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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ORLD MUSIC

이집트 출생 프랑스 Dalida-Sois Heureux

 

 

 

 Dalida-Sois Heureux (행복한 이별)

 

 

 

 

 

 

 

 

 

 

 

 

 

 

Sois Heureux (행복한 이별)

 

 

 

N'ai pas peur
Vas, je ne me tuerai pas pour si peu va
Moi
N'ai pas peur
Moi aussi je saurai bien t'oublier va
Toi
C'est ainsi
Qu'on ne peut jamais revivre un amour mort
Bien mort
jetons lui
Un dernier bouquet de roses
Pour l'adieu,  l'adieu

Ah ! Dans ton regard ce n'est plus moi que je vois
Ce n'est plus moi que tu retiens dans tes bras
Pars si tu m'aimes encore un peu
Et sois heureux


~Musique~

C'est fini
Et ni ton ni moi, jamais n'y pourrons rien
Plus rien
Cest fini
Et mourra aussi la rose demain matin

Ah ! Ou sont les mots que je voudrai te donner
Ou sont les mots que voudrai te crier
Mais je ne sais que dire adieu
Et sois heureux

N'ai pas peur
Vas, je ne me tuerai pas pour si peu va
Moi
N'ai pas peur
Pars sans crainte avec une autre
Et sois heureux, et sois heureux
Et sois heureux

 

 

 

 

 

 

 

 

 

달리다 [ Dalida ] 1933.1.17 ~ 1987.5.3 이집트 출생 프랑스인본명 : 욜란다 크리스티나 질리오티

(Iolanda Cristina Gigliotti)극심한 우울증으로 끝내 목숨을 끊어....

 

이집트 태생의 프랑스 가수 겸 배우. 프랑스어는 물론 이탈리아어, 아랍어, 스페인어, 그리스어, 독일어 등 10여개국의

언어로 노래를 부르며 월드뮤직 발전에 기여했다.

대표곡으로 <밤비노(Bambino)>(1956), <파롤 파롤(Parole Parole)>(1973), <살마 야 살라마

(Salma Ya Salama)>(1977) 등이 있다.

 

1933년 이집트 카이로의 이탈리아 이민 가정에서 태어났다.

 카이로 오페라 하우스(Cairo Opera House)의 수석 바이올린 연주자였던 아버지 덕분에 일찍부터 음악을 접했다.

 1950년 지역 미인 대회인 미스 온딘(Miss ondine)에 출전해 우승했고, 곧바로 카이로의 패션 센터 도나(Donna)에서 모델로 일했다.

 

1954년 이집트 최고의 미인대회인 미스 이집트(Miss Egypt)에서 ‘미스 이집트’로 뽑혔다.

그해 오마 샤리프(Omar Sharif) 주연의 영화 《조제프 에 세 프레르(Joseph Et Ses Frères)》에 캐스팅되며 배우로 데뷔했고, 이후 십 여 편의 영화에 출연했다.

 

1954년 말 프랑스 파리로 이주해 샹젤리제거리에 위치한 카바레에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올랭피아(Olympia) 극장의 소유주 브뤼노 코카트릭스(Bruno Coquatrix), 프랑스 라디오 방송국 유럽

 1(Europe 1)의 제작자 뤼시엥 모리스(Lucien Morisse), 음반사 바클레이 레코즈(Barclay Records)의 대표

 에디 바클레이(Eddie Barclay)의 전폭적인 후원을 받았다.

 

1956년 데뷔싱글 <마돈나(Madona)>를 발표하며 음반활동을 시작했다.

그해 발표한 싱글 <밤비노>로 (1957년 기준) 프랑스에서 30만 장의 판매고를 올렸고, 샤를 아즈나부르

(Charles Aznavour)의 올랭피아 공연에 게스트로 출연했다.

1950년 후반 <곤돌리에(Gondolier)>(1957), <코메 프리마 (튀 므 돈느)(Come Prima (Tu Me Donnes))>

(1958), <차오, 차오 밤비나 (피오베)(Ciao, Ciao Bambina (Piove))>(1959)를 히트시켰다. 또한 1958년부터

1960년대 초반까지 프랑스, 이집트, 이탈리아, 미국에서 콘서트를 펼쳤다.

