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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LASSIC

Bach -Trio Sonata in G BWV 1079 from Musikalisches Opfer

 

 

 


 2악장 - Allegro

 



 


프리드리히대왕이 좋아하는 플루트와 바이올린과 쳄발로를 위한 트리오 소나타입니다

제1악장 라르고 제2악장 알레그로 제3악장 안단테 제4악장 알레그로로써 전4악장을 통하여 지극히 높은 기풍을  지니고있습니다

 

프리드리히 2세에게 헌정된 이 악곡집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큰 것은 6성의 리체르카르라고 할 수 있겠으나 모두 4악장을 갖는 이 트리오 소나타도 그에 못지 않습니다

이 소나타는 플라우토 트라베르소와 바이올린 통주저음을 위한 트리오 소나타로 느린 악장-빠른 악장-느린 악장-빠른

악장으로 이어지는 전형적인 교회소나타(Sonata da chiésa)의 구조를 갖고 있습니다

 

또 전13곡 가운데 바흐가 악기를 지정한 2곡 중의 한 곡입니다

 푸가와 카논이라는 계속되는 엄격하고 복잡한 양식 속에 유려한 흐름과 빛나는 환상성을 가진 눈부시게 아름다운 곡으로 화사한 색채감이 분방한 자유로움이 참으로 인상깊습니다 (옮김)  

 

 

바흐 - '음악의 헌정'

Musikalisches Opfer Bwv.1079

 Performer: Jordi Saval,l Le Concert Des Nations
Komponist: Johann Sebastian Bach 

Label: Alia Vox (Harmonia Mundi)

 

 

 

 



바흐 - '음악의 헌정' Musical Offerings

 
01  Thema Regium (Iraverso Solo)


 
02  Ricerear A 3 (Clavecin)



     
    03  Canon Perpetuns Super Thema Regium (7)


     
    04  Canon 1 A 2 (Cancrizans) (Clavecia)


     
    05  Canon 2 A 2 Violini In Unisono


     
    06  Canon 3 A 2 Per Motum Contratium 


     
    07  Canon 4 (A) Per Augmentationem Contratrio Motu 


     
    08  Ricercar A 6 (Clavecin) Sonata Sopr`Ii Soggetto Real



    09  Sonata soprIl Soggetto I.  Largo


     
    10  II. Allegro



     
    11  III. Andante


     
    12  IV. Allegro


     
    13  Canon A 2 Quaerendo Invenietis (9a) (Clavecin)


     
    14  Canon A 2 Quaerendo Invenietis (9b) (Clavecin)


     
    15  Canon 5 A 2 Per Tonos     
    `Ascendenteque Modulatione Ascendat Gloria Regis`


       
      16  Fuga Canonica In Epidiapente


       
      17  Canon 4 (B) Per Augmentationem Contrario Motu


       
      18  Canon Perpetuus : Per Justi Invervali


       
      19  Canon A 4 (10)


       
      20  Ricercar A 6 Ensemble


     


     

    음악의 헌정(Musikalisches Opfer), BWV 1079


    [성립] 1747년 봄, 바흐는 맏아들 프리데만과 함께 프리드리히 2세의 궁정 오케스트라의 하프시코드 주자로 있던 둘째 아들 필립 엠마누엘을 만나기 위해 베를린을 여행하게 되었습니다.

    1747년 5월 11일자 "Berlirische Nachrichter"지에는 바흐의 방문에 대한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려 있습니다.

    "지난 일요일, 포츠담으로부터 그 유명한 궁정악장 바흐가 이곳에 온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그는 이곳의 뛰어난 궁정음악에 관심을 갖고 있다고 한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일요일 저녁 관례대로 실내악이 왕의 방에서 연주되기 직전에 바흐의 내방 소식이 보고되었다는 것이다.

     

    프리드리히 대왕은 대기실에서 기다리고 있던 바흐를 즉시 불러들여 환영의 뜻을 전했다.

     또한 왕은 바흐에게 하나의 주제를 하사하고 아무런 준비없이 즉흥연주를 해보도록 당부했다.

    소위 "포르테 피아노"라고 불리우는 악기를 가지고 바하는 정말 성공적인 즉흥연주를 해냈다.

     

    홀에 모인 모든 사람들은 놀라움을 표시했고 바흐는 그 주제가 특히 멋진 것이었음을 강조하면서 사의를 표했다.

