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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LASSIC

Sergei Rachmaninov-Prelude in C-sharp minor, Op. 3, No. 2 'The Bells of Moscow'

 

Sergei Rachmaninov     piano                                                                                                                                


Prelude in C-sharp minor, Op. 3, No. 2

'The Bells of Moscow'

 

 

 

 

 

라흐마니노프의 24개의 프레류드는 Op.23(10곡), 32(13곡) 등 23곡과 함께 Op.3 No.2를 포함하여 흔히 그렇게 부르는 것이다.

 이 곡들은 바흐의 평균율처럼 24개가 각각의 조성을 가지고 쓰여진 것이며 쇼팽이 이를 시작하여 스크리아빈 등도

 이런 방식의 프렐류드를 작곡하고 있다.

라흐마니노프 초기 명성은 그의 피아노 작품들 특히 C# minor 전주곡으로 얻어졌다.

이 곡은 1893년 쓰였으며 모스크바의 극적인 화재와 교회의 종의 울림을 연상시킨다.

Op.23의 G minor는 그 영웅적이고 행진곡 풍의 주제로 인해 전주곡 가운데 가장 장쾌하다.

 

 

 

 

 

 

 

 노브고로트 출생. 어릴 때부터 아버지에게 피아노의 기초를 배우고 그 후 페테르부르크 및 모스크바 음악원에서

A.실로티에게 피아노를, S.I.타네예프와 A.S.아렌스키에게 작곡을 배웠다.

재학 중에 이미 작곡을 시작하여 졸업하던 해인 1892년에는 가극 《알레코》와 피아노곡 《전주곡(내림마단조)》을

작곡하였다.

 

졸업 후에는 스크랴빈과 더불어 스베리오프에게 사사하였다.

1893년 평소 사숙하던 차이코프스키가 죽었을 때는 《위대한 예술가의 회상》을 썼다.

1899년 런던에서 피아니스트 ·작곡가 ·지휘자로서의 명성을 얻고, 《피아노협주곡 제2번》(1901)으로 글린카상을

 받았으며, 다시 드레스덴에서 교향시 《죽음의 새》(1906)를 작곡하였다.

1909년 미국에 건너가 피아니스트로서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후 귀국, 1910∼1917년 모스크바극장 및 마린스키극장의 지휘자를 역임하였다.

1917년 러시아혁명이 일어나자 이를 피해 미국으로 망명, 연주활동과 작곡에 전념하였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에서 소련의 패색이 짙어지자 모금연주회를 개최하는 등 구국운동에 앞장서기도 하였다.

 

 그 후 소련 당국의 권유로 귀국준비를 하던 중 발병하여 사망하였다.

 20세기 초 가장 탁월한 피아니스트의 한 사람이었으며, 《피아노협주곡》 제2번 및 제3번에서도 알 수 있듯이 낭만파의 마지막 작곡가이기도 하였다.

 작풍은 ‘차이코프스키로의 회귀’를 주장하는 일종의 회고적 경향을 띠고 있다.

작품으로는 피아노곡을 비롯하여 관현악곡 ·가곡 ·합창곡 ·오페라 등 많은 곡들을 남겼다.

 

 

 

 

   

 

 


라흐마니노프의 가문은 유서있는 러시아 귀족이며, 아버지는 근위대의 대장이었다.

부계의 할아버지도 역시 군인이었고, 젊었을 때에는 필드에게 피아노를 배운 적도 있어, 아마튜어 피아니스트로서도

다소 그 이름이 알려진 사람이었다.

 

라흐마니노프는 4세 때부터 교양이 높은 어머니에게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했다.

러시아의 농노해방이후 사회적 변동의 소용돌이 속에서 그의 아버지는 점차로 농토를 잃게 됐고, 1882년 19세 때에

양친이 서로 별거하게되자, 그는 어머니를 따라 페테르부르크에 옮겨서 페테르부르크음악원의 유아과정에 입학, 피아노공부를 계속했다.

 

 85년 사촌형 알렉산드로 실로티(A. Siloti)의 권유로 모스크바 음악원으로 전학, 니콜라이 즈베레프(N.S. Zverev)에게 피아노를 배웠다.

