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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학과 건강관리

아인슈타인 증후군 [Einstein syndrom]









아인슈타인 증후군 [Einstein syndrom]


지능이 일찍 발달한 어린이들의 말하는 능력이 늦게 발달하는 현상을 일컫는 말.





                                


 




미국의 물리학자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 1879∼1955)을 비롯해 여러 가지 분야에서 남다른 능력을 발휘한

인물들 가운데는 아기 때 말을 늦게 시작했거나 말하는 능력의 발달이 정상보다 뒤처진 사람들이 많았다.

예를 들면 피아니스트 아르투르 루빈슈타인, 이탈리아 독재자 베니토 무솔리니, 인도의 수학천재 라마누얀, 노벨상을 받은 경제학자 개리 베커, 물리학자 리처드 파인먼, 에드워드 텔러 등이다.

지능이 일찍 발달한 아이들의 말하는 능력이 늦게 발달하는 원인은 아직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그러나 분명 이러한 아이들 중 유아 때 지능이 일찍 발달하는 경우가 있다.

동갑내기들은 말하는 능력을 발달시키고 있는데도 침묵을 지키는 유아들 가운데서 빠르게는 두 살 때 컴퓨터를

혼자 사용할 수 있는 아이도 있다고 한다.

아인슈타인의 뇌를 연구한 신경과학자들은 그가 말하는 것이 늦었던 것은 뇌의 비정상적인 발달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해부 결과 밝혀냈다. 분석적 사고 기능이 집중된 아인슈타인의 뇌 부위가 정상적인 영역을 크게 벗어나

있었는데, 이 같은 침범을 받은 영역 가운데 하나가 일반적으로 언어기능을 통제하는 부위였다.


일부 신경과학자들은 이 같은 현상을 보고 아인슈타인의 천재적 능력과 말이 늦어진 것 사이에 관계가 있을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여러 가지 능력 결핍이 일반인들보다 지능이 높은 사람들에게 더 많다는 사실은 이미 확인되었다.

이 모든 현상은, 뇌의 한 부위가 정상 수준 이상으로 발달하여 갖가지 자원을 사용함으로써 다른 뇌 부위가 기능을

발휘하는 데 필요한 자원을 제대로 사용하지 못했을 때 일어나는 것이다.


 다른 부위에게 자원을 빼앗겼던 뇌 부위들은 유아기 때 뇌 전체가 성장할 때 필요한 총 자원의 양이 증가하면 비로소 정상적으로 발달할 수 있다.




 



사진출처=온라인 커뮤니티, 아인슈타인의 모습이 담겨 있다





아인슈타인 증후군

 

유명한 피아니스트 아르투르 루빈슈타인, 이탈리아 독재자 베니토 무솔리니, 인도의 독학 수학천재 라마누얀, 노벨상을 받은 경제학자 개리 베커, 토크쇼 사회자 G. 고든 리디, 저명한 물리학자 리처드 페인먼,에드워드 텔러,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탁월한 인물이라는 점 외에 이들은 모두 유아기 때 말을 시작한 것이 늦었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분야에서 남다른 능력을 발휘한 인물들 가운데서 아기 때 말하는 능력의 발달이 정상보다

 뒤처진 사람들이 많았다.

 

부모와 전문가들은 지능이 분명 일찍 발달한 어린이들의 말하는 능력이 늦게 발달하는 까닭을 알아내지 못해 안타까워 하고 있다.

그러한 어린이들은 이미 유아 때 지능이 조기 발달하는 경우가 있다.


 이러한 유아들 가운데 일부는 나이가 더 많은 어린이나 성인을 위해 고안된 퍼즐을 맞출 수 있다.

동갑내기들은 말하는 능력을 발달시키고 있는데도 침묵을 지키는 유아들 가운데서 빠르게는 두살 때 컴퓨터를 혼자

 사용할 수 있는 어린이도 있다.

 

왜 이런 현상이 벌어지는지 확인되지 않고 있다.

언어 지진아에 대한 연구가 시작된 것은 불과 10년도 안되었다.

 

아인슈타인의 뇌를 연구한 신경과학자들은 그의 말하는 것이 늦었던 것은 뇌의 비정상적인 발달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해부 결과 밝혀냈다.


분석적 사고 기능이 집중된 아인슈타인의 뇌 부위가 정상적인 영역을 크게 벗어나 이웃의 몇몇 지역으로 넘쳐들어가

 있었다.

 이같은 침범을 받은 영역 가운데 하나가 일반적으로 언어기능을 통제하는 부위였다.

 

일부 신경과학자들은 이같은 현상을 보고 아인슈타인의 천재적 능력과 말이 늦어진 것 사이에 관계가 있을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여러가지 능력 결핍이 일반인들보다 지능이 높은 사람들에게 더 많다는 사실은 이미 확인되었다.

 

이 모든 현상은, 뇌의 한 부위가 정상수준 이상으로 발달하여 갖가지 자원을 사용함으로써 하나 이상의 다른 뇌 부위가 여타 기능을 발휘하는데 필요한 자원을 정상보다 적게 사용한 것과 일치된다.

