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추선희 어버이연합 사무총장
<사진제공=뉴시스>
이명박 ,박근혜 정권 '어버이연합 게이트'의 추악한 진실
보수단체 통해 여론조작, '돈' 미끼로 탈북민까지 이용..실무자 허현준 전 靑 행정관 구속, '화이트리스트' 수사 막바지
‘어버이연합 게이트’의 핵심 인물인 허현준 전 청와대 국민소통비서관실 행정관이 10월19일 구속됐다.
시사저널의 ‘어버이연합 게이트’ 단독 보도 후 1년6개월 만이다. 허 전 행정관은 전국경제인연합회를 비롯한 여러
대기업들을 압박해 대한민국어버이연합 등 보수단체에 자금 지원을 하도록 한 혐의를 받고 있다.
‘어버이연합 게이트’의 또 다른 한 축인 추선희 어버이연합 사무총장에 대한 사전구속영장은 기각됐다.
그러나 검찰은 추 사무총장에 대한 영장을 재청구할 방침이어서 ‘화이트리스트’ 수사 역시 급물살을 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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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현준 전 행정관이 10월18일 구속 전 피의자심문(영장실질심사)을 위해
서울중앙지법으로 들어서고 있다.
© 연합뉴스
화이트리스트란 이명박(MB)·박근혜 정부가 친정부 성향의 단체에 자금 지원 등 특혜를 몰아 준 것을 말한다.
검찰은 MB 정부와 박근혜 정부가 국가정보원 등을 동원해 대기업으로부터 조직적으로 받은 200억원의 자금을 특정
보수단체에 지원한 사실을 파악하고 수사에 착수한 상태다.
시시저널 보도 후 1년6개월 만에 허현준 구속
화이트리스트 의혹은 시사저널이 지난 2016년 4월 단독 보도한 ‘어버이연합 게이트’로부터 시작됐다.
본지는 2016년 4월12일 ‘어버이연합, 세월호 반대 집회에 알바 1200명 동원 확인’이라는 기사를 시작으로, 4월19일
‘보수집회 알바비, 경우회·유령회사가 댔다’, 4월22일 ‘“청와대 행정관이 집회 열라고 문자 보냈다”’
기사를 연이어게재했다.
이 기사를 통해 세월호 반대 집회를 비롯한 각종 보수 집회에 ‘알바’로 동원된 탈북자가 상당수를 차지한다는 의혹이
사실로 밝혀졌으며, 어버이연합의 보수 집회를 움직이는 자금줄이 대한민국 재향경우회·전경련이라는 것도 드러났다.
핵심은 자금줄을 움직이는 ‘윗선’이었다.
본지는 허 전 행정관을 비롯한 청와대가 어버이연합 등 보수단체에 직접 집회 지시를 내린 사실을 밝혀냈다.
추 사무총장은 어버이연합이 ‘박근혜 보위단체’임을 공공연히 밝혀왔다. 추 사무총장은 기자에게 “어버이연합은 박근혜 대통령 보위단체다.
더 정확하게 하자면 ‘박근혜 보위단체’다”면서 “어버이연합은 박근혜가 대통령이 되기 전부터 그녀의 보위단체였으며, 그녀가 대통령직을 떠나도 ‘박근혜 보위단체’로 계속 남아 있을 것이다”고 말했다.
실제로 어버이연합은 박근혜 정부와 각을 세운 인물에 대해서는 보수·진보를 가리지 않고 규탄 집회를 열었다.
2014년 새누리당(현 자유한국당) 7·14 전당대회를 앞두고 비박계 수장인 김무성 전 새누리당 대표(현 바른정당 의원) 규탄 집회를 대대적으로 개최하기도 했다.
그러나 어버이연합은 이명박 정부 시절에는 박근혜 전 대통령이 아닌 MB의 홍위병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다.
어버이연합은 2006년 5월에 출범했다. 하지만 어버이연합이라는 이름이 대외적으로 알려진 것은 MB 정부가 출범한
이후다. 어버이연합은 과격한 집회·시위를 통해 이른바 ‘아스팔트 보수’를 자처하면서 기존의 보수단체들을 밀어냈다.
‘아스팔트 우파의 대부’로 불리는 서정갑 국민행동본부 본부장은 어버이연합에 대해 “당시 어버이연합은 우리 사무실에 2개월 동안 매주 금요일 오후 2시마다 버스 2대를 타고 몰려와서 ‘국민행동본부 해체하라’고 외치고 아주 입에 담지
못할 말을 했다.
어버이연합이 무쇠로 만들어진 사무실 간판을 망치로 두드렸는지 찌그러뜨렸다.
심지어 내가 사는 아파트까지 찾아와서 서울기동대 경비 1개 중대가 와서 정리하기도 했다”면서 “나는 배후조종 세력이 있다고 확실히 생각한다”고 밝히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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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선희 사무총장이 10월19일 구속 전 피의자 심문(영장실질심사)에 출석하기 위해
법정으로 향하고 있다.
© 연합뉴스
시사저널, 2010년부터 어버이연합 추적
어버이연합이 주목을 받은 것은 집회·시위의 과격성과 폭력성 때문이다. 시사저널은 어버이연합이 ‘아스팔트 보수’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한 2010년경 이 단체를 추적 보도한 바 있다(2010년 1월26일자 ‘사법부 공격 선봉에 선 그들은
누구인가’ 기사 참조).
어버이연합은 2008년 4월 이건희 당시 삼성그룹 회장이 특검 소환을 앞두고 있을 때, 회원 50여 명을 동원해 한남동
조준웅 특검팀 사무실로 찾아가 삼성을 비호하는 시위를 벌였다.
2009년 8월 김대중 전 대통령이 서거한 후 북한에서 온 조문단에게 달걀을 던진 것도 어버이연합이다.
같은 해 9월 흑석동 국립현충원 앞에서는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의 가묘를 설치하고 “DJ 묘 파내서 평양으로 이장하라”며 모형 불도저와 굴착기로 묘를 파헤치는 퍼포먼스를 벌이기도 했다.
10월에는 진보개혁 성향 인사들의 시민사회 정치 참여를 위한 ‘희망과 대안’ 창립행사장에 몰려가 “국민의례를 하지
않는다”며 소동을 벌여 창립 행사를 무산시킨 적도 있다.
2010년에는 광우병 사건을 보도한 MBC 《PD수첩》이 무혐의 처리되자 연일 법원과 판사들의 집 앞으로 몰려가 판사들의 출근을 저지하고, ‘빨갱이’라며 욕설을 퍼붓는가 하면, 판사의 화형식 퍼포먼스를 열기도 했다.
취재 중이던 기자에게는 휘발유를 뿌리며 위협을 가하기까지 했다. 같은 해 1월22일 이용훈 당시 대법원장의 출근
차량에 달걀을 던진 것도 어버이연합이었다.
어버이연합의 튀는 행동이 계속되자 온갖 추측이 난무했다.
‘국정원이 뒤에 있다’‘정치 세력이 든든한 배경이다’ ‘누가 돈을 대주고 있다’ ‘돈을 받고 움직인다’ 등이다.
당시 어버이연합은 자금 출처를 묻는 기자에게 “회비에서 활동비 전액을 충당한다”고 밝혔다.
추 사무총장은 “재정국장이 100원짜리 하나까지 일일이 기록하고 있다. 어르신 돈 모아서 사무실 넓히는 것을 보면
기자들도 놀란다. 노인들의 투철한 국가관이 군자금을 만드는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관제데모 윗선 청와대·국정원 지목
추 사무총장은 자신들을 도와주거나 뒤를 봐주는 세력이 없다고 잘라 말하면서도 “앞으로는 솔직히 정부 지원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이는 곧 현실화됐다.