실로티 역시 즈베레프의 가르침을 받았고, 후에는 리스트에게 사사하여 90년부터  교수가 된 훌륭한 피아니스트이다.

라흐마니노프는 피아노 외에도 화성학과 작곡법을 아렌스키(Arensky)에게 ,대위법을 타니예프(Taneyev)에게

 배웠고, 뒤에 실로티에게도 피아노를 배웠다.

 

재학시절부터 그는 작곡을 시작하여, 90년부터 이듬해에 걸쳐서 작곡된 피아노협주곡 제1번은 실로티에게 바친

곡으로서, 모스크바의 구트헤일 출판사에서 op.1(작품번호 1번)으로써 출판되었다. 91년에는 피아노경연에서 제1위로 입상, 이듬해 졸업작품으로 단시일에 쓴 오페라<알레코>로써 금메달상을 획득하고 졸업하게 되었다.

 

이 오페라는 차이코프스키의 추천으로 93년에 볼쇼이극장에서 첫공연을 가졌다. 92년에는 피아노곡집 <환상적

소품집>도 작곡되었다.

그 곡집의 제2곡인 전주곡(C#단조)은 그의 피아노곡으로서는 가장 널리 알려진 곡이다.

 

93년 존경하던 치이코프스키의 죽음을 맞게되자, 그는 이 위대한 음악가를 추모하기 위해서 피아노3중주곡 <위대한

예술가의 추억>(d단조)을 작곡했다.

이해 모스크바의 마린스키여자전문학교의 피아노과 교사가 되는 한편, 러시아명지를 순회연주하여 명성을 떨쳤다.

 

95년에는 교향곡 제1번(d단조)을 작곡, 이곡은 97년에 글라주노프의 지휘로 첫공연을 가진 바  아주 평이 나빴다.

이에 의기소침한 나머지 그는 한동안 다른 길을 택하여 오페라의 지휘를 맡기도 했으나 , 이것 역시 오래 계속되지는

않았다.

 

98년 런던 필하모니협회의 초빙을 받아 영국에 건너갔고, 피아니스트/지회자로서 자작을 연주하여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이듬해 귀국하게되자 제 1교향곡의 실패에서 받았던 정신적 상처가 아직도 아물지않아서 새로운 피아노협주곡을 작곡하도록 청탁을 받으면서도 신경쇠약에 걸리고 말았다.

 

다행히도 모스크바의 정신병과의 명의 사다르박사의 치료로써 신경쇠약은 완치되고, 1901년에 피아노협주곡 제2번

(c단조)을 완성 하였다.

이 작품으로 그의 작곡가로서의 지위는 확고부동하게 되었고, 계속해서 첼로 소나타(1901), 13의 프렐류드(1903~4)등의 걸작을 낳게됐다.

 

05년부터 다음해에 걸쳐 모스크바의 볼쇼이극장의 지휘자를 맞게되고, 이무렵에 오페라 <인색한 기사>와

<프란체스카다 리미니>를 작곡, 동극장에서 초연되었다.

 

 

 

 


 

1907년부터 1909년까지는 드레스덴에 살면서 작곡에 몰두하기 시작, 교향곡 제2번(e단조)과 피아노 소타타 제1번

(d단조), 교향시 <죽음의 섬>을 썼다.

제2교향곡은 08년 페테르부르크에서 자신의 지휘로 초연되었고, 같은해 초연된 스크랴빈의 교향곡 제4번<법열의 시>를 능가하여 클린카상 제1위에 입선된 걸작이다.

 

 1909년 미국을 순회연주하고, 보스턴교향악단을 지휘한 이외에도 여러곳에서 피아노를 연주하는 한편, 피아노협주곡 제3번(d단조)을 작곡했다.

 10년에 귀국하여 17년까지는 주로 피아니스트,지휘자로 활약하고, 피아노곡및 가곡 작곡에 손을 대었다.

 

이무렵의 작품인<성 크리소느토무스의 전예악>은 옛러시아의 즈나메니 성가를 인용한 것인데, 20세기의 러시아정교의 전례음악으로서는 이색적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러나 이런한 그에게 또다시 크나큰 시련이 들이닥쳤다.

