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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P SONG & ROCK

Blur - Song 2

 


 

 

 



 


 

 

 

 

 

 

 

Song 2

 

 

 

I got my head
checked by a jumbo jet
It wasn't easy
but nothing is no

When I feel heavy metal
And I'm pins and I'm needles
Well I lie and I'm easy
All of the time


But I'm never sure
why I need you
Pleased to meet you
I got my head done

When I was young
It's not my problem
It's not my problem
Woo hoo


When I feel heavy metal
Woo hoo
And I'm pins and I'm needles

Woo hoo
Well I lie and I'm easy
All of the time


But I'm never sure
why I need you
Pleased to meet you
I got my head done


 


 

내 머리 좀 체크 해봐야겠어요
점보 제트기를 타고 말이에요
그건 쉽지 않았죠
그렇지만 아무 이상 없었던 걸요


내가 헤비메탈을 들을 땐
난 기분이 엄청 좋아요
자 누워서 편안하게 들어볼까요
항상 말이에요


그치만 난 헤비메탈이 필요한지
이유를 모르겠네요
난 헤비메탈을 만나면 기분이 좋아요
머리가 기진맥진해져요


 내가 젊었을 땐
아무 문제 안되었었는데
아무 문제 안되었었는데
우후

내가 헤비메탈을 들을 땐
우후
난 기분이 엄청 좋아요
우후
자 누워서 편하게 들어볼까요
항상 말이에요


그치만 난 헤비메탈이 필요한지
이유를 모르겠네요
난 헤비메탈을 만나면 기분이 좋아요
머리가 기진맥진해져요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 영국 밴드 'Blur'에 관하여....

출처: 네이버 지식인

 

 

스톤 로지스(Stone Roses) 이후 등장한 브릿 팝 밴드 중 하나인 블러(Blur)는 "브릿 팝을 창조했고, 브릿 팝의 전형을 만들었으며, 브릿 팝의 제왕으로 등극"한 밴드다. 이들은 킨크스(The Kinks), 스몰 페이스(The Small Faces),

 후(The Who), 잼(The Jam), 매드니스(Madness), 스미스(The Smiths) 등이 형성한 영국 기타 팝의 전통을

계승한 밴드이자 이를 확립한 밴드라 할 수 있는 것.

 

그러나 90년대 영국에서 가장 대중적인 밴드 중 하나인 이들은 단지 브릿 팝의 전형 안에 머무르지 않고 보다 도전적인

사운드로 발전해 나갔다.

90년대 후반 브릿 팝 무브먼트가 점차 쇠락의 길에 빠져들었을 때 블러는 인디 록과 로우 파이의 영향을 받아들여 아트

 팝 밴드로의 선회을 꾀했다.

 

그들과 - 의도와는 무관하게 - 대결 구도에 놓였던 오아시스(Oasis)가 비틀스(The Beatles)의 수혜자로서 멜로디를

중심으로 한 사운드를 펼쳤던 것과 달리 블러는 멜로디 중심의 사고에서 벗어나 새로운 도전을 감행했다. 브릿 팝의

 전형을 마련한 초기작들에서부터 미국 인디 밴드의 마인드를 빌어 그 전형으로부터 탈피하려 했던 일련의 과정에서

블러는 브릿 팝 밴드인 동시에 아니기도 하다.

 

블러는 1989년 영국 콜체스터(Colchester)에서 데이먼 알반(Damon Alban, 보컬/키보드)과 고등학교 동창인 그래엄 콕슨(Graham Coxon, 기타/색소폰), 컴퓨터 엔지니어이자 콜체스터 로컬 밴드로 활동하던 데이브 로운트리

(Dave Rowntree, 드럼), 그리고 알반의 대학 동창인 알렉스 제임스(Alex James, 베이스)에 의해 '세이무어

(Seymour)'라는 이름의 밴드로 결성됐다.

 

이들은 클럽가를 중심으로 한 공연과 'Fool'과 'She's So High' 등이 포함된 데모 테이프를 제작하며 활동을 시작했다. 그리고 이 데모 테이프를 통해 저널리스트 앤디 로스(Andy Ross)와 티어트롭 익스프로우드스(Teardrop Explodes)의 키보디스트 데이브 밸프(Dave Balfe)가 운영하는 푸드 레코드(Food Records)와 계약을 체결하게 됐다.

