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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P SONG & ROCK

Paul McCartney -Monkberry Moon Delight (& Wings ) , No More Lonely Nights

 

 

 

 

 

 

 

 

 


 

 

 

So i sat in the attic, a piano up my nose,
And the wind played a dreadful cantata.(cantata)
Sore was i from a crack of an enemy's hose
And the horrible sound of tomato.(tomato)

 

이렇게 나는 다락에서 앉았다,
나의 코에 피아노,그리고 바람은
무서운 칸타타 (칸타타…)를 했다.


상처는 enemys 호스의 균열에서 I이었다,
그리고 토마토 (토마토…)의 무서운 소리.



Ketchup (ketchup)
Soup and puree (soup and puree),
Don't get left behind (get left behind)...

 

케첩 (케첩)
수프와 퓌레 (수프와 퓌레),
좌로의 뒤에 얻지 말라 (뒤에 좌로 얻으십시오)…

 

When a rattle of rats had awoken
The sinews, the nerves and the veins.
My piano was boldly outspoken

In attempts to repeat this refrain.


 

쥐의 가르랑거리는 소리가 각성할 때,
힘줄, 신경 및 정맥.
나의 피아노는 대담하게 그것의 후렴을

반복하는 시도에서 거리낌없이 말했다.



So i stood with a knot in my stomach,
And i gazed at that terrible sight,
Of two young sters concealed in a barrel,
Suckin' monkberry moon delight, ho!

 

 

이렇게 나는 나의 위에 있는 매듭으로 서 있었다,
그리고 나는 저 참담한 광경을 지켜봤다
배럴에서 은폐되는 2명의 젊은이의,
monkberry 달 쾌재를 빨기(마시기...)

Monkberry moon delight,
Monkberry moon delight,
Monkberry moon delight,
Monkberry moon delight.

Monkberry 달 쾌재,
Monkberry 쾌재...

Monkberry 달 쾌재,
Monkberry 달 쾌재...

 

 Oh -
Oh-oh, oh-oh.


Well, i know my banana is older than the rest
And my hair is a tangled beretta. (beretta, beretta)
But i leave my pyjamas to billy budapest,
And i don't get the gist of your letter. (your letter...).

 

 

만족스럽게, 나는 나의 바나나가 나머지 보다는

더 오래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리고 나의 머리는 엉키게 한 beretta이다.

 


나가 주전자 부다페스트에게 나의 잠옷을 맡길 때,
그리고 나는 당신의 편지

(당신의 편지…)의 요점을 얻지 않는다.

 

 

Catch up! (catch up),
Cats and kittens (cats and kittens),
Don't get left behind (get left behind)...

 

 

만회하십시오! (만회하십시오),
고양이와 새끼 고양이 (고양이와 새끼 고양이),
좌로의 뒤에 얻지 말라 (뒤에 좌로 얻으십시오)…

 

Oh - monkberry moon delight, yeah,
Monkberry moon delight,
Monkberry moon delight,

 

Oh, oh, oh, oh, oh, oh,
Monkberry moon delight, yeah, yeah, yeah,
Monkberry moon delight,
Oh, monkberry moon delight,
Oh, monkberry moon delight,

 

Monkberry moon delight, oh-oh,
Monkberry moon delight
Suckin' monkberry moon delight,


Monkberry moon delight,
Monkberry moon delight,
Monkberry moon delight,

 

Ah, monkberry moon delight, yeah, yeah,
Monkberry moon delight, oh, oh, oh, oh, oh, oh,

Oh, oh, oh, oh, oh....


Uh, monkberry moon delight.
"try some of this, honey!
"what is it?"

Monkberry moon delight, ah, ah, ah, ah, ah, ah,
Ah, ah, ah, ah, ah....
(ooh) monkberry moon delight,

 

Uh, monkberry moon delight,
Monkberry moon delight,
Monkberry moon delight, ...

 

 

 

 

 

 

 

 

 

 

 

No More Lonely Nights

 

 

I can wait another day until I call you

내가 당신에게 전화할 때까지 하루를 기다릴 수 있어요

You've only got my heart on a string and everything a-flutter

당신은 내 맘을 조종하고 있을 뿐이고 모든 건 흔들거리지만

 

But another lonely night might take forever

또 외로운 밤은 영원히 오지 않을 거예요

We've only got each other to blame

우린 서로의 탓으로 돌리곤 했죠

 

It's all the same to me, love

난 아무래도 상관없어요, 사랑

'Cause I know what I feel to be right

내가 옳다고 느끼는 걸 아니까요

 

 

No more lonely nights X2

더 이상 외로운 밤은 없을 거예요

You're my guiding light day or night I'm always there

당신은 나의 등대고 난 낮이건 밤이건 거기에 항상 있을 테니까요

 

