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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LASSIC

Rachmaninoff Piano Concerto No. 3 in D minor, Op. 30 / Seong-jin Cho

 

 

 

 

 

 



 

 

14th International Tchaikovsky Competition
Round 3 (Final)

Rachmaninoff — Concerto for Piano and Orchestra No. 3 in D minor, Op. 30
Piano : Seong-jin Cho (He was 17 years old, 3rd Prize)
Conductor : Alexander Dmitriev

Great Hall of the Moscow Conservatory, June 27, 2011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 

 

 



 

 

 

 

  “라흐마니노프는 강철과 황금으로 만들어진 사람이었다. 강철의 팔과 황금의 심장!

나는 눈물 없이는 전지전능한 그의 존재감을 생각할 수조차 없다. 왜냐하면 나는 그의 탁월한 예술성을 존경했을 뿐만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도 그를 사랑했기 때문이다.” 

ㅡ1945년 5월 16일, 요제프 호프만

 

  1873년 러시아에서 태어나 1943년 미국에서 생을 마감했던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Sergei Rachmaninoff)는

자기 자신을 작곡가라고 생각했지만, 생의 마지막 30여년 동안에는 자신의 작품을 연주하고 녹음하는 피아니스트라는

두 번째 직업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볼세비키 혁명 이후 이역만리 타국에서 생활하기에 작곡가라는 직업은 배가 고플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 세월 동안 그가 보여준 놀라운 피아노 음악의 경지는 사람들로 하여금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고 결국 그를

전설적인 피아니스트로 아로새길 수밖에 없게 만들었다.

 

 

 

 

 

 

 

  정력적이고 외향적이었던 그의 친구, 피아니스트 요제프 호프만(Josef Hofmann)에 비해 라흐마니노프는 사색적이고 내향적이었는데, 그가 연주를 시작하면 곧 음표가 구조에 달라붙듯이 청동처럼 견고한 건축물로 변화하였다.

한편 호프만이 자연스럽고 다채로운 음색과 변덕스러울 정도로 거침없는 스타일을 구사한 반면, 라흐마니노프는

고집스러울 정도로 한결같은 음색과 기계적일 정도로 잘 계산되고 정돈된 스타일을 보여주었다.

 

그의 사진에서도 느낄 수 있는 수도승과도 같은 이미지, 즉 삭발에 가까운 머리 스타일과 고정된 시선, 굳게 닫힌 입술에서 느낄 수 있는 엄격함은 곧 그의 연주 및 작곡 스타일에서도 똑같이 적용되었다.

 

  러시아의 정서와 작곡가의 시성이 매 순간을 아름답게 채색하는 [피아노 협주곡 2번]이 라흐마니노프를 있게 한 가장 대중적이고 유명한 작품일지는 모르겠지만, [3번 협주곡]이야말로 피아니스트로서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고자 한

초월적 의지를 반영한 작품이다.

 

진정한 의미에 있어서 피아노의, 피아노를 위한, 피아노에 의한 협주곡이다. 오죽하면 작곡가 자신도 이 작품을

 “코끼리를 위해 작곡했다”라며 곤혹스러워했을까.

 

  1909년 라흐마니노프는 이바노프카의 시골집에서 평화로운 나날을 보내면서 자신의 미국 데뷔 무대를 위한 새로운

 피아노 협주곡을 작곡했다.

그러니까 이 [3번 협주곡]은 순수하게 미국을 위해 작곡한 곡으로서 작곡가로서는 자신의 기량을 한 번에 쏟아내어

새로운 무대를 휘어잡을 만한 도구가 필요했던 것이다.

 

 그의 바램대로 피아노 협주곡 역사상 무서우리만큼 가공할 만한 테크닉과 초인적인 지구력, 상상을 뛰어넘는 예술적

 감수성과 시적 통찰력을 요구하는 매머드급 작품이 탄생했다.

이 곡은 라흐마니노프를 미국으로 이끌었을 뿐더러, 예술적 동료로 평생토록 깊은 우정을 나누었던 피아니스트 호프만에게 헌정되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호프만은 이 작품을 연주하기에는 손이 작았기 때문에 공개석상에서는 한 번도 연주하지

못했다고 한다.

 

 

                                                                                                    

           라흐마니노프                                                                                                                                                     

 

  라흐마니노프는 자신의 모든 기교와 작곡 역량을 동원해 거대하고 초인적인 [피아노 협주곡 3번]을 완성했다.

