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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LASSIC

Mozart, Symphony No.40 in G minor, K.550

 

 

 

Nicolaus Harnoncourt/Concentus Musicus Wien - Mozart, Symphony No.40, K.550

 

 

 

 

 

 

Mozart, Symphony No.40 in G minor, K.550

모차르트 교향곡 40번

Wolfgang Amadeus Mozart

1756-1791

 

 

모짜르트의 기념비    

 

 

1악장: 몰토 알레그로

 

그중에서도 교향곡 40번 G단조 K.550은 모차르트의 교향곡 중에서도 오늘날 가장 많이 애청되는 곡입니다. 아마 모차르트의 작품 전체를 통틀어도 가장 인기 있는 곡들 가운데 하나일 성싶습니다. 특히 바이올린과 비올라가 연주하는 1악장의 주제 선율을 모르는 분들은 아마 없을 것 같습니다. 서주 없이 곧바로 등장하는 주제 선율입니다.

이른바 ‘한숨의 동기’로 불리는 단2도의 음형이 몇 차례 이어지다가 하행하는 선율이 연주되지요. ‘단단다안’ 하고 전개되는 이 동기를 잘 기억해주시기 바랍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되게 등장하면서 구조적 통일감을 이뤄내고 있습니다. 두 번째 주제는 바이올린에 목관이 합세하면서 서정적이고 평화로운 느낌으로 펼쳐집니다.

슬픔과 불안의 정조를 밑바닥에 깐 채, 하지만 겉으로는 애써 슬픔을 지우면서 격정적으로 흘러가는 악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2악장: 안단테

 

2악장은 위로의 느낌으로 가득한 안단테 악장입니다. 앞의 8마디에서 바이올린이 비선율적인 음계를 연주합니다. 8분음표의 리듬 음형이 잔잔하게 반복되지요. 그 반복 리듬을 밑에 깔고 호른과 첼로가, 이어서 바이올린이 상승하는 주제 선율을 연주합니다. 두 번째 주제는 반대로 하강하지요.

부드럽고 평화로우면서도 짙은 슬픔의 그림자를 느끼게 하는 악장입니다. 뒤로 갈수록 고통스러운 느낌이 점점 배가됩니다. 앞의 악장에도 등장했던 ‘한숨의 동기’가 좀 더 흐릿한 형태로 등장하면서 슬픈 탄식의 분위기를 자아내지요. 마지막 종결부에 들어서면 자조하듯이 스르르 흩어지는 음형을 연주하면서 끝납니다.

3악장: 미뉴에트. 알레그레토

 

3악장은 짧은 미뉴에트 악장이지만 ‘프랑스 궁정의 우아한 춤’이라는 고전적 의미와 판이한 분위기를 연출합니다. 춤의 리듬을 밑바탕에 깔고는 있지만, 가볍고 우아하기보다는 장중한 쪽에 가까운 선율들이 펼쳐집니다.

 큼직하고 대담한 음형들이 긴장감 있게 펼쳐지다가 트리오 부분으로 넘어오면서 현악기가 연주하는 평화롭고 다정한 목가적 선율이 등장하고, 이어서 클라리넷을 비롯한 관악기가 아련한 느낌으로 호응합니다. 그러다 다시 장중한 분위기로 돌아오지요.

4악장: 알레그로 아사이

4악장도 3악장처럼 짧은 악장입니다. 템포는 알레그로 아사이(Allegro assai). ‘매우 빠르게’라는 말답게 속도가 격렬해집니다. 뭔가 급박하게 상승하는 선율이 첫 번째 주제로 등장합니다.

 긴박감 넘치는 선율이라고 할 수 있지요. 관현악이 힘찬 경과부를 연주한 뒤 이어지는 두 번째 주제는 좀 더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선율입니다. 마지막 장면은 슬픔의 심연으로 가라앉는 듯한 느낌을 전해줍니다.