 

May I never miss the thrill of being near you

당신 옆에 있는 스릴을 난 놓치지 않을 거고

And if takes a couple of years to turn your tears to laughter

당신의 눈물이 웃음이 될 때까지 2년이 걸린다 해도

 

I will do what I feel to be right

난 내가 옳다고 느끼는 감정대로 할 거예요

 

And I won't go away until you tell me so

당신이 그렇게 말할 때까지 난 멀리 가지 않을 거예요

No, I'll never go away

그래요, 난 절대 떠나지 않을 거예요

 

Yes, I know what I feel to be right

No more lonely nights (Never be another)

더 이상 외로운 밤은 없어요

 (절대로 또 그런 밤은 없어요

 

 

 

 

 

 

 

 

 

 

제임스 폴 매카트니 경(Sir James Paul McCartney, MBE, 1942년 6월 18일 ~ )은 영국싱어송라이터이자

 멀티플레이어다.

매카트니는 존 레논, 조지 해리슨, 그리고 링고 스타과 함께 팝 역사상 가장 유명하고 영향력 있는 그룹 중 하나인 비틀즈로 활동하여 전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그와 존 레논의 작곡 파트너 관계는 20세기 가장 뛰어난 업적 중 하나로 여겨진다.

밴드가 해체된 이후에도 솔로 경력을 이어나간 매카트니는 첫 아내 린다, 데니 레인과 함께 윙스를 결성했다.

 

역사상 가장 성공한 작곡가이자 공연자 중 하나로 인정받는 매카트니는 1988년 비틀즈의 멤버로서, 1999년 솔로

가수로서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 두 번 입성했으며, 그래미 어워드에서 21차례 우승했다.

공동 작곡 혹은 혼자 작곡한 32곡을 빌보드 핫 100에 1위로 올린 그는 미국에서만 2009년 기준 2550만 장의 음반을

팔았다.

 

 2,200명이 넘는 예술가들이 그가 비틀즈에 있을 때 작곡한 〈Yesterday〉를 커버했고, 저작권 보호를 받는 그 어떤

노래도 이 기록을 깨지 못했다.

윙스가 1977년에 발매한 〈Mull of Kintyre〉는 영국에서 역대 가장 많이 팔린 싱글 중 하나다. 매카트니는 1965년에 비틀즈의 멤버로서 대영 제국 훈장 5등급(MBE)을, 1997년 3월 11일에 단독으로 기사 작위를 받았다.

 

매카트니는 솔로 예술가로서 광범위한 곡을 발표했으며 클래식과 전자 음악을 작곡하기도 했다.

 그는 왕립음악대학 등에서 음악 교육가와 화가로도 활동했으며 동물 보호 활동, 지뢰 반대 활동 등 다방면의 사회 운동에 앞장섰다.

특히 그는 채식주의자로 유명하다. 세 번 결혼한 그는 다섯 자식의 아버지이다

 

제임스 폴 매카트니는 1942년 6월 18일 영국 리버풀 북부에 있는 월튼 병원에서 태어났다.

어머니 메리 퍼트리샤(Mary Patricia, 1909–1956)는 여기에서 자격증을 따기 위해 간호사로 일했다.

아버지 제임스 "짐" 매카트니(James "Jim" McCartney, 1902–1976)는 당시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기 때문에

매카트니의 출생을 보지는 못했다.

 

 폴은 마이크 맥기어라는 남동생이 있었고, 그와 마찬가지로 1944년 월튼 병원에서 태어났다.

가톨릭를 믿은 어머니에 의해 세례를 받았으나 아버지는 신교도에서 불가지론자로 전향하여 종교의 큰 영향 없이

자라났다.

 

매카트니는 1947년에서 1949년까지 스톡턴 우드 로드 프라이머리 학교에 다녔다.

 나중에는 학교의 정원 초과로 조셉 윌리엄스 주니어 학교로 전학을 가게 되었다.

 1953년, 매카트니는 90명의 수험생 중 3명만이 통과한 일레븐 플러스 시험을 통과했고, 세컨드 모던 학교보다

 그래머 스쿨 다운, 리버풀 인스티튜트 남자 고등학교에 입학했다.

 

 1954년, 그는 스피크에 위치한 집에 가는 버스에서 조지 해리슨을 만났다.

둘은 빠르게 친구가 되었다.

폴 매카트니는 이렇게 회고했다.

