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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DERNISM 음악

Argentine -Tango, Carlos Gardel - Por una cabeza

 

 

 

 

 

 

Carlos Gardel - Por una cabeza (간발의 차이로)

 

 

 

 

어둡고 무거운 음색을 지닌 반도네온(Bandoneon)이 이끄는 강렬한 악센트의 음악, 열정적인 눈빛을 마주한 채 엮어

가는 탕게로스(Tangueros: 탱고 춤을 추는 사람)의 관능적인 춤.

 

 전문적인 공연을 보지 못했더라도 여러 영화를 통해 확인할 수 있었던 이 장면은 아르헨티나를 대표하는 춤이자 음악인

 탱고(Tango: ‘땅고’가 정확한 발음이지만 세계적으로 일반화되어 있는 발음대로 ‘탱고’로 표기함)의 무대 모습이다.

 찌든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었던 항구도시 이민자들이 그 격정적인 감정을 춤과 음악으로 분출했던 탱고는 스페인의

 플라멩코와 함께 가장 인상적인 예술로 손꼽힌다.

 

특히 그 춤이 보여주는 유일무이한 매력으로 인해 ‘네 다리 사이의 예술’로 불리기도 한다.

 지난 세기의 초엽, 화려한 전성기를 구가했던 탱고는 현재 ‘춤추기 위한 음악’으로서 뿐만 아니라 ‘감상을 위한 음악’으로

발전해 다양한 장르의 중요한 음악적 소재로 사용되는 ‘세계의 음악’이 되어 있다. 태생적으로 지닌 격정적인 감성과 강

렬한 리듬으로 인해 ‘치명적인 유혹’이라는 표현이 쓰일 정도로 듣는 사람을 사로잡는 탱고, 그 거부하기 힘든 매력의

 세계는 장르를 뛰어넘어 다양한 취향의 음악 애호가들을 유혹해왔다.

항구의 어두운 그림자 속에서 태어난 탱고

아르헨티나를 여행하는 사람들이 꼭 찾는 예쁜 거리가 있다. 항구 지역인 보카(Boca)의 카미니토(Caminito)라는

 이름의 거리다.

 ‘작은 거리’, ‘골목길’이라는 의미를 지닌 이름답게 150미터 정도밖에 되지 않는 거리지만, 탱고를 비롯한 이 항구도시의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는 박물관 같은 곳이다. 기차가 다니던 길이었다가 철도 선로가 폐쇄되면서 버려진 길이었지만,

지금은 파스텔 톤의 알록달록한 색을 칠한 작은 건물들이 늘어서 있는 유명한 관광지로 변모해 있다. 무엇보다 인상적인

 것은 화사하고 밝은 분위기를 지닌 거리 곳곳에서 연주와 춤이 함께 하는 탱고를 눈앞에서 볼 수 있다는 점이다.

탱고가 태어난 곳으로 알려져 있기도 한 카미니토의 과거와 현재는 탱고의 역사와도 닮아 있다.

 

 

탱고는 아르헨티나의 음악이라기보다는 부에노스아이레스(Buenos Aires)라는 도시의 것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파고들면,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보카’라는 지역이 탱고가 태어난 곳이라고 보는 견해가 일반적이다.

부에노스아이레스는 1880년 아르헨티나의 수도가 되어 1930년대까지 급속한 팽창을 이루며 ‘남미의 파리’로 불릴 만큼

유럽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았다.

 

 또한 1차 세계대전까지 유럽으로부터 엄청난 수의 이민자들이 몰려와 1920년대에는 부에노스아이레스 시민의 70%

이상이 유럽 이민자들과 그 자손이었다고 한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 속에서 공업지구와 접해있던 지저분한 항구 지역 보카에는 이탈리아 출신이 주를 이루는 극빈층

이민자들이 모여 살았다. 이들은 주로 항구의 노동자였고, 돌아갈 수 없는 고향에 대한 향수를 가슴 깊이 품고 있었다.