 

매사추세츠 공과대학(MIT)의 저명한 언어 권위자이며 신경과학자인 스티븐 핑커는 "언어는 성장하는 뇌가 처리할 수

있는 능력 범위 안에서 발달하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한다.

 핑커의 말은 일반적인 언어 능력 발달에 언급한 것이지만 말을 늦게 하는 총명한 어린이의 경우에 특히 해당되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다른 부위에게 자원을 빼앗겼던 뇌 부위들은 유아기 때 뇌 전체가 성장할 때 필요한 총 자원의 양이 증가하면 비로소

성장을 따라잡아 정상적으로 발달할 수 있다.

 

 
내용출처 : [기타]
http://cfd.korea.ac.kr/math/mathstory/etc/Einstein_syndrome.html 












아인슈타인 에 대하여




어린 시절



유대계 독일인으로 유명한 이론 물리학자이며 지금도 '천재 과학자' 하면 일반적으로 회자되는 대표적인 인물이다.

문제는 의외로 무엇 때문에 유명한지를 잘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다.

상대성 이론만 발표한 사람인 줄 알기도 한다! 너무 유명해서 그런지 온갖 루머가 난무하지만 신빙성이 있는 것은

드물다. 아인슈타인에 대한 책도 많지만 역시 믿을 만한 책은 얼마 안 된다



1879년 3월 14일 독일 울룸에서 출생한다. 어렸을 때부터 천재성을 보이는데 12~16살에는 미적분을 혼자서 공부했다고 하며, 특히 유클리드 기하학을 보고 그 논리성에 감탄했다고 한다.

이후 김나지움에 진학했는데 수학, 물리에 심취하여 당시 교육과정을 뛰어넘어 선생님들도 쩔쩔매는 질문을 해 유명한 학생이 된다. 여


담으로 이런 아인슈타인의 초월질문에 선생님들이 "너의 질문을 이해하지 못하겠다"고 대꾸했는데, 이게 와전되어

아인슈타인이 공부 못하는 아이였다는 식으로 떠돌게 된 것이란 얘기도 있다.

당시 독일의
주입식 교육[8]에 굉장한 반감을 가지기도 하였다.

이것은 훗날 학풍이 보다 자유로운 스위스로 유학을 떠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여튼 1894년 말에는 의사에게 진단서를 받아서 휴학을 하고 가족을 찾아 떠나는데, 이 시기에 쓴 첫 번째 논문이

 'on the Investigation of the State of the Aether in a Magnetic Field'(자기장에서의 에테르의 상태)이다.

 참고로 이때가 한국 기준 고등학교 1학년.(...).

1895년 중순 취리히 공과대학 시험을 쳤으나 떨어졌다.

하지만 남달리 뛰어난 수학 실력과 물리학 실력을 인정받아서, 학장이 고등학교 졸업장을 따오면 입학시켜주겠다고

 해서 배려로 1년 후에 입학하게 된다.

17세 때 스위스 아라우의 아르고비안 주립학교에 다녔다.

당시 교수의 집에서 하숙하고 있었는데, 교수의 딸이었던 첫사랑인 마리 빈텔러(Marie Winteler)를 만났다.

이후 아인슈타인은 연애편지를 자주 썼는데, 1896년 아인슈타인이 대학에 진학을 하고, 마리가 교사가 되고, 이사를

가면서 사이가 멀어졌다.


 둘은 계속 연락을 했지만 아인슈타인이 먼저 연락을 끊고 싶다고 했고, 마리는 아인슈타인을 잔인하다고 비난했다.

 그래서인지 아직도 남아있는 편지들 중에는 찢어진 것도 있다고.(...)

아인슈타인은 1903년에 밀레바와 결혼하고도 사이가 좋지 않아서 마리에게 계속 편지를 보냈다고 한다.

1896년 9월 스위스 고등학교 졸업 시험을 통과했다.

스위스에서는 졸업 시험을 1~6으로 평가하는데 6이 최고점이다.

아인슈타인은 대수학, 기하학, 물리학에서 6을 받았다.


지리학 등 세 과목에서 4점, 프랑스어에서 3점을 받아서 한국 인터넷에서는 '아인슈타인은 낙제생이었다'는 소문이

 퍼지기도 한다.

이는 아인슈타인이 다닌 스위스 학교인 아르가우 칸톤이 이전 학기는 등급제로 수학, 물리학을 등급제로 표기하여

1로 적었으나 다음 학기부터 점수제로 표기하여 6을 적어 생긴 오해이다.


당시 독일이 등급제였기 때문에 그의 성적을 본 이들이 그가 이론 물리학자임에도 불구하고 낙제점을 받았다고 판단

한 것이다.

한국에서는 이 오해 때문에 주로 부모나 선생님이 '아인슈타인 알지?

아인슈타인도 수학과 물리를 엄청 못했는데 죽어라 노력해서 위대해진 거야.


그러니까 너도 죽어라 노력하면 안 될 게 없어!!' 등의 논리를 내세우곤 한다.

  낙제한 것은 대입 시험시의 수학과 물리학 외의 지리, 프랑스'어 등의 과목에서와 대학시절 장 페르네의 '기초

 물리학 실험' 수업에 자주 출석을 하지 않아 화난 교수가 1점을 부여하여 그 수업에 낙제한 것이 다이다.






