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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LASSIC

Tchaikovsky, Piano Concerto No.1 in Bb minor) Op.23/Vladimir Horowitz

 


 

 

1st Mov. Allegro non troppo e molto maestoso

 

1악장 : Allegro non troppo e molto maestoso(너무 빠르지 않게 그리고 매우 웅장하게)

웅장하고 풍부한 색채로 시작하는 1악장은 소나타 형식을 취하고는 있지만 조성과 전개가 자유로운 편이다.

 오히려 환상곡적인 느낌까지 드는 이 1악장은 오케스트라의 강렬함과 화려하고 육중한 피아노가 서로 대결하는 듯

조화를 이루는 모습이 특징으로서, 장대한 1주제와 낭만적인 2주제의 뚜렷한 대비가 인상적이다.



2nd Mov. Andante semplice

 

2악장 : Andante semplice(느리고 간결하게)

느린 안단테 악장과 스케르초 악장을 뒤섞어놓은 듯한 혁신적인 악장.

어머니의 이야기를 듣고 잠이 드는 아기의 평온함으로 시작하여, 프레스티시모로 질주하는 환상 속의 동화를 꿈꾸다가

첫 자장가로 돌아오는 모습은 지극히 전원적이고 평화로운 모습을 연상시킨다.



3rd Mov. Allegro con fuoco

 

3악장 : Allegro con fuoco(빠르고 격렬하게)

 

피아노 협주곡 역사상 가장 맹렬하고 장대하며 스펙터클한 악장으로 손꼽힌다.

오케스트라의 네 마디 서주 후부터 펼쳐지는 피아노의 굵고 거친 슬라브 무곡풍의 론도 주제와 이어지는 간결한 가요적인 부주제가 잇달아 펼쳐지며 서정과 기교의 긴박감 넘치는 조화와 대비를 이룬다.

 

특히 마지막 피아노 코다 부분에서의 빠르고 강렬하며 비르투오시티 넘치는 옥타브와 이어지는 오케스트라 총주의

터질 듯 벅차오르는 사운드는 러시아의호방함과 저력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아마도 피아노라는 악기가 지구상에서 완전히 사라진다고 하더라도 차이콥스키의 피아노 협주곡 1번의 유명세는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이 작품이 초연된 지도 어느 새 150년을 바라보고 있지만, 작품에 대한 애정과 유명세는 점점 더 증폭되어 왔지 단 한 번도 줄어든 적이 없기 때문이다.

차이콥스키의 이 대곡은 피아니스트라면 응당 연주할 수 있고, 연주해야만 하며, 이 곡을 통해 비로소 피아니스트로 인정받을 정도로 프로 연주자로서의 가능성과 예술성을 가늠하는 척도이기도 하다. 차이콥스키는 총 세 개의 피아노 협주곡을 작곡했지만 이 가운데 1번 협주곡만이 유독 유명하다.

흥분에 들뜬 회상이든, 괴롭고 즐거운 기억에 대한 체념이든 간에 이 곡의 가장 큰 주제는 ‘향수’다. 이 ‘향수’가 바로 러시아 낭만주의를 지탱하는 뿌리임은 분명하다. 우리가 다른 작품에서도 항상 느껴 왔듯이, 러시아인이라면 필수적으로 가지고 있는 능력이 바로 절망 속에서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키는 무엇인가를 뽑아내는 능력이다.

 

 

 

피아니스트들의 시작이자 끝인 협주곡

 

차이콥스키는 절망과 불행한 상황 속에서 이 곡의 작곡을 시작했다. 그러나 결국엔 감동적이고 성공적인 작품으로 발전되었다는 점에서 전형적인 러시아 작품이라 말할 수 있다. 철인 3종 경기에 맞먹을 만한 강인한 지구력과 원자폭탄과 같은 폭발력, 목가적이고 가요적인 정서를 극대화시킬 수 있는 러시아적인 멜랑콜리가 이 곡의 매력이다.

