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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P SONG & ROCK

Nana Mouskouri -White Rose of Athe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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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Nana Mouskouri - White Rose of Athens

 

 

 

 

 

 

 

 

 

 

 

White Rose of Athens

(아테네)하얀 장미

 

 

Till the white rose blooms again  
하얀 장미가 다시 필때까지 
 You must leave Till me, leave me lonely  
당신은 나를 떠나야 해요, 외로운 나를 떠나가요 
 
So good bye my love till then  
그그래서 그 때까지 나의 사랑 안녕 
 Till the white rose blooms again  
하얀 장미가 다시 필때까지 
 
The summer days are ending in the valley  
어느 여름 계곡에서 끝났어요
 And soon the time will come and we must be apart  
그리고 곧 우리가 헤어져야 할 때가 오겠지요 
 
But the like the rose comes back with the spring time  
하지만 장미같이 봄 철에 함께 돌아 올거예요
  You're weary time to me when spring time comes around  
당신이 나에게 싫증난 봄철에 다시 이 곳에 올거예요 
 
Till the white rose blooms again  
하얀 장미가 다시 필 때까지 
 You must leave me, leave me lonely 
당신은 나를 떠나야해요, 외로운 나를 떠나가요 
 
So good bye my love till then  
그래서 나의 사랑 그 때까지 안녕 
 Till the white rose blooms again  
하얀 장미가 다시 필 때까지
 
Till the white rose blooms again  
하얀 장미가 다시 필 때까지 
 You must leave me, leave me lonely  
당신은 나를 떠나야 해요, 외로운 나를 떠나가요

 

So good bye my love till then  
그러하여 그 때까지 나의 사랑 안녕
  Till the white rose blooms again  
하얀장미가 다시 필 때까지
 
Good bye till then  
그 때까지 안녕 

good bye till then  
그 때까지 안녕 
 
good bye till then  
그 때까지 안녕 

 

 

 

 

 

 

 

 

 

 

 

 

Nana Mouskouri 

 

 

 

나나 무스쿠리(그리스어: Nανά Μούσκουρη 본명: 이오안나 무스쿠리 1934년 10월 13일 ~ )는 그리스의 가수이다.

약 3억장이라는 놀랄만한 음반판매기록을 갖고 있는 가수다.

그리스 가수이나 그리스어 뿐만 아니라 영어, 불어, 스페인어, 이탈리아어, 독일어, 라틴어, 포르투갈어로도 음반을

취입하기도 했고 프랑스에서는 역대 최대 앨범 판매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검은 뿔테 안경을 즐겨 끼고 다니는 나나는 그 청초한 이미지 때문에 젊은 아가씨로 착각하는 사람이 많지만 그녀가

금년에 82세의 노가수다. 그녀의 노래를 듣노라면 어떻게 이세상 사람이 저런 아름다운 목소리로 노래를 부를 수 있을까하고 의아하게 생각할 정도 이다. 

 

 천상에서나 들을 수 있을 법한 청아한 목소리에 한두번 놀랜게 아니다.  거기에다  그녀의 노랫말 발음은 거의 완벽에

가까울 정도로 정확해서 동서양을 막론하고 듣기가 매우 편안하다는 특징이 있다. 

 그녀는 고생을 한번도 하지 않은 사람으로 알고 있지만  그녀가 시골에서 아테네에 올라와서 오페라 가수가 되기 위하여   아테네로 와서 공부하던 도중에 문제가 발생하다.

 

 졸업을 얼마 앞두고 친구의 권유로 카페에서 당시 미국에서 유행하는 째즈를 불러 준적이 있다. 이것이 담당교수에게

 발각되어 시험을 치룰 수 없게 되고 수업을 계속 받을 수 없게 된다.

 

  그러나 나나에게는 이것이 전화위복이 되는 계기가 된다.  오페라 가수의 꿈을 접고  다양한 노래를 부르게 되는데

10여개국의 노래를 섭렵하기도 하면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독보적인 가수가 된다.

 어떤 노래든 그녀가 노래를 부르면 그노래의 새로운 기원이 탄생한다고 까지 극찬하는 이도 있다.   

 

 

 

 

 

 

 

 

 

 

제가 팝송을 좋아하는지라 좋아하는 가수는 수도 없이 많지만 그중에서도 특히 좋아하는 가수를 뽑으라면 3명을

뽑을 수 있다.
첫째가 나나 무스꾸리, 둘째가 셀린 디옹, 세째가 바브라 스트라이잰드 입니다. 호불호는 본인 취향이니 누구를 더

 좋아한다거나 하는 것은 별의미가 없겠으나 나나무스꾸리의 음악을 듣다보면 천상의 목소리로 착각에 빠져드는 때가 종종 있다.


