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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과 시사

노태우 전 대통령 별세…향년 89세

 

 

 

노태우 대통령 당선자가 서울 한국종합전시관에서 열린 당선 축하연에서

1만여 축하객들의 열렬한 박수에 손을 치켜들어 답례하고 있다. /조선DB

 

 

 

 

 

 

 

(서울=뉴스1) = 제13대 대통령을 지낸 노태우 전 대통령이 26일 지병 악화로

별세했다. 향년 89세.  (대통령기록관 홈페이지 캡처) 2021.10.26/뉴스1

 

 

 

 

 

 

 

 

사진은 노태우 전 대통령이 1988년 6월 청와대에서 후안 안토니오 사마란치

국제올림픽 위원장을 접견하는 모습 연합뉴스

 

노태우 전 대통령 별세…향년 89세

 

 

 

12·12로 전두환 이은 5공화국 2인자
3金 후보 분열돼 개헌 후 첫 직선제 대통령 당선

 

 

 

 

대한민국 제13대 대통령을 지낸 노태우 전 대통령이 26일 오후 서울 종로구 연건동 서울대병원에서숙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89세

노 전 대통령은 지병으로 오랜 병상 생활을 해왔다.

 

최근 병세가 악화돼 서울대병원에 입원해 의료진의 집중 치료를 받았지만, 끝내 회복하지 못하고 삶을 마감했다.

노 전 대통령은 1932년 12월4일 경북 달성군 공산면 신용리(현 대구 동구 신용동)에서 면 서기였던 아버지 노병수와 어머니 김태향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경북고와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보안사령관, 체육부·내무부 장관, 12대 국회의원, 민주정의당 대표를 지냈다.

육군 9사단장이던 1979년 12월12일 육사 11기 동기생인 전두환 전 대통령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 ‘하나회’ 세력의 핵심으로서 군사쿠데타를 주도했다.

 

쿠데타 성공으로 신군부 2인자로 떠올랐고, 수도경비사령관, 보안사령관을 거친 뒤 대장으로 예편했다.

노 전 대통령은 정무2장관으로 정계에 입문했고, 초대 체육부 장관, 서울올림픽조직위원장, 민정당 대표를 지냈다.

 

5공화국 말기 전두환 전 대통령을 이을 정권 후계자로 부상했다.

1987년 6월10일 올림픽공원 실내체육관에서 치러진 민정당 전당대회에서 대통령후보로 지명됐다.

이 때 6월 항쟁의 결과 대통령 직선제 개헌이 이뤄졌다.

 

그러나 김영삼 전 대통령, 김대중 전 대통령, 김종필 전 총리 등이 모두 출마하면서 ‘1노(盧)3김(金)’ 구도가 만들어졌고, 개헌 후 첫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당시 슬로건이 ‘보통사람 노태우’였다.

 

노 전 대통령은 퇴임 후 12·12 주도, 5·18 광주 민주화운동 무력 진압, 수천억 원 규모의 비자금 조성 등의 혐의로 전 전 대통령과 함께 수감됐다.

법원에서 징역 17년형과 추징금 2천600억여 원을 선고받았다.

 

1997년 12월 퇴임을 앞둔 김영삼 대통령의 특별사면 조치로 석방됐지만, 오랫동안 추징금 미납 논란에 시달리다가 지난 2013년 9월에야 뒤늦게 완납했다.

유족으로는 부인 김옥숙 여사와 딸 소영씨, 아들 재헌씨가 있다.

소영씨와 이혼 소송 중인 최태원 SK 그룹 회장이 사위다.

 

 

 

양범수 기자

 

 

 

 

 

 

 

 

▲  1990년 10월 13일, 당시 노태우 대통령은 청와대에서 건전시민운동 단체대표들

로부터 수범사례 발표와 건의를 듣고 범죄와 폭력을 소탕하기위한 강력한 실천

방안을 천명했다.

 

 

 

 

10.26 사태 42주년 날, 군사반란 2인자 노태우 떠나다

 

 

 
대한민국 13대 대통령을 지낸 노태우씨가 26일 숨을 거뒀다. 향년 89세.

1987년 6월 항쟁 이후 직선제로 선출된 최초의 대통령이자, 전두환씨와 함께 12.12 군사반란을 주도해 5공화국을 탄생시킨 주역이다.

1979년 10.26 사태로 유신정권이 막을 내리면서 쏟아진 민주화의 열망을 가로막으며 군부독재를 연장시킨 책임자 중 한 명인 그가 42년 뒤인 2021년 10월 26일 숨을 거둔 점이 공교롭다.

전직 대통령에 대한 예우는 대부분 박탈된 상태다. 노씨는 12.12 군사반란 혐의 등으로 1995년 전두환씨와 함께 구속 기소돼 반란수괴 등에 관한 판결로 징역 17년과 추징금 2688억 원을 선고받았다.

이에 따라 그의 장례를 '국가장'으로 할 것인지 말 것인지를 두고 사회적 논란이 불가피해 보인다. 다만 그는 법률상 국립묘지에는 묻힐 수 없다.

노태우씨는 지난 2002년 전립선암 수술 이후 20년 가까이 공식석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면서 오랜 투병생활을 해왔다.

 

김연수 서울대병원장은 26일 오후 기자회견에서 "고인(노태우)께서는 다계통 위축증으로 투병하시며 반복적인 폐렴과 봉와직염 등으로 수차례 병원에 입원하셨고 심부정맥 혈전증으로 치료를 지속하셨다"며 "최근엔 서울대병원 재택의료 돌봄 하에 자택에 지내시다 하루 전부터 저산소증·저혈압을 보여 금일 오후 12시 45분경 응급실을 방문, 치료했으나 상태가 악화돼 오후 1시 45분 서거하셨다"고 밝혔다.



