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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과 시사

이승만·DJ 사이 누운 그녀..왕 낳고 왕 쉰다, 명당 중 최고명당

 

 

조선시대 수렴청정을 하는 대왕대비가 여성이었기 때문에 그의 친정 가문을 중심으로
외척이 국정을 장악하고 세도정치로 발전했다는 비난을 받고 있다. [사진 pixabay]
그림=안충기,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 공작봉 아래 470여 년을 지킨 창빈 안씨 묘_묘비석_상석과 장명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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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 넘어 공작봉 아래 창빈 안씨_선조의 할머니 신도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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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작봉 아래 창빈 안씨 묘_원찰 호국지장사의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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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DJ 사이 누운 그녀..왕 낳고 왕 쉰다, 명당 중 최고명당

 

[한국의 명당]

심재학당과 함께 하는 풍수답사 (1)
"장흥 묘지는 풍수상 좋은 땅이 아니오"

그녀가 죽은지 1년 만에 이장을 한 뒤
손자부터 줄줄이 임금에 오르는데
대통령들 묘보다 명당인 이곳은 ..

서울 동작구에 있는 국립서울현충원. 보통 시민들에겐 ‘동작동 국립묘지’라는 표현으로 더 익숙한 곳이다.
나라와 민족을 위해 목숨을 바친 국가유공자들이 잠들어 있다.
1955년 7월 국군묘지로 조성되었다가, 1965년 국립묘지로 승격되어 군인이 아닌 유공자들도 안장 자격을 얻게 되었다.
그래서 이승만 박정희 김영삼 김대중 등 대통령들과 각계 저명인사들도 묻혀 있다.

현충원은 그런 남다른 의미를 가진 만큼 국가에 충성을 약속하는 정치인들이 선거 당선 등 특별한 날에 찾아가 마음을 다잡거나 정치적인 메시지를 알리기도 한다.
벚꽃 명소로도 유명해 요즘 같은 봄날엔 참배객뿐 아니라 상춘객들의 발길도 끊이지 않는다.









동작대교 남단 노을카페에서 본 현충원 전경. 왼쪽 멀리 관악산이 보인다.
관악산에서 이어지는 산줄기가 한강과 만나는 곳에 있는 현충원은 인근 동작대교 위에서 보면 그 전경이 한 폭의 그림같이 눈에 들어온다.

안으로 들어가면 순국 영령들의 올곧음을 상징하듯 자로 잰 듯 반듯하게 전개된 끝도 없는 묘지 행렬이 보는 이의 마음을 숙연하게 만든다.
셀 수 없이 많은 묘지 중 ‘국가유공자’라는 원래 취지와는 전혀 다른 묘지가 하나 있다.

일반인들에게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지만 조선 시대부터 있었던 오래된 묘지다.
바로 창빈 안씨(昌嬪 安氏) 묘. 무슨 사연이 있을까.







동작동 현충원에서 최고 명당으로 알려진 창빈 안씨 묘.

 

 

 

경내 한가운데쯤 이승만 전 대통령과 김대중 전 대통령 묘역 사이에 있는 주차장에 ‘창빈 안씨 묘역’이란 안내표지가 있다.
여기서 30m쯤 올라가면 크지도 작지도 않은 무덤 하나가 단아하게 자리 잡고 있다.
묘지로 가는 오솔길에 서 있는 신도비(神道碑)는 1550년경에 이 묘가 조성됐음을 알려준다.

현충원보다 400년이 더 됐다는 얘기다.
창빈 안씨가 사실상 이 구역의 본토박이 터줏대감임을 말해주는 셈이다.
창빈 안씨는 누구일까. 창빈은 조선 선조 임금의 할머니다. 연산군 5년(1499년)에 태어나 아홉 살 때인 중종 2년(1507년) 궁녀로 뽑혔다. 스무 살 때 중종의 총애를 입어 영양군, 덕흥군, 정신 옹주 등 2남 1녀를 낳았고, 1549년 50세의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당시는 정치적으로 매우 혼란하던 시기였다.

중종이 죽고(1544년) 다음 임금인 인종이 즉위 1년도 안 된 31세의 나이에 죽자(1545년), 인종의 이복동생인 명종이 왕위에 오르는데 그도 34세에 대를 이을 자식이 없이 죽는다(1567년). 누가 왕이 될지 모르는 어수선한 정국에서 명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사람(선조)이 바로 창빈 안씨가 낳은 덕흥군의 셋째 아들 하성군이다.

창빈 안씨의 입장에서는 손자가 임금이 된 것이다. 후궁의 손자가 임금이 되기는 조선 건국 이래 처음이었다.
이후 임금은 모두 창빈의 후손이다. 어떻게 보면 이때부터의 조선은 ‘창빈의 조선’인 셈이다.
흥미로운 것은 풍수적으로 봤을 때 창빈 안씨의 묘소가 현충원 안에서 가장 좋다는, 이른바 ‘혈(穴) 자리’에 해당하는, 그야말로 명당 중의 명당이라는 점이다.

