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lix Mendelssohn Violin Concerto in E minor, Op.64
멘델스존 바이올린 협주곡 e단조 작품64
바이올린 협주곡 중 최고의 금자탑으로 손꼽히는 이 곡은 아름다운 가락과 정열에 넘친 풍부한 색채감이 전곡에 넘쳐, 오늘날 가장 많이 연주되는 바이올린 협주곡 중의 하나이다.
멘델스존이 이 마단조 협주곡의 작곡에 착수한 것은 1838년(29세)의 일이지만 완성된 것은 그로부터 6년 뒤인 1844년(35세) 9월이었다.
속필가인 그로서는 이례적으로 장시일이 걸렸는데 그렇게 된 데에는 몇가지 이유가 있었다.
우선 착수하기 전 해에 세실 살로테 소피 장 르노와 결혼해서 행복하고 다망한 신혼생활에 쫒기고 있었다는 것, 그리고 라이프찌히 음악원의 창설을 위해 동분서주해야 했고, 버밍검 음악제와 베를린 예술 아카데미의 지휘자로서 연주활동에도 몸을 쪼개야 했던 것 등, 차분히 일에 몰두할 수 없었다는 것이 외부적인 주요 이유였다.
그리하여 이 곡은 이듬해 페르디난드 다비드의 바이올린 독주로 라치프치히 게반트하우스에서 초연되었다. 초연 당시 멘델스존은 건강의 악화로 부지휘자인 닐스 가데에게 지휘를 맡겼다.
다비드와 멘델스존은 어렸을 적 친구로, 같은 오케스트라의 악장과 지휘자 사이였고 서로 오랫동안 교우를 지속했다.
이 곡을 작곡하는 과정에서도 다비드로부터 많은 조언을 충실하게 듣고 신중하게 작곡해 나갔다. 따라서 이 협주곡이 다비드에게 헌정된 것은 매우 당연한 일일 것이다. 이 <바이올린 협주곡>은 멘델스존의 모든 작품 중에서 가장 뛰어난 것일 뿐만 아니라, 독일 낭만파 음악이 낳은 협주곡으로서는 기념비적인 의의를 가지는 작품이다.
부드러운 낭만적 정서와 균형 잡힌 형식미는 멘델스존의 모든 작품에 공통된 특징이지만 이 두개의 측면이 이 곡에서 처럼 잘 조화된 작품은 이 곡의 이전에도 이후에도 없다고 할 만큼 멘델스존이 우리에게 남긴 최대의 유산이다.
영국의 스텐실 베네트는 베토벤 <바이올린협주곡>과 멘델스존의 <바이올린협주곡>을 비교하면서 <아담과 이브>
라고 평했다.
이 평을 전면적으로 긍정할 수는 없다고 할지라도 분명히 화려함이나 섬세함, 그리고 유려함에 있어서 베토벤의 것보다 훨씬 여성적인 것만은 사실이다.
곡은 고전적 형식에 의해 씌여졌지만, 전체적으로 로맨틱하고 도처에 새로운 시도가 엿보인다.
예컨데 전 3악장이 중단 없이 연속해서 연주되는 것이나, 제1악장의 서두부터 독주바이올린이 제1주제를 연주한
것이나, 스스로 카덴차를 써서 로맨틱한 정서가 중단되는 것을 막고 있다던가, 제1악장의 독주 카덴차가 재현부 다음에 연주되는 관례를 무시하고 발전부 다음에 온다는 점 등은 당시로서는 다 대담한 수법이었던 것이다.
제1악장 : Allegro molto appasionato
현악기의 으뜸화음이 속삭이듯이 나오면 이를 타고 둘째마디부터 독주바이올린이 매우 아름다운 선율(제1주제)를 노래하기 시작한다.
이 주제가 나온 후 이어서 독주 바이올린의 눈부신 기교에 의한 경과구가 연주되고 오케스트라가 제1주제를 ff로
연주하고 경과구를 화려하게 연주하고 나면 새로운 e단조의 선율이 오보와 제1바이올린에 의해 연주되고 이것이
독주바이올린에 이어지면서 화려한 기교를 나타낸 이후 차츰 가라 앉으면서 제2주제가 G장조로 플루트, 클라리넷의
4중주로 pp로 아름답게 연주되고 바로 독주 바이올린에 의해 PP로 연주된 후 제시부가 끝난다.
전개부는 독주 바이올린이 연주하는 제1주제로 시작되어 이를 전개하고 e단조의 선율이 나타나고 목관이 여기에
제1주제의 첫머리 동기를 p로 곁들인다.
