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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LASSIC

Rachmaninov- Piano Concerto No.2 in C minor, Op.18

 

 

 

 

 

 

 

 

 

 

 

 

 

 

 

 

 

 

I.  Moderato - a tempo con passiane

 

 

 

 

 

 

 II - Adagio sostenuto

 

 

 

 

 III. Allegro scherzando

 

 

 

 

 

 

 

190cm 장신의 라흐마니노프는 손도 유난히 커서 13도 음정을 거뜬히

집을 수 있을 정도였다.

 

 

 

라흐마니노프(Sergei Vasilyevich Rachmaninoff(Rachmaninov/Rakhmaninov), 1873~1943)의 피아노 협주곡 2번.

첫 부분의 피아노 터치가 인상적인 곡이다.

이 부분은 크렘린의 종소리 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는데, 그만큼 장중하고 아름답다.

 

 누가 들어도 단번에 러시아적인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또한 애수에 찬 감미로운 2악장, 빛나는 3악장도 많은 영화,

 드라마, CF에 삽입되어, 이 곡은 처음 듣는 사람에게도 아주 친숙하게 느껴진다.

 

라흐마니노프는 작곡가로도 유명하지만, 그 자신이 아주 뛰어난 피아니스트였다.

그는 아주 손이 크고 테크닉도 뛰어나, 힘과 기교를 겸비한 빼어난 연주를 하였다.

그의 피아노 곡들은 당연히 직접 연주할 것을 염두에 두고 작곡되었으니, 연주하는데 피아니스트의 엄청난 기량이

 필요하다.

 

관객들에게는 피아노의 능력을 극대화한 명곡이지만, 수많은 피아니스트들을 절망에 빠뜨리는 난곡들이기도 하다.

현재는 라흐마니노프를 마판증후군 환자 로 추정하고 있는데, 이 병은 손가락을 길고 유연하게 만드는 특성이 있다.

그러니 정상적인 사람이 라흐마니노프의 테크닉을 쉽게 따라 하기란 애당초 어려울 수밖에 없다. 전설적인

바이올리니스트 파가니니도 역시 마판증후군 환자로 의심된다.

 

 

 

 

    라흐마니노프 부부.

 

 

 

 

감미로운 서정성과 스케일 큰 극적인 피아노 협주곡의 대작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2번은 차이콥스키의 피아노 협주곡 1번과 쌍벽을 이룰 만큼 많이 연주되는 곡이다. 특히 1악장 도입부가 인상적. 이 부분은 ‘크렘린 궁전의 종소리’라는 별칭을 가지고 있는데, 중후하고 웅장한 종소리의 홍수가 높은 첨탑에서 쏟아져 내리는 듯하다. 누가 들어도 단박에 러시아적인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피아노 협주곡 2번은 박력 있고 화려한 기교를 요하는 대곡이다. 동시에 낭만주의의 영향을 받아서 풍부한 선율과 애수를 담은 서정성을 아울러 가지고 있다.

라흐마니노프는 평생 4개의 피아노 협주곡을 작곡했는데 그중 2번과 3번이 가장 유명하다. 1번은 10대 후반에 작곡했다가 나중에 전면적으로 수정해서, 실질적으로는 이 2번이 첫 번째 협주곡이라고 보아도 큰 무리는 없다. 라흐마니노프는 작곡에서 차이콥스키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고 평가받는다.

실제로 라흐마니노프는 차이콥스키에게 배웠으며 그를 멘토로 삼았다. 차이콥스키가 죽었을 때 그는 <위대한 예술가의 회상>이라는 곡을 쓰기도 했다. 그래서 라흐마니노프의 경향을 회고적이라고 하기도 하고, 그를 낭만파의 마지막 작곡가라고 하기도 한다. 당시의 다른 작곡가들이 보았을 때는 좀 구닥다리 스타일이었던 것이다.

라흐마니노프는 작곡가로도 유명하지만 당대를 풍미한 뛰어난 피아니스였다. 190cm 장신의 키뿐만 아니라 손도 유난히 커서 한 손으로 13도 음정을 거뜬히 짚을 수 있는 그를 가리켜 스트라빈스키는 ‘6피트 반의 괴물’이라 할 정도였다. 그는 그 큰 손에 테크닉도 뛰어나 힘과 기교를 겸비한 발군의 연주를 하였다.

