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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P SONG & ROCK

Paul McCartney - Ob La Di Ob La Da

 

 

 

 

 

 

 

 

 

 

 

 

 

 

 

 

이 노래도 작곡가가 John Lennon과 Paul McCartney 공동으로 올려져 있습니다.

자메이카 reggae 리듬을 차용한다고 만든 곡이 이리저리 재반죽을 하다 최종적으로 변형된 모습입니다.

미국에는 안먹힐 것 같았는지 미국에는 늦게 발표했습니다.

1969년 호주,스위스,일본에서 차트 1위를 하고, 영국에선 Marmalade cover 버전이 차트 1위 했습니다.

 

무대는 얼마전 올린 동영상 톰존스의 딜라일라의 동일 무대입니다.  2012년 영국여왕 생일축하 공연.

폴매카트니는 공연 마지막 부분에 나와서 여러곡을 부릅니다.

그 중에서도 피날레 곡을 이 Ob La Di Ob La Da로 불렀습니다. 

 

비평가들이 Worst Hit Song 리스트에 올린 곡인데, 그에 대한 반발인지 관중들을 합창하게 합니다.

동료 빅스타들도 쭉 뒤로 도열해서 합창을 해줍니다.

 

현재 영국의 대중음악산업에서 영향력 1위 인물이라는 걸 보여주는 인증샷입니다.

백악관 가서도 그는 Sir 칭호를 듣습니다. 

 

 

 

 

 

 

 

Paul McCartney (폴 맥카트니) 
 


 
60년대에는 영국이 낳은 최고의 그룹 비틀즈(Beatles)의 멤버로, 70년대 이후에는 솔로주자로 활동하며 전세계적으로 수백만 장의 앨범을 판매하고 금세기 최고의 록 작곡가로서 성공을 구가하고 있는 음악인이 바로 폴 매카트니

(James Paul McCartney)이다.

싱어송라이터인 그의 비틀즈 시절의 대표곡 'Yesterday'(65)는 미국 라디오 방송국에서만 600만 번 이상 연주되어

왔고, 현재까지도 전세계적으로 최고의 애창곡으로 남아있다.

비틀즈 시절 야심만만한 폴은 밴드의 재정적인 지원을 담당할 비지니스 매니저로 그의 장인인 리 이스트먼

(Lee Eastman)을 추천했지만 다른 멤버들과 의견 차이를 보이면서 내부 갈등을 겪게 된다.

또한 새로 영입된 프로듀서가 자신의 트레이드마크인 스트링 편곡과 여성 백 보컬을 사용한 것에 불만을 품은 그는 70년 솔로 앨범인 [McCartney]를 발매한다.

비틀즈의 [Let It Be]가 출반되기 수개월 전에 앨범을 발표하고 음악잡지에 홍보 인터뷰를 가진 그는 인터뷰에서

비틀즈의 해체를 선언하게 된다.


이후 이익 배당을 문제로 법적인 소송을 걸면서 실질적으로 밴드를 해체시키게 된 폴은 자신의 회사인 매카트니 프로덕션을 설립한다.

팀의 해체에 따른 팬들의 실망에도 불구하고 그가 모든 악기를 연주하고 부인인 린다 매카트니(Linda McCartney)의

백업 보컬로 완성된 그의 첫 앨범은 US 차트 정상을 차지했고, 71년 두 번째 앨범인 [Ram]이 발매되기도 전에 싱글

'Another Day'가 대 히트를 기록하는 등 그의 인기 전선에는 아무런 장애가 없는 듯 했다.

그러나 71년 폴은 자신이 베이스와 리드 보컬을 맡고 아내 린다를 키보디스트 겸 백킹보컬로 하여 예전 무디 블루스

(Moody Blues)의 기타리스트였던 데니 레인(Denny Laine)과 드러머 데니 세이웰(Denny Seiwell)을 영입해

 윙즈(Wings)라는 밴드를 결성하였는데, 그 해 12월에 발매된 첫 앨범 [Wild Life]는 평론가들로부터 혹평을 받고

 앨범 판매고도 비교적 저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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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년 그다지 좋은 비평을 받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Red Rose Speedway]가 미국에서 차트 톱을 차지하고 이어

 제임스 본드(James Bond) 영화 [Live and Let Die]의 주제음악을 담당해 톱 텐 히트를 기록한 그는, 이어 발표한

 [Band on the Run](73)으로 비틀즈 이후 최고의 성공작이라는 평가를 받게 된다.

 

이 앨범으로 트리플 플래티넘을 기록하며 US 차트 4주 연속 정상의 자리를 차지하는 등 다시 찾아온 행운에 고무된 폴은 기타에 지미 매클로치(Jimmy McCulloch)와 드러머 게오프 브리턴(Geoff Britton)을 영입해 윙즈를 재정비했고,

[Venus and Mars](75), [At the Speed of Sound](76)로 인기를 누리며 전미투어를 실시한다.

 

78년 [London Town]의 'Mull of Kintyre'로 UK 정상에 등극하며 200만장 이상의 판매고를 올리고, 79년

[Back to the egg]로 연이어 상업적 성공을 누린 윙즈는 일본공연을 계획한다.