이 첫머리 동기가 드디어 독주 바이올린에 나타나고 멘델스존 자신이 쓴 카덴짜에 이르게 되는데 전개부와 재현부
사이에 삽입한 것은 당시로서는 새로운 일이었다.
재현부는 카덴짜에서 이어져 독주바이올린이 아르페지오를 살타토로 연주하는 가운데 pp로 조용하게 플루트와
클라리넷으로 제1주제가 부각되기 시작된다.
이 주제는 독주 악기에 옮겨지는 일 없이 바러 경과주제가 오케스트라의 ff로 나타나고 이를 독주 바이올린이 이어받아 반복되고 다음 제2주제가 목관에 의해 E장조로 나타나고, 독주 바이올린에 반복된다.
코다는 길며 매우 빠르게 진행되면서 정열적으로 끝을 맺는다.
제2악장 : Andante
멘델스존다운 매우 서정적이며 감미로운 악장이다.
1악장에서 이어지는 제1바순의 B음으로 시작되며 C장조가 되어 제9마디부터 독주바이올린이 매우 아름다운 주제를
노래한다.
중간부는 장중한 느낌의 주제를 제1바이올린과 오보에가 나타내며 독주 바이올린이 이를 장식하며 변주하고 마지막에 다시 최초의 주제가 독주바이올린이 pp로 노래하고 관현악은 이를 더욱 아름답게 장식한다.
제3악장 : Allegretto non troppo - Allegro molto vivace
경쾌하고 정열적이며 바이올린의 현란한 연주효과와 박력있는 내용을 합한 바이올린 음악의 걸작품이라고 불릴 수 있는 악장이다.
14마디의 서주(Allegtretto non troppo, e단조 4/4)가 끝나면 Allegro molto vivace, E장조로 바뀌면서 주부가 ff로
관현악과 팀파니가 지금까지의 정적을 깨면 독주 바이올린이 그 사이를 누비며
제1주제의 첫머리 동기를 네번 반복한 뒤 발랄하게 제1주제를 연주하고 이 주제는 점점 경쾌하게 진행되며 현란한
기교를 지닌 경과구를 지나 제2주제가 B장조로 오케스트라에ff로 나타난다.전개부는 제1주제를 독주 바이올린이
연주하며 시작되고 곧 아주 다른 새롭고 장중한 주제가 아에 따라 연주된다.
이에 대해 오케스트라는 제1주제의 부분 동기를 연주해 가고 그 다음에는 이와 반대로 독주 바이올린이 제1 주제의
부분 동기를 나르는 듯 연주해 가며 관현악이 제2주제를 장중하게 나타내는 가운데 미끄러 지듯 재현부에 들어 선다
이 바이올린 협주곡은 멘델스존의 작품 가운데서 가장 기품 있고 독창적인 작품으로 여겨진다.
4대 바이올린 협주곡으로 꼽는다고 하는 베토벤, 멘델스존, 브람스, 차이코프스키의 네 작품 가운데 다른 작품은
D단조인데 멘델스존의 것은 유일하게 E단조를 취하고 있다.
(앞서 소개한 브루흐의 바이올린 협주곡 1번을 더해 5대 바이올린 협주곡이라 하기도 한다. 브
루흐의 작품은 G단조이다.) 흔히 멘델스존의 곡을 바이올린 협주곡의 여왕이라 부르고, 베토벤의 곡을 왕이라 부른다. 여왕이라는 표현이 썩 잘 어울리는 것은 이 작품에 가득 차 있는 낭만성과 귀에 잘 들어오는 부드러운 멜로디 때문이
아닐까? 멘델스존이 <바이올린 협주곡 E단조>를 작곡하기 시작한 것은 1838년(29세)인데, 마친 것은 6년 후인
1844년(35세)이었다.
빨리 작곡하는 것으로 유명한 그가 이토록 오래 걸린 데는 그럴 만한 까닭이 있었다. 신혼생활에 빠져 있었다는 것,
라이프치히 음악원 설립을 위해 동분서주해야 했던 것,
버밍엄 음악제와 베를린 예술아카데미 지휘자로서 연주활동을 한 것 등 차분히 일에 몰두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멘델스존이 바이올린 협주곡을 쓰게 된 데에는 독일 바이올린 학파의 거장이자 게반트하우스 관현악단의 오케스트라
악장을 역임한 페르디난트 다비트(Ferdinand David, 1810-1873)의 영향이 컸다.