여러 가지 음악적 배경 속에서 만들어진 탱고는 벗어나기 힘든 가난과 체념에 빠져 살았던 이들 하층민의 정서를

 담아내기 시작했다.

 탱고가 지닌 강한 호소력은 향수와 고독에 찌든 항구 지역 하층민들의 격정적인 감정에서 비롯되었고 할 수 있다.

음악적으로 탱고의 모체가 되는 것은 19세기 초 쿠바에서 유행했던

‘아바네라(Habanera)’라는 음악이다.

 우아한 춤곡인 아바네라는 19세기 중엽 쿠바를 드나들던 선원들에 의해

 부에노스아이레스로 전해졌고, 강한 템포감과 아르헨티나풍의 선율이 실린

민요 형식의 춤곡인 ‘밀롱가(Milonga: 다른 의미로 탱고 춤을 추는 장소를

 가리키는 말이기도 함)’와 만나게 된다.

 

여기에 아프리카에 기원을 둔 ‘칸돔베(Candombe)’라는 음악이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칸돔베는 독특한 싱커페이션

을 지닌 댄스 리듬으로 우루과이로 건너갔던 아프리카 흑인들이 타악기를 동반한 춤과 음악으로 발전시켜 우루과이의

 중요한 전통문화 중 하나로 정착된 것이다.

우루과이 화가 페드로 피가리(Pedro Figari)의 작품 <칸돔베(Candombe)>.

 

칸돔베는 부에노스아이레스를 비롯한 아르헨티나에서도 축제 음악으로 성행

했으며, 19세기 후반 아바네라와 밀롱가의 만남에 칸돔베의 리듬적인

요소까지 더해지면서 탱고의 독특한 음악 스타일이 만들어 졌다.

 또한 당시 부에노스아이레스에 들어와 있던 유럽 무곡의 크고 작은 영향도

분명히 받았을 것이다.

유럽에 전해져 가장 큰 인기를 얻었던 남미의 문화로 탱고를 손꼽을 수 있다.

카미니토 거리의 탱고 댄서.

유럽으로 건너 간 탱고는 ‘콘티넨탈 탱고(Continental Tango)’라는

이름으로 프랑스를 비롯한 여러 나라의 상류층에서 무도회용 댄스로 각광을

 받았다.

 탱고가 지닌 우울하고 격렬한 감성보다는 화려하고 귀족적인 분위기로 변한 콘티넨탈 탱고는 세련된 춤곡으로서의

 형태를 갖추었는데, 이것이 역으로 아르헨티나 탱고에 영향을 주기도 했다.

이처럼 탱고는 라틴 아메리카의 민속적인 음악 요소와 아프리카의 리듬적인 요소, 그리고 유럽의 춤곡으로부터 받은

영향이 섞여 있는 복합적인 음악이다.

 

이는 부에노스아이레스가 지닌 역사와 당시 이곳에 들어왔던 다양한 문화적 배경과도 무관하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탱고의 무엇보다 중요한 요소는 그 안에 내재되어 있는 부에노스아이레스라는 항구도시가 지닌 특별한 분위기다.

가난한 이민자들의 향수와 라틴의 기질이 만나 표출된 우울한 고독감과 격정적인 감성이야말로 춤과 함께 표현되어 온

 탱고라는 예술이 지닌 가장 근본적인 정서인 것이다.

 

 

탱고의 꽃 반도네온

탱고의 꽃은 보는 이의 눈을 자극하는 춤이라 할 수 있다. 탕게로(Tanguero: 탱고 춤을 추는 남자)와 탕게라

(Tanguera: 탱고 춤을 추는 여자)가 바닥에 그림을 그려나가듯 움직이며 격정적으로 인생을 표현하는 이 춤 속엔

 절도 있는 형식미와 함께 본능적인 에너지가 꿈틀거리는 관능미가 공존한다.

