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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P SONG & ROCK

Yngwie Malmsteen -You Don't Remember, I'll Never Forget

 

「Rising Force」(1984)

 

 

 

 

Yngwie Malmsteen -You Don't Remember, I'll Never Forget

 

 

 

 

 

 

Live in Leningrad  

 

 

 

 

 

 

You Don't Remember, I'll Never Forget

 

 

 

Version 01. 

 

It was you, it was me,
And we would last forever.
Any fool could see, that we were
Meant to be

너의 잘못이든, 나의 잘못이든..

결국 우린 끝이나 버렸지.

암만 바보래도 이렇게 되기를 바라진 않아.

 

Without you,

there is no meaning to
My life.
너 없인 내 인생은 아무런 의미도 없는데

 

You're gone

and it cuts me like
A knife.
너는 떠나버렸고 나를 칼로 베어내듯 잘라내 버렸지.

 

How could you leave me?

어떻게 나를 떠나버릴 수 있지?

 

You don't remember, I'll never forget
너는 나를 기억 못하겠지만 나는 절대 잊지 못해.

You just don't remember, I'll never forget.

 

 

Why did you turn away,

왜 돌아오려는거야,
Let your love fade away and die.
너의 감정은 멀리 지워버리고 없애버려.

You became so cold, you made me feel
So old.

너는 내게 차갑게 대하고, 나를 늙어버리게 만들어.

 

When you left, you broke my heart
And just to see.

니가 떠나버리면서, 나의 가슴은 조각조각 부서져버렸어.

너도 알잖아.

 

How many pieces there would be,
After you leave me.

니가 나를 떠남과 동시에

대체 나의 가슴은 몇조각으로 부서져버렸는지..

 

You don't remember, I'll never forget
너는 나를 기억 못하겠지만 나는 절대 잊지 못해...!!

You just don't remember, I'll never forget

 

 

 

          

 

 

 

어려서 클래식 수업을 받고 바이올린등을 연습한 잉위는 지미 헨드릭스의 미친기타에 넔을 잃고

 이후 리치 블랙모어와 울리 로스의 클래시컬한 어프로치에 반하고 결국

 스윕 아르페지오를 들여와 세상에 그의 기타세계를 알립니다.

 

그의 재능은 당시 천재 프로듀서 마이크 바니에의해 미국에 알려집니다. 그리곤 [Steeler]의 저 앨범에

 잠깐 몸 담았다가 83년 당대 최고의 보컬로 이름을 날리던

그래험 보넷과 [Alcatrazz]를 만들어 활동을 합니다. 

 

그것도 잠시 자신만의 밴드 [Yngwie Malmsteen Rising Force]를 조직해 본격적인 세계정복에 나섭니다.

 또한 첫 앨범부터 그의 든든한 메이트이자 20세기형 키보디스트 옌스 요한슨과 함께

 초절정 솔로 배틀을 선보입니다.

 

1집 수록곡 [Black Star], [Far Beyond The Sun]으로 전 세계의 모든 기타리스트들을 긴장시키기에 이릅니다.  

 

 

  

 

 

 

한창 기타를 연습하던 크리스 임펠리테리는 잉위의 등장에 엄청난 충격을 먹게되고

자신만의 개성을 살리기위해 부던히 노력을 합니다.

 

임펠리테리는 결국 극한의 스피드로까지 기타연주를 몰아붙이며 전 세계 속주 전쟁에 선봉에 섭니다.

 EP를 발매하고 88년 그래험 보넷과 함께 1집 [Stand In Line]을 발표합니다.

 

 특히나 [Over The Rainbow]의 연주로 단번에 기타영웅으로 등극합니다.

 둘의 두번째 공통분모 그래험 보넷이 있었군요.  

 

 

   

 

 

다작을 하는 잉위는 창작의욕을 불태우며 그의 명반들을 쏟아냅니다. [Odyssey]에서

 정점을 찍은 잉위는 소련 레닌그라드에서 라이브도 할 수 있게 됩니다. 이후 퇴색되어가는

 기타속주 테크닉 전쟁과 함께 메틀이 서서히 사그라 듭니다.  

 

 

잉위가 제왕으로 군림하며 승승장구 했지만 임펠리테리는 2집이 나올무렵 큰 방황을 하게 됩니다.

절친이자 동반자 롭 락이 돌아와 함께한 [Grin And Bear It]은 파워풀한 곡들로 구성은 되어있지만

 임펠리테리의 특징을 살리지 못한체 외면을 당합니다.

 

이후 다시 돌아온 밴드는 미니앨범 [Victim Of The System]을 발매합니다. 예전 임펠리테리의 모습을

 다시금 보여준 준비작이죠.

 EP나 미니 싱글이 안팔리는 한국에는 저 미니 앨범과 2집을 섞어서 발매합니다.  

 

 

 

 

 

90년대 미국에서 바로크 메틀은 뭐 그냥 사장됩니다.

하지만 유럽과 특히 일본에서는 지속적인 지지를 받으며 제왕의 대접을 받습니다.