[정치군인의 길] '육사동기' 전두환과 12.12 군사반란 주도


 

 

 

 

▲  육사 생도 시절의 전두환(왼쪽)과 노태우 자료사진

 

 

 

 

 

 

 

▲ 12.12 쿠데타의 핵심 관계자들 12.12 쿠데타에 이어 1980년 광주민주화항쟁까지

 사진은 1979년 12월 14일 서울 보안사령부에서 기념촬영한 12.12 핵심 관계자들의

모습.  연합뉴스

 

 

 


그의 이름이 현대 정치사에 등장하게 된 배경엔 육군사관학교 시절을 빼놓을 수 없다.

육사 11기인 노태우씨는 전두환씨를 육사 동기로 만나 같은 방을 썼다.

이후 두 사람은 그의 동기들과 함께 사조직 '하나회'를 결성하면서 정치군인의 길을 걸었다.

12.12 군사반란의 주역도 육사 11기, 12기생들을 주축으로 한 '하나회' 구성원들이었다.

1981년 21대 국군보안사령관을 끝으로 예편(대장)한 노씨는 같은 해 안보·외교 문제를 담당하는 정무2장관에 임명됐다.

 

 

이후 체육부·내무부 장관을 거쳐 1985년 집권여당인 민주정의당 전국구 국회의원으로 당선돼 당대표로 임명됐다.

1987년 6월 항쟁 당시 민정당의 대통령 후보로 선출됐다.

노씨는 당시 민정당 대선후보 자격으로 대통령 직선제 요구 수용 등을 골자로 한 6.29 선언을 발표했다.

또 이러한 요구를 청와대에서 수용하지 않는다면 당대표 등 모든 공직에서 물러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후 관련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6.29 선언은 전두환씨 등과의 협의를 거친 결과물이라는 분석도 있다.

 



[5공화국에서 6공화국으로] 양김 분열로 최저 득표율 대통령 당선, 3당 합당의 주역
 

 

 

사진은 1990년 1월 당시 김영삼 민주당 총재(오른쪽), 김종필 공화당 총재(왼쪽)와

청와대에서 긴급 3자 회동을 갖고 민정, 민주, 공화 3당을 주축으로 신당 창당에 합의

했음을 발표한 뒤 청와대를 나서는 모습.연합뉴스

 

 

 

 

 
1987년 12월 16일, 노씨는 36.64%의 득표율로 13대 대한민국 대통령에 당선됐다.

역대 대선 최저 득표율 당선자다.

김영삼·김대중 후보가 단일화에 실패하면서 야권 지지층의 표가 분산된 덕이 컸다.

 

당시 통일민주당 김영삼 후보의 득표율은 28.03%, 평화민주당 김대중 후보의 득표율은 27.04%였다. 대선 당시 자신을 "보통 사람"으로 강조하는 이미지 메이킹으로 군부정권에 대한 거부감을 반감시켰다는 평가도 있다.

노씨는 1988년 4월 총선 결과로 만들어진 '여소야대(與小野大)'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1990년 1월 집권여당이었던 민주정의당과 김영삼의 통일민주당, 김종필의 신민주공화당을 통합하는 '3당 합당'을 성공시킨 것도 현대 정치사의 주요한 변곡 지점이다.

 

당시 3당 합당을 통해 출범한 민주자유당은 현재 국민의힘의 전신이다.

또 대구·경북(노태우)과 부산·경남(김영삼), 충청(김종필)을 하나로 묶으면서 1987년 민주화 이후 지금껏 유지되고 있는 지역주의 정치의 시발점으로도 평가된다.

대통령 재임 시절 전국교직원노동조합 탄압, 국군보안사령부 민간인 사찰 사건, '분신 정국' 등의 반정부 민주화 시위, 강기훈 유서대필 조작사건 등 많은 시국사건들이 벌어졌다.

 

퇴임 직후엔 재벌 총수 등 40여 명의 기업인으로부터 3400억~3500억 원의 비자금을 수수한 사실도 드러났다.

이로 인해 노태우씨는 헌정 사상 구속된 첫 대통령으로 기록됐다.

 

 

 

 


 

 

 사진은 당시 고대신문 사진기자가 촬영. 오마이 뉴스 자료사진

 

 

 

 

 
[재임] 끊이지 않은 시국사건, 수많은 젊은이들 분신... 비자금 수수도

그러나 긍정적 평가도 있다. 13대 국회의원 총선으로 여소야대 국회가 꾸려졌을 때, 노씨는 '물태우'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낮은 자세로 야권과의 '협치'를 적극 시도했다.

그 스스로도 자신의 별명에 대한 질문에 "나의 신조는 '참 용기'다. 참고 용서하고 기다리는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성과는 나왔다. 노씨는 당시 집권여당의 총재를 겸임하고 있었지만 당 원내총무(현 원내대표)에게 국회 협상 전권을 부여했고, 김영삼·김대중·김종필 등 야당 총재들을 자주 만났다.

13대 국회는 이를 통해 백담사로 떠났던 전두환씨를 증인으로 출석시킨 '5공화국 청문회'나 지방자치법 제정, 국정감사제도 부활 등을 성공시켰다.

진보 정치학자로 꼽히는 손호철 서강대 명예교수는 노씨에 대해 "군사독재의 연장선에 있었지만 토지공개념이라는 역대 가장 진보적인 경제정책을 만든 것은 높이 평가한다(2017년 12월 <경향신문> 인터뷰 중)"라고 말하기도 했다.