대학 시절



취리히 연방 공대(ETH Zurich)에서 '수학 물리 교육과'(mathematics and physics section of the teaching

diploma course)를 전공했다.

후술되어 있지만 졸업할 때 교원 자격을 땄으며, 이 자격증을 광고하며 개인 과외를 구하려 한 적도 있다.

참고로 아인슈타인의 아버지는 전기 공학자였고, 아인슈타인도 자연스레 전기 기술자의 길을 걸으려 했다고 한다.

잘하던 물리학과 수학 중에서, 대학 진학 후에는 물리학에 더 큰 관심을 가지게 된다.

그 이유는 수학에는 흥미로운 문제가 너무 많아서 무엇을 풀어야 할지 모르겠는데, 물리학에는 그러한 문제가 수학보다는 덜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렇다고 절대 아인슈타인의 수학 실력이 평범했다는 것은 아니다.

 일반 상대론에서 쓰는 리만기하학은 당시 수학의 최전방 분야의 하나였고, 논문을 찾아서 봐야했으니 관심있는

수학 전공 학부생이나 그 상위의 코스를 밟고 있는 자가 아닌 이상 알기 힘들던 시대였다.


사실 그가 대학에 와서수학을 등한시하고 물리학에 심취한 배경엔 대학 시절 교수였던 저명 수학자 민코프스키와의

트러블도 원인이 되었다고 여겨지는데, 민코프스키는 아인슈타인이 너무 불성실한 학생이라 졸업한 것이 놀랍다고

말하기도 했다.


교수와의 트러블은 아인슈타인이 대학을 졸업하고도 교수 추천서를 받아내지 못해 취직에 어려움을 겪게 된 이유 중

 하나로 거론되기도 하는데, 사실 그 외에도 시민권이나 여러 가지 복합적인 사유가 있다.

하여튼 아인슈타인은 대학 시절에 자신이 좋아하는 과목을 제외하고는 출석을 거의 하지 않았다고 한다.

 시험이 다가오면 친구들의 노트를 빌려 벼락치기한 후, 시험만 겨우 통과하는 식. 이런 일은 그의 경력에도 문제

였지만, 결론적으로 그를 도와주는 사람은 친구들 이외에 별로 없게 된다.


완전히 논 건 아닌지 1899년에는 물리학에서 5.5점을 받는 등 평균평점 5.7/6점을 받아서 6명 중 1등을 하기도 했다.

 1900년 졸업시험 때는 평균평점 4.91/6을 받아 6명 중 4등을 했다.

 그리고 밀레바를 제외한 5명은 졸업을 한다.










초기 직장 생활



아인슈타인은 대학전공과는 무관한 다소 엉뚱한 곳에서 첫 직장생활을 시작한다.

왜냐하면 상술했듯 아인슈타인의 지도교수가 그의 자만심과 불성실한 자세를 싫어하여 추천서를 써주지 않아 전공인

 물리학 쪽으로 마땅한 취직자리를 얻지 못했기 때문.


 물론 이 이유 뿐인 건 아니고 유대인이라는 데서 온 인종차별과 시민권 문제 등이 겹친 것으로 보인다.

결국 보험사에 취직한 뒤, 월급만으론 생활이 어려워 과외알바를 시작한다. 이때가 1902년 봄. 아인슈타인은 베른 신문에 다음과 같은 광고문을 내었다. (아래 절반)









연애와 결혼


2번 결혼했는데 우선 첫 번째 부인 밀레바는 결혼 전부터 아인슈타인의 집안 쪽에서 그녀에 대한 반대가 있었다고 한다. 가장 큰 이유는 밀레바가 아인슈타인보다 나이가 많고, 아인슈타인과 동시에 물리학을 전공했으며, 세르비아계 외국인이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일설에 의하면 아인슈타인의 어머니가 밀레바를 '늙은 마녀'(...)라고 불렀다는 기록도 있다.

밀레바는 1900년 대학 졸업 시험에서 떨어져 다시 졸업장을 따려고 시험준비를 할 생각이었는데, 1901년 아인슈타인과의 사이에서 원하지 않는 임신으로 인해 시험 준비가 좌절되었으며, 1903년 둘은 결혼했다.

아인슈타인은 일반적으로 너무 연구에만 매달려 부인이나 가정에 소홀했다는 식으로 알려져있는데, 연구도 연구지만

아인슈타인은 유대인으로 제 1차 대전 도중 중립국에 도망쳤고, 첫 아내 밀레바와 떨어져 있는 시기 동안 친척 누나이자 당시 과부였던 엘자와 친해진 것으로 알려져있다.


그리고 엘자와 결혼하기로 결정하면서 밀레바를 저버리게 된다.

그렇게 1919년 이혼을 한 후 같은 해 엘자와 결혼했고 그녀는 1936년 병으로 사망한다.

문제는 밀레바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두 아들에게 신경을 써주지 않아 밀레바가 고생을 했다고 한다.