그러나 소량의 마리화나가 폴의 짐에서 발견되면서 공연은 취소되었고, 그는 10일 동안 구금되는 불명예를 입는다.

80년 윙즈의 영국 순회공연 후 솔로 앨범 [McCartney II]를 준비하던 그는 오랜 친구인 존 레논(John Lennon)의

죽음을 맞게 된다.

 

81년 윙즈가 해산된 후 솔로 활동에 전념하게 된 폴은 비틀즈의 전 프로듀서인 조지 마틴(George Martin)과 합작으로 세 번째 솔로 앨범인 [Tug of War](82)를 발표, 스티비 원더(Stevie Wonder)와 듀엣으로 녹음한 'Ebony and

 Ivory'가 넘버원의 자리에 오르면서 비평가들로부터 호평을 받고 상업적으로도 성공을 거둔다.

이듬해 가까이 지내는 음악동료인 마이클 잭슨(Michael Jackson)의 싱글 'The Girl is Mine'에 보컬로 참여하고,

 마이클 또한 폴의 앨범 [Pipes of Peace](83)에 'Say Say Say'를 불러 차트 정상을 차지하는 동료애를 과시한 그는 84년 영화 [Give My Regards to Broad Street]로 영화감독에 데뷔한다.

비록 영화는 혹평을 받으며 흥행에 실패했지만 사운드트랙 앨범은 'No More Lonely Nights'의 히트에 힘입어

 톱 셀링을 기록한다.

85년 코미디물 [Spies Like Us]의 배경음악을 담당하기도 한 폴은 86년 [Press to Play] 이후 록계의 거장인 엘비스 코스텔로(Elvis Costello)와 함께 작업하며 [Flowers in the Dirt](89)를 발표해 솔로 전향 이래로 가장 큰 호평을

받게 된다.


MTV의 "Unplugged Show"에 출연한 것을 계기로 [MTV Unplugged](91)를 발매하여 이후 타 아티스트들의

 전형처럼 되어버린 라이브 앨범을 발표한 그는, 93년 기존 그의 스탠다드 음악인 팝/록 스타일의 앨범

[Off the Ground]를 발표한 이후 다른 장르의 음악으로 그의 실험정신을 구가하게 된다.

 

94년 파이어맨(Fireman)이라는 가명으로 테크노 앨범을 발표하기도 한 그는 91년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에 의해

 연주되었던 'The Liverpool Oratorio'를 작곡했던 것을 바탕으로 그의 두 번째 클래식 작품인 'The Leaf'(95)를

 작곡했다.

 

[Oobu Joobu]라는 라디오 시리즈물의 진행자로, BBC 방송국의 비틀즈 다큐멘터리 작업으로 바쁜 시간을 보낸 폴은

드디어 96년 비틀즈의 다큐멘터리 비디오에 존 레논의 미발표 데모곡 'Free As a Bird', 'Real Love'를 비롯해

오래도록 잊혀져있던 비틀즈의 데모곡들과 앨범 선곡에서 제외되었던 곡들을 담은 멀티 볼륨(multi-volume) 앨범이

합쳐진 [Beatles, Anthology]를 발표해 멀티 플래티넘을 기록하게 된다.

97년 베이비 붐 세대의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어쿠스틱한 매력으로 가득찬 [Flaming Pie]를 발표한 그는 영국과 미국

차트 2위를 차지하면서 그래미 그 해의 앨범(Album of the Year)에 노미네이트 되었고, 영국 황실로부터 기사 칭호의 영광을 얻게 된다.

98년 사랑하는 아내의 죽음을 맞이한 폴 메카트니는 음악활동 이외에도 동물보호와 채식주의를 주창하는 적극적

행동주의자로 현재까지 활동하고 있다.

 

 

 

 

 


 

 

 

1991년, 로열 리버풀 필하모닉 소사이어티는 150주년 기념으로 매카트니에게 악곡을 써달라는 요청을 하고, 그는\ 오케스트라 음악에 도전한다. 칼 데이비스와의 공동 작업했고, 리버풀 오라토리오가 제작했다. 키리 테 카나와, 샐리 버제스, 제리 해들리, 윌라드 화이트가 오페라 가수를 맡았고, 로열 리버풀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리버풀 대성당 성가대가

함께 했다.

 리뷰는 부정적이었다.

 

 《가디언》지는 특히 음악을 "모든 것을 빠른 박자로 접근하는 무서움"이라 표현했고, 곡에 대해 "모든 작업을 묶어버릴 반복되는 아이디어에 대한 미약한 인식"이라고 덧붙였다.

 

 신문에서는 매카트니가 몇몇 작업물에 빠른 박자를 넣었고 "다행히, 역사는 당시에 많은 좋은 음악들이 비평가에게

좋지 못한 평을 받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래서 나는 행복하다 ...

 

사람들이 알아서 작업물의 훌륭함을 평가하게 놔 두어라."며 덧붙였다

《뉴욕 타임스》는 약간 더 관대한 평가를 내렸다, "아름다움과 기쁨을 주는, 극적인 요소가 있는 장면들이 있다 .