노씨가 개발이익환수에 관한 법률 등 이른바 '토지공개념 3법'을 추진한 점을 짚은 것이다.

 

'경제민주화 전도사'인 김종인 전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당시 경제수석)을 통해 재벌의 비업무용 부동산 강제매각·신규취득 금지조치, 이른바 '5.8조치' 역시 이 시기 이뤄졌다.

외교·안보 분야에선 러시아(구소련)·중국 등 사회주의 국가들과 국교를 정상화하는 등의 '북방정책'이 세계적인 냉전 체제 해체 흐름에 부응한 것으로 긍정적 평가를 받는다.

대북 정책도 마찬가지다.

 

노씨는 1988년 7.7 선언을 통해 "민족통합은 우리의 책임 아래 우리의 자주적 역량으로 이루어야 한다"라면서 한반도 문제에 대한 '당사자 해결 원칙'을 제시했다.

또 1991년 12월 남북고위급회담을 통해 '남북기본합의서'도 타결했다.

 

이는 이후 김대중 정부의 6.15 선언과 노무현 정부의 10.4 선언의 기초가 됐다.

그 다음해인 1992년엔 한반도비핵화공동선언을 채택했다.

퇴임 이후 노씨의 삶을 옭아맨 것은 앞서 밝혔던 정치군인으로 걸었던 길이었다

. 후임 김영삼 전 대통령은 1993년 노씨의 출발점이었던 '하나회'를 숙청했다.

1995년엔 전두환씨와 함께 그를 12.12 군사반란 등의 혐의로 법정에 세웠다.

1997년 선고가 확정됐지만, 같은 해 12월 사면 받았다.

 

 

 

 

 


 

 

  노태우 대통령이 1990년 12월 14일 오전 크램린궁내 소연방 최고인민회의 회의실

에서 고르바초프 소련대통령과 미 샌프란시스코 정상회담 이후 6개월만에 제2차

정상회담을 가졌을 당시 모습.

 

 

 

 

 
[명과 암] 북방외교·남북기본합의서 채택 등 재평가... 

5.18 사과와 추징금 완납 등 전두환과 다른 행보



1997년 대법원 판결 이후 행보는 전두환씨와 대비된다.
그 역시 오랫동안 2688억 원에 달하는 추징금을 미납했다는 지적을 받았으나 2013년 9월 사실상 완납했다.

 

반면, 전두환씨는 지금도 추징금 966억 원을 미납한 상태다.

2019년엔 수년째 지방세를 체납하고 있단 사실도 알려졌고 같은 해 12.12 군사반란 주역들과 오찬을 하고 골프 라운딩을 하는 모습이 드러나 비판 여론이 크게 일었다.

특히 전씨는 당시 본인이 알츠하이머를 앓고 있다고 주장하던 시기였다.

5.18 광주에 대한 인식 차도 있다.

전씨는 2017년 펴낸 자신의 자서전에서 5.18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진압군의 헬기 사격을 증언한 고 조비오 신부의 명예를 훼손한 혐의로 재판을 받는 중이다.

그는 이 과정에서도 5.18 관련 본인의 책임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노씨는 아들 노재현씨를 통해 꾸준히 광주에 대한 사죄 의사를 표해 왔다.

노재현씨는 부친의 뜻이라며 지난 2019년부터 총 다섯 차례 광주를 방문했는데, 지난 4월엔 노태우씨의 이름으로 국립 5.18 국립묘지를 참배하고, 5.18 희생자 유족들을 만나 직접 사과하기도 했다.
 

 

 

 

 

 

 

 

▲  노태우 전 대통령이 1995년 12월 18일 오전 1차공판을 받기위해 서초동 서울

지방법원에 도착, 입감되고 있는 모습. 연합뉴스

 

 

 


고 노태우 약력

1932년 12월 4일, 경북 달성군(현 대구 동구) 출생.
1946년 대구 공산소학교(현 공산초등학교) 졸업
1951년 경북고등보통학교(현 경북고등학교) 졸업


1955년 육군사관학교 11기 졸업
1956년 육군 제5보병사단 소대장 발령
1959년 결혼


1960년 군사정보대학 영어번역담당 장교
1961년 전두환 등과 함께 '5.16 군사혁명 지지 행진' 참가
1966년 국군 방첩부대 방첩과장


1967년 베트남 전쟁 참전(맹호사단 1연대 3대대장)
1968년 육군대학 수료 및 수도경비사단 대대장 부임
1970년 육군참모총장 수석 부관장교
1971년 보병 연대장


1974년 공수특전여단 여단장
1976년 청와대 대통령 경호실 행정차장보
1978년 청와대 대통령 경호실 작전차장보
1979년 육군 제9보병 사단장


1979년 12.12 군사반란 주도
1980년 5월 수도경비사령관 및 국가보위입법위원회 상임위원
1980년 8월 국군보안사령부 사령관
1981년 7월 예비역 대장으로 예편 및 정무 제2장관 임명


1982년 체육부 장관 및 내무부 장관
1983년 서울올림픽 조직위원장
1985년 민주정의당 전국구 국회의원 당선 및 당 대표위원 임명
1987년 6월 민주정의당 대통령 후보로 선출


1987년 6월 29일 대통령 직선제 수용 등을 골자로 한 '6.29 선언' 발표
1987년 12월 16일 13대 대통령 선거 승리
1988년 2월 25일 13대 대한민국 대통령 취임
1988년 7월 7일 민족자존과 통일번영을 위한 특별선언, 이른바 '7.7 선언' 발표