러시아혁명은 그의 생활을 송두리째 위엎었다. 귀족출신인 그는 공산정권이 싫은 나머지 1917년 말에 파리로 망명하고 말았다.

 

 이듬해 미국으로 건너가 그곳에서 정주하며, 해마나 여름에는 스위스에서 정양을, 가을에는 유럽의 곳곳을 순회연주하는 식의 생활을 되풀이했다.

26년부터는 오랫만에 작곡을 위한 붓을 들어 피아노협주곡 제4번(g단조)을 완성했고, 그뒤 34년에는 <파가니니의

주제에 의한 랩소디>, 36년에는 <교향곡 제3번>(a단조), 40년에는 <교향적 무곡>을 작곡했으나, 그 가운데서

<파가니닌의 주제에 의한 랩소디>만이 일반에게 알려져있다.

 

이무렵 그는 고국 러시아로 북귀하려는 뜻을 비치기도 했으나, 제2차세계대전으로 말미암아 그 실현을 보지못한채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라흐마니노프의 음악은 19세기 러시아음악의 이른바 서구적인 모스크바악파의 정통을 이어받은 것이다.

그 풍부한 선율성과 애수를 담은 서정성은, 직접 차이코프스키와 연결되는 것이며, 같은 시대의 스크랴빈이나 바실렌코등이 인상주의 이후의 근대음악의 영향을 풍기고 있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낭만주의의 흐름속에 잠겨있었다.

 

수많은 그의 피아노곡이나 가곡은 그러한 낭만주의의 전형이었으며, 거기에는 진취성이 있는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으나, 20세기에 있어서의 낭만주의의 한 흐름으로서는 많은 사람들에게 애호받을만한 요소를 충분히 지니고 있었다.

피아니스트로서의 라흐마니노프는, 육중한 체구에서 우러나오는 정력적인 연주와 초인적인 기교넌, 베토벤, 슈만, 쇼팽, 차이코프스키의 작품에 독자적인 해석을 낳았고, 특히 자기작품의 연주에 있어서는 절대적인 인기를 얻었다.


그의 작품은 3개의 교향곡, 교향시, 관현악곡, 그리고 피아노곡 분야에 우수한 작품을 많이 남겼다.

더구나 피아노에 있어서는 그 악기의 극한까지 특성을 발휘했다고 하겠으며 그의 표현양식은 고전적인 기교와 낭만적인 선율을 효과적으로 전개시켰다.

따라서 그의 작품에서 는 러시아의 국민성을 반영했으며 슬라브적인 색채가 농후하다. 그는 소박하고 솔직하며 어두운

 성격의 소유자이지만 진지한 인격을 겸비한 예술가였다.

 

 

 

 

 

 


1. 라흐마니노프에 대한 몇 가지 생각

고전 음악이란 쟝르에 대해서 별로 좋지 못한 인상을 가진 사람들을 만날 때가 간혹 있다.

그 중에는 단지 지루하다거나어럽다는 단순한 이유로 고전음악을 멀리하는 경우도 있고, '위선적이고 쓸데없이 잘난

체하는 음악'이란 식의 강한 적개심(?)을 보이는 경우도 있다.

 

어떤 이유에서든 고전음악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꼭 들려주고 싶은 곡들이 몇 곡 있는데 그 중의 한 곡이

라흐마니노프의 교향곡 2번 특히 3악장이다.

마치 영화음악을 연상케 하는 세련된 선율... 화려하면서도 (말러의 그것처럼) 복잡하지는 않은 관현악법...

고전음악을 젊은 시절부터 좋아하던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곡에 얽힌 로맨틱한 추억들을 하나씩은 갖고 있을 걸로 믿는다.

라흐마니노프는 19세기의 감성을 가지고 20세기를 살다 간 작곡가이다. 그는 20세기에 들어 명성을 얻었던 대부분의

음악가들(바르톡, 쇼스타코비치, 쉔베르그 등)이 내세웠던 전위성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창작이 가장 왕성했던 시기는 전부 20세기에 걸쳐져 있다.