어버이연합은 MB 정부 시절인 2009년부터 국정원으로부터 자금 지원을 받는 대가로 각종 관제데모를 주도했다.
시사저널이 앞서 보도한 어버이연합의 과격 시위가 국정원의 사주를 받은 것으로 드러난 것이다.
MB 시절 국정원은 2009년 12월 “보수단체들이 국정 버팀목으로 지속 가능할 수 있도록 고정적 자금 지원 방안 마련이 필요하다”며 주요 대기업과 보수단체의 1대1지원을 연결해 주는 매칭사업을 추진했다.
MB 정부의 보수단체 지원 금액은 지금까지 밝혀진 것만도 118억원에 이르는 것으로 집계되고 있다.
국정원의 보수단체 자금 지원에는 국정원장이 직접 나서기도 했다.
시사저널은 2016년 5월10일 “이병기 비서실장 국정원장 시절, 보수단체에 창구 단일화 요청”이라는 단독 기사를 통해, 이병기 전 국정원장이 박근혜 정부의 청와대 비서실장으로 임명되기 직전에 보수단체 대표 등과 회동을 갖고 이들에게 ‘창구 단일화’를 요구한 사실을 밝혀냈다.
이 전 원장은 국정원장에서 대통령비서실장으로 옮기기 보름 전인 2015년 2월12일, 국민행동본부·애국단체총협의회
(애총협)·재향경우회 등 내로라하는 보수단체의 대표들과 회동을 갖고 “우파 진영이 하나로 뭉쳤으면 좋겠다”면서
“집회를 각 단체에서 나눠서 할 것이 아니라 한 단체에서 하는 것이 어떠냐. 돈 지원해 주는 창구를 하나로 해야 그
창구에다 (돈을) 쉽게 넣을 수 있다”고 말했다.
이 전 원장은 지난 1월 박영수 특검에 출석해 “보수단체에 자금을 지원했다”면서 “우리와 뜻을 같이하는 단체에 대한
지원은 예전부터 해오던 일”이라고 밝혔다.
어버이연합을 움직인 것은 결국 ‘돈’이었다.
어버이연합 측은 2016년 4월 ‘어버이연합 게이트’가 터졌을 당시 기자에게 어버이연합 외의 다른 보수단체들도
허 전 행정관의 손에 의해 움직이고 있으며, 허 행정관의 지시에 따르지 않았을 경우 지원하는 예산을 자르거나
보류했다고 밝혔다.
어버이연합 측은 “말 그대로 지금 이 시민단체들이 다 걔(허 전 행정관) 손에 의해서 움직이고 있다”면서 “(자금 지원을 받기 위해서) 보수단체들 사이에도 경쟁이 붙었다”고 말했다.
이어 “(허 전 행정관의) 지시를 안 들었을 경우 ‘예산 지원하는 거 다 잘라라. 책정된 거도 보류시켜라. 못 준다’ 이런 식으로 허현준이가 (자금줄을) 다 잘랐다”고 덧붙였다.
어버이연합은 보수단체 후발주자로서 이름을 알리고 조직을 확대하기 위한 ‘스폰’이, 이명박·박근혜 정부는 여론을 호도할 수 있는 충직한 단체가 필요했을 것이다.
과격한 폭력 시위를 통해 이슈가 되고 있던 어버이연합은 이명박·박근혜 정부가 요구하는 보수단체의 성격과 정확히
일치한 셈이다.
이명박·박근혜 정부는 ‘돈’이라는 미끼를 이용해 어버이연합에 접근했고, 어버이연합 역시 이를 거부할 이유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실무자로는 시민단체를 잘 아는 인물이 활용됐다.
허 전 행정관이 적임자였다.
허 전 행정관은 전북대 88학번으로 1993년 전북대 총학생회장과 전북총련 의장을 지낸 학생운동권 출신이다.
범청학련 사건과 서울대 범민족대회 사건에 연루돼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두 차례 구속된 전력이 있다.
그러나 허 전 행정관은 1990년대 후반 노선을 갈아타 보수진영에 참여했다. 뉴라이트 운동을 주도한 ‘전향386’과
‘시대정신’이라는 단체의 핵심 멤버였다.
진보와 보수를 오간 이력 때문인지 허 전 행정관은 박근혜 정부 출범 후 청와대에 입성했고, 어버이연합을 비롯한
보수단체를 관리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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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4월21일 오후 서울 용산구 시사저널사 앞에서 어버이연합 회원들이 집회를 열고
항의하고 있다.
© 시사저널 이종현
여론 조작 위해 푼돈 미끼로 탈북민 이용
허 전 행정관을 비롯한 청와대가 관제데모를 지시하고 이 지시를 받은 어버이연합이 시위를 주도했다.
그런데 이 관제데모가 실제로 이뤄지기 위해서는 현장에서 단체로 움직여줄 인원이 필요했다.
어버이연합은 이를 북한이탈주민(탈북민)으로 충당했다.
탈북민들은 북한 체제에 비판적이고, 이 때문에 보수적인 정치 성향을 띤다.
그렇다고 해서 어버이연합의 집회에서 보여준 것처럼 극우 성향을 지닌 것은 아니다.
단지 ‘알바비’로 나오는 일당 2만원을 받기 위해 별 고민 없이 집회에 참석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지난 5월 19대 대선에서도 탈북 알바가 동원됐다.
장성민 전 의원이 대선 출마 의지를 밝힌 북콘서트에 탈북 알바가 대거 동원된 것이다.
시사저널은 당시 현장에서 탈북민들이 일당을 지급받는 장면을 촬영해 보도한 바 있다(1월19일자 “[단독 영상] 대선
판에 동원된 알바들 일당 지급 장면 단독 포착” 기사 참조).
어버이연합은 생활고를 겪고 있는 탈북민들에게 푼돈을 쥐여주고 이들을 정치적으로 이용했다. 어버이연합은 보수단체 후발주자로서 자신들의 존재를 공고히 할 필요가 있었다.
이를 위해선 돈과 정치적 뒷배가 필요했을 것이다. 어버이연합이 내세울 수 있는 것은 충성심과 이를 보여줄 수 있는
과격한 폭력시위였다.
이는 이명박·박근혜 정부의 요구와 맞아떨어졌다. 즉, 국민의 투표에 의해 선출된 이명박·박근혜 정부가 여론 조작을 위해서 어버이연합을 통해 사회적 소수자로 최하층민 취급을 받고 있는 탈북민들을 이용한 것이다.
이것이 ‘어버이연합 게이트’의 추악한 진실이다.

▲ 희망촛불 가족 지난 2016년 12월 31일 오후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박근혜
즉각퇴진을 위한 '송박영신' 10차 범국민행동의 날에 참여한 한 가족이 대형
'희망촛불'앞에서 사진을 찍고 있다.
2016년 촛불 집회에서 나온 '이게 나라냐?'는 말은 좋게 해석하면 '이게 민주공화국이냐?'는 말이었다고 생각한다.
즉 국가 자체의 존재와 정당성은 인정하는 '관용'이 자리잡고 있다고 이해하는 것이다.
그런데 요즘 국가정보원의 행적에 대한 각종 언론 보도를 보자면, '파시즘 범죄단체'와 다를 바 없다는 참담함을
느낀다.
또 '과연 우리에게 국가라는 게 필요할까'라는 절망감에 빠져든다.
더 충격적인 것은 이 사태를 바라보는 한국 사회의 무덤덤한 인권적, 민주주의적, 공화주의적 감각이다.
국가정보원은 '반대세'의 본산이었다. '반대세'는 '반(反)대한민국 세력'의 준말이다.