 "난 그를 깔보듯이 말하곤 했는데, 그가 나보다 한 살 어렸기 때문이다

 

매카트니의 어머니 메리가 조산사로 벌어들인 수입 덕분에 그들은 앨러튼의 포틀린 20번지로 이사갔고, 1964년까지

거기서 살았다.[13] 그녀는 환자에게 자전거를 타고 갔는데, 매카트니는 그녀가 집을 떠나던 어릴 적 기억을 이렇게

회상했다.

 

 "새벽 3시의 거리 ... 눈은 두껍게 쌓여 있었다"

 매카트니가 14살이 되던 1956년 10월 31일에 어머니는 색전증으로 사망했다.

이것은 그의 인생에 큰 영향을 미쳤다.

 

레논의 어머니 줄리아 레논은 1958년 7월 15일 레논이 17세 되던 해에 사망했는데, 후에 매카트니는 레논과의 이러한 공통점을 통해 더욱 친해질 수 있었다.

아버지 제임스 매카트니는 1920년대 짐 맥이 이끄는 재즈 밴드에서 트럼펫과 피아노 연주자를 맡았다.

그는 거실에 피아노를 두었으며,  아들에게 음악을 접하게 해 주었고, 피아노 연습을 도와주면서 고무해주었다.

 

 하지만 폴은 귀로 음악을 듣고 따라 연주하는 방식을 취했다.[17] 제임스는 폴의 14살 생일 때 니켈 도금한 트럼펫

선물했는데, 매카트니는 라디오 룩셈부르크에서 흘러나온 로큰롤이 유명해지자 노래를 부르며 연주하기 위해 이 트럼펫을 가지고 현재도 소유하고 있는 15파운드짜리 제니스 어쿠스틱 기타로 바꾸었다.

 

그는 오른손으로 기타를 연주하기 힘들단 걸 알고 있었으나, 슬림 휘트먼의 콘서트 포스터에서 그가 왼손으로 기타를

연주하는 걸 보고서야 반대쪽으로 현을 잡기 시작했다.

 제니스에서 매카트니는 자신의 첫 곡인 〈I Lost My Little Girl〉을 작곡했다.

 

그리고 후에 〈When I'm Sixty-Four〉가 될 곡을 작곡하여 피아노로 연주하기도 했다.

 그는 미국의 리듬 앤드 블루스에 영향을 받았고, 리틀 리처드는 학생 시기 자신의 우상이었다.

Long Tall Sally〉는 (버틀린 휴가용 캠프장에서 이루어진 장기 대회에서) 그가 사람이 있는 데에서 공연한 첫

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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쿼리맨

1957년 7월 6일, 17살의 매카트니는 교회 축제에서 쿼리맨와 함께 있는 존 레논을 처음 만났다.

 쿼리맨은 재즈, 블루스 그리고 포크 대중음악의 영향을 받은, 로큰롤과 스키플이 섞인 곡을 연주했다.

 

머지않아 밴드는 매카트니를 리듬 기타 연주자로 초대했다.

 그리고 폴은 존과 가까운 사이가 되어 함께 작업하게 되었다. 해리슨은 1958년에 리드 기타 연주자로 들어왔다.

1960년 존의 예술 학교 친구였던 스튜어트 섯클리프가 베이스로 참여하게 된다.

 1960년 3월부터, 밴드는 'Beatals', 'Johnny and the Moondogs', 'the Silver Beetles'  이름으로 활동했다.

 

'비틀즈'라는 이름이 차용된 것은 1960년 8월이었고, 함부르크로 가기 전 드럼 연주자 피트 베스트를 뽑아 다섯 명으로 구성된 밴드가 되었다

알란 윌리엄스를 비공식적인 대표자로 내새운 비틀즈는 1960년 함부르크에 체류하며 첫 공연 계약을 맺는다.

 이후 2년 동안의 장기 체류 기간 동안 그들은 둘 모두 브루노 코쉬마이더 소유인 클럽인 인디아로, 이후에는 카이저켈러에서 공연했다.

 함부르크에서 쫓겨난 밴드는 리버풀로 돌아왔고, 정기적으로 캐번 클럽에서 공연했다.

 

섯클리프는 1961년에 밴드를 떠났고, 매카트니가 마지못해 베이스를 맡게 되었다.

그들은 함부르크에 있을 때 (비트 브라더스로 표기하여) 영국의 가수 토니 셰리던의 싱글 〈My Bonnie〉에서 백 보컬을 맡아 처음 직업적인 녹음을 했다.

 

 이것은 그들의 성장과 성공을 이끌어 낸 브라이언 엡스타인의 관심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그는 1962년 1월 비틀즈의 매니저가 되었다.

 8월에 링고 스타가 베스트의 자리를 꿰찼다.

그리고 10월에 밴드는 〈Love Me Do〉로 첫 히트를 쳤다. 비틀즈는 1963년 유명인이 되었고, 다음 해 미국에서도

그랬다.