 

나나 무스꾸리는 저뿐만 아니라 세계인들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기 때문에 부연설명이 필요 없을 것이나 그녀가

음악원을 졸업할 단계에서 음악원을 졸업할 수 없게 되어 실의에 빠져 있었던 때가 있었다.
이번 알파고의 바둑 두는 것을 보고 왜 나나 무스꾸리가 생각이 났는지 모르나 아마도 우리가 불행을 당했을 때

그 불행이 한단계 도약할 수 있는 계기도 된다는 것을 연상하면서 나나무스꾸리와 이세돌을 연결지었던 것 같다.

 

물론 끊임없이 자기 개발에 노력을 해야 하는것은 기본적인 일이지만 비록 실패하더라도 너무 실의에 빠지지않기를

바라는 바램이 있을것이다.
분명 우리가 나이를 먹는 것, 이것이 축복일 수 없지만 반면 좋은 점도 분명 어디엔가 있다는것.

병에 걸린것을 축하할 일은 아니지만 분명 병을 얻고 치료를 하는 과정에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고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스 태생인 나나 무스꾸리는 어릴적 부터 음악 공부를 해왔고 오페라 가수가 꿈이었다.

검은 뿔테 안경과 긴 생머리가 트레이드 마크인 그녀는 아테네의 음학원 졸업을 얼마 남기지 않을 때 포크, 재즈, 록큰롤 등 그당시 유행하던 음악에 심취하였고 친구 권유로 시내 카페에서 자기가 좋아하는 노래를 불렀다.


 

그런데 당시 음학원 규정에는 사사로히 업소에서 클라식이 아닌 음악을 부르지 못하게 규정되어 있었는데 담당교수가

 이를 어겼다하여 졸업시험을 치루지 못하게 하여 졸업을 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런데 인생역전의 찬스는 바로 나나무스꾸리가 매우 곤경에 빠져 있을 때 나타난다.


 

나나무스꾸리가 노래를 부르던 카페에서 차를 마시러 들르던 유명한 그리스 작곡가가 그녀를 눈여겨 보왔는데 이런 소식을 들었는지 그녀에게 곡을 주고 음반을 취입하게 도와준다.


이 때부터 나나무스꾸리 인생은 탄탄대로를 달리게 됩니다.

유럽 송테스트 대회에서 그랑프리를 받고, 그녀는 1960년 독일에서 "하얀 손수건"등 싱글을 발표하고 120만장의

 판매고를 올리고, 64년 세계적인 대스타 해리 벨라폰테의 초청으로 미국 카네기 홀에서 첫 공연을 가진 그녀는

 그후 세계적인 주목을 받게 된다.

 

80년대에 들어서도 꾸준히 음악활동을 해오면서 "배트 미들러" "케니 로저스" 곡을 나름대로 리메이크 하여 오히려

원곡 보다 더많은 사랑을 받았다


 

 청순한 이미지로 많은 팬들이 생기고 포크, 가스펠, 샹송에서 확고한 자리를 차지한 여가수 이기에
그동안 그녀가 발표한 노래는 약 1,500곡, 발매된 음반만 약 450장, 판매된 음반은 3억장에 넘는다 한다.

  그중 골드앨범(판매 50만장 이상)과 플래티늄앨범(100만장 이상 판매)도 3백여장 이였다 한다. 

 

 그녀는 모든 장르의 곡들을 다 소화해 낸 매우 특별한 가수였고, 그리스 출생이지만, 영어 뿐만 아니라, 불어, 스페인어, 이탈리어, 독일어, 라틴어, 포르투갈어로도 음반을 취입하기도 했고, 프랑스에서는 역대 최대 앨범 판매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한다.


그녀의 곡 중 "하얀 손수건 (Me T'aspro Mou Mantili)를 국내에서 "트윈폴리오 (송창식, 윤형주)가  이 곡을 번안해

불러 70년 당시 크게 인기를 끌었고 "사랑의기쁨(Plaisir D'amour)"이란 노래도 우리에게 많은 사랑을 받는 곡,

 "아테네의 흰장미", "지중해의 요정" 또는 "20세기 뮤즈" 라는 최상의 수식어가 붙는 그녀의 노래는 70~80년대

암울한 시절, 국내 팝 애호가에 오아시스와 같았다.