     바흐는 또한 그 주제를 위한 푸가를 한번 작곡해 보기로 결심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기억할만한 방문에 대한 또 다른 기록은 바흐가 쓴 "음악의 헌정" 서문의 헌사에서 찾을 수 있는데...
    "저는 최고의 공손함으로 "음악의 헌정"을 일개 범인의 혈통으로서는 가장 고상한 사람의 손으로부터 존귀하신 폐하께 헌정하는 바입니다.

     

    얼마전 포츠담에서 저의 알현에 베풀어주신 폐하의 그 각별한 배려를 저는 아직도 즐겁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폐하께서는 저에게 친히 피아노를 위한 푸가의 주제를 하사하시어,황송하게도 그것을 폐하 앞에서 즉흥으로 연주하는

    영광을 주셨습니다.

     

     폐하의 뜻에 복종하는 것은 저에게 가장 명예로운 일이었지요.

     그러나 저는 충분치 못한 준비로 인하여 그 뛰어난 주제에 걸맞는 성공적인 즉흥 연주를 해내지는 못했음을

    곧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폐하께서 주신 바로 그 주제를 좀더 완벽하게 다루어 출판할 것을 결심하고 즉시 그것을 실행에 옮겼습니다. 그 결심은 제 능력이 되는 데 까지는 이제 막 실현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계기로 "음악의 헌정"이 작곡되었던 겁니다.

    바흐에게 푸가의 주제를 주었던 이 프러시아 왕은 당시 그라운(Graun)과 핫세(Hasse)의 새로운 음악 양식에 깊히

    몰두해 있었는데,대위법과 즉흥연주로 이름난 전설적인 대가인 바하의 연주를 몹시 듣고싶어 했다고 합니다. 어쩌면

    그는 이미 구식이 되어버린 옛 양식을 보여줄 가장 유명한 작곡가를 만남으로서 음악의 지난 흐름을 훑어보고 싶었을

    지도 모르죠.

    바흐에게 있어서 자신이 완전한 음악가로 더 이상 존경받을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습니다.

    왜냐면 당시는 그의 아들들 조차도 새로운 양식의 음악만을 쓰고 있던 시대였기 때문입니다. 그는

    왕의 주제가 푸가의 주제로는 적절치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공손히 격찬했으며 음악에 능했던 왕이 바흐를

    시험하기 위해 일부러 어려운 주제를 내놓았으리라는 가정도 해봄직 합니다.

    작곡가의 대응은 정말 천재적이고도 명석해서 거의 해결할 수 없는 주제를 받은 그는 플루우티스트인 왕이 당해낼 수

     없는 것으로 대응했던 것입니다.

    플루우트, 바이올린, 바소 콘티누오(Basso Continuo)를 위한 트리오 소나타는 당시의 플루우트로는 거의 연주 불가능한 것이었습니다.

    1747년 7월 7일, 바흐의 아들 칼 필립 엠마누엘은 "음악의 헌정" 사본을 그의 아버지 이름으로 프리드리히 왕에게

    선사했습니다. 바흐는 포츠담 방문이 있은 후에 자신이 그 곡을 쓰도록 영감을 불러일으킨 왕에게 "최고의 공손함"으로 작품을 헌정했던 것이죠.


    [개설] 이것은 미완성으로 끝난 <푸가의 기법>과 함께 바흐의 가장 만년을 장식하는 대위법의 정화중 하나이다.

    이들 앞에서도 <골드베르크 변주곡>, <카논풍 변주곡>이 있듯이 만년의 바흐는 복잡한 대위법 기술이나 변주곡에

    이상한 관심을 나타냈으며, 거기에 장인적인 연마의 극치라 할 수 있는 것과 정신적인 깊이를 서로 이웃한 걸작을 남겼다.

     

     <푸가의 기법>은 그 곡명에서도 나타나 있듯이 작곡자가 일하는 방에서 순수하게 생각했다는 아취가 있음에 대하여

    <음악의 헌정>은 바쳐진 상대는 물론이고 음악을 즐기는 사람 전체에 대한 친근감 내지 대화 등이 곡명에서도 들려온다. 바흐의 사후에 음악을 대위법적으로 쓰는 방법은 진부하다고 간주하여 급속히 쇠퇴되어 갔으므로 이 <음악의 헌정>은

     대위법 음악에 있어서 최후의 보배라는 이유를 갖게 되었다 할 수 있다.

     

    뭐라고 해도 여기에 제시된 작곡 기법의 자유자재함과 감정 표현의 깊이는 서양 음악사상에서도 그 예가 드문 것이라

    할 수 있다.