그의 피아노곡들은 당연히 자신이 직접 연주할 것을 염두에 두고 작곡되었으므로, 수많은 피아니스트들을 절망에 빠뜨리는 난곡들이기도 하다. 현대의학은 그를 마판증후군 환자로 추정하고 있는데, 이 병은 손가락을 길고 유연하게 한다고 한다. 그러니 정상적인 사람이 라흐마니노프의 테크닉을 따라 하기란 애당초 어려울 수밖에 없을 것. 전설의 바이올리니스트 파가니니도 마판증후군 환자로 의심되고 있다.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는 1873년 러시아 오네그에서 태어났으며, 상트페테르부르크 음악원과 모스크바 음악원에서

 공부했다. 다른 사람보다 유난히 큰 손을 가지고 있었던 그는 특히 피아노에 탁월한 재능을 보였고, 어려서부터 장래가 촉망되는 피아니스트로 이름을 날렸다.

 

 피아노곡 작곡에도 흥미를 보여 17살 때부터 피아노 협주곡을 쓰기 시작했다.

1892년에는 푸시킨의 《집시들》을 바탕으로 작곡한 오페라 〈알레코(Aleko)〉를 교내 콩쿠르에 출품해 심사위원인

 차이콥스키로부터 극찬을 들었다.

이 작품으로는 그는 1등의 영예와 함께 부상으로 피아노를 받는 영광을 누렸다.

 

초기에 주로 피아노 소품을 작곡하던 라흐마니노프는 23살 때인 1896년, 처음으로 교향곡 작곡에 도전했다.

 그의 〈교향곡 제1번(Symphony No.1 in D Minor Op.13)〉은 1897년 상트페테르부르크 필하모닉 홀에서

글라주노프의 지휘로 초연되었다.

 

하지만 지휘를 맡은 글라주노프가 제대로 단원들을 연습시키지 않은 데다가 연주 당일 술에 취한 상태였기 때문에

초연은 참담한 실패로 끝났다.

 

이에 충격을 받은 라흐마니노프는 자신감을 잃고 심각한 우울증에 걸려 3년 동안 곡을 쓰지 못했다.

다행히 1900년, 치료를 맡은 심리학자 니콜라이 달 박사의 헌신적인 도움으로 우울증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1901년, 라흐마니노프는 오랜 침묵을 깨고 〈피아노 협주곡 제2번(Piano Concerto No.2 in C minor Op.18)〉을

자신의 연주로 초연했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이로써 그는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로서 확실한 입지를 다질 수 있었다.

피아니스트로 세계적인 명성을 떨치던 그는1909년 멀리 미국까지 건너가 순회 연주회를 열었다.

이 무렵 〈피아노 협주곡 제3번(Piano Concerto No.3 in D minor op.30)〉을 완성해서 당대 최고의 피아니스트

블라디미르 호로비츠에게 헌정했으며, 호로비츠로부터 "이것이야말로 내가 바라던 바로 그 협주곡"이라는 찬사를

들었다.

 

그로부터 몇 년 후, 러시아에 붉은 혁명이 일어났다. 대지주 출신인 라흐마니노프의 가족은 재산을 몰수당해 당장

의식주를 해결할 수 없는 처지에 놓였다. 그때 마침 스웨덴 왕자가 그를 초청했다.

1917년 12월, 그는 가족과 함께 러시아를 떠나 스웨덴으로 갔다.

그리고 이듬해 11월 미국으로 건너가 1919년 말부터4개월 동안 총 40회의 연주를 했으며, 이후 미국 땅에 정착했다.

 

비록 미국에 정착했지만 라흐마니노프는 죽을 때까지 러시아인으로 살았다.

러시아 비서, 러시아 요리사, 러시아 기사를 두고 러시아 정교를 굳게 믿었다.

 

 흔히 미국은 여러 민족의 용광로라고 하지만, 라흐마니노프는 문화적으로나 정서적으로 미국 사회의 일원이 되는 것을 거부했다.

비록 몸은 러시아를 떠났지만 영혼은 그대로 러시아에 두고 온 것이다.

