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athalie Cardone-Hasta Siempre Comandante Che Guevara
Hasta Siempre Comandante Che Guevara
Original lyrics in Spanish
Aprendimos a quererte
desde la histórica altura
donde el Sol de tu bravura
le puso cerco a la muerte.
Chorus:
Aquí se queda la clara,
la entrañable transparencia,
de tu querida presencia,
Comandante Che Guevara.
Tu mano gloriosa y fuerte
sobre la Historia dispara
cuando todo Santa Clara
se despierta para verte.
[Chorus]
Vienes quemando la brisa
con soles de primavera
para plantar la bandera
con la luz de tu sonrisa.
[Chorus]
Tu amor revolucionario
te conduce a nueva empresa
donde esperan la firmeza
de tu brazo libertario.
[Chorus]
Seguiremos adelante,
como junto a tí seguimos,
y con Fidel te decimos :
Hasta siempre, Comandante
Translated in English
We learned to love you
from the historical heights
where the sun of your bravery
laid siege to death
Chorus:
Here lies the clear,
the dear transparency
of your beloved presence,
Commander Che Guevara
Your glorious and strong hand
over History it shoots
when all of Santa Clara
awakens to see you
[Chorus]
You come burning the breeze
with springtime suns
to plant the flag
with the light of your smile
[Chorus]
Your revolutionary love
leads you to new undertaking
where yearned is the firmness
of your liberating arm
[Chorus]
We will carry on
as we followed you then
and with Fidel we say to you:
Until forever, Commande
이 음악은 남미의 영웅, 쿠바혁명의 상징인 체 게바라를
추모하기위해 헌정된 그를 기리는 음악입니다.
나탈리 카르돈 (Nathalie Cardone
시칠리아인 아버지와 스페인 어머니 사이에 태어난 가수이자 배우인 나탈리 카르돈은 12살때 아버지를 잃고 할머니
손에 자랄만큼 비운의 가수... 그의 싱글 앨범도 잠시 프랑스와 벨기에에서 ‘체 게바라여, 영원하라’로 인기를 얻지만
이내 더 이상 성공을 거두지 못하고 98년과 99년 싱글 앨범으로 많은 변신을 시도하지만 팬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진다.
이 곡은 2007년 그의 싱글 앨범이자 재기작으로 그의 음악적 동반자인 로랑이 편곡 리메이크한 곡이다.
그의 음악들 듣고 있노라면 어느님의 해설처럼 마치 샹송의 이단아 세르쥬 갱즈부르와 제인 버킨의 강한 비트와 속삭이는 서정적 언어로 외설시비에 휘말릴 만큼
나탈리 카르돈의 음악 또한 ‘Les Hommes De Ma Vie, Libre’에서는 그녀의
애절한 목소리가 가슴을 저미게 할만큼 달콤하다 ‘
Baila Si’의 뮤직 비디오에서는 강한 비트와 야성적인 모습으로 미성년자가 보기에
민망할 정도이다.
체 게바라의 일생을 노래했던 1965년 카를로스 푸에블라(Carlos Puebla) 원작인 'Hasta siempre comandante (체 게바라여, 영원하라)'의 시에 곡을 붙인 곡으로 남미의 혁명 영웅 '체 게바라 '서거 40주년 추모 앨범과 맞물려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곡이다.
헌정곡 형식인 이 노래는 여러 가수들이 불러 많은 버전이 있지만 검은 비둘기로 잘 알려진 Soledad Bravo와
나탈리 카르돈(Nathalie Cardone)이 부른 곡이 네게 마음에 와 닿는다.
불멸의 게릴라 -체 게바라(Che Guevara)
에르네스토 체 게바라 (Ernesto Che Guevara)
본명 : 에르네스토 게바라 데 라 세르나
(Ernesto, Guevara de la Serna)
1928. 6. 14 ~ 1967. 10.9
1. 탄생과 진실을 향한 여행
체 게바라는 1928년 6월 14일, 아르헨티나의 로자리오에서 중류층 가정의 미숙아로 출생했다.