 음악의 무고한 성실성은 그 야망을 이루기 힘들게 만든다.

 런던에서의 초연 후, 전 세계에서 공연이 이루어졌고, 《Liverpool Oratorio》는 《뮤직 위크》의 영국 클래식 차트의 1위에 오른다.

 

1991년, 매카트니는 어쿠스틱 음악만 선정하여 MTV 언플러그드에서 공연한다.

공연은 《Unplugged (The Official Bootleg)》으로 명명된 라이브 음반으로 발매된다.

 1990년대 내내, 매카트니는 유스와 킬링 조크와 협력하여 음악 듀오 '더 파이어맨'을 결성해 활동한다.

 

1993년 그들의 첫 일렉트로니카 음반, 《Strawberries Oceans Ships Forest》을 발매한다.[150] 매카트니는

1993년에 록 음반 《Off the Ground》를 발매한다.

 후에 《New World Tour》를 했고, 다음 해 《Paul Is Live》를 발매한다.

 

1994년, 매카트니는 솔로 경력을 4년간 중단하고 해리슨, 스타, 그리고 마틴과 함께 《비틀즈 앤솔로지》 작업을

개시한다.

1995년 그는 미국의 방송사 웨스트우드 원을 위해 《Oobu Joobu》란 라디오 시리즈를 녹음한다.

 

그는 이를 "와이드스크린 라디오"라고 표현했다.

 또한 그해 웨일스 공 찰스가 그에게 왕립음악대학의 명예 회원 자격을 수여한다.

매카트니는 "음표도 읽을 줄 모르는 사람한테는 좀 놀라운 일이다"라고 말했다.

 

1997년, 매카트니는 록 음반 《Flaming Pie》를 발매한다. 스타는 〈Beautiful Night〉의 드럼과 백 보컬을 맡았다.

 다음 해, 그는 클래식 음반 《Standing Stone》을 발매했고, 영국과 미국 클래식 차트의 정상에 오른다.

 1998년, 그는 더 파이어맨의 두 번째 일렉트로니카 음반 《Rushes》를 발매한다.

 

1999년, 매카트니는 《Run Devil Run》를 발매한다.

 이언 페이스데이비드 길모어가 피처링했고, 1주일만에 녹음되었다.

또한 음반의 커버는 매카트니가 주로 디자인한 세 번째 커버다. 그가 그해에 이 음반을 계획할 동안, 1998년 4월에

아내 린다가 암으로 사망한다.

 

그는 29살에 죽은 아내를 위한 미발표 공연 《Concert for Linda》을 진행했다. 공연은 1999년 4월 10일에 로열

앨버트 홀에서 열렸다.

그리고 가까운 친구인 크리시 하인드와 칼라 레인이에 의해 조직되었다.

1999년 내내, 그는 오케스트라 음악 실험을계속했고, 《Working Classical》를 발표한다.

 2000년, 그는 슈퍼 퍼리 애니멀스와 유스와 함께, 1960년 중반 그가 매료된 사운드 콜라주와 뮈지크 콩크레트를

사용한 일렉트로니카 음반 《Liverpool Sound Collage》를 발매한다.

그는 노래 〈Nova〉를 린다에게 바치는 헌정 음반 《A Garland for Linda》(2000)에 담았다. 

 

 

 


 

 

 

 

매카트니는 9·11 테러를 존 F. 케네디 국제공항에서 목격했고, 이에 자극받아 자선 공연 《the Concert for New York City》를 자신이 주도하여 조직한다. 그해 11월에, 테러의 희생자를 추모하는 곡 〈Freedom〉을 수록한 정규 음반

《Driving Rain》을 발매했다.

 

 다음 해, 매카트니는 기타 연주자 러스티 앤더슨과 브라이언 레이, 키보드 담당 폴 위킨스, 드럼 연주자 에이브 라보리엘 주니어를 포함한 밴드와 투어를 떠난다.

 

 그들은 2002년 4월부터, 미국, 멕시코, 그리고 일본을 거쳐 《Driving World Tour》를 시작했다.

 투어의 결과로, 더블 라이브 음반 《Back in the US》과, 전 세계에서 2003년 《Back in the World》가 발매되었다.투어에서 126백만 달러를 벌어들였고, 하룻밤에 평균 2백만 달러 이상을 벌었다.

빌보드는 이 투어를 올해 최고의 투어로 이름 붙였다.

 

2002년 7월, 매카트니는 헤더 밀스와 결혼한다.

11월, 조지 해리슨 사망 1주기를 맞이하여, 매카트니는 《Concert for George》를 진행한다.

그는 내셔널 풋볼 리그의 슈퍼볼에 참가하여, 2005년 슈퍼볼 XXXVI 경기 전 〈Freedom〉을 공연한다.

 

 2002년, 영국의 암스칼리지는 그에게 문장을 수여한다. 매카트니의 문장은, 리버풀 출신인 그의 음악 경력을 대조하여, 리버 버드가 자신의 발톱으로 어쿠스틱 기타를 들고 있는 것을 나타내었다.