 

"나나 무스쿠리"는 2008년에 50년의 음악인생을 마무리하였고, 전 세계를 돌며 은퇴 공연을 하던 그녀는  국내에서도 고별 무대를 펼쳐,공연수익금에서 1만달러를 원유 유출 사고를 당한 태안주민들에게 기부, 그후 유럽 국회의원

(1994-1999)과 유니세프(UNCEF) 친선대사로 활동 했다

 

퍼온글

 

 

 

 

 

 

 

 

 

노래하는 지중해의 요정,푸르른 초원에 은은하게 불어오는 바람을 연상시키는 음악의 여신 Nana Mouskouri,

본명은 Ioanna Mouskouri (이오안나 무스꾸리)로 1934년 10월 13일 그리스 아테네에서 출생입니다.
흰 장미의 은은한 향기, 검은 테의 안경을 걸친 그녀의 모습이란 그야말로 갈 데 없는 여학생. 청순하고 이지적인

품위를 보이고 있지만 결코 빼어난 미모라고 말하긴 어려운 용모입니다.


그러나 그 독특한 마스크와 가냘픈 몸매와 그것들에게서 풍겨 나오는 분위기가 목소리와 조화될 때, 아무도 그녀를 가리켜 결코 평범한 여가수라고 부를 수 없게 됩니다.
나나 무스꾸리.


마치 푸르른 초원에 은은하게 불어오는 바람결을 연상시킬 만큼 신선하다.

그녀의 그 이미지와, 그리고 우리들과 30년 가까운 세월 동안 친숙해 온 '하얀 손수건' '여름의 마지막 장미' '아테네의 흰 장미'를 들으면서 그녀가 어느새 83세나 되었다고 생각하는 팬은 아마 없을 것입니다.


그만큼 나나 무스꾸리의 이미지는 소박하고 청순해서 세속과는 저멀리 떨어진 존재처럼 느껴지는데 그런 의미에서 나나 무스쿠리와 같은 가수는 목소리의 아름다운 추억만을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는 것이 좋을 뿐, 세월의 흔적을

얼굴에 아로새긴 현실의 모습 따위는 생각하지 않는 편이 좋지 않을까요?


그녀는 분명히 금세기 최고의 가수 중의 한 사람입니다.
나나 무스꾸리는 그리스 아테네의 어느 작은 영화관에 근무하던 영사기사의 딸로 1934년 10월 13일에 태어났다. 집안 형편은 넉넉치 못했지만, 조촐하고 평화로운 살림이었고 의좋은 가족이었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나는 음악 듣는 것을 가장 좋아했죠. 당시 나의 아버지는 영사 기사였기 때문에 우리는 영화관 뒤에

 있는 작은 아파트에서 살았습니다.

그런 까닭에 많은 영화를 볼 수 있었다.

그 영화관의 스크린 위에 펼쳐지는 영상은 그녀를 환상의 세계로 인도 하였을 것입니다.


특히 뮤지칼 영화에 나오는 노래들이 가장 좋았했고 집으로 들아와 본 영화의 주인공을 흥내내면서 마음껏 소리를

 높여서 노래를 부르고 가사를 외곤 했다고하네요.
어린 마음에도 그녀는 기어이 노래로 성공해 보겠다는 의지를 품었었던 것 같습니다.


나나 무스꾸리는 처음에는 오페라 가수를 지망하여 성악도로서의 재질을 드러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음악원의 졸업 시험을 눈앞에 둔 어느날, 그녀는 지금까지 한번도 경험하지 못한 신선한 음악에 넋을 잃고

끌려 들어가고 말았습니다.

그녀가 새로운 음악세계를 접했을 때를 후일 나나 무스꾸리는'갑자기 밝은 햇빛이 비친 듯 나의 음악 세계가

 눈부시게 밝아진 느낌이었다'고 술회한 적이 있습니다.
당연히 뮤지컬을 때려치우고 본격적으로 재즈라는 음악으로 접어들게 됩니다.


15세 되던 해, 매일같이 새벽 3시에 일어나 아버지가 손수 만들어 주신 라디오로 아테네 방송의 재즈 프로를

 듣는 것이 나의 첫 일과였습니다.

때문에 음악원의 공부시간에는 몰려드는 잠을 쫓느라고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었죠.