 

그들의 팬들은 비틀마니아라는 이름으로 알려진다. 언론은 가끔식 매카트니를 "귀여운 비틀"이라고 불렀다.

같은 해 《Please Please Me》와 《With the Beatles》를 발표한 비틀즈는 다음 해 《A Hard Day's Night》와

Beatles for Sale》를 발표했다.

 매카트니는 레논과 함께 초기 히트곡인 〈I Saw Her Standing There〉, 〈She Loves You〉, 〈I Want to Hold

 Your Hand〉, 〈Can't Buy Me Love〉 등을 썼다

 

1965년 8월, 비틀즈는 매카트니가 작곡했으며 현악 사중주가 들어간 노래 〈Yesterday〉를 발표했다.

이것는 LP 《Help!》에 수록되었다.

〈Yesterday〉는 비틀즈가 처음으로 고전 음악의 요소를 사용하고, 한 멤버만이 녹음에 참여한 노래다.

 

〈Yesterday〉는 대중음악 사상 가장 많이 커버된 곡이 되었다.

다음 해 《Rubber Soul》의 녹음 세션 때 매카트니는 레논을 대신하여 비틀즈에 우세한 음악적 힘을 불어넣는다.

음악학자 이언 맥크라켄은 "[1965년]부터 ...

 

 [매카트니]는 비틀즈의 송라이터 뿐만이 아닌, 기악 연주자, 편곡자, 프로듀서, 그리고 사실상 음악 감독으로서

우세해졌다."고 썼다.

 비평가는 《Rubber Soul》이 정제되었고, 밴드의 음악과 가사에서의 깊이에 큰 발전이 있었다고 평가했다.

 

 비틀즈의 곡 중에서도 정상에 있다고 여겨지는 〈In My Life〉는 레논과 매카트니 둘 다 자신이 썼다고 주장한다.

매카트니는 음반에 대해 "우린 귀여운 시간을 보냈고, 이제는 확장할 시간이였다."고 말했다.

 녹음 엔지니어 노먼 스미스는 《Rubber Soul》의 세션이 늘어나는 불화의 조짐을 들어나게 했다고 말한다. "존과

폴 사이에서의 충돌은 점점 명백해졌다 ...

 

 [그리고] 폴은 조지가 아무 권리가 없다 생각했다.

폴은 너무나 까다로웠다."

1966년, 비틀즈는 《Revolver》를 발표했다.

 

수준 높은 가사, 스튜디오 실험, 그리고 혁신적인 현악기 편곡이 쓰인 사이키델릭 록으로 하여금 음악 장르 범위의

확장을 보여준 음반은 비틀즈의 예술적 도약을 뚜렷하게 보여주었다.

 매카트니가 처음 세 번 연이어 A 사이드를 차지하게 한 싱글 〈Paperback Writer〉는 LP로 앞서 발매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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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틀즈는 B 사이드의 〈Rain〉과 함께 이노래의 홍보용 단편 영화를 제작했다.

해리슨은 영화를 "비디오의 전조"라고 표현했다.

영화는 1966년 6월 《에드 설리번 쇼》와 《탑 오브 더 팝스》에서 공개되었다.

 

《Revolver》에는 현악 8중주가 들어간 매카트니의 〈Eleanor Rigby〉가 수록되어 있다. 굴드는 노래를 "신고전

주의의 역작 ...

노래의 스타일이나 장르를 알아 볼 수 없는, 진정한 혼합체"라고 표현했다.[44] 몇몇 백 보컬만 제외하면 노래에는

매카트니의 리드 보컬과 조지 마틴의 현악 편곡만 들어가 있다

밴드는 1966년 미국 투어를 마지막으로 상업적 콘서트를 중단한다.

 

 다음 해, 매카트니는 비틀즈와는 별개로 작업한 뮤지컬 프로젝트, 영국 영화 《The Family Way》의 사운드트랙

작업을 마친다.

음악은 매카트니의 주제곡 두 개를 열세 개의 변주곡으로 써 준 조지 마틴과 함께 작업했다.

사운드트랙은 차트에서는 실패했으나, 매카트니가 이보르 노벨로상 최고의 주제곡 부문에서 수상하게 했다.

 

밴드의 공연 경력이 종결됨에 따라 매카트니는 밴드 내의 불안감을 감지했고, 그들의 창의적인 생산성을 유지하고 싶어 했다.

그는 첫 록 콘셉트 음반으로 널리 인정받는 음반인 《Sg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가 될 새로운

 프로젝트를 진행한다.