 그녀는 아인슈타인과 이혼한 이후, 피아노 가정 교사를 하며 두 아들을 홀몸으로 키웠는데, 밀레바와 이혼할 당시

아인슈타인이 이후 노벨상을 받게 되면 그 상금을 모두 주기로 하고 이혼했기 때문인지 아인슈타인은 이후

그녀의 경제적 지원 요청을 들어준 적이 별로 없다고 한다.


여튼 엎친데 덮친 격으로 아인슈타인과 밀레바 사이의 둘째 아들 에두하르트는 정신 박약아였고, 발작을 일으켜 어머니를 목졸라 죽이려 한 직후 정신 병원에 수감되어 일생을 마쳤다.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밀레바는 사망했다.

아인슈타인이 임종 직전에, 독일에 있는 장남에게 보고 싶다고 와달라고 했는데 그대로 씹혔다는 이야기도 있다(...).

아인슈타인의 죽음 당시 첫 아들은 부모의 머리를 물려받아 버클리 주립 대학에서 수력학 교수를 하고 있었는데

신문에 짤막한 부고 몇 줄을 낸 것이 전부라고 한다. 밑의 죽음을 보면 알 수 있듯 아인슈타인도 여생에 큰 미련은

 없었던 것 같지만...












 도망

1930년대가 되자 독일은 아돌프 히틀러가 집권하게 되고 유태인 탄압이 시작되었다.

이에 아인슈타인은 1933년에 유태인을 탄압하는 나치를 피해 미국으로 도망갔다.


 사실 이렇게 미주지역으로 도망친 유태인은 꽤나 많았는데 볼펜을 발명한 헝가리 국적의 유태인인 비로 라슬로

역시 비슷한 시기에 아르헨티나로 도망갔다. 아인슈타인을 비롯해 프로이트 등 몇몇 유명인사들 역시 나치를 피해

도망쳤다.


아인슈타인은 미국으로 도망친 이후 프린스턴 대학교의 교수가 되었다. 아인슈타인은 나치를 피해 도망치면서

"권위에 대한 맹목적인 복종이 진실의 가장 큰 적"이라는 말을 남겼다.
또한 이렇게 도망친 덕분에 아인슈타인은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끌려가는 것을 모면했다.









죽음


아인슈타인의 공식적인 사인은 복부 대동맥류 파열로 인한 내출혈이다.

이스라엘 건국 7주년 기념행사의 연설을 준비하다가 쓰러졌는데, 병원으로 실려갔을 당시

"I want to go when I want. It is tasteless to prolong life artificially. I have done my share, it is time to go.

I will do it elegantly."


"나는 내가 떠나고 싶을 때 떠나고 싶소. 인간의 기술로 삶을 늘리는 건 천박한 짓인 거 같소. 내 사명은 이제 끝냈으니, 우아하게 갈 때라오."



이 말을 하며 수술을 거부하였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까지 연구를 계속하다가 결국 사망했다.

유명인물 치고는
유언이 알려져있지 않은데, 죽을 당시 미국에 있어서 주위에 찾아와 있던 '미국' 지인들이 그가

 죽기 직전 내뱉은 독일어를 알아들을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유언이 없는 것이 오히려 아인슈타인스러운 것일지도.

아인슈타인의 사후는 상당히 쇼킹하다.

아인슈타인은 자신을 화장하길 원했고 화장되었다.

가족들도 화장했다고 믿었다.


 하지만 아인슈타인의 사체 부검을 맡았던 프린스턴 병원의 병리학자 토머스 스톨츠 하비 박사는 부검시, 아인슈타인이 죽기 전에 미리 동의를 구하지도 않은 상태에서, 아인슈타인의 뇌를 빼내어 240조각으로 잘라내어 보관해 두었다.

정확히 관련 다큐에 따르면, 아인슈타인은 사후 하루도 안 되어서 화장되었고, 그 뇌는 하비 박사가 적출해서 포르말린 용액에 보관했다고 한다.


 최초 적출 상태 그대로 조각내지 않고 보관했었고, 주기적으로 관리되었다고 한다.

그 후 비밀로 붙이다가, 아인슈타인의 손녀를 만나기도 하고, 뇌 연구가들에게 일부분이 제공되기도 했다.

아인슈타인의 뇌는 그 이후 흑백으로 전후좌우 사진을 찍은 후 조각내졌다.

 현재 이 뇌의 일부분만(슬라이드) 제한적으로 공개되며, 전체적인 조각은 다큐 이후로 비 공개 상태다.

그러나 이런 아인슈타인의 인격을 무시한 듯한 그의 행각은 엄청난 비난을 받았다.

이에 하비 박사는 과학의 발전을 위한 것이었다는 주장을 하며 뻔뻔하게 맞섰다.


웃긴 사실은 아인슈타인의 뇌가 보관되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수많은 과학자들이 같이 연구하자는 진풍경이

펼쳐졌다고.

이후 아인슈타인의 뇌는 박물관에 보관된다.

이 부분은 2015년 6월 28일자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 다루었다.

생각보다
의 크기가 크지 않아서 머리크기와 지능지수는 비례하지 않는다는 반론의 산 증거가 되고 말았다.

