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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LASSIC

Mozart's love과 아내에게 보내는 편지

 

 


 

 

             

Symphony No.25 in G minor, K.183                                                                                     

제 1악장 Allgro con brio g단조 4/4박자 소나타 형식                                                                                                                                      

 

 

 

 

 

 

 

모자르트의 편지

 

  모차르트의 아내 콘스탄체는 악처로 유명하다. 사치가 심해 모차르트를 힘들게 했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이다. 그런데 아래 제시하는 편지를 보면 소문만큼 대단한 악처는 아니었던 것 같다.

 모차르트의 경제적 어려움과 이른 죽음을 애도하는 후대 사람들이 콘스탄체를 비난하면서

위안을 삼은 것은 아닐까?

 

  아내에게

   

  사랑하는 아내,

 

  하루에 한 번밖에 편지를 쓰지 않는 것을 용서하오.

그 이유는 그를 붙들어서 도망하지 못하게 해야 하기 때문이오.

 나는 매일 아침 7시에 그의 집에 도착하오.

 

  어제 당신에게 보낸 편지는 받았겠지. 당신이 말한 풍선 구경을 가지는 않았소.

왜냐하면 그런 것은 머릿속에서도 상상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오.

게다가 이번에는 아무 이득도없을 것이오.

 

그러나 빈 시민들은 어찌나 좋아하는지 놀랄 지경이오.

그들은 지금까지 그를 욕했던 것만큼이나 그를 칭찬하느라 정신이 없을 지경이오.

 

  당신의 편지에는 읽을 수 없는 대목, 이해할 수 없는 대목이 있소. 당신은 “나의 남편은 오늘도 많은

com에서 잡담하고 있을 텐데……”라고 쓰고 있는데

나는 com이 company의 약자라고 추측하지만 numerous company가 무엇을 뜻하는지 이해할 수 없구려.

 

 

  사워메이어에게 내가 프라이머스로 뛰어다닐 시간이 별로 없었고 또 내가 갈 때마다 그가 집에 없더라고

전해주기 바라오. 그가 불평하지 않도록 그에게 3굴덴을 주기 바라오.

 

  나의 유일한 희망은 일이 다 해결되고 당신과 함께 있게 되는 것이오. 이 오랜 동안 얼마나

당신이 보고 싶었는지 당신은 상상을 할 수도 없을 것이오.

 

 그 동안의 느낌―나를 괴롭히는 공허함, 채워지지 않는 그리움, 그것은 사라지지 않고

 끈질기게 나를 따라다니면서 매일매일 커가는데―은 이루 표현할 수가 없소.

바덴에서는 마치 어린애들처럼 함께 즐거워했는데 여기서는 정말 서글프고 괴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고

재미가 없소. 가끔 일을 중단하고 당신이 옆에 있는 듯이 상상적인 대화를 해보는 버릇이 다 들었소.

 

  아! 이 기쁨도 잠깐이오. 피아노 앞에 앉아서 오페라 <마적>에 나오는 노래를 부르다간 또 곧 멈추어야 하오. 너무나 깊이 감정을 건드리기 때문이오. 좋아! 이 일만 끝내면 즉시 출발하여 이곳에서 멀리 가버리려 하오.

 당신에게 특별히 더 전할 소식은 없소. 바덴에서는 조명이 너무 일찍 켜졌던 듯하오.

 

 

 

사실은 그 반대이지만.

궁중 약제사에게 문의하여 연약(煉藥)을 구할 수 있는가 알아보겠소. 구하게 되면 곧 보내겠소.

그 동안 필요하다면 브랜디보다는 주석(酒石)을 복용하기 바라오. 사랑하는 아내여, 안녕!

 

 

1791년 7월 7일 빈에서    

                                                                                                                                         당신의 모차르트

 

 

 

 

 

 

 

 

모차르트(Wolfgang Amadeus Mozart, 1756~1791)

 

모차르트의 생애는 참으로 극적이다. 다섯 살에 작곡을 시작하여 여섯 살에 이미 신동으로 이름을

 떨치기 시작했다.

 

첫사랑의 연인 알로시아와의 비련, 그녀의 동생 콘스탄체와의 결혼, 허영과 애정이 뒤섞인 아버지와의 갈등, 끊임없는

유럽 순회공연, 왕족과 귀족들로부터의 뜨거운 갈채,살리에리를 비롯한 동료들로부터의 질시로 인한 중상과 비난,

생기발랄하고 천진난만했던 천재 작곡가를 무너뜨린 가난, 병, 그리고 흔적조차 모르는 주검과 무덤.