무엇보다도 피아니스트의 마법적인 음색과 초인적 기교를 갖추고 있지 않으면 이 작품의 진정한 모습을 발견할 수 없다. 차이콥스키는 러시아적 흙냄새와 호방한 사운드를 조합해 피아노 협주곡 1번이라는 걸작을 남겼다.

그러한 만큼 이 곡은 음반이라는 새로운 미디어가 발매되기 시작한 무렵부터 지금까지, 일반적인 경우 다른 음반사나 자사의 레퍼토리와 겹치는 경우 레코딩을 회피하곤 했지만, 모든 피아니스트들이 상업적 비즈니스의 이해관계와는 상관없이 한 번 이상은 반드시 녹음해야만 할 정도로 융숭한 대접(물론 슈나벨이나 폴리니, 브렌델과 같은 예외의 경우도 있지만)을 받고 있다.

CD로 발매된 종류만 해도 무려 150종이 넘는 음반이 발매되었으니(복각되지 않은 LP시대의 녹음까지 합하면 더 많을 듯하다), 단연 최고의 베스트셀러 레퍼토리임을 확인할 수 있다.

레코딩이 발명된 이후 셀락이나 왁스를 재료로 한 디스크들이 상업적으로 널리 판매되기 시작했던 1920년대부터 이 작품은 초미의 관심사였다.

전기녹음이 도입되기 이전인 1925년까지는 녹음 기술에 문제가 많았으나 피아니스트 빌헬름 박하우스가 어쿠스틱 레코딩을 1921년과 1922년에 각각 남겼다. 그러나 레코딩 테크놀로지의 한계로 이 녹음과 작품은 그다지 주목받지 못했다. 전기녹음이 도입된 이후 처음으로 마르크 함부르크의 녹음이 등장했고, 비로소 차이콥스키 피아노 협주곡 1번은 레코드 필청 레퍼토리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

 함부르크는 리스트와 더불어 19세기 피아노 교육의 양대 산맥이었던 레셰티츠키의 제자였다. 그는 러시아 출신다운 화려한 테크닉과 탁월한 힘, 빼어난 지구력을 자랑하는 피아니스트였다.

1926년 함부르크는 HMV 음반사에서 로열 앨버트 홀 오케스트라와 랜던 로날드의 지휘로 지금의 버짓 프라이스에 해당하는 ‘블랙 라벨’로 음반을 녹음했고, 이 음반은 삽시간에 전 세계적인 히트를 기록했다.

현재 일본 Greendoor 레이블로 발매되어 비교적 어렵지 않게 감상해볼 수 있는데, 극심한 루바토와 열악한 음질에도 불구하고 불을 뿜는 듯한 테크닉, 다이아몬드처럼 빛나는 터치, 안정된 호흡으로 훌륭한 비르투오시티을 들려주고 있다.

 뿐만 아니라 마르크 함부르크 자신이 살았던 19세기 러시아 낭만주의 시대의 열정과 온기를 고스란히 전달해 주고 있다. 그러나 1930년대 전설의 피아니스트 블라디미르 호로비츠가 등장하고 나서야 차이콥스키의 이 괴물 같은 대곡은 진정한 의미에서 불멸의 지위를 얻게 된다.

 

 

 

구제불능의 2류 작품이라는 혹평을 받다

차이콥스키의 얼룩진 삶에 끈질기게 실처럼 따라다녔던 것은 신경쇠약 증세였다. 성공보다는 실패에 더 민감했던 차이콥스키는 그가 음악의 구세주라고 생각했던 모차르트와 자기 자신을 비교하며 형식미와 구성력의 부족함을 특히 한탄했다. 자기 자신에 대해 항상 비판하고 회의했던 그는 이 피아노 협주곡 1번에 대해서도 확신을 가지지 못했다.