창빈 묘에 얽힌 풍수적인 스토리는 이렇다. 1549년 10월 창빈이 죽자 아들 덕흥군은 경기도 장흥에 시신을 모셨다.
그런데 그곳이 풍수상 좋지 않다는 말을 듣고 1년 만에 이장을 결심한다.
지금도 이장이 쉽지 않지만, 당시엔 이장한다는 것은 새로 장례를 치르는 것과 같았다.
많은 돈과 시간이 들어가는 까닭에 왕가에서도 결코 쉬운 결정이 아니었을 것이다.
덕흥군의 속마음이 어땠는지는 모르지만 이장을 결심한 그는 실력 있는 풍수 지관들을 동원해서 명당자리를 찾았고, 그곳이 바로 지금 창빈 묘역이다.
이장한 지 3년 만인 1552년 하성군이 태어났다.
그리고 1567년에 하성군은 선조 임금이 되었다.
하성군이 임금이 되자 창빈 묘역은 그야말로 ‘임금이 난 명당 터’가 됐다.
‘할머니 묘의 발복으로 임금이 됐다’는 소문은 삽시간에 퍼졌다.
그렇지 않아도 선비들 사이에서 유행하던 풍수설에 기름을 끼얹었다.
조선의 선비들이 낮에는 유교, 밤에는 풍수를 공부하고 토론했다는 말이 헛말이 아니었던 것 같다.






겸재 정선이 그린〈동작진〉. 동작대교 북쪽에서 지금의 현충원 쪽을 보고 그렸다.

 

당시 사회 분위기가 이러한데, 감각 있는 화가들의 눈에 이런 절묘한 스토리가 그냥 지나쳤을 리 없다.
진경산수화의 대가인 겸재 정선이 18세기 중엽에 그린 '동작진(銅雀津)'은 바로 지금의 현충원 일대가 배경이다.
좌우의 산이 마을을 포근하게 감싸고, 그 앞으로 한강이 흐른다.

멀리 보이는 관악산이 든든하다.
명당의 조건을 두루 갖춘 곳으로, 당시 선비들의 관심이 집중되었던 터임을 보여준다.
풍수적으로 설명하면 관악산(祖山)의 기운을 이어받은 서달산(主山)이 좌우로 두 팔을 벌려 현충원을 감싸면서 흑석동 쪽의 산이 좌청룡(左靑龍), 사당동 쪽이 우백호(右白虎)가 된다.
서달산 능선 하나가 박정희 묘역을 살짝 비켜 내려오다가 다시 고개를 쳐들어 봉우리 하나를 만든다. 장군봉이다.

장군봉은 풍수상 현무(玄武)정이라 부른다.
주산의 강한 기운을 잠시 머물게 하였다가 다시 조금씩 흘려 보내주는 역할을 한다.
그 기운은 장군봉에서 다시 중심 산줄기(來龍)로 내려와 창빈 묘역에서 멈춘다.
땅 기운이 오롯이 뭉친 곳인데 이런 자리를 ‘혈(穴)’이라고 부른다.






능선의 오른쪽 산이 서달산. 왼쪽 산 아래가 박정희 대통령 묘소.


 

또한 기운이 좋은 터는 양쪽에서 물길이 흐르다 혈 자리 앞에서 하나로 합쳐(水口) 흘러나간다.
지금은 도로포장 등으로 금세 눈에 띄지는 않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창빈 묘역 양쪽으로 물길이 흐르다 묘역 앞에서 합쳐져 한강으로 흘러나가는 모양새를 뚜렷하게 확인할 수 있다.

기운의 흐름이 조산(관악산) → 주산(서달산) → 현무정(장군봉) → 내룡(국가유공자 묘역) → 혈(창빈 묘) → 명당(일반 사병 묘역) → 수구(현충원 정문) → 객수(한강)로 이어진다는 뜻이다.
풍수에서는 ‘산은 인물을 키우고, 물은 재물을 창출한다(山主人 水主財)’고 얘기한다.

풍수의 핵심 화두 중 하나다.
그런 측면에서도 창빈 묘역은 좋은 산(인물)과 생기 넘치는 물(재물)을 다 품어 안고 있는 명당인 셈이다.

앞에서도 설명했지만, 창빈 묘역 왼쪽 100m 지점에 이승만 묘역이 있고, 오른쪽 뒤편 10m 거리에는 김대중 묘역이 있다.

그 뒤로는 정일형·이태영 부부, 시인 이은상, 광복군 출신 이범석, 애국가 작곡자 안익태, 한글 학자 주시경, 민족지도자 조만식 등 쟁쟁한 인물들이 안장된 국가유공자 묘역과 장군묘역이 이어지고, 장군봉을 내려다보는 자리에 박정희 묘역이 있다.
김영삼 묘역도 멀지 않은 곳에 있다.







창빈 안씨 묘에서 앞을 볼 때 왼쪽에 자리잡고 있는 이승만 대통령 묘.







창빈 안씨 묘에서 앞을 볼 때 오른쪽에 자리잡은 김대중 대통령 묘.

 

 

 

 

 

 

 

창빈 안씨 묘 뒤편에 자리잡은 박정희 대통령 묘.








창빈 안씨 묘역에서 앞을 볼 때 왼쪽 건너편 산자락에 있는 김영삼 대통령 묘.

