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태우 전 대통령이 1990년 12월 14일 옛 소련 크레믈린궁에서 미하일
고르바초프 대통령과 정상회담에 앞서 악수하고 있다. 노태우가 자랑하는
북방외교의 하이라이트 장면이다. 연합뉴스
노태우 전 대통령. 뉴시스
사진은 지난 1995년 10월 27일 노태우 전 대통령이 서울 연희동 자택에서
대국민사과문을 발표하며 눈물을 훔치는 모습.
[사진=연합뉴스]
전두환과 달랐던 노태우의 유언 "제 과오에 깊은 용서 바란다
【뉴스퀘스트=김동호 기자】 지난 26일 사망한 고(故) 노태우 전 대통령의 유언이 공개됐다.
이날 공개된 유족이 공개한 유언에 따르면 노 전 대통령은 "저의 과오들에 대해 깊은 용서를 바란다"고 말했다.
이는 12.12쿠데타와 5.18민주화운동 유혈진압 등 각종 범죄행위에 대한 반성의 뜻으로 보인다.
그는 생전에도 아들 재헌씨를 5.18 민주화묘역에 보내 헌화를 하는 등 사죄의 뜻을 표하기도 했다.
지난해 5월 29일 오전 광주 북구 국립 5·18민주묘지에서 노태우 전 대통령의 장남
재헌 씨가 묘소를 참배하고 있다. [사진=국립 5·18민주묘지 제공/연합뉴스]
노 전 대통령의 이 같은 행동은 아직까지 자신의 행위에 대해 사죄 및 반성의 뜻을 표하지 않고 있는 전두환씨와 극명한 대조를 이루고 있다.
노 전 대통령은 또 유언을 통해 "주어진 운명을 겸허하게 그대로 받아들여, 위대한 대한민국과 국민을 위해 봉사할 수 있어서 참으로 감사하고 영광스러웠다"며 "생애에 이루지 못한 남북한 평화통일이 다음 세대들에 의해 꼭 이루어지기를 바란다"는 말했다.
한편, 유족측은 노 전 대통령이 생전에 "장례는 국법에 따라 최대한 검소하게 해주시길 바라셨다"며 "장례 절차는 정부와 협의 중이며, 장지는 이런 뜻을 받들어 재임시에 조성한 통일 동산이 있는 파주로 모시는 것을 협의 중"이라고 밝혔다.
유족인 부인 김옥숙 여사와 딸 노소영 아트센터 나비 관장이 빈소를 지키는 가운데 각계의 조문 발길이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영국 출장 중이던 아들 노재헌 변호사는 이날 오전 귀국해 곧바로 빈소로 올 것으로 전해졌다.
유족 측은 또한 이날 노 전 대통령의 장례 절차를 포함한 고인의 생전 뜻 등 공식 입장을 발표할 예정이다.
다음은 故노태우 대통령 유족 입장 전문.
오랫동안 병환에 계시던 사랑하는 저희 아버지 노태우 전 대통령께서 10월26일 오후 운명하셨습니다.
많은 분들의 애도와 조의에 감사드리며 아버지께서 돌아가시기 전 평소에 남기신 말씀을 전해드립니다.
아버지께서는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을 겸허하게 그대로 받아들여, 위대한 대한민국과 국민을 위해 봉사할 수 있어서 참으로 감사하고 영광스러웠다" 고 하시며 "나름대로 최선의 노력을 다했지만 그럼에도 부족한 점 및 저의 과오들에 대해 깊은 용서를 바란다"고 하셨습니다.
장례는 국법에 따라 최대한 검소하게 해주시길 바라셨고 "자신의 생애에 이루지 못한 남북한 평화통일이 다음 세대들에 의해 꼭 이루어지기를 바란다"는 당부를 하셨습니다.
(장례 절차는 정부와 협의 중이며 장지는 이런 뜻을 받들어 재임시에 조성한 통일 동산이 있는 파주로 모시는 것을 협의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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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직 대통령들 박정희 전 대통령 추도식 참석 10.26 15주년이었던 지난 1994년
10월 26일 국립묘지에서 열린 박정희 전 대통령 추도식에 참석한 전직 대통령들.
전열 좌로부터 최규하, 전두환, 노태우 전 대통령.[연합뉴스 자료사진]
노태우 전 대통령이 1987년 대선의 민정당 대선후보로 지명된 뒤, 민정당 총재를
맡고 있던 전두환 전 대통령과 손을 맞잡고 있다. ⓒ연합뉴스
친구' 전두환 곁에서…'성공한 2인자' 처신 보여
노태우와 전두환, 육사 11기 동기
12·12 사태로 신군부 득세하자
노태우, 자연스레 2인자로 부상
26일 서거한 노태우 전 대통령의 삶을 돌아볼 때, 빼놓을 수 없는 존재는 '친구' 전두환 전 대통령이다. 노 전 대통령과 전 전 대통령은 육사 11기 동기다.