 

그러나 푸드 레코드는 밴드명을 바꿀 것을 요구했고, 블러가 바로 이들의 밴드명이 된 것. 이후 발표한 첫 싱글 'She's

So High'가 영국 차트 50위에 진입하는 데 이어 'There's No Other Way'가 차트 10위권에 진입하면서 블러는 유

망주로 기대를 얻기 시작했다.

 

1991년 블러는, 이 두 개의 싱글에서 함께 작업했던 프로듀서 스티븐 스트리트(Stephen Street, 그는 블러와 97년

다섯 번째 앨범 "Blur"까지 작업했다)와 데뷔작 "Leisure"를 발표. 이 데뷔작이 앨범 차트 2위까지 진입하면서 블러는 쇠락해 가는 맨체스터 팝 씬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는 밴드라는 평가를 얻었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이들의 깔끔한 외모 탓인지 다듬어진 틴 아이돌 스타라는 비난하기도.


이후 1992년 블러는 'Pop Scene'을 통해 보다 날카로워진 사운드를 들려줬다. 그러나 이는 1992년 당시의 브릿 팝이나 미국 그런지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것이었다.

그 결과 'Pop Scene'은 영국 차트에서 별다른 성과를 얻어내지 못했다.

 

 이러한 가운데 1993년 두 번째 앨범 "Modern Life Is Rubbish"를 발표. 처음 이 앨범의 프로듀싱은 XTC의 앤디

패트리지(Andy Partridge)가 담당했었다.

그러나 그와의 작업이 원활하지 않자 이들은 다시 스티븐 스트리트와 작업을 시작해 앨범을 완성했다.

거의 1년간의 스튜디오 작업을 통해 앨범을 완성해 푸드 레코드사에 앨범을 보냈지만 레코드사는 히트할 만한 싱글이

없다는 이유로 재작업을 요구했다.

 

이렇게 하여 이 앨범에 새롭게 수록된 곡이 'For Tomorrow'다. 새로운 트랙의 추가로 앨범 발매 준비가 다 된 듯했지만 이번에는 푸드 레코드사의 미국 배급사인 SBK가 미국에서 히트할 만한 싱글을 원했고, 다시 블러는 새로운 곡

 'Chemical World'를 추가 수록해야만 했다.

 

이 곡은 미국 마이너 얼터너티브 록계에서 인기를 얻었고 영국에서는 차트 28위를 기록했다.

"Modern Life Is Rubbish"와 관련된 또 다른 일화는, 이 앨범이 발매 예정일을 앞뒀을 때 SBK가 너바나(Nirvana),

소닉 유스(Sonic Youth)의 프로듀싱을 맡았던(Garbage의 일원이기도 한) 부치 빅(Butch Vig)과 재녹음하기를

요청했다는 것.

 

그러나 블러는 이를 거절, 그 해 5월 영국에서 이 앨범을 발매했고, 가을에는 미국 발매를 했다. "Modern Life Is

Rubbish"는 영국 차트 15위까지 진입, 그러나 미국에서는 별다른 성과를 얻어내지 못했다.


그러나 1994년 발표한 "Parklife"는 첫 싱글 'Girls & Boys'의 히트에 힘입어 기대 이상의 성공을 거둬냈다.

"Parklife"는 영국 차트 정상에 올랐고, 'Girls & Boys'는 싱글 차트 5위를 기록했다.

 또한 이 싱글은 미국 차트 52위까지 기록했지만 15주동안 차트에 머무는 일정의 성공을 거둬냈다.

 

그리고 뒤이어 발표한 싱글 'To the End'와 'Parklife'가 영국에서 잇따라 성공을 거두면서 블러는 인디 밴드라는

수식어를 떼어버릴 수 있었으며, 90년대 중반 영국 팝 문화군을 이끌어나가는 주요한 밴드로 군림하기 시작했다.

또한 이 앨범으로 블러는 1995년 브릿 어워드에서 '최우수 밴드', '올해의 앨범' 부문을 포함한 4개 부문을 수상.

이러한 블러의 성공은 '영국의 남북전쟁'으로 불려질 정도로 가열됐던 블러와 오아시스의 라이벌화를 가속시켰다.