국정원이 개입하여 출판한 단행본 <반대세의 비밀, 그 일그러진 초상>에서 등장한 용어다
(<한겨레21>, 2013년 6 20일).
이 책은 "좌성향 세력은 반정부·반체제·반미 촛불시위를 주도하는 등 보수 우익 정권에 타격을 주어 국민들의 민심
이반을 유도한 후 반보수 대연합을 통해 좌익 정권을 수립하려는 시도를 계속하고 있다"고 서술하고 있다
(187쪽). 그러나 이것은 고스란히 국가정보원에게 되돌려주어야 한다.
대한민국의 국가정체성은 민주공화국이다. 국가정보원이야말로 대한민국의 민주공화국 정체성을 부정한다.
국가정보원식의 '결단주의 우적론'에서는 국가에 무조건 충성하는 것이 적으로부터 우군동지를 식별하는 유일한 기준
이고, 이것이 집단적 내면화의 과정을 거치면 헌법현실의 파시즘화 경향은 필연적인 현상이다
(국순옥,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란 무엇인가', <민주법학> 제8호, 1994년, 156쪽). 그 중심에 국가정보원이 있다.
2017년 6월 19일 '국정원개혁발전위원회'가 발족했다. 그 아래 '적폐청산 TF'와 '조직쇄신 TF'를 두었다.
그러나 이러한 조치는 국가정보원에 대한 문재인 정부의 안일한 문제의식을 드러낸다.
설령 민간위원으로 위원회를 구성했다고 하더라도 더 이상 국가정보원 차원의 셀프 개혁을 통해 일정한 국가정보원
개혁의 성과를 기대하는 것은 무리이기 때문이다.
국가정보원 '적폐'는 한국 사회 전반에 걸쳐 있다.
따라서 대통령 직속기관으로 하여금 정보기구를 비롯한 공안권력이 저지른 반(反)헌법적 행위를 조사하게 하되,
책임자 처벌과 재발방지 대책을 마련, 국가안보기능의 조직체계를 전면 재편하는 일은 국회와 협력하여 국가체제를
혁신하는 입법적 조치로서 완성해야 한다.

파시즘적 국정원, 이중국가체제의 블랙박스
2004년 출범한 '국가정보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는 1차적으로 7개 의혹사건과 2차적으로 6개 분야를 조사했다. 2007년 '과거와 대화 미래의 성찰'이라는 종합보고서를 발간했다.
과거를 반복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국가정보원은 그 약속을 철저히 짓밟았다.
해체밖에는 답이 없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그 결과는 국민에게는 참혹한 일이었다.
지금도 국가정보원의 반(反)헌법적 범죄행위는 계속해서 드러나고 있다. 이명박 정권과 박근혜 정권을 거치면서 논두렁 시계사건, 정치인 룸살롱 검색 사건, NLL 대화록 논란, 선거개입 여론조작 사건, 좌익효수, 인도네시아 특사단 숙소
침입사건, 예술적 표현행위에 대한 배제와 탄압, 유우성씨 간첩 조작 사건, 카카오톡 사찰 논란, 국정원 해킹
프로그램 도입 논란, 어버이연합 게이트, 탈북자 시위 알바 동원, 박원순 서울시장 조직적 음해 공작, 판사후보자 면접 사건, 대법원장 사찰, 헌재 불법사찰 논란,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사건 등 헤아릴 수 없다.
국가정보원의 파시즘적 행태는 이중국가체제의 블랙박스였다.
"… 안보 관련 기구들이 사회 전 영역에 걸쳐 주요 국가정책의 결정 및 집행과정에 깊숙이 개입하게 되고, 이로 말미
암아 국가 안의 국가가 머리를 내미는 이른바 이중국가의 현상이 나타나게 된다.
이것은 공식국가가 비공식국가에 자리를 내주고, 양지의 국가가 음지의 국가에 밀리는 무정부적인 국가 해체의 과정이기도 하다.
그 결과 헌법 하위법에 의하여 설치된 안보 관련 기구들이 초헌법적 주권기관으로 군림함으로써 공식 국가기관들은
박제된 명목상의 존재로 전락한다."(국순옥, <민주주의 헌법론>, 아카넷, 2015, 497쪽).
국가정보원에는 민주적·법적 통제가 작동하지 않았다.
국가정보원이 자의적 절대 권력을 어떻게 남용했는지는 아직까지도 그 전모를 알 수 없다.
국가정보원 차원에서 규명할 수 있는 규모가 아니다.
몇 가지 유형으로 정리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가장 중요한 첫 번째 문제는 국가정보원의 반(反)헌법행위가 국가보안법체제에서 사람들의 생각, 사고, 사상 등 개인의 내면 영역까지 지배하려는 국가폭력이라는 점이다.
국가보안법체제는 인간의 사상․표현의 자유를 원천적으로 봉쇄하면서 언제든지 비판세력을 제거할 수 있는 체제다.
과거 사상범 또는 양심수에 대한 사상전향제도와 다를 바 없는 각종 제도와 현상들이 존재한다. 보안관찰제도, 정부
정책 비판을 세뇌의 결과로 보는 발언, 군 정보기관까지 가담한 민간인 사찰과 대국민 심리전, 문화예술계를 비롯한
사회 곳곳에 블랙리스트 존재 등은 가히 '사찰 왕국'이라고 할 만한, 파시즘 국가와 다를 바 없는, 인간 존엄을 침해
하는 국가폭력이다.
두 번째 문제는 국가의 간섭에서 자유로워야 할 사회적 자율 영역에 국가정보원이 개입했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 시민사회를 조종한 건 전체주의적 폭력이다. 보수단체에게 자금 등을 제공하여 국가에게 적극적으로 충성을 맹세하고 국가권력의 하수인 역할을 하게 했기 때문이다.
세 번째 문제는 국가정보원이 민주주의의 근간인 선거과정에 개입하여 저지른 반(反)민주적 범죄를 저질렀다는 점이다. 3․15부정선거가 4․19혁명으로 이어진 헌정사를 되짚어볼 때, 국가권력의 선거개입은 헌법 자체와 국가의 민주적 정당성을 부정하는 범죄행위다.
그것은 형법상의 내란·외환죄 이상의 범죄다.
마지막 네 번째 문제는 국가정보원이 간첩조작 사건을 통해 인권을 침해함은 물론 국가안보에 기여하기보다는 국가안보에 대한 국민의 신뢰감을 상실시킴으로써 국가의 안전을 위태롭게 한 안보범죄의 주체였다는 점이다.
국가정보원은 다른 나라에서 유례를 찾기 어려운 수사권을 틀어쥐고 그것을 남용함으로써 위법한 감금과 수사기법을
확산하는 악영향을 끼쳤다.
북한해외식당 종업원 탈북 관련 사건을 비롯하여 탈북자 관련 사안에서는 남북관계를 악화하는 방향으로 정보 권력을 남용함으로써 헌법이 명령한 평화통일 원칙을 무력화한다.
무소불위의 절대적인 안보 권력은 민주적 견제 장치가 작동하지 않아 부패의 온상이 됐다.
아울러 평화적 생존을 위협하고 현실적인 안보 무능력을 초래했다.

▲ 18일 오후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언론장악 국정원 문건 피해자 보고대회에
민일홍 KBS 라디오 PD, 김범수 KBS 전 <추적 60분> PD, 이근행 MBC 전 시사교양국 PD,
이우환 MBC 전 <PD수첩> PD가 참석하고 있다.
ⓒ 남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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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공화국을 다시 세울 8가지 헌법원칙
헌법은 원칙규범이다. 예외상황 논리에 흔들려서는 안 된다. 현실 여건을 고려한 점진적 개선 방법을 취할 수밖에 없다고 하더라도 헌법에서 유래하는 원칙을 확인하는 일이 그래서 매우 중요하다.