노 전 대통령은 군생활을 하면서 육군참모총장 수석부관, 청와대 경호실 작전차장보, 보안사령관 등 요직을 두루 거쳤는데, 전임자는 모두 전 전 대통령이었다.
이러한 둘 사이의 인연과 관계 탓에 1979년 12·12 사태로 전두환 전 대통령을 중심으로 하는 신군부가 권력을 잡자, 노태우 전 대통령은 자연스럽게 정권의 2인자로 부상하게 됐다.
1981년 예편해 민간인이 된 노 전 대통령은 정무2장관을 거쳐 체육부 장관으로 입각했다.
당시 체육부는 1988년 서울올림픽 개최를 준비하는 주무부처라 나름 요직이었다.
1985년에는 총선을 맞이해 집권여당인 민정당의 전국구 공천을 받아 당선되면서 원내로 진입했다.
초선 전국구 의원인데도 곧바로 민정당의 대표최고위원을 맡았다. 당시에는 당청(黨靑) 분리가 되지 않아 대통령이 집권여당의 총재였기 때문에, 대표최고위원은 일본의 간사장(幹事長)과 같이 청와대에 있는 총재를 대신해 여당을 관리하는 직책이었다.
전 전 대통령이 '친구' 노 전 대통령에게 여당을 맡긴 것이다.
2인자로 있는 동안 허문도·허삼수·허화평 등 이른바 '쓰리허'나 장세동 안기부장 등의 견제를 받기도 했지만, 처세를 신중하게 했기 때문에 무사히 전 전 대통령의 후계자로 낙점받을 수 있었다.
이와 관련 군인 출신답지 않게 자신의 의중을 잘 드러내지 않고, 우월한 지위에 있다고 해서 남에게 고압적인 태도를 취하지 않는 것이 2인자로서 성공한 비결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김종필 모셔서 '2인자 처세술' 들어
"참을 수 있는 것을 참는 게 아니라
참을 수 없는 것을 참는 것이 인내"
노태우 전 대통령과 김종필 국무총리. 사진은 1988년 1월 각각 민정당 총재와
신민주공화당 총재 자격으로 국회에서 회동을 할 때의 모습이다. ⓒ연합뉴스
김종필 전 국무총리의 회고록 '김종필 증언록' 79장(章) '2인자의 정치 철학'에 이와 관련한 대목이 나온다.
노태우 전 대통령이 신군부 집권 이후 고초를 겪던 김종필 전 총리의 마음을 사 '2인자 처세술'을 전해듣게 되는 과정이다.
1980년 8월, 보안사 서빙고 분실에 46일간 무단 감금돼 있다가 풀려나 청구동 자택으로 돌아온 김종필 전 총리에게 당시 보안사령관이었던 노태우 전 대통령이 직접 전화를 걸었다.
김 전 총리를 신문로 구세군회관 인근 보안사 안가로 초대한 노 전 대통령은 만나자마자 고개를 숙이더니 "이렇게까지 안해도 되는 일이었는데 참으로 못할 짓을 했다"며 "용서해달라"고 사과했다.
김종필 전 총리는 보안사 합수부 조사 과정에서 216억 원을 부정축재했다는 날조된 혐의를 뒤집어쓴 뒤, 제주도의 감귤농장과 서산의 목장까지 전부 강탈당하고 막 풀려난 처지였다.
사과를 받는다고 원상회복이 될 리 없는 상황이었지만 김 전 총리는 노 전 대통령의 솔직하고 예의바른 어투에 마음이 풀렸다고 회상했다.
김 전 총리가 "기왕 이렇게 됐으니 이 나라를 잘 이끌어달라"고 당부하자, 노 전 대통령은 "선배로서 충고해줄 말은 없느냐"고 간곡히 물었다.
그러자 김 전 총리는 "좋든싫든 이미 권력의 길에 들어섰다.
내가 보기엔 당신이 2인자인 듯 한데 처신을 제대로 해서 온전히 살아남아야할 것"이라며 △절대로 1인자를 넘겨다보지 말라 △조금도 의심을 받을만한 일은 하지 말라는 조언을 했다.
특히 김종필 전 총리는 "때가 올 때까지 1인자를 잘 보좌하면서 억울한 일이 있어도 참고 넘겨야 한다"며 "참는다는 것은 참을 수 있는 것을 참는 게 아니라 참을 수 없는 것을 참는 게 인내"라는 말도 남겼다.
김 전 총리의 조언대로 '때가 올 때까지' 견제와 의심을 참고넘긴 노태우 전 대통령은 마침내 전두환 전 대통령에 이어 대통령의 자리에 올랐다.