 

 

 

 

 

모차르트가 남긴 교향곡은 모두 41곡입니다. 동시대의 작곡가 하이든이 썼던 100곡 이상에 견주자면 적은 분량이지요. 하지만 모차르트는 자신보다 24세 연상이었던 하이든보다 훨씬 먼저 이 세상을 떠났으니, 35년간의 짧은 생애에 41곡의 교향곡을 썼다는 사실은 모차르트의 천재성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증표라고 하겠습니다.

 첫 번째 교향곡은 고작 여덟 살이던 1764년에 작곡됐지요. 아버지 레오폴트에 이끌려 서유럽 곳곳을 여행하던 시기에, 사실 그것은 결코 안락한 여행이 아니라 혹독한 연주 투어였지만, 어쨌든 그 시기에 런던에서 작곡됐습니다. 자필악보에 ‘볼프강 모차르트의 교향곡, 런던, 1764년’이라고 적혀 있습니다.

물론 여덟 살이었던 모차르트가 그렇게 썼다기보다는 그의 아버지 레오폴트가 기입해 넣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모짜르트의 생가

 

 

 

 

 

아시다시피 모차르트는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 태생이고, 그곳에서 노상 툴툴대면서 콜로레도 대주교의 ‘음악 하인’으로 살았지요. 지금도 이 작은 도시는 ‘모차르트’라는 브랜드로 먹고 살고 있습니다. 모차르트의 생가가 보전돼 있는 이곳에서는 매년 7월에서 8월까지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이 열립니다.

세계 곳곳에서 관광객들이 몰려들어 숙소가 모자랄 정도입니다. 그중에서도 모차르트 생가가 있는 게트라이데 거리(Getreidegasse)가 가장 붐비지요. 6층짜리 건물이 1917년에 모차르트 박물관으로 조성됐는데요,

 사실 모차르트 가족은 그 건물의 2층에 세 들어 살았습니다. 저는 한 4~5년쯤 전에 잘츠부르크에 간 적이 있었는데, 모차르트 생가를 들어가 보려다가 그만두었던 기억이 납니다. ▶잘츠부르크 게트라이데 거리에 있는 모차르트의 생가.

왜냐구요? 입장료가 상당히 비쌌기 때문입니다. 물론 비용 자체가 아까워서 그랬던 건 아닙니다. 사실 그날 저는 심사가 좀 뒤틀려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모차르트를 소비하는 방식’에 왠지 진절머리가 났던 까닭이지요. 게트라이데 거리에 즐비하게 늘어선 명품 숍들, 쇼핑을 하느라 북적대는 인파를 헤집고 걷는 것에 슬슬 짜증이 일기 시작했습니다.

식당마다 만원이어서 맥도날드에 들어가 햄버거로 배를 채웠는데, 세상에나, 그렇게 맛없는 햄버거는 생전

처음이었습니다. 축제 기간이 아니었는데도 그랬습니다. 모차르트의 생가에 도착해서는 급기야 실망감이 최고조에 달했던 것 같습니다.

모차르트는 1781년에 콜로레도 대주교와 결별하고 잘츠부르크를 떠나 빈으로 갑니다. 그것은 자신을 옥죄던 권위로부터의 탈출이었습니다. 궁정의 안락한 월급쟁이로 살기보다는 자유로운 음악가로 살겠다는 선언이었던 셈이지요. 아울러 ‘아버지와의 결별’이기도 했습니다. 아버지 레오폴트는 모차르트가 빈으로 가는 걸 반대하는 입장이었습니다.

 하지만 모차르트는 아버지의 뜻을 거스릅니다. 이때부터 세상을 떠나던 1791년까지를 ‘모차르트의 빈 시절’이라고 합니다. 모차르트의 나이 스물다섯에서 서른한 살까지입니다.

모차르트는 그 10년 동안 수많은 걸작을 작곡했는데 그의 작품목록 중에서 거의 절반에 가까운 곡들을 이 시기에 썼습니다. 교향곡은 모두 여섯 곡을 썼지요. 빈에 도착하고 1년 뒤에 썼던 교향곡 36번 K.385 ‘하프너’부터 마지막 교향곡인 41번 K.551 ‘주피터’까지, 말하자면 오늘날까지 빈번히 연주되는 모차르트의 교향곡들입니다.