1909년 11월 28일, 이 곡은 월터 담로슈(Walter Damrosch)의 지휘와 뉴욕 필하모닉의 연주, 라흐마니노프 자신의 피아노 연주로 초연되었고 7주 후 구스타브 말러(Gustav Mahler)의 지휘로 다시 한 번 연주되었다.

 

작품에 대한 청중들의 반응은 [피아노 협주곡 2번] 초연 때만큼 뜨거웠다고는 말하기 어렵지만 오히려 연주자

 라흐마니노프에게 관심이 집중되며 커다란 성공을 거두었다.

이 날의 성공 덕택에 다음 시즌 연주회를 위한 계약이 쇄도했고, 보스턴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상임 지휘자 직책까지

 제안받을 수 있었다.

 

이 작품은 연주하기가 너무나 힘들 뿐더러 그 정서적 표현 역시 당시로서는 대단히 혁신적인 곡이었다.

그래서 대중적으로 어필하기까지에는 1960년대 피아니스트 블라디미르 아쉬케나지(Vladimir Ashkenazy)가 등장할 때까지 50여년의 세월을 기다려야만 했다.

 

그러나 이보다 앞선 1928년 한 젊은 러시아 피아니스트가 나타나 이 [3번 협주곡]을 말 그대로 ‘삼켜버린’ 사건이

벌어졌다.

 

  

   라흐마니노프도 놀란 초신성 피아니스트 호로비츠의 연주

 

 

  1928년 1월의 어느 날, 뉴욕 카네기 홀 맞은 편에 위치한 스타인웨이 쇼룸에 두 명의 러시아 음악가가 마주보고 앉아

 있었다.

한 명은 시대의 거장으로 손꼽히는 라흐마니노프, 다른 한 명은 막 미국에 도착한 스물 다섯 살의 젊은 피아니스트인

블라디미르 호로비츠 (Vladimir Horowitz)였다.

 

1월 12일 지휘자 토머스 비첨과 뉴욕필과의 차이콥스키[피아노 협주곡 1번] 연주로 전설적인 데뷔 무대를 가진

호로비츠는 여세를 몰아 2월 23일에 라흐마니노프가 [3번 협주곡] 초연시 함께 했던 지휘자 담로슈의 지휘로

[3번 협주곡]을 연주하기로 했다.

이 만남은 이 연주회를 위해 작곡가와 연주자가 함께 한 리허설 성격의 만남이었던 것이다.

 바로 그 날의 만남이 음악사에 있어 ‘역사적인 만남’이라고 기록되는 이유는 곡의 창조자 라흐마니노프가 자신의

 [피아노 협주곡 3번] 연주에 관한 ‘권위의 봉인’을 호로비츠에게 물려주는 자리였기 때문이다.

 

언젠가 라흐마니노프는 호로비츠 연주를 듣고 너무 놀라 입을 벌린채 넋을 잃었다고 친구에게 말했을 정도로 무한한

신뢰를 보냈는데 특히 후배인 아브람 카신스(Abram Chasins)에게 “호로비츠는 이 작품을 통째로 삼켜버렸네”라고

 언급했을 정도였다.

그정도로 [피아노 협주곡 3번]과 호로비츠는 샴 쌍둥이와 같은 운명이었다.

 

  

                                                                                                              

                                                                                         

 

 

이 곡은 영화 <샤인>을 통해서도 잘 알려져 있다. 정신질환자인 주인공을 통해 이 곡의 연주와 해석의 어려움을

잘 나타낸 영화다.

 

 

  이 자리에서 라흐마니노프는 호로비츠의 조언에 따라 1악장과 2악장에서 짧은 삭제 부분을 결정했고(호로비츠는

2악장과 3악장에서 보다 더 삭제된 버전으로 연주, 녹음했다), 1악장의 솔로 카덴차를 보다 짧게 단축시켰으며,

2악장과 3악장의 짧은 피아노 부분들에 대한 두 장 분량의 얼터너티브 솔로 패시지를 과감하게 생략했다.

 

이러한 수정을 모든 연주자들이 따르게 강제한 것은 아니었지만, 여러 이유에 의해 이 관습은 작곡가에 대한 가장 정중한 예의이자 호로비츠에 대한 무한한 존경의 표시로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낭만주의 러시아 피아니즘의 진정한 적자임을 대변하는 ‘권위의 인장’은 [3번 협주곡]을 통해 라흐마니노프를 거쳐

 호로비츠에게 주어지게 된 것이다.