방패에는 딱정벌레의 등을 나타낸 네 개의 상징이 있다. 문장의 문구 'Ecce Cor Meum'는 라틴어이며, "내 심장을 보아라"라는 뜻이다.

 2003년, 폴 매카트니와 헤더 밀스 사이에서 딸, 베아트리체 밀리가 태어났다.

 

 

2005년 7월, 그는 런던 하이드파크에서 개최된 라이브 8에서, U2와 함께 〈Sg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를 공연한여 콘서트의 오프닝을 열었고, 〈Drive My Car〉(조지 마이클과 함께), 〈Helter Skelter〉,

그리고 〈The Long and Winding Road〉를 불러 마지막을 장식했다.

 

 9월, 음반 《McCartney》와 마찬가지로 대부분의 악기를 혼자 연주한, 록 음반 《Chaos and Creation in the

Backyard》를 발매했다.

2006년, 매카트니는 클래식 음반 《Ecce Cor Meum》을 발매한다.

 

다음 해 2007년 록 음반 《Memory Almost Full》가 나왔다.[184][nb 39] 2008년, 그는 세 번째 더 파이어맨 음반

Electric Arguments》를 발표했다.

 또한 그해, 리버풀이 유럽 문화 수도로 선정된 걸 기념하여 공연했다.

2009년, 4년 만에, 80번이 넘는 콘서트를 진행했다.

 

비틀즈가 《에드 설리번 쇼》로 미국 텔레비전에서 첫 출현한지 45년 후, 매카트니는 그 프로그램과 같은 극장에서

진행된 《레이트 쇼 위드 데이비드 레터먼》에 출연했다.

2009년 9월 9일, EMI는 디지털 리마스터가 이루어진 비틀즈 카탈로그를, 비디오 게임 《비틀즈: 록 밴드》의 발매일과 동시에 재발매했다.

 

2009년, 그는 세 번의 매진된 콘서트를 새롭게 지어진 시티 필드(퀸스의 셰이 스타디움을 대체하기 위해서 지음)에서

 열었다.

공연의 라이브 곡이 다음 해 《Good Evening New York City》 더블 음반으로 나왔다.[191] 2010년, 매카트니는

 펜실베이니아 주 피츠버그PPG 페인츠 아레나에서 공연을 열었다

 

 

 

 

     
 

      

         

 

 

 

2011년 7월, 매카트니는 양키 스타디움에서 두 번의 완매된 콘서트를 진행했다. 《뉴욕 타임스》는 첫 번째 콘서트 리뷰에서 매카트니가 "작별을 고하지 않고, 스타디움 투어를 다니며 마라톤 같은 콘서트를 진행한다"고 보도했다.

 2011년 9월 매카트니는 피터 마틴스와 공동 작업한 뉴욕 시티 발레단의 음악인 《Ocean's Kingdom》을 발표한다.

 

또한 그해에 낸시 쉬벨 결혼했다.

2012년 2월 스탠더드 노래를 모은 음반인 《Kisses on the Bottom》를발매했다.

같은 달에 미국 레코드 예술 과학 아카데미에서 그를 올해의 뮤직케어스 인물로 선정했다. 선정 2일 전에는 제54회

그래미상에서 공연하기도 했다.

 

매카트니는 세계 최고의 인기인 중 하나로 남아있다.

그가 멕시코 시티에서 펼친 두 번의 공연에서 총 100,000명이 넘는 사람이 운집했고, 여기서 6백만 달러를 벌었다.

2012년 6월, 매카트니는 버킹엄 궁전 밖에서 열린, 엘리자베스 여왕을 위한 콘서트에서 〈Let It Be〉, 〈Live and

 Let Die〉를 포함한 곡을 불렀다.

 

 6월 27일, 런던에서 열린 2012년 하계 올림픽개막식의 피날레를 〈The End〉와 〈Hey Jude〉를 불러 장식했다.그는 올림픽 조직위원회에게 1파운드(당시 약 1784원)의 출현료만 받았다.

12월 12일, 매카트니는 너바나의 전 맴버(크리스 노보셀릭데이브 그롤, 그리고 팻 스미어)와 함께 허리케인 샌디

피해자들을 위한 자선 공연 《12-12-12: The Concert for Sandy Relief》의 후반부에서 공연했다.

 

2백만 명에 가까운 전 세계의 사람들이 공연을 시청했다.

 2013년 8월 28일, 매카트니는 2013년 10월에 발매할 정규 음반 《New》의 타이틀 곡을 발표했다.

 

프라임타임 엔터테이먼트는 일곱 번이나 그래미에서 우승한 비틀즈의 업적과, 《에드 설리번 쇼》에서 이루어진 그들의 기념비적인 첫 공연을 기념하여, 폴 매카트니와 링고 스타를 2014년 1월 27일에 촬영하여, CBS 2014년 2월 9일에

방송했다.

 

공연의 이름은 《The Night That Changed America: A Grammy Salute to The Beatles》이고, 22개의 비틀즈 곡을 다양한 가수가 불렀으며, 여기에 폴 매카트니와 링고 스타도 포함되어 있다.