 

그 때문인지 미국에 있는 동안, 이렇다 할 작품을 쓰지 못했다. 1927년, 〈피아노 협주곡 제4번(Piano Concerto No.4

in G minor Op.40)〉을 발표했지만 그다지 좋은 평을 받지 못했다.

그의 팬들은 불같은 열정의 새로운 협주곡을 원했지만, 고향을 떠나 영혼의 힘을 잃어버린 라흐마니노프는 더 이상

그런 곡을 쓸 수 없었다.

 

1930년, 러시아에 숙청의 피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스탈린은 죄 없는 사람들을 수없이 살해하고, 예술가들을 탄압했다. 라흐마니노프는 〈뉴욕 타임스〉에 소련 정부를

비판하는 글을 발표했다.

 

러시아에 자유로운 예술은 없다.

오로지 억압받는 예술가가 있을 뿐이다.

그들은 직업적 살인자이다. 

  

이 때문에 소련 전역에서 그의 작품에 대한 연주 금지 조치가 내려졌다.

이렇게 비록 고향에서는 홀대를 받았지만, 그는 미국에서 엄청난 인기를 누렸다.

 피아니스트이자 지휘자, 작곡가로 연주와 음반 녹음 등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냈다.

 

1932년, 라흐마니노프는 건강을 회복하고 새로운 공기를 쐬기 위해 가족과 함께 스위스로 건너갔다. 여기서

〈파가니니 주제에 의한 랩소디(Rhapsody on the theme of Paganini Op.43)〉와 〈교향곡 제3번(Symphony No.3

in A minor Op.44)〉을 완성했다. 하지만 곧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는 바람에 다시 미국으로 돌아왔다.

 미국에서 그는 나치에 반대하는 운동을 위한 기금 모금 연주회에 참가했다.

 

1942년 초, 라흐마니노프는 흑색종이란 피부암에 걸렸다. 하지만 그럼에도 피아니스트로서의 활동을 계속했다.

그러다가 1943년 2월 17일의 연주를 마지막으로 무대를 떠났다.

그리고 그해 3월 28일, 7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라흐마니노프는 혁신적이거나 독창적인 작곡가는 아니다.

 

스크랴빈, 라벨, 버르토크와 같은 시대에 활동했으면서도 그의 음악에는 20세기 초 유행처럼 번졌던 전통의 파괴 같은 혁신성은 보이지 않는다.

 

자신이 피아니스트였기 때문인지 그의 중요 작품은 피아노에 집중되어 있다.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작품은 피아니스트들에게 끊임없는 힘과 열정, 속도감과 긴장감을 동시에 요구한다. 초기 작품으로는 모스크바 음악원을 졸업할 당시에 작곡한 독주곡 〈환상 소곡집〉이 있으며, 피아노 협주곡 형식의 작품으로는 네 개의 피아노 협주곡과 〈파가니니 주제에 의한 랩소디〉가 있다.

 

이 중 가장 유명한 곡은 〈피아노 협주곡 제2번〉이다.

1899년부터 1901년 사이에 작곡된 이 곡은 러시아적인 우수와 로망스를 한몸에 담고 있는 피아노 협주곡의 걸작으로

 꼽힌다.

 

1악장은 피아노의 장중한 서주에 이어 매우 드라마틱한 제1주제가 오케스트라에 의해 제시되고, 다음에 제2주제가

피아노로 연주된다.

 

그리고 이 선율은 당당한 마에스토소의 발전부를 거쳐 재현부를 맞는다.

 템포의 변화가 무쌍하며 카덴차가 없는 것이 특징이다.

2악장은 아주 느린 템포를 가진 아름다운 악장이다.

 

꿈같이 자유로운 형식의 환상곡으로 오케스트라의 취급이 풍부하고 다채롭다. 3악장은 빠른 템포의 눈부시게 강렬한

악장인데, 불규칙한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오케스트라가 서주를 연주하면 피아노가 중심 주제를 제시한다.

 

제2주제 선율은 오보에와 비올라로 시작되어 독주 피아노가 이어받는다. 주제 선율이 몇 차례 등장하는데, 나올 때마다 악상을 고조시켜 마지막에는 거의 폭발하듯 화려하고 장대하게 펼쳐진다.