 1930년 최초로 이 작품을 녹음한 이후 총 여섯 종의 레코딩을 남겼던 호로비츠에게 있어서 이 작품에 대한 진정한

라이벌은 작곡가도 다른 연주자도 아닌, 바로 자기 자신밖에 없었다.

 작곡가가 서거한 지 40여 년이 지난 1982년, 런던에서 연주회를 가질 당시 호로비츠는 작곡가 라흐마니노프에 대해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그는 내가 아는 한 가장 위대한 인간이자 위대한 작곡가이며 또한 위대한 피아니스트였습니다.”

작곡가에 대한 무한한 애정과 존경을 평생토록 가슴 속에 새겨놓았던 호로비츠야말로 이 [3번 협주곡]을 삼킬 자격이

있었던 것이다.

 호로비츠는 작곡가 라흐마니노프로부터 이 곡의 해석과 연주의 권위를 인정받은 대피아니스트이다.

 

 

 

 

 

 



 

 

 

  제1악장 - 알레그로 마 논 탄토

 

  오케스트라가 연주하는 서주부에 뒤이어 D단조의 장엄한 테마가 피아노로 연주된다. 피아노가 두 번째 주제를 연주하며 점점 빠르게 진행되며 음악은 힘차고 다이내믹하게 이어진다.

이윽고 걸음이 빨라지면서 변주곡으로 진입하고 곧 카덴차 부분으로 이어지며 장대한 피아노 솔로 카덴차가 나타난다.

 

그리고 다시금 1주제와 2주제가 제시되며 끝을 맺는다.

이 카덴차에는 두 가지 버전이 있다.

 하나는 반짝이고 투명한 질감을 가지고 있는 버전, 다른 하나는 화음 위주의 무겁고 힘이 실려있는 버전이다.

비르투오시티를 강조하는 피아니스트들은 주로 앞 버전을 선호한다.

 

  제2악장 - 인터메초, 아다지오

 

  오보에의 독주로 멜로디가 연주되며 강렬한 총주로 이어진다.

이 때 불협화음으로 등장하는 피아노 독주는 주단 위를굴러가는 흑진주 같다는 찬사를 받은 바 있다.

왈츠풍 음형과 여러 단편들이 경쟁적으로 대화를 나누다가 솔로 피아노의 장대한 스케일과 간결한 오케스트라 총주가 등장하여 3악장으로 음악을 이끌어간다.

 

  제3악장 - 피날레. 알라 브레브

 

  한마디로 비르투오소를 위한 찬가라고 말할 수 있다.

웅대한 힘, 야성적 매력, 정교한 테크닉과 진한 서정성이 뒤엉켜 펼쳐지는 낭만주의 상상력의 극치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프로코피에프를 연상시키는 듯한 짧은 카덴차 성격을 가진, 피아노가 연주하는 마지막 토카타 패시지가 압권이다.

 

 피아노가 클라이맥스를 주도하며 폭풍우가 몰아치는 듯한 옥타브, 살인적인 분산화음으로 듣는 이의 심장을 10분 넘게 들었다 놓으며 웅장하고 화려하게 마무리된다.

 

  사족을 붙이자면, 영화 <샤인>의 주인공인 데이빗 헬프갓이 이 작품을 연주하다가 혼절한다는 스토리는 사실상 음악적 넌센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닐지 모르겠지만, 그만큼 이 작품을 연주하기 위해서는 초인적, 거장적, 선천적 재능이 전제되어야만 한다는 현실적 인식에 대한 성공적인 영화적 메타포이기도 하다.

 

  박제성 | 음악 칼럼니스트, 『베토벤 이후의 교향곡 작곡가들』 역자. 클래식음악 전문지 『음악동아』, 『객석』,

『그라모폰 코리아』

, 『피아노 음악』과 여러 오디오 잡지에 리뷰와 평론을 써 온 음악 칼럼니스트 공연, 방송, 저널활동, 음반리뷰,

음악강좌 등 클래식 음악과 관련한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다.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는 1873년 러시아 오네그에서 태어났으며, 상트페테르부르크 음악원과 모스크바 음악원에서

공부했다.