1988년 9월 서울 올림픽 개최
1988년 11월 일해재단 비리 등 '5공화국 비리 청문회'
1989년 2월 1일 헝가리와 공식 수교
1989년 9월 11일 한민족공동체통일방안 발표


1989년 12월 전두환 전 대통령 '5공화국 청문회' 증인 출석
1990년 1월 22일 민주정의당·통일민주당·신민주공화당의 '3당 합당' 발표
1990년 10월 1일 소련(현 러시아)과 공식 수교
1991년 3월 31년 만의 지방선거 부활


1991년 9월 남북 UN 동시가입
1991년 12월 13일 화해·불가침·교류협력 등의 '남북기본합의서' 합의
1992년 1월 31일 남북 한반도비핵화공동선언
1992년 8월 중화인민공화국과 공식 수교


1992년 9월 민주자유당 탈당. 대선 전 대통령의 여당 탈당 첫 선례
1993년 2월 대통령 퇴임


1995년 11월 16일 12.12 군사반란 및 뇌물수수 혐의로 구속.
1997년 4월 대법원 선고, 징역 17년-추징금 2688억 원
1997년 12월 사면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YONHAP PHOTO-0513〉 3당 합당 발표 (서울=연합뉴스) 1 〈저작권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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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태우 대통령이 1991년 6월 29일 오후 서울공항에서 특별기에 탑승하기에 앞서

환송나온 각계인사들에게 손을들어 답례하고 있다. [매경DB]

 

 

 

 

영남·충청 합쳐 호남 압박…현대사 물줄기 뒤바꾼 '3당합당

 

 

 

노태우 전 대통령의 5년 재임 중 가장 큰 정치적 이벤트는 1990년 1월의 3당 합당이었다.

“정치가 상상할 수 있는 것 그 이상”이라는 말을 낳았던 초유의 일이었다.

노 전 대통령의 민정당, YS(김영삼)의 통일민주당, 그리고 JP(김종필)의 신민주공화당이 합쳐 거대 여당인 민주자유당이 된 것이다.

 

취임 만 2년이 채 안 된 노 전 대통령을 두 김씨와의 합당으로 내몬 것은 민정당의 1988년 4ㆍ26 총선 참패였다.

직전 해 대선 승리로 자신감을 얻은 노 전 대통령은 총선을 앞두고 벌어진 정치관계법 협상에서 DJ(김대중)의 평화민주당이 요구한 소선거구제를 덜컥 받았다.

 

한 선거구에서 2명을 뽑는 과거의 중선거구제가 여당에 유리하다는 분석이 많았지만, 판세를 낙관했던 민정당과 노 전 대통령은 ‘날치기’까지 감행하며 소선거구제 안을 통과시켰다.

이만섭 전 국회의장은 “당시 민정당 지도부는 노 전 대통령에게 ‘총선에서 너무 많은 의석을 낼까 걱정’이라는 보고를 할 정도여서 소선거구제 안이 빛을 보게 된 것”이라고 회고했다.

 

그러나 새 선거법으로 치러진 13대 총선에서 민정당은 불과 125석을 건지며 헌정사상 첫 ‘여소야대’의 시련을 맞았다.

반면 1987년 대선에서 3위에 머물렀던 DJ의 평민당이 호남과 수도권 일부를 차지하며 무려 70석을 얻어 제1야당에 오르는 ‘황색 돌풍’을 일으켰다.

YS의 민주당은 부산ㆍ경남을 근거지로 해 59석을 얻는 데 그쳐 제2야당으로 쪼그라들었다.

 

 

 

 

 

 

 

 

제13대 대통령 선거 당시 노태우 후보, 김영삼 후보, 김대중 후보의 선거 벽보.

 

 

 

이후 노 전 대통령에겐 시련의 연속이었다. 제1야당 총재인 DJ와 제2야당 총재인 YS는 ‘5공 청산’ 등을 내걸고 집권 세력을 협공했다. JP까지 한몫 거들었다.

노 전 대통령은 ‘3김’을 일대일로 물밑에서 접촉하며 돌파구를 모색했다.

그 결과로 YS와 JP의 손을 잡고 216석의 거대 여당을 만들어 여소야대를 탈출한 것이다.

 

3당 합당은 한국 현대사의 물줄기를 크게 바꾸어 놓았다.

전통 야권 세력의 절반이 뚝 떨어져 나와 5공 세력과 합쳐진 것이었다.

3당 합당의 결과로 만들어진 민자당은 지금까지도 한국 보수 진영의 중심 세력으로 자리 잡았다.

또 지역적으로는 영남ㆍ충청이 합쳐 호남을 압박했다.

 

일종의 호남 고립구도였다.

여소야대로 출발한 국회였지만, 합당 이후엔 DJ의 평민당이 유일한 원내 야당이 됐다.

노 전 대통령은 3당 합당을 계기로 국정을 견인할 수 있는 힘을 되찾으려 했다.

 

그러나 현실은 그의 뜻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대선 고지에 오르기 위해 박태준ㆍ이종찬 등 민정계 세력을 넘어서야 했던 YS는 합당 후에도 전투태세로 대통령인 노태우를 압박했다.

그러던 중 ‘내각제 각서’가 중앙일보의 단독 보도(1990년 10월)로 공개됐다.

 

3당 합당의 이면에 ‘내각제 개헌’ 약속이 담겨 있었다는 사실이 공개되자 정국이 출렁였다.

내각제 각서를 노 전 대통령 측에서 흘렸을 것이라고 추측한 YS는 격분해 마산으로 가버렸다.