 

 

교향곡에 대한 기존의 인식을 바꾸다

그중에서도 마지막으로 작곡한 세 곡을 ‘최후의 교향곡’이라고 합니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최후의 3대 교향곡’이라고 칭하지요. 이렇게 세 곡을 한 덩어리로 취급하는 까닭은 1788년 여름, 불과 1개월 보름이라는 짧은 기간에 거의 동시에 작곡됐기 때문입니다.

모차르트가 남긴 ‘자작품 목록’에 따르면 39번은 6월 26일, 40번은 7월 25일, 41번은 8월 10일에 각각 완성했습니다. 이 세 곡은 모차르트 교향곡의 정점으로 평가받으면서, 교향곡에 대한 기존의 인식을 바꿔 놓은 중요한 모멘트로 서양음악사에 자리해 있습니다. 알려져 있다시피 18세기에 교향곡은 그다지 비중 있는 장르가 아니었지요.

‘오페라의 서곡’이라는 태생적 한계를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하지만 모차르트의 마지막 교향곡 세 곡은 그런 관념을 여지없이 흔들어 놓습니다. 말하자면 음악적 규모와 완성도, 드높은 정신성의 추구라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물론 하이든이 영국 런던에서 발표했던 일련의 교향곡들도 규모가 훨씬 확장됐고 이전의 교향곡들과 구분되는 완성도를 보여줬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모차르트가 남긴 세 곡의 교향곡보다 몇 년 뒤에나 가능한 일이었지요.

베토벤이 교향곡 3번 ‘에로이카’를 통해 교향곡을 ‘음악의 황제’로 격상시켰던 것은 1804년, 그러니까 19세기로 접어들어서의 일이었습니다. 그런 맥락에서 보자면 모차르트가 남긴 마지막 교향곡들이야말로 18세기 교향곡의 정점을 찍으면서 19세기로 진입하는 장면을 가장 먼저 보여준다고 얘기할 수 있습니다. ▶<교향곡과의 만남>(앤드루 후스 지음ㆍ김병화 옮김).

마지막 교향곡 세 곡은 동시에 작곡됐음에도 스타일과 분위기가 각기 다르지요. 이 또한 모차르트의 천재성을 거론할 때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근거 가운데 하나입니다. 국내에도 번역ㆍ출판돼 있는 <교향곡과의 만남>(앤드루 후스 지음ㆍ김병화 옮김)이라는 책에서는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모차르트 최후의 교향곡 세 곡은 각 작품들이 가진 스타일과 분위기의 다양성이라는 면에서 충격적이다. 39번 E플랫장조는 고요하며, 40번 G단조는 열정적으로 강렬하며, 41번 C장조는 찬란하게 빛난다.”

 

 

모차르트 탄생 250주년 기념 축제 니콜라우스 아르농쿠르의 축하연설

 

신사 숙녀 여러분! 저는 모차르트가 작곡한 교향곡이야말로 이 축제의 진정한 서막이라 여깁니다. 이제 연주하게 될 교향곡은 모차르트가 작곡한 세 개의 마지막 교향곡(39, 40, 41번) 중에서 가운데 곡입니다. 분명 이 세 개의 교향곡은 인간이 목적지로 가기 위해 택한 일종의 길을 나타냅니다.

이 마지막 세 교향곡의 첫 곡은 E플랫장조인데, 이것은 사랑의 조성이며 동시에 ‘의례적 장중함’의 조성이기도 합니다. 여기서 시작해 모차르트는 G단조 교향곡으로 넘어가 앞선 모든 것이 의심되는 깊이 있는 단계로 우리를 인도합니다. 그리고 ‘주피터 교향곡’의 현란한 C장조로 이어지는데, 이 곡에서는 모든 것이 해결되고 전에 마음이 혼란스러웠던 사람들이 하모니 속에 평온함을 느끼게 합니다.

모차르트는 41개의 교향곡을 작곡했지만 G단조는 25번 교향곡과 함께 두 곡밖에 없습니다. 당시에는 G단조가 죽음과 슬픔의 조성으로 이해되었습니다.