2014년 3월 19일, 매카트니가 알 수 없는 바이러스로 아파서 몸져 누웠다. 의사의 지시로 다음주부터 시작하기로 예정된 일본 콘서트는 취소되었다.

 

 2014년 6월, 뉴욕 알버니에서 완전히 회복된 모습으로 3시간 공연을 열어 투어를 재개했다

 2014년 8월 14일, 매카트니는 캘리포니아 주 샌프란시스코 캔들스틱 파크에서 마지막 콘서트를 열었다.

캔들스틱파크는 비틀즈가 1966년에 마지막 콘서트를 진행한 장소이고, 매카트니의 공연 이후에 해체되었다.

 

2014년, 매카트니는 비디오 게임 《데스티니》의 엔딩곡 〈Hope for the Future〉를 쓰고 불렀다.

 2014년 11월, 매카트니의 솔로 곡과 비틀즈 곡을 여러 가수가 커버한 42개의 곡이 수록된 헌정 음반

《The Art of McCartney》가 발매되었다.

또한 그해에 매카트니는 미국의 가수 카녜이 웨스트와 작업한 〈Only one〉을 2016년 12월 31일에 발매했다.

 

2015년 1월, 매카트니는 카녜이 웨스트리한나와 함께 작업한 싱글 〈FourFiveSeconds〉을 발표했다.[214] 같은

 달에 곡의 뮤직 비디오를 공개했다.

 

그리고 2015년 2월 8일 제57회 그래미상에서 공연했다.[216] 매카트니는 웨스트의 2015년 싱글 〈All Day〉에서

 특별 손님으로 참여했다

 

2015년 2월 15일, 매카트니는 폴 사이먼과 《새터데이 나이트 라이브 40주년 기념 스페셜》에서 공연했다.

매카트니와 사이먼은 〈I've Just Seen a Face〉의 1절을 어쿠스틱 기타로 공연했고, 매카트니는 후에 〈Maybe

I'm Amazed〉를 공연했다.

 매카트니는 앨리스 쿠퍼가 이끄는 슈퍼그룹 할리우드 벰파이어스가 커버한 〈Come and Get It〉에서 함께 리드

 보컬을 맡았다. 곡은 그들의 데뷔 음반에 수록되어 2015년 9월 11일에 발매했다.

 

2016년 6월 10일, 매카트니는 자신의 경력을 집대성한 컴필레이션 음반 《Pure McCartney》를 2-CD, 4-CD,

4-LP, 그리고 디지털 버전의 세 포맷으로 발매했다.[220] 음반은 매카트니의 솔로 경력 전반에 걸친 노래과 윙스, 그리고 더 파이어맨과 작업한 노래를 수록하고 있다. 4-CD 버전에는 대다수 히트한 67개의 곡이 수록되어 있다.

2017년, 매카트니는 영화 《캐리비안의 해적: 죽은 자는 말이 없다》에 출현할 예정이다

 

 

 

 

 

 

 

매카트니는 스스로 터득한 음악가로, 이러한 접근법에 대해 음악 학자 이안 맥도널드는 "자연적으로 이끌려 온 그의 음악 형식은 아직 완전히 교육되지 않았다 ... [그는] 본능적으로, 거의 기술적으로 '완성된' 작품을 내고, 그의 조화로운 판단은 대개 완벽한 음높이와 극적인 귀 한 쌍을 기반으로 한다 ...

 

타고난 선율 작곡가다—그 하모니로부터 떨어져 존재할 수 있는 작곡가다

매카트니는 "음악에 대한 나의 접근 방식을, 훈련받지 않고 그리는 원시 동굴 예술가들 같은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매카트니의 베이스 연주자로서의 능력은 스팅, 닥터 드레, 베이스 연주자 마이크 엘리존도, XTC콜린 몰딩 등 다른

베이시스트들로부터 인정받는다.

플렉트럼이나 피크를 주로 사용하는 것으로 잘 알려져 있으며, 매카트니는 가끔 핑거스타일로도 연주한다.

 

그는 슬래핑이나 뮤팅 기법을 사용하지 않는다.

매카트니는, 모타운 소속 예술가 제임스 제이머슨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매카트니는 제이머슨의 선율 스타일을 듣고,

그를 영웅이라 칭하기도 했다.

그는 또한 브라이언 윌슨의 영향을 받았다. 매카트니는 "그가 매우 특이한 곳으로 갔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가 좋아하는 또다른 베이시스트는 스탠리 클락이다.

 

매카트니는 비틀즈 초기에 호프너 500/1 베이스를 주로 사용했다. 1965년에는 녹음용으로 리켄배커 4001S를 가끔씩 사용했다.

1967년까지 일반적으로 복스 앰프를 사용했지만, 증폭을 위해 펜더 베이스맨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1980년대 후반과 1990년대 초반에는 월 5-스트링을 사용하여 가벼운 호프너와는 달리 더 두껍게 울리는 베이스

 라인을 연주했다.

이 기타는 그가 연주 스타일을 근본적으로 고려하여 좀 더 민감하게 연주하게 만들었다.