 

 

 

 

 

 

 

 

1989년 1월년 서울 마포가든호텔에서 만난 3김. 왼쪽부터 당시 김영삼 민주당 총재,

김대중 평민당 총재, 김종필 공화당 총재. [연합뉴스]

 

 

 

 

3당 합당 당시 노 전 대통령은 “내각제를 하면 YS에게만 한 번 수상(총리)을 할 기회를 주면 된다”는 생각을 했다는 게 당시 측근인 박철언 전 정무1장관의 얘기다.

그걸로 ‘3김 시대’를 마무리한다는 구상이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YS의 격렬한 반발에 부닥쳐 내각제 개헌은 없던 일이 됐다.

 

내각제 각서 파동은 거꾸로 YS로선 족쇄에서 벗어나는 전화위복이 된 셈이다.

행운의 여신은 YS의 편이었다. 1992년 YS는 대통령에 당선됐다.

그 이후 JP가 YS에게서 떨어져 나왔다.

 

1997년 대선에서 DJ와 JP는 다시 내각제 개헌을 매개로 ‘DJ 대통령-JP 총리’ 시대를 열었다.

YS의 측근인 고(故) 이원종 전 청와대 정무수석은 “역사적 가정이지만, 3당 합당이 없었다면 DJP 연합도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1990년 3당 합당. 왼쪽부터 김영삼 통일민주당 총재, 노태우 대통령, 김종필

신민주공화당 총재.

 

 

 

 

한편 3당 합당을 앞두고 열린 5공 청문회(1989년 12월)에서 전두환 전 대통령이 국회에 증언을 하러 나왔다.

그때 증인석을 향해 명패를 던지며 강렬한 인상을 남긴 이가 노무현 당시 통일민주당 의원이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3당 합당에 끝까지 반발하며 소신 있는 정치인이란 평가를 얻었다

 

. 만약 3당 합당이 없었다면 김영삼→김대중→노무현 대통령으로 이어지는 권력의 변화는 전혀 다른 궤도로 흘러갔을지도 모른다.

노태우 전 대통령은 3당 합당을 방패삼아 퇴임 후의 안위를 도모하려 했으나, 내각제 각서 파동 이후 흘러간 정치의 격랑은 노 전 대통령의 뜻과 다르게 전개됐다.

 

 

 

 

윤정민 기자 yunjm@joongang.co.kr

 

 

 

 

 

 

 

▲사진은 1995년 10월 27일 노태우 전 대통령이 서울 연희동 자택에서 대국민사과문

을 발표하며 눈물을 훔치는 모습. ⓒ연합뉴스

 

 

 

 

노태우 전 대통령 별세, 전두환과 이어진 영욕의 삶

 

 

12.12 쿠데타 주역, 최초의 직선제 대통령, 형 확정 뒤 특별사면



 

 

26일 별세한 노태우 전 대통령은 대한민국 최초의 직선제 대통령이지만, 12.12 군부 쿠데타 주동 세력이자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진압한 '정치 군인'이라는 역사적 평가를 피하지 못한다.

노 전 대통령의 생애는 1951년 육사 11기 동기로 인연을 맺어 함께 12.12 군부 쿠데타를 일으켰던 전두환 전 대통령과 대부분 겹친다.

 

 1961년 박정희 전 대통령이 5.16 군사 쿠데타를 일으키자 노태우, 전두환 전 대통령은 육사 생도 및 장교단의 '혁명 지지 시가행진'을 주도하며 '정치군인'의 길을 걸었다.

 

특히 훗날 정치 개입 폐단의 진앙으로 지목되는 군부내 사조직인 '하나회'를 전 전 대통령의 주도로 결성했으며, 1979년 10월 26일 박 전 대통령이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에게 살해된 뒤 12.12 군사 쿠데타를 주도했다. 

공교롭게 노 전 대통령은 박 전 대통령의 사망일과 일치하는 날에 별세했다.

12.12 쿠데타 당시 9사단장이던 노 전 대통령은 최전방부대를 동원해 쿠데타에 결정적으로 기여해 '전두환 후계자'의 기반을 닦았다.

 

1974년 장군으로 진급한 이후엔 신군부의 2인자로 제 9공수특전여단장, 청와대 작전차장보, 보안사령부 사령관 등을 지냈으며, 1980년 국가보위입법위원회 비상대책위원과 상임위원을 지냈다.

이후 제5공화국에서 1981년 정무2장관, 대통령 특사, 1982년 체육부 장관, 41대 내무부 장관 등을 차례로 역임했다. 

전두환 정권의 2인자 발판을 다진 노 전 대통령은 1987년 민정당 총재가 됐으며, 전 전 대통령의 추천으로 민정당 대선후보로 지명됐다. 

 

결국 '1노3김(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김종필)이 겨룬 1987년 대선에서 승리하고 제13대 대통령에 당선됐다. 

 

노 전 대통령은 대한민국 역사상 처음으로 직접 투표에 의해 선출된 대통령이지만, 이는 전 전 대통령이 대통령 간선제 유지를 위한 4.13 호헌 조치 발표로 6월 민주화항쟁이 거세지자 6.29 선언을 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내몰린 상황을 배경으로 한다. 

.29 선언으로 대통령 직선제가 도입되면서 형성된 정치체제가 바로 '87년 체제'다.

 

노 전 대통령은 군부 출신이지만 민주적 절차에 의해 탄생된 만큼 전두환 전 대통령과의 갈등이 불가피했다.

 취임 뒤 '5공 청산' 요구가 강해지고 '전두환 구속' 목소리가 높아지자 전 전 대통령은 노 전 대통령의 권고로 백담사로 떠났다.