국가정보원의 구체적 개혁안에 다소 차이가 있을지언정 아래와 같은 헌법적 원칙에 따른 목표를 설정하고 점진적
이행방안을 담아야 할 것이다. 원칙이 먼저이고 주도적이며, 현실과 예외는 구체적 실증을 통해 그리고 지속적으로
그 필요성을 입증해야 한다.
첫째, 인권을 존중하고 민주주의에 복무하며 헌법에 합치하는 비밀정보기구는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국가정보원 개혁 문제의 인식의 출발점으로 삼는 일이다.
비밀정보기구에 대한 통제와 감시가 작동할 수 있다는 인식 자체가 비밀정보기구의 확장력을 내포하기 때문이다.
비밀정보기구는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침해할 때만 그 본연의 임무를 수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비밀정보기구의 개혁 문제는 헌법 문제로서 국가정보원이라는 기관의 문제에 한정할 수 없고 다른 국가기구와 관련 법제와 내부의
행정규칙 등 국가체제 전반에 걸친 개혁 과제를 부과한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둘째, 평화주의원칙을 굳건히 견지해야 한다.
그것은 분단체제를 이유로 민주공화국의 예외 상태를 강요하는 현실을 넘어서게 할 힘이다.
헌법의 평화원칙이 남북관계의 정치적 상황에 따라 흔들려서는 안 된다. 사상과 표현의 자유를 부인하는 국가보안법을 폐지하는 일은 필수적이다.
국가보안법은 반공주의와 국가안보이데올로기의 근원지이기 때문이다. 테러방지법도 존재이유가 없다. 테러가능성을 높이는 군의 해외파병도 금지할 일이다.
과잉의 국가안보이데올로기는 오히려 국민의 안전을 위태롭게 한다. 견제 기능을 약화함으로써 부패의 온상이 되기
때문이다.
이미 우리는 정권에 충성하는 정보기구, 구성원의 사익(私益)과 결부한 부패동맹, 방위산업의 비리 등으로 이러한 점을 확인했다.
셋째, 인권 존중 원칙을 회복하여 최대한으로 인권을 보장해야 한다.
헌법 제10조는 인간의 존엄과 가치를 인정하면서 국가에게 개인이 가지는 기본적 인권을 확인하고 보장할 의무를
지우고 있다.
국가는 헌법 제37조 제2항에서 명령한 기본적 인권의 본질적 내용 침해 금지 원칙에 따라 매우 예외적인 경우에만
엄정한 적법절차에 따라 과잉금지원칙을 준수하면서 기본적 인권을 제한할 수 있다.
이것은 국가의 조직 원칙에서도 준수해야 하며, 그것을 구체화하는 것이어야 한다.
국가보안법의 폐지와 정보기관의 분산과 견제 체계 수립, 수사기관의 정보 권력에 대한 민주적 통제 등으로 인권 존중 원칙을 뒷받침해야 한다.
넷째, 정보기구를 다시 편성할 때 반드시 준수해야 할 원칙은 정보수집과 법 집행의 분리원칙이다.
분리원칙(Trennungsgebot)은 경찰과 정보기관을 조직과 기능 모두 분리해야 한다는 원칙이다.
당연히 비밀정보기관에게는 수사권 같은 집행권한이 없다.
독일은 '비밀첩보기관이면서 동시에 경찰기관'이었던 나치스 정권의 국가비밀경찰(게슈타포)에 대한 역사적 청산과
반성의 의미에서 분리원칙을 헌법상 지위를 가지는 원칙으로 이해했다.
독일의 상황이 현재 한국의 상황과 다르지 않다.
분리원칙을 정립하면, 한편으로 정보기구에게 집행권한을 인정하지 않는 동시에 경찰 같은 집행기관에게는
정보수집기능을 인정하지 않는다.
구체적인 내용은 국가정보원의 범죄 수사권을 박탈하는 것이다.
지금 한국에서 분리원칙은 정보와 집행, 국내와 해외 그리고 사이버, 민간과 군, 경찰·검찰·일반행정기관 등에서 정보 기능 폐지 등 그 범위를 확장하여 철저하게 준수해야 한다.
국가정보원의 과거 행태를 반성하는 의미에서 분리원칙을 구체화하면, 국가정보원은 해외정보를 수집하는 업무만을
수행해야 한다.
구체적으로는 국가정보원의 국내정보 수집을 금지하고, 정보 및 보안 업무 기획조정권을 폐지하며, 각 정보기구 간
분리와 견제 관계를 전제로 한 협력 체계를 구축하는 것으로 대체하는 것이다.
비밀보호 정책 수립과 신원조사와 보안측정 기능, 사이버 보안 기능 등은 각 개별 정부기관이 필요하고 적정한 범위에서 인권을 준수함을 전제로 하여 제한적으로 수행하도록 한다. '심리전' 등 국내 정치에 관여하거나 정보수집 기능을
넘어서는 적극적 활동은 엄중한 형사 처벌 대상이다.
다섯째, 국가정보원을 비롯한 모든 정보기구에 대해 민주적 통제와 법적 통제의 유기적 제어기제를 수립하는 일이다. 국회 정보위원회와 별도로 국회 소속의 '전문가형 정보기관 감독기구'와 대통령 소속 '정보감찰관'을 설치하여 각종
정보기구 통제장치를 신설한다.
정보기관의 임무를 정보수집에 한정한다고 하더라도 그 비밀주의에 따른 정보의 왜곡과 정보권력의 오·남용 가능성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통제와 감독 체계가 필수적이다.
그것은 안보 업무의 답책성(accountability) 확보를 수반한다. 정보 활동에 대하여 해명 또는 설명하도록 책임을 지우는 것이다. 만약에 실수가 있었다는 것이 드러나면, 적절한 곳에서 그 결과를 수용하도록 하고, 비판을 받거나 사태를
수습하도록 하게 해야 한다. 일반에게 공개하는 것이 적절하지 않다면, 비밀 정도에 따라 적정한 답책 체계를 구축하면 될 일이다.
구체적으로는 국회 정보위원회의 과잉 비공개주의를 개선하여 공개 범위를 확대하고, 정보위원회의 국가정보원 보유
자료 제출권과 답변 요구권을 강화하는 것이다.
여섯째, 정보권력의 오·남용을 방지하기 위해 예산을 삭감하고 인력을 축소하며 문민 통제를 강화하고, 그 법적 위상을 약화하는 것이다.
구체적으로는 국가정보원 예산의 투명성을 강화하기 위해 예산회계특례법을 폐지하고, 예산결산위원회의 심사 면제조항을 폐지하며, 국가정보원 직원에 대한 수사 사실과 결과를 통보하는 것 등이다.
일곱째, 정보수집 방법의 제한이다.
패킷 감청 금지와 도청장치 수입과 사용 금지 등을 비롯한 도청의 원칙적 금지와 매우 엄격한 예외적 인정이다.
광범위한 통신사실 확인 등 개인정보 수집 제한이다.
각종 리스트 작성 등에 대한 금지와 엄격한 처벌이다.
여덟째, 정보기구의 내부적 통제 체계를 마련해야 한다.
국가정보원의 정보수집활동을 제어하기 위한 구체적이고 광범위한 매뉴얼을 마련하고, 각종 통제·감독 기구가 매뉴얼 준수 여부를 감사하며, 그 위반 행위에 대한 징계 책임을 엄정하게 추궁하는 기제를 마련하는 것이다.