"Parklife"가 트리플 플래티넘을 획득했던 1995년, 블러는 네 번째 앨범 녹음과 단독 공연(그 중에는 매진된(Sold

-out) 스타디움 공연이 포함된다)을 가지며 한 해를 시작, 그 해 8월 첫 싱글 'Country House'를 공개했다.

 

 그리고 때마침 오아시스가 싱글 'Roll With It'를 발매, 이성을 잃어버린 듯 영국 매스컴들이 앞다투어 불붙인 블러와

오아이스의 대결구도에서 'Country House'와 "The Great Escape"가 차트 정상을 차지하며 승리는 블러의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뒤이어 발표된 오아시스의 두 번째 앨범 "(What's the Story) Morning Glory?"가 영국 뿐 아니라

미국 진출에 성공함으로써 "The Great Escape"는 그 가치에 비해 팬들로부터 더욱 평가절하되기도 했다.

 


오아시스와의 비교에 넌더리가 난 블러는 2년 가까이 칩거해 새 앨범을 준비했다. 그리고 이들이 97년 셀프 타이틀을

붙인 앨범 "Blur"를 들고 나타났을 때, 그것은 블러의 팬들을 적잖이 놀라게 할 만한 것이었다. 브릿팝은 죽었다고 선언한 데이먼 알반은 더 이상 브리티시 뮤직에 관심이 없다고 말했으며, 미국의 인디 록에 매혹됐다고 표명했다.

 

이전에 보여줬던 세련된 도시적인 이미지는 사라지고 스스로 팝 밴드라 자칭할 만큼 경쾌하고 밝은 분위기를 찾을 수

없는 "Blur"는 사이키델릭한 사운드와 일렉트로닉적인 사운드까지 겸하고 있다.

 

그러나 앨범 전체적인 분위기는 단연 산란하게 들릴 수 있을 정도의 노이즈 가득한 얼터너티브 사운드였다.

브릿 팝 씬에서 완연히 벗어난 블러의 또 다른 도전은 영국 내에서는 그다지 따스한 시선을 얻지 못했지만 그와 달리

'Song 2'를 위시한 이 앨범은 블러에게 미국에서의 성공을 안겨줬다.

 

그러나 블러의 음악적 변화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데뷔작에서부터 함께 했던 프로듀서 스티븐 스트리트(Stephen Street)가 아닌 최근 가장 유력한 일렉트로니카

 프로듀서로 군림하고 있는 윌리엄 오빗(William Orbit)과 함께 작업한 "13"은 "Blur"의 연장선 상에서 더욱 어둡고

 혼탁한 사운드를 들려주고 있으며, 로우 파이와 인디 록적인 관심을 여전히 보여 주었다.


2000년 현재 블러는 11년의 경력을 결산하는 베스트 앨범을 발매, 여기에는 신곡 'Music Is My Rader'가 수록됐다.

 이 앨범은 데뷔 시절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의 음악적 성과를 결산함과 동시에 앞으로 블러의 음악적 방향을 가늠해

볼 수 있는 기회로서의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간단요약

이미 솔로로 활동 중이었던 Damon albarn과 Graham coxon, Alex james, Dave rowntree는 88년 'Seymour'

결성.
레코딩 스튜디오 'The beat factory'에서 'She's so high'가 포함된 데모 테잎을 제작했고 푸드 레코드 사장이었던

'Andy Rose' 와 계약 한후 밴드명을 'Blur'로 교체한다

90년 데뷔 싱글 'She's so high' 발매. 이듬해 두 번째 싱글 'There's no other way' 발매.
91년도 데뷔 앨범 'Leisure' 발매
'There's no other way'의 성공에 힘입어 미국 진출을 시도하였고. 객원 멤버로 저스틴 프리쉬먼을 영입하기도 했다.


그들의 2집 'Modern life is rubbish'는 그들이 미국 투어 중 겪었던 경험들을 노래함.
94년 세 번째 음반 'Parklife'발매. 95년 'Brit award'에서 베스트 싱글, 베스트 앨범, 베스트 비디오 부문 수상.
95년 'The great escape' 발매.

97년 셀프 타이틀 앨범 'Blur' 발매.

데이먼의 유명한 발언 'Britpop is dead' 이 나온 시기. 앨범 제작에 '소닉유스' 참여.
99년 여섯 번째 앨범 '13' 발매. 오랜 프로듀서였던 ' Stephen street' 대신 'William orbit'과 작업.

