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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LASSIC

Chopin-Etude Op.10 No.3 In E Major 'Tristes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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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tude E major Op.10 No.3 Tristesse

 

 

2/4 박자의 렌토(Lento Ma Non Troppo). 이 곡은 일명 "이별의 곡"으로 불리어지고 있는데 잔잔하고 애수가 깃든

 아름다운 선율은 너무나 유명한 곡이다.

이곡은  '이별의 곡'으로 알려진 명곡으로 쇼팽이 조국을 떠날 때 그의 첫사랑인 콘스탄티아라에게 이별을 알리면서

 

 연주한 곡이다.

쇼팽 자신이 당시, 한 제자에게 "이제까지 이렇게 아름다운 선율을 써본 일이 없다."고 말했 다는 일화가 전해 오지만,

 선율은 정말 천상의 것이며, 그대로 선율 연습이라고 할 수 있다.

 

매우 로맨틱하기 때문에 감정에 탐닉하기 쉽지만, 너무 처지지 않는 렌토를 꼭 지켜야 하며 그렇기 때문에 루바토 사용

에 더욱 더 세심한 주의가 요구된다.

피아니스트가 정서 표현력을 기르기 위해서 가장 중요하게 다뤄야 할 연습곡이다.

 

'이별의 노래'라고 알려져 있지만 쇼팽 자신이 붙인 이름은 아니다.

쇼팽 스스로도 이렇게 아름다운 선율은 써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는 일화를 제자인 구트만이 전하고 있다.

구트만은 어느 날 자신이 이 곡을 연습하고 있는데 쇼팽이 자신의 팔을 잡아 올리면서, "오, 내 조국이여!" 라고

외쳤다고 이야기 하고 있다.

쇼팽은 이 곡을 비바체 마 논 트로포의 훨씬 경쾌한 음악으로 구상했다가 결국 느린 곡으로 고친 듯하다.

 

 

 

  

쇼팽의 피아노 연습곡 가운데 '작품 10-3'은 그 아름답고도 슬픈 선율로써 '이별의 노래(Tristesse)'곡이란 부제를

 달고 있다.

쇼팽 스스로가 “이렇게 아름다운 멜로디를 써 본 일이 없다”고 했을 만큼 매우 뛰어난 작품으로, 그가 조국 폴란드를

 떠날 때(1831년) 첫사랑의 여인에게 이 곡으로 이별을 고했다는 일화가 있다.

 

 


 

 바르샤바 근교 젤라조바 볼라(Zelazowa Wola)에 있는 쇼팽의 생가(生家) 


쇼팽의 아버지 니콜라스는 폴란드로 이주한 프랑스인으로서, 바르샤바 근교 젤라조바 볼라의 스카르벡 가문을 포함한

여러 귀족 가문의 가정교사로 일했으며 스카르벡 집안의 가난한 친척과 결혼했다.

이 사이에서 태어난 쇼팽은 당연히 어릴 적부터 음악적 재능이 뛰어났고, 보다 폭넓은 음악적 경험을 오스트리아 빈에서 쌓는 한편 몇번의 연주회도 가졌다.

1829년 9월 바르샤바로 돌아온 쇼팽은 그곳 음악원의 매력적이고 인기있는 젊은 성악도인 '콘스탄티아

글라드코프스카'와 사랑에 빠졌다.

이 시기의 그에게 있어 영감의 원천은 사람의 목소리(오페라에 포함된 아리아 등)로, 아름다운 선율과 현란한 장식이

있는 야상곡, 그리고 시적인 기교를 보여 주는 2개의 피아노 협주곡의 서정적인 악장들도 이때에 작곡됐다.

 

다시 빈으로 가 머물다가 폴란드가 러시아에 대항해 봉기한 소식을 접하고 귀국하려 했을 때, 많은 사람들이 '전운에

휩싸인 나라로 와서 너가 할 일은 없다'며 말림으로써 파리행을 결심, 그때부터 그는 평생 조국땅을 다시 볼 수 없게 되고 말았다.

자신과 같은 조국의 청년들이 피를 흘리며 죽을 때 자신은 무엇을 했는가? 이런 자학감이 평생 그를 따라다녔을 것이다.

 

 

 

 

 

 

파리에 도착한 그는 우아한 매너와 세련된 옷차림, 타고난 감각을 가진 연주가·음악교사로서 파리의 대저택에서 가장

환영받는 인물이 됐다. 

1836년엔 당시 사교계의 여왕으로 자유분방한 생활을 하는 여류 소설가 조르주 상드(오로르 뒤팽 혹은 뒤드방 부인)의 눈에 띄었고, 그녀는 스스로 원해서 그의 정부가 됐다고 한다.

 

남녀 관계란 묘해서 서로의 이질적인 성향에 끌리는 것이 다반사. 현재와 미래를 알 수 없는 조국과 자신에 대한 생각으로 늘 암울한 표정을 짓고 있는 쇼팽, 이에 반해 어떤 일도 혼자 알아서 척척 처리하는 상드의 배려에 따라 그들의 사랑은

 뜨겁기만 했다.

 

 허나 오래 가지는 못했다. 쇼팽의 폐병 때문이었다. 

현대의술로도 낫기 힘든데 오죽 할까. 그저 잘 먹고 쉬는 게 상책이라 남부 프랑스에 있는 상드의 별장과 스페인

휴양지에서 요양을 해보지만 죽음은 서서히 그러나 확실히 한발짝씩 다가왔다. 

 

자신의 죽음을 직감한 쇼팽은 1848년 영국과 스코틀랜드를 방문, 토머스 칼라일, 찰스 디킨스 같은 마음이 맞는 사람들과의 만남을 갖는다.

1849년 8월에는 결혼한 누이가 찾아와 만났으며, 파리 중심부의 넓은 새 아파트로 돌아온 후 마지막 남은 몇달 동안 보고 싶어하던 많은 사람들에 둘러싸인 채 남은 생을 보냈다.

 

누이에게는 특별히 부탁한 바가 있는데, 그것은 비록 몸은 이국땅에 묻지만 자신의 뜨거운 심장만은 보드카에 담아가

 고향의 교회에 안치시켜 주기를 바랐다.

이어 폴란드 사제로부터 종부 성사를 받고 자신의 미완성 악보를 파기할 것과, 그의 장례식에 모차르트의 〈진혼곡〉을 연주하도록 유언했으며 그의 마지막은 평온했다.

 

장례식은 10월 30일 마들렌 성당에서 있었으며, 식후에는 애도객들이 페르 라셰즈(Pere Lachaise) 공동묘지까지 그의 관을 뒤따랐다.

 1년 후 깨진 리라(악기)를 들고 슬퍼하는 뮤즈를 조각한 기념비가 제막되었을 때, 폴란드에서 가져온 흙이 그의 무덤

위에 뿌려졌다.

 

 

 


 

 

파리 페르 라셰즈 공동묘지에 있는 쇼팽의 묘

 

 

 

쇼팽의 심장이 안치돼 있는 바르샤바 성십자가 교회 기둥.

2차대전 때 바르바샤 전체가 폐허가 될만큼 공습당했지만, 이곳만은

온전했다고 한다

 

 

 

쇼팽이 파리에 머물던 시절에 사용하던 피아노.

 쇼팽은 자신의 연주회에서[1번 협주곡]을 자주 연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