다만 공간 지각 능력,수학,사물에 대한 이름짓기,복잡한 문법,운동 명령을 담당하는 두정엽은 일반인보다 15~30%가량 컸다고 한다.










업적

우선 핵폭탄 만든 사람으로 잘못 알려져 있기도 하나, 핵 폭탄은 그가 제작한 것이 아니다.

그가 이뤄낸 물리학적 쾌거가 핵폭탄을 개발하는 데 도움이 된 것일 뿐, 실제로 맨해튼 프로젝트에서 가장 큰 기여를

 한 사람은 오펜하이머이다. 오히려 아인슈타인은 후술하듯 이후 반핵 운동에 앞장선다.

아인슈타인이 1905년에 서너 달 간격으로 발표한 논문이 세 개 있고, 같은 해에 ETH Zurich에서 박사 학위를 받는다. 참고로 그 세 가지 각 논문의 주제는 광양자 가설, 특수상대성 이론, 브라운 운동인데 이 세 편의 논문은 아이작

뉴턴으로 대표되던 근대의 물리학을 뒤엎으면서 천지 개벽을 일으켰고, 그 각 논문은 현대 물리학의 주요 테마인

양자 역학, 상대성 이론, 통계역학의 시초가 된다.


더 무서운 것은 그는 학교에서 연구에 전념할 수 있는 상태도 아닌, 특허청에서 일하면서 남는 시간에 물리학 연구를

한 것이었다

즉, 공무원 생활하면서 인류의 물리학사(史)에 이름을 남길 대업적을 남긴 거다.

아인슈타인은 특허청에서 근무하면서 시간이 남으면 도서관 가는 게 그렇게 즐거웠다고 한다.

그러나 보통 사람들의 생각과는 달리 아인슈타인이 특허청에서 고리타분한 일을 하고 개인 자투리 시간에 위대한 연구를 한 것은 전혀 아니다.

 오히려 정반대이다.


 위에 서술에 전자기 현상을 이용한 기기에 대해 일했다고 돼 있는데, 이 기기가 바로 시계들의 동기화

(synchronisation)를 하는 기계들이었다.


19세기 말은 현대화가 가속되는 시점이었기 때문에 여러 시계들(이를테면 전국의 기차역들에 있는 시계들)을 동기화

하는 것은 사업가들에게 중요한 문제였다.

 또, 19세기 말은 제국주의의 시대였고 본국과 점령지들 사이의 시계를 동기화 시키는 것(시간을 지배한다는 것)은

정치적으로도 의미가 있었다.


이런 시대적 배경이 있었기에 시계들을 동기화하는 것에 당시 사람들의 관심은 컸다.

 당연히 그중에는 전자기현상(빛)을 이용해 시계를 동기화하겠다는 아이디어도 있었고 아인슈타인은 특허청에서

 일하면서 이런 아이디어들에 자연히 노출되었다.


때문에 아인슈타인에게 있어 절대 시간, 여러 관찰자들 사이의 변환 등의 개념은 단순히 추상적 사고 대상이 아니라

 여러 특허들을 보며 현실적으로 풀어야 할 과제였던 것이다.


광양자



1902년 광전효과라는 독특한 현상이 보고된다.

이 효과는 기존의 빛에 대한 개념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것이었다.

오래전부터 빛의 본성에 대한 논의와 연구가 꾸준히 있어 왔으며, 파동설과 입자설이 서로 경쟁해왔다.


근대에는 빛이 슬릿을 통과하여 보이는 회절-간섭 무늬 패턴이 빛이 파동이라는 확실한 증거로 나타남으로써, 빛은

 파동이라는 것이 정설로 자리잡게 된다.

그러나 아인슈타인은 광전효과의 실험데이터를 기존의 빛에 대한 이론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이 개념을 설명하기 위해 광양자라는 개념을 도입한다.

광양자 가설의 에너지가 양자로 이루어져 있다고 주장한 것으로, 현재는 광자(Photon)라고 명명되었다.

이것은 이후 양자 역학을 이뤄내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정확히 말하자면, 플랑크의 양자가설을 바탕으로 해, 빛에는 일정한 에너지 단위, 양자화 된 무언가가 있는데, 그것이 빛에게 입자적 성질을 가지게 한다고 했다.

(E= n hf, n= 정수배) 양자화 된 그 무언가를 그는 '광양자'라고 불렀으며 빛은 광양자들의 모임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아인슈타인은 광전효과로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한다.

이는 빛이 파동이라고 생각했던 기존의 학설을 반박함과 동시에, 이 가설에 사용되었던 플랑크 양자가설을 더 굳건하게 하였다.

빛이 가지고 있는 이중성을 거의 못박은 셈.


 이 이론은 많은 물리학자들에게 아이디어를 제공했다.

대표적으로 드브로이가 있는데, 그는 빛이 가진 파동과 입자의 "이중성"에 자극받아 "혹시 우리가 입자라고 생각했던

 전자가 파동이 아닐까?"라는 것을 느끼고 나온 것이 물질파다.


또 슈뢰딩거 역시 그의 물질파 개념에 영향을 받아

 전자를 파동함수로 기술하는 슈뢰딩거 방정식을 제안하게 된다.