피아노 협주곡 양식의 〈파가니니 주제에 의한 랩소디〉는 라흐마니노프가 피아니스트로 이름을 날리고 있을 무렵인

1934년, 스위스 루체른의 한 별장에서 작곡한 것이다.

 

유명한 파가니니의 〈독주 바이올린을 위한 24개의 카프리스〉 중에서 제24번의 멜로디를 주제로 작곡한 변주곡 형식의 랩소디로 〈피아노 협주곡 제2번〉과 함께 라흐마니노프의 작품 중에서 가장 자주 연주된다.

 피아니스트의 작품답게 피아노의 다양성과 화려함을 한껏 돋보이게 하는 걸작이다.

 

변주곡은 모두 24개로 이루어져 있는데, 외형적으로는 변주곡의 형식을 취하고 있으나 단순한 변주곡에서 벗어나

주제 선율을 다양한 어법으로 채색함으로써 피아노의 모든 연주 기법을 두루 망라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서정적이고 로맨틱한 멜로디부터 고도의 기술을 요구하는 복잡한 패시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어법들이 등장하는데,

 특히 제18변주의 낭만적인 멜로디는 영화의 주제 음악으로 쓰일 정도로 대중적인 인기를 얻고 있다.

 

 

모스크바의 라흐마니노프 동상

모스크바에 새워진 동상

 

 

관현악 작품으로는 세 개의 교향곡과 교향시 〈죽음의 섬(The Isle of the Dead Op.29)〉, 〈교향곡 무곡

(Symphonic Dance Op.45)〉 등이 있다.

이 중 〈교향곡 무곡〉은 말년인 1940년에 작곡된 것이다.

 

모두 3개의 악장으로 이루어진 일종의 모음곡으로, 춤곡의 형식을 빌린 연주회용 무곡이라고 할 수 있다.

1악장은 힘차고 리드미컬한 춤곡의 테마로 시작한다.

중간에 색소폰을 중심으로 한 관악기로 연주되는 러시아 민요 선율이 나오고 나중에 다시 리드미컬한 춤곡의 분위기로 돌아간다. 2

 

악장은 3박자의 왈츠풍 리듬을 갖고 있지만, 이는 춤곡의 형식을 갖추려는 암시적인 상징에 불과하다.

그리고 3악장 렌토의 서주로 시작되는 빠른 템포의 알레그로 비바체로 이어진다.

스케르초의 성격을 지닌 눈부신 춤곡으로 밤의 음산한 분위기를 연상케 한다. 마지막에 〈진노의 날〉 테마로

 클라이맥스를 이룬다.

 

그 밖의 작품으로는 피아노곡 〈쇼팽 주제에 의한 변주곡〉, 실내악 〈슬픔의 3중주〉, 〈첼로 소나타〉, 교향시 〈

바위〉, 오페라 〈인색한 기사〉, 〈프란체스카 다 리미니〉, 가곡 〈보칼리제〉 등이 있다.

 
 
 
 
 

피아노 앞에 앉은 69세의 라흐마니노프

 

 

 

세 번의 정신적 타격에서 벗어나 거둔 성공작

 

“지옥에 있는 음악학교에서 한 재능 있는 학생에게 모세가 이집트에 내린 일곱 개 재앙에 대한 교향곡을 쓰라고 했는데, 그가 라흐마니노프의 것과 똑같은 교향곡을 제출했다면 그는 과제를 멋지게 수행한 것이고 지옥의 주민들에게 큰 즐거움을 줄 것이다.” 러시아 5인조 작곡가 가운데 한 사람인 세자르 퀴가 1897년에 초연된 라흐마니노프의 교향곡 1번을 듣고 한 신랄한 촌평이다.

23살의 전도유망한 작곡가는 선배의 악평에 철퇴를 맞은 듯했다. 두 번째 철퇴는 사촌 나탈리아 사티나와의 결혼이 근친이라는 이유로 러시아 정교회의 허락을 얻지 못해 좌절되고 만 것이다(뒷날 둘은 부부가 된다). 세 번째이자 결정적인 철퇴는 톨스토이로부터 받았다.