2000년 베스트 앨범 발매.
2003년 7번째 앨범 'Think Tank' 발매. '팻 보이 슬림'이 음악에 참여. 잠정적 멤버 그레이엄 콕슨 탈퇴.

 

 

 

 







브릿 팝의 아이콘, Blur

1968년 3월 23일 블러의 보컬리스트인 데이먼 알반이 출생했다. 원래는 세이무어(Seymour)라는 이름으로 시작된

블러는 1989년 보컬리스트이자 키보디스트인 데이먼 알반(Damon Albarn), 기타리스트인 그레이엄 콕슨(Graham

Coxon), 베이시스트인 알렉스 제임스(Alex James) 그리고 후에 영입된 드러머 데이브 로운트리(Dave Rowntree)로 구성을 갖추면서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간다.

 

데이먼 알반과 그레이엄 콕슨은 콜체스터에서 같은 학교를 다니고 있었고, 데이브 로운트리 역시 콜체스터 출신의

친구이며 알렉스 제임스는 런던의 골드스미스 대학에서 만났다.

 

블러라는 이름은 이들의 소속사가 된 푸드 레이블의 관계자가 권해주는 이름들 가운데에서 골라냈다.

곧 발표한 첫 싱글 는 차트 50위권에 들었고 뒤이은 싱글 'There's No Other Way'는 톱 텐에 들었다.

싱글들에 이어 '91년 발매한 데뷔앨범 [Leisure]는 초기 핑크 플로이드나 비틀즈 그리고 당시 영국 록 신에서 화제가

되었던 드림 팝의 영향을 담고 있었는데 당시 죽어가던 맨체스터 팝 씬과 교묘하게 맞아들어가면서 붐에 맞춰 뒤늦게

제조된 틴 아이돌 그룹 정도로 무시되는 평을 얻기도 했다.

 

그런 관계로 2집을 낼 때까지 블러는 그런 선입견들에서 적극적으로 탈피하는 싸움을 해나가야 했다. '92에 발표된

 'Pop Scene'은 음악적 방향 선회의 첫 번째 시도였다.

따라부를 수 있는 팝적 멜로디 라인과 관악기들의 건방지고 짖궂은 느낌은 이 즈음부터 블러의 독자적인 캐릭터로

굳혀졌다.

 

그러나 'Pop Scene'은 영국 팝 풍토나 당시 인기 폭발이던 미국 그런지 어느 쪽과도 맞아 떨어지지 않았으므로 차트에 큰 성과는 없었다.

1집에 이어 다시 스티븐 스트리트(Stephen Street)가 프로듀스를 맡은 두 번째 앨범 [Modern Life Is Rubbish]는

영국적인 오만함로 가득했는데 결과적으로 영국에서는 꽤 괜찮은 성적을 거뒀지만 미국 상륙에는 실패했다.

'94년 봄에 발매된 앨범 [Parklife]가 차트 상위에 랭크되면서 드디어 블러는 명실공히 영국 팝 씬 스타로 발돋움했다. 몇몇 곡이 싱글로 크게 히트했고 'Girls And Boys'는 미국에서까지 인기를 얻었다.

블러는 당시 불거져 나온 브릿 팝 붐의 선봉장이었고 [Parklife]는 그 마스터피스로 받아들여졌다.

 

 1995년의 절반을 다음 앨범 녹음에 보낸 그들은 첫 싱글로 'Country House'를 발표했고, 같은 주에 라이벌인

 오아시스의 싱글 'Roll with It'이 나오면서 언론의 입방아는 점점 심해졌다.

 

이것은 판매부수를 올리려는 영국 음악 언론의 얄팍한 장삿속이 부추긴 대결의식이었는데 어쨌든 결과적으로는 블러의 'Country House'가 밴드의 첫 번째 넘버원 싱글이 되면서 잠시 우위를 점하는 듯 했으나 궁극적으로는 오아시스의

두 번째 앨범 [(What's the Story) Morning Glory?]가 역시 차트 1위에 올랐던 블러의 [The Great Escape]를

덮어버릴 정도로 성공하면서 오아시스의 승리로 돌아갔다. 또한 오아시스는 미국 시장에서도 예외적으로 승승장구하면서 승리의 휘파람을 불었고, 점자 쇠퇴되어 가는 브릿 팝 붐과 더불어 블러에게는 점차 어두운 그림자가 깔리기 시작했다.