정보기구 전면 해체 후 정보기능의 재편성
개혁의 마지막 기회라는 의미는 국가정보원을 비롯한 비밀정보권력이 저지른 폭력과 범죄의 끝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더 이상 양보할 것도 피할 데도 없는 현실을 맞닥뜨려서도 국가정보원을 혁신하지 못한다면, 도대체 대한민국이
민주공화국이고 국민이 주권자라는 것을 어떻게 확인하고 인정할 수 있을까 하는 절박함의 표현인 것이다.
국가정보원의 개혁은 '촛불 혁명'의 정신에 따라 혁명적인 '리셋'이어야 한다.
새로 헌법을 제정한다는 단호함과 결연함으로써 국가정보원 혁신을 완수해야 한다.
국가정보원 개혁은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의 민주주의 복원력 문제다.
제왕적 대통령제의 근원은 헌법의 권력구조가 아니라 법치주의 통제를 벗어헌법을 파괴할 수 있는 비밀권력의 존재다. 헌법을 고칠 것이 아니라 제왕적 대통령을 옹위하고 있는 국가권력기구, 특히 국가정보원을 비롯한 각종 정보기구의
전면 해체 후 정보기능의 재편성이야말로 민주공화국체제로 회귀할 수 있는 최우선 과제다.
문재인 대통령과 국회의 엄중한 현실 인식과 적극적인 대처방안 실행이 절실하다. 특히 헌법파괴행위로 기득권을
누렸던 세력의 경우 국가정보원의 혁신을 방해하는 행위는 반(反)헌법적 범죄행위의 공모자임을 자백하는 일이다.
과거 행적에 대한 뼈를 깎는 자기반성 위에 국민의 인권을 최우선시하는 보수의 이념을 실천함으로써 주권자 국민에게 용서를 구할 마지막 기회다.

▲ (왼쪽) 추선희 어버이연합 사무총장이 전경련의 지금지원 의혹을 보도한
시사저널을 규탄하는 집회를 이끌고 있다. (오른족) 주옥순 엄마부대봉사단
대표가 세월호 국비인양 반대 시위를 이끌고 있다)
추선희 전 어버이연합 사무총장 / 사진=홍봉진 기자 |

어버이연합 엄마부대, 왜 거리에서 사라졌나?
이명박근혜 비호 불법 관제데모 주동자 추선희가 지난해 11월30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에서 열린 박근혜 탄핵 반대 집회에서 연설하고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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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정부 들어 집회 신고도 없어
【서울=뉴시스】김지은 기자 = 보수단체 어버이연합과 엄마부대봉사단(엄마부대)이 문재인 정부가 들어선 이후 단 한건의 집회도 개최하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3일 국회 행정안전위원회 국민의당 이용호 의원이 경찰청으로부터 제출받은 '어버이연합·엄마부대 집회 신고 및
개최 현황'에 따르면 어버이연합은 지난 3년간 총 1897건을 신고해 71번 집회를 열었다.
엄마부대는 같은 기간 총 484건을 신고해 39번 집회를 진행했다. 집회 개최가 아닌 장소 선점 등을 목적으로 유령집회를 열었다는 지적도 나온다.
2015년의 경우 어버이연합은 총 1277건을 신고해 48번 집회를 개최했다.
한달 평균 106번을 신고해 4차례 집회(매주 1회 가량)를 가진 것이다. 같은해 엄마부대는 한달 평균 28번 신고해
2.8회 집회(2주에 1회 이상)를 가졌다.
지난해 어버이연합은 총 575회 신고해 21회 집회를 가졌고 엄마부대는 총 59회 신고해 5회 집회를 열었다.
2015년에 비해 활동이 절반 이하로 대폭 줄어들었다.
올해의 경우 어버이연합은 3월6일까지 총 45회 신고했는데 1월6일과 1월20일 단 두 차례만 집회를 가졌다.
이 집회들은 '최순실 게이트' 특검 사무실이 있던 서울 강남구 대치동 대치빌딩에서 열린 것들이었다. 같은해 엄마부대는 5월12일까지 총 90회 신고했는데 3월24일 대전에서 단 한 차례만 집회를 가졌다.
예전에 스포트라이트 영상에 참가자들한테 일당지급하는 영상이 찍힘.
지난 5월9일 대선 이후 현재까지 어버이연합과 엄마부대는 단 한건의 집회도 개최하지 않았다. 신고 자체를 하지
않았다.
이 의원은 "대선 이후 보수단체들의 활동이 사실상 멈춰 정권 교체 후 변화를 실감하게 한다"며 "국가정보원과의
유착 관계에 대해서는 검찰이 철저히 수사해야 하고 어느 정권이건 정치적 색채가 강한 시민단체와 결탁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whynot82@newsis.com
“촛불은 부패한 권력을 시민들이 맨몸으로 쫓아낸 혁명이었다.” “돌 하나 안 던지고 권력자의 항복을 받은 건 역사상 최초이다.” 촛불집회 당시 사회를 맡았던 박진 다산인권센터 상임활동가(왼쪽)와 유재원 한국외대 명예교수는 <한겨레>와의 인터뷰에서 ‘촛불혁명’의 의미를 되새겼다. 두 사람이 24일 오후 서울 종로구 광화문광장에서 만나 활짝 웃고 있다.
김성광 기자 flysg2@hani.co.kr
“박근혜는 물러나라!” 그(박진)가 지난겨울 광화문광장에 마련된 무대 위에서 외쳤다.
“박근혜는 물러나라!” 광장의 그(유재원)는 동료 시민들과 함께 소리를 보탰다.
지난겨울 촛불집회 주최자와 참가자로서 무대 위와 아래에 각각 있었던 두 사람은 24일 세종문화회관의 아담한 회의실에서 자리를 함께했다.
세종문화회관은 지난해 겨울 공연을 소화하면서도 화장실을 개방하는 등 촛불시민들과 호흡을 같이했다.
지난겨울의 사건을 한목소리로 ‘촛불혁명’이라고 규정한 두 사람은 “정치 개혁 등 혁명의 성공을 위해서는 촛불을
국회에서 다시 들어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또 “광장의 열기를 삶의 현장으로 가져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국정농단의 주인공인 ‘최순실’이란 이름을 최초로 보도해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의 포문을 연 <한겨레> 2016년 9월20일치 1면.
―촛불시민이 올해 독일 에버트재단의 인권상을 받게 됐다.
유재원(유) “내가 상을 받은 것처럼 기뻤다. 상금(20만달러)에 시민들도 돈을 보태 기금을 마련해서 세계적인 촛불 평화시위상을 만들었으면 좋겠다.”
박진(박) “실제로 선생님이 받은 거다.
축하한다. 하하. 노동운동과 평화운동을 지지하셨던 분들의 유산으로 만든 상이어서 더 의미가 있다.”
―지난겨울의 촛불집회를 혁명이라고 부를 수 있나?
박 “항쟁, 탄핵촛불, 촛불혁명, 촛불시민혁명 등등 다양하게 부르는데 나는 촛불시민혁명이라고 부른다.”
유 “나도 촛불혁명으로 부른다. 정치체제, 즉 정권이 넘어갔다는 점에서는 혁명이 맞다.
완벽한 혁명이 되려면 사상의 변화, 다시 말해 생각의 변화가 있어야 하지만, 그런 부분은 아직 진행형이라고 본다면
미완성의 혁명이라고 본다.”
박 “대통령을 바꾼 것도 굉장히 중요하나, 더 중요한 것은 부패한 권력을 오로지 시민들이 맨몸으로 쫓아냈다는 점에서 혁명이라는 이름을 아낄 필요가 없다.”
유 “돌 하나 안 던지고 권력자의 항복을 받은 것은 역사상 최초이고, 세계에서도 처음이다.