 

[The Seventh Sign]에서는 라우드니스에서 활약한 유일한 서양보컬 마이크 베세라를 맞이해

일본 오리콘 1위를 하기도 했습니다.

 

 저 앨범이 나오기 전 잉위의 처가가 약혼을 반대하면서 경찰에 체포를 의뢰해 밤중에 잡혀갑니다.

[I Don't Know]란 곡에서 뭔일인지 자신도 모르겠다면서 심경을 토로하죠.

 

90년대가 끝나갈 무렵 발표한 [Facing The Animal]에서는 전설의 드러머 코지 파웰이 함께 했는데

 앨범을 발표하고 얼마 안가 코지는 차 사고로 사망하고 저 앨범이 유작이 된 잉위에게는 특별한 앨범입니다. 

 

 

 

 

잉베이 말름스틴

 

 

 

 

 

지미 헨드릭스 이후 가장 혁신적인 기타리스트로 추앙받으며 1980년대 초반의 헤비메탈 씬을 사실상 평정했던 에드워드 반 헤일런 앞에 강력한 도전자가 등장했다.

그의 이름은 잉베이 말름스틴, 이른바 바로크 메탈의 전성기를 열어젖히며 1980년대 중반 이후 불꽃처럼 펼쳐졌던

 기타계의 속주경쟁을 주도했던 인물이다.

 

어느 날 리치 블랙모어가 우연히 그의 음반을 듣고는 누군가 레코드를 고속으로 돌리고 있는 줄 착각했으나 그것이

 실제 연주 속도임을 알고 이제 자신의 시대는 갔다며 탄식했다는 것도 유명한 일화이다.

잉베이 말름스틴의 연주 속도가 얼마나 빨랐는지를 말해주는 이야기이다.

 

 

누군가 레코드를 고속으로 돌리고 있는 줄 착각했다

1963년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태어난 잉베이 말름스틴은 일곱 살이던 1970년, TV에서 지미 헨드릭스 추모 특집

 프로그램을 보다가 기타리스트가 되기로 결심했다.

 아홉 살 생일 때 딥 퍼플의 앨범 「Fireball」을 선물 받으며 자연스럽게 지미 헨드릭스와 리치 블랙모어는 그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선배가 되었다.

 

열두 살 때 자신의 필생의 명기가 될 펜더 스트라토캐스터와 처음 만난 그는 타고난 재능을 바탕으로 하루 여덟 시간이

 넘는 맹연습을 통해 실력을 연마했다.

 

몇몇 로컬 밴드를 거쳐 1978년 라이징 포스(Rising Force)를 결성한 그는 기타 전문잡지 「기타 플레이어」에 데모

 테이프를 보냈는데, 그것을 들은 저명한 칼럼니스트 마이크 바니(Mike Varney)가 「기타 플레이어」의

'스포트라이트' 칼럼에 그를 소개함으로써 이름을 알리게 되었다.

 

마이크 바니의 주선으로 그룹 스틸러(Steeler)에 가담해 미국 록계에 처음 모습을 드러낸 그는 1983년 그래험 보냇과 함께 알카트라즈(Alcatrazz)를 결성했다

 

 

알카트라즈

 

잉베이 말름스틴은 알카트라즈 시절 데뷔 앨범인 「No Parole from Rock 'n' Roll」과 일본 공연실황을 담은

라이브 앨범 「Live Sentence」 단 두 장의 앨범에 참여했다. 「No Parole from Rock 'n' Roll」에서는 수록곡

〈Island in The Sun〉 〈Jet to Jet〉 〈Hiroshima Mon Amor〉 등에서 탁월한 기타 솔로를 들려주며 명성을

얻기 시작했으며, 「Live Sentence」 실황에서는 바흐의 유명한 클래식 명곡인 〈부레〉를 일렉트릭 기타로 편곡해

연주한 〈Coming Bach〉의 연주 장면이 향후 그가 걸어갈 길을 예시한 명장면으로 꼽힌다.

 

약관 스무 살의 나이에 이미 기타의 신성으로 떠오른 잉베이 말름스틴은 그러나 열 살에서 스무 살에 이르는 다른 멤버들과의 현격한 나이차와 음악적 견해차를 극복하지 못하고 알카트라즈를 떠나 자신의 밴드인 라이징 포스를 이끌고

 독자적인 활동을 펼쳐나가기 시작했다.

 

첫 번째 스튜디오 앨범인 「Rising Force」는 1984년에 나왔는데, 이 앨범은 헤비메탈 기타의 새로운 이정표를 제시한 기념비적 역작으로 평가받는다.

여기에 〈Black Star〉 〈Evil Eye〉 〈Far Beyond The Sun〉 등 그의 대표곡들이 대거 수록되어 있는데, 바로크

 메탈의 전성기는 명백히 이 앨범과 함께 도래했다고 할 수 있다.

 

「Rising Force」는 「기타 플레이어」에 의해 그 해 베스트 록 앨범으로 선정되었으며 그래미 어워즈의 베스트 록 연주 부문에 노미네이트되기도 했다.

