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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DERNISM 음악

Cliff Richard & Sarah Brightman-Only You

 

 

 

 

 

Cliff Richard & Sarah Brightman-Only You

 

 

 

 

 

Only You

 

 

 

Only you
Have the power to move me
And together we'll make
The whole world move in sympathy
But I could not see before

Only you
Have the power to move me

Take me hold me mould me
Change me and improve me

It's not funny anymore
There was I
[There was I]
Wondering why
[I was wondering why]
Every day

Disappeared into the distance

Now with you
The light is shining through

You gave me life not just existence

Only you
[You are the starlight]
Have the power to move me

And together we'll make
The whole world move in sympathy

Only you
Have the power to move me
[Move me]

There was I
[There was I]
Wondering why
[Wondering why]

Every day disappeared into the distance
Now with you
The light is shining through
You gave me life not just existence

Only you
[Only you]

Have the power to move me
And together we'll make
The whole world move in sympathy

But I could not see before
[I couldn't see it before]
That only you

Have the power to move me
Take me hold me mould me
Change me and improve me

Only you
[Only you]
Have the power

To move me


오직 당신만이
나를 움직일 힘을 가지셨어요
그리고 우리 이제 함께 만들어 갈거예요
온세상이 공감속에 움직이도록
그러나 그전엔 내눈으로 볼 수 없었어요

오직 당신만이
나를 움직일 힘을 가지셨어요

나를 잡아 앉혀 새롭게 만들어 주세요
나를 변화시켜 더나은 나로 만들어 주세요

더이상 농담이 아니예요
그것에 내가 있었죠
왜일까 궁금해 하면서요
매일 왜일까 궁금했었어요

저멀리 어디론가 사라져 가는것이

지금은 당신과 함께 하니
빛이 반짝이며 뚫고 지나가고 있어요

당신은 나에게 단지 생존이 아니라 삶은 주셨지요

오직 당신만이
당신은 나의 별빛이예요
당신은 나를 움직일 힘을 가지셨어요

그리고 우리 이제 함께 만들어 갈거예요
온세상이 공감속에 움직이도록요

오직 당신만이
나를 움직일 힘을 가지셨어요
나를 움직이세요

그곳에 내가 있었죠
왜일까 궁금해 하면서요

 

 

 

 

 

 

 

Sarah Brightman

 

 

 


크리스탈처럼 영롱한 목소리를 가진 사라 브라이트만은 오페라의 유령 이나 캐츠로 잘 알려진 최고의 뮤지컬 가수일

 뿐 아니라, 대중음악에서 고전음악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음악을 소화해 내는 완벽한 가수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어떤이들은 그녀를 가리켜 크래시컬 팝 싱어의 여왕이라고도 부른다.

사라는 유려한 가창력 뿐 아니라 고음에서 나는 맑고 순수한 느낌과 저음에서 나는 거칠고 싸늘한 느낌까지 다양한

음색의 목소리를 지니고 있다.
그녀의 목소리는 단순히 아름답다고 할 수 있는 그런 차원이 아니다.

게다가 매춘부에서 천사까지 다양한 역을 소화해 내는 그녀의 표정과 연기력은 모든 것을 갖춘 완벽한 뮤지컬 가수임을 확신케 한다. 하지만 더이상 사라를 뮤지컬 가수라는 이름안에 가둬 놀 수 없게 됐다.
앤드류 로이드 웨버와 이혼한 이후 그녀는 뮤지컬 이외에 분야에서 눈부신 활약을 하면서 자신의 세계를 만들어

가고 있기 때문이다

 

1961년 영국에서 태어난 그녀는 1978년 댄스 그룹 핫 가쉽에서 디스코-팝싱글인"I Lost My Heart to A Starship

Trouper"를 영국 차트 톱 10에 올려놓으면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어린 시절 발레리나를 꿈꾸던 그녀에게는 다소 다른 방향이었으나 그녀는 가수이자 배우로서 서서히 자신의
이름을 알리기 시작하였으며,1981년 앤드류 로이드 웨버의 뮤지컬 [Cats]에 발탁되면서 다시 주목을 받았다.