    <음악의 헌정>은 두 곡의 리체르카레(푸가와 비슷함), 아홉 곡의 각종 카논, 한 곡의 카논 풍의 푸가, 그리고 한 곡의 트리오 소나타로 이루어져서 모두가 동일한 주제에 기초를 두고 있다.


    [감상] <음악의 헌정> 전곡은 프리드리히 대왕의 주제에 의해서 다단조를 중심으로 쓰여져 있다.

    이 주제는 다단조의 으뜸화음을 분산형으로써 끝까지 올려 <사>의 다음은 내림가로 가고, 거기에서부터 6도 하강시켜

     일단 <나>로 낙착시킨 후에 <사>로부터 차례로 반음을 전하고, 절분음을 섞어서 한 옥타브마다 이 동안에 모였던

     에너지를 이어지는 상행의 커다란 움직임 속에 발산하며 트릴을 거쳐서 일단락짓는 것이다.

     

     이 주제의 표현상의 핵심의 하나는 6도 하강인데 여기에서는 대단히 인상적으로 울린다.

    이어서 반음풍의 하강구로서 여기에 내림나음이 있으면 12음렬이 된다는 근대적인 것이다.

    <음악의 헌정>은 다음과 같은 곡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Ricercare a 3 (Harpsichord)
    3성 리체르카레 (하프시코드)

    Canon perperpetuus super thema regium(Flute,Violin,Cello*)
    카논 (플루우트,바이올린,첼로)

    Canon a 2 (Harpsichord)
    2성 카논 (하프시코드)

    Canon a 2 Violini in unisono (2 Violins,Cello,Harpsichord)
    2성 카논 (2대의 바이올린,첼로,하프시코드)

    Canon a 2 Per motum contrarium (Flute,Violin,Viola)
    2성 카논 (플루우트,바이올린,비올라)

    Canon a 2 Per augmentationem,contracrio motu (2 Violins,Cello*)
    2성 카논 (2대의 바이올린,첼로)

    Canon a 2 Per tonos (Violin,Viola,Cello)
    2성 카논 (바이올린,비올라,첼로)

    Fuga Canonica in Epidiapente(Flute,Violin,Cello,Harpsichord)
    푸가 (플루우트,바이올린,첼로,하프시코드)

    Ricercare a 6 (Harpsichord)
    6성 리체르카레 (하프시코드)

    Canon a 2 (Harpsichord)
    2성 카논 (하프시코드)

    Canon a 4 (Flute,2 Violins,Cello,Harpsichord)
    4성 카논 (플루우트,2대의 바이올린,첼로,하프시코드)

    Trio : Largo-Allegro-Andante-Allegro (Flute,Violin,Cello,Harpsichord)
    트리오 소나타 (플루우트,바이올린,첼로,하프시코드)

    Canone perpetuo (Flute,Violin,Cello,Harpsichord)
    카논 (플루우트,바이올린,첼로,하프시코드)

    여기서 리체르카레란 단일 주제의 기교적인 처리, 혹은 계차적인 여러 주제의 처리로서 가장 기교적인 푸가를 말합니다. Cello옆에 *가 붙은 건 아마 지금의 계량된 첼로가 아니고 당대의 비올라 다 감바(Viola da gamba)인 것 같습니다.

     



     

     

    바흐(J.S. Bach, 1685-1750)

     

    바로크의 태양이 지고 있다.

     휘영청 밝은 달빛이 창문 깊숙이 스며들며, 세상 아름다움과 몇 해 전부터 인연을 끊은 늙은 바흐를 비추고 있었다.

    영주들도 항복할 만큼 기세등등하고 완고했던 요한 세바스티안 바흐, 위대한 칸토르, 작곡가, 지휘자로서의 파란만장한 명성을 누렸던 별이 까무러지고 있었다.

     

    200년에 걸쳐 50명 이상의 음악가를 배출한 대음악가계의 후손인 요한 세바스티안 바흐의 집안은 유전학상으로도 많은 흥미를 불러 일으켰다.

    1685년 아이제나하에서 출생한 그도 거리의 악사, 작곡가, 칸토르 등 다양한 음악직업을 가진 선조들로부터 그는

    아낌없는 재능을 물려받았다.

     

    당시의 모든 변변찮은 음악가들의 형편이 그렇듯이 그의 집 안도 넉넉한 편은 아니었다.

    그래서 틈틈이 집안일을 도우며 학교를 다녀야 했지만 영특한 바흐는 언제나 학급에서 일등이었다.

     1694년 잇달아 부모가 돌아가시는 바람에 바흐는 맏형 요한 크리스토프를 따라 오르도르프로 이사했다.