그리하여 그의 스승이자 당시 러시아 피아니즘의 대부로 손꼽히던 니콜라이 루빈스타인에게 이 작품을 보냈고 그의 의견을 기다렸으나 결과는 참담했다.

루빈스타인은 이 작품을 엉뚱하고 기괴하며 거북스럽기 그지없는, 한마디로 구제불능의 곡이라고 신랄한 평을 서슴지 않았다. 문제는 연주하기에 너무 어렵고 악장들은 너무 잘게 조각 나 있으며 서투르게 취급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덧붙여 이런 2류 작품은 반드시 대대적으로 수정을 해야만 자신이 연주를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에 대한 내용은 차이콥스키가 후원자인 폰 메크 부인에게 쓴 편지에 대체적으로 정확하게 적혀 있다.

격분한 차이콥스키는 독일의 명 피아니스트이자 지휘자인 한스 폰 뷜로에게 이 작품을 헌정했다.

 이 작품의 가치를 인정했던 뷜로는 이 곡을 미국 연주회 도중 1875년 10월 25일 벤저민 존슨 랑의 지휘와 함께 보스턴에서 초연했고 대성공을 거두었다. 같은 해 모스크바에서도 연주해 호평을 받게 되었다.

결국 3년 뒤에는 루빈스타인이 직접 화해를 구하게 되었고 두 사람의 우정은 다시 회복되었다고 한다. 이후 차이콥스키는 이 작품에 수정을 가하여 모스크바의 유르겐슨 출판사를 통해 세 개의 판본을 발표했다.

첫 번째는 1875년에 완성한 ‘오케스트라 반주의, 혹은 두 대의 피아노를 위한 피아노 협주곡’이고, 두 번째는 1879년 9월 개정된 판본, 마지막 세 번째는 1889~90년에 개정된 판본이다. 그러나 문제는 여기서 출발한다.

 이 작품은 독일의 지휘자 한스 폰 뷜로에게 헌정되었고, 뷜러는 이 작품을 초연했다.

차이콥스키는 분명 루빈스타인의 비평에 “나는 음표 하나라도 고치지 않겠습니다.”라고 말했지만, 시간이 지난 뒤 결국 고치고야 말았다. 차이콥스키는 다른 사람들의 비판에는 귀를 기울였지만, 이 작품을 최초로 본 루빈스타인의 비판은 무시했다.

“진정 하나의 진주와 같은 작품”이라고 극찬한 초연자 뷜로가 어떤 조언을 했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지만, 분명한 사실은 1876년 런던 초연의 협연자로 나선 에드워드 댄로이터의 수정이 두 번째 판본에 영향을 끼쳤다는 것이다.

댄로이터는 초연 당시 프로그램 노트에 해설을 쓰기도 했다. 1969년 발견된 댄로이터의 가필 판본은 그의 수정이 부분적으로 반영되었음을 확실하게 알려주고 있다.

특히 차이콥스키는 1876년 댄로이터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의 ‘현명하고 실제적인 제안들’에 감사를 표했고, 재출판될 경우 의견을 반영하겠다고 썼다. 차이콥스키는 루빈스타인의 감정에 찬 비판은 거부한 채, 댄로이터의 건설적인 제안을 선택적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블라디미르 호로비츠, Vladimir Horowitz (1903 - 1989)

 

러시아출신의 미국 피아니스트

블라디미르 호로비츠(Vladimir Horowitz,1903-1989)라는 피아니스트가 20세기의 수 많은 피아니스트들 중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그리고 그 위치는 어느 정도일까?

 

극단적이고 편협한 비교가 되겠지만 음악가, 연주자로서의 호로비츠는  리히터나 제르킨에 견줄만한 인물은 못 된다.

연주자로서 성장하기 시작할 무렵이었던 1920년대에서 30년대에 걸쳐 미국 청중들을 열광시켰던 호로비츠의 음악에는 어느 정도는 불가피하게또 어느 정도는 고의적으로, 당시 만연하고 있었던 미국식 상업주의의 영향이 깃들어져 있었던 것이 사실이었으며 이후에는 상당히 정치적인 입김까지 호로비츠의 음악을 따라다녔던 것이다.