 

같은 낭문주의 음악이라도 슈베르트나 슈만의 음악보다 라흐마니노프의 곡들에 더욱 현대인들이 이끌리는 것은 이러한 시대적인 요인도 있지 않을까? 라흐마니노프에게 있어서 피아노는 단순히 악기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그는 작곡가이기 전에 타고난 피아니스트였고, 그의 대부분의 작품들은 피아노 거장으로서의 자신을 드러내기 위한

 일종의 도구라 봐도 좋을 만큼 피아노란 악기의 가능성을 최대한 내보이고 있는 것들이다.

 

라흐마니노프의 다섯개의 협주곡들과 수많은 독주곡들에서 피아노는 완전히 발가벗는다. 때로는 흐느끼듯이, 때로는

눈부시게 작렬하며... 라흐마니노프가 살던 시대에는 그 누구도 하나의 악기에 이토록 집착하지 않았다.

'Romantic Rachmaninoff' 에 실린 곡들은 라흐마니노프의 음악세계 전부를 조망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만큼

그의 면면을 잘 드러내고 있다.

 가장 인기있는 작품인 피아노 협주곡 2번중 최고의 명연주를 들려주는 이 곡의 3악장이 실려 있는가 하면,

 라흐마니노프가 추구했던 탐미적 서정미의 정수라 할 수 있는 교향곡 2번 3악장도 실려있다.

 

변주곡이라는 진부한 형식을 한 편의 드라마로 부활시킨 듯한 명곡, 파가니니 광시곡은 작곡가로서 라흐마니노프의

 빼어남을 역설하는 곡이다.

그 밖에 몇 곡의 전주곡(Prelude)들과 회화적 연습곡(Etude-tableaux)은 그의 예리한 현대적 감각을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작품들이다.

이런저런 어려운 미사여구들을 모두 잊더라도, 라흐마니노프의 음악은 만인취향이다. 로맨틱하며, 신비로우며, 적절하게 화려하다. 마치 월남전 반대 시위 때 진압군인들의 총구에 히피들이 꽂았던 꽂송이처럼, 라흐마니노프의 음악이야말로

많은 사람들의 가슴 속에 있는 고전음악에 대한 빗장을 풀 수 있는 열쇠가 아닐까?

해설 : 이종승

 

 

 



2. 내부로부터 흘러나오는 음악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와 관현악을 위한 작품

라흐마니노프는 피아노의 역사상 가장 위대한, 다시 말해 가장 독창적이고 완벽한 피아니스트 중 한사람이었다.

 그는 몇몇 곡들을 작곡할 기회를 가진 피아니스트 겸 작곡가가 아니었다.

그의 작품에는 건반을 포함하지 않는 많은 작품도 역시 존재한다. 또한 이러한 점은 대가적인 기교의 운반체를 진열하는 것이 결코 아니라고 지적하며, 자신의 피아노 협주곡을 "피아노 교향곡"이라고 말한데서 드러난다.

 

이것이 암시하고 있는 진지함에도 불구하고, 그의 음악은 새로운 것이라 해도, 쇤베르크, 바르톡 혹은 스트라빈스키 같은 작곡가들이 그때 작곡하고 있었던 것과 관련시켜 낡은 것으로 생각되었다.

 

이것은 이해할 만한데, 왜냐하면 신선한 음악적 아이디어는 보수적인 어휘로 표현되었을 때 간파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활기있고 새로운 통찰력이 존재했으며, 그래서 그의 작품들은 계속해서 살아남아 종종 연주되거 있다.

라흐마니노프의 음악은, 강력하고 매우 개인적이고 내적인 생활에 의해 내부로부터 흘러나오고 있으며, 심오한 인간적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중요한 것은 그의 주요 작품 각각이 작곡가로서 지속적인 성장에 점하는 위치이다.

왜냐하면 악의 어린 신선미없다는 비난에도 불구하고, 그는 머물러 있지 않은 작곡ㄱ가였기 때문이다.

사실상 그는 보통 믿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혁신적이었다.

 

관현악 작품에는 결코 해당하는 이야기가 아니지만, 그의 피아노 서법의 독창성은 특히 러시아 음악에서 실제적인 선례가 거의 없다.