4·19, 전두환, 박근혜까지
우리는 세번씩이나 비폭력 평화적으로 권력을 무너뜨렸다.
간디가 왔다가 울고 갈 곳이 여기다.
그 뿌리를 생각해봤는데 기미독립선언(3·1운동) 할 때부터 그랬다.
그때도 총 하나 들지 않고 일본에 저항했다. 일부에서는 3·1운동을 실패라고 하지만, 나는 성공이라고 본다.
식민정책의 첫번째가 어문정책인데 일본은 1938년 이전까지는 조선어나 한글에 대해 시비를 못 걸었다.”
―대통령이 탄핵됐으니 촛불혁명은 성공한 건가?
박 “박근혜 퇴진이라는 단일한 목표로 봤을 때는 성공한 혁명이다.
물론 적폐 청산을 못 하는 현실을 보면서 이러려고 촛불 들었나라는 부정적인 평가도 있지만, 실패로 보는 것은 너무 이르다고 본다.
문재인 정부에 대한 평가도 마찬가지다. 한국전쟁 이후 기울어진 운동장이었던 우리 사회의 완고하고 뿌리 깊은 기득권 세력들을 몇 개월의 촛불로 다 뒤집을 수 있다고 보는 것은 조급하다.
87년 6월항쟁 때를 보자. 그때는 정권도 못 바꿨지만, 항쟁 이후 민주노조가 생기고 시민사회가 생기는 등 우리 사회는 질적으로 완전히 다른 사회가 됐다. 이번에도 변화는 앞으로 적어도 30년은 계속될 것이다.”
유 “촛불혁명은 진행형인데 촛불로 정권 교체를 이룬 뒤에 국민들이 방향을 잃어버리지 않았나 우려되는 면이 있다.
문재인 대통령이나 새 정부도 적폐 청산은 열심히 하는데 정치적 개혁을 어떻게 하겠다는 아이디어나 비전을 확실하게 제시하지는 않는 것 같다.”
박진 다산인권센터 상임활동가는 1997년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지역운동을 하기 위해 경기도 수원에 있는 다산인권
상담소(다산인권센터의 전신)에 들어갔다.
그는 20년 동안 다산인권센터에서 법률 상담과 인권운동 등을 해 왔다.
지난해 첫 촛불집회가 시작됐을 때는 활동가로서 모처럼의 안식년을 보내던 중이었다.
하지만 거꾸로 가는 시계였던 박근혜 정부는 인권운동가에게 잠시의 휴식도 허용하지 않았다.
국정농단의 결정적 증거인 ‘태블릿 피시’를 단독보도한 2016년 10월24일 제이티비시 ‘뉴스룸’의 한 장면.
“감옥 겁은 없는데 어디로 갈지 몰라 무서웠다”
―처음부터 촛불집회 사회를 맡았나?
박 “1, 2차 집회까지는 단순 참가자였다.
연일 터져나오는 뉴스를 보면서 가만히 있으면 안 될 것 같아서 집회에 갔는데 거기에 온 분들의 에너지가 밖으로
뻗쳐나가는 게 보이더라.
이것 크게 터지겠구나 하는 감이 왔다.
결정적으로 나를 움직인 것은 한 장의 사진이었다.
퇴진행동이 구성되기 바로 직전에 시민사회 원로들이 국정농단 사태와 관련해서 했던 기자회견이었다.
그 사진을 보니 전부 어르신들만 있었다. 촛불은 이미 다양한 연령과 계층의 사람들이 참여하고 있는데 이 사진만
봤을 때는 시민들이 어버이연합과의 차이를 알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왔다.
더 다양한 얼굴로 만드는 게 촛불광장의 핵심이라고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얘기했더니 그러면 네가 해야 한다고 해서
나오게 됐다.”
지난해 9월20일 최순실의 미르재단 및 케이(K)스포츠재단 관련 의혹에 대한 최초 보도(<한겨레>)에 이어 10월24일
최순실의 태블릿피시 보도가 나오자, 당시 민중총궐기 투쟁본부와 백남기 투쟁본부는 10월29일 급하게 서울 청계광장에 무대를 만들었다. 이날 5만명(주최 쪽 추산)이 모였다.
―초반부터 ‘박근혜 하야’를 시민들이 외치는 등 국민의 분노가 높았는데, 대통령 퇴진이 될 거라고 예상했나?
박 “전혀 예상 못 했다.
늘 한치 앞을 볼 수 없는 안갯속을 헤매는 느낌이었다.
그때 얼마나 무서웠는지 모른다.
구속이 두려운 게 아니었다.
그런 연대기구의 공동상황실장으로 이름을 올릴 때는 감옥 갈 각오를 한다.
어디로 가는지 방향은 하나도 알 수 없는데 어슬렁어슬렁 걸어가는 거대한 호랑이의 목줄을 잡고 따라가는 듯한 상황이 무서웠다.”
―탄핵 구호는 촛불집회에서는 비교적 늦게 나온 것 같다.
박 “내부 회의 때 탄핵 구호를 외칠 것이냐 말 것이냐를 놓고 논쟁을 많이 했다.
왜냐하면 탄핵은 국회를 거쳐 헌법재판소까지 가야 하는데 당시 시민들의 요구는 대통령의 즉각 퇴진이었다.
이런 열망을 제도권의 결정에 온전히 맡기는 게 맞느냐, 오히려 탄핵 반대를 외쳐야 한다는 목소리도 있었다. 탄핵
구호는 국회에서 탄핵안이 가결된 뒤에야 공식적으로 무대에 등장했다.”
유 “처음에는 하야를 외치더니 그다음 주부터는 물러나라로 바뀌더라. 하야는 권력자한테 인심을 쓰라는 요청인 데 비해 물러나라는 주권자로서 강한 의지의 표현이다. 그런 면에서 언어 선택을 잘했다.”
박 “집단적 지혜였다.
우리는 스스로를 항쟁의 지도부라고 생각하기보다는 시민들의 요구를 잘 듣고 그것을 무대에서 정확하게 반영해야
하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끊임없이 듣고 끊임없이 토론했다.
운영위 회의에는 100명이 참가해서 6시간씩 했다.
한가지 결정하는 데만 보통 2시간이 걸렸다.”
―결론이 안 나면 다수결로 했나?
박 “아니다. 다수결로 하게 되면 그야말로 패권이 된다.
서로 상대방 얘기를 듣고 또 듣고, 제안하고 또 수정 제안해서 최대의 합의점을 찾아내는 방식으로 회의를 했다.
회의 진행도 매주 단체별로 돌아가면서 의장을 맡았다.”
유 “그런 식으로 토론하고 타협해 합의하는 것은 고대 그리스 민회가 운영되는 원칙이었다.”
그리스 아테네대학교에서 공부(언어학 박사)한 유재원 명예교수는 국내 그리스학의 대가이자 고대 그리스 민주주의
(민중정치)에 대한 전문가이기도 하다.
그는 최근 낸 책 <데모크라티아>에서 데모크라티아(영어 democracy)를 민주주의로 번역한 것은 잘못이라며,
‘데모스’(민중, 인민)와 ‘크라티아’(통치, 지배, 정치)의 의미를 살려 ‘민중정치’로 부를 것을 제안했다.
2016년 12월3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제6차 촛불집회 모습. 이날 주최 쪽 추산으로 전국에서 232만명이 모여 최대 규모를 기록했다.
김태형 기자 xogud555@hani.co.kr
“
경찰뿐 아니라 법원도 민심 읽더라”
―군대 동원 등을 우려하지는 않았나?
박 “민심이 이반한 상태였기에 군이 움직일 거라는 걱정은 하지 않았다.