 

 

 

 

풍수적 관점에서 보면 역대 대통령들과 국가 유공자들이 혈 자리에 있는 창빈 안씨를 호위하고 있는 형국이다.
왕을 낳고, 왕(대통령)들이 쉬는 곳. 바로 현충원이다.
심재학당은 풍수학자 심재(心齋) 김두규 교수와 함께 영역이 다른 전문가들이 모여 공부한다.
고서 강독과 답사를 하며 풍수의 현대적 의미를 찾는다.


글=심재학당, 그림·사진=안충기 기자·화가












▲ 한강 넘어 동작동 국립서울현충원 전경



 




대대로 王 낸 창빈안씨 묘역이 현충원 되기까지

 

(문화경제 = 이한성 옛길 답사가) 호국지장사 경내를 나서서 우측 언덕길로 잠시 오르면 철 펜스 안쪽에 바위들이 나타난다.
그 바위 가운데에서 크기 10여cm쯤의 사각형 홈을 찾을 수 있다.
무심히 보면 그냥 바위를 파낸 홈일 뿐이다.
그러나 그 홈은 마애사리공(磨崖舍利孔)이다.

흔히 마애부도(浮圖, 浮屠)라고 하는데 사리를 넣는 구멍인 것이다.
요즈음 말로 하면 유골함인 셈인데 조선 중기 이후가 되면 절은 매우 가난해지고 신역도 고되어졌다.
시주(施主)가 줄어드니 절 살림 하기 힘들어진 것이다.

기껏해야 정성을 비는 할머니들이 주신도가 되었으며 그나마 형편이 좀 나은 절은 궁궐의 궁녀, 벼슬아치 집안의 아녀자들이 신도가 되어 시주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모시던 스승이 입적을 해도 변변한 부도 하나 쓰기가 어려운 형편이 되어 갔다.
지난 졸고에서 언급했듯이 겸재의 공암층탑에서 보이는 부도와 같은 부도는 경제 사정 탓에 세우기 어렵게 되어 간 것이다,

어느 날 스승이 입적을 하면 할 수 있는 방안이 절 주위 우뚝 선 바위에 구멍을 뚫고 그 곳에다가 다비(화장)한 후 수습한 사리를 봉안하는 게 고작이었다.

서울 경기 일원에는 이런 마애사리공이 수십 기 발견된다.
온전히 남아 있는 마애사리공은 없고 거의가 구멍을 막았던 덮개가 벗겨져 그 안에 있던 사리함도, 사리도 흔적이 없다.
모르긴 몰라도 사리를 담았을 함이나 혹시라도 함께 넣었을 부장물들이 탐나 누군가의 손에 의해 파손되었으리라.






 

호국지장사 사리공. 사진 = 이한성 옛길답사가

 

이제 창빈 안씨(昌嬪 安氏) 묘역을 찾아간다.
드라마나 소설의 주인공이 되어 보지 못한 분이라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낯선 분이다.


원래 이곳 현충원 일원은 창빈 안씨의 묘역으로 전주 이씨 소유의 땅이었다 한다.
한국전쟁에 많은 국군장병이 목숨을 잃자 이들을 뫼실 묘역이 필요했다.
여러 곳을 검토한 후 이 지역으로 낙점했는데 양녕대군의 후손인 이승만 대통령의 노력으로 이곳에 국군묘지를 설치할 수 있었다 한다.





 

1950년대 초 국군묘지 공사 당시의 자료사진. 
국립서울현충원은 원래 창빈 안씨 묘역





그런데 창빈 묘역으로 들어온 국군묘지는 이제는 주인과 객이 완전히 전도되었다.
현충원에 와서도 창빈이 누구인지, 그런 분 묘가 있는지, 알고 왔다 해도 그 분묘가 어디 있는지 좀처럼 알기 어렵다.
창빈은 누구일까?









 

국립서울현충원 안의 창빈안씨 묘역. 사진 = 이한성 옛길답사가

 

 

 

 

결론부터 말하면 창빈 안씨(1499~1549년)는 선조(宣祖)의 할머니다.
금천에서 태어나 10살도 안 된 나이에 1507년(중종 2)에 궁인으로 들어가 자순대비(중종의 계비인 정현왕후)를 모시게 되었다 한다.


미모는 수수했는데 행동이 정숙하고 온전하여 자순대비 윤 씨의 눈에 들었고 대비의 보살핌으로 스무 살에 중종의 승은을 입어 후궁이 되었다 한다.
그 뒤 상궁, 숙원(淑媛), 숙용(淑容)까지 그 지위가 올랐다.

1544년 중종이 57세로 승하하자, 3년 복제를 마치고 전례에 따라 인수궁(仁壽宮)에 물러나 거처하기를 청했으나 품행이 단정한 데다 문정왕후와도 사이가 좋아 궐에서 머물게 되었다 한다.
우연히 1549년(명종 4) 친정집에 갔다가 갑자기 51세로 사망하여 양주 장흥리(長興里)에 묻혔다.


중중과는 슬하에 3남 1녀를 두었으며, 영양군, 정신옹주, 그리고 선조대왕의 아버지가 되는 덕흥군을 낳았다.
둘째 아들은 일찍 죽었다.