 

모차르트는 열정과 고뇌로 가득 찼던 생을 살면서 불멸의 작품을 남겼으나 신마저 질투하여 35세를 일기로 세상을 뜨고

 말았다.

600여 편에 이르는 작품은 아름답고 심오하고 완벽하여 그가 작곡한 곡을 듣는 청중은 찬탄을 금치 못하고 있다.

모차르트는 시기와 음모에 휘말려든 말썽 많은 예술가였고, 교회와 귀족의 허울 좋은 비호에 대항했던 혁명가이기도 했다.

 

모차르트의 아내 콘스탄체에 대한 세상의 평은 지금까지도 좋지 않다. 변덕스러웠다느니 낭비벽이 심했다느니 하는 소문

 외에도 소크라테스나 톨스토이의 아내와 더불어 역사상 유명한악처의 한 사람으로 손꼽히기까지 한다.

 

세상 사람들의 평가는 별 이유도 없이 그 사람의 장점은 덮어두고 단점만을 부각시키는 경우가 있는데, 모차르트의 아내가 대표적인 예일 것이다.

세평(世評)의 안개를 걷어내고 보면 두 사람 사랑의 실상은 순수하고 아름다웠다.

모차르트의 첫사랑은 참담한 실패로 끝난다.

모차르트는 스물두 살 젊은 나이에 만하임에서 소프라노 가수 알로시아 베버를 만나 사랑에 빠진다.

 

궁정 오페라단의 가수인 프리돌린 베버의 네 딸 가운데 둘째인 알로시아는 아버지의 후원으로 이미 오페라 무대에 단역으로 출연하고 있었다.

 

지휘자 카나비치의 안내로 놀러 간 베버의 집에서 모차르트는 피아노 솜씨를 한껏 자랑했다. 네 명의 아가씨가 모차르트의 피아노 솜씨에 넋을 잃고 둘러서 있었다.

그때 모차르트의 반주에 맞춰 알로시아가 노래를 불렀는데, 모차르트는 그 순간 사랑의 포로가 되고 만다.

노래가 끝났을 때 모차르트는 말까지 더듬고 있었다.

“다…… 당신의 노래는…… 그건 저…… 알로시아……”

 

 

  사랑에 취해 몽롱한 상태에서 집밖으로 나온 모차르트는 카나비치에게 알로시아를 보고 첫눈에 반했음을 고백한다.

 

  “정말 아름다웠어! 그 사랑스런 얼굴…… 검은 머리칼…… 하얀 목, 그리고 부드러운 손,

볼록하게 솟아오른 가슴…… 그리고…… 노래는 또 어떻고!”

 

  모차르트는 열렬한 마음을 담아 구애의 편지를 하루가 멀다하게 쓰고 두 사람의 사랑은 무르익어간다.

 

  그런데 이들이 쌓아올리던 사랑의 탑은 얼마 안 가 무너지고 만다.

가난한 궁정 오페라 가수의 딸인 알로시아를 후원하겠다는 후견인이 나타나자 알로시아의 마음은 한순간에 변한 것이다.

 

  ‘누가 내게 날개를 달아 주겠다는데 이 기회를 불장난 같은 사랑 때문에 놓치지 말자.’

 

  모차르트의 천재성을 인정하고 있던 알로시아였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모차르트의 앞날은 불투명했고,

자신의 앞날은 장마 끝 맑게 갠 날처럼 창창하게 느껴졌다.

 

  알로시아의 절교 선언에 이어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비보까지 날아오자 모차르트는 마음에 큰 상처를 입는다.

전기 작가 데이븐 포드는 이때 모차르트의 심정을 “파리에서 자기 가슴을 찢고 난도질했다”고 표현했다.

 

  사랑의 실패가 준 상처는 또 다른 사랑으로 치유된다고 했던가. 모차르트에게 새로운 사랑이 찾아온다. 그런데 그의 두 번째 사랑은 놀랍게도 자기에게 상처를 준 알로시아의 동생 콘스탄체였다.

 

  실연의 아픔을 준 알로시아가 요청을 하자 아리아 ‘포플리 디 테사글리아(작품 316)를 작곡해줄 정도로 넓은 도량을 지닌 모차르트는 베버 가족과도 교분을 끊지 않았다. 고향을 오래 떠나 있던 모차르트에게는 그래도 친분 있는 베버 가족의 환대가 눈물겹도록 고마웠기 때문이었다.