 

'브릿 팝은 죽었다'는 데이먼 알반의 선언과 더불어 블러의 미래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들이 대두되었고 '96년 말 데이먼 알반은 그간 그레이엄 콕슨이 늘 관심을 가져왔던 미국 인디-록에 매력을 느끼고 있으며 더 이상 요즈음의 영국 음악에

 관심이 없다고 선언했다.

이런 영향은 97년에 발매된 다음 앨범 [Blur]에 그대로 나타났다.

 

싱글 'Beetlebum'은 발표 첫 주에 1위에 올랐고 그들의 혁신된 사운드는 미국에서도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지면서

 'Song 2'가 큰 인기를 얻었다.

1999년에 발매된 신보 [13]은 또 한 번 블러 팬들에게 충격을 안겨주었는데 첫 싱글이자 오프닝 트랙인 'Tender'의

 가스펠 터치는 전혀 예상치 못했던 방향 선회였다.

 

그 외에도 페이브먼트 등 미국 로-파이 음악에 대한 영향은 여전히 드러나고 있었다.

최근에는 베스트 앨범을 발표했으며 데이먼 알반의 새로운 힙합 프로젝트 고릴라즈(Gorillaz)에도 관심 집중!

프런트맨인 데이먼 알반과 기타리스트 그레이엄 콕슨의 불협화음이 주원인이었다.

몇 년 사이 데이먼 알반은 2001년의 프로젝트 그룹 고릴라즈가 강력히 시사했듯, 일렉트로니카 쪽으로 점점 마음을

빼앗겼으며 그에 따른 기타 비중의 축소는 어쩔 수 없는 수순이었다.

 

인디 록의 향연이었던 [Blur](1997)와는 달리 전자적 소리샘이 대폭 도입되었던 [13](1999)이 그 시작이었다.

 따라서 그레이엄 콕슨이 이에 반발했던 것은 너무도 당연했다.

브릿팝의 대표 브랜드 블러의 불화설이라니...이는 영국 언론으로서는 결코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메뉴 아니겠는가.

갑작스레 해체설이 불거져 나왔으며 멤버들은 이를 억측이라며 불편함을 표시했다.

그레이엄 콕슨이 떠난 뒤 가졌던 인터뷰에서 드러머 데이브 로운트리는 “밴드를 위해서나 그레이엄 개인을 위해서 최선의 선택이었다. 그레이엄이 밴드에 있었던 얼마 전까지 우리는 더 이상 나빠질 게 없던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전이나 지금이나 우리는 똑같다. 아니, 오히려 더 나아졌다(!)고도 볼 수 있다.”라고 밝힌 바 있다.

현재 블러는 데이먼 알반의 취향이 적극 반영된 신보 [Think Tank]를 얼마 전 발표했으며 영국 투어를 준비중에 있다.


 



Blur - Biography]

 

94년 3월 영국의 음악전문지 [NME]에 실린 블러(Blur)의 인터뷰 기사에는 'London Loves Blur'라는 놀라운 타이틀이 붙어있었다.

 

오아시스의 데뷔와 더불어 브릿팝의 피크기라고 할 수 있는 이 해는 블러가 대중적으로 가장 사랑받았으며 또한 밴드

최고의 수작으로 꼽히는 3집 [Parklife]를 발표해 전영국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때였다. 1989년 런던에서 결성한 블러는 이후 세계적인 밴드로 성장한다.

영국 콜체스터(Colchester)의 스탠웨이(Stanway) 종합학교 학생이던 데이먼 알반(Damon Alban 보컬, 키보드)을 중심으로 그의 동창 그래엄 콕슨(Graham Coxon 기타, 색소폰)과 컴퓨터 엔지니어이자 콜체스터의 로컬 밴드에서

 활동하던 데이브 로운트리(Dave Rowntree 드럼), 그리고 알반의 대학 동창인 알렉스 제임스(Alex James 베이스)가 모여 88년 블러의 전신인 세이모어(Seymour)를 결성한다. 이들은 로컬 클럽에서 연주활동을 벌이면서 'Fool'과

 

 'She's So High'를 포함한 네곡짜리 데모 테잎을 제작했고 이것이 푸드 레코드(Food Recode)의 눈에 띄어 계약을

맺는다. 90년도에 밴드명을 블러로 고치고 발표한 데뷔 싱글 [She's So High]가 영국차트 48위에 랭크되며 밴드는

가능성을 보이기 시작한다.