‘한숨의 동기’가 나오는 첫 주제 악장에서는 단 한 개의 음도 바로 연주되지 않습니다. 모든 음은 위에서 아래로, 또는 그 반대로 연결되는 자식음인 ‘아포지아투라’(appoggiatura)를 갖고 있어서 매우 단순하고 당연한 것이 흐릿해집니다. 마치 물방울을 통해 보는 것처럼 불명료해지는 것입니다.

 두 번째 악장은 ‘주피터 교향곡’에서 살짝 숨겨져 있기도 한 푸가 주제로 시작합니다. 이것은 E플랫장조인데 마치 첫 번째 악장의 악몽을 완전히 없애려는 듯, 더 나은 세상을 향한 희망을 호소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모든 언어가 무색해지고 우리가 그 앞에서 잠잠해져야 하는 이 놀라운 음악을 들으신 후에 저는 이제 모차르트와 그를 기념하는 올 한 해에 대해 말씀을 드려야겠습니다.

 아니, 어떤 축하연설도 이 음악에서는 적합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제가 모차르트의 음악 외에 다른 것을 말할 수 있겠습니까? 아무도 할 수 없는 것인데, 이제는 모두가 음악 외적인 것에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올해 오스트리아는 모차르트와 동일한 말이 되어버렸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모차르트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이 모든 것이 돈을 벌고 사업과 관련된 것이어서 유감이라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부끄러워해야 합니다. 모차르트가 우리에게 요구하고 있고 지난 200년이 넘게 우리에게 요구해온 바는 너무나 단순할 것입니다.

우리는 매우 엄숙히 그리고 주의 깊게 그의 음악을 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만약 우리가 그의 말없는 간청과 호소를 이해할 수 있다면 우쭐해하기보다는 진실로 부끄러워해야 합니다.

우리는 지금 그를 축하하고 있는데 그것이 마치 우리가 우리 자신을 축하하고 싶다는 것으로 보입니다. 우리는 자랑할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것은 모차르트가 빈과 잘츠부르크에서 살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는 천재의 가차 없는 엄격함으로 무언가를 요구하는데, 우리는 경제적 증대 효과와 사업상의 거래로 그를 축하하고 그의 음악을 모든 종류의 경영 채널을 통해 조각조각으로 흩어 보내고 있습니다. 추악하며 수치스러운 것이죠.

어떻게 그것이 용납될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반성의 한 해가 의미를 가지려면 우리는 모차르트의 음악을 듣고, 듣고, 또 들어야 합니다. 그럴 때 모차르트가 전하는 메시지의 일부라도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모차르트는 우리의 시상식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그를 필요로 하는 것이며 그의 격동하며 요동치는 폭풍을 갈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한 해는 실로 우리를 위한 기회인 것입니다.

모차르트가 이룬 성과는 무엇일까요? 바로 예술 자체입니다. 그것은 음악이고 우리는 그 음악을 통해 이루어 온 것과 지금도 이루어 가고 있는 것, 또 이루지 못한 것을 설명해야 합니다. 음악과 예술은 인간의 삶에 꼭 필요한 중요한 부분입니다. 그것은 실용적인 것과 균형을 맞추도록 우리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철학자들이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것은 예술이며 음악이라고 말할 때 저는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설명하기 어려운 매혹적인 선물이며 마법의 언어입니다.

현 세대들은 행복의 기대치가 물질적인 것에서만 얻을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당장 쓸모 있는 것에만 점점 집중하고 있습니다. ‘행복은 성공과 동일하고, 성공은 재산과 같다. 나는 더 많이 소유할수록 더 잘 살게 된다.’

이러한 태도는 이미 학교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예술 과목들, 상상력에 도전하는 모든 것들과 인간의 삶에 필수불가결한 ―혹자는 '필수불가결하게 되고 싶은' 이라고 말하고 싶겠지만― 대부분의 것들이 억압받고 있습니다.

요즘은 대부분의 아이들이 노래를 하도록 권유받지 않기 때문에 더 이상 노래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어떻게 노래해야 할지 모르고 아예 아는 노래조차 없습니다. 하지만 음악을 만들고 음악을 이해하는 것은 이미 3, 4, 5세 때 시작됩니다. 이후에는 이것이 방송이나 워크맨에 맡겨지게 됩니다.