 

 

 

 

 

 

  몇 년 세월이 흘러 모차르트가 스물여섯이 되었을 때, 알로시아의 바로 밑 동생인 콘스탄체는

열여덟 살이 되어 있었다.

 베버 가족이 뮌헨에서 비엔나로 떠날 때까지 모차르트는 그들 가족과 거의 매일 함께 지냈다.

 

(알로시아는 그 사이 오페라 가수로 조금씩 명성을 얻으며 유럽의 대도시를돌고 있었다.)

 콘스탄체에게 피아노를 가르쳐 주면서 모차르트는 자신이 콘스탄체를 좋아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모차르트는 그녀와 함께 있으면 마음이 편했다. 그녀는 모차르트의 몸짓이나 억양만으로도

 그가 무엇을 원하는지, 무엇을 불편해 하는지 눈치챌 정도로 총명하였다.

 

  모차르트는 고향에 계신 아버지한테 편지를 쓴다. 연인을 칭송하기 위해 주변 사람들을

 묵사발로 만든 모차르트의 재치에 미소가 머금어진다.

 

  “제 사랑의 대상은 누구일까요? 다시 한번 부탁드리지만, 놀라지 말아 주십시오. 베버네 가족 중

하나가 아니냐구요?

  네, 그렇습니다. 그러나 맏딸 요세파도 아니고 막내 소피도 아닙니다.

바로 콘스탄체, 셋째 딸입니다.

 형제들 간에 그렇게 성격이 다른 집은 지금까지 본 적이 없습니다.

 

맏딸은 상스럽고 쓸모없고 불성실한 사람이라 도저히 믿을 수가 없습니다.

랑게 부인(베버의 누이동생)은 위선적이고 심술궂은데다가 교태까지 부리는 여자입니다.

 막내딸은 아직 너무 어려서 잘 모르겠지만, 상냥하고 덜렁대는 어린아이입니다.

 

그녀를 유혹에서 지켜주소서, 하느님! 그러나 셋째 딸, 내가 사랑하는 천사 콘스탄체,

이 모든 이로부터 고통을 받고 있는 그녀는 아마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마음씨가 가장 아름답고 가장 영리하며, 한마디로 말해 딸 중에서 가장 훌륭합니다.”

 

  아버지는 아들의 간곡한 편지에도 결혼을 허락하지 않는다. 모차르트는 아버지의 허락을 받기 위해

여러 차례 편지를 보냈지만 답변은 언제나 ‘절대 불가’였다.

 상류계급도 아니고, 가난한 며느리감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이다.

 

 

 

  결국 아버지의 허락을 받지 못한 상태에서 모차르트와 콘스탄체는 스테판 성당에서 결혼식을 올린다.

신부의 어머니와 여동생, 몇 사람의 후견인만 참석한 간소한 결혼식이었다.

신랑 신부가 혼인서약을 하면서 눈물을 흘리자 성당의 신부도 함께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모차르트는 결혼 직후 아버지한테서 두 통의 편지를 받는다. 아들의 결혼을 절대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것과 재정적인 후원을 끊겠다는 매몰찬 내용이었다.

 

  신랑의 아버지가 끝끝내 허락하지 않은 두 사람의 결혼은 그 누구의 환영도 받지 못한다.

하지만 결혼으로 정신적인 안정기에 접어든 모차르트는 이때부터 대작들을 작곡하기 시작한다.

 

<현악 4중주곡>, <피아노협주곡 D단조>, <피아노협주곡 C장조>, <피가로의 결혼>, <돈 조반니>,

36번 교향곡 <린츠>에서 41번 교향곡 <주피터>에 이르기까지의 교향곡들. 많은 사람들이

모차르트의 음악에 열광했다.

 

 

 

 

 

  하지만 아이들의 연이은 죽음과 경제적 궁핍 때문에 모차르트의 결혼 생활은 그리 행복하지 못했다.

 여섯 아이(일곱 아이라는 설도 있다) 중 두 아들만 살아남고 모두 죽는 비극이 연이어 일어났고,

모차르트의 나이 서른이 되었을 때 아버지도 세상을 떠났다.

 

  왕과 귀족들이 주는 후원금은 늘 넉넉지 못했다. 경제적 궁핍에서 벗어나고자 떠난 유럽 연주 여행은

오히려 빚더미에 앉게 하였다.

모차르트의 파산 지경에 이르렀다.

