쉬면 늙는다
[2010년 결장암을 극복하고 나서] 내 가장 커다란 승리는 질병을 이겨낸 것.
2009년 한국 방문 때 기자회견에서 =“은퇴 계획은 없다.
매일 아침 일어나 내가 노래할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한다.
다만 내가 노래해야 하는 시기보다 더도 덜도 하고 싶지는않다.
관객이 내 노래를 원하는 한 계속해서 노래하고 싶다
플라시도 도밍고 [1941.1.21]
에스파냐의 테너 가수. 사르수엘라를 비롯해 이탈리아·프랑스·독일 오페라를 아우르는 다양한 레퍼토리와 극적 표현력
및 뛰어난 가창력의 소유자로 '오페라의 제왕' '음악계의 진정한 르네상스 맨'으로 불리며 대중적인 사랑을 받고 있다.
스페인에서 태어나 8세에 멕시코로 건너가 피아노·지휘·성악을 공부했다.
부모가 주재하는 사르수엘(스페인 민요 오페라) 극단에서 데뷔했고, 1961년에는 몽트뢰유에서 오페라로 데뷔했다.
처음에는 바리톤이었는데, 같은 해에 멕시코에서 ≪라 트라비아타≫의 알프레도를 부르고 테너로 전환했다.
60년대 전반은 텔 아비브 오페라 극장의 멤버로서도 활약했고, 65년 마르세유, 66년 뉴욕 시티 센터 오페라에 출연하던 무렵부터 주목을 끌기 시작했다.
그리고 68년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극장에서 코렐리의 대역으로 데뷔하여 ≪아드리아나 르쿠브뢰르≫의 마우리치
오를 부르고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이후의 경력과 인기에 대해서는 새삼스레 말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그의 명성은 세계적이다.
이탈리아·프랑스 오페라의 주요 배역을 커버하는 한편 80년대부터는 지휘에도 의욕을 보이고 있으며, 90년 1월에는
빈 국립 오페라 극장에서 ≪로엔그린≫의 타이틀 롤을, 91년 3월에는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극장에서 ≪파르지팔≫의
타이틀 롤을 부르는 등 최근에는 바그너에도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1990년 로마월드컵 전야제 때 루치아노 파바로티, 호세 카레라스와 함께 공연한 '3 테너 콘서트'를 시작으로 2001년
한국공연에 이르기까지 세계 각국을 무대로 활발한 공연활동을 펼치고 있다. 워싱턴오페라의 예술감독이자 로스앤젤레스오페라의 창립자 겸 예술감독을 지내고 있다.
1991년 처음 내한공연을 가졌으며, 1992년과 1995년·2001년, 2009년 내한공연을 가진 바 있다.
9번의 그래미상과 신설된 라틴 부문에서 3개의 그래미상을 수상했다. 그의 음반은 오페라, 아리아, 크로스오버 등의
장르를 불문하고 베스트셀러로 자리잡았다.
도밍고는 현재 워싱턴 국립 오페라단과 로스앤젤레스 오페라단의 극장 총감독을 맡고 있다. 또한 해마다 ‘Operalia'
콩쿠르를 개최하여 재능 있는 젊은 성악가들을 발굴하고 있다.
능력 있는 젊은이들을 발굴해 그들에게 경제적 후원과 역량을 키워주는 일은 그가 가장 신경 쓰는 일 이며, 또한 가장
성취감을 느끼는 일중에 하나이다.
카탈로니아[호세 카레라스]는 마드리드[도밍고]의 식민 정치에서 벗어나기 위해 투쟁중이었다.
카타로니아지역 사람들이 스페인을 다스렸던 마드리드지역 사람들로 부터 자치권을 쟁취하려고 하는 과정에서
두 지역출신이 적대관계가 된것은 잘 알려져있다.
그래서 마드리드지역 출신인 플라시도 도밍고와 카타로니아 지역 출신인 호세 카레라스도 이러한 정치적인 이유
때문에 1984년에 앙숙이 되었다.
그들이 각각 대단히 유명해지고 세계 여러 곳을 다니며 노래하게 되자, 그들은 서로가 상대방이 초빙되지 않았을 때에만 음악회에 나가기로 약정(約定)하였다.