그러나 그녀는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대부분의 노래들을 노트에 적어가면서 노래 공부에 열중했습니다.
그녀는 정말 학교 공부는 젖혀 놓고 재즈에 미쳐 있었습니다.

빌리 홀리데이 듀크 엘링턴의 재즈는 나를 완전히 사로잡았습니다.


물론 죠니 미첼 ·죤 바이에즈의 포크송도 무척 즐겼고, 자크 브렐이나 조르지 브라상, 레오 페레 같은 샹송 가수들은 그녀의 우상이기도 했습니다.
결국 나나 무스꾸리의 남달리 적극적이고 민감한 예술적 감각은 그녀를 아테네 음악원의 이단아로 만들고, 졸업을

불과 몇 달 앞두고 학교를 그만두게 되는 상황을 낳게 합니다.


학생의 신분으로 대중가수에 뜻을 두고, 아테네 라디오방송국에서 소편성의 밴드가 반주하는 유행가를 노래한

 사실이 물의를 일으켜 규율이 엄격한 음악원 측에서는 그녀의 졸업시험 응시자격을 박탈한 것입니다.
흔히 '오페라의 여신'이라고 불리는 마리아 칼라스도 아테네 음악원에서 로시니의 오페라로 널리 알려진 스페인의

명가수히달고에게 사사한 경력을 갖고 있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나나 무스꾸리의 퇴학은 어쩌면 마리아 칼라스를 이을 인재를 잃은 반면, 유로 팝스의 역사상 불후의 위대한 스타를 탄생시킨 전화위복의 결과를 낳은 것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이때부터 수년간 나나 무스꾸리에겐 기약 없는 무명의 나이트 클럽 가수 시대가 계속됩니다.

 

 이 고달프고 기나긴 슬럼프에서 그녀를 구해낸 사람이, 그녀의 평생의 은인이며 친구가 된 위대한 작곡가 마노스

 하지다키스였습니다.
마노스 하지다키스는 영화 '페드라' '희랍인 조르바'의 작곡가 미키스 테오도라키스와 더불어 현대 그리스 음악계의 최대의 거인으로 손꼽히는 작곡가로, 1960년 영화 '일요일은 참으세요 Never on Sunday'의 음악으로 아카데미

작곡상을 수상한 최초의 외국인이었다.


1959년, 마노스 하지다키스는 아테네의 한 작은 나이트 클럽에서 노래부르고 있는 이 가냘픈 몸매의 무명가수

나나 무스꾸리를 발견하고 그녀의 대성할 자질을 발견하였던 것이다.

마노스하지다키스 같은 대작곡가의 작품으로 그 경력을 쌓을 수 있었다는 점에서, 나나 무스꾸리는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한 가수였습니다.


그녀는 1960년 9월 스페인의 바르셀로나에서 열린 '지중해 가요제'에 그리스 대표로 출전하여 우승의 그랑프리를 획득, 새로운 스타로 탄생하여 크게 주목받기 시작했습니다.


이때 그녀가 부른 곡이 마노스 하지다키스 작곡의 '아테네의 흰 장미'였고 그녀의 인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곡입니다.
나나 무스꾸리를 놓고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또 한 사람이 있는데 프랑스 '필립스 레코드'의 디렉터 루이

아장입니다. 그는 나나 무스쿠리의 매력을 발굴하여 대스타로 만드는 데 공헌한 인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그 당시를 루이 아장은 이렇게 말합니다.


영화 '일요일은 참으세요'의 공개 이후, 영화에서 부둣가 창부 역의 멜리나 메르쿠리가 흥얼거린 주제가의 인기는

파리를 뒤흔들 만큼 굉장한 것이었다.

사람들은 너도 나도 이 곡을 따라 불렀고, 독특한 울림을 전해 주는 그리스의 민속악기 부주키에 많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나는 그리스에서 전해 오는 음악 중에는 보다 색다른 그 무엇인가가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그리스의 레코드사에 연락해서 그곳 가수들의 샘플 레코드를 부탁해 직접 찾아내기로 결심했다.

며칠 뒤 산더미 같은 레코드가 그리스에서 도착했다.

그것들을 하나하나 듣는다는 것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많은 시간과 인내심을 요구하는 작업이었다.


게다가 멜로디가 꽤 아름다운 곡이 몇 곡인가 있었지만 전체적으로 단조롭기 그지없었기 때문에 시간이 흐르면서

 나는 점점 지루해졌다.

 그 순간이었다.