국립서울현충원 안의 창빈안씨 묘역. 사진 = 이한성 옛길답사가


 

안 씨가 죽은 후에도 문정왕후는 그녀의 자식들을 돌보아 주었고 후사 없이 명종이 졸하자 문종의 비는 덕흥군의 셋째 아들 하성군을 등극시켰다.
이 사람이 선조다.

선조 이후의 모든 조선 국왕은 창빈 안씨의 DNA를 물려받았으니 창빈 안씨는 사후에 큰 복을 누리게 된 것이다.
선조는 재위 10년째인 1577년 할머니 소용 안씨를 창빈으로 추봉하였다.

한편 아들 덕흥군은 풍수가들의 말을 따라 어머니 안 씨의 묘를 장흥에서 현재의 위치로 이장을 하였던 것인데, 묘 자리 덕이었는지 왕위를 이을 위치에 있지도 않은 아들 하성군(선조)이 등극하였기에 풍수하는 이들은 묘 자리 덕이라고 한
마디씩 하고 있다.


창빈의 묘 자리는 겸재의 ‘동작진’ 그림에 표시해 보았듯이 관악산에서부터 높고 낮은 산줄기가 흘러와 서달산에서 한 번 솟아오른 후 그 줄기(來龍)가 창빈 묘 쪽으로 내려오고 있다.
또 서달산은 좌우로 팔을 벌려 국립현충원 묘역을 감싸고 있는데 이른바 좌청룡(左靑龍), 우백호(右白虎)가 분명하고 앞으로는 한강의 흐른다.

눈앞에 보이는 나지막한 산인 안산(案山)은 달리 없다. 대부분 풍수사들은 명당(明堂)이라 하고 어떤 이들은 좌청룡, 우백호가 팔을 오므리지 못했고 앞에 안산(案山)도 없으니 명당이 못된다고도 한다.


자손대대로 왕 됐다지만 국민에 좋은 왕이었나

풍수를 모르는 필자의 생각으로는 창빈 입장에서 볼 때는 자손이 대대로 조선의 왕이 되었으니 길지(吉地)가 맞을 것 같고, 일반 민초의 입장에서 보면 백성들 배 주리지 않고 삶이 곤곤하지 않게 해주는 임금이 많이 나왔어야 하는데 별로 그렇지 못한 것을 보면 명당은 못되는 것 같다.

장군, 유공자 묘역 아래에 있는 창빈 묘를 찾아간다. 창빈과 그 자손들 입장에서 보면 안타까운 것이, 본인의 묘역을 내 주었더니 내룡(來龍)이 흘러내려 오는 산줄기에 장군 묘역, 유공자 묘역이 자리 잡았고 어느 대통령 묘도 그 맥(脈)을 범하였으니 내 집을 빼앗긴 기분이 들 것도 같다.








창빈안씨 신도비. 사진 = 이한성 옛길답사가

 

 

 

묘는 단아하다.
아래 길 옆에는 신도비가 세워져 있다.
묘비석이 없어서 1683년(숙종 9) 이조판서 신정이 신도비문을 짓고, 판돈녕부사 이정영이 해서로 쓴 뒤, 비석의 머리글자 전자(篆字)는 오위도총부 도총관 이항이 써서 묘소 근처에 세웠다.

신도비는 1982년 묘소와 함께 서울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과천읍지에는 창빈 묘가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 “(창빈 묘는) 군 북 25리 동작리에 있는데 중종대왕 빈 안씨 묘이다.
신도비가 있다(在郡北二十五里銅雀里 中宗大王嬪安氏 有神道碑).”


실록 기사를 보면 영조와 정조가 할머니 창빈 묘 관리와 제사에 신경 쓴 모습이 보인다.
일례를 하나 보자. 아버지 묘인 현륭원 원행길에 다녀온 정조는 배다리(舟橋)에서 창빈 묘역을 보고는 묘에 제사드리도록 조처를 취한다.
정조 23년(1799) 8월 기사는 다음과 같다.


전교하기를 ‘오늘 새벽 주교(舟矯)를 건너올 때 송추(松楸)가 눈 안에 들어왔다.
몇 해 전에 묘소에 제사를 지내드린 적이 있는데 금년은 그분의 환갑이 다시 돌아온 해이므로 강타(江沱)와 규목(樛木)의 칭송이 생각난다.

자손에게 복록을 길이 누리게 하였고 나라에 끼치신 공이 크니, 내가 어찌 감히 목묘(穆廟)의 마음을 내 마음으로 삼아 그 공을 기리지 않을 수 있겠는가. 승지를 보내 이 제문을 가지고 가서 창빈 묘에 제사를 지내드릴 것이며, 대원군(大院君: 선조의 부친)의 봉사손이나 직계손 중에서 이름을 알아본 뒤에 현재의 목릉 참봉은 임시로 군직에 붙여두고 그 후임으로 오늘 인사행정에 의망하여 그로 하여금 내일 제례에 참가하고 그대로 재소(齋所)로 들어가 숙직하게 하라’.


敎曰: “曉過舟橋, 松楸入眺. 年前雖致告侑, 而今年卽周甲, 又重回之歲也, 追念(江沱) (樛木)之頌. 福履永綬, 功大邦家, 予小子敢不以穆廟之心爲心, 以敉寧前烈乎? 遣承宣, 奉此祭文, 行祭于昌嬪墓所, 而大院君奉祀直泒中問名, 穆陵參奉權付軍職, 其代今日政擬入, 使之明日往參祭禮後, 仍爲入直齋所.