 

그 시작은 향수와 고독이라 할 수 있다. 탱고 춤은 보카 지역 항구의 노동자들이 고된 하루의 피로를 풀며 술을 마시다

 고향에 대한 그리움과 삶의 회한을 풀기 위해 음악에 맞춰 춤을 추면서 시작되었다고 전해진다.

 항구의 남자들이 거리의 여인들을 유혹하기 위한 수단으로 시작해 유행한 춤이라는 이야기도 있지만, 어쨌든 처음에는

남자들끼리 추었던 춤이라고 한다.

한편, 독특한 악센트와 함께 부에노스아이레스 서민들의 고독과 우울을 담아 온 음악은 반도네온(Bandoneon)이라는

 악기가 있었기에 탱고 고유의 정서를 채색할 수 있었다.

아르헨티나 탱고의 황금기를 구가했던 시절 탱고 단체의 리더로 활약했던 많은 명인들이 반도네온 주자였고,

 ‘New Tango’의 시대를 열어 탱고를 예술의 경지에 올려놓은 피아졸라 역시 뛰어난 반도네온 연주자였다. 다른 장르의

음악에 거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지만, 탱고를 탱고답게 만드는 ‘탱고의 꽃’이라 할 만한 악기가 바로 반도네온이다.

 

 

탱고의 꽃 반도네온

 

초창기의 탱고는 악기 편성에 있어 정해진 형태를 취하고 있지 않았다. 기타와 플루트, 바이올린, 클라리넷 등으로

연주되며 구조적으로 안정된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피아노가 합류하고 반도네온이 등장하면서 음악적으로 완성된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다. 탱고 연주의 전형적인 편성은

반도네온 두 대, 바이올린 두 대, 피아노 한 대, 베이스 한 대의 6인 편성이 표준적이다. 여기에 반도네온과 바이올린

연주자가 줄거나 늘면서 변화를 주기도 하고, 규모가 커질수록 각 악기의 숫자가 늘어나고 다른 악기가 추가되기도 된다.

흔히 아코디언과 비교되는 반도네온은 독일에서 아르헨티나로 건너온 악기이다.

1850년경 하인리히 반(Heinrich Band)라는 사람이 아코디언과 콘체르티나(Concertina)의 원리와 특징을 이용해

 만들어 자신의 이름과아코디언을 섞어 반도니온(bandonion)이라 이름을 붙였고, 19세기 후반 선원들과 이민자들에

의해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전해져 반도네온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탱고와 역사적인 만남을 가졌던 것이다.

 

그리고 1910년경부터 탱고의 대표적인 악기로 떠오르면서 한 세기를 지나는 오늘날까지 탱고와 그 운명을 함께해

 오고 있다.

아코디언과 늘 비교되기도 하는 반도네온은 겉모양에서부터 연주 방법까지 완전히 다르다.

가운데 주름 부분을 열고 닫으면서 연주하는 방식은 같지만, 반도네온에는 양쪽의 사각형 상자에 단추들이 달려 있다.

 건반으로 선율을 연주하고 단추들을 이용해 화음을 내는 아코디언과는 연주 방식이 확연하게 틀리다. 반도네온의 단추

들은 모두 각각의 단음을 소리 내게 만들어져 있는데, 양쪽 상자에 3, 40개 가량씩 자리 잡고 있는 각 단추들은 보통의

건반악기들처럼 음계의 높낮이에 따라 순차적으로 배열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때문에 연주의 난이도는 아코디언과는 비교하기 힘들 만큼 어려운 것이다. 한편 감상자의 입장에서 본다면 반도네온이라

는 악기의 가장 큰 특징은 그 음색일 것이다.

아코디언과 비교하자면 음의 밀도가 대단히 높아 무겁고 어두운 색조를 지니고 있는데, 이것이 바로 탱고 음악의 특징

 자체를 나타내는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 할 수 있다.

 

 

 

반도네온이라는 악기는 탱고 연주자들에게는 말할 것도 없고 감상자들에게도 특별한 영감을 전한다. 또한 그 어떤

 악기도 흉내 낼 수 없는 반도네온의 음색과 표정은 탱고 음악이 춤추기 위한 음악에서 감상을 위한 예술적인 음악으로

 변화해 오는 과정 속에서 변함없이 감상자들을 매료시켜 온 가장 중요한 요소이기도 하다.