 그 이유 때문에 1990년 호프너로 다시 돌아왔다.[228] 그는 라이브 공연에서 메사 부기 베이스 앰프를 사용한다.

 

맥도널드는 〈She's a Woman〉가 매카트니의 베이스 연주가 극적으로 진화하기 시작한 전환점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비틀즈 전기작가 크리스 잉엄은 매카트니의 연주가 상당한 진보를 보인 순간이 《Rubber Soul》, 특히

수록곡 〈The Word〉에서 나타났다고 주장한다.

 

 베이컨과 모건은 수록곡에 나타난 매카트니의 그루브를 "팝 베이스 연주의 중대한 시점"이라며 "악기에 대한 그의

 진지한 기술적 능력을 녹음한 최초의 증거"라고 동의했다.

맥도널드는 제임스 브라운의 〈Papa 's Brand New Bag〉와 윌슨 피켓의 〈Midnight Hour〉, 이런 미국의 소울 노래에서 매카트니가 요소를 흡수하고 영감을 이끌어내 "현재까지 그의 가장 자연스러운 베이스 파트를 전달한다."며 영향력에 대해 말했다.

 

베이컨과 모건은 비틀즈의 노래 〈Rain〉에서 보여진 그의 베이스라인을 "믿기 힘들 정도로 놀라운 연주 ..

 [매카트니]는 리듬과 '리드 베이스' 모두를 고려한다 ...

 [베이스의] 목 부위를 [선택하여] ...

그는 정확히, 리듬을 위한 소리가 너무 얇아지지 않게 연주하며 멜로디에 대한 선명도를 준다."고 했다.

 

 맥도널드는 곡을 비틀즈의 B면 중 최고라고 여겼고, "밀접하게 포화된 질감이 매카트니의 [베이스라인에서] 울려 퍼진다"고 말했다.

베이스라인에 대해서는 "트랙을 압도할 정도로 위협적인 발명품"이라고 표현했다.

 

 맥도널드는 또한 "베이스 파트에 이국적인 멜리스마"가 있다며 인도 고전 음악의 영향을 지적했다.[238] 매카트니는 《Sgt. Pepper 's Lonely Hearts Club Band》에, 특히 〈Lucy in the Sky with Diamonds〉에서 그의 가장

강력하고 독창적인 베이스 연주가 포함되어 있다고 밝혔다

 

 

 

 

 


 

 

 

어쿠스틱 기타

매카트니는 어쿠스틱 기타를 주로 피크를 사용해 연주하지만, 핑거스타일의 요소를 쓰기도 한다.[240] 비틀즈

 노래에서 연주한 그의 어쿠스틱 기타의 예에는 〈Yesterday〉, 〈I'm Looking Through You〉, 〈Michelle〉,

Blackbird〉, 〈I Will〉, 〈Mother Nature's Son〉 그리고 〈Rocky Raccoon〉 등이 있다.[241] McCartney는 〈Blackbird〉 추려내어 개인적으로 좋아한다 언급했고, 기타 부분에 대한 기술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난 내 자신만의 [핑거 피킹] 방식을 가지고 있다 ...

 

나는 실제로 두 줄을 한 번에 당긴다 .

나는 그 포크 연주자들을 모방하려고 애썼다

 그는 〈Jenny Wren〉에서 비슷한 기술을 사용했다.

 매카트니는 어쿠스틱을 녹음할 때 에피폰 텍산으로 대다수를 연주했지만, 마틴 D-28도 사용했다

 

 

 

 

 

 

 

 

일렉트릭 기타

 

 

매카트니는 리드 기타를 비틀즈의 여러 곡에서 연주했다. 이안 맥도널드는 매카트니 에피폰 카지노로 연주한

Drive My Car〉를 "지독하게 각진 슬라이드 기타 솔로"라고 표현했다.

매카트니는 이 악기에 대해 "내가 일렉트릭 기타 하나를 고르게 된다면, 이것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해리슨이 작곡한 〈Taxman〉과 〈Sg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 그리고 〈Helter Skelter〉에서

기타를 연주했고 맥도널드는 이를 "놀랄만한 기타 솔로"라고 기술했다.

맥도널드는 〈Good Morning Good Morning〉에서 나타난 매카트니의 "번뜩이는 모조 인도" 기타 솔로에 찬사를

 보냈다.

 

Another Girl〉에서 리드 기타를 맡았다.

윙스에 있을 때, 매카트니는 그룹 멤버들에게 일렉트릭 기타 연주를맡기는 경향이 있었다.

 그래도 《Band on the Run》에서는 리드 기타의 대부분을 연주했다.

 

 1990년에 그가 가장 좋아하는 기타연주자가 누구인지 물었더니 "난 여전히 헨드릭스가 최고다."라고 답했다.

그는 주로 전자 음악 연주에는, 특히 라이브 공연에선 깁슨 레스폴을 사용한다.

 

 

 

 

 

 

 

보컬

 

음악계에서 가장 위대한 가수 중 한 명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 매카트니는 《롤링 스톤》이 선정한 가장 위대한 가수에서 11위를 차지했고,《NME》 독자가 선정한 가장 위대한 가수에서는 8위를 차지했다.그리고 《뮤직 레이더》 독자가 선정한 "역사상 가장 위대한 가수 30명"에서 10위에 올랐다.