동작 지역에 있던 8개 정자 살펴보니

이제 대통령 묘역, 유공자 묘역을 지나 정문을 향하여 내려온다.
조그만 묘비 하나로 자신들이 나라를 위해 산 모든 것을 보여주는 사병 묘역을 지난다.
월남전에서 우뚝 모범을 보였다는 삼성(三星)의 채명신 장군 묘도 이 가운데 자리 잡았다. 죽어서도 사병과 함께 하겠다는 고인의 뜻이 있었다 한다.





겸재 작 ‘동작진’.  


한편 겸재의 동작진도를 보면 이들 묘역이 자리 잡은 곳에 기와집여러 채가 보인다.
둘레에는 축축 늘어진 버드나무들이 울타리처럼 자리 잡았다.
도대체 과천 읍내도 아닌 호현(狐峴, 여시고개, 남태령) 넘어 강가 동작진에 무슨 집들일까?

추측할 수 있는 근거가 과천군읍지에 실려 있다. 누정(樓亭) 조에 따르면 그곳에는 많은 정자가 있었다는 것이다.
망신루(望辰樓), 망북루(望北樓), 망원정(望遠亭), 창회정(蒼檜亭), 명월정(明月정), 월파정(月波亭), 추원정(追遠亭), 효사정(孝思亭) 등. 겸재의 그림에서 정자들을 이름별로 구분할 수 없는 아쉬움은 남지만 동작, 흑석에 있었던 정자들을 살펴보려 한다.


1. 망신루는 판서 윤계의 강변 정자라 한다(判書尹堦江榭). 아마도 북극성(北辰)을 바라보는 강가 정자 같다.
두보의 ‘높은 누대에서 북극성을 바라보네(危樓望北辰)’라는 시구(詩句)에서 힌트를 얻었을 것이다.


2. 망북루(望北樓)는 장악원 첨정(僉正) 박세교(朴世橋)의 강변 정자(江榭)다.
여기에서 북(北)은 그냥 북쪽이 아니라 임금이 계신 한양을 가리키는 것이리라.


3. 망원정(望遠亭)은 망원동에 있는 그 정자가 아니라 동작강가(銅雀江頭)에 있었던 정자라는데 경평군(慶平君)의 정자라 한다. 경평군은 광해군 시대의 이륵(李玏)과 철종 시대의 이호가 있었다.
아마도 이 정자의 주인은 이륵일 것 같다.
그는 왕족으로서 심한 갑질을 했던 사람이다.


4. 창회루(蒼檜樓)는 동작진 강가에 있던 연평부원군(延平府院君) 이귀(李貴)의 정자다.
매산집(제2권)에는 ‘동강의 배 안에서 쌍회정을 바라보다(桐江舟中望雙檜亭)’라는 시에서 창회정을 말하고 있다.
은일할 만한 장소였던 것 같다.
지금 전철이 다니고 올림픽대로로 차가 쌩쌩 달리는 모습으로는 감히 상상할 수도 없던 곳이었던 모양이다.






하늘에서 내려본 동작-노량 일대. 자료사진

 

 

강물 도도히 흐르고 또 흐르는데 江漢滔滔流復流
동작 나루 서쪽 강가 외로운 배에 오른다 桐津西畔上孤舟
구름은 푸른 벽에 갇혀 비 더욱 머물고 雲籠翠壁深留雨
햇볕은 단풍을 비추니 가을이 깊어가네 日照丹楓爛欲秋

물고기와 용은 출몰을 다투지 않고 不與魚龍爭出沒
저 물오리와 해오라기가 제 알아 부침하네 任他鳧鷺自沉浮
어느 날 나 참된 은일 한다면 異時容我成眞隱
창회정 백척루에서지. 蒼檜亭頭百尺樓


창회정(蒼檜亭)은 이귀 이전부터 동작강가에 있었던 것 같다.
여기서는 銅을 桐으로 쓰고 있다.
이유는 알 수 없는데 특별히 의미를 구분하지 않을 때는 때때로 그러한 예가 있는 것으로 볼 때 같은 음을 살려 쓴 것으로 보인
다. 조선 초에 수양대군(首陽大君)이 이곳에서 한명회(韓明澮), 권람(權擥) 등과 대사를 논의하였다고도 한다.


또 이곳 창회정 지역에서 바라보는 경관의 아름다움을 조선 후기 문신 남용익(南龍翼)은 호곡집(壺谷集)에 창회정팔경(蒼檜亭八景) 8편의 오언절구(五言絶句)로 남기고 있다.
제목만이라도 살펴본다.


* 一帶淸江 한 구비 푸른 강
* 十里明沙 십리 밝은 모래 (아마도 十里鳴沙는 아니었는지?)
* 三角朝雲 삼각산 아침 구름
* 終南夕烽 남산의 저녁봉화

* 華藏曉鍾 화장사 저녁 종소리
* 龍山夜燈 용산의 밤 등불
* 棋島芳草 기도의 방초
* 漢江歸帆 한강 돌아오는 돛배

5. 명월정(明月亭)은 판서 정두경(鄭斗卿)의 정자로 과천군 읍지에 북쪽 20리 되는 이 지역에 있었다고 기록돼 있다.
6. 월파정(月波亭)도 동작 강가에 있던 판서 장선징(張善澂)의 정자였다.