플랑크의 흑체복사이론과 함께 양자역학 태동의 도화선으로 작용한 셈. 흔히 상대성 이론만을 알고 있는 일반 대중에게는 익숙하지 않지만, 물리학이나 전자공학 등에 조금만 손 대기 시작하면 정말로 중요한 개념임을 알 수 있다.


양자역학뿐 아니라 LCD, LED 등 디스플레이 소재 등의 발광소자 등의 기본원리이며, 이미 20세기 초반에 현대 물리의 가장 중요한 개념인 기본 입자중 하나인 광자라는 입자를 규명했다는 것에서 그 중요성은 절대로 상대성 이론

뒤지지 않는다.


 브라운 운동

브라운 운동이란 1827년 영국의 생물학자 브라운이 발견한 현상으로, 물에 작은 입자를 집어넣었을 때 외부의 특별한 간섭이 없어도 여기저기로 움직이는 현상이다.

브라운은 꽃가루로 실험했었기 때문에 자신이 당시에 유행하던 학설이던 생기(생명체가 가지고 있는 특별한 기운)를

발견했다고 생각했으나, 나중에 아무 입자든지 작기만 하면 같은 행태를 보인다는 것이 관찰돼서 물리학자들의 관심을 끌었다.

아인슈타인의 업적은 이것이 물
분자의 열운동에 의해 그 입자의 통계 역학적 임의 보행(Random walk) 운동하는

 현상이라고 설명한 것이다.

예를 들어, 물통에 아주 아주 아주 작은 입자를 하나 넣었다고 해보자 (물통은 정지해 있다).


그런데 그 입자는 물 속에서 물분자들과 충돌하게 되고 결국 스스로 이리저리 움직인다는 것이다.

이 입자가 앞으로 어떻게 움직일지는 거의 랜덤이라서 랜덤워크운동한다고 하는 것이다.

물통에 들어간 입자가 충분히 크다면 역학적 평형관계를 이루게 되지만, 입자가 너무작으면 이리저리 움직인다는 것.


아인슈타인은 이런 가설로부터 미소입자의 움직임을 나타내는 식을 만들었는데, 이는 추후에 프랑스 물리학자

바티스트 페렝이 실험으로 검증해냈다.

이 업적의 중요한 부분은 당시에는 생소했던 확산(Diffusion)이나 임의보행과 같은 개념을 도입하고 이론화 한 것이다. 즉, 무작위과정(stochastic process)이 물리학에서 중요개념으로 데뷔한 사건으로 그 중요성이 같은 해에 발표된

 광양자가설이나 특수상대론에 비해 결코 처진다고 할 수 없다.

뿐만 아니라 그 이전까지
원자는 자연현상을 편리하게 설명하기 위한 가상의 개념이라 견해가 많았는데, 이는 원자의 존재가 실험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루트비히 볼츠만 등의 물리학자는 원자론의 개념으로 기체를 연구하는 과정에서 원자론을 받아들이지 않는 진영의

맹비난을 받고 조롱거리가 되기도 한다.

아인슈타인은 원자개념이 없이는 브라운 운동을 절대로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을 입증해냈고 이후 원자가 실재하는

 개념으로 받아들여지게 된다.




아인슈타인이 만든 확산-임의보행모델은 통계역학에서 중점적으로 연구되었고, 수학에서도 확률미적분학 등으로

발전했다.


 그 영향력은 오늘날에는 경제학의 경제예측 및 시계열분야, 주식/채권을 분석하는 금융경제학에서도 연구대상이 되고 있는 정도. (이래서 경제학계에서 순수 수학 / 이론 물리학자들을 대거 채용한 적이 있었는데 이들을 통칭 '로켓과학자'라고 불렀다.)



 상대성 이론



아인슈타인의 가장 유명한 상대성 이론은 1905년에 발표한 특수 상대성 이론(Special Theory of Relativity)과 이후

1916(혹은 1915)년에 발표한 일반 상대성 이론(General Theory of Relativity)으로 나뉜다. 다만 여담으로 본인은

'상대성'이라는 표현을 극도로 싫어했다고한다.


그의 중심생각은 모든 좌표계에 같은 법칙이 적용된다는 것이고 '상대성'이라는 이름이 그것을 잘 표현해주지 못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의 생각은 적중하여 철학자들은 '과학조차 모든 것이 상대적임을 인정했다'라며 떠들어댔고 이를 파인만이

엄청나게 깠다.

아인슈타인은 상대성 이론 발표 이후 1922년에 1921년분
노벨물리학상을 받는다.

참고로 노벨물리학상은 '광전효과'(광양자 가설)로 받은 것으로, 상대성 이론으로 받은 것이 아니다.

 상대성 이론은 여러모로 말이 많았고 노벨상감은 확실하니 상을 주긴 줘야겠고...해서 나온 궁여지책으로 이 광전효과는 이전까지의 빛의 입자설을 종합한 거 정도이며 분량도 A4 한 페이지 정도였다고 한다.

유명해진 뒤로는 그가 일했던 스위스 특허국에 수많은 물리학자들이 그를 찾아오고는 했다.