대통령은 그간 전두환 전 대통령이 전임자로서 물려준 군 요직과는 달랐다. 무엇보다도 노태우 전 대통령에게는 1971년 대선 이후 16년만에 국민이 직접 직선제로 선출했다는 정통성이 있었다.
'5공 청산 바람' 속에 소원해졌다 회복
부음을 전해들은 전두환, 말없이 눈물
본인도 투병…빈소 조문은 어려울 듯
노태우 전 대통령과 전두환 전 대통령 ⓒ연합뉴스
두 사람의 '친구' 관계는 1988년 총선을 통해 구성된 13대 국회에서의 '5공 청문회'를 거치며 파국을 맞이했다.
국회에 5공비리 조사특위, 광주민주화운동 진상조사특위가 잇따라 구성됐다.
자신의 최측근이던 장세동 전 안기부장까지 국회에 증인으로 소환되자, 전두환 전 대통령은 이를 막아주지 않는 노태우 전 대통령에게 배신감을 느끼며 백담사에 칩거했다.
노태우 전 대통령은 회고록 '국가, 민주화, 나의 운명' 18장(章) '5공 청산 바람'에서 "우리는 우정과 동지애가 유난히 강했으나 우정을 국가보다 상위에 놓을 수 없게 됐다"며 "전임자는 나에 대해 배신감을 느끼면서 서운해할 수 있는 것이고 나는 미안해하면서도 어쩔 수 없다는 마음"이라고 기술했다.
노 전 대통령과 전 전 대통령은 김영삼정부 들어 5·18 특별법이 제정된 뒤, 약 보름 간격으로 나란히 구속되면서 역설적으로 배신감·서운함·미안함 등을 털어낸 것으로 알려졌다.
1심 재판정에서 오랜만에 해후하자 전두환 전 대통령은 노태우 전 대통령에게 대뜸 "자네 구치소에서 계란후라이 주나"라고 물었다.
이에 노 전 대통령이 "안 줘"라고 답하자 전 전 대통령이 "우리도 안 줘"라고 답하면서 짧은 대화를 끝마쳤는데, 이 때 두 사람 사이의 앙금이 해소됐다는 설명이다.
실제로 1심 선고 과정에서 노 전 대통령과 전 전 대통령이 손을 맞잡은 모습을 찍은 보도사진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이날 노태우 전 대통령의 서거 소식을 전해들은 전두환 전 대통령은 말없이 눈물을 보인 것으로 전해졌다.
전두환 전 대통령측 관계자는 이날 연합뉴스를 통해 "노태우 전 대통령 별세 소식을 이순자 여사를 통해 전해듣고 아무 말씀도 하지 않은 채 눈물만 지으셨다"고 전했다.
'친구' 전 전 대통령도 혈액암의 일종인 다발성 골수종 진단을 받고 투병 생활을 하고 있다.
전 전 대통령이 노 전 대통령의 빈소를 조문할 가능성은 크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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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태원 SK그룹 회장과 어제 26일 별세한 노태우 전 대통령의 딸 노소영 아트센터
나비 관장. /사진=뉴시스
인내심으로 버틴 아버지" 노태우 딸 노소영 최태원 오늘 만나나
대한민국 제13대 대통령을 지낸 노태우 전 대통령의 딸 노소영 아트센터 나비 관장의 '아버지의 인내심' 이라는 글이 재주목받고 있다.
노 전 대통령이 어제 26일 숙환으로 별세한 가운데서다.
오늘 27일 노 관장의 페이스북을 보면 그가 지난 4월 10일 '아버지의 인내심'이라는 올린 제목의 글이 눈에 띈다.
노 관장은 "한마디 말도 못하고 몸도 움직이지 못한 채 침대에 누워 어떻게 십여년을 지낼 수 있을까? 나는 단 한 달도 그렇게 살 수 없을 것 같다"며 노 전 대통령의 병상 생활을 전했다.
그는 이어 "소뇌 위축증이란 대뇌는 지장이 없어서 의식과 사고는 있다.
때로는 눈짓으로 의사 표현을 하시기도 하는데, 정말 하고픈 말이 있을 때 소통이 잘 되지 않으면 온 얼굴이 무너지며 울상이 되신다. 아버지가 우는 모습이다. 소리가 나지 않는다"고 적었다.
노 관장은 "어제 또 한 고비를 넘겼다.
호흡 보조장치에 문제가 생겼던 것이다.
지상에서 아버지께 허락된 시간이 앞으로 얼마나 남았는지 알 수 없지만, 아버지는 나에게 확실한 교훈을 주셨다. 인내심이다.