다산시문집에는 이 정자 앞 강에서 친구들과 뱃놀이 하던 다산의 칠언절구 4수가 전해진다.
줄여서 두 수 읽고 가자. 제목은 ‘여러 벗과 함께 배를 타고 월파정에 이르러 달밤 뱃놀이 하다(同諸友乘舟至月波亭汎月)’.


월파정 이 아래에 조각배를 갖다 대니 月波亭下扁舟泊
마을 터에 연기 일고 해는 금방 넘어갔네 墟里煙生日初落
누각 올라 술 마시고 내려와서 노래하며 登樓飮酒下樓歌
조수 머리 큰 고기 뛰는 것도 구경하네 時見潮頭大魚躍

부평초에 바람 일어 잔잔한 물결 일으켜 白蘋風起波微揚
수면이 번쩍번쩍 황금 비늘 빛이로세 水面閃閃金鱗光
어느새 하늘 끝에 옥바퀴가 솟아올라 俄看天際玉輪涌
맑고 깊은 푸른 수정 강물 속에 굴러가네 玻瓈碾碧澄泓長
(기존 번역 전재)

7. 추원정(追遠亭)도 여기에 있었는데 재상 노사신의 정자라 한다.






‘서빙고망도성’도 시각에서 바라본 한양. 사진 = 이한성 옛길답사가

 

 

 

현충원을 돌아 나오며 한양도성을 바라본다. 겸재의 서빙고망도성도는 전호(前號)에서 언급했듯이 한양을 바라보며 그린 것인데, 동작진 앞 한강에 배가 떠 있는 것으로 보아 제목과는 달리 서빙고에서 도성을 본 것이 아니라 현재 현충원쯤 되는 곳에서 그린 그림이다.
도봉산, 북한산, 인왕산, 남산과 한양도성의 성 길도 또렷하다.
남대문도 선명하게 사실적으로 그린 그림이다.

너무 사실적이다 보니 신묘년풍악도첩쯤으로 돌아간 것 같다.
도봉산의 모습은 손자 정황의 양주송추도(楊洲松楸圖)와 흡사하다.
이 구도로 사진을 찍어 보았다.
이촌동과 용산 건물들에 가려 비교해 보기에는 아쉬움이 남는다.






겸재 작 ‘서빙고망도성’. 

 

 

이제 현충원을 나와 동작천철역에서 반포천을 통해 한강으로 나온다.
동작구에서는 걷는 이들을 위해 동작충효길을 이어놓았는데 동작역 ~ 노들역 ~ 노량진역을 잇는 코스가 동작충효길 3코스다.




효사정. 사진 = 이한성 옛길답사가

 

 

 

강가 길을 통해 노량진 방향으로 간다. 잠시 후 흑석동에 접어들면 효사정으로 오르는 나무 데크 계단에 닫는다.
동작, 흑석 지역에 아름다웠을 정자 중 유일하게 복원해 놓은 정자다. 오르는 순간 눈과 가슴이 탁 트인다.


8. 효사정(孝思亭)은 “세종 때 한성부윤과 우의정을 지낸 공숙공(恭肅公) 노한(盧閈 1376~1443)의 별서(別墅)였다.
노한은 모친이 돌아가시자 3년간 시묘를 했던 자리(지금의 노량진 한강변)에 정자를 짓고 때때로 올라가 모친을 그리워했으며, 멀리 북쪽을 바라보면서 개성에 묘를 쓴 아버지를 추모했다 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금천현(衿川縣) 누정(樓亭) 조에는 동시대 많은 이들의 글이 실려 있다.
현재 복원해 놓은 효사정에는 이들 글의 일부를 살려 방문객들이 읽을 수 있게 했다.
복원한 자리가 예전 자리인지는 확실히 알 수 없지만 일제강점기 때에 한강신사(또는 웅진신사) 자리에 정자를 세웠다 한다.

이 지역 다른 정자는 하나도 복원되지 못한 것을 보면 공숙공의 후손인 전 노태우 대통령도 효사정 복원에 일조했던 것 같다.





정조의 수원 행차 중 한강에 주교(배다리)를 놓은 모습을 그린 정리의궤의 그림에는
중간에 섬이 따로 없다.

 

기왕에 나선 길, 이제 겸재의 동작진도에서 벗어나 동작충효길 3코스를 따라 노량진 방향으로 가 본다.
한강대교 앞에서 강 길을 버리고 노량진 방향으로 오르면 용양봉저정(龍驤鳳翥亭)을 만난다.
현재 노량진 수원지 공원 건너편 작은 언덕이다.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思悼世子)의 묘가 있는 수원 화산(華山)의 현륭원(顯隆園) 원행길을 과천길에서 시흥길로 바꾼 후, 화성행차 8일이 있었던 을묘년 원행길에 노들강(노량진의 한강)에 배다리(舟橋)를 가설하여 건넜는데, 이때 어가(御駕)가 쉴 수 있게 이 정자를 지었다 한다.