어느 물리학자를 만난 후 아인슈타인이 "실제로 리학자를 보는 것은 처음입니다."라고 하자 "당신은 매일 거울도 안 보십니까."라고 받아쳤다는 일화도 있다.

세 논문으로 아인슈타인은 유명해져 1908년에는 베른 대학에서 강의를 맡게 되고, 이듬해에는 취리히 대학 교수,

1911년에는 프라하 Karl-Ferdinand 대학 교수, 1914년에는 카이저 빌헬름 연구소 소장과 베를린 대학 교수직을

맡는 등 출세길에 오른다.

상대성 이론이 대체 뭐하는 녀석이길래 이렇게 난리인지 이해가 안가는 사람들을 위해 간단히 설명하자면 우리가 쓰고 있는 GPS장치는 상대성 이론이 없으면 작동이 불가능한 기술이다.

 GPS가 없다면 자동항법장치도 나올 수 없고 스마트폰에 있는 지도 앱이나 운동 앱들은 탄생조차 하지못 했을 것이다. 


 이미 실생활에 너무 많이 적용되어 설명하기가 어려울 정도. 쉽게 말해서 중력과 위치에 관련된 제품은 전부 상대성이

론이 쓰인다.

1916년에 그는 일반 상대성 이론에서 시공간이 뒤틀리면서 발생하는 파동, 즉
중력파의 존재를 제시하였다.

당시 과학기술로는 이 존재를 확인하지 못했으나, 딱 100년 뒤에 중력파의 존재가 확인되면서 이는 21세기 물리학

 분야 최고 성과로 인정받고 있다. 자세한 것은 연구가 진행되면서 밝혀지겠지만, 우주에 대한 신비를 밝혀줄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보스-아인슈타인 통계

세상을 이루는 입자들 중 보즈 입자들의 분포에 관한 함수식이다. 물리학자 보즈는 광자의 분포에 대해서 통계식을

만들어냈는데 이를 아인슈타인이 보손 전체로 일반화시켰다. 통계역학 참조.

맥스웰-볼츠만 통계는 고전적인 '근사식'이 되고 보즈-아인슈타인 통계는 페르미-디랙 통계와 함께 현대 통계역학의

기본 개념으로서 자리잡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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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인슈타인 고체 모델




고체의 열용량은 상온 근처에서는 크게 변하지 않지만, 극저온에서는 온도에 대해 매우 민감하게 변한다.

아인슈타인은 고체 원자들이 Phonon(간단히 말하면 용수철과 같다.)으로 연결된 조화진동자(Harmonic Oscillator)로 되어 있다는 간단한 착상으로 통계역학적인 방법으로 고체의 열용량에 대한 일반식을 유도해냈다.


이 식은 간단한 발상에도 불구하고 실제 고체의 열용량 거동과 거의 일치한다. 후에 Debye에 의해 양자역학적으로

수정되면서 고체의 열용량을 매우 정교하게 계산해낼 수 있게 된다.[26]

EPR 역설

Einstein과 Podolsky, Rosen 이렇게 세사람의 앞머리를 따서 이름 붙여진 양자역학의 역설이다.

 다만 실제로 포돌스키와 로젠이 각각 사고실험을 하고 논문을 쓴 것과 달리 아인슈타인은 이름값으로 숟가락만

얹었다고 전해진다.

양자얽힘에 관한 역설을 말하고 있는데 다들 한번씩 비문학 지문에서 읽어봤음직한 내용일 것이다.

 얽혀있는 멀리 떨어져 있는 두 입자의 상호작용이 즉시 전달되는가 아니면 상대론에 따라 빛보다 느리게 전달되는가를 말하고 있다.


국소성의 원리에 대한 문제로, 아인슈타인의 주장에 따르면, 태양이 사라져도 곧바로 지구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 것

처럼, 양자적인 규모에서도 어떤 현상이 다른 곳에서 일어나는 현상에 즉각적인 영향을 미치지 않아야한다.

아인슈타인을 비롯한 소수의
이론 물리학자들은 양자계의 상태에 대한 서술이 근본적으로 확률적이라는 코펜하겐

해석을 인정하지 못했다.


양자적인 규모에서의 이야기이긴 하지만 모든 것이 확률적이며, 심지어는 관측이 거기에 영향을 미친다는 코펜하겐

해석은 라플라스의 악마로 대표되던 고전적인 세계관에 정면으로 대치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신은 주사위를 굴리지 않는다."는 유명한 말도 코펜하겐 해석에 대한 이야기.

상대론의 확실함을 알고 있었던 아인슈타인은 이를 통해 양자역학이 불완전하다는 것을 지적하였으며, 확률적인

코펜하겐 해석 대신에 국소성의 원리에 맞는 숨은 변수 이론을 주장했다.

다만 존 벨(John Bell)이
벨의 부등식을 발견했는데, 이는 어떤 형태로던 국소적 숨은 변수가 존재한다면 그 이론이

 반드시 만족해야 할 부등식이다. 만약 이 부등식이 참이라면 양자역학은 완전히 틀린 이론이 된다. 실험 결과 벨의

부등식은 거짓으로 밝혀졌고, 물리학자들은 국소적 숨은 변수는 없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었다. 아인슈타인이 틀린 것으로 밝혀진 것들 중 한 사례.