초인적인 인내심으로 버티고 계신 아버지를 뵈면, 이 세상 어떤 문제도 못 참을 게 없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참.용.기.(참고 용서하고 기다리라)가 아버지의 좌우명이다.
정말 어려운 길임에 틀림없다"며 글을 마무리했다.
노 관장은 지난 5월 8일 어버이날에도 아버지 노 전 대통령을 페이스북에 언급했다.
그는 "아버지가 오늘따라 두 눈을 크게 뜨고 계신다. 이때다,
싶어 평소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쏟아냈다"며 "아빠의 사랑 듬뿍 받고 자랐어요.
그게 저를 버티는 힘이예요"라고 강조했다.
한편 노 전 대통령 빈소는 오늘 오전 10시 서울대병원 장례식장 3호실에 차려진다.
유족으로는 부인 김옥숙 여사와 딸 소영씨와, 아들 재헌씨가 있다.
최태원 SK그룹 회장이 조문을 할 예정인 가운데 최 회장과 노 관장이 이 자리에서 만날지도 관심이 쏠린다.
ck7024@fnnews.com 홍창기 기자
사진은 1989년 교황 요한바오로2세 방한 당시 노태우 전 대통령.
과오에 깊은 용서를…장례는 국법 따라 검소하게" 노태우, 유언
26일 89세 일기로 운명…정치권, 애도 표하면서도 역사적 잘못 비판
2021.10.26. (뉴시스)노태우 전 대통령이 26일 오후 89세를 일기로 운명했다.
과오를 용서해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유족은 이날 고인이 생전에 남긴 말을 전한다며 성명을 발표했다.
정치권은 애도의 뜻을 밝히면서도 고인이 생전에 저지른 잘못을 날카롭게 비판했다.
유족은 "오랫동안 병환에 계시던 사랑하는 저희 아버지 노태우 전 대통령께서 26일 오후 운명했다.
많은 분들의 애도와 조의에 감사드리며 아버지께서 돌아가시기 전 평소에 남긴 말씀을 전한다"며, "아버지께서는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을 겸허하게 그대로 받아들여 위대한 대한민국과 국민에게 봉사할 수 있어서 참으로 감사하고 영광스러웠다'고 했다"고 밝혔다.
이어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지만 그럼에도 부족한 점 및 저의 과오들에 깊은 용서를 바란다'고 하셨다"며, "장례는 국법에 따라 최대한 검소하게 해주길 바라셨고 '자신의 생애에 이루지 못한 남북한 평화통일을 다음 세대들이 꼭 이루기를 바란다'는 당부를 했다"고 덧붙였다.
유족은 "장례 절차를 정부와 협의하고 있으며 장지는 (고인이 대통령으로) 재임할 때 조성한 통일 동산이 있는 파주로 모시는 것을 협의 중"이라고 말했다.
청와대는 노 전 대통령의 장례식을 국가장으로 치를지 검토한다는 입장이다.
이날 오후 YTN 라디오 '이동형의 뉴스정면승부'에 출연한 박수현 청와대 국민소통수석은 "법적·절차적 문제와 국민 수용성 문제를 기준으로 살피겠다"며, 27일 오전에 논의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한편 정치권은 노 전 대통령의 죽음에 애도를 표하면서도 군사 쿠데타를 일으키고 민간인을 학살한 점을 비판했다.
다만 여아간 비판의 온도는 차이가 났다.
이용빈 더불어민주당 대변인은 "노 전 대통령이 영욕의 삶을 내려놓고 오늘 향년 89세 일기로 별세했다"며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노 전 대통령은 12·12 군사쿠데타의 주역이자 5·18 광주민주화운동 강제 진압에 가담한 역사의 죄인"이라며, "직접 선거로 당선됐지만 결과적으로 군사독재를 연장했고 부족한 정통성을 공안 통치와 3당 야합으로 벗어나고자 했던 독재자"라고 꼬집었다.
다만 그는 노 전 대통령이 남북기본합의서를 채택하고 중국과 수교를 수립한 것과 북방정책을 펼친 점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퇴임 이후 16년에 걸쳐 추징금을 완납한 것과 그의 자녀들이 광주를 찾아 사과하며 끊임없이 반성하는 모습을 보였다는 점도 강조했다.
이 대변인은 "그것으로 억울하게 돌아가신 광주영령과 5.18 유가족 및 광주시민을 위로할 수 없겠지만 그의 마지막은 여전히 역사적 심판을 부정하며 사죄와 추징금 환수를 거부한 전두환 씨의 행보와 다르다"며, "우리 역사에 다시는 과오가 반복되는 일이 없도록 더욱 엄정한 역사적 평가가 이뤄지길 바란다"고 말했다.