 

그룹에 새로운 자아를 만들어 이에 영감을 받아 음악적 실험의 수단으로 쓰고, 자신들의 팬에게 어른스러운 음악을 한다는 걸 알리기 위해 매카트니는 음반의 타이틀 트랙 〈Sg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에 가상의 밴드를

초대한다.

 

 매카트니는 "우리는 우린 비틀즈로 있는 것에 진절머리가 났다. 그 망할 몹톱(더벅머리) 꼬맹이 네 명이 어프로치 하는 게 정말 싫었다.

우린 어린애가 아니라, 어른이었다...

그리고 [우리는] 자신을 공연인이 아닌 예술가로 여겼다."고 설명했다.

 

1966년 11월, 녹음을 시작한 밴드는 음반 제작에 실험적인 자세를 취했다.

 엔지너어 제프 에머릭은 "비틀즈는 음악적으로나 소리적으로나 위험한 다리를 건너는 것으로 보이는 듯 했다 ...

우리는 수많은 배리스피딩 테이프와 여러 기민한 기술을 사용했다 ... 리미터나 ...

 플랜징과 ADT(Automatic Double Tracking) 같은 것 말이다."라고 회고했다.

 

A Day in the Life〉의 녹음에는 40인조 오케스트라가 쓰였고, 마틴과 매카트니가 번갈아 가면서 지휘했다

녹음 기간에 제작한 〈Strawberry Fields Forever〉와 〈Penny Lane〉은 1967년 2월에 더블 A 싱글로 발매

되었고, 6월에 LP가 발매되어 뒤를 이었다.

 

 매카트니의 〈She's Leaving Home〉은 오케스트라 팝 음악이다.

 맥도널드는 노래에 대해 "《페퍼상사》에서 가장훌륭한 결과물—이 시대의 불멸의 대중 예술이다"라고 표현했다.

LP의 커버는 피터 블레이크와 잔 하워스가 매카트니의 잉크 드로잉을 바탕으로, 콜라주 기법으로 디자인했다.

 

 

 비틀즈가 색색의 서전트 페퍼스 론리 하트 클럽 밴드 코스튬을 입고, 판지를 잘라 만든 실물 크기의 유명인들과 함께

서있는 장면을 나타내었다.

 구드는 비틀즈가 쓴 짙은 콧수염은, 밴드 내에서 커지는 히피 스타일의 영향력을 반영하고 있으며, 옷은 "영국에서

유행하던 밀리터리 패션의 패러디"라고 적었다.

 

 스칼러 데이비드 스콧 캐스턴은 《Sg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를 "역사상 가장 중요하고 영향력 있는 로큰롤 음반"이라고 표현했다

1967년 8월, 엡스타인의 죽음으로 비틀즈에게는 공백이 생겼다.

이들은 당혹해했고 미래를 염려하기 시작했다.

 

 매카트니는 공백을 매우기 위에 나섰다.

매카트니는 서서히 한때 레논이 이끌었던 비틀즈의, 사실상의 리더가 되었고 비즈니스 매니저를 도맡았다.

이러한 리더십 변화 후, 그는 밴드를 나아가게 하려고 텔레비전 영화를 제작하자는 안을 낸다.

 

이것은 《매지컬 미스테리 투어》가 된다. 비틀즈 역사학자 마크 루이손은 이 프로젝트를 "계속해서 관리된 악몽"이라고 표현했다.

매카트니는 영화를 감독했고, 그룹이 처음으로 혹평을 듣는 결과를 가져온다.[65] 하지만 영화의 사운드트랙은 그보다는 성공적이었다.

 

영국에서 6트랙 더블 EP가 발매되었고, 같은 제목의 LP가 밴드가 당시에 발매했던 다섯 싱글을 넣어  출시되었다.

 여기서 캐피틀의 《Magical Mystery Tour》 LP는 3주 만에 800만 장의 판매량을 기록했고, 이는 캐피틀 LP 사상

가장 높은 판매량이다. 나중에 캐피틀 음반만이 그룹의 정규 음반으로 인정받는다.

 

1968년 1월, EMI는 매카트니의 1966년 노래 〈Yellow Submarine〉를 기반으로 상상의 세계를 그려낸 비틀즈의

 애니메이션 영화 《노란 잠수함》의 광고용 트레일러를 제작한다.

비평가들은 영화의 시각적 스타일, 유머, 그리고 음악에 감탄했으나 7주 후에 발매된 사운드트랙 음반은 덜한 지지를

 받았다.

 

1968년 말, 밴드 내의 관계는 악화를 거듭한다. 밴드와 동명인 더블 앨범 《The Beatles》의 녹음 작업에서도 긴장은 고조되고 있었다.

 다음 해 《Let It Be》 세션에도 문제는 커져만 갔다. 카메라 팀은 매카트니가 비틀즈에게 다음과 같이 설교하는 장면을 촬영했다.