만일 예술교육이 독서, 쓰기, 그리고 수학과 동일한 중요성을 갖고 있지 않다면, 우리는 이미 이러한 지경에 이르렀는데 실용주의가 모든 것을 지배한다면, 물질주의와 탐욕이 우리 시대의 맹목적 종교가 될 극도의 위험에 처하게 됩니다.

우리의 아이들이 단순한 기술 훈련이 아니라 완전한 교육에 대한 권리를 갖고 있음을 다급하게 경고합니다! ‘피사 연구’(Pisa Study)처럼, 음악을 다소 경시하는 경향이 우리의 교육 목표가 잘못 설정되었다는 증후입니다. 저는 예술에 대한 관심이 상류층에서 확고하게 되는 데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오히려 가장 고급화된 형태의 예술은 아무도 그 언어를 이해할 수 없을 때 결국 공허한 외침이 되리라는 것이 진실입니다. 음악은 교만하고 자기만족적이며 특권을 갖고 있는 소수만의 신비한 언어가 아닙니다.

모든 사람은 그 메시지를 이해할 수 있고, 어린 나이부터 안테나가 바르게 맞추어졌다면  부유함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예술의 보이지 않는 힘은 강력하고 위험스러우며 그 효과는 파괴적입니다. 그런 이유로 권력을 가진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이것을 활용하려 애쓴 것입니다. 하지만 예술은 언제나 권력에 반대하고 그 어떤 지배도 받지 않으며, 길들여질 수도 전유될 수도 없기에 그들의 시도는 성공할 수 없습니다. 예술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언어이지만 말의 언어보다도 진리에 더 가깝습니다.

위대한 작곡가들의 음악은 항상 그 시대의 영적 상황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해 왔습니다. 모차르트의 G단조 교향곡이 처음 연주되었을 때 사람들은 당시로서는 충격적인 음악어법이 허용될지에 대해 반신반의했습니다.

 그때 음악을 들은 사람들은 이 교향곡이 극단적인 음악언어의 형태라고 느꼈습니다. 아무도 편안한 마음으로 집에 돌아갈 수 없었던 것 같습니다.

예술은 어떤 깨달음에 이르도록 인도하며 때로는 강제하기도 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보아야만 하는 거울입니다. 거울은 보지 않기 위해 사람들은 예술을 단지 미학적이거나 대중적인 어떤 것으로 접근하는 방법을 취합니다.

 ‘듣기 좋은’ 음악을 듣고, ‘보기 좋은’ 그림을 보면서 되도록이면 파괴적인 경험에 노출되거나 철저하게 분쇄당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게 됩니다.

50년 전 오케스트라의 단원이었을 때, 저는 일 년에 몇 차례 모차르트의 G단조 교향곡을 연주해야 했는데 그것은 항상 부드럽고 아름다웠습니다. 청중들은 행복에 젖어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였고 곡이 끝나면 ‘모차르트 행복감’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하지만 제 책상 위의 진실은 다른 것을 말하고 있었습니다. 멜로디, 화음, 그리고 리듬, 모든 것이 의심의 대상이 되었고 정말로 파괴되어 있었습니다.

그 어떤 것도 미뉴에트 악장의 ‘로맨틱한 트리오’와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아마도 2차 대전 후라는 시대 상황에서 사람들이 가장 극명하게 정반대되는 경험을 했기 때문에 현란한 하모니와 순수한 행복감을 필요로 했다는 사실로 설명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때는 모차르트 음악에 관한 해석이 다소 밝고 긍정적인 면은 강조하고 파괴적인 면은 억압하는 양상이었습니다.

이 교향곡은 개인적으로 저의 ‘운명 교향곡’(제 개인의 운명에 관한 교향곡)이 되었고 제 인생을 영구히 바꾸어 놓았습니다. 왜냐하면 오케스트라의 첼리스트로 17년을 지낸 어느 날, 저는 더 이상 그 곡을 그런 식으로 다시는 연주하고 싶지 않았고 그래서 오케스트라를 떠났기 때문입니다.