다른 사람보다 유난히 큰 손을 가지고 있었던 그는 특히 피아노에 탁월한 재능을 보였고, 어려서부터 장래가 촉망되는 피아니스트로 이름을 날렸다. 피아노곡 작곡에도 흥미를 보여 17살 때부터 피아노 협주곡을 쓰기 시작했다. 1

 

892년에는 푸시킨의 《집시들》을 바탕으로 작곡한 오페라 〈알레코(Aleko)〉를 교내 콩쿠르에 출품해 심사위원인

차이콥스키로부터 극찬을 들었다.

이 작품으로는 그는 1등의 영예와 함께 부상으로 피아노를 받는 영광을 누렸다.

초기에 주로 피아노 소품을 작곡하던 라흐마니노프는 23살 때인 1896년, 처음으로 교향곡 작곡에 도전했다.

 

그의 〈교향곡 제1번(Symphony No.1 in D Minor Op.13)〉은 1897년 상트페테르부르크 필하모닉 홀에서

글라주노프의 지휘로 초연되었다.

하지만 지휘를 맡은 글라주노프가 제대로 단원들을 연습시키지 않은 데다가 연주 당일 술에 취한 상태였기 때문에

 초연은 참담한 실패로 끝났다.

 

이에 충격을 받은 라흐마니노프는 자신감을 잃고 심각한 우울증에 걸려 3년 동안 곡을 쓰지 못했다.

 다행히 1900년, 치료를 맡은 심리학자 니콜라이 달 박사의 헌신적인 도움으로 우울증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1901년, 라흐마니노프는 오랜 침묵을 깨고 〈피아노 협주곡 제2번(Piano Concerto No.2 in C minor Op.18)〉을

자신의 연주로 초연했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이로써 그는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로서 확실한 입지를 다질 수 있었다. 피아니스트로 세계적인 명성을 떨치던 그는

1909년 멀리 미국까지 건너가 순회 연주회를 열었다.

 

 이 무렵 〈피아노 협주곡 제3번(Piano Concerto No.3 in D minor op.30)〉을 완성해서 당대 최고의 피아니스트

블라디미르 호로비츠에게 헌정했으며, 호로비츠로부터 "이것이야말로 내가 바라던 바로 그 협주곡"이라는 찬사를

 들었다.

 

그로부터 몇 년 후, 러시아에 붉은 혁명이 일어났다. 대지주 출신인 라흐마니노프의 가족은 재산을 몰수당해 당장

 의식주를 해결할 수 없는 처지에 놓였다.

그때 마침 스웨덴 왕자가 그를 초청했다. 1917년 12월, 그는 가족과 함께 러시아를 떠나 스웨덴으로 갔다. 그리고

이듬해 11월 미국으로 건너가 1919년 말부터 4개월 동안 총 40회의 연주를 했으며, 이후 미국 땅에 정착했다.

 

비록 미국에 정착했지만 라흐마니노프는 죽을 때까지 러시아인으로 살았다. 러시아 비서, 러시아 요리사, 러시아 기사를 두고 러시아 정교를 굳게 믿었다.

흔히 미국은 여러 민족의 용광로라고 하지만, 라흐마니노프는 문화적으로나 정서적으로 미국 사회의 일원이 되는 것을 거부했다. 비록 몸은 러시아를 떠났지만 영혼은 그대로 러시아에 두고 온 것이다.

 

그 때문인지 미국에 있는 동안, 이렇다 할 작품을 쓰지 못했다. 1927년, 〈피아노 협주곡 제4번(Piano Concerto

 No.4 in G minor Op.40)〉을 발표했지만 그다지 좋은 평을 받지 못했다.

그의 팬들은 불같은 열정의 새로운 협주곡을 원했지만, 고향을 떠나 영혼의 힘을 잃어버린 라흐마니노프는 더 이상

그런 곡을 쓸 수 없었다.

 

1930년, 러시아에 숙청의 피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스탈린은 죄 없는 사람들을 수없이 살해하고, 예술가들을 탄압했다. 라흐마니노프는 〈뉴욕 타임스〉에 소련 정부를 비판하는 글을 발표했다.

러시아에 자유로운 예술은 없다. 오로지 억압받는 예술가가 있을 뿐이다. 그들은 직업적 살인자이다.

 

이 때문에 소련 전역에서 그의 작품에 대한 연주 금지 조치가 내려졌다.