     

    형은 바로크 시대의 대작곡가 요한 파헬벨의 제자였으므로 바흐도 그 영향을 단단히 받았다.

    그의 형은 프로베르거, 케를, 북스테후데 뵘 등의 작품사보를 많이 가지고 있었지만 바흐를 무시하여 잘 보여주지

     않았으나 집념이 강한 바흐는 그 많은 악보를 남몰래 필사하여 누구보다도 뛰어난 독보력으로 공부했다.

     

    1700년 봄 형의 가족이 늘어나 더 이상 군식구로 붙어 있기가 불편했던 바흐는 북독일 뤼네부르크에서 급비생으로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바흐가 18세 되던 해, 아른시타트의 교회 오르간 주자로 취임해 그의 실력을 인정받아 이례적인 높은 급료를 받았다.

     그는 오르간 주자로서만 아니라 성가대 연습도 맡았는데 그의 완고한 성격과 젊은 대원들의 혈기 왕성한 성격은 거리

    에서 난투극을 벌일 정도로 심각했다.

     

    그러다가 아른시타트 성직회의와 결정적으로 충돌한 것이 1705 10월 휴가 후의 일이었다.

     무엇이나 새것을 좋아하고 훌륭한 것에 깊은 감동을 받을 줄 아는 바흐는 1705 10월에 한 달의 휴가를 얻어 뤼베크를 방문해 북스테후데의 명연주를 들었다.

     

    그의 장려한 오르간곡과 칸타타에 흠뻑 빠져든 바흐는 무려 4개월을 아무 소식도 없이 뤼베크에 머물렀다.

    가뜩이나 젊은 성가대원들과의 불목과 괴상한 연주법에 머리를 흔들던 시의회원들은 더 이상 그를 내버려둘 수가 없었다. 이 시대는 바흐가 오르간 연주와 작곡의 기초를 굳혀가며 자기 양식을 만들고 있던 때로서, 시의회원들이 "괴상망측한

    음악 같지도 않은 소리들"이라고 부르던 곡들이 태동되고 있었다.

     

    이 시대에 만들어진 전주곡과 푸가, 혹은 토카타와 푸가에는 북스테후데의 매혹적인 영향이 강하게 나타나 있고, 유명한 D단조의 토카타와 푸가(BWV 565)도 그 가운데 하나였다.

     

    1707 6월 아른시타트 성직회의와 충돌한 후 그는 뮐하우젠에서 새 직장을 구하고 육촌동생인 마리아 바르바라와 결혼했다.

     

    이 고장에서 1708 2월에 작곡한 "하느님은 나의 왕이시로다"( 71)는 북독일 악파의 양식에 의한 장려한

    작품으로서 바흐 생전에 출판된 유일한 교회 칸타타였다.

     바흐는 1708 7월 바이마르에 새 직장을 얻어 오르간곡의 시대를 열었다.

    그는 이 고장에서 교회의 오르간을 자신의계획에 따라 개조했으며 그 많은 바흐의 오르간곡이 이곳에서 탄생되었다.

     

    바흐는 지극히 독일적이면서도 결코 독일의 울타리에만 갇혀 있지 않고 여러 국민의 양식을 융합시키는 도예가였다.

    그는 이탈리아 작곡가 비발디의 신선한 매력에 끌려 그가 작곡한 협주곡을 오르간이나 쳄발로로 편곡하여 전혀 새로운

     느낌을 맛보게 했다.

    바이마르 시대 후기의 오르간곡은 라틴적인 명쾌함이 물씬 풍기는 것도 바로 그 영향 때문이라 할 수 있다.

     

    1713년 헨델을 존경했던 바흐는 그의 탄생지인 할례에서 직장을 구하려 했다. 할례의 의원들은 바흐의 오르간 연주와

     칸타타의 작곡에 감탄하고 있었으므로 그를 기꺼이 맞 아들이려 했으나 급료문제로 의견을 일치할 수가 없었다.

     

    바흐는 스스로의 능력에 적합한 보수를 바라며 추호의 양보도 하지 않았기에 취직을 할 수 없었다.

     그러나 바흐가 다른 직장을 구하려 한다는 소식을 들은 바이마르 영주는 그를 놓치고 싶지않아 그의 봉급을 증액시키고

     1714 3월 궁정악단의 지휘자로 임명하며 대신 매달 교회 칸타타 한 곡씩을 작곡하도록 정했다.