 피아졸라의 음악이 전통적인 아르헨티나 탱고와 많은 부분에서 차이가 나지만, 그의 음악 속에서도 부에노스아이레스라

는 도시가 지닌 우울한 서정을 느낄 수 있는 것은 반도네온이 여전히 음악적인 중심에 위치해 있기 때문일 것이다.

 탱고의 꽃으로 불리며 탱고와 그 운명을 같이 해 온 반도네온. 태생적으로 지니고 있는 탱고의 격정적인 비애감을

이처럼 강렬하게 표현해 낼 수 있는 악기는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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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r una cabeza' from the movie "Scent of a Woman" (영화 <여인의 향기> 탱고 장면)

 

 

탱고의 황제 카를로스 가르델

명배우 알 파치노가 노년의 원숙한 매력을 선보였던 영화 <여인의 향기(Scent of a Woman)>에서 탱고 춤을 추는

장면의 배경으로 등장해 유명해졌던 ‘Por una cabeza’라는 탱고 명곡이 있다.

 ‘머리 하나 차이로’라는 뜻의 이 제목은 국내에서는 흔히 ‘간발의 차이로’라고 번안되기도 한다.

 

원곡은 가사가 있는 노래다.

낭만적인 아름다움이 담긴 선율과는 달리 경마장에서 자신의 돈을 몽땅 건 말이 그야말 머리 하나 차이로 지는 장면을

보며 사랑의 거짓을 깨닫는 내용을 담고 있다.

수많은 탱고 음악가들이 연주해 온 이 곡은 탱고의 황제로 불리는 카를로스 가르델(Carlos Gardel)이 직접 작곡해서

불렀던 곡이다.

또한 1935년 영화 <탱고 바(Tango Bar)>에서 자신이 주연을 맡으며 노래하기도 했다.

 

 

 

왼족] 탱고의 황제 카를로스 가르델(Carlos Gardel) [오른쪽] 카를로스 가르델의 무덤에 헌화하는 사람들

 

 

 

아르헨티나 사람들이 가장 사랑하는 세 명의 인물이 있다.

에비타라는 애칭으로 더 잘 알려진 에바 페론과 축구 영웅 디에고 마라도나, 그리고 또 한 사람이 바로 탱고의 황제

카를로스 가르델이다.

프랑스 태생인 그는 네 살 때 어머니와 함께 부에노스아이레스로 이주해 왔다. 가난한 환경 때문에 어릴 때부터 갖가지

 직업을 전전했고, 한 극장에서 막을 올리고 내리는 일을 하면서 열렬한 오페라 팬이 된 그는 가수의 꿈을 키워 나갔다.

그리고 그가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한 1917년 이후 탱고의 역사는 커다란 전환기를 맞게 된다.

 

카를로스 가르델은 탱고의 새로운 형식인 노래하는 탱고, 즉 ‘탕고 칸시온(Tango Cancion)’의 시대를 열어 나갔다.

탱고라는 음악 속에 담긴 통속적인 감성과 우울함을 가사가 있는 노래를 통해 좀 더 직접적이고 감상적으로 표현했던

 것이다.

타고난 미성과 수려한 외모가 성공의 발판이 되긴 했지만 자신의 노래와 작곡 기법을 향상시키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가수였던 그는 1935년 갑작스러운 비행기 사고로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수백 곡의 주옥같은 명곡들을 남겼다.

 ‘Por una Cabeza(간발의 차이로)’, ‘El Dia que Me Quieras(당신이 나를 사랑하게 되는 날)’, ‘Mi Buenos Aires

 Querido(내 사랑하는 부에노스아이레스)’, ‘Volver(돌아가네)’, ‘Adios Muchachos(안녕 소년들이여)’ 등은

 지금도 많은 탱고 뮤지션들이 녹음하고 있다.