 

쟁 중, 혼란스러웠던 유럽대륙을 피할 수 있었던 것이 호로비츠의 행운이었다면, 평생동안 미국을 중심으로

연주활동을 펼쳤던 것은 어떤 의미에서 호로비츠의 불행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호로비츠에 대한 찬사의 이면에는 항상 개운치 않은 그림자가 따라 다녔고 유명한 평론가인 마이클 션버그는 '악기에 대한 놀라운 재능이 음악적 이해와 항상 같이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라고 비난하기까지 했었다.

그러나 호로비츠는 의심할 여지도 없이 20세기 최고의 피아니스트라고 할 수 있다.

매스컴이나 대중의 관심도로 비추어 봐도 그를 능가할 인물은 찾을 수가 없다.

그 이유는 일차적으로 그가 갖고 있는 독창적인 연주 스타일 때문이라고 할 수 있는데투명하면서도 찬란한 음색, 그리고

다이내믹한 터치와 색채의 뉘앙스는 그만의 전매 특허였다.

 

특히 스크리아빈의 곡에서 보여 준 힘과 세기의 변화는 이 작곡가의 위대함을 온 세계에 알려 준 독보적인 것이었다.

호로비츠는 그 자체로서 극히 카리스마적인 존재였고 청중들을 열광시킬 수 있는 조건을 완전히 갖추고 있었으므로,

음악을 통하여 자신이 가진 그대로를 고스란히 보여주었을 뿐 자신의 음악이 상업주의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굳이

숨기려 하지 않았었다.

 

1930년대의 청중들에게는 거의 상상도 하기 힘든 정도임에 틀림없었던 놀라운 손가락 기교에 피아노 전체가 진동하는

듯 한 큰 음량, 여리고 서정적인 부분에서 흘러 나오는 티 없이 맑은 소리 등등 그에게는 청중들을 매료시킬 수 있는 완전

한 조건을 갖추고 있었던 피아니스트였다.

 

그는 '벨칸토야 말로 피아노 연주의 미학이다'라고 말하면서 레가토의 개념을 해석에 전용시키고 있어 힘이 넘치는 가운

데서도 줄곧 노래를 부르는 듯한 유연한 연주를 들려주었다.


 

블라디미르 호로비츠는 1903년 10월 1일, 우크라이나의 케이프에서 태어났다.

본래의 이름은 호로비츠가 아니라 고로비츠(Gorowitz)였으며 1925년 베를린 데뷔시에 이름을 바꾸게 된다. 아버지는

저명한 전기 기술자였으며 어머니가 피아니스트였기에 6세부터 어머니에게서 레슨을 받기 시작했다.

1912년 키에프 음악원에 입학아여 세르게이 타르노프스키(Sergei Tarnowsky)에게 공부했고, 안톤 루빈스타인의

수제자 펠릭스 브루멘펠트(Felix Blumenfeld)에게 사사했다.

 

가장 정통적인 러시아 음악의 흐름을 이어받을 수 있는 축복받은 조건이었다.

피아노에 관해, 특히 기술적인 면에 관해서는 블루멘펠트가 호로비츠에게 가르쳐 줄 것은 이미 없었다고 한다.

특히 그에게서 배우면서 작곡에 큰 관심을 가져 장차 작곡가가 되려는 꿈을 품기도 했었다.

 

1919년 라흐나미노프 피아노협주곡 3번을 연주곡으로 키에프 음악원을 졸업했으며920년 독주연주회를 열었다.

호로비츠의 삼촌 또한 당시 상당한 명성을 가지고 있는 음악학자였는데, 스크리아빈과 개인적인 친분이 있었던 관계로

어린 호로비츠와 스크리아빈을자주 만나게 하였고, 이 때의 인연으로 호로비츠는 평생에 걸쳐 스크리아빈의 음악을

즐겨 연주하게 된다.