     

    이로써 바흐는 칸타타 시대에 돌입하여 제 61 ", 오라 이방인의 구세주여!"(Nun komm, der Heiden Heiland),

    31 "하늘은 웃고 땅은 환호하도다!"(Der Himmel lacht die Erde jubiliret), 61 "오라, 그대 달콤한

    죽음이여!"(komm, du, Stlsse Todesstunde) 등의 명작이 태어났다.

     

    바이마르에서 바흐는 다섯 아이의 아버지로서 가정과 경제가 모두 안정되었고 교우관계도 비교적 원만했던 행복한 시절이었다.

    그는 이때 토카타 아다지오와 푸가 C장조(BWV 564)를 작곡했다.

    이 곡은 특이한 형식과 화려한 연주 효과를 갖는 오르간 칸타타로서 그가 매료되었던 비발디와 북스테후데의 영향을

    깊이 받았다는 것을 보여주었는데 이태리 협주곡의 3악장 형식을 사용한 화려한 페달 솔로에는 복스테후데의 모습을,

    푸가에는 쿠우나우 풍의 유머가 넘실거리고 있다.

     

    이렇듯 활동적이고 안정된 기반에 어둔 그림자가 드리운 것은 1716년 영주와 그 조카 사이에 일어났던 권력 다툼

    때문이었다.

    그 둘 모두와 친분을 맺었던 바흐로서는 처신하기가 매우 난처했으며 더우기 궁정악장이 죽자 그 후임으로 내정될

    것이라는 기대가 어긋난 것은 바흐가 바이마르를 떠날 계기를 마련해주었다.

    바흐의 재능을 아끼던 영주는 간청과 협박으로 그를 묶어두려 했으나 고집불통이고 완고한 바흐를 꺾는 데는 실패했다.

     

    바흐는 쾨텐 궁정악장으로 취임하여 1723년까지 지냈다. 1720년 쾨텐에서 안정된 생활을 누리던 바흐는 바르바라의

     죽음으로 큰 슬픔에 빠져 또다시 방황을 시작했다.

    그러다가 1723년 라이프치히의 토마스 교회 칸토르 자리가 공석이 되어 바흐는 세번째 인물로 선택되었다.

     

    "최고가 거절했으니 중간 정도의 인물이라도" 선정하겠다는 라이프치히 시참사원들의 거만한 태도는 몇 년 동안 바흐에게 고된 시집살이를 시켰다.

     

    시 참사회, 성직자회의, 대학 당국 등 세 부류의 상사가 바흐 활동에 커다란 장애가 되었으며, 그들 사이의 반목은 바흐의 깊은 괴로움이었다.

    게다가 라이프치히의 합창단의 질은 낮았고 규율도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았으며 봉급도 그가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작아 교회 음악에 대한 그의 열의는 급속도로 식어갔다.

     

    바흐의 태만에 분노한 시 참사회가 감봉처분을 결정하자 바흐는 드레스덴에 있는작센 선거후(選擧候)의 궁정작곡가라는 칭호를 얻어내려고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에게 호의를 갖고 있던 작센후는 1736 11월에 기꺼이 그 작호를 내렸고, 바흐의 예측대로 이 명예는 효과가 있어

    그 이후 바흐에 대한 노골적인 간섭은 현저히 줄어들었다.

     

    바흐 생애의 마지막 화폭은 포츠담 방문이다.

    계몽군주였던 프리드리히 2세를 방문한 바흐는 왕이 제시한 주제를바탕으로 즉흥연주를 해 왕을 감격시켰다.

     

    이때 연주된 곡이 바로 "음악의 헌정(Musikalisches Opfer)"(BWV 1079)이다. 그리고 그 해 6월 이론가 미슬러

    (Lorenz chistoph Mizler)가 창립한 음악가 협회에 가입하여 "높은 하늘에서(Vom Himmel hoch)"(BWV 769)

    작곡 출판했다.

     

    그리고 1748년부터 1749년에 걸쳐 마지막 대작 "푸가의 기법(Die kunt der Fuge)"(BWV 1080)을 진행하고

    있었으나 악화된 그의 건강은 미완성 곡을 남기고 말았다.

    1749 5월 시력이 급속히 감퇴하여 50년 두 번에 걸친 수술을 받고 더 악화되어 완전히 시력을 잃고 말았다.

     

    위대한 음악의 도예가 바흐는 바로크 시대의 마지막 커튼을 내리며 별빛 속으로 사라졌고, 그의 죽음과 더불어 고전파의 탄생이 장엄한 서곡을 펼쳤다.

    그의 진가는 세기가 흐를수록 더욱 드러나 누구도 모방할 수 없는 위대한 명성을 빛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