1987년, 카레라스는 그의 라이벌 플라시도 도밍고 보다도 더 받아들일 수 없는 적을 만나게 되었다.
그는 백혈병에 걸렸다는 진단을 받았던 것이다.
그의 백혈병과의 투쟁은 고통스러운 것이어서 골수이식과 수혈뿐만이 아니라 여러 가지 치료를 병행하지 않으면
안되었기 때문에, 매달 미국으로 가야만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노래를 할 수 없었고, 그는 약간 부유했었지만 미국에서의 치료에 드는 막대한 비용은 그의 재산을
고갈(枯渴)시키고 말았다.
그의 경제적 능력이 바닥났을때, 그는 마드리드에 오직 백혈병 환자만을 위한 재단(財團)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카레라스는 그 ‘Hermosa’재단의 후원에 감사하며 투병하고, 다시 노래를 부를 수 있게 되었다.
그는 다시 재기하였고, 경제적 형편이 나아지게되자 그 재단에 가입하려고
재단의 정관(定款)을 읽고 나서, 플라시도 도밍고가 그 재단의 설립자이며 기여자의 리더이고, 또한 이사장인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후에, 이 재단이 애당초 그의 치료를 돕고자 설립되었으며, 앙숙인 자기로부터의 도움을 창피하게 느끼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도밍고가 익명(匿名)으로 기부하고 있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이 이야기의 정점은 마드리드에서의 만남으로, 도밍고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즉, 카레라스는 도밍고의 연주회를 찾아가 그의 연주회를 중단시키고, 겸손하게 도밍고의 발 아래에 무릎 꿇고
공개적으로 감사를 표했다.
도밍고는 그를 잡아 일으키고 꼭 껴안아, 그들의 위대한 우정의 시발(始發)을 확고히 하였다.
플리시도 도밍고는 한 인터뷰에서, 그의 앙숙에게 이익을 주는 것뿐인 ‘Hermosa재단’을 그때에 설립하게 된 이유를
물었더니, 그는 "그의 목소리를 잃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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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리 테너의 시대는 저물었다.
루치아노 파바로티는 세상을 떠났고 호세 카레라스는 가끔 리사이틀 무대에서나 볼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플라시도 도밍고만은 예외다.
만 69세를 넘긴 나이지만 목청은 여전히 쩌렁쩌렁하며 워낙 다양한 활동을 벌이는 데다 폭넓게 존경까지 받고 있어서
가히 `오페라계 대통령`에 비유해도 좋을 것 같다.
게다가 늙었어도 여전한 매력남이고, 뛰어난 판단력과 빈틈없는 추진력은 공연계에 널리 알져져 있으니 뭔가 부족한
면을 찾을 수 없다.
◆ 카루소와 파바로티를 넘어선 역사상 최고 테너
= 지난 수년간 도밍고가 누린 명예 중에서 몇 가지만 예를 들어보자.
2008년 봄, 영국의 권위 있는 음악저널 BBC뮤직 매거진은 유럽 평론가들 투표를 통해 `역사상 가장 위대한 테너`로
도밍고를 선정했다. 이로써 도밍고는 오랜 라이벌인 파바로티뿐 아니라 엔리코 카루소, 베니아미노 질리, 마리오 델
모나코, 주세페 디 스테파노, 프랑코 코렐리를 비롯한 과거의 전설적 테너들이 누린 평판을 넘어섰다.
작년 3월에는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가 도밍고의 이 극장 데뷔 40주년을 축하하는 자리를 마련했다. 사실 정확한
40주년은 2008년 9월이었지만 극장 창립 125주년 행사와 붙여서 그 역사를 상징하는 최고 테너라는 경의를 표하고자 일정을 바꾼 것이다.
노래 외적인 명예도 많다. 2007년 여름, 청소년기를 보낸 멕시코시티에 도밍고 동상이 들어섰다. 지진 피해를 입었을 때 보여준 헌신적 자선 활동을 기린 것이다.