 

"우리는 엡스타인 씨가 돌아가신 후로 줄곧 부정적이 되었어 ... 우리는 [그의] 훈계 때문에 항상 싸웠지만, 이 싸움이

우리 자신 때문이라면 바보 같은 짓이라고".

 

1969년 3월 린다 이스트먼과 결혼한 매카트니는 8월 첫 자식인 메리 매카트니를 가진다. 메리의 이름은 린다의 죽음 후 붙여졌다.

 밴드의 마지막 음반인 《Abbey Road》에 마틴은 "계속해서 움직이는 악곡"인 교향곡 형식을 제안한다.

매카트니는 동의했으나 레논은 반대했다.

 

 결국 LP의 1면에 개인 곡을 넣고, 2면에 긴 메들리를 넣는 것을 매카트니가 제안하여 타협했다.

1969년 10월, 매카트니가 차 사고로 1966년에 죽었고 닮은 사람으로 교체되었다는 루머가 퍼진다.

 

허나 11월에 《라이프》지가 "Paul is still with us"라는 문구와 함께 커버에 그와 가족을 커버에 실어 루머에 반박해

이는 빠르게 잠식된다.

1970년 4월 10일, 그의 밴드 동료와 사업과 관련하여 서로 충돌이 생긴다.

매카트니는 자신이 비틀즈를 떠난다고발표했다.

 

1970년 12월 31일, 그는 비틀즈의 파트너십을 해소하기 위해 소송을 제기했다.

매카트니의 변호사, 존과 리 이스트먼은 레논, 해리슨, 스타의 사업 매니저, 앨런 클라인과 로열티와 창작물에 대한

주도권을 두고 싸웠다.

 

영국 법원은 1975년 1월 9일에 비틀즈를 법률적으로 해체했다. 하지만 이따금 레코드 회사 EMI의 반대로 인한 소송이

 1989년까지 일어났다.

 비틀즈는 록 음악의 역사에서 가장 유명하고 영향력 있는 활동을 한 것으로 널리 평가받고 있다.

 

비틀즈를 떠난 후 매카트니는 잠시 동안 밴드의 해체로 인한 깊은 우울증에 빠져 침대와 지나친 술로 나날을 보냈다.

"난 고장나기 직전이었다", "난 점점 미쳐갔다"고 그는 말했다.

 전기 작가 하워드 사우네즈는 "매카트니는 위스키에 빠져 인사불성이 되었고, 린다만이 그를 구할 방법을 알았다"고

 적었다.

 

그녀는 그의 작곡 능력을 칭찬하고, 계속해서 쓰고 녹음할 수 있게 설득하여 매카트니가 정서적 위기에서 빠져나오게

도왔다.

매카트니는 후에 〈Maybe I'm Amazed〉를 그녀 덕택에 비틀즈 해체 시기에 녹음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그게 내가 느낀 감정이었다: 난 지금 일어나는 일에 놀라고 있는 것인지고 몰라..

 

. 당신이 나라는 남자를 도울 유일한 여자일지도 몰라, 내가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주지 않을래... 난 현실로 끌어올려준, 위태로울 때 잡아준, 당신의 행동에 놀라고 있는지도 몰라, 정말 필요한 당신이, 날 도와준 것에 놀라고 있는지도 몰라." 그는 "모든 러브 송은 린다를 위해 쓴 것이었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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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윙스

 

비틀즈가 1970년 해체된 후, 매카트니는 미국에서 1위를 차지한 《McCartney》의 발매와 함께 첫 솔로 음악가의

경력을 시작한다.

 아내 린다가 보컬에 참여한 것 외에는, 모든 악기를 연주하는 등 매카트니 혼자서 음반 전체를 담당했다.

 

 1971년, 드럼 연주자 데니 세이웰과 협력하여 두 번째 음반 《Ram》을 발표한다. 《Ram》은 영국에서 1위를

 차지했고 미국에서 2위까지 오른다.

 

《Ram》에는 미국에서 1위를 차지한 히트 싱글 〈Uncle Albert/Admiral Halsey〉가 수록되어 있다.

다음 해, 전 무디 블루스 기타 연주자 데니 레인과 시웰을 데려와 밴드 윙스를 결성한다. 매카트니는 그룹의 형성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윙스는 어렵게 내놓은 아이디어였다 ...

어떤 그룹이든 [비틀즈에] 상응하는 성공을 거두기란 쉽지 않다 ...

 

 난 그런 중대한 위치에 서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 하지만, 계속할 것인지 그만둘 것인지의 기로에 서게 되었고,

난 그만두기에는 음악을 너무 사랑했다

 1971년 9월, 매카트니는 딸 스텔라 매카트니를 가지게 되었다. '스텔라'라는 린다의 할머니 이름을 따서 만들어졌다.