이 교향곡은 많은 문학작품이나 공예품과 똑같이 위대한 본보기가 됩니다. 예술은 얼마나 멀리 갈 수 있고 가야하는가? 또 청중은 무엇을 받아들일 준비가 될 수 있고 되어야 하는가? 모차르트는 계속 이 한계에 매우 가까이 다가갔습니다.

 

 

모든 위대한 예술가들과 마찬가지로 모차르트는 인간으로서 미스터리로 남아 있습니다. 그는 정말 불가사의합니다. 사람들은 모차르트에 대한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의 인생은 서류상으로 매우 잘 정리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모차르트에 관해 무언가를 말하고 싶을 때 사람들은 전혀 알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우리는 결코 모차르트에 관한 진실은 알 수 없을 것입니다. 진실이라고 여기는 것은 우리가 스스로 만들어낸 이미지입니다. 그의 음악만이 진실을 담고 있습니다. 인물을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해 보이기 때문에 이중적 견해에 이르게 됩니다. 그것은 마치 두 명의 모차르트가 있는 것과 같습니다.

 피아노를 치고 있는 아이, 활달하고 외향적인 젊은이, 모차르트의 친구들은 그가 결코 우울해한 적이 없으며 젊어서부터 세련된 필체로 편지를 쓴, 교양 있고 재치 넘치며 자기 확신에 찬 인물이었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전기를 통해 아는 경제적ㆍ예술적 위기를 겪고 가정사에 문제를 안고 있는 모차르트, 그는 부자였을까요, 가난했을까요? 그는 아버지와 다투었을까요, 아니면 그 관계가 조화로운 사랑의 관계였을까요?

 빈에서 초연된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이 성공하지 못하자 모차르트는 예술가로서 실패했을까요? 저는 이런 이야기들을 한 마디도 믿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오스바르트 슈펭글러(Osward Spengler)가 말했듯이 자연은 과학적으로 다루어져야 하지만, 역사에 대해서는 시를 써야 하기 때문입니다.

또 다른 모차르트는 진실한 바로 그입니다. 이해할 수 없고 생각을 넘어서며 어떤 평가를 내리기가 불가능한 존재인 것입니다. 우리의 척도가 모차르트와 맞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고 부끄러워해야 합니다.

모차르트는 다른 행성에서 온 것 같습니다. 오직 자신의 음악을 통해 살고 있습니다.

매순간 심각하고 농담을 하고 있을 때조차도 숨 막힐 듯 답답합니다. ‘음악적 농담’(Musikalischer Spass)도 오페라 <자이데>(Zaide)에서 나오는 ‘유령과 같은 분위기의 웃긴 아리아’처럼 어둡습니다.

 

아버지가 어린 모차르트에게 천재성을 발견했을 때 그것은 가족에게 틀림없이 놀라운 일이었을 것입니다. 유쾌하고 총명한 어린아이를 대면하고 그가 악어와도 같이 무시무시한 존재임을 발견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모차르트와 같은 천재는 갑자기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우주에서 떨어지는 유성과 같습니다.

 

연주하는 어린아이가 어른이었던 것입니다. 인간 사회에는 천재를 양육하는 모델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런 악마적 존재는 그의 환경을 지배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는 ‘양육될’ 수 없고 가족에게 사랑받는 존재임과 동시에 두려움의 대상이 됩니다. 아주 초기 작품에서 예술가로서 모차르트의 길은 외부 환경과는 정반대로 절대적으로 확고하며 놀라운 확신으로 특징지어집니다.

 심지어 아이일 때도 모차르트는 정서적으로 경험하거나 겪을 수 있었던 범위를 넘어서는 작품을 작곡했습니다.

 

우리에게 언제나 젊은 청년으로 남아 있고 또 언제나 젊은이였던 모차르트에게 사랑과 죽음, 비극과 죄, 그리고 행복에 관한 가장 극단의 비밀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모차르트는 우리로 하여금 마음 깊은 곳을 들여다보게 하고, 그 다음 하늘을 올려다보게 합니다.

아마도 그는 신의 손에 들린 펜대였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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