그는 멘델스존에게 바이올린 협주곡을 써보도록 권했을 뿐만 아니라, 바이올린 기교에 대해서 많은 조언을 해 주었다.
또한 곡이 완성된 이듬해 1845년 3월 1일 라이프치히의 게반트하우스에서 초연할 때는 다비트가 과르네리
바이올린으로 솔로를 연주했으니 멘델스존이 그에게 이 작품을 헌정한 것은 당연하다 할 것이다.
지휘는 당시 건강을 헤쳐서 프랑크푸르트에 가 있던 멘델스존 대신에 닐스 가데(Niels Gade, 1817-1890)가 맡았다.
덴마크 출신의 가데는 멘델스존의 추종자로 당시 게반트하우스 관현악단 부지휘자였다.
머리에 쏙 기억되는 멜로디 로맨틱한 분위기의 명작
음악적으로 세 개의 악장이 이어져 있고, 시작하자마자 독주 바이올린이 음악적 방향타를 제시하는 새로운 방식은 동시대 청중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1845년 3월 13일 닐스 가데가 지휘하는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와 다비트의 협연으로 초연이 이루어졌다. 그리고 2년 후에 멘델스존이 사망하면서 이 작품은 그의 음악적 초상으로 기억된다.
지난 160여 년 동안 멘델스존의 바이올린 협주곡은 연주자들에게나 음악애호가들에게나 엄청난 사랑을 받고 있다. 한 번 들으면 머리에 쏙 기억되는 멜로디, 로맨틱한 분위기 등 이 작품은 19세기 전체를 통틀어서도 최고의 명작으로 인정받고 있다.
낭만주의 시기에 작곡된 바이올린 협주곡은 수없이 많지만 그 중에서도 멘델스존의 작품은 차이콥스키의 작품과 더불어 언제나 최고의 찬사를 받고 있다. 이 협주곡에는 멘델스존의 온화하고 따뜻한 성품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어린 천재로서 세상의 주목을 받으며 괴테로부터 축복의 키스를 받으며 성장한 아이가 청년 작곡가로서 세계를 향해 던지는 메시지이기도 하다.
멘델스존에 대한 한 가지 오해는 그가 어려움 없이 성장했기 때문에, 인생의 여러 가지 단계를 거치지 못했고 따라서 그의 음악도 심오한 철학을 담아낼 수 없다는 것이다.
음악가로서 멘델스존의 작품이 지닌 가장 중요한 요소는 많은 사람들이 엄숙한 얼굴을 하고서 음악의 한 가지 측면만을 이야기할 때, 그는 다채로운 언어로 음악을 만들었다는 데 있다.
‘베토벤의 바이올린협주곡을 아담이라고 한다면, 멘델스존의 이 협주곡은 이브이다’라고 베네트는 말했다.
멘델스존이 지휘를 맡은 게반트하우스 관현악단의 수석 주자였던 페르디난트 다비드에게 작곡을 약속한 것은
1838년이며, 그로부터 6년이 지난 1844년에 이 곡이 완성되었고, 1845년 3월 13일 게반트하우스에서 초연되었다.
멘델스존과 다비드는, 브람스와 요아힘과의 관계와 거의 비슷하고, 어느 쪽이나 바이올린 주자이며 작곡자이다.
그리고 서로 이 유명한 바이올린 협주곡의 완성에 조언을 했고, 명곡을 완성시켜 초연의 영예를 짊어졌다.
이 작품은 낭만파 음악의 금자탑이라고 할만한 걸작으로, 균형 잡힌 세련된 형식과 향기 높은
내용은 베토벤의 협주곡과 견줄 수도 있는 명곡이다.
Mendelssohn(1809~1847)
출생과 환경
함부르크 태생인 독일의 작곡가. 부유한 은행가의 아들로서 태어나, 어릴 때 베를린으로 이주했는데, 일찍부터 음악적으로 풍부한 교육을 받았다.
학문과 예술을 사랑하던 집안이기 때문에 많은 예술가와 학자들이 그의 집에 모였고, 일요일에는 가정 음악회를
열었다.
어머니에게서 처음으로 피아노를 배웠는데,그가 연주회에 처음으로 나간 것은 9세 때였다.
이듬해 가창 학교에 입학하고, 그 해 가을에 그 자신의 성경의 시편에 곡을 붙인 노래가 학교에서 연주되었다.
이 해부터 그는 작곡을 시작했고, 시인 괴테를 방문한 것은 15세 때였다.