 

가수로서뿐만 아니라 영화배우로서도 많은 활약을 했던 그는 성공의 정점에서 짧은 생을 마감했지만 지금도 무덤에는

날마다 새 꽃다발이 놓일 정도로 아르헨티나 사람들의 변함없는 사랑을 받고 있다.

탱고의 첫 번째 거장으로 기억되고 있는 카를로스 가르델의 음악은 탱고의 전성기를 이끌어 내었다고 할 수 있다.

 정통 아르헨티나 탱고의 고유한 분위기를 확립했던 그의 활약은 항구의 빈민층을 위한 음악이었던 탱고를 아르헨티나를

대표하는 대중적인 음악으로 만들어 놓았다.

또한 그가 세상을 떠난 뒤 탱고는 춤곡으로서의 성격을 강하게 지니면서 발전해 나갔고, 프란시스코 카나로

(Francisco Canaro), 후안 다리엔소(Juan d'Arienzo), 엑토르 바렐라(Héctor Varela), 아니발 트로일로

(Anibal Troilo), 플로린도 사소네(Florindo Sassone) 등 탱고 밴드의 리더로 한 시대를 풍미했던 뛰어난 인물들이

 탱고의 황금기를 엮어 갔다.

 

한편 노래로 표현하는 탱고 음악 탕고 칸시온은 뛰어난 가수들을 배출하며 지금도 탱고의 가장 사랑 받는 일부분으로

 발전해 가고 있다.

특히 풍부한 표현력을 지닌 여성 가수들이 많은 사랑을 받았다. 카를로스 가르델이 세상을 떠나던 해 태어나 탱고 가수로

서 국제적인 인정을 받았던 수산나 리날디(Susana Rinaldi)는 2000년대에 들어서서도 노익장을 과시한 바 있고,

그 다음 세대의 대표주자로 아드리아나 바렐라(Adriana Varela), 리디아 보르다(Lidia Borda) 등이 최고의 탱고

보컬리스트로 인정받고 있다.

 

 

[왼쪽] 아니발 트로일로 [오른쪽] 아드리아나바렐라 

 

 

 

Astor Piazzolla - Adios Noniño

 

탱고의 새로운 시대를 연 피아졸라

 

탱고의 시작을 정확한 연도로 말하기는 어렵지만, 19세기 말경으로 본다면 이제 그 역사도 한 세기를 훌쩍

 뛰어넘고 있다.

그 세월 속에서 카를로스 가르델을 비롯한 많은 거장들이 아르헨티나 탱고의 황금기를 이끌었으며, 군사정권이 들어서

탱고 뮤지션들도 침묵할 수밖에 없었던 암흑기를 겪기도 했다.

항구의 빈민가에서 시작된 탱고가 세월의 격동 속에서 상류층과 지식층으로 퍼져 나가며 유럽을 비롯한 전 세계를

 매료시켰고, 지금은 장르의 벽을 뛰어 넘어 클래식과 재즈에서도 의미 있는 소재로 사용되며 사랑받고 있다.

 

 그 세월의 중심에 탱고 역사의 가장 많은 페이지를 장식하고 있는 아스토르 피아졸라(Astor Piazzolla)가 자리한다.

뛰어난 반도네온 연주자이자 혁신적인 작곡가였던 피아졸라는 탱고를 더 이상 춤을 위한 음악이 아닌 감상을 위한

음악으로 바꾸어 놓았다.

클래식과 재즈, 그리고 전위적인 요소들까지 도입해 탱고의 역사를 바꾼 일대 혁명을 일으킨 것이다.

그는 탱고를 예술적 경지로 끌어올린 장본인이자 20세기 최고의 작곡가 중 한 사람으로 손꼽힌다.

 

 

반도네온을 연주하는 아스토르 피아졸라(Astor Piazzolla).

 

1921년생인 피아졸라는 세 살 때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이주해 뉴욕의 뒷골목에서 거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처음 반도네온을 잡은 것은 여덟 살 때였다.