 

그는 네 옥타브에 걸쳐있는, 다양하고 넓은 테너 보컬 범위를 가진 가창력으로 유명하다.[253][254] 리틀 리차드의 영향을 크게 받은, 매카트니의 보컬은 경력 전반에 걸쳐 여러 음악 장르에 손길을 뻗고 있다.

 베니테즈는 〈Call Me Back Again〉에서, "매카트니는 블루스적인 솔로 보컬리스트로서 빛난다"고 표현했다 맥도널드는 〈I'm Down〉에서 "매카트니의 보컬과 다재다능한 스타일을 유감없이 보여주는 로큰롤 클래식"이라고 말했다.

 

맥도널드는 〈Helter Skelter〉을 헤비 메탈의 초기 시도, 〈Hey Jude〉를 "팝/록의 혼합체"라고 표현했으며, 곡에

각각 "가스펠 스타일의 멜리즘 사용"과, "페이드 아웃에 가짜 적인 비명"이 있다 지적했다.

베니테즈는 〈Hope of Deliverance〉와 〈Put It There〉에 포크 음악을 시도하려는 노력이 있었다고 지적했다.

 

월터 에버렛은 〈When I'm Sixty-Four〉과 〈Honey Pie〉에 보드빌이 있다고 추측했다.

 맥도널드는 비틀즈의 12마디 블루스 〈She's a Woman〉의 "스윙 비트"를 "그때까지 그들이 제작한 것 중 가장 짜릿한 소리"라고 치켜세웠다.

 

매카트니의 목소리에 대해서는 "가운데에서, 흉성 성역의 한계를 쥐어짜고 금방이라도 갈라질 듯 위협한다."고 했다.

맥도널드는 〈I've Got a Feeling〉의 보컬에 대해서 "팔팔하고 혼이 느껴진다", "지저분하며, 중간 빠르기의 록커

"라고 했고, 〈Back in the U.S.S.R.〉에서는 "[비틀즈의] 마지막 빠른 템포 록커"라고 했으며, 매카트니의 "벨팅"

보컬은 그때에서 3년 전 녹음된 〈Drive My Car〉부터 최고를 찍었다고 했다.

 

그는 비틀즈 경력부터 솔로 예술가까지에 걸쳐 광범위한 음악적 그리고 보컬 스타일을 계속해서 실험한다.

〈Monkberry Moon Delight〉에 대해 피치포크의 제이슨 그린은 "완전히 불안한 보컬 테이크, 폴은 당신의 귀 바로

 앞에서 벌컥거리고 엉엉거릴 거다.

"라고 했고 "톰 웨이츠의 현대판 공연처럼 보인다."고 덧붙였다

 

 

건반

 

매카트니는 피아노를 여러 비틀즈 노래에서 연주했다. 예를 들면 〈Every Little Thing〉, 〈She's a Woman〉,

 〈For No one〉, 〈A Day in the Life〉, 〈Hello, Goodbye〉, 〈Hey Jude〉, 〈Lady Madonna〉,

〈Let It Be〉 그리고 〈The Long and Winding Road〉가 있다.

 

 맥도널드는 〈Lady Madonna〉의 피아노 파트는 패츠 도미노를 연상시키며, 〈Let It Be〉는 가스펠 리듬이

 담겨있다고 했다.

맥도널드는 〈Strawberry Fields Forever〉에서 나타난 매카트니의 멜로트론 도입부를 노래 성격에 있어 필수적인

기능이라고 불렀다

 

 매카트니는 무그 신시사이저를 비틀즈의 노래 〈Maxwell's Silver Hammer〉와 윙스 노래 〈Loup (1st Indian on

the Moon)〉에서 연주했다.

 잉엄은 윙스의 노래 〈With a Little Luck〉고 〈London Town〉를 "세심한 팝 신시자이저 터치로 가득 찼다"고

 표현했다.

 

드럼

매카트니는 드럼을 비틀즈의 노래 〈Back in the U.S.S.R.〉, 〈Dear Prudence〉, 〈Martha My Dear〉, Wild Honey Pie〉 그리고 〈The Ballad of John and Yoko〉에서 연주했다.

 그는 자신의 솔로 정규 음반인 《McCartney》과 《McCartney II》, 윙스의 정규 음반 《Band on the Run》의 드럼 파트를 맡았고, 솔로 음반 《Chaos and Creation in the Backyard》에서는 대부분의 드럼을 혼자서 연주했다.

매카트니는 1968년 폴 존스의 노래 〈And the Sun Will Shine〉에서 드럼을 연주했다.[278] 매카트니는 1960년 스코틀랜드에서 이루어진 비틀즈의 첫 투어 공연에서 사용한 폴 라몬이란 가명으로 스티브 밀러 밴드의 1969년 노래 〈Celebration Song〉과 〈My Dark Hour〉에서 드럼을 연주했다.[279][280]

테이프 루프

1960년 중반 예술가 친구인 존 던바가 사는 런던의 아파트에 찾아 온 매카트니는 여자친구 재인 애셔의 집에서 가져온

 테이프로 녹음을 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매카트니가 제작한 다양한 노래와 악곡, 음성들을 믹스했다.