 

추가로 기타 연주자 헨리 맥컬러를 영입하여, 1972년  노팅엄 대학교의 700명의 관중 앞에서 첫 콘서트를 시작한다.

윙스는 밴을 타고 영국을 가로질러, 발표되지 않은 10번의 공연을 대학교에서 펼친다.

그 동안에 밴드는 수수한 숙소에서 지냈고, 학생들에게서 모여진 동전으로 보수를 받았으며, 비틀즈 곡을 공연하는 건

 피했다.

 

 매카트니는 후에 "내가 무대에 오르면서 보고 싶지 않았던 건, 다섯 줄에 있는 작은 수첩을 가진 언론 기자들이 모두

날 보고는 '어휴, 예전처럼 좋지 않군'이라고 말하는 장면이다.

그래서 우린 날 덜 불안하게 할 대학에서 투어를 하기로 결심했다 ...

 

투어의 끝 무렵에 난 다른 걸 할 결심이 들었고, 우린 유럽에 갔다."고 밝혔다.[91] 7주 동안 스물 다섯 번의 공연을 선보인 《Wings Over Europe Tour》에서 윙스와 매카트니는 오로지 솔로 곡만 연주했다. 비틀즈 때 커버한 리틀 리처드의 〈Long Tall Sally〉가 유일하다. 매카트니는 대부분 3,000명만 수용 가능한 작은 홀에서 연주했기 때문에 투어를 넓은 장소에서 하고 싶어했다.

 

1973년 3월, 윙스는 처음으로 미국에서 싱글 〈My Love〉를 1위에 올린다. 노래는 두 번째 LP 《Red Rose

Speedway》에 수록되었고, 음반은 미국에서 1위까지 올랐고, 영국에서 5위 내에 진입한다.

폴은 린다와 비틀즈의 전 프로듀서 조지 마틴과 함께 동명의 제임스 본드 영화 테마곡인 〈Live and Let Die〉를

제작했다.

 

이 곡은 아카데미상에 후보로 올랐고, 미국에서 2위까지, 영국에서 9위까지 올랐다. 마틴은 오케스트라 편곡에 대한

공로로 그래미상을 수상한다.

음악 교수이자 저자인 빈센트 베니테즈는 곡을 "교향악 록에서 최고의 것"이라고평가했다.

 

1973년 맥컬러와 세이웰이 나간 뒤, 매카트니는 레인과 함께 《Band on the Run》을 녹음한다.

윙스는 음반 덕분에 처음으로 플래티넘 일곱을 받는다.[97] 음반은 미국에서 영국에서 1위를 차지했고, 밴드가 두 나라

 모두에서 1위를 차지한 것은 이게 처음이었고, 빌보드지에 세 번 연속으로 오른 것도 처음이었다.

 

또한 10년간 가장 맣이 팔린 음반 중 하나고, 영국 차트에서는 124주간 머물렀다.

롤링 스톤은 《Band on the Run》을 1974년의 올해의 음반으로 선정했고, 1975년 그래미상 최고의 동시대/팝 보컬, 최고의 기술상 부문에서 우승했다.

 

 1974년, 윙스는 타이틀 곡 〈Band on the Run〉로 미국에서 두 번째 차트 1위 싱글을 만든다.

 음반은 10위 내에 오른 〈Jet〉와 〈Helen Wheels〉를 수록하고 있다.

《Band on the Run》은 롤링 스톤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음반 500장에서 413위를 차지했다

 

윙스는 《Band on the Run》 다음으로 차트 정상을 차지한 《Venus and Mars》(1975)와 《Wings at the

 Speed of Sound》(1976)를 발표한다.

 1975년, 윙스는 14개월에 걸쳐 《Wings Over the World Tour》를 시작한다.

 

영국, 호주, 유럽 그리고 미국에서 진행되었가. 투어에서는 매카트니가 윙스와 함께 처음으로 비틀즈의 곡을 공연했다.

두 시간의 세트 리스트에서 〈I've Just Seen a Face〉, 〈Yesterday〉, 〈Blackbird〉, 〈Lady Madonna

그리고 〈The Long and Winding Road〉의 다섯 곡이다.

 

두 번째 유럽 투어와 런던에서의 대규모 리허설 이후, 윙스는 야심찬 미국 아레나 투어에 착수한다. 여기에서 트리플

라이브 음반 《Wings over America》가 나왔고 미국에서 1위를 차지했다.

1977년 9월, 매카트니는 제임스 매카트니라는 이름의 세 번째 아이가 생긴다.