피아졸라가 태어나기 전날 만삭의 어머니를 이끌고 탱고 공연을 보러 갈 정도로 열렬한 탱고 팬이었던 아버지가 준 생일

선물이었다.

훗날 아들이 최고의 반도네온 연주자가 되길 바랐던 아버지의 소망은 이루어졌고, 피아졸라는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을 때

‘Adios Noniño(안녕 노니뇨)’라는 명곡을 헌정하기도 했다.

 어린 시절부터 라디오 연주회에서 반도네온을 연주했던 피아졸라는 카를로스 가르델의 마지막 영화에 출연하면서

탱고의 황제와 특별한 인연을 맺기도 하며 탱고라는 이름의 운명에 좀 더 가까이 다가서게 된다. 거장 아니발 트로일로의

밴드에서 반도네온 솔리스트로 활동을 시작하며 클래식 작곡 공부를 하던 그는 한 작곡 경연 대회에서 1등을 하면서

파리 음악원으로 유학을 가게 된다.

이곳에서 피아졸라는 자신의 인생에 결정적인 방향을 제시해 준 나디아 블랑제(Nadia Boulanger)를 만나게 된다.

뛰어난 지휘자이자 음악교사였던 나디아 블랑제는 피아졸라의 재능과 개성을 탱고로 향하게 했다.

 

1955년 부에노스아이레스로 돌아온 그는 자신의 밴드를 결성하고 작곡과 연주에 매진하게 되는데, 전통적인 탱고에

클래식과 재즈의 기법을 도입한 그의 음악은 완전히 새로운 것이었다.

스스로 자신의 음악을 ‘누에보 탕고(Nuevo Tango)’, 즉 ‘새로운 탱고’라고 말했다. 전통적인 탱고 리듬을 사용하지

 않는 그의 음악은 춤추기에 적합한 음악이 아니었다.

때문에 당시의 순수한 탱고 애호가들에게 심한 반발을 사기도 했지만, 아르헨티나 탱고 음악계에 일대 변혁을 일으키며

젊은 세대의 환호를 받았다.

이후 ‘Libertango(리베르탕고)’, ‘Oblivion(망각)’, ‘Vuelvo al Sur(남쪽으로 돌아와요)’, ‘Milonga del Angel

(천사의 밀롱가)’, ‘Buenos Aires Hora Cero(0시의 부에노스아이레스)’, ‘Michelangelo(미켈란젤로)’, ‘Las 4 Esta

ciones Porteñas(부에노스아이레스의 사계)’ 등 숱한 명곡들로 유럽을 비롯한 전 세계 청중들을 매료시키다

1992년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생을 마감했다.

피아졸라의 음악은 새로운 기법에 의한 것이었지만, 어느 작곡가의 음악 못지않게 탱고 본연의 정서를 끌어안고 있었다.

피아졸라 본인도 말했듯이 그의 음악 속에는 부에노스아이레스라는 도시가 지닌 특별한 분위기가 자리하고 있다.

그것은 탱고가 태생적으로 지녔던 고독하고도 우수에 찬 감성이다.

그리고 그 위에 더해진 새로운 음악적 시도가 탱고에 새로운 생명력을 불어 넣었던 것이다. 탱고에 차원 높은 예술성을

부여한 피아졸라의 음악은 다른 장르의 음악에도 깊은 영감을 주었다.

 기돈 크레머(Gidon Kremer), 요요 마(Yo-Yo Ma) 등 많은 클래식 아티스트들이 그의 음악에 경의를 표하며 리코딩을

남겨 왔고, 재즈에서도 중요한 소재로 사용되고 있다.

피아졸라의 음악은 분명 부에노스아이레스의 감성을 통해 만들어진 것이지만, 더 이상 아르헨티나의 것으로만 구속할 수

없는 열린 음악으로서의 힘을 동시에 지니고 있는 것이다.

 

부에노스아이레스 도시 전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