 

이듬해 선보인 두 번째 싱글 'There's No Other Way'는 차트 8위에 올랐으며 블러 마니아들이 가장 선호하는 앨범

가운데 하나인 데뷔작 [Leisure](91)는 골드를 기록하며 차트 7위를 밟았고 밴드는 세 번째 영국 투어를 벌인다.

92년 블러는 'There's No Other Way'를 미국 차트 82위에 진입시키며 전미 투어를 갖는 등 미국 시장 진출을 시도

하였으며 스웨이드(Suede)의 보컬 브렛 앤더슨(Bret Anderson)의 연인이었던(지금은 알반의 연인이며 그룹

앨라스티카(Alastica)를 이끌고 있다) 저스틴 프리쉬만(Justine Frischmann)을 객원멤버로 영입해 런던에서 클럽연주 활동을 펼치기도 했다.

데뷔 앨범 이후 2년만에 그들은 미국에서의 활동 기간 동안 겪은 경험과 사고의 단편들을 [Modern Life Is

Rubbish](93)라는 비판적이고 냉소적인 앨범으로 엮어내 '제 2의 킹크스(The Kinks)'라고 불리기 시작한다.

그리고 94년도를 빛낸 명반 [Parklife]가 영국 차트 1위에 등극하고 트리플 플래티넘을 기록하면서 스웨이드, 오아시스(Oasis)와 함께 브릿팝씬의 확실한 주역이 되었다.

 

또한 이 앨범으로 블러는 95년 브릿 어워드에서 베스트 싱글, 베스트 앨범, 베스트 비디오 등 3개 부분을 석권한다.

저 유명한 블러와 오아시스간의 묘한 라이벌전이 시작된 것도 이 무렵이다(이것은 두 밴드가 의도했다기보다 영국 언론들에 의해 부추겨진 것이다).

 

오아시스가 [(What's The Story) Morning Glory?](95)로 영국은 물론 미국 차트까지 점령하는 동안 블러는 4집

[The Great Escape](95)를 발표하지만 그다지 주목받지 못한다.

4집의 실패(?)는 언론이 주도한 오아시스와의 비교와 싸움붙이기에 희생당한 면이 없지 않은데 이런 대외적인 상황에

 넌더리가 난 것인지 밴드 내부적으로 음악적 변화에 대한 필요성을 절감한 때문인지 97년에 발표한 셀프타이틀 앨범

 [Blur]에서 이들은 새로운 시도를 꾀한다.

 

 '브릿팝은 죽었다'고 선언한 데이먼 알반의 주도로 블러의 음악은 미국적인 얼터너티브 사운드로 변모했다.

 앨범 제작에 참여한 소닉 유스(Sonic Youth)의 손길이 지나간 자리마다 잔뜩 노이즈 걸린 사운드는 기존의 블러팬들을 당황하게 만들기도 했지만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이제 블러는 여타 브릿팝 밴드들과는 차별화된 길을 가기로 완전히 마음을 굳힌 것 같다.

 최근에 이들은 [Blur]의 침울함이 더 심화되고 노이즈도 훨씬 맹렬해진 [13](99)을 발표했다. 이 신보는 현재 영국에서 놀라운 속도로 팔려나가는 중이며 'Tender', 'Coffee & TV' 등이 차트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고 있다.

글 / 이기연


 

 

 




블러(Blur)는 89년 영국 런던에서 결성된 팝 밴드로 초창기 이들은 스톤 로지즈(the Stone Roses 의 뒤를 쫓아 결성된 수많은 영국 밴드들 중 하나에 불과했다.
골드스미스(Goldsmith) 대학 재학 중이던 보컬리스트 데이먼 알반(Damon Albarn), 베이스의 알렉스 제임스(Alex James), 기타의 그래험 콕슨(Graham Coxon), 드럼의 데이브 로운트리(Dave Rowntree)를 멤버로 세이무어

(Seymour)라는 밴드를 결성하면서 블러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알반의 음악에 대한 욕구는 소프트 머신(Soft Machine)이나 캣 스티븐스(Cat Stevens)와 같은 아티스트들과 접하기 쉬운 환경으로 이사를 한 아버지의 노력이나 조안 리틀우드(Jaon Littlewood) 극단의 무대 디자이너였던 어머니의

영향이 컸다고 볼 수 있다.
로운트리의 아버지는 BBC에서
비틀즈(the Beatles)
의 사운드 엔지니어였고 백파이프 레슨을 받기도 했다.