 

 1984년 사라는 앤드류와 결혼한다.

결혼 생활은 6년간 지속되었으며 이 기간 동안 그녀는 뮤지컬계에서 가장 뛰어난 여배우로서 자신의 위치를 굳건히 한다. 계속적인 보컬 수업을 통해 자신의 소프라노 목소리를 더욱 가다듬어 어려운 배역을 무리없이 소화할 수 있었다.

1984년 사라는 앤드류의 [Song And Dance]의 텔레비젼 버전에 모습을 나타냈으며, 1년 후 [The Merry Widow

at Sadlers Wells]에서 처음으로 오페라 가수로 데뷔하였다.

 이후 앤드류의 작품 [Requiem]에서 열연하였으며 이를 담은 앨범 역시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이 앨범에서는

 톱 5까지 오른 "Pie Jesus"가 크게 히트 하였는데,당시 12세였던 Paul Miles-Kingston과 부른곡이었다.

1986년 [The Phantom of The Opera]를 통해 그녀는 가장 커다란 성공을 거둔다.
마이클 크로포드(Michael Crawford)와 함께 한 이작품으로 그녀는 명성을 드높이게 되었으며, 2년 후에는

 이 작품으로 브로드웨이에 진출하게 된다.


1980년대 후반과 1990년대 초반까지 그녀는 수많은 나라에서 투어를 가졌으며1992년에는 오페라 가수인 호세

 카레라스(Jose Carreras)와 함께 올림픽 주제가인 "Amigos Para Siempre(Friends for Life)"를 불렀다.

공연활동과 더불어 그녀는 솔로앨범 작업에도 충실하였는데 [The Trees They Grow So High](1988),

 

[TheSongs That Got Away](1989), [As I Come of Age](1990), [Dive](1993), [Fly](1995),

 [Time to Say Goodbye](1997) 등의 앨범을 발표하였다.
오늘 이시간에는 그의 대표곡이라할수 있는So Many Things들어보기로...

 

 

 

 

 

 

 

Cliff Richard의 내한 세 번째이자 마지막 공연이 이화여대 강당에서 열렸다.

전날 공연을 TV가 중계해서인지 이대 앞에는 수천의 관중이 몰렸다. 서로 먼저 들어가려고 다투다 강당

유리창이 깨져 사람들이 베이고 넘어져 다치는 소동이 일어났다. 경찰은 서둘러 출입문을 막았다.

 

표를 가지고도 미처 못 들어간 사람들이 거세게 항의했다.

여학생들은 그런 중에도 "클리프 오빠, 사랑해!" 를 연호하기 시작했다.

 

공연장 안은 더 심했다. 뜨거운 흥분과 광기에 가까운 소란이 무대와 객석을 후끈후끈 달구었다.

Cliff Richard가 최고의 히트곡 'The young ones'를 부르자 무대 위로 꽃다발 손수건 선물상자들이

던져졌다. 관객 전체가 기성을 지르거나 노래를 따라 불러 정작 가수의 목소리는 들리지도 않았다.

 

흐느끼다 못해 통곡하는 여학생이 넘쳐났고 기절해 실려 나가는 사람도 생겼다.

몇몇 남성은 "시끄러워 노래를 들을 수 없다"며 의자를 쾅쾅 치고 여학생들에게 욕을 퍼부었다.

거의 주먹다짐 수준이었다.


 

레퍼토리가 'Summer holiday' 'Devil woman'을 거쳐 당시 젊은이들이 거의 가사를 외다시피 한 'Visions(of you)' 'Evergreen tree'로 넘어가도 가수의 목소리는 소음에 묻혀 들리지 않았다.

공연 초반 Cliff Richard는 청중들에게 "제발, 제발, 노래를 할 수 있게 조용히 해 달라."고 호소했다.

 

그러나 걷잡을 수 없는 흥분과 함성 탓에 통제 불능 상태가 되었다고 판단했는지 나중엔 그런 호소마저 포기했다.