정의당 역시 애도를 표했지만 비판적인 논평을 내놨다. 이동영 정의당 수석대변인은 "노 전 대통령이 1980년 5월의 진실을 밝히지 않고 진정 어린 참회도 없이 생을 마감했다"며, "안타깝고 무거운 마음을 지울 수 없다"고 말했다.
이어 "고인의 역사적 평가는 민주주의와 인권을 지향하는 우리 공동체의 과제로 남겨 놓았다"며, "어둡고 암울했던 시대를 기억하며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고 밝혔다.
허은아 국민의힘 수석대변인은 "고인은 1987년 6·29 선언으로 직선제 개헌 요구를 받아들여 직선제 하에서 대통령에 선출됐다"며 "재임 당시 △남북한 동시 유엔 가입 △남북 기본합의서 채택 △북방외교 등의 성과도 거두었다"고 평가했다.
그러면서도 "12·12 군사쿠데타로 군사정권을 탄생시킨 점 그리고 5·18민주화운동에서 민간인 학살에 개입한 과오를 어떠한 이유로도 덮을 수 없다"고 말했다.
이어 "국민의힘은 불행한 역사가 다시는 되풀이되지 않도록 하겠다"며,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고 밝혔다.
이슬 기자 dew@newshanku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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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2월 25일 노태우 대통령이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 광장에서 전두환
이임대통령, 윤보선.최규하 전 대통령 및 3부요인, 91개국 경축사절, 각계대표
등이 참석한 가운데 거행된 제13대 대통령 취임식 참석하여 취임 연설하는 모습
/[사진=국가기록원]
노태우 사망] 기묘한 우연…박정희 前대통령과 같은날 10·26에 떠나
생전 인연도 눈길…
5사단 소대장 시절 사단장이 박 前대통령
(서울=연합뉴스) 류미나 기자 = 노태우 전 대통령이 사망한 26일은 고 박정희 전 대통령의 서거일(1979년 10월 26일)이기도 하다.
물론 우연의 일치다.
희귀병인 소뇌위축증을 앓아온 노 전 대통령은 오랜 시간 병상 생활을 해왔다.
그럼에도 두 전직 대통령이 한 날 유명을 달리했다는 점은 흔치 않은 우연이다.
박 전 대통령은 지난 1979년 당시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총탄에 맞아 생을 마감했다.
노 전 대통령과 박 전 대통령의 인연도 눈길을 끈다.
노태우 전 대통령 회고록에 따르면 1955년 육군사관학교(11기)를 졸업하고 소위로 임관한 노 전 대통령은 이듬해 제5사단 소대장으로 부임한다.
이 때 5사단 사단장을 박 전 대통령이 맡고 있었다.
당시 박 사단장은 노 소위를 각별하게 챙겼다고 한다.
노 전 대통령은 회고록에서 당시 박 사단장에 대해 체구는 작았지만, 큰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평가한 바 있다.
박 전 대통령 서거 이후 육군 9사단장이던 노 전 대통령은 1979년 12월12일 육사 11기 동기생인 전두환 전 대통령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 '하나회' 세력의 핵심으로서 군사쿠데타를 주도했다.
이후 직선제를 통해 13대 대통령에 취임한 노 전 대통령은 첫 민선 대통령으로 기록됐다.
하지만 사실상 전 전 대통령의 정치적 후계자나 다름없었다는 점에서, 박 전 대통령부터 이어온 군부정권의 연장선이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서울=연합뉴스) 사진은 1981년 국군보안사령관 노태우 대장 전역식.
2021.10.26 [연합뉴스 자료사진]
photo@yna.co.kr
minaryo@yna.co.kr <저작권자(c) 연합뉴스,
1987년 민정당 전당대회에서 대통령 후보로 지명된 노태우(왼쪽) 대표와 전두환
대통령이 손을 맞잡고 대의원들의 환호에 답하고 있다. 연합뉴스
전두환 "날 알아보시겠나"에 눈 깜박인 노태우.. 7년전 마지막 만남
전두환, 신군부 이끌고 노태우 '2인자'
全, 靑 입성 후 논공행상 계기로 거리
盧 정권 '5공 청문회'로 全 백담사 유배
전두환, 노태우 부고에 말 없이 눈물
노태우 전 대통령의 인생에서 빠트릴 수 없는 인물은 전두환 전 대통령이다.
육군사관학교 11기 동기인 두 사람은 군내 사조직인 '북극성회'와 '하나회'를 이끈 주축으로 1979년 10·26 사태에 따른 혼란기를 틈타 12·12 군사 반란에 앞장섰다.
이후 앞서거니 뒤서거니 대통령 자리까지 올랐고 퇴임 후 내란죄로 구속되는 영욕을 함께 했다.
1955년 소위로 임관한 두 사람은 1961년 박정희 전 대통령의 5·16 군사 쿠데타부터 본격적으로 손을 맞잡았다.