아버지 에르네스토 게바라 린치는 귀족의 후손이고, 어머니 세실리아 데 라 세르나는 독립전쟁 당시 군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들은 모두 노동자와는 거리가 먼 부르주아 계급 출신이었고, 무신론자였으며, 공산주의자라기보다는
자유주의적 좌파에 가까웠다.
모두 5남매의 자식을 두었으며, 게바라가 맏아들이었다.
에르네스토는 두 살 때 천식에 걸려 고생을 하게 되는데, 이 천식은 그의 일생에 많은 영향을 준다.
왜냐하면, 이 천식의 고통이 후에 그를 의사로 만들었고, 병에 걸려 신음하는 민중을 치료하다가, 이들이 걸린 병마보다, 가진 자들의 억압과 착취가 더 큰 문제임을 인식하여 마침내, 민중해방을 위해 아낌없이 자신을 불사른 위대한 게릴라 전사로 거듭나게 되기 때문이다.
어쨌든, 천식에 고통받는 그를 위해 가족들이 모두 코르도바 근처의 알타그라시아)로 이사를 간다.
그러나 그는 천식 증세가 좀처럼 가라앉지 않아 초등학교 과정을 어머니 곁에서 자택학습으로 배운다.
비록 천식으로 고생하고 있었지만, 그는 활동적이고 자립심이 강했으며, 돈에 대한 집착이 없었고, 옷차림도
자유롭고 활달했다.
그는 고독을 즐길 줄 알았으며, 광적으로 책을 읽었다고 한다.
칼 마르크스와 엥겔스, 그리고 프로이드의 저서에 심취했으며, 1941년 중학교에 들어가서도 문학과 체육과목에
뛰어난 재능을 보인다.
(후에 그의 이 문학적 역량은 유감없이 드러나게 되는데, 그의 편지와 일기, 연설문 및 저서에서 보여지는 것 외에도회견장에서 자작시를 낭독했을 정도로 대단했다.)
당시 스페인 내전에 휘말린 정치적 망명자들에게 깊은 관심을 보였던 에르네스토는 좌익 파시스트가 득세한
독재국가 아르헨티나의 정치적 상황에 환멸을 느껴 "反 페론" 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벌써 이 시기에 그는 파시즘적 군사 정권에 강하게 반발했으며, 부르조아들의 "부(富)의 독점", 그 중에서도 특히 힘을 바탕으로 하는미국식 자본주의와 제국주의를 통렬히 비판했고, 그들을 풍자하는 무언극을 쓰기도 했다.
청년 에르네스토는 특히 여행을 통해서 많은 지식과 견문, 그리고 후에 혁명을 위한 경험들을 얻게 되는데,
열일곱살 때, 자전거로 아르헨티나의 중부지방을 둘러보는 것을 시작으로 여러 곳을 답사하게 된다.
1947년 부에노스 아이레스 대학에 진학한 그는 의학을 전공했으며, 급진적 학생운동은 하지 않았고, 다만 그들의 행동을 관망하는 태도를 보였던 것으로 알려진다.
이 당시만 해도 그는 행동하는 이성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가 의학을 공부하려 한 것은 앞에서 잠시 언급한 것과 같이 두 살때부터 줄곧 자신을 괴롭혀온 천식을 치료하기 위해서 였지만, 차츰 나병에 더욱 몰두하기 시작한다.
이즈음 그의 부모님들은 불화끝에 1950년에 이혼하고, 그는 어머니와 생활하게 된다.
그는 갑자기 어려워진 집안을 돕고 학비를 벌기 위해 부에노스 아이레스에 있는 한 건설회사에서 한때 사무원으로 일하며 공부했다.
1951년 그의 여행이 다시 시작되는데, 북 아르헨티나를 자전거로 일주했다.
이 여행을 통해 그는 병들고 가난한 인디오 원주민들을 접하게 되었고, 그들과 교분을 나눈다.
같은 해 의사시험에 합격하자, 다시 여행을 떠나는데, 칠레에서 한때 좌파정부를 세워 대통령에 올랐다가 반혁명
혐의로 사형 당한 아옌데(Salvador Allende)를 만나기도 했고, 페루의 나환자촌에서는 한동안 봉사활동에
열중했다.
콜롬비아를 여행할 때는 폭동이 일어나, 시위대로 몰려 잠시 구금되는 헤프닝을 겪기도 했다.