이렇게 비록 고향에서는 홀대를 받았지만, 그는 미국에서 엄청난 인기를 누렸다. 피아니스트이자 지휘자, 작곡가로

 연주와 음반 녹음 등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냈다.

 

1932년, 라흐마니노프는 건강을 회복하고 새로운 공기를 쐬기 위해 가족과 함께 스위스로 건너갔다. 여기서

〈파가니니 주제에 의한 랩소디(Rhapsody on the theme of Paganini Op.43)〉와 〈교향곡 제3번(Symphony

 No.3 in A minor Op.44)〉을 완성했다.

 하지만 곧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는 바람에 다시 미국으로 돌아왔다.

미국에서 그는 나치에 반대하는 운동을 위한 기금 모금 연주회에 참가했다.

1942년 초, 라흐마니노프는 흑색종이란 피부암에 걸렸다.

 

하지만 그럼에도 피아니스트로서의 활동을 계속했다. 그러다가 1943년 2월 17일의 연주를 마지막으로 무대를 떠났다. 그리고 그해 3월 28일, 7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라흐마니노프는 혁신적이거나 독창적인 작곡가는 아니다.

 

스크랴빈, 라벨, 버르토크와 같은 시대에 활동했으면서도 그의 음악에는 20세기 초 유행처럼 번졌던 전통의 파괴 같은 혁신성은 보이지 않는다.

자신이 피아니스트였기 때문인지 그의 중요 작품은 피아노에 집중되어 있다.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작품은 피아니스트들에게 끊임없는 힘과 열정, 속도감과 긴장감을 동시에 요구한다.

초기 작품으로는 모스크바 음악원을 졸업할 당시에 작곡한 독주곡 〈환상 소곡집〉이 있으며, 피아노 협주곡 형식의

작품으로는 네 개의 피아노 협주곡과 〈파가니니 주제에 의한 랩소디〉가 있다.

 

이 중 가장 유명한 곡은 〈피아노 협주곡 제2번〉이다. 1899년부터 1901년 사이에 작곡된 이 곡은 러시아적인 우수와 로망스를 한몸에 담고 있는 피아노 협주곡의 걸작으로 꼽힌다.

1악장은 피아노의 장중한 서주에 이어 매우 드라마틱한 제1주제가 오케스트라에 의해 제시되고, 다음에 제2주제가

 피아노로 연주된다.

 

그리고 이 선율은 당당한 마에스토소의 발전부를 거쳐 재현부를 맞는다.

템포의 변화가 무쌍하며 카덴차가 없는 것이 특징이다. 2악장은 아주 느린 템포를 가진 아름다운 악장이다.

 꿈같이 자유로운 형식의 환상곡으로 오케스트라의 취급이 풍부하고 다채롭다.

 

3악장은 빠른 템포의 눈부시게 강렬한 악장인데, 불규칙한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오케스트라가 서주를 연주하면 피아노가 중심 주제를 제시한다.

제2주제 선율은 오보에와 비올라로 시작되어 독주 피아노가 이어받는다.

 

주제 선율이 몇 차례 등장하는데, 나올 때마다 악상을 고조시켜 마지막에는 거의 폭발하듯 화려하고 장대하게 펼쳐진다.

피아노 협주곡 양식의 〈파가니니 주제에 의한 랩소디〉는 라흐마니노프가 피아니스트로 이름을 날리고 있을 무렵인

 1934년, 스위스 루체른의 한 별장에서 작곡한 것이다.

 

유명한 파가니니의 〈독주 바이올린을 위한 24개의 카프리스〉 중에서 제24번의 멜로디를 주제로 작곡한 변주곡 형식의 랩소디로 〈피아노 협주곡 제2번〉과 함께 라흐마니노프의 작품 중에서 가장 자주 연주된다. 피아니스트의 작품답게 피아노의 다양성과 화려함을 한껏 돋보이게 하는 걸작이다.

 

 변주곡은 모두 24개로 이루어져 있는데, 외형적으로는 변주곡의 형식을 취하고 있으나 단순한 변주곡에서 벗어나 주제 선율을 다양한 어법으로 채색함으로써 피아노의 모든 연주 기법을 두루 망라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서정적이고 로맨틱한 멜로디부터 고도의 기술을 요구하는 복잡한 패시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어법들이 등장하는데,

특히 제18변주의 낭만적인 멜로디는 영화의 주제 음악으로 쓰일 정도로 대중적인 인기를 얻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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