 

노 전 대통령은 퇴임 후 법정의 심판을 받기도 했다. 노태우 정부 이후 집권한 김영삼 정부 시절이던 1995년, 12.12 쿠데타 내란과 5.18 민주화운동 폭력 진압 주범으로 지목돼 전두환 전 대통령과 함께 구속 기소됐으며, 1997년 4월 17일 대법원에서 징역 17년이 확정됐다.

 

그러나 1997년 대선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은 국민 통합 차원에서 두 전직 대통령에 대한 사면을 공약으로 내걸었고, 김 전 대통령은 당선 후 이들을 특별사면했다.

똑같이 5.18 광주 민주화운동 진압과 12.12 쿠데타에 가담한 전두환, 노태우 전 대통령의 이후 행보도 다소 차이가 있다.  

전 전 대통령과 달리 노 전 대통령은 추징금 2628억 원을 완납했으며 아들 노재헌 씨가 광주시 북구 운정동 국립 5.18민주묘지에 조화를 보내고 사과의 뜻을 밝히기도 했다.

 

2002년 암 투병 생활을 시작한 노 전 대통령은 외부 활동을 삼갔고 전 전 대통령과 교류도 드물었다. 

다만 2014년 전 전 대통령이 노 전 대통령을 병문안한 자리에서 "나를 알아보겠는가"라고 물었던 일화가 있다.

 

노 전 대통령의 별세로 전두환-노태우 인연은 막을 내렸으며 김대중 전 대통령(2009년), 김영삼 전 대통령(2015년), 김종필 전 국무총리(2018년)에 이어 노 전 대통령까지 생을 마감해 '1노3김'이라는 정치의 시대도 마침내 막을 내렸다.

 

 

 

 

서어리기자

 

 

 

 

 

 

 

<YONHAP PHOTO-2224> 대통령 취임 선서하는 노태우 (서울=연합뉴스) 대한민국

제13대 대통령을 지낸 노태우 전 대통령이 26일 숨졌다. 사진은 1988년 제13대

대통령 취임식에서 선서하는 모습. 2021.10.26 [연합뉴스 자료사진]

 

 

 

 

 

[노태우 별세] 노태우는 누구?…12·12 주역에서 민주화 후 첫 직선제 대통령

 

 

 

 

전두환 육사 11기 동기


대한민국 13대 대통령
”보통사람입니다. 믿어주세요” 대선 슬로건
1997년 뇌물수수·내란·반란 등으로 징역
1997년 특별사면 받고 복권

 

 

 

 

 

육군 대위였던 5·16 때 전두환 등 장교들과 ‘군사혁명 지지 행진’에 참가했고, 1966년 국군 방첩부대 방첩과장, 육군본부 정보과장 등 ‘정치 장교’의 길을 걸었다.

1967년 육군 중령으로 진급, 베트남 전쟁에 맹호사단 소속으로 참전했다.

 

베트남전 참전 이후에는 육군참모총장 수석부관장교, 공수특전여단 여단장 등을 거쳐 1978년 육군 소장으로 진급했다.

 

이때 대통령경호실 작전차장보로 발탁됐다.

1979년 12·12 당시 9사단장으로서 예하 29연대를 중앙청으로 진주시키는 등 군사 반란에 가담했다. 이듬해 전두환 신군부의 5·17 계엄 확대 등에도 관여했다.

 

그는 회고록에서 10·26 직후 정승화 당시 육군참모총장을 연행하는 과정에서 장태완 수도경비사령관이 신군부가 모여있던 30경비단을 포위한 상황에 대해 “나는 자결하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면서도 “그러나 30경비단에 들어온 누구도 방아쇠를 당기지 않았고, 우리는 ‘기회는 이때’라고 판단해 군을 출동시키기로 했다”고 했다.

 

전두환의 5공(共) 정권 출범 후 수도경비사령관과 보안사령관을 거쳐 1981년 육군 대장으로 예편했다.

이후 곧바로 전두환이 창당한 민주정의당에 입당했다.

전두환 정권에서 정무 2장관, 초대 체육부 장관, 내무부 장관, 당 대표위원 등을 지냈다.

그는 군 경력과 정치 활동의 대부분을 전두환에 이은 2인자로 보냈다.

 

동기이자 친구인 전 전 대통령 재임 7년을 2인자로 버틴 그는 1987년 민정당 대표위원으로서 직선제 개헌 요구를 전격 수용한 6·29 선언을 했다.

고인은 직선제로 치러진 1987년 대선에서 ‘보통 사람의 시대’를 기치로 내걸고 대한민국의 13대 대통령(1988~1993)으로 당선됐다.

 

당시 선거 슬로건 “나, 이 사람! 보통사람입니다. 믿어주세요!”라던 유세는 지금도 회자된다.

박정희의 유신 선포 이후 15년만의 첫 직선 대통령이었다.

노 전 대통령의 당선은 3김(金)의 할거와 양김(兩金)의 분열 덕도 있었다.

 

1987년 대선에서 김영삼(YS)·김대중(DJ) 두 후보가 단일화에 실패해 독자 출마하면서 36.64%라는 역대 최저 득표율로 대통령에 당선됐다.

 

노 전 대통령은 집권에 성공했지만 민주화 요구가 분출했다.

1988년 총선에서 여소야대(與小野大)가 되면서 정국 불안정에 시달렸다.

결국 그는 1990년 김영삼·김종필과 손잡고 218석의 거대 여당 민주자유당을 출범시켰다.

김대중의 평화민주당을 소외시켜 “지역구도를 심화한 야합”이란 비판도 받았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김영삼 정부 출범으로 재집권에 성공했다.