전에 전혀 들어 보지 못했던 새릅고 신선한 목소리가 스피커를 통해 들려 나오기 시작했다. 나는 넋을 잃고 어느새

그 아름다운 목소리에 도취되었다. 얼마나 맑고 투명한 목소리인가!


누구의 노래일까?

그리스 어를 약간 아는 내 처 오딜이 레코드를 듣고 가수의 이름을 읽었다. 나나 무스꾸리~~
그러나 그녀는 우리들에게 전혀 미지의 인물이었다.

 우리는 곧 바캉스를 취소하고 때마침 열리고 있는 에레니크 가요제에 참석하기 위해 아테네로 향했다.

 

나를 사로잡았던 그 목소리의 주인공미 무대에 나타나기를 얼마나 초조하게 기다렸던지 지금도 나는 그때 일을

잊지 못한다.

아름답고 자신에 찬 미녀가수들이 무대에 나타날 때마다 나나 무스꾸리가 아닌가 하며 가슴을 두근거렸으나,

번번이 나의 기대는 어긋났고 그럴수록 초조감은 더해갔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검은 드레스로 몸을 감싼 한 젊은 여성이 등장했다.

 

화장기 없는 깨끗한 얼굴에 코 위에는 안경을 걸친 그녀는 겨우 40킬로그램을 넘을 듯한 가냘픈 몸매를 한

 볼품없는 여성이었다.

설마 저 촌스런 아가씨가 나나 무스꾸리는 아닐 테지~~
그러나 그녀가 수줍은 듯한 몸가짐으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을 때 나는 드디어 만났던 것이다.

 나나 무스꾸리 를~~

 

 

 

 

 

 



나나 무스꾸리는 이때부터 유럽 전역에 알려지기 시작했고, 프랑스와 영국 ·독일로 연주여행을 해서 커다란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196l년 아테네에서 나나 무스꾸리를 만난 해리 벨라폰테는 3년후인 1964년 그녀를 미국에 초청했습니다.

넓은 미국 무대에의 데뷔는 나나 무스쿠리에게 있어서 하나의 꿈이었지만, 인종 분규가 절정에 이르렀던 미국사회의 분위기는 흑인 가수와 함께 무대에 서는 백인 여성을 결코 허락하지 않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백인들의 숱한 협박과 방해에도 불구하고 흑인 가수 해리 벨라폰테와 공연한 유일한 백인 여성으로, 카네기 홀을 비릇한 미국 각지의 대학 캠퍼스와 극장에서 연주회를 가져 대단한 환영과 절찬을 받았습니다.
그녀는 미국을 정복하였던 것입니다.

 

그 후 나나 무스꾸리는 계속해서 그 소녀와도 같은 가련함, 그러면서도 청순한 아름다움을 지닌 풍모와 섬세한

목소리를 과시하면서 숱한 히트송들을 발표해 왔습니다.

 디 로즈 Die Rose' '나부코 Nabuco' 등 FM 방송을 통해 수많은 사람들을 사로잡았던 그녀의 노래들은 모두

그 목소리의 아름다움과 깊이를 잊을 수 없는 주옥과 같은 히트 송들인 것입니다.


더구나 그녀는 다른 연예세계의 스타들처럼 화려한 스캔들과 이혼 경력이 전혀 없는 정숙한 현모양처로써 격을

높이고 있습니다.

하나의 여자로서 그리고 가수로서의 행복을 한몸에 모으고 있는 그녀는 '아테니안스 Athenians'의 리드 보컬이자 기타리스트인 남편 조르지 페실라스와의 사이에 세 딸을 두고 있습니다.


그동안 450여 장의 앨범을 발매, 350여 장을 골드앨범 또는 플래티넘 앨범에 등극시킨 나나 무스꾸리는 팝 역사상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음반을 판매한 여성가수로 기록(3억장이 넘는 경이적인 기록)되고 있습니다.

 

 


특히 그녀의 음악은 영화, 드라마의 러브 테마곡으로 사용되어 국내에서 수많은 팬들을 확보하고 있는것입니다,
1994~1999년까지는 유럽의회의 의원으로도 활동했고, 사전에도 나와있듯 쿠데타로 집권한 그리스 군사독재정권을 비판하여 추방되는 박해를 받기도 하였습니다.


1997년에는 가수 40년 기념 공연을 가졌으며, 2005년에서 2008년 사이에는 전 세계 곳곳을 순회하면서 인생

마지막 공연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한국을 사랑하여 두번씩이나 한국을 방문하여 공연을 한바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