라흐마니노프에게 톨스토이는 신과 같은 존재였다. 친구 샬리아핀과 두 번째로 작가를 찾아갔을 때 샬리아핀은 가곡 하나를 라흐마니노프의 반주로 노래했다. ‘운명’이라는 이 노래는 베토벤 교향곡 5번의 유명한 첫 동기로 시작하는 곡이었다. 노래를 듣고 난 톨스토이는 이렇게 말했다.

“그런 음악이 누군가에게 필요할 것 같은가. 정말 듣기 싫군. 베토벤은 엉터리야. 푸시킨과 레르몬토프도 마찬가지야.” 라흐마니노프의 충격은 컸다. 어리벙벙해진 그를 보고 잠시 뒤 톨스토이가 사과했다. “미안하네. 난 노인네야. 자네를 속상하게 할 생각은 없었어.” 라흐마니노프는 즉시 대답했다. “제가 베토벤도 아닌데 뭐 속상할 것 있습니까.” 하지만 그의 속은 시커멓게 되었다. 이번에는 정말 회복 불능이었다.

 

 

그 뒤의 이야기는 잘 알려져 있다. 세 번의 철퇴로 심한 노이로제에 걸린 라흐마니노프는 3년 동안 극심한 슬럼프를 겪는다. 그때 니콜라이 달이라는 의사가 그의 구원자가 된다.

박사는 그에게 ‘자기암시’라는 치료법을 사용하는데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불어넣어 준다. 덕분에 라흐마니노프는 작곡을 다시 할 수 있게 되었고, 이렇게 해서 탄생한 곡이 피아노 협주곡 2번이다. 2악장, 3악장 그리고 1악장의 순서로 완성하여 1901년 10월 27일에 라흐마니노프 자신의 피아노 독주로 초연을 가져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다.

1905년에는 글린카 상을 받았다. 그는 당연히 이 곡을 니콜라이 달 박사에게 헌정했다. 달 박사는 그 후 베이루트로 이주하였는데, 1928년 미국 대학 오케스트라가 이 협주곡을 연주할 때 비올라 주자로 참가했다.

청중에게 이 곡을 헌정 받은 사람이라고 달 박사가 소개되었고,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 답례를 한 뒤에도 오랫동안 박수소리가 멈추지 않았다고 한다.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2번이 작곡된 이래 이 음악보다 유명해진 음악은 그리 많지 않다. 그만큼 이 곡은 시대의 감수성을 잘 대변하고 있다.

데이비드 린 감독의 1946년도 영화 <밀회>(Brief Encounter)를 통해 이 곡은 사람들의 마음에 깊이 각인되었다. 최근에는 광팬이 많은 일드 <노다메 칸타빌레>에서도 소개되었고, 엄정화 주연의 우리 영화 <호로비츠를 위하여>에서 피아니스트 김정원이 직접 출연 이 곡을 연주하여 음악 애호가뿐만 아니라 일반인에게도 더욱 친근한 음악으로 다가왔다. 2009년 KBS 클래식FM과 방송문화연구소에서 함께 실시한 ‘한국인의 클래식 기악곡 선호도 조사’에서 전체 8위, 피아노 협주곡으로는 1위를 차지했다.

 

 

 

 




 

20세기 벽두를 장식했던 최고의 발라드는 무엇일까요? 저는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2번을 가장 먼저 떠올립니다.

우울증을 간신히 이겨낸 라흐마니노프는 1899년부터 쓰기 시작한 피아노 협주곡 2번을 1901년 5월 모스크바에서 비공식 초연합니다. ‘비공식’이란 무슨 말인고 하니, 콘서트홀의 청중 앞에서가 아니라 자신의 모교인 모스크바 음악원 관계자들과 동료 피아니스트들만 초대해 연주회를 가졌다는 뜻입니다.

공식 초연은 11월 9일, 라흐마니노프 본인의 피아노 연주로 이뤄졌습니다. 청중의 반응이 매우 좋았다고 하지요. 덕분에 라흐마니노프는 자신감을 회복하고 3년간의 침체에서 완전히 벗어났다고 전해집니다. 바로 그때부터 미국으로 떠나야 했던 1918년까지, 그는 ‘작곡가’로서 가장 왕성한 창작열을 보여줬습니다.