 

그는 새로운 건반 음형을 무진장 창조해냈다.

그리고 다른 뛰어난 피아니스트처럼, 그렇지만 그것은 자원이 풍부한 손을 이끄는 상상력 풍부한 귀의 문제이이

그 반대가 아니라는 것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의 연주를 반영하는 것은 건반 텍스추어만이 아니다.

그의 음악의 리듬적 생동성은, 긴 호흡의 선율을 피아노가 노래하도곡 하는 그의 놀라운 리듬적 조절력과 관련되어 있다.

이 4개의 협주곡과 파가니니 랩소디의 일부 시작부분이 주는 충격은 라흐마니노프의 독주파트 연주의 도저히 흉내낼 수 없는 수법이다.

 

 그러나 또다른 요소는 그의 양식이 정확히 러시아적이라는 것이다.

이는 단지 멜랑콜리한 표현의 문제일 뿐 아니라 그것이 정교회의 고도로 감정적인 음악에 깊이 뿌리박고 있다는 것과

 관련된 문제인 것이다.

 동시에 각 작품은 서구의 형식적 선례를 따르며, 협주곡 제 1번은 그가 이것들을 섭렵하여 이룬 통달의 생생한 예를

 제공한다.

초판은 1890-91년에 나왔는데, 그 때 그는 자신을 발견하는 과정에 있는 매우 조숙한 10대였다. 반면에, 여기서 연주된 개정판은 1917년에 나온 것인데, 이 때 그는 성숙하고 매우 경험많은 작곡가 였으며, 이미 두개의 피아노 협주곡을 더

썼을 뿐 아니라, 두개의 교향곡, 세개의 오페라, 세개의 교향시, 주요 합창작품, 많은 독주 피아노 곡집, 그리고 수많은

노래를 썼을 때였다.

 

 

 

 

라흐마니노프는 후에 "한 음도 그냥 있던 자리에 두기 힘들다"라고 말했다.

비록 그것은 과장이었지만, 그 결과는 보다 다채롭고, 모험적인 화성, 놀라운

 텍스추어의 명료성, 그리고 무엇보다도

더욱 탄찬해진 구조를 낳았다.

 

그렇지만 어떻게 중년 작곡가의 현학성에도 불구하고 피날레 시작부분의 집시풍 주제와 유려하게 시작하는 건반의-젊은 열기의 세련된 표현-자연스러움이 그대로 남게 되었는지 놀랍다.

거의 수정이 필요없는 부분은 제1악장의 화려한 카덴차였는데, 이것은 1890년대 판에서조차 대 기교적 피아노 서법을 결정적으로 요구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여기서는 비바체의 주요 주제인 시작부분의 팡파레와 피아노 악구의 대답이 모두 사용된다.

 

그리고 전체 악절은 그 악장의 형식에 본직적인 역할을 하며, 결코 단순한 전시를 명목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비록 이 카덴차는 연주자에게 대단한 요구를 하지만, 외부 악장들에서도 이는 마찬가지이다.

본질적르로 대비를 이루는 것이 내부 악장인 안단테인데, 간단하고 서정적인 녹턴으로 되어있다.



모든 클래식 작품 가운데 가장 익숙한 것 중 하나의 협주곡 제 2번은 교향곡 제 1번 초연의 비참한 실패로 얻은 질병으로부터 벗어나 다시 작곡하도록 도와준 의사, 니콜라이 달에게 헌정되었다. 그것은 1900-01에 작곡되었는데, 두개의

피아노를 위한 조곡 제2번 op.17과 첼로 소나타 op.19와 거의 동시에 작곡외었다.

 

그리고 예민한 감상자라면 이 세 작품의 상호보충적인 성격을 반드시 알아차릴 것이다.

그의 전주곡 op.23 제 6번은 여름날의 산들바람처럼 쉽게 변화하는 작품인데, 이 협주곡의 1악장 제 2주제와 매우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이 협주곡은 특히 작곡가의 음악적 개성의 한 일면인 특징적인 선율적 풍부함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 작품이 매우 폭넓게 감상되기 때문에, 종종 그는 단지 제시하는 것밖에 없다고 여겨지기도 한다-비록 여기에

포함된 다른 작품들이 곧 그렇지 않다는 것을 증명하긴 하지만, 피아노만 나오는 시작부분은, 너무나 자주 접할 수 있어 오히려 잘 파악하기 어려운 독창성을 지닌 악절들 중 하나이다.