이곳에서 휴식을 취하면서 점심을 들었기 때문에 일명 주정소(晝停所)라 부르기도 하였다고 전하여진다.
처음에는 정문과 누정 등 두세 채의 건물이 있었다 하나, 지금은 용양봉저정만 남아 있다.
이때의 기록은 원행을묘정리의궤로 우리에게 전해진다.







용양봉저정. 사진 = 이한성 옛길답사가

 

그 그림 중 주교(舟橋. 배다리)를 놓았던 지금의 한강대교(인도교)를 보면 가운데 섬이 없다.
이 섬 이름이 일본 냄새가 풀풀 나는 중지도(中之島: nakanoshima)이다. 한강인도교를 놓을 때 용산 쪽 강변 모래와 토석(土石)을 실어다 섬을 만들었다고 한다.
실제 주교(배다리)를 그린 정리의궤에는 중간에 섬이 없다.







사육신 묘. 사진 = 이한성 옛길답사가

 

 

 

오늘의 마지막 코스는 길을 건너 노량진 수원지 공원을 둘러보고 사육신 공원으로 넘어간다.
우리가 이미 친숙한 사육신(死六臣) 이외에 김문기 선생이 함께 올라 기리는 분은 일곱 분이다.
공원 벤치에 봄볕이 내려앉는다. 

▲ CNB저널, CNBJOURNAL, 씨앤비저널, 문화경제







▲ 한강 넘어 동작동 국립서울현충원 전경

 

한강 넘어 창빈(昌嬪) 안씨 묘역에서 국립현충원까지

숨은 역사를 찾아 걷는다



[미디어파인 칼럼=최철호의 한양도성 옛길] 새벽 바람이 목을 타고 넘어온다.
스카프와 모자를 눌러쓰고 걸어도 세찬 바람이 몸 구석구석에 머문다. 매서운 강바람이 겨울임을 알린다.
한강을 건너야 동작이다.
100여 년 전 한강을 어떻게 건너갔을까?

나룻배를 타고 추운 겨울에 건너기는 더욱 힘들었을 것이다.
한양에서 한강을 건너는 왕의 행렬은 어디에 머물렀을까?
한양도성 옛길을 따라 목멱산 아래 첫 동네를 지나니 궁금증이 물밀 듯 밀려온다.
목멱산 아래 둔지미 마을에서 한강을 바라보다



▲ 한강 넘어 순국선열의 영면처_동작동 국립서울현충원

 

 

 

다리를 건너간다. 목멱산 아래 둔지산 둔지미 마을에서 국립현충원이 있는 동작진까지 동작대교가 놓여있다.
한강을 오가는 다리 중 동작대교만이 남단과 북단이 굽어 있다. 직선이 아닌 곡선 다리다.
왜일까?
숭례문 광장에서 출발하여 후암동 옛길 따라 이태원 터를 지나면 용산 미군기지가 가로 놓여있다.
아쉽지만 길이 멈춘다.

더 이상은 걸어서 갈 수가 없다.
금단의 땅 미군기지 안 만초천과 남단이 힐끗 보인다.
국경처럼 한강까지 성벽을 따라 걸어야만 동작대교를 마주한다.
그나마 걸어서는 다리에 접근 할 수도 건너 갈 수도 없다.






▲ 2020년 새롭게 떠오르는 태양_공작봉가는 길 위에서


지하철을 탄다. 한 정거장이지만 가깝지 않다. 이촌역에서 동작역이다.
구가 바뀐다. 도성을 벗어나 한강을 건너야 갈 수 있다. 지하철역 출구와 출구 사이가 엄청 길다.
국립서울현충원 정문에 들어서니 왼쪽에서 오른쪽 끄트머리까지 산으로 둘러싸여 있다.

야트막한 산이지만 포근하고 힘찬 기운이 느껴진다.
한강을 바라보며 병풍처럼 펼쳐진 봉우리가 공작봉이다.
175m 공작봉 정상에서 장군봉이 이어진다.

아늑하다.
한강 너머 목멱산과 삼각산이 보이는 이곳은 왕릉처럼 편안함이 느껴진다.
누구의 능이 있었던 걸까?

서달산에서 공작봉을 오르다


 서달산 자락 달마사 가는 길_두꺼비 바위

 

 

동작릉이라 불린 이곳을 걸어서 오른다. 정문을 지나 산 정상에 오르니 서달산(西達山)이다.
서달산은 ‘달마(達磨)가 서쪽으로부터 왔다’는 불교에서 유래된 이름이다.
화장산 또는 공작봉이라 불리우는 산이다.
산 봉우리들은 관악산에서 뻗어 내려와 삼각산을 향하다 한강에 멈추어 동작진에 닿는다.

산을 넘으면 흑석동과 사당동이 이어진다. 산마루는 동작동과 경계다.
600여 년 전 한강 넘어 이곳은 과천이었다.
관악산으로부터 내려 온 산 자락은 반포천을 지나 한강에 숨어든다.
한강을 사이에 두고 삼각산과 마주하는 지역이라 힘이 솟구치는 지세다.