미국 뉴올리언스시도 허리케인 피해를 입은 이 지역을 위해 자선 음악회 등을 펼친 도밍고에게 감사의 표시로 시립극장 무대를 `플라시도 도밍고 스테이지`로 명명했다.
엄청난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하고 있다는 얘기다.
그렇다면 처음부터 그는 완벽한 남자였을까.
◆ 성악가를 넘어선 발전형 인간의 전형
= 그렇지 않다. 이처럼 성악가 범주를 넘어 세계적인 인물로 추앙받는 이유는 평생에 걸쳐 변화를 추구하고 다재다능한 역량을 축적한 `발전형 예술가`, 아니 `발전형 인간`이라는 사실에 있을 것이다.
도밍고 부모는 스페인 민속가극단을 운영했지만 본바닥에서 성공을 거두지 못하고 멕시코로 흘러들었다.
도밍고 역시 청소년기를 멕시코시티에서 보냈는데, 열여섯 살 때 여자와 동거하고 이듬해에 아들을 봤을 정도로
열정만 앞서는 제멋대로인 아이였다. 그러나 결국 쓰라린 아픔을 겪었고 이때부터 `탕아의 귀환`이랄까, 전혀 다른 사람으로 변모했다.
멀리 보는 용의주도한 계획을 세우고 일상을 꼼꼼하게 기록했으며, 이를 바탕으로 반성과 개선을 반복하면서 최고 가수가 됐다. 바리톤으로 시작했다가 테너로 전향했다는 핸디캡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테너로서도 이탈리아 오페라에 머물지 않고 프랑스, 독일 오페라로 점점 영역을 넓혔다.
지금까지 오페라 130여 개를 소화해 역사상 가장 많은 레퍼토리를 보유한 테너가 됐다.
기네스북에 실릴 일이다. 지난 시즌에는 베르디의 `시몬 보카네그라`를 부르고 싶어서 바리톤으로 외도하기도 했다.
가수로 절정에 도달한 다음에는 지휘자로 나선다는 목표를 일찌감치 세워놓고 지휘에도 발을 담갔다.
물론 비판도 많았지만 차근차근 실력을 붙여나가더니 이제는 적어도 오페라에 관한 한 뛰어난 지휘 실력을 인정받고
있다.
이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행정에도 관심을 보이더니 미국의 워싱턴내셔널 오페라, 뒤이어 LA 오페라까지 책임지는 총감독이 됐는데, 두 극장은
도밍고가 부임한 이후 놀라운 질적ㆍ양적 성장을 이뤘다.
◆ 예술계와 사회를 향한 기여에 앞장
= 예술계와 사회를 위한 객관적 기여도 활발하다.
우선 사재를 털어 `오페랄리아`라는 성악 콩쿠르를 만들었다. 바쁜 일정을 쪼개 입상자를 세상에 알리는 데도 헌신한다. 우리나라 베이스 연광철, 요즘 최고 인기 테너인 멕시코의 롤란도 비야손이 모두 이 콩쿠르와 도밍고의 열성적인
배려에 힘입어 성장했다.
앞에 언급한 멕시코시티 동상, 뉴올리언스 시립극장 얘기도 마찬가지다.
기부에 만족하지 않고 촌각을 다투는 일정에도 현장에 달려가서 직접 뛰며 도와주는 성격이기에 모두를 감동시키는
것이다.
오페라 가수로 파바로티가 도밍고보다 먼저 성공을 거뒀고 `역사적`이라는 오페라 명반도 파바로티가 더 많이 남겼다. 그런데도 그 위상이 역전돼 도밍고가 더 높이 평가받게 된 이유, 그 `열정과 헌신`은 모든 리더에게 시사점을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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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뉴스 [9월 15일]
도밍고가 라틴 그래미 상의 '올해의 인물(Person Of The Year)'로 선정됐다.
라틴음반협회는 라틴 그래미 수상식 전야인 10일 밤 라스베이거스에서 도밍고의 문화적 업적과 박애주의 정신을 기리는 콘서트를 연다.
이 행사에는 멕시코의 팝가수 알레한드로 페르난데즈, 푸에르토리코의 소프라노 가수 안나 마리아 마르티네즈가 찬조 출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