 

  이런 악재 속에서 모차르트의 몸과 마음은 지쳐가는데 세상의 비난은 콘스탄체에게만 쏟아졌다.

 아내의 낭비벽 때문에 저렇게 되었다는 세간의 악평 속에서도 두 사람의 사랑은 변함이 없었다.

아기는 계속해서 태어났고 두 사람의 상대방에 대한 헌신도 변함이 없었다.

 

  전기작가 프리드리히 슐리히테그롤은 콘스탄츠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콘스탄츠는 두 사람 사이에서 태어나 살아남은 두 아이의 훌륭한 어머니였으며, 모차르트의 어리석은

결정과 지나친 행동을 견제했던 훌륭한 아내였다.”

 

  세상 사람들은 불세출의 천재 작곡가 모차르트가 대단한 부자라고 생각했지만 현실은 정반대였다.

유모까지 합쳐 다섯 식구가 살아가기에 모차르트의 수입은 결코 많은 편이 아니었다.

모차르트는 몸에 무리가 계속 왔음에도 불구하고 경제적인 이유에서 작곡을 그만두고 쉴 수가 없었다.

 

  <피아노협주곡 제27번> <마술피리> <클라리넷협주곡 K.622>의 작곡을 마치고 <레퀴엠>에

착수하였다. 결국 그는 <레퀴엠>을 완성하지 못하고 심장에 온 충격과 과다한 출혈로 숨을 거두었다.

그때 그의 나이 불과 35세였다.

 

  사람들은 천재 음악가를 꾀어내 결혼을 하고는 살림을 못 살아 궁핍 속에 모차르트를

 죽게 했다고 콘스탄체를 맹렬히 비난했다. 경제적으로 힘든 상황과 세상 사람들의 비난 속에서도

두 사람의 사랑이 어느 한 순간도 변치 않았음은 모차르트가 아내에게 쓴 편지들이 증명한다.

모차르트가 세상을 떠나기 5개월 전에 아내에게 쓴 편지가 남아 그 사랑을 전하고 있다.

 

 

(……) 정말 보고 싶다오.

자, 이제 정말 건강하도록 해요.

 자주 웃고 재미있고 행복한 생각만 해요. ……

내 생각도 내 이야기도 자주 하도록 하고…….

 

내가 당신을 사랑하듯 날 영원히 사랑해주오.

그리고 영원한 나의 사랑이 되어주오.

 

안녕, 몸조심해요.

 

자, 잡아봐요. 붕! 붕! 붕! 설탕처럼 달콤한 키스 세 개가 당신을 향해 날아가고 있어요!

 

                                                                                                           모차르트

                                                                                                     1791년 7월 6일, 빈

 

 

 

 

 

  콘스탄체는 모차르트의 사후에도 아내로서의 역할을 확실히 한다. 엄청난 빚더미를 안고

신경쇠약에 시달렸지만 레오폴드 황제에게 탄원해 자선음악회 개최했고 연금 수혜를 허락받았다.

 

 모차르트가 남긴 악보도 팔아 재원을 마련한 그녀는 하숙집을 세내어 하숙을 쳤다.

그녀는 하숙생이었던 비엔나 주재 덴마크 대사관의 참사관 게오르크 니콜라우스 폰 니센과

1809년에 결혼했으나 슬하에 아이는 두지 못했다. 니센이 죽은 뒤 콘스탄체는 모차르트와의 추억을

정리해 전기를 출간하였다.

 

  모차르트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두 아이도 후사가 없어 대가 끊겼지만 모차르트의 무덤이 없는 것은

너무나 유명하다.

콘스탄체가 재혼을 앞두고 모차르트의 묘소를 찾았으나 17년 전 그의 시신을 공동묘지에 안치했던

 성당의 종지기는 이미 죽은 후였고, 공동묘지는 10년마다 새로 파기 때문에 모차르트가

묻혔던 자리를 확인할 방법이 없었다.

 

그의 장례식 때 무덤에 십자가나 표식을 할 생각을 한 사람이 없다는 것은 비극이었다.

모차르트가 숨을 거둘 무렵, 콘스탄츠 또한 몸이 아파 동생 소피의 간호를 받고 있었던 것이다.

모차르트가 사랑에 빠졌을 때 아버지한테 쓴 편지에 “상냥하고 덜렁대는 어린아이”라고 한 바로 그 아이였다.

 

                                                                                                                         ㅡ졸저『빠져들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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