민심 이반은 심지어 경찰 태도에서도 느꼈다. 사람들은 우리가 갑자기 평화로운 집회를 한 것으로 생각하지만, 우리는 늘 평화로운 집회를 했다.
백남기 농민이 돌아가셨던 민중총궐기 때도 평화롭게 진행했다.
그때 차에 줄 감고 당기는 것이 다였는데 그게 어떻게 폭력집회냐, 기껏해야 기물 파손이지. 이번에 양상이 달랐던 건 공권력이 변했기 때문이다.
1차 집회 때 청계광장에서 집회하고 광화문으로 행진했을 때 신고된 집회의 행진이 아니었다.
막을 수 있었는데도 못 막더라. 그것 보면서 ‘아, 얘네들 막을 생각이 없구나’ 싶더라.”
유 “87년 6월항쟁 때도 군을 투입하지 못했는데 지금은 절대로 군이 나올 수 없다고 봤다.
다만, 혹시 박근혜가 하야하면 어쩌나 걱정은 했다. 하야하면 민중이 만족하고 흩어질 수 있고, 그러면 아무것도
못 바꾸기 때문이다.”
박 “공권력이 시민을 두려워하면서 길을 열어주기 시작하자,
시민들은 더 나왔다.
퇴진행동이 발 빠르게 했던 것은 그것을 제도적으로 문제가 없도록 매주 가처분신청을 했던 점이다.
집회를 경찰이 불허하면 가처분신청 내서 번번이 이겼다.
법원도 민심을 읽었다고 생각한다.
그동안은 한번도 안 내준 것을 법원이 허락했다.
그렇게 되자, 시민들은 저기 가도 위험하지 않고 안전하다고 생각하게 돼 가족 단위로 나오고, 숫자가 늘어나니 공권력은 더 빠른 속도로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됐다.”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은 주요 시설물 100미터 바깥에서는 어디든 집회가 가능하게 규정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청와대 근처에서는 광화문 앞이 마지노선이었다.
촛불집회 때도 1·2차 때는 세종대왕 동상(청와대에서 1.3㎞ 밖)까지만 진출할 수 있었다.
3차 집회(11월12일) 때 사상 처음으로 내자동 로터리(900m 밖)까지의 행진이 허용됐으며, 이후 4차(500m 밖)와 5차
(200m 밖)를 거쳐 마침내 12월3일 6차 집회 때는 청와대 100m 밖인 효자치안센터 앞에서의 집회도 허용됐다.
―3차 집회(11월12일)가 고비였던 것 같다. 그날 경복궁역 앞에서 일부가 경찰 차량에 올라가는 등 약간의 물리적
충돌 조짐이 있었다.
유 “그 현장에 있었는데 고비라고 할 수도 없다.
너무 싱겁게 끝났기 때문이다. 한두명이 경찰차에 올라가자,
거기 있던 시민들이 일제히 ‘내려와’ ‘내려와’를 외쳤고, 상황은 저절로 끝났다.”
박 “5개월 동안의 촛불집회 동안 유일하게 연행자가 발생한 게 그날이었다.
그날 퇴진행동에서는 시민들에게 ‘집회 신고는 12시까지입니다’만 반복해서 알려드렸다. 대신 마지막 시민 한 명이
남을 때까지 우리도 현장에 같이 있기로 했다.
당시 시민들의 기세가 남달라서 집회가 끝난 뒤에 해산하라 마라 할 수가 없었다. 2
008년 광우병 촛불 때의 경험도 크게 작용했다.
광우병 집회 때는 주최 쪽이 경찰한테 혼나는 것보다 시민한테 혼난 일이 더 많았다고 하더라.
‘왜 진격하지 않고, 가두리 집회만 하느냐’고 말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시민들의 반응이 완전히 달랐다.
그날 새벽 5시에 마지막으로 남아 있던 시민 10여명이 경찰에 연행됐다.
아, 이제 매주 새벽 5시에 끝나겠구나고 생각했다.
그런데 연행된 시민들이 경찰서에 간 변호사들에게 ‘아니, 집회가 종료됐으면 끝났다고 얘기를 해줘야지 왜 얘기를
안 해줘서 경찰에 잡히게 만드느냐’고 하더라는 거다.
그제야 2008년과 다르다는 것을 알았다. 다음 집회부터는 욕먹을 각오를 하고 ‘오늘 집회는 여기서 마무리합니다’라고 종료선언을 했다.
그랬더니 군더더기 없이 모두 벌떡 일어서서 쓰레기를 줍고 집으로 돌아가더라. 그렇게 해서 23차까지 갔다.”
―2008년과 촛불 양상은 비슷했는데 그때와 달리 이번에 성공한 것은 무엇 때문이라고 보나?
박 “그때는 정권 초기였고, 이번에는 정권 말기였다는 객관적 조건 차이가 크다고 본다.
물론 주체적인 면에서는 2008년의 경험이 없었으면 지난해 촛불이 성공하기 어려웠을 거라고 본다.
거슬러 올라가면 2002년 효순이 미선이 사건 때의 촛불부터 시작이었다고 할 수 있다.”
유 “2002년 월드컵 때의 길거리 응원이 없었으면 아마 지난해 촛불도 없었을지 모른다.
길거리 응원을 통해 사람들이 광장의 힘을 알았기에 여기까지 왔다고 본다.”
“일제 소등 때 전율 느꼈다”
두 사람 모두 스물세 차례의 집회 가운데 6차 집회(12월3일)가 절정이었다고 기억했다.
6차 집회를 앞두고 정국은 요동쳤다. 코너에 몰린 박근혜 당시 대통령이 일종의 승부수를 던졌기 때문이다.
민주당과 국민의당, 정의당 등 당시 야3당이 대통령 탄핵소추안을 발의하기로 하는 등 탄핵 쪽으로 무게추가 기울자,
그는 11월29일 “대통령직 임기 단축을 포함한 진퇴 문제를 국회의 결정에 맡기겠다”는 내용의 제3차 대국민 담화를
발표했다.
야3당은 이 제안에 대체로 부정적이었지만, 탄핵안 가결을 위해서는 꼭 필요한 새누리당의 비상시국회의 소속 의원들은 ‘2017년 4월까지 사퇴 시한을 명시할 것’을 청와대에 요구하는 등 흔들렸다.
박 “박근혜 담화로 새누리당의 비박계나 야당이 흔들흔들했는데 그날 광화문에 160여만명 등 전국에서 가장 많은 인파인 232만명이 모였다.
사람들이 몰려드는데 어디로 가려고 이러나 싶어 공포를 느낄 지경이었다.
나만 그런 게 아니라 정치권도 공포를 느꼈다. 결국 9일 탄핵안이 국회에서 압도적으로 통과됐다.
3일 집회는 대의제 민주주의가 가진 한계를 직접민주주의로 돌파한 일대 사건의 날이었다고 본다.
그날의 판세를 헌법재판소도 뒤집지 못할 것이라고 봤다.”
유 “그즈음 국민의당 박지원씨가 타협적인 발언을 했다.
그래서 나도 정치인들이 장난치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3일 집회에 다 나가자고 주변 사람들에게 전화를 많이 했다.
그날은 그야말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친구들과 만나기로 한 장소에 갈 수가 없어서 포기할 정도였다. 일본에서 온 지인이 그 장면을 보고는 문화 충격을
받더라.”
―촛불 물결이나 소등 장면 등도 장관이었다. 누구 아이디어였나?
박 “파도타기는 워낙 촛불의 상징적인 의미여서 처음부터 했다.
이번에 처음 등장한 것은 소등이었다. 집회에 오는 이뿐 아니라 참가하지 못한 사람도 참가할 수 있는 퍼포먼스가
필요하다고 보고 소등 아이디어를 내가 먼저 냈다고 생각했는데, 얘기를 해 보니 그 아이디어를 먼저 냈다는 사람들이 여럿이더라.