딕 제임스는 매카트니를 위해 데모를 만들어줬다.

 

 미국의 아방가르드 음악가 존 케이시에게 큰 영향을 받은 매카트니는 음성, 기타, 봉고를 브레넬 테이프 리코더로 테이프 루프하거나 루프를 접합했다.

그는 이렇게 완성된 결과물을 "일렉트로닉 심포니"라고 불렀다.[282] 매카트니는 테이프를 역재생하거나, 속도를 빠르게 혹은 느리게 하여 원하는 효과를 만들었다.

비틀즈의 후기 노래인 〈Tomorrow Never Knows〉와 〈The Fool on the Hill〉 등이 이러한 기법을 사용했다.

 

매카트니는 초기에 리틀 리처드, 엘비스 프레슬리, 버디 홀리, 칼 퍼킨스, 척 베리에게 영향을 받았다.

 비틀즈가 어째서 《페퍼 상사》 커버에 엘비스 프레슬리를 올리지 않았는지를 물었을 때, 매카트니는 이렇게 대답했다. "엘비스는 너무 중요했으며 또한 나머지와는 비교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에요 ... 그래서 우린 그를 커버에 넣지 않았어요.

 

그는 단순히 ... 팝 스타가 아니라 제왕 엘비스였으니까요."

 매카트니는 〈I Saw Her Standing There〉의 베이스라인을 척 베리의 〈I'm Talking About You〉에서 그대로

 따온 것이라 밝혔다.

 

매카트니는 리틀 리처드가 자신의 우상이었으며, 그의 가성이 자신의 보컬 기법에 영향을 주었다고 말했다.

 매카트니는 〈I'm Down〉을 리틀 리처드 흉내를 낼 매개체로서 썼다고 밝히기도 했다.

 

1971년에는 버디 홀리의 음악 판권을 구입하였고, 1976년에는 그의 서거 40주년 기념일에서, 영국서 매년 열리게

될 "버디 홀리 위크"를 개막했다.

이 행사에는 게스트 음악가의 공연과 작곡 경연 대회, 사생 대회, 크리켓츠의 특별 공연이 마련되어 있다.

 

 

 


매카트니는 1969년 사진작가 린다 이스트먼과 결혼한다. 린다는 유명 록밴드와 동행하며 그들의 모습을 담는

사진작가였는데, 1967년 런던에서 활동하던 록밴드들의 사진을 찍기 위해 비틀즈의 팀에 합류하였고 린다와 폴은

 서로 첫눈에 반하여 결혼에 골인하게 된다.

 

 

 

 


린 다는 폴의 뮤즈로써, 폴은 린다와 윙스활동까지 같이하며 어디든지 함께 하였다.

폴에게는 안습이지만 '뮤지션'으로써 린다의 평가는 매우 좋지 않았다.

그러나 애초에 밴드에 그녀를 부른 이유는 그녀가 좋은 뮤지션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순전히 함께 하고 싶었던

 이유였기 때문에 당사자들은 신경쓰지 않았던 듯 하다

 

 

 


그 러나 린다는 1998년에 유방암으로 인해 투병생활을 지속하던 중 56세의 일기로 생을 마감하게 된다.

평생을 함께한 배우자의 사망으로 폴은 큰 슬픔에 빠졌으며, 후에 동물 실험을 하지 않는 조건으로 암 치료제 연구소를

설립하기도 하였다

 

 

 

 


이후 2002년 헤더 밀즈[25]라 는 환경운동가와 재혼하였다.

그 이듬해에 늦둥이 딸을 보게 되는 등 행복한 시간을 보냈으나 이와 같으 시간으 지속되지 못하고 2007년에 결국

이혼하게 된다.

 

둘 사이에서 난 딸의 양육권은 조건부로 헤더 밀즈가 가져가게 되었다.

이혼시 헤더 밀즈는 엄청난 위자료를 챙겨 결국 돈을 보고 결혼했던게 아니냐는 여론의 뭇매를 받기도 하였다

 

 

 

 


그 후 다시는 결혼하지 않을 것 같던 폴 매카트니는 19세 연하의 낸시 쉬벨을 만나 2011년 세번째 결혼을 했다.

 헤더 밀즈와 달리 낸시 쉬벨은 미국의 유명한 자산가의 상속녀로 재산과 관련한 의심에서 벗어난 상태.

최근 폴 매카트니와 여러 매체에서 보여주는 훈훈한 모습으로 팬들에게도 호의적인 응원을 받고 있다.

 

 

 

 


현 재 함께하고 있는 밴드 멤버들이 있다. 왼쪽부터 기타를 맡고 있는 Rusty Anderson과 Brian Ray, 드럼을 담당하는 Abe Laboreil Jr., 키보드를 담당하는 Paul 'Wix' Wichens.

 곡마다 어우러지는 화음들이 도드라지는 폴 매카트니 작곡의 노래 특성상 각각의 멤버들이 백보컬을 담당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