후배들을 이끌고 '군사혁명 지지 카퍼레이드'에 나서면서다.
이후 12·12 군사 반란을 거치면서 정치에 노골적으로 개입하는 경위도 동일했다.
전 전 대통령이 전면에 나서 신군부를 이끌었다면 노 전 대통령은 이를 뒷받침한 '2인자'였다.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은 육사 생도 시절부터 하나회 등 군내 사조직을 만들어
정치에 관여했다. 육사 생도 시절 11기 하나회 멤버들. 뒷줄 맨 오른쪽이 노 전 대통령,
그 바로 옆이 전 전 대통령이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노 전 대통령의 결혼식에서 사회를 봤을 만큼 돈독했던 두 사람의 우정에 금이 가기 시작한 계기는 전 전 대통령이 청와대에 입성하면서다.
노 전 대통령이 내심 육군참모총장 임명을 바랐지만, 오히려 반강제적으로 전역을 당했기 때문이다.
육군 수장이 되지 못한 노 전 대통령은 전두환 정권에서 체육부·내무부 장관 등을 거치며 차기 대선주자로 입지를 다졌다.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요구한 1987년 6월 민주항쟁도 두 사람의 우정을 시험한 사건이었다.
민주정의당 대선후보였던 노 전 대통령은 청와대 입성에 빨간불이 켜지자, 직선제 개헌을 수용하는 6·29 선언을 발표하며 임기 말 전두환 정권과 거리두기에 나섰다.
노 전 대통령 취임 후 두 달 뒤 치러진 1988년 13대 총선은 두 사람이 틀어진 결정적 계기였다.
"총선 승리를 위해서는 5공과 단절해야 한다"는 참모들의 요구를 노 전 대통령이 수용하면서다.
그간 '상왕' 노릇을 했던 전 전 대통령은 국가원로자문회의 의장에서 내려왔고, 전 전 대통령의 동생인 전경환 새마을운동본부 명예총재는 수십억 원을 횡령한 혐의로 구속됐다.
2003년 2월 25일 국회에서 열린 제16대 대통령 취임식 취임선서 중 김영삼, 노태우,
전두환 전 대통령. 고영권 기자
13대 총선 참패로 여소야대 국회가 되면서 정국 주도권은 야권으로 넘어갔다.
야권의 '5공 비리 청산' 요구에 전 전 대통령은 자신이 유치했던 1988년 서울올림픽 개막식에 참석할 수 없었다. 노 전 대통령이 참석을 만류한 것이다.
그해 11월에 열린 '5공 청문회' 이후 전 전 대통령은 강원도 인제 백담사로 유배를 떠나야 했다.
전 전 대통령의 백담사 유배 동안 노 전 대통령은 권력 기반 강화를 위해 YS(김영삼 전 대통령)의 통일민주당, JP(김종필 전 국무총리)의 신민주공화당과 3당 합당(1990년)을 선언하면서 전 전 대통령과의 거리는 더욱 멀어졌다.
두 사람은 1996년 1월 5·18 민주화운동 진압과 12·12 군사반란 등에 따른 내란죄로 구속 기소되면서 또다시 언론의 조명을 받았다.
1996년 8월엔 1심 선고를 기다리는 재판정에서 두 손을 맞잡은 모습은 화제가 됐다.
1996년 8월 26일 12·12사건 17년 만에 열린 선고 공판에서 서로 위로하듯 손을
맞잡고 있는 노태우 전 대통령과 전두환 전 대통령. 한국일보 자료사진
노 전 대통령은 2011년 회고록에서 "우리는 우정과 동지애가 강했지만 우정을 국가보다 상위에 놓을 수 없게 됐다.
전임자는 내게 배신감을 느끼며 서운해할 수 있는 것이고 나는 미안해하면서도 '어쩔 수 없다'는 마음을 가졌다"고 했다.
2002년 전립선암 수술 이후 노 전 대통령이 오랜 투병생활을 하면서 두 사람 간에는 좀처럼 화해의 자리가 마련되지 못했다.
다만 전 전 대통령은 2014년 8월 예고 없이 노 전 대통령 자택을 찾아 병상에 누운 노 전 대통령을 향해 "이 사람아, 나를 알아보시겠는가"라고 말을 건넸고, 노 전 대통령은 눈을 깜빡이며 화답했다.
두 사람의 생애 마지막 만남으로 전해진다.
전 전 대통령은 노 전 대통령의 부고 소식을 듣고 별 말 없이 눈물을 흘린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혈액암의 일종인 다발성 골수종 진단을 받고 투병 중이어서 빈소를 조문할 가능성이 크지 않다.