통일장 이론

아인슈타인에게는 꿈으로 남은 이론. 말년에 이 이론으로 씨름했는데, 동료들에게도 무시당하고 결국 완성을 시키지

못한 채 작고하게 된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의 유산은 남아 자연계의 기본힘을 모두 통일하여 설명하는 통일장이론의 꿈은 후대 물리학자들인 와인버그와 살람의 표준모형과 같은 명맥을 만들기에 이른다.

혹자는 아인슈타인이 조금만 더 살았다면 통일장 이론을 완성했을지도 모른다는 아쉬움 섞인 이야기를 하기도 한다.

다만 많은 물리학자들은 아인슈타인이 말년에 남긴 통일장 이론에 대한 수식들만큼은 혹평에 가까운 수준으로 평가절하했다.(...)

오죽하면 어떤 물리학자가 아인슈타인을 만나러 왔다가 통일장 이론에 관련해 아인슈타인이 써놓은 수식들을 보고

 "아인슈타인 면전에다 이게 쓰레기라고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이걸 봤는데 또 양심적으로 쓰레기라고 하지 않을 수도 없고..."라며 고민하다가 그냥 도망나오기도 했다고.(...) 다른 물리학자들은 통일장 이론 때문에 아인슈타인을 보려고 하지 않았고, 아인슈타인은 양자역학 때문에 다른

물리학자들을 만나려고 하지 않아, 말년에 아인슈타인이 고립된 원인이기도 했다.

 우주 상수

1917년, 아인슈타인은 일반상대성이론에서 파생된 중력방정식을 우주 전체에 적용시켜 보려고 했다.

그런데 바로 문제가 생겼다. 우주에 균일하게 퍼져 있는 은하들의 중력이 우주 공간 전체를 휘게 만들었다.

여기에 따르면 우주는 끝이 없지만 크기는 유한한 '닫힌 우주'가 되어야 했다.


 그러나 닫힌 우주는 자체적으로 구조를 유지하는 것이 불가능했는데, 시간이 지나면 자체 중력으로 은하들이 한 점

으로 뭉쳐 빅 크런치가 일어나야 했기 때문이다.

어쩔 수 없이 아인슈타인은 우주가 균형을 유지하도록 중력방정식에 우주상수라는 추가항을 포함시켰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에드윈 허블이 우주가 팽창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 당시까지만 해도 모든 은하들이 한 지점에 멈춰 있다고 생각되어 왔던 우주의 패러다임이 한꺼번에 뒤집히자

아인슈타인도 더 이상 우주 상수를 고집할 필요가 없어졌다.


 우주가 팽창하고 있다면 앞서 말했던 우주 붕괴 문제도 자연스럽게 해결되기 때문.

아인슈타인은 곧장 우주상수를 폐기하면서 팽창우주론의 손을 들어줬다.

이후 아인슈타인은 "나의 일생일대의 실수는 우주 상수를 방정식에 집어넣은 것이다."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하지만 아인슈타인이 실제로 우주상수를 인생 최대의 실수라 말했는지는 불분명하다.

아인슈타인이 남긴 어떠한 발언에서도 인생 최대의 실수라는 말을 한 적이 없으며 아인슈타인이 그렇게 말했다는

 모든 기록은 조지 가모프가 쓴 1956년 사이언티픽 아메리칸 기사와 1970년에 나온 그의 자서전에서 기인한다.


때문에 인생 최대의 실수라는 표현은 가모프가 아인슈타인과의 대화에 살을 덧붙이는 과정에서 생겨난 표현일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아인슈타인이 죽은 뒤 한참 후인 현대에 들어와 우주상수는 엉뚱하게도 재조명을 받게 되었다. 이번에는 왜 그런지는 모르지만 우주의 팽창 속도가 빨라지고 있다는 것.

우주상수는 이제 우주를 유지시키던 힘에서 더 빨리 팽창시키는 힘, 암흑 에너지로 변모하여 현대 우주론에 돌아왔다.


물론 암흑 에너지가 무엇인지 아직 알려진 것이 거의 없기 때문에 상수의 형태를 취할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일단

가장 간단한 형태이기 때문에 사용되고 있다.

이렇게 아인슈타인의 우주 상수와 암흑 물질을 포함하는 우주 모형을 람다시디엠(ΛCDM) 모형이라고 부르는데 표준

우주모형이라고도 불린다.


이유는 현재까지 관측되어온 전반적인 우주 관련 데이터가 이 모형과 부합하기 때문. 예를 들면 우주 마이크로파

 배경 말고도 다른 여러 효과들을 계산하면 다름이 아니라 이제까지 관측된 대다수의 관측 데이터를 설명하는 게

 가능하다.


하지만 대폭발의 평탄성 문제나 지평선 문제 같은 개념 등은 다루지 않아서 다른 모형들을 추가로 도입하긴 해야 한다. 아무튼, 비록 아인슈타인 스스로가 폐기하긴 했어도 현대 들어 다시 재조명되어 실제로도 설득력을 갖춘 개념이라는

 데서 그의 천재성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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