「Rising Force」가 잉베이 말름스틴의 기타 플레이를 전면에 내세웠던 반면, 이어진 앨범들인 「Marching Out」

(1985)과 「Trilogy」(1986)에서는 대중성을 고려해서 보컬의 비중을 높이게 되는데, 이러한 전략은 성공을

 거두어 상당한 대중적 인기를 누리게 되었다.

 

1987년 잉베이 말름스틴은 큰 교통사고를 당해 오른손에 심각한 부상을 입었다. 업친데덥친 격으로 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 어머니가 암으로 세상을 떠나면서 그의 상실감은 극에 달했다.

하지만 그는 1988년 아픔을 이기고 돌아와 컴백작인 「Odyssey」를 발표했다.

 

 수록곡 가운데 〈Heaven Tonight〉이 크게 히트했으며 앨범도 최대의 상업적 성공을 거두면서 잉베이 말름스틴은

재기에 성공했다.

 

1980년대 테크닉 지상주의 시대를 열다

바로크 메탈의 제왕이라는 별명은 잉베이 말름스틴에게 붙여진 가장 적절한 칭호이며 그의 기타와 음악을 가장 잘

 정의하는 수식어이다.

그가 기타 연주에 끼친 가장 큰 영향은 헤비메탈 기타 연주에 클래시컬한 요소들을 적극 도입했다는 점인데, 그것은

 아마도 클래식에 정통했던 어머니의 영향으로 어려서부터 피아노와 클래식 기타를 배웠던 가정 환경과 클래식적 요소가 강했던 기타리스트 리치 블랙모어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비발디, 바흐 등 바로크 시대 음악가들의 대위법 선율을 록 기타 연주에 응용했고 파가니니의 초절기교의 바이올린 테크닉 또한 기타 연주를 위해 옮겨 왔다.

한 개의 줄 위에서 7~8잇단음 이상이 이어지는 긴 프레이즈를 빠르게 연주하는 스타일이 대표적으로 바이올린 주법을

 활용한 것이다.

 

잉베이 말름스틴의 탁월함은 역시 눈부신 속주에 있다.

 속주를 위해 고안했다는 스윕 피킹 주법은 그의 트레이드마크 가운데 하나인데, 왼손가락의 현란한 움직임을 바탕으로 한 스윕 피킹은 업다운 크로스 피킹 만으로는 한계에 봉착해 있던 속도 경쟁에 새로운 신기원을 열었다.

 

솔로 애드립에서 보여주는 유연한 스케일의 연주 또한 빼놓을 수 없는 그의 강점이다.

 그는 내추럴 마이너, 하모닉 마이너, 디미니쉬 스케일 등 다양한 스케일을 적극 활용해 독창적인 연주를 펼침으로써

펜타토닉 스케일에 갇혀있던 기존의 연주 패턴에도 변화의 바람을 불어넣었다.

 

잉베이 말름스틴은 펜더 스트라토캐스터와 마샬 앰프라는 고전적 조합을 즐겨 사용했다.

알카트라즈 시절 이후 그는 평생을 초지일관 이 조합을 고집했는데 그래서 펜더 스트라토캐스터의 마왕으로 불리기도

한다.

 

 

 

 

 

기타의 역사에서 1980년대는 테크닉 지상주의 시대였다.

수많은 기타리스트들이 불꽃 튀는 경쟁을 펼치며 연주 기술의 진보와 확장을 이루어냈다.

그 시작은 아마도 에드워드반 헤일런이었을 것이며, 일단 타오르기 시작한 불꽃에 기름을 쏟아 부은 이는 잉베이

말름스틴이었을 것이다.

 

잉베이 말름스틴의 연주력, 특히 속도는 후배 기타리스트들이 반드시 도전하고 넘어야 할 숙제와도 같은 것이었다.

그것을 뛰어넘지 못해 좌절하고 실패한 이의 숫자 또한 헤아릴 수 없을 것이다.

 

잉베이 말름스틴에 대해서는 많은 논란거리가 있다.

그는 연주력과는 별개로 불 같은 성격과 쉽게 자만심을 드러내는성품 탓에 많은 비난에 직면해야 했고, 바로크 메탈의

 시대가 빠르게 저물어간 이후에도 고집스럽게 노선을 견지했던 탓에 말년에는 시대에 뒤떨어진 연주자라는 혹평도

 들어야 했다.

 

 그러나 잉베이 말름스틴이 1980년대의 중심에서 테크닉과 속주 경쟁을 주도했던 스웨덴이 낳은 불세출의

기타리스트이며 바로크 메탈의 제왕임은 변하지 않는 사실이다.

이후 눈부신 속주를 주무기로 등장한 수많은 기타리스트들, 대표적으로 토니 메칼파인, 조슈아 페러히어

(Joshua Perahia), 크리스 임펠리테리, 폴 길버트 등은 명백히 그의 영향권 아래에 있는 이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