정승임 기자 choni@hankookilbo.com
김지현 기자 hyun1620@hankookilbo.com
ⓒ한국일보 www.hankookilbo.com
대한민국 제13대 대통령을 지낸 노태우 전 대통령이 26일 숨졌다. 사진은 1996년
12.12 및 5.18사건 항소심 선고공판에 출석한 노태우·전두환 전 대통령의 모습.
연합뉴스 자료사진
대한민국 제13대 대통령을 지낸 노태우 전 대통령이 26일 숨졌다. 사진은 1987년
민정당 전당대회에서 대통령 후보로 지명된 노태우 대표(왼쪽)가 전두환 대통령과
손을 맞잡고 대의원들의 환호에 답하는 모습. 연합뉴스 자료사진
맞잡은 두손…전두환, 노태우 소식에 말없이 눈물만
[
노태우 전 대통령을 별세 소식에 오랜 친구인 전두환 전 대통령이 말없이 눈물을 흘린 것으로 전해졌다.
고인의 친구이자 육사 동기인 전 전 대통령의 조문이 어렵다는 전망이 많다.
그는 현재 혈액암의 일종인 다발성 골수종 진단을 받고 투병 중이다.
두 사람은 1996년 1월 5·18 민주화운동 진압과 12·12 군사반란 등에 따른 내란죄로 구속 기소된 뒤 그해 8월엔 1심 선고를 기다리는 재판정에서 두 손을 맞잡은 모습은 화제가 된 바 있다.
노 전 대통령은 2011년 회고록에서 “우리는 우정과 동지애가 강했지만 우정을 국가보다 상위에 놓을 수 없게 됐다. 전임자는 내게 배신감을 느끼며 서운해할 수 있는 것이고 나는 미안해하면서도 ‘어쩔 수 없다’는 마음을 가졌다”며 정국에 따라 서로의 사이가 멀어질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설명하기도 했다.
두 사람의 생애 마지막 만남은 2014년 8월로 남았다.
사진은 지난 1994년 10월 26일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에서 열린 박정희 전 대통령
15주기 추모식에 최규하, 전두환, 노태우 전 대통령(왼쪽부터)이 참석한 모습.
연합뉴스 자료사진
전 전 대통령이 갑자기 노 전 대통령의 자택을 방문해 김옥숙 여사에게 “노 대통령을 좀 만나러 왔다”고 했다.
전 전 대통령은 병상에 누워있는 노 전 대통령에게 “이 사람아, 나를 알아보시겠는가”라고 했고, 의사소통이 어려운 노 전 대통령은 김 여사가 “알아보시면 눈을 깜빡여보시라”고 하자 눈을 깜빡인 것으로 알려졌다.
노 전 대통령은 2002년 전립선암 수술 이후 오랜 투병생활을 해왔다.
신은정 기자 sej@kmib.co.kr
GoodNews paper ⓒ 국민일보(www.kmib.co.kr),
사진은 2019년 <더팩트> 카메라에 단독으로 잡힌 노태우 전 대통령의 모습으로,
당시 노 전 대통령은 치료를 마치고 입원한 지 나흘 만에 휠체어에 의지해 퇴원했다.
/김세정 기자
제6공화국을 이끌었던 대한민국 제13대 노태우 전 대통령. /서울신문
노태우 전 대통령 별세 '영욕의 삶 저물다
[더팩트ㅣ이선화 기자]
노태우 전 대통령은 제6공화국을 이끌었던 대한민국 제13대 대통령이다.
1932년 12월 4일 경북 달성군에서 태어나 경북고등학교와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노 전 대통령은 국군 보안사령관, 내무부 장관, 제12대 국회의원 등을 지내다 1987년 대통령에 취임했다.
1987년 전두환 대통령과 나란히 서 있는 노태우 전 대통령(왼쪽)의 모습.
/서울신문
노 전 대통령은 육군사관학교 11기로 입교했을 당시 인연을 맺었던 전두환 전 대통령과 '12·12쿠데타'를 일으켰다.
군사 쿠데타를 주도했던 육군 사조직 '하나회'는 당시 육군 9사단 사단장이었던 노 전 대통령이 핵심 세력이었다.
쿠데타에 성공한 두 전 대통령은 1980년 5월 17일 비상계엄확대조치를 단행하고 본격적으로 권력을 장악했다.
1987년 6월 29일 서울 종로 민정당사에서 대통령 직선제 개헌과 김대중 사면복권
등을 골자로 한 6·29 특별선언을 발표하는 노 전 대통령. /서울신문
5공화국 말 신군부의 민주정의당(민정당)의 대통령 후보로 지명된 노 전 대통령은 '직선제 개헌', '김대중 사면', '언론기본법 폐지' 등을 내용으로 한 6·29선언을 발표했다.
