에 10시간 이상씩 기타연습을 해왔다는 일화는 음악에 대한 그의 열정이 어떠했는지, 음악적 완성도에 대한 그의 신념이 어떠했는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게 한다.
지미 핸드릭스를 영웅으로, 리치 블랙모어의 기타테크닉을 교과서로 삼아 그는 피가 날 정도로 연습을 하였다.
10대에 접어들어 그는 아마츄어 밴드들을 결성하여 활동하다가 1978년 Rising Force라는 그룹을 조직하게 된다.
고국에서는 별로 신통치 못한 대접을 받던 그에게 드디어 1981년 미국의 유명한 메탈 프로듀서인
Mike Varney에게 Rising Force의 데모테잎이 건네졌고, 1983년 Mike Varney가 기고한 Guitar Prayer에
잉베이를 극찬하는 글을 올리게 된다.
그 후 Mike Varney는 잉베이를 미국으로 초대하고 결국 솔로앨범을 제작하던 중, STEELER란 그룹의 데뷔앨범에
기타리스트로 참여하게 된다.
여기서 잠시 활동하다가 당시 Rainbow의 보컬이었던 그래험 보넷과 Alcatrazz를 결성하게 된다.
스틸러에서의 활동을거쳐 알카트라즈에서 보여준 그의 기타솜씨는
새로운 천재의 등극을 전세계에 알리는 당당한 사자후였다.
스틸러 시절의 Serenade는 불후의 명곡으로 자리하고 있으며 Alcatrazz에 참여한 앨범
[No Parole from Rock n'roll]과 라이브 앨범인 [Live sentence]에서는 'Suffer me'와 'Hiroshima mon amour'가 사랑받았다.
특히 [Live sentence]앨범의 백미는 그래험 보넷과 관중들의 절묘한 하모니(딥 퍼플의 made in japan라이브를
연상시키는)와 coming bach다.
바하의 bouree를 일렉트릭기타로 편곡한 곡은 이후 잉베이의 앞날에 대한 화려한 전주였으며, 바하에 대한 그의 깊은
애정을 느끼게 하는 대목이었다.
(잉베이의 연주와 나르시소 예페스의 클래식 기타연주를 비교해 듣는다면 그 진가를 확실히 느낄 수 있다.)
우여곡절 끝에 1984년 결국 자신의 옛 밴드를 다시 결성하기로 하고, 스웨덴의 인기그룹인 Silver Mt출신인
Jens Johansson의 키보드, Jethro Tull출신인 드러머 Barriemore Barlow와 보컬리스트 Jeff Scott Soto가
참여한 라이징 포스 앨범을 발표한다.
이 앨범이 발매되면서 당시 음악계는 충격에 휩싸이게 된다.
잉베이의 기타연주는 당시 잠자고 있던 기타리스트들의 연주능력에 불을 붙이는 효과를 발휘했던 것이다.
그리고 클래식 음악과 헤비메틀의 접목을 통한 바로크메탈이라는 새로운 쟝르의 이정표를 분명히 세우게 되었다.
잉베이 말름스틴의 거센 항해 이후로 폴 길버트(Mr.Big)나 토니 메컬파인, 죠슈어 페러히어, 크리스 임펠리테리 등이 생겨났으며, 이들에 의해 바로크메탈은 새로운 장르로 자리잡게 된다.
이후에 잉베이는 계속적으로 멤버를 교체해가면서 현재까지 통산 10장이 넘는 스튜디오 앨범과 2장의 라이브앨범을 내는 등 정력적인 활동을 해내고 있다.
바하만이 최고라고 외치던 그가 1996년 [inspiration]앨범을 내면서 자신에게 음악적 영감을 주었던 선배 아티스트들의 곡을 카피한 앨범을 내놓으며 광오한 그의 성격에 중대한 변화가 일지 않았나 하는 추측을 낳기도 했다.
'87년의 교통사고로 인한 휴우증, 젊었을 때의 날카로운 눈매 대신에 불어난 체중, 바로크 메탈의 쇠퇴, 팬들의 다소 냉소적인 분위기.. 이 모든 것이 결코 잉베이에게 좋은 쪽으로만 돌아가고 있지는 않지만 하나의 장르와 주법에 머무르지 않고 젊은 시절에 그가 보여주었던 열정을 계속 유지한다면 21세기에 새로운 거장으로 거듭날 수 있는, 한 때의 추억이 아닌 영원한 아티스트로 팬들에게 기억될 충분한 자질이 있는 기타리스트임에 틀림없다.
※ Tip : Playing "Far Beyond the Sun" at Live
- 파가니니 : 바이올린 협주곡 4번(Violin Concerto No.4 in D minor) 1악장 Allegro maestoso
- 알비노니 : 아다지오(Adagio in G minor)
- Yngwie Malmsteen's Far Beyond The Sun
아메리칸 하드록의 제왕
그룹 결성이후 보스톤에서 인기를 얻기 시작하면서 데뷔앨범 [Aerosmith]를 발표한다.
그들의 명곡 'Dream On'은 당시에는 차트 59위의 성적 밖에 올리지 못했으나 3년이 지난 76년 차트 10위권에 진입하는 늦깍이 성공을 거두기도 한다.
두번째 앨범을 발표한 이후 라이브 투어에 열중하며 실력을 인정받아 나간다. 한때 그룹의 핵심인 Joe Perry가 자신의 프로젝트 그룹을 만들며 탈퇴하고 연이어 Brad Whitford가 탈퇴하며 약간 흔들리긴 했으나 1985년 이들이 다시 합류하면서 제 2의 전성기를 구가하게 된다. 이후 87년 'Angel', 89년 'What It Takes', 93년 'Crying', 'Crazy',
'Amazing'을 연이어 히트 시키며 록 발라드에서 최고의 자리에 올라서 당시 얼터너티브 음악의 대 인기 속에서
유일하게 록 차트에 남아있었던 하드록 밴드 에어로스미스는 노익장을 과시하며 '아메리컨 하드록의 제왕'으로
자리매김한다.
93년 발표된 히트 넘버 'Crazy'의 뮤직비디오에 출연했던 보컬 스티븐 타일러의 딸 리브 타일러는 뮤직비디오의 인기와 함께 미국 최고의 여배우로 떠올랐고,
98년 리브 타일러가 여주인공으로 출연한 'Armageddon'의 영화에 아버지의 그룹 에어로스미스가 주제가를 부르면서 화제를 불러 일으키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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