14대 대선을 앞두고 민자당을 탈당하고 중립 내각을 출범시켰다.

노 전 대통령은 취임 후 정치적 은인인 전임자 전두환 전 대통령을 백담사로 보냈다.

‘5공(共) 청문회’와 ‘광주 청문회’에도 동의해줬다.

 

노 전 대통령은 당시 김윤환 의원에게 야당과 협상에 전권을 주며 “나의 신념은 ‘참용기(참고 용서하고 기다리자)’다”라고 했다고 한다.

그러나 전면적 5공 청산과는 거리가 있었다.

1995년 후임 김영삼 전 대통령 취임 후 비자금 사건으로 구속됐다.

 

1997년 4월 뇌물수수와 내란·반란혐의 등으로 대법원에서 징역 17년을 선고 받았다.

복역 중이던 1997년 12월 특별사면을 받고 복권됐다.

1987년 대선에 민정당 후보로 나선 고인은 6·29 선언을 통해 직선제 개헌을 수용했다.

6·29를 전두환이 기획했느냐, 노태우가 주도했느냐를 두고 양측의 말이 다르다.

 

그러나 1987년 6·10 항쟁으로 분출된 민주화 요구를 큰 유혈 희생 없이 제도적으로 수용해낸 점은 노 전 대통령의 공(功)이라는 평가가 있다.

 

 

 

 

 

 

 

 

 

사진은 1996년 12.12 및 5.18사건 항소심 선고공판에 출석한 노태우·전두환

전 대통령의 모습.

2021.10.26 [연합뉴스 자료사진] photo@yna.co.kr/2021-10-26 14:28:40/

<저작권자 ⓒ 1980-2021 ㈜연합뉴스. 

 

 

 

 

◇ 노태우 전 대통령 연표

1932년 대구광역시 동구 신용동에서 출생

1951년 경북고 졸업

1955년 육사졸업(11기)

1979년 수도경비사령관

 

1981년 전역(육군 대장), 제2정무장관

1985년 민정당 대표위원

1987년 6·29선언 발표, 민정당 대통령 후보

 

1988년 대한민국 제13대 대통령 취임

1990년 소련과 수교, 3당 합당-민자당 창당

1991년 남북 기본 합의서 채택, 남북 공동 유엔가입

1992년 한·중 수교

 

1993년 대통령 퇴임

1995년 비자금 사건으로 구속

1996년 12·12 군사반란 등의 혐의로 추가 기소

1997년 특별사면복권

 

2011년 회고록 출간

2013년 추징금 2628억9600만원 완납

2021년 10월26일 사망

 

 

 

박정엽 기자

 

 

 

 

 

 

 

대한민국 제13대 대통령을 지낸 노태우 전 대통령이 26일 숨졌다. 사진은 1987년

직선개헌을 포함한 '시국수습대책 8개항'을 담은 6.29 선언을 하고 있는 당시 민정당

노태우 대표위원. /연합뉴스

 

 

 

 

가능할까…文, ‘국가장’ 허용할지가 관건

 

 

‘내란죄’로 실형 선고…국립묘지 안장 불가
국무회의 거쳐 대통령 ‘국가장’ 여부 결정
‘장례위원회’ 국립묘지 안장 여부 결정할 수도

 

 

 

대한민국 제13대 대통령을 지낸 노태우 전 대통령이 26일 별세한 가운데 그의 장례가 국가장(國家葬)으로 치러질지, 국립현충원에 안장될지 등에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노 전 대통령은 내란죄로 실형을 선고 받았던 전력이 있어 국립묘지 안장이 법적으로는 불가하나, 만약 국가장을 치른다면 국민 여론 등을 고려해 정부가 예외적으로 안장 여부를 결정할 수 있다.

 

국가장의 최종 승인권자는 대통령이다.

이에 문재인 정부가 과거 정부에 얼마나 포용적일지 등이 드러날 것으로 보인다.

 

정치권에 따르면 행정안전부는 노 전 대통령의 장례 절차와 관련, 유족과 만나 의견을 듣고 국가장 여부에 대해 논의할 계획이다.

행안부 관계자는 조선비즈와의 통화에서 “(외국에 나가 있는) 유족들이 내일 들어올 예정인데, 만나서 논의를 해야 한다”며 “정부 차원에서 국가장으로 치를 지 등에 대한 판단도 필요하다”고 했다.

 

국가장법에 따르면 국가장은 전·현직 대통령이거나 국가 또는 사회에 현저한 공훈을 남겨 국민의 추앙을 받는 사람이 사망했을 때 행안부 장관의 제청으로 국무회의의 심의 후 대통령이 최종 결정한다. 국무총리가 장례위원회 위원장을 맡으며, 행안부 장관이 집행위원자장을 맡게 된다.

 

국가장의 장례 기간은 5일 이내로, 이 기간 중에는 조기(弔旗)를 게양한다.

지금까지 치러진 국가장은 지난 2015년 고(故) 김영삼 전 대통령 장례뿐이다.

 

앞서 2009년 5월 노무현 전 대통령의 장례는 국민장으로 치러졌고, 같은 해 8월 김대중 전 대통령의 장례는 국장으로 치러졌다.

국장과 국민장을 가르는 요건과 기준이 명확하지 않다는 지적이 나오면서 이명박 정부 시절인 2011년 국장과 국민장은 국가장으로 통합됐다.

 

노 전 대통령의 국립현충원 안장 여부는 국가장 시행 여부에 따라 결정될 것으로 보인다.

국립묘지법에 따르면 전직 대통령은 국립현충원 안장 대상이나, 노 전 대통령은 내란죄 등으로 실형을 선고 받아 안장이 불가능하다.