하하. 아마 비슷한 생각들을 동시에 했던 것 같다.
무대 위에서 소등 카운트다운에 들어간다면서 ‘3, 2, 1, 소등’ 하면 일순간에 쫙 어두워지는데 온몸에 전율이 오더라.”
유 “정말 그 장면은 장엄하고 감동이었다. 87년 항쟁 당시 약정된 시간에 모든 차들이 빵빵빵 하면서 클랙슨 소리를
냈을 때 ‘아, 전두환이 끝났구나’ 하는 느낌을 받았는데 이번 소등은 그때보다 훨씬 강렬했다.
광화문 주변의 빌딩들도 참여하지 않았나. 실수라고 핑계댔지만, 미국 대사관도 불을 꺼줬다.”
―사회자로서 특별히 신경 쓴 것은 뭔가?
박 “윤희숙씨는 또랑또랑한 말투였고, 김덕진씨는 유려한 진행이 특징이었다.
거기에 비해 나에 대해서는 사람들이 굉장히 독특하다는 얘기를 많이 하더라.
나는 사회자가 할 일은 참석한 분들의 얘기를 받아서 그날의 분노와 감정을 잘 조율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신경 쓴 것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까’ ‘동지 여러분’ 등 선동적인 이른바 운동권 사투리를 안 쓰려고 노력했다. 대신 평이한 말을 사용하려고 애썼는데 그때 자주 했던 말이 ‘괜찮습니까’, ‘괜찮으세요’였다. 그 때문에 내 별명이
‘괜찮으세요 아줌마’였다. 하하.”
―2008년에는 중앙무대가 없었던 데 비해 이번에는 중앙무대를 중심으로 행사가 이뤄졌다. 주최자로서 어깨가
더 무거웠을 것 같다.
박 “이번 일은 시민사회운동에 대한 어떤 검증대라는 생각도 들었다.
시민사회운동이 너무 나서지도, 너무 뒤처지지도 않고 시민들보다 반발 앞에서 먼저 만드는 역할을 보여줘야 한다고
봤다.
우리가 과도하지는 않은지, 뒤처지지는 않는지, 잘못하는 것은 없는지 해서 잠을 잘 못 잤다.
그렇게 몇달을 보냈더니 민주주의 훈련을 나 스스로 많이 받았다는 생각이 들더라.”
―제일 감동적인 장면이 있었다면?
박 “너무 많았는데 그중 하나는 눈이 와서 그랬는지 바닥에 얼음이 잔뜩 꼈던 날이었다.
보통 무대팀은 아침 일찍부터 일하는데 한 시민이 앉아서 얼음을 긁고 있었다. 그래서 무대팀이 다가가서 ‘이래 봐야 소용없다.
이렇게 넓은데 어떻게 그걸 다 하겠느냐’고 말렸더니 그분이 말하길 ‘이렇게 하면 한 사람만이라도 더 앉을 수 있지
않겠느냐’고 했다.
그래서 우리 무대팀도 모두 따라서 바닥을 긁어야 했다. 한 사람이라도 더 앉을 수 있도록 시민이 다른 시민을 배려하는 모습에 정말로 감동했다.”
2017년 3월10일 오전 서울시 재동 헌법재판소 대심판정에서 이정미 헌재소장 권한대행이 “피청구인 대통령 박근혜를 파면한다”는 주문을 읽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제도 개혁 정치권에 맡겨선 안 돼”
―촛불혁명이 진행형이라면 남은 과제는 뭔가?
유 “혁명이 만족할 만한 수준까지 이뤄지려면 국민이 바라는 체제가 만들어져야 한다. 이런 면에서는 사법부 개혁이
가장 중요하다.
제왕적 권력을 막으려면 완전한 사법 독립이 이뤄져야 한다.
대법원장과 검찰총장을 대통령이 임명하지 말고, 판사와 검사들이 각각 뽑고, 배심원 제도도 도입해야 한다.
우리 국민은 불의에 저항해 무너뜨리는 데까지는 열심인데 그다음의 제도 개혁은 정치인에게 맡기는 경향이 있다.
그래선 안 된다.”
박 “맞다. 불의한 권력을 끌어내려서 정권 교체가 됐다면 그 정권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끊임없이 주목해야 한다.
투표하는 권리에서 그치면 안 된다. 한국 사회에서 대통령의 역할이 크다 보니까 정권 교체도 작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제도 변화가 뒤따르지 않으면 지금 보듯이 정치권 적폐가 다시 발목을 잡게 된다.
저는 개혁의 우선순위는 정치개혁이라고 본다.
연동형 비례대표제나 18세 선거권 같은 구체적 성과를 따내지 못하면 앞으로도 정치에 발목 잡히면서 촛불의 성과들이 유야무야될지도 모른다.”
―사법개혁이나 정치개혁은 결국 정치를 통해서 이룰 수 있다. 탄핵 이후 정치를 보면 광장의 요구가 국회에서 대부분 비토되고 있는 상황이다.
시민들이 무력감을 느끼는 지점이기도 하다.
유 “지난해 총선은 공천 때부터 매우 왜곡됐다.
촛불을 통해 이쪽 행정권력은 바로잡았는데 저쪽 입법 쪽은 바로잡지 않아서 지금 절름발이 신세다.
소환제라도 있어야 하는데 그것도 없으니 답답하다. 국회로 촛불을 들고 가야 한다는 얘기가 맞는 것 같다.
국회의원들 지역 사무실을 찾아가서 국민의 요구를 직접 전달해야 한다.”
박 “지금대로라면 정말 국회 앞에서 촛불이라도 들어야 할 것 같다. 물론 대규모 집회만이 정답은 아니다.
광장의 열기를 이제는 내 삶으로 가져가는 게 중요하다.
세상 바꾸려는 생각을 우리가 가진다면 반상회도 나가고, 학교 운영위도 나가고, 이렇게 다양한 삶의 공간에 나가서
거기서 정말 정치하는 사람들이 무시 못하는 목소리를 길러내야 한다.
우리 대통령이 잘하겠지 하면서 다시 한번 대의하는 방식으로 가서는 안 된다.
정치적으로 각성된 시민들이 끊임없이 일상의 광장을 펼쳐야 민주정부도 힘을 받을 수 있고, 대통령도 잘할 수 있다.”
인터뷰에 앞서 두 사람은 광화문광장 앞에 섰다. 길 건너 세종문화회관 계단에서는 국가정보원의 불법사찰 공개와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는 집회(내놔라 시민행동), 인근 세종로공원에서는 성노동의 비범죄화 공약 이행을 촉구하는
성노동자들의 집회가 한창이었다. 광장에는 산책하는 시민, 청와대 쪽 북악산을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찍는 교복
입은 학생들로 붐볐다.
“그동안 힘들고 외로울 때도 있었는데 촛불광장이 답을 줬다. 기다리면 사람들이 와서 승리를 준다는 사실, 즉 민중의 힘을 책이 아니라 광장에서 봤다. 사회운동을 계속할 수 있는 힘을 얻었다.”(박진)
“그리스 사람들도 촛불혁명의 힘이 어디서 왔느냐고 묻곤 한다. 나는 촛불집회에 와 봐야 안다고 대답한다.
그동안 겪고 배운 것을 책으로 써서 민중정치 발전에 기여하려고 한다.”(유재원)
광화문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을 때 두 사람의 눈가에는 저절로 웃음이 번졌다.
김종철 선임기자 phillkim@hani.co.kr
[촛불집회 1주년]여의도 '촛불파티'
엄마부대 회원들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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