 

결과론적 이야기가 되겠지만 실제로 당시 별다른 시선을 끌지 못하고 있었던 스크리아빈의 피아노 작품들의 상당수가

호로비츠 덕분에 유명해진 측면도 있다.

 

호로비츠의 음악가로서의 장래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 사건은 1917년의 볼셰비키 혁명이었다.

부유했던 그의 집안은 혁명으로 인해 완전히 몰락하게 되고 호로비츠는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부득이 피아니스트로

데뷔하게 된다.

키에프를 중심으로 작은 리사이틀을 가지던 호로비츠는 1922년 카르코프에서 연주를 가졌고, 이것이 큰 성공을 거두어

계속해서 15번의 리사이틀을 열게 되었다.

그의 리사이틀은 모스크바와 키에프로 이어지면서 명성을 얻게 되고 1924년에서 25년에 걸쳐 11개의 프로그램을

가지고 23번의 리사이틀을 여는 등 70여회의 콘서트를 가지면서 초인적인 기량을 과시한다.

 

 

1925년엔 러시아를 떠나 독일로 갔다. 베를린에서 3번의 리사이틀을 성공적으로 마친 호로비츠는 다음 해 함부르크에

서 후에 자신의 트레이드 마크나 다름없는 곡이 되는 차이코프스키의 1번 협주곡을 연주하여 청중들을 경악하게 한다.

1926년 어느 여류 피아니스트 대신 연주회에 출연하여 차이코프스키의 피아노 협주곡 제1번을 연주하여 하룻밤에 이름

을 떨치는 계기를 잡았다.

 

그 결과 유럽의 여러 도시에서 연주회를 가지게 되었고, 가는 곳마다 대단한 화제를 불러 일으켰다.

1927년, 당시 최고의 흥행사였던 아더 짓슨에게 발탁되어 미국에 데뷔하게 된다.

당시 미국의 청중들에게 호로비츠라는 존재는 단순히 음악적인 차원을 떠나 매우 신선하고 충격적인 존재일수 밖에

 없었다.

 

 러시아라는 먼 땅에서 건너온 핸섬한 청년 호로비츠,압도적인 기교, 폭발하는 듯한 강렬한 터치, 애매함이라고는 \

티끌만큼도 없이 명쾌한 연주, 평론가와 청중들은 새롭게 등장한 호로비츠에게 완전히 매료되기 시작했으며 다음

해인 1928년 토머스 비첨과 함께 한 뉴욕 데뷔연주는 그의 명성을 결정적으로 굳히는 계기가 된다.

 

이 연주회는 동시에 비첨의 뉴욕 데뷔이기도 했으며 프로그램은 차이코프스키의 1번 협주곡이었다.

후에 토스카니니와 협연하여 음반으로 남은 기록을 통해 생각하더라도 이날 뉴욕의 청중들이 받은 충격의 크기는

대강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그 때를 기억하는 많은 피아니스트들이 '당시의 호로비츠는 폭풍이었다'라고 술회했듯이 그의 연주는 얼마간 요란스러

우면서도 당시의 상식을 완전히 뒤집는 신선함과 흡인력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호로비츠가 토스카니니와 만난 것은

1932년의 일이다.

 

흔히 토스카니니가 호로비츠의 음악적 성숙에 큰 영향을 주었다고 이야기하는데두 사람의 음악적 스타일에 상당한 공통

점이 보이는 것은 사실이지만 과연 그것이 두 거장의 만남이 있은 이후에 호로비츠에게 일어난 변화에 의한 것인지

 어떤지는 의심스럽다.

 

토스카니니와의 만남과 호로비츠의 음악관이 변화한 것은 시기적인 일치 이외에는 그다지 상관관계가 없는 듯 한데,

 다만 두 사람이 협연할 때에 토스카니니의 음악적 고집을 호로비츠에게 강요한 것은 사실이라고 한다.