밴드 결성 후 1년 이상 공연을 가진 후, 밴드명을 블러로 변경한다는 조건으로 티어드롭 익스플로즈(Teardrop

Explodes)의 키보드 연주자였던 데이비드 밸페(David Balfe)와 사운드의 기자였던 앤디 로스(Andy Ross)가 운영하는 푸드(Food)와 계약을 체결했다.

활기에 넘치는 90년 식의 친근한 팝을 연주했던 이들의 데뷔곡 'She's So High'는 영국 차트 50위 권에 진입하는 성공을 거두었다.

이들의 역량을 이미 드러낸 것으로 전염성 강한 'There's No Other Way'가 91년 영국 차트 8위에 올랐을 때 이는

 그다지 놀랄만한 것이 아니었다.

이러한 성공은 결성된 지 2년만에 1집 [Leisure]가 앨범 차트 2위에 오르기까지 지속되었다.


그러나 'Popscene'이 34위에 그치면서 이들은 한동안 슬럼프를 겪었다. 배기와 맨체스터 운동이 사라졌을 때 이들은

 고정된 기타 팝에서 팬들이 멀어져 가고, 레인이나 목 터틀즈같은 밴드들이 각광을 받는 그러한 시기를 겪어야만 했다.

2집 [Modern Life Is Rubbish](93)은 처음 완성되었을 때 레이블로부터 거절당했고 밸페는 알반에게 추가로 두 곡을 더 요청하여 이듬해에야 발매되었다. 결국 추가로 수록한 곡 'For Tomorrow', 'Chemical World'가 이 앨범에서

싱글로 발매되었다.

이 앨범은 5만장이라는 전작과 팬들의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실패를 하고 말았으나 지속적인 투어와 리딩 페스티발 참가로 다시 신뢰를 얻기 시작했다.


다음 앨범 [Parklife](94)에 수록된 첫 싱글 'Girls & Boys'의 성공은 신기원을 이룩한 앨범의 증거라고 할 수 있다.

주변의 음악적인 기대를 뒤엎은 이 앨범은 비틀즈,스몰 페이시스, 킨크스에서 잼, 매드니스, 스미스에 이르는 영국 출신의 위대한 밴드들의 요소를 거의 모두 포함한 것으로 알반과 코크니의 공동작업으로 완성되었다.
이 앨범은 95년 브릿 어워즈에서 최우수 밴드와 앨범상을 포함한 4개 부문을 수상했다.

이후부터 매스컴은 블러 대 오아시스의 전쟁을 기사화하기 시작했다.

알반의 비꼬는 가사와 밴드의 영국 팝 전통을 계승한 사운드의 조화로 블러는 브릿팝의 선구자가 되었으나, 브릿 팝 운동이 소멸되자 이들 역시 그 영향력을 잃게 되었다.
[the Great Escape]가 미온한 결과를 낳자 이들은 아이슬랜드에서 두문불출하며 인디 록과 로파이 영향을 조화시켜

아트 팝 밴드로 변신했다.


다음 앨범 [Blur](97)는 싱글 'Beetlebum'의 성공과 함께 앨범 차트 정상을 차지하며 미국 시장에서 성공을 거두었다. 'Song 2'와 같은 스래쉬 스타일의 하드한 곡과 다운비트된 곡인 'Death of A Party'는 이들의 초창기 싱글을 상기시키는 곡들로 블러가 영국 팝 음악계의 중요한 세력을 형성하고 있음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90년대 중반 완전히 이미지 변신을 한 후, 스미스나 스몰 페이시스, 잼 등 영국 기타 팝의 전통을 계승하면서 영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밴드로 부상했던 블러는 브릿 팝이라 명명되는 기타 밴드의 새로운 세대를 시작했다고 할 수 있다.