 아예 마이크를 객석으로 돌려놓고 자신이 오히려 청중의 노래를 듣는 제스처를 취하기도 했다.

무대에는 여전히 손수건과 사진 수첩 머리핀 등 온갖 잡동사니 선물들이 쉼 없이 던져졌다.

 

이들 물건 가운데는 여학생들이 입고와 벗어던진 팬티도 있었다고 일부 언론이 보도했다.

그러나 주최 측은 나중에 선물을 모두 수거, 점검한 결과 팬티 등 속옷은 한 점도 없었다고 부인했다.

한마디로 그날 이대 강당은 안과 밖 할 것 없이 완전히 집단 흥분의 도가니였다

이 모든 소동은 공항에서부터 예견되었는데…


이런 소동은 사실 CR이 입국한 김포공항에서부터 예견됐다.

1969년 10월16일자 매일경제는 입국장 소동을 이렇게 전했다.

"클리프 리처드군(29세)일행이 내한한 15일 낮 김포공항은 2백여 명의 단발머리 소녀 팬들이 모여들어 수라장....

 

리처드 군이 트랩을 내려서자 그의 초상화를 든 앳된 소녀 팬들은 발을 구르며 일제 기성을 질러 이채 리처드 군이

입국수속을 마치고 나오자 소녀들은 그의 옷깃을 잡아당기며 흐느끼는 등 광태(狂態)를 보여 기동경찰관들이 등장,

겨우 진압. 이 광경을 지켜보던 다른 공항 손님들, 왜 무엇 때문에 저렇게 미치느냐고 고개를 갸우뚱."

 

그런데 당시의 팬클럽은 Cliff Richard의 내한에 맞춰 즉석 결성된 게 아니었다.

내한공연이 있기 5년 전인 64년 12월 스카라 극장에서는 CR주연 영화 'The young ones'를 상영했었다.

이때 그에 감명 받은 여학생들이 CFC(Cliff Fan Club) 혹은 CRFC(Cliff Richard Fan Club)를 만들어

활동하기 시작한 것. CR의 내한공연은 사실 이들의 노력으로 성사된 측면이 없지 않았다. 
 
한국 팬클럽은 외국의 팬클럽 및 영국 CR측과 연락해 최신 음반을 들여왔고 그걸 최동욱 이종환 피세영 등

라디오방송 디제이들에게 보내 한국에 CR노래가 더 많이 퍼지도록 애를 썼다. 물론 CR(Cliff Richard)에게

끈질기게 내한공연도 요청했다.

 소리만 지르는 오빠부대가 아니라 진짜 열광적인 팬이었던 셈이다.

 

당시 공연 입장료는 특A석 2,000원, A석 1,700원부터 D석 800원까지 5종류였다.

버스 값이 10원, 연탄 1장에 15원, 해장국과 자장면이 50원, 설렁탕이 90원 하던 때니 꽤 비싼 편이었다.

그런데도 표는 거의 매진되다시피 했다. 구입자는 대부분 여고, 여대생. 이렇게 CR의 광(狂)팬이 많다는

걸 여고에선 이미 알고 있었다. 서울시내 많은 여학교가 그의 방한일자에 맞춰 중간고사를 실시했다.

 

일부 학교는 아예 학생들의 조기 하교를 막았다. 생활지도 교사를 공항과 공연장에 보내 학생 동태를 파악한

학교도 많았다.

소녀 오빠부대에 충격받은 어른들은…

이른바 오빠부대의 기성(奇聲)과 소란을 서구 젊은이들의 철없는 짓거리로만 보아왔던 기성세대는

'CR 사태'에 넋을 잃었다.

 

당시 '어른들의 충격'이 얼마나 컸던지는 한 달 뒤 Y시민논단이 이 현상을 분석하는 토론회를 연 것으로도 짐작할 수

있다.