 

협주곡에는 매우 드믄 특성으로, 건반 파트가 종종 반주적으로 되고 주제와 주제의 발전이 오케스트라에 놓이는 부분도 있다. 어떤 곳에서는 피아니스트가 거의 실내악 연주자의 성격을 가질 때도 있다.



명백히 음악어휘상의 유사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협주곡 제 3번은 완전히 다른 작품이며, 우울함과 화려함, 달콤한과

찬란함이 불가해하게 결합되어 있다.

이 곡은 1909년 이후 그의 고향이 되었으며, 그해 초연이 있었던 뉴욕을 처음 방문한 기간동안 작곡되었다.

그 형식은 부분적으로는 소위 전통적 진행이란 외압에 의한 것이며, 또한 보다 재미있는 것은 텍스추어와 리듬의

만화경적 변화로부터 왔다는 것이다, 독주자도 지휘자도 대규모의 분위기 대조를 과장해서는 안된다. 이 작품은 또한

 악장들 사이의 연관성과 더불어 주제적으로 빈틈없다.

이것은 음악이 최상의 흐름과 연속성을 갖는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는 부분적으로는 의심할 바 없이 라흐마니노프의

교향곡 제2번(1906-1907)을 통해 성취한 것의 결과이다.

그러나 협주곡 제 3번의 시작은 우연한 듯 위장되어 있는데, 왜냐하면 시작부분의 선율이 작품 전체를 통해 계속 나타나는 몇개의 동기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동기들을 추적하는 것은 매력적인 작업이다.

마찬가지로 시작의 관현악 파트의 리듬은 단순히 반주적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거의 주제적이라고 여겨질 정도로 협주곡의 많은 부분에 스며들어 있다. 사실상 리듬적 변화의 중요성은 이 작품과 협주곡 제2번을 구별하는 요소 중 하나이다.

 

 

 

 



그런 구별성은 협주곡 제4번도 마찬가지다.

라흐마니노프는 아마도 그것을 1917년에 협주곡 제2번을 개정할때 쯤 작곡하기 시작했던 것으로 보인다-혹은 구상하기 시작했을 것이다.

 

그러나 작품의 대부분은 1926년에 쓰여졌다. 그리고 이 작품은 그가 미국에 정착한 이후 쓰여진 첫번ㅉ째 중요한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제4번은 1941년 전반적으로 개정되었다.

 

그리고 이것이 이 레코딩에 수록된 연주의 판이다.

제 4번은 이 과정에서 삭제되기도 하고 압축되기도 하고, 관현악파트가 사실상 다시 편곡되었으며, 현악파트에 특히 많은 변화가 있었다.

 

정말고 이 협주곡은 어려운 개념, 즉 작곡가가 매우 정확한 것을 얻기 위해 상당한 노력을 필요로 했던 그런 것을

구연한다.

다시말해 낭만적 모호함은 영원히 사라졌다.

협주곡 제2번과 제3번 그리고 심지어 제1번의 개정에는 시간상으로 상당한 거리가 존재한다.

그리고 파가니니 랩소디처럼, 그것은 본질적인 의미로 현대적이다. 이는 단지 더 많은 불협화음이란 문제가 아니라 생략적인 구조, 일부 진술의 간접성, 즉 다른 것들에 대한 강조에 의해 고도화된 회피 등의 문제이다.

 

그래서 청중들이, 갑작스런 병렬과 때때로 거의 퉁명스러운 제스추어를 갖는 라흐마니노프의 작품 전체를 파악하기란

 가장 어려운 일이다.

중요한 것은 더이상 주제의 본질적인 의미가 아니라 무슨 일이 거기에 발생했는가라는 예측불가능성이다.

이 작품들 중 마지막 것은 1934년 파가니니 주제에 의한 랩소디이다. 우리가 24개로 된 이 일련의 변주곡으로부터

라흐마니노프의 예술적 개성의 전체에 대한 분명한 인상을 얻는다는 것은 역설적이다.