 

1960년대 초반 미국의 보컬 그룹 드리프터스(The Drifters)의 <세이브 더 라스트 댄스 포 미

(Save The Last Dance For Me)>와 미국의 포크 가수 피트 시거(Pete Seeger)의

 <웨어 해브 올 더 플라워스 곤?(Where Have All The Flowers Gone?)>을 각각 프랑스어로 개사해 부른

<가르드 무아 라 데르니에르 당스(Garde-Moi La Dernière Danse)>(1961)와 <크 송 드브뉘 레 플뢰르?

(Que Sont Devenues Les Fleurs?)>(1962)를 히트시켰다.

 

1965년 그리스 음악가 미키스 테오도라키스(Mikis Theodorakis)가 음악을 맡은 영화 《희랍인 조르바

(Alexis Zorbas)》의 테마음악에 노랫말을 붙여 노래한 <라 당스 드 조르바(La Danse De Zorba)>를 히트시켰다.

1967년 1월 당시 연인 관계였던 이탈리아의 신예 싱어송라이터 루이지 텐코(Luigi Tenco)와 함께 제17회 이탈리아

산레모 가요제(San Remo Festival)에 출전해 루이지 텐코가 작곡한 노래 <차오 아모레 차오(Ciao Amore Ciao)>를 함께 불렀다.

 

그러나 산레모 가요제에서 좋은 반응을 얻지 못한 것에 비관해 루이지 텐코가 1967년 1월 27일 호텔 방에서 자살하자 큰 충격을 받았고, 한 달 후 자신도 자살을 시도했지만 미수에 그쳤다.

 

1967년 10월 5일 올랭피아에서 재기 무대를 가졌고, 1970년 그리스 칼림노스섬(Kalymnos Island)의 민요를 새롭게 재해석한 <달라 딜라다다(Darla Dirladada)>를 히트시켰다.

 

그러나 1970년 9월 전(前) 남편이자 매니저였던 뤼시엥 모리스 역시 자살을 하면서 다시 큰 충격을 받았다.

이후에도 주변 인물들의 자살은 계속되어 1975년에는 친구이자 가수인 마이크 브란트(Mike Brant)가, 1983년에는

 한때 연인 사이였던 리샤르 샹프레(Richard Chanfray)가 자살했다. 결국 달리다는 활동기간 내내 심각한 우울증에

시달려야 했다.

 

1973년 프랑스 배우 알랭 들롱(Alain Delon)과 함께 부른 듀엣곡 <파롤 파롤>(1973년 프랑스 싱글차트 1위)을

히트시켰다.

 1970년대 후반까지 <지지 라모르소(Gigi L'amoroso)>(1974), <일 브네 다부아 디즈위트 앙

(Il Venait D'avoir 18 Ans)>(1974), 디스코 스타일의 <자탕드레(J'attendrai)>(1975), 이집트 민요를 재해석한 <살마 야 살라마>(1977)와 같은 노래를 히트시켰다.

 

1978년 11월 미국 뉴욕의 카네기 홀(Carnegie Hall) 무대에 섰고, 1980년대 중반까지 <제네라숑 78

(Génération 78)>(1978), <헬와 야 발라디(Helwa Ya Balady)>(1979), <무리르 쉬르 신(Mourir Sur Scène)>(1983), <솔레유(Soleil)>(1984) 등의 대표곡을 남겼다.

1986년 유세프 샤힌(Youssef Chahine) 감독의 이집트 영화 《르 시지엠므 주르(Le Sixième Jour)》에 출연했고,

1987년 초 터키 앙카라(Ankara)에서 라이브 무대를 펼쳤다.

그러나 깊은 우울증을 극복하지 못하고 1987년 5월 3일 파리 몽마르트르의 자택에서 ‘인생은 너무 견디기 힘들어요.

 날 용서해주세요.’라는 유서를 남기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달리다는 샹송 발전에 기여한 것은 물론, 이탈리아어, 아랍어, 스페인어, 그리스어, 독일어 등 10 여 개 국의 언어로

노래를 부르며 월드뮤직 대중화에도 이바지했다.

대표곡으로 <밤비노>, <파롤 파롤>, <지지 라모르소>, <살마 야 살라마>, <무리르 쉬르 신>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