여행은 그에게 남미대륙의 아름다운 경관과 함께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비참한 생활을 대조적으로 느낄 수 있게
해 주었다.
특히 상 파울로 나환자촌에서의 노동을 통해 "인간들의 사랑과 유대감은 고독하고 절망적인 사람들 사이에서 싹튼다는 소중한 진실을 깨닫는다.
그는 이 여행을 통해서 그곳 민중들의 비참한 생활과 그들이 안고 있는 근본적인 문제를 알 수 있었고,
그 경험을 바탕으로 인간해방에 기초한 인식의 굳건한 토대를 쌓게 되었다.
이러한 소중한 여행으로 인해서 훗날 그는 라틴아메리카의 어느 땅에서도 자신을 이방인으로 느껴본 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고 술회했다.
라틴아메리카의 억압받는 힘없는 민중은 이미 그의 가족이자, 친구였기 때문이다.
그는 여행 중 비행기의 출발이 지연되어 마이애미에서 1개월간더 머물게 된적이 있었는데, 이때 그는 미국의 실상에 대해 알 수 있었다고 한다.
그는 8월에 귀국한 후, 다시 의학공부에 몰입하여 1953년 3월, 대학을 졸업했다.
그리고, 평소에 관심 가지고 있던 나병과의 인연으로 <알레르기에 대한 연구>라는 논문을 통해 피부과 전문의 자격을 취득하지만, 중류계급을 보장받는 개업의가 되길 원하진 않았다.
결국 그는 두달만에 흰가운을 벗어 던지고, 아르헨티나를 떠나 새로운 정권이 수립된 볼리비아로 갔다.
하지만 이때까지도 그는 혁명가를 꿈꾸지는 않았다
2. 일어서는 체 게바라
볼리비아 라 파스에서 그는 아르헨티나의 변호사 리카르도 로호와 만나게 되는데, 조국에서 추방된 이 반페론주의자와의 만남에서 그는 많은 변화를 갖게 되었고, 남미 일부국가에서 이미 현실화 되어가는 사회개혁 운동과
부딪히면서 진보적이고 혁명적인 이념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된다.
또한, 로호와 함께 여행을 하면서 1953년 볼리비아 혁명의 실패의 원인을 분석하기도 하고, 그의 의견에 따라
베네수엘라로 가지 않고, 과테말라로 가게 된다.
그곳에서 그는 마야와 잉카문명에 관한 고고학 쪽에 관심을 두어 오래도록 머물렀다.
과테말라는 당시 혁명에 의한 사회주의 정권이 들어서 있었는데, 그는 일찍이 마르크스와 레닌에 심취한 적이
있었지만, 공산당 가입은 거부했고 따라서 정부가 좋은 조건으로 제의해 온의료담당관 자리도 거부했다.
그는 그곳에서 인디오 혈통의 마르크스주의자 가디아(Hilda Gadea)와 기거하며, 정치적인 영향을 많이 받았는데,
그때 훗날 쿠바혁명의 둘도없는 동지인 피델 카스트로의 조직원 로페즈(Nico Lopez)를 소개받아 그와 많은 대화를 나누게 된다
1928년 6월 14일 아르헨티나 로사리오(Rosario)에서 출생하였다. 그의 집안은 스페인에서 아르헨티나로 이주하였고 상류층에 속했다.
아버지 에르네스토 게바라와 어머니는 셀리아 데 라 세르나는 진보적인 의식을 가진 사람이었다. 아버지는 개인적인
사업을 했는데 부유하지는 못했다.
어머니는 문학과 사상에 대한 열정이 매우 높았으며 집안에는 많은 책이 많았고 예술가들과 지식인들과 교류가 많았다. 체 게바라는 이런 성향의 어머니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후일 그가 사회주의 혁명전사가 되는데는 어머니의 영향이 컸다고 보여진다.
그의 형재는 모두 5명이며 체는 첫아이로 동생은 4명이 있었다. 1945년 그의 가족은 부에노스아이레스로 이사하였고 체 게바라는 1947년 부에노스아이레스 의과대학에 입학하였다. 그는 성실한 학생이었으며 아버지의 영향으로 스포츠와 여행을 좋아했다.