 

예민한 성격이었던 호로비츠가 의외로 순순히 토스카니니와 타협을 보았다는 것도 재미있는 일이기는 하다.

이러한 만남을 계기로 호로비츠는 토스카니니의 딸 완다와 결혼하여 평생을 함께하게 된다.

     

     




      이후 유럽을 중심으로 왕성한 활동을 펼치던 중 1936년에 건강에 손상을 입어 일체의 연주활동을 중지하는 비운을 당한다.
      이 무렵부터 호로비츠의 은퇴-복귀가 시작되게 된다. 1930년대,호로비츠는 그야말로 엄청난 숫자의 콘서트를 가졌으며 누적된 육체적, 정신적 피로로 인해 자신을 정비할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는 이후에도 수술의 후유중, 피로, 신경쇠약 등의 이유로 평생동안 4번의 공백기간을 가지게 된다.
      그러나 1939년 파리공연을 통해서 그는 거장적 풍모를 보여 주었고그 후에도 그의 음악은 계속 성장하였다. 1940년, 미국에 정주하기로 결심했으며, 1944년에 미국 시민권을 획득했다.1950년대에 와서 호로비츠의 예술활동은 정점에 올라서게 됐고 1953년엔 미국 데뷔 25주년을 축하하는 모임이 있었다.
       이 무렵 호로비츠는 명실상부한 세계 최고 거장의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건강이 다시 나빠져서 이후 12년간 연주계를 떠나 있을 수밖에 없었다. 1963년 레코딩 활동을 다시 시작했고 1965년 4월, 12년간의 공백 끝에 카네기홀에서 가진 복귀연주는 센세이션을 불러 일으켰다.
       사람들은 반 클라이번이 차이코프스키 콩쿨에서 우승했을 때 보여주었던 것과 비슷하게 호로비츠에게 열광했으며 연주 당일 카네기홀은 호로비츠의 모습을 보려는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이 날의 실황은 레코드로 제작되어('The Historical come back' CBS) 엄청난 판매량을 기록했고, 두고두고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전설'이 되었다. 
      1986년 이미 80을 훌쩍 넘긴 호로비츠는 갑작스럽게 DG와 전속계약을 맺는다. 일생에 걸쳐 RCA,CBS 두 레코드사와 함께 해 온 호로비츠가 만년에 이르러 갑작스레DG와 계약을 했다는 것 자체가 놀라운 일이었지만, 그가 사망할 때까지 몇 년 간DG에서 녹음한 음반에는 또 하나의 완전히 새로운 음악세계가 담겨 있다. 이전까지의녹음에서 들려주던 음악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음악을 호로비츠는 만들어 냈던 것이다.
      이 시기에 녹음된 슈만의 '크라이슬레리아나' 같은 곡은 과거의 녹음과 비교해보면 확실히 기교의 쇠퇴와 체력의 노쇠를 느낄 수 있다. 스크리아빈의 연습곡에서도 터치의 명료함에 있어 60년대의 녹음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뒤쳐져 있음을 느낄 수 있다.
      하지만 DG에서 남긴 모차르트의 소나타와 몇 곡의 소품들에게서 호로비츠가 평생을 걸쳐 도달한 음악의 결론이 담겨 있다고 단언해도 좋을 만큼 빼어난 연주를 들을 수 있다. 단 한 소절만을 들어도 그 비범함은 쉽게 느낄 수 있다. 
      이것은 리히터와는 또 다른 의미에서 말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1986년 호로비츠는 꿈에도 그리던 모스크바 연주를 가지게 된다. 'Horowitz in Moscow'라는 제목으로 DG에서
      음반과 영상물로 출판되어 있는데, 단순히 뛰어난 연주라는 것 이상의 감동을 전해주는 귀중한 기록이다. 이 연주가 진행되는 도중에는 당시 세계를 양분했던 두 초강대국간의 갈등도,대립되는 이념으로 서로를 왜곡하고 있던 시민들의 시각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단순히 감상적인 이유에서가 아니라 이 영상물을 보고 있으면 - 물론 뛰어난 연출력 때문이기도 하지만 - 무의식 중에 가슴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낀다.