16세 때 부친과 함께 스위스와 파리로 가서 유명한 작곡가와 파리 음악원의 원장 케루비니를 방문하여 음악가로서의
재능을 인정받았다.
이곳에서 마이어베어나 롯시니 등과도 알게 되었다. 셰익스피어의 《한여름밤의 꿈》의 서곡을 작곡한 것은
17세 때이고, 그 이듬해부터 베를린 대학에서 철학이나 문학 강의를 듣고 높은 교양을 몸에 익혔다.
1829년에는 스승인 쩰터의 반대를 무릅쓰고, 바하 사망 후 처음으로 《마태 수난곡》을 지휘 상연해서. 잊혀져 있던
바하의 진가를 인정시키는 주도자로서 활약하여, 당시의 예술에 새로운 방향을 제시한 공적은 크다.
1829년에 모셸레스의 초대로 런던으로 가서, 처음으로 연주가로서 국제적으로 인정을 받았다.
이 때 자작의 제1교향곡을 지휘했는데, 그 당시의 습관에 따라 피아노를 치면서 지휘했다.
이 교향곡은 필하모니 협회에 증정되었는데,그것은 그가 명예 회원으로 추대된 답례였다.
그는 훌륭한 인품과 넓은 교양으로 영국에서 대단한 호평을 말았으며, 그 뒤 베토벤의 제 5 피아노 협주곡을
처음으로 연주하여, 그의 피아노 연주자로서의 재능을 인정받아 독일에도 알려지게 되었다.
이 음악회가 끝난 뒤,스코틀랜드에 여행하여 그 당시의 인상을 《스코틀랜드 교향곡》과 《핑갈의 동굴》로 표현했다.
1830-31년에 이탈리아, 1832년에는 파리로 여행하여 베를리오즈, 리스트, 쇼팽과 만났다.
독일로 돌아와서는 관현악단 설립 기금 모집을 위한 연주회를 열거나, 극장에서 교회 음악을 시범 연주하거나,
라인 지방의 음악제를 지휘하기도 했다.
1835년에는 게반트하우스 음악회의 지휘자가 되었는데, 이것을 계기로 해서 라이프찌히가 유럽 음악의 중심이 되도록 진력했다.
그는 또 유명한 바이올리니스트인 다비트를 초대해서 현악기의 연주 방법을 개량했고, 그의 유명한 바이올린 협주곡의 반은 다비트의 조력을 입은 것이다.
1837년에는 결혼하여 5명의 자녀를 두었고, 1841년에는 빌헬름 4세의 부탁을 받아, 베를린의 관현악단과
합창단을 지휘하여, 예배당 합창단의 이름을 세계에 떨치게 했다.
1843년에는 라이프찌히 음악학교를 창설하여, 그 후로 지휘자와 작곡가로서 다망한 활약을 계속 했다.
그는 열 번이나 런던을 방문했으며, 의가 좋았던 누이의 죽음에 낙심한 것과, 과로 때문에 누이가 죽은 지 반 년만에
라이프찌히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의 관현악곡은 주제나 성부의 진행에 있어서, 또 그 형식에 있어서 고전주의의 이념을 유지하고 있는데,
그러나 신선한 낭만주의의 숨결이 느껴진다.
그 작품들은 색채 풍부한 풍경화라고도 할 수 있다.
실내악은 형식과 성부 내용과의 균형이 잡혀 있고, 이런 종류의 많은 걸작을 작곡했다. 피아노곡은 재치에 넘치고,
풍부한 내용을 갖고 있다. 그는 음악사적으로 보아서 개척자나 모방자도 아니다.
그의 개성은 낭만적인 풍부한 이념이 고전적 형식미와 일치하고 있다는 것, 고귀한 형식에 대한 섬세한 감정,
무리가 없는 화성과 선율과의 처리에 대한 세밀성 등이 특징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또 우아하고 유려한 악상도
특색의 하나로, 초기 낭만파의 대작곡가의 한 사람으로 손꼽힌다.
[주요 작품] 바이올린 협주곡 D단조(1822), 5곡의 교향곡 중 《스코틀랜드 교향곡》(1842), 《이탈리아 교향곡》
(1833), 서곡 《핑갈의 동굴》(1830), 극음악 《한여름밤의 꿈》(1842), 오라토리오 《엘리아》(1846), 피아노곡집 《무언가》(1834), 기타 실내악곡, 합창곡, 《노래의 날개 위에》를 포함한 가곡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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