▲ 서달산에서 한강이 보이는 고요한 사찰_달마사

 

 

 

100여 년 전 목멱산 아래 용산에서 수원 화성을 가는 나루터의 하나다.
광나루,송파나루,동작나루,한강나루,노들나루,용산나루,마포나루,서강나루,양화나루,공암나루등 한강변 상류에서 하류까지 나루터가 즐비하게 있었다.

도성에서 나와 삼남지방을 가는 중요한 나루터가 동작나루다.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 융릉을 향해가던 능행길이 바로 이 나루터다. 춘향가에서 이몽룡이 남원으로 가는 어사 출도길 역시 이 길이다.
동재기 나루터에서 동작동이 유래된 곳이다.
서울에서 과천,수원을 지나 삼남지방을 내려가는 교통의 요지가 동작진이다.

땅끝마을에서 금강 지나 서울을 올 때도 이곳에서 멈춘다.
수원을 지나 남태령을 내려와 한강에 배를 타고 가는 나루터가 바로 동작나루터이다.
국립서울현충원은 창빈 안씨의 묘역이다
동작동 국립현충원을 들어오니 공작봉 아래는 모두 묘역이다. 1평도 안되는 무명용사 묘지부터 국가유공자 묘역,애국지사 묘역,장교와 사병 묘역,장군 묘역과 대통령 묘역까지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혼이 깃든 신성한 공간이다.
그런데 왕릉에도 거의 없는 신도비가 커다랗게 우뚝 서 있다. 쑥돌이라 불리는 예석, 곱게 써 내려간 글씨에 홀린 듯 발걸음을 멈춘다. 그 규모에 잠시 머리를 숙여 곰곰이 생각해 본다.

누구의 신도비일까?
여주 영릉에서나 볼 수 있는 신도비의 크기와 규모에 한자를 따라 읽어본다.
조선시대 후궁 중 최후의 승자의 신도비다. 방계 출신 중 최초의 왕이 된 선조의 할머니, 창빈 안씨의 묘다.
창빈 안씨는 중종의 후궁이자 최초의 대원군인 덕흥대원군의 어머니다. 신도비를 지나 계단에 오르니 그 끝에 봉분이 있다.

묘 보다 크고 왕릉보다는 작은 규모다. 비석에는 이수와 귀부가 아름답게 그려져 있다.
혼유석과 상석,향로석과 장명등 및 망주석이 그의 지위를 짐작케 한다.
무인석만 없지 왕릉에나 있는 문인석 2개도 묘를 지키며 한강을 따라 중종이 잠든 선정릉의 정릉을 바라보고 있는 듯하다.
500여 년 역사를 담은 동작동, 미래를 향해 날다
공작포란형의 산세는 그 누가 보아도 동작동 국립현충원의 주인답다.
공작이 알을 품고 있듯 상서로운 기운이 돋는다.

동작포란형이라고도 하는데 앞에 흐르는 한강수가 용틀림하듯 용산을 보며 수려하게 뽐내고 있는 형국이다.
선정릉의 원찰이 봉은사이듯, 동작릉이라 불린 창빈 안씨의 묘 원찰은 갈궁사로 화장사라 불리었다.
한강 넘어 오래된 사찰로 동작진에서 조망이 가장 좋은 절터다.

이곳에 올라오면 탁 트인 전망이 창빈 안씨 묘역과 국립현충원의 잠든 영혼을 감싸 안은 듯하다.
한국전쟁 이후 국립묘지가 되어 수많은 영혼이 잠들자 호국영령을 위해 호국지장사로 사찰 이름도 바꾼다.
새벽 공기를 마시며 천년 고찰 앞에 잠시 생각을 멈춘다.
바람 속 풍경소리에 마음이 숙연 해 지고 고개가 절로 숙여진다.






▲ 공작봉 아래 창빈 안씨 묘_원찰 천년 고찰 호국지장사 가는 길


한강을 건너 병풍처럼 펼쳐진 산자락,검은 구릿빛 돌이 많다는 동재기 나루터에는 500여 년 전 역사가 숨쉬는 공간이다.
목멱산을 내려와 둔지미 마을에서 동작진으로 이어진 한강에는 수많은 이야기가 얽혀있다.
서울 도심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역사 속 창빈 안씨 묘가 있었다. 하지만 동작대교가 제 역할을 못하여 근접하기 어려운
곳이였다.

한강을 끼고 동작진은 교통의 요지이며, 수운의 중심이었으나 미군기지로 인해 북단이 가로막혀 활용도가 떨어진 곳이었다.
앞으로 용산 미군기지가 국립공원이 되면 용산과 동작이 새롭게 탈바꿈 하리라 생각한다.

관악산과 목멱산이 연결되는 서달산은 한강의 상류와 하류를 한눈에 볼 수 있다.
동작과 용산이 이어지는 역사적인 공간에 새롭게 문화가 깃든 다리가 되어야 한다.
2020년 꿈과 미래를 품은 동네로 변화되길 빌며, 동작대교에서 새롭게 떠오르는 해를 바라본다.








▲ 최철호 성곽길 역사문화연구소 소장 - (저서) ‘한양도성 성곽길 시간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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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서울현충원 지도 국립서울현충원 둘레길과 접근로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지도
이상현







 서울현충원의 해질녘 가을 풍광 동작역에서 바라본 국립서울현충원 종합민원실과 서달산
이상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