1951년 친구 알베르토와 함께 모터사이클을 타고 남아메리카 일대 4500km를 여행하면서 라틴아메리카의 고대유적과 문명에 매료되었다.
1953년 부에노스아이레스 의과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의사가 되었다. 그해 그는 두번째 라틴아메리카 여행을
떠나게 되는데 이때 그는 볼리비아와 페루를 지나 과테말라로 그리고 파나마를 거쳐 코스타리카로 갔는데 그곳에서
라틴아메리카 혁명가들의 영향을 받았다.
체 게바라는 이때 자본주의를 타도하기 위해 혁명가의 삶을 살아갈 것이라고 다짐하게 된다.
과테말라에서 여성혁명가인 일다 가데아 아코스타를 만나 결혼하게 된다. 그녀는 사회민주주의정당에 소속되어 정치혁명가와 폭 넓은 인맥과 정치경험을 가지고 있었다.
1955년 멕시코에 머무는 동안 쿠바 혁명의 지도자 피델 카스트로와 그의 동생 라울 카스트로를 만나 쿠바혁명에
뛰어든다. 멕시코에서 쿠바혁명군을 조직하여 군사훈련을 받고 피델 카스트로와 함께 쿠바로 침투하였다.
1957년 반군부대의 대장을 맡았고 쿠바 바티스타 정부군과 싸웠다. 그리고 이 무렵 두번째 부인 알레이다 마치를 만나게 된다. 1959년 카스트로가 정권을 잡자 쿠바 시민이 되어 라카바니아요새 사령관, 국가토지개혁위원회 위원장,
중앙은행 총재, 공업 장관 등을 역임하며 '쿠바의 두뇌'로 불리면서 쿠바정권의 기초를 세워나갔다
쿠바가 사회주의 혁명군에게 점령되자 위기를 느낀 미국은 1961년 쿠바를 침공하였다.
쿠바는 이들의 공격을 물리쳤지만 미국에 의해 경제봉쇄를 당하게 되었다.
체 게바라는 소련을 방문하여 경제적인 지원뿐만아니라 무기원조를 요청했으며 쿠바에 소련제 미사일을 배치하여
미국의 공격에 대비하는 외교적 성과를 이루었다.
하지만 소련은 미국과 협상으로 미사일을 철수하였다.
체 게바라는 소련의 조치에 실망하여 소련은 더이상 사회주의혁명을 지원하는 종주국이 아님을 천명했다.
그리고 자신의 역할은 노동계급을 위한 대중혁명을 지원하는 것이며 쿠바에서 성공한 혁명을 라틴아메리카 전역에
확산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그리고 그는 다시 게릴라로 돌아가기로 결심하였다
1965년 4월 소련과 갈등으로 쿠바의 모두 공직에서 물러난 게바라는 혁명 게릴라들의 국제주의 전선의 형성을 위해
아프리카 콩고로 떠난다.
그는 콩고에서 게릴라 부대를 훈련시키고 그의 혁명 동지들과 활동을 펼치지만 혁명연합이 와해되고 콩고 좌파세력들의 쿠바인 철수 요구로 성과없이 쿠바로 돌아온다.
쿠바에서는 볼리비아 혁명을 지원하기 위해 게릴라 요원을 훈련시켰으며 1966년 가을 볼리비아에 잠입하였다.
하지만 볼리비아 혁명세력으로 부터 지원을 받지 못했고 산악지대에서 소규모 게릴라 부대를 조직한 후 라틴아메리카 전체의 혁명을 계획하고 활동하던 중 1967년 10월 볼리비아 산중에서 정부군에게 포위되어 종아리에 총상을 입고
생포되었다. 체 게바라는 다음날 곧바로 총살당하였다.
그의 유해는 총살 당한 지 30년 후인 1997년 6월 볼리비아의 공동묘지에서 발견되었으며 그해 10월 전사한 당시의
그의 참모들과 함께 쿠바 산타클라라 시의 기념관에 매장되었다.
그의 저서에는 《게릴라 전쟁》(1960), 《혁명전쟁 여행》, 《라틴 여행일기》, 《체의 일기》, 《먼 저편》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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