 

11월, 윙스는 매카트니와 레인이 공동 작사한 〈Mull of Kintyre〉를 발표한다.

이는 2,500만 장을 팔아치웠고 〈She Loves You〉의 판매량을 뛰어넘어, 빠르게 영국 차트 사상 가장 많이 팔린

 싱글 중 하나가 되었고, 매카트니의 솔로 경력에서 가장 성공적인 싱글이 된다. 이 영국 음반 판매량 기록은 1984년

자선 싱글 〈Do They Know It's Christmas?〉로 깨진다.

 

London Town》(1978)은 《Band on the Run》 이후로 윙스의 가장 많이 팔린 음반이 되었고, 미국과 영국에서

 5위 내에 진입한다.

그리고 싱글 〈With a Little Luck〉도 1위에 오른다.

 

 하지만 편단의 반응은 좋지 못했고, 매카트니도 음반에 실망을 표했다.

 《Back to the Egg》(1979)는 매카트니와 협력한 록 슈퍼그룹 록케스트라의 오버 더빙이 포함되어 있다.

 그룹에는 윙스의 멤버와 피트 타운젠드, 데이비드 길모어, 게리 브루커, 존 폴 존스 그리고 존 본햄이 있다. 비록

판매량은 플래티넘이었으나, 비평가의 혹독한 혹평을 들었다.

 

 1979년, 윙스는 20번의 공연이 이루어진 마지막 콘서트 《Wings UK Tour》를 마친다.

여기서 처음 라이브로 선보여진 비틀즈 곡은 〈Got to Get You into My Life〉, 〈The Fool on the Hill〉 그리고

 〈Let it Be〉다.

 

1980년, 매카트니는 자신이 프로듀싱한 두 번째 솔로 LP, 《McCartney II》를 발매한다.

영국에서는 1위에, 미국에서는 3위에 오른다. 그의 첫 음반처럼 모두 자신 혼자서 작곡하고 연주했다.

음반에는 스코틀랜드 글래스고에서 녹음한 라이브 버전의 노래 〈Coming Up〉이 수록되어 있고, 이것이 윙스의 마지막

차트 1위 히트가 된다.

 

 1981년 윙스와 창조적으로 할 수 있는 건 전부 성취하였다 생각한 매카트니는 변화하기로 결정한다.

그룹은 로열티와 급료를 두고 다투면서 1981년 4월에 해체한다

 

     
 

      

         
 

                   



 

 

 

 

 

 

 No More Lonely Nights매카트니(Paul McCartney) 각본을 쓰고 음악을 맡고 출연까지 한 피터 웹

(Peter Webb) 감독의 1984년 영화 <Give My Regards to Broad Street>의 수록곡으로 영국과 아일랜드에서

 2, 미국 6위에 올랐다.

골든 글러브 영화 주제가상 후보였다.

 

핑크 플로이드(Pink Floyd)데이빗 길모어(David Gilmour)가 기타로 참여했다. 하지만 데이빗의 세션비는 폴의

요청으로 자선단체에 기부되었다.

영화 마지막에는 같은 가사지만 완전 다른 편곡의 록 버전이 나나오는데 팬들 사이에서 엄청난 호평을 받았다.

그러나 영화는 음악에 비해 좋은 평가를 받지는 못했다

 

 

 

 

 

 

 

 

영국 여왕이 작위를 준 예능인은 많지 않다.

앤소니 홉킨스, 폴 매카트니, 엘튼 존...

비틀즈 멤버 중 폴이 유일하게 작위를 받은 것은 가장 영국적인 음악을 했고, 영국을 떠나지 않았으며, 비틀즈에서

폴 매카트니가 차지하는 비중이 반영된 것이다.

 

폴 매카트니의 음악은 비틀즈 시절만 기억하는 사람이 많은데, 비틀즈 해체 뒤에도 폴은 'Paul McCartney & Wings'

라는 밴드를 조직해서 여전히 많은 히트곡을 냈다.

그 가운데 한 곡이 이 곡이다.

 

'예스터데이' '렛잇비'에서 보여준 부드러운 목소리가 아니라 터프하고 폭발적인 가창력에 서정적인 가사에서 일상적인 가사로 바뀌고 있다.

 

이 곡은  좋고 음악적으로도 높이 평가할 곡이다. 5분이 넘는 긴 곡이라 국내에서는 뒷부분을 잘라서 방송을 많이 했다.

 사별한 전 부인인 린다 매카트니는 유명한 동물보호 운동가였고 현재 부인은 모델이자 인권 운동가인 헤더 밀스인데

사고로 다리를 잃은 장애인.

20세기 최고의 작곡가로도 선정된 대단한 송메이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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