주변 사람들로부터 인정받는다는 것, 다시 말해 ‘사회적 자존감’이라는 것은 이처럼 중요합니다.전통적인 멜랑콜리의 정서를 최고조로 끌어올리다!피아노 협주곡 2번은 전통적인 멜랑콜리의 정서를 최고조로 끌어올리고 있는 음악입니다. 대중음악에 비유하자면 ‘발라드’인 셈이지요.

하지만 이 곡으로 재기에 성공해 작곡가로서 황금기를 구가하던 라흐마니노프는 1917년 혁명이 일어나자 더 이상 조국에 머물 수 없는 처지가 됩니다. 그는 특별한 정치적 견해를 밝힌 적은 없었지만, 귀족이라는 이유 때문에 혁명 직후의 러시아를 떠났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의 조부와 부친은 차르 군대의 장교였고 어머니도 장군의 딸이었습니다.

 

 

 

 

 

 

 

 

 

 

 

 

 

결국 10월 혁명이 발발하고 3주 후, 스웨덴으로부터 연주 요청을 받은 라흐마니노프는 가족을 모두 데리고 기차를 탑니다. 그 후 다시는 고국 땅으로 돌아가지 못합니다. 스톡홀름 연주를 마친 이듬해에 미국으로 망명, 1928년까지 그곳에서 살았습니다. 이후 프랑스와 스위스에 잠시 체류하다가 1935년에 다시 미국으로 돌아와 세상을 떠날 때까지 ‘러시아계 미국인’으로 살았지요.

 

 

 

 

 

Rachmaninov,  Sergei (1873∼1943 R.)

 

 

 

 

 

 

 

 

 

 

 

 

 

 

▶피아노 앞의 라흐마니노프. 작곡가로 황금기를 구가하던 라흐마니노프는

1917년 러시아 혁명 후 미국으로 망명하고부터는 고작 6곡을 작곡했을 뿐

연주자로서의 생활에 매달리게 된다.

 

그렇다고 라흐마니노프가 미국을 ‘자유의 땅’으로 생각하며 동경했던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는 미국 망명 전에 가족에게 이런 편지를 보낸 적이 있지요. “이 정 떨어지는 나라에는 미국인들만 들끓는다. 그들은 죽을 때까지 일만 하려고 하는지, 비즈니스를 외치면서 사람을 들볶고 강행군시키는구나. 나는 지쳤다.

성격도 많이 나빠진 것 같구나.” 하지만 라흐마니노프는 1918년부터 그 ‘끔찍한 나라’에 발붙이고 살아야 했습니다. 게다가 45세의 그는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가장이었습니다.

결국 이 지점에서 ‘피아니스트’ 라흐마니노프의 생애가 시작됩니다. 물론 그는 러시아에서도 종종 피아노를 연주했지만, 그것은 ‘작곡가’로서의 연주에 가까웠다고 봐야 하겠습니다. 하지만 이제 사정이 달라졌습니다. 미국에서의 라흐마니노프는 자작곡뿐 아니라 베토벤과 슈베르트, 쇼팽과 그리그까지 연주해야 했습니다.

당연히 작곡가로서의 활동은 줄어들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 까닭에 미국 망명 후 세상을 떠날 때까지 라흐마니노프가 완성한 곡은 고작 6곡에 불과합니다. 그의 음악적 생애는 그렇게, 45세 이전과 이후로 크게 나뉩니다.

 

 

 

 

 

30㎝ 손가락으로 피아노 테크닉 ‘묘기’

 

하지만 피아니스트로 ‘전직’했던 라흐마니노프의 존재감은 오늘날 우리가 상상하는 이상이었지요. 적어도 1920~30년대의 라흐마니노프는 요제프 호프만(1876~1957)과 쌍벽을 이루던 최고의 피아니스트였습니다. 손가락을 쫘악 폈을 때 손의 크기가 자그마치 30cm에 달했다는 그는 건반을 완전히 장악한 채 육중하고 화려한 연주를 선보였고, 콘서트홀의 청중은 그의 초인적 기교에 완전히 열광했다고 전해집니다.

 그에 대해서는 피아니스트 아르투르 루빈슈타인(1887-1982)의 언급이 전해집니다. “(라흐마니노프의) 황금색 비밀을 간직한 살아 있는 피아노 음색은 가슴에서 흘러나왔다. 나는 화려하게 건반을 질주하는 그의 손가락과 흉내 내기 어려운 거대한 루바토에 홀려 시름을 잊고 빠져들었다.”