      호로비츠가 미국에서 가진 마지막 연주도 바로 이 해 가을에 링컨센터에서 이루어졌다.

      다음 해에 호로비츠는 런던과 빈, 암스테르담, 함부르크를 순회하면서 그의 공식적인

      마지막 순회연주회를 가졌다.

       

      1989년 11월 5일 호로비츠는 병석에서가 아니라 스튜디오에서, 자신의 녹음을 편집하던 중

      갑작스런 심장발작으로 사망했다. 건강상태는 나이에 비해 극히 양호한 편이었다고 한다.

       

      평소 부인인 완다에게 남긴 유언에 따라 호로비츠는 이탈리아의 밀라노에 있는 토스카니니의

      가족묘에 묻히게 되었다.호르비츠의 레퍼토리는 대단히 넓은 편이었으며,그리고 그가 연주하는

      곡은 그 어떤 것이든 호르비츠류로 변환되기 마련이었다.

       

      초기에 녹음된 리스트의 피아노 소나타프로코피에프의 피아노 소나타,스크리아빈의 피아노 작품집, 쇼팽의 피아노

      소나타, 슈만의 <어린이 정경>등은 호로비츠 예술의 핵심에 다가갈 수 있는 첩경을 제공해 주었다.

       

      젊은 시절에 들려 주던 음악에서 호로비츠에게는 확실히 기교와 음악성 사이의 괴리를 느끼게 하는 점이 있었다.

      프로코피에프의 소나타, 쇼팽의 발라드, 폴로네에즈 등에 대한 일반적인 높은 평가는 필요 이상으로 분명 과대평가

      된 것이며 거의 연주하지 않았던 베토벤에 대해서 그는 분명 부적격자였다.

       

      피아니스트로서 베토벤을 잘 연주하지 못한다는 것은 치명적인 것이다. 그렇다고 호로비츠가 코르토나 프랑스와처

      럼 프랑스 음악의 스페셜리스트도 아니었으며 어떤 작곡가의 음악을 끈기 있게 연주하여 전곡을 완성한 경우도 사

      실상 없기 때문에 상대적인 평가절하를 받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이라 생각한다.

       

      하물며 연주회의 앙코르로 '성조기여 영원하라'를 피아노용으로 편곡하여 연주하면서 거의 광란에 가까운 환호성

      을 받았던 사실은 분명히 거부감을 줄 수 있는 점이다.

       

      하지만 만년에 이르러 열린 일련의 연주여행에서 이미 자신의 몸도 제대로 가눌 수 없을 정도로 노쇠한 몸으로 제대

      로 깎지 않아 시커멓게 때가 낀 손톱을 하고서도 건반 앞에만 앉으면 천상의 소리처럼 맑고 아름다운 음악을

      들려 주며 어린이처럼 기뻐하던 그의 모습에서 더 이상 누가 '상업주의에 물든 장사꾼'이라고 비난을 할 수

      있을 것인가?

       

      호로비츠가 베토벤의 음악을 잘 연주하지는 못했지만 호로비츠의 생애는 베토벤의 음악을 닮았다.

      젊은 시절의 패기에 넘치고 스피디한 연주스타일에서,폭발적인 힘과 당당함을 함께 갖추었던 장년기, 슈만과

       스카를랏티를 중심으로 점차 세련된 모습을 갖추어가던 60년대, 그리고 마지막으로 모차르트의 티없이 맑은

       세계에 도달하여 사심 없이 흥겨워하는 모습은 꼭 베토벤의 마지막 소나타를 떠올리게 하는 것이다.

      출처 : 네이버 블로그 빈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