 

노 전 대통령은 퇴임 후 1995년 전두환 전 대통령과 함께 군사 반란을 주도했던 내란죄로 징역 17년을 선고받고 복역 중 1997년 12월 특별사면을 받아 복권됐다.

그러나 노 전 대통령의 장례가 국가장으로 치뤄진다면 국가장법에 의해 장례위원회와 안장대상심의위원회가 국립묘지 안장 여부를 결정할 수 있어 여지는 있다.

 

국민 여론에 따라 정부가 결정할 수 있다는 의미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1981년 광주 민주화 운동의 주동자로 지목돼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사형 선고를 받았으나, 1987년 사면·복권돼 국립현충원에 안장된 바 있다.

 

당시 이명박 정부 김경한 법무부 장관은 국무회의에서 “사면·복권이 되면 국립묘지 안장 자격도 회복시켜 주는 것으로 법무부가 판단했다”는 유권해석을 내렸다.

 

 

 

 

 

 

 

 

사진은 1987년 민정당 전당대회에서 대통령 후보로 지명된 노태우 대표(왼쪽)가

전두환 대통령과 손을 맞잡고 대의원들의 환호에 답하는 모습. /연합뉴

 

 

 

 

 

 

1990년 1월 22일 노태우 전 대통령이 김영삼 민주당 총재(왼쪽), 김종필 공화당

총재(오른쪽)와 청와대에서 긴급 3자회동을 갖고 3당 합당을 발표하고 있다. 연합뉴스

 

 

 

 

 

[사설] 사죄 없이 오욕 남기고 떠난 노태우 전 대통령

 



 

13대 대통령을 지낸 노태우씨가 26일 지병으로 사망했다. 대통령 재임 당시 북방외교와 남북관계 등에서 적잖은 기여를 했지만, 그의 죽음을 흔쾌한 마음으로 추모할 수 없는 것은 신군부의 12·12 권력 찬탈과 5·18 광주 시민 학살 등 전두환 독재정권 당시 그가 저질렀던 죄과가 너무나 크기 때문이다.

 

이 밖에 미진했던 ‘5공 청산’과 천문학적 규모의 비자금 조성 등도 오점으로 기록돼 있다.

물론 그가 재임 기간 세계적인 탈냉전 추세에 맞춰 북방외교와 남북관계에서 새 지평을 연 것은 부인할 수 없는 공적이다.

 

무엇보다 1988년 7·7선언(민족자존과 통일 번영을 위한 특별선언)과 함께 시작된 소련·중국 등 공산권 국가와의 수교, 1991년 남북기본합의서 체결과 남북한 유엔 동시 가입 등은 그의 결단이 없었다면 쉽지 않았을 일이다.

 

토지공개념제 도입과 대규모 주택 공급으로 서민 생활 안정과 중산층 확대를 도모한 것도 평가할 만한 대목이다.

같은 군인 출신임에도 전임자 전두환과는 달랐던 유화적인 스타일은 한국 사회의 탈권위주의화와 문민정부 출범에도 일정 부분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사면 이후 보여준 행보도 전두환과는 사뭇 달랐다.

추징금 납부를 거부하고 잊을 만하면 망언을 일삼아온 전두환과는 대조적으로 외부활동을 삼가며 자숙하는 모습을 보였다.

 

법원이 선고한 추징금도 2013년 완납했다.

그러나 한국 현대사에 그가 드리운 짙은 그늘은 이런 긍정적 평가를 가리고도 남는다.

 

무엇보다 신군부 실세로서 자신 또한 책임이 무거운 1980년 5월의 학살과 관련해 그는 광주 시민과 국민에게 한번도 직접 사죄하지 않았다.

2011년 펴낸 <노태우 회고록>에서는 5·18 민주화운동에 대해 “광주 시민들이 유언비어에 현혹된 것이 사태의 원인이었다”고 주장하기까지 했다.

 

아들 재헌씨가 2019년 이후 여러 차례 광주를 찾아 피해자들과 유족들에게 사죄를 했지만, ‘대리 사죄’로는 온전한 용서를 구할 수 없다.정치권 일부와 사회 일각에서 재임 시절의 성과와 국민 통합의 필요성을 들어 그의 장례를 국가장으로 치르고 국립묘지에도 안장하자는 주장이 고개를 드는 분위기다.

 

결코 안 될 일이다.

화해와 용서는 온전한 반성과 사죄 위에서만 가능하다는 사실을 전두환의 사례를 통해 분명히 보고 있지 않은가.

지금은 그저 ‘자연인 노태우씨’의 죽음을 조용히 애도하면 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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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연합뉴스) 박철홍 기자 = 노태우 전 대통령이 사망한 26일 오후 광주 북구 국립

5·18민주묘지 내 전시관에 노 전 대통령이 전두환 전 대통령과 함께 1996년 12·12 및

5·18사건 항소심 선고공판에 출석한 모습이 전시돼 있다. 2021.10.26 pch80@yna.co.kr

 

 

 

 

 

광주시민 항의에 고개 숙인 '노태우 아들'

(광주=연합뉴스) 정회성 기자 = 노태우 전 대통령의 외아들인 노재헌 동아시아문화

센터 원장이 25일 광주 동구 광주아트홀에서 5·18 민주화운동을 다룬 연극 '애꾸눈

광대' 관람을 마친 뒤 객석 일부에서 책임 있는 행동 등 부친의 진정성 있는 사죄가

먼저라는 항의가 터져 나오자 고개 숙이고 있다. 2021.5.25 hs@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