 






멤버 각자가 얼마나 서로 다른 사람들인지를 알고 나서 오히려 그들이 왜 한 자리에 모이게 되었으며 서로 얼마나

 좋아하는지 알게 되었다는 감동적인 진술처럼, 새 앨범의 오프닝 트랙이자 7분 남짓한 길이의 첫 싱글 Tender는

 대단히 감상적인 영혼의 울림을 전달하고 있다.

 

'사랑은 가장 위대한 것'이라는 이토록 벅찬 감정을, 아무 가리개도 없이 발가벗은 채 데이먼이 노래하리라고 우리가

 언제 상상이나 해볼 수 있었던가? 이 곡을 부르고 있는 그의 표정에서 우리는 익히 알고 있었던 그의 웃음을 찾아볼 수

있을 것인가? 한 쪽 입가를 일그러뜨린 한 점 냉소와 장난끼는 여기에 없다.

 

런던 가스펠 합창단 40인의 코러스와 어쿠스틱 기타, 손뼉 장단, 그리고 탬버린이 곁들여진 아름다운 컨트리 가스펠

Tender는 한 마디로 경이로움과 생경함 그 자체다.

찬송가? 세기말의 위로? 뭐든 좋다. 아무튼 한동안은 두 번째 트랙으로 넘어가지 못할 것 같다.


"정말 새롭게 시작하는 것 같았죠. 새로운 관계였어요. 페이브먼트나 벡 같은 사람들이 레코딩하는 방식은 그 핵심이

 '자유로움'에 있었죠. 난 우리 데모가 그런 소리들하고 비슷하다는 걸 알았어요. 블러의 레코드도 그런 소리를 가졌으면 했죠. 그건 어떤 '태도'예요.

 

스튜디오에 가고 녹음을 하는 거죠. 너무 많이 신경 쓰거나 걱정하지 않고 말이죠. 가사만 해도 예전처럼 그렇게 위트

있으려고 노력하진 않았어요."

-데이먼 알반, '97년 BLUR 발매 당시


진상은 이러했다.

'95년 블러는 PARKLIFE에 이은 네 번째 앨범 THE GREAT ESCAPE를 발매했다.

Country house, The universal, Stereotypes, Charmless man 등이 히트를 기록하면서 전작에 못지 않은 대중적 성공이 그들의 손에 쥐어졌지만 어쩐지 그들 자신은 그다지 안녕치 못했던 것이다.

 

'명성'이라는 네온사인이 번쩍이고 있었는데, 대신 처음엔 있었던 중요한 무언가가 이제는 없었다.

'브릿 팝'이라 뭉뚱그려지는 것도 싫었고 남들이 생각하는 '전형적인 블러 스타일'이라는 것을 계속하고 싶지도 않았다.

'97년의 BLUR에는 이런 모든 정황과 그에 따른 변화가 잘 드러나 있다. BLUR에 실려있던 14개의 트랙들에서 그들은

 여전히 블러이기는 했으나 예전에 보여주었던 영리하고 댄디하고 위트 넘치는 영국 청년들의 모습은 아니었다.

 

브라스 파트는 없어졌고 그들이 가지고 있었던 영국적 캐릭터나 팝적인 깔끔 마무리도 없었다. 한층 내성적이고 개인적이었으며 또한 어둡고 따라서 그다지 대중적이지 못했고... 하지만 그래서 더 자유롭고 느슨했던 것만은 사실이었다.

 

벡(Beck)이나 페이브먼트(Pavement) 그리고 토터스(Tortoise) 같은 이들의 제작 방식과 사운드에서 많은 영감을

얻었던 앨범 BLUR의 기타 노이즈와 실험 정신은 그간 나아왔던 방향을 선회하여 오히려 '90년대 초 그들의 초창기

시절로 돌아간 듯한 느낌마저 주었다(Death of a party는 '90년 초 그들이 만들어 놓았던 데모이기도 하다).

 

 Beetlebum이나 Song 2 같은 것들이 싱글로 히트를 했지만,그들은 의식적으로 상업적인 이미지에서 멀어지려고 하는 것 같았고 실제로 그런 것들에 초월한 듯한 인상도 주었다. 밴드명을 새삼스레 앨범 제목으로 사용했던 것에는 자유로운 모습으로 새로 태어나려는 그들의 의지가 담겨있었다.


"완전히 자유로워졌어요. 예술적으로 완전히 자유로워졌죠."

- 데이먼 알반, 1998년 12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