'한국의 10대와 클리프 리처드' 제목의 토론회에서 서울 의대 정신과 한동세 교수는 "우리사회 대로의 특성을 지닌

서울에서 그처럼 광란하는 10대의 반응은 오히려 부자연스럽다."면서 서양의 것이면 무엇이든 따라하겠다는 사고방식은 지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작가 송정숙 씨는 "CR의 팝송이 불건전하지 않은 만큼 울부짖는 우리 10대의 사고나 행동이 불건전하다고

 볼 수는 없다."고 주장했다.

그는 "평소 10대들만이 지니고 있는 감정이 자기들이 좋아하는 가수에게 분출구를 찾아 폭발한 것"이라고 해석하며

기성세대가 10대의 '그 무엇'을 이해하여 건전한 방향으로 이끌어야지, 우범시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했다.

찬반논쟁은 급기야 새로운 '청년문화'의 태동을 예고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시민사회와 문화계가 어떤 반응을 보이건 정부는 달랐다.

소리를 지르며 울부짖고 자기들의 우상을 좇아 '날뛰는' 10대들에게 더 이상 자극의 원천을 제공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72년 CR이 다시 한국을 찾아 공연하려 했으나 정부는 일거에 이를 거부했다.

싱가포르가 그의 비틀즈 스타일 장발을 문제 삼았듯 한국도 그의 장발이 청소년에게 나쁜 영향을 준다는 이유를 들었다. 마침 그때는 대통령의 엄격한 지시로 장발과 미니스커트, 고고 춤 등 '무분별한 외래 퇴폐풍조'를 발본색원하겠다고

나설 때였다. 
 

 

Cliff Richard, 50대가 된 소녀들을 다시 만나다


결국 69년 이후 근 10년 동안 우리나라에서는 청소년 우상 팝스타의 내한공연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샹송가수 살바토레 아다모의 공연이 70년대 후반에 두 차례 있었으나 오빠부대가 동원될 정도는 아니었다.

그런 사이 한국가요무대에도 차츰 오빠부대가 결성되기 시작했다.

 

조용필 전영록 최성수 구창모 윤수일 김범용 등의 공연장이나 녹화무대에는 10대 소녀 팬들이 진을 치고 앉아 오빠를

부르기 시작했다.

이들은 좋아하는 가수의 집은 물론, 동선을 따라다니며 팬덤을 과시했다.

 

그러던 80년 6월. 미국의 19살 '꽃미남'가수 레이프 가렛(Leif Garrett)의 내한공연이 남산 숭의 음악당에서열렸다.

이때의 분위기는 CR공연의 그것을 훨씬 넘어섰다.

 음악당 유리창이 깨졌고 화단의 꽃도 무수히 뽑혔다.

 

공연 때 그에게 바치기 위해 뽑은 것이었다.

객석에선 기절해 병원에 실려 가는 여학생이 속출했다.

무대 위에는 온갖 물건이 다 던져졌다. 모든 걸 다 줘도 좋다는 뜻으로 던진 열쇠도 수북이 쌓였다.

 

청소년들의 아이돌 스타를 향한 도 넘은 열정에 어른들은 다시 진저리를 쳤고 정부는 해외 아티스트 공연을 불허했다.

그리고 92년 뉴 키즈 온 더 블록(New Kids on the Block)공연 때는 사상자가 발생 불상사까지 빚어졌다.

오빠부대의 원조 클리프 리처드는 2003년 다시 한국을 찾았다.

 

공연장인 잠실체육관에는 이미 반백이 된 여성 팬들이 몰려와 옛날처럼 환호하고 노래를 따라 불렀다.

34년 만에 재공연을 하게 된 리처드도 "시간은 막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할 수만 있다면 이 자리에 모인 여러분과 지난 시절로 돌아가고 싶네요.

 

저와 여러분의 추억여행을 시작해 봅시다."며 정성을 다해 애창곡들을 불러냈다.

 잠실벌에는 그와 50대 여성 팬들이 함께 부른 'Evergreen tree'가 울려 퍼졌다.
 

 

 

 

 

 

 

 

 

 
 

 















 






 
 

 




Dive



Timeless



DIVA - The Singles Collection



Love Changes Everyth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