그렇게 라흐마니노프는 피아니스트로서 명성을 얻고 돈도 벌었습니다. 비벌리 힐즈에 저택을 구입했고 두 딸에게는 프랑스 파리에 출판사를 차려주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행복했을까요?

 별로 그랬던 것 같지는 않습니다. 라흐마니노프는 미국 망명 후 혹독한 연주 스케줄에 시달리면서 요통과 관절염을 끼고 살았고 늘 피로를 호소했다고 전해집니다. 물론 더 심각했던 것은 고향을 그리워하는 ‘향수’였을 겁니다.

 


 

 

 

 

 

 

 

 

 

 

정신을 휩쓸어가는 소리, 온몸을 뒤흔들어 버리는 소리, 그 소리에 샤워당했다.

이게 카타르시스인가. 음악이 끝났는데 얼어붙어 있었다. 수업하신 선생님도 내 심정을 아시는지 미소만 짓고

서 계셨다. 라흐마니노프 피아노협주곡 2번이었다. 퇴임한 후 그해 가을이었다.

 

  라흐마니노프는 1873년 러시아 출신 작곡자이자 피아니스트였다.

 러시아 혁명이후 1917년에 미국으로 망명하였다.

 아버지는 육군 장교, 어머니는 장군의 딸이었다.

 

어렸을 때 저명한 피아니스트에게 가르침을 받았고, 모스크바 음악원을 졸업했다. 졸업 당시 단막 오페라로 금상을

 받았다.

1905년에는 볼쇼이 극장의 지휘자가 되었다. 그에게 성공작이 피아노협주곡 2번이었다.

 

 하지만 그의 정열적인 성격은 대인관계와 작품의 성패에 따른 정서적 불안에 휩쓸렸다. 교향곡1번 실패와 사랑의

실패에 따른 고통으로 정신과 치료를 받아야만 했다.

자신감을 회복한 그는 피아노협주곡 2번을 작곡했고, 그 곡을 정신과 의사 니콜라이 달에게 헌정을 했다.

그는 차이코프스키 계열에 속했고, 후기 낭만파였다.

 

  라흐마니노프 피아노협주곡 2번은 적막 속에 중후하게 울려 퍼진다.

오케스트라의 연주는 사람을 압도시킨다. 거칠게 사정없이 몰아붙이는 큰 강물이 흐르는 느낌이다.

강렬하면서도 서정적인 피아노 연주 소리가 심장을 두근두근 거리게 한다.

  내가 바쁠 때 내 귀엔 클래식이란 없었다. 내 감정이 늘 폭풍이니 음악이 귀에 들어올 리 없다.

 

콩볶 듯 하는 날의 연속이었다. 내 감정을 살피지 않았고, 내 몸을 신경쓰지 않은 채 달렸다.

그 때 우리집 가훈은 내 먼저 나간다.’였다. 남편은 알아서 옷 입고 나갔고. 아이도 스스로 챙겨서 나갔다. 나도 덩달아 문밖으로 나갔다.

 

누구든 먼저 나가면 장땡이였다.

그 말이 인사요, 대화요, 행복한 가정의 사랑이다고 착각하면서 살았다.

 

  실로 나는 클래식엔 문외한이다. 아니 몰이해라 하는 것이 좋겠다. 귀가 어두운지 청음능력이 떨어진다.

 아는 곡이라곤 베토벤 교향곡 5번 운명, 드보르작 교향곡 9번 신세계, 차이코프스키 교향곡 6번 비창이 전부다.

이제 시간이 나니 차츰차츰 들으려고 하고 있다.

 

차이코프스키 바이올린 협주곡, 멘델스존 바이올린 협주곡. 바하 무반주 첼로곡, 쇼팽 피아노협주곡 1, 말러 교향곡

5번 등이 들리기 시작한다.

  이젠 가장 행복한 순간이 클래식 듣는 시간이다.

 

그 무엇에도, 그 누구에게도 구속받지 않고 온전히 자유롭게 되는 시간이 좋다. 음악이 내 귀를 장악하는 시간이 행

복하다.

 

 

 

카페와 웹에서 발췌하여 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