주제는 파가니니의 무반주로 된 바이올린 카프리치오 op.1의 마지막에서 나오는 것이다.

 

그러나 또다른 주제가 6,10,22 그리고 24번 변주에 등장하는데, 그것은 중세의 "디에스 이레(진노의 날)"이란 평성가에서 취한 것이다.

그리고 이 랩소디는 이 주제들을 묘사하는 표현의 방식 사이의 변증법적 대립을 매우 생생하게 구현하여 보여준다.

옜날의 "디에스 이레"가 파가니니 주제에 대하여 발휘하는 힘에도 불구하고 부동성, 불변을 상징하는 반면, 덧없는 정력으로 가득찬 파가니니 주제의 건조하고, 신경과민적인 균형성은 지칠 줄 모르고 증식하는 창작력을 낳는다는 방식으로

 이 작품에는 생산적인 긴장이 매우 명료하다.

 

변주적 처리에 너무나 민감한 파가니니의 주제는 또한 다른 작곡가들에게도 작곡의 기초가 된다.

그리고 이 중 몇몇은 아마도 파가니니의 거장적인 기교가 주는 원래의 충격을 복구시키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라흐마니노프의 변주곡 각각은, 비록 분리될 수 없는 전체의 부분이지만 자신만의 독특한 정체성을 가지며, 그는 여기서 기교성외에도 다른 문제들을 깊이 탐구했다.

그래서 그의 작품은, 마치 나쁘게는 악마적인 바이올리니스트, 좋게는 암흑의 오르페우스의 음악이라고 평가받는

 파가니니의 "사상"에 대한 랩소디인 것처럼 보인다.

해설 : 박정민

 

 

 




3. RACHMANINOV & TCHAIKOVSKY

젊은 라흐마니노프에세 음악적으로 가장 큰 영향력을 미친 인물은 역시 차이코프스키였다.

누이 엘레나가 그에게 흥얼거려 주던 로만스곡들과 발레곡, 협주곡, 오페라등 차이코프스키의 모든 음악은 광포한 열정과 '모르비데차(각주1)' 그리고 사람을 경건한 감동으로 몰아넣는 깊은 힘을 지니고 있었다.

 

차이코프스키는 당시 50에 가까운 나이였고, 음악가로서 최절정기를 맞이하고 있었다.

한 세대 전반에 걸친 예술적이고 도덕적인 지도력이 그때만큼 강력했던 적은 없었다. 스트라빈스키, 심지어 쇼스타코비치 같은 작곡가마저 <에프게니 오네긴 Evgeny onegin>(각주2)의 작곡가가 지닌 권위를 방패로 이용하게 될 것을 한번 생각해 보라.

라흐마니노프에게 차이코프스키는 단순한 모델 이상이었다.

두 사람의 만남은 1885년에 즈베레프의 주선으로 이루어졌다.

이미 교육계에서 은퇴한 그 고명한 음악가에게 ' 사부' 역할을 강요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런데도 그는 호감을 보이며 라흐마니노프라는 소년의 말에 귀를 기울였고, 그에게 용기를 북돋워주었다.

이후 두 사람은 계속 만나게 된다. 우리는 어느쪽을 더 칭찬해야 할까?

명예를 한몸에 누리고 있던 당대 음악계의 스승 차이코프스키의 끈질긴 고독에?

아니면 그 고독을 깨뜨릴 수 있었던 라흐마니노프의 예외적인 재능에?

라흐마니노프의 음악적 취향은 차이코프스키에 그치지 않았다.

클라비어(피아노의 일종)을 다루는 솜씨와 화성적인 색채, 곡을 구성하는 타고난 감각을 들어 쇼팽(각주3) 역시

흠모했다. 슈만 또한 그와 비슷한 이유로 애호했다. 낭만파 음악가 중에서는 브람스보다 베토벤이나 리스트를 선호했다.

(각주1) morbidezza: '부드러움', '온화한'이라는 뜻을 지닌 이탈리아 어. 그는 점차적으로 여기에 사로잡히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