이후 민주화 물결에 힘입어 1987년 대선에서 장장한 대통령 후보였던 김영삼·김대중·김종필 후보를 누르고 대통령에 당선됐다.
노 전 대통령의 취임식 당시 모습. /서울신문
직선제가 부활한 뒤 처음 당선된 대통령으로서 노 전 대통령은 취임 기간 88서울올림픽 개최와 남북한 유엔 동시 가입, 북방외교 등의 성과를 냈다.
퇴임 후에는 군사 반란 주도 및 5·18 광주 민주화운동을 무력 진압, 수천억 원 규모의 비자금 조성 등의 혐의로 징역 17년형과 추징금 2600억 원을 선고받았다.
1989년 노태우 전 대통령이 방한한 교황 요한바오로2세와 대화하는 노 전 대통령.
/뉴시스
1997년 12월 김영삼 정권 당시 특별사면 조치로 석방된 노 전 대통령은 지난 2002년 암 수술을 받았고, 희소병인 소뇌위축증과 천식 등의 지병으로 오랜 병상 생활을 해왔다.
최근 병세 악화로 서울대병원에 입원해 의료진의 집중 치료를 받았지만 끝내 회복하지 못했다.
유족으로는 부인 김옥숙 여사와 딸 소영, 아들 재헌이 있다. 소영 씨와 이혼 소송 중인 최태원 SK 그룹 회장이 사위이다.
1989년 노태우 전 대통령 내외가 방한한 교황 요한바오로2세와 기념촬영 하는 모습.
/뉴시스
1991년 UN헌장 의무수락 선언서에 서명하는 노 전 대통령. /뉴시스
1992년 청와대 녹지원에서 외손녀 윤정을 품에 안은 노태우 전 대통령 부부.
/서울신문
노 전 대통령을 예방한 박근혜 전 대통령(당시 한나라당 대표)와 악수하는 모습.
/서울신문
2004년 10월 서울 올림픽공원 테니스코트에서 열린 샤라포바와 안네 크레머의
준결승전을 본 전 노태우 대통령이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차에 오르고 있는 모습.
/이효균 기자
2015년 더팩트 카메라에 단독 포착된 서울대병원에서 퇴원하는 노 전 대통령.
/이덕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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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희동 파문'과 전두환·노태우의 '생명보험'
[김종성의 히,스토리 : 역대 선거 이야기] 1992년 대선 앞두고 벌어진 일
1980년 이후로 전두환은 국민과 반대 진영에 위압적 자세를 보이거나 도피하는 모습을 보이거나 뻔뻔한 모습 등을 보였다.
잠깐 동안에 불과했지만, 그가 다소 색다른 태도를 보인 기간도 있었다.
김대중에게 꽤 노골적으로 호감을 표시한 1992년 대통령선거 때가 바로 그 시기다.
그해 대선은 5·18 진상규명을 향한 국민적 열기가 점차 고조되는 시기에 치러졌다.
전두환의 신변이 불리해지던 때에 치러졌던 것이다.
이때 전두환은 노태우와 더불어 기본적으로 민주자유당(민자당)을 지지하면서도 만약을 대비해 김대중에게도 일종의 보험을 들어놓으려 했다.
잘못하면 사형을 받을 수도 있었으므로 '생명보험'을 가입하려 했다고 말하는 게 정확할 것이다.
전두환의 '생명보험'
전두환은 김대중에 대한 호감을 표시하는 데 주력했다.
이것이 상당히 노골적이어서 파문이 일어났을 정도다.
김영삼이 5월 19일 민자당 후보로 선출되고 김대중이 26일 민주당 후보로 선출된 뒤인 1992년 6월 7일, 전두환은 육사 출신 민주당 의원들을 만난 자리에서 '연희동 파문'으로 보도될 만한 의미 깊은 발언을 남겼다.
그달 20일자 <한겨레> 기사 '대선 앞둔 정가에 연희동 파문'은 "지난 7일 장준익·나병선·임복진 의원 등 민주당 안 육사 출신 3인과의 만찬 자리에서 그가 김대중 대표를 격찬"했다고 한 뒤 "최근 전씨나 그 측근들의 언행 및 감정에 따를 경우, 전씨는 김영삼 대표보다는 김대중 대표 쪽으로 미세하게나마 기운 듯한 인상을 배제할 수 없다"고 분석했다.
▲ 1992년 6월20일자 한겨레신문 ⓒ 한겨레
그때만 해도 여권과 군부에 영향력이 있었던 전두환 측이 아무런 대가도 기대하지 않고 김대중에 대한 호평을 흘린 것은 아니다.
위 기사는 "정치권에서 먼저 제의해오지 않는 한, 그가 먼저 정치적 접촉을 시도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전두환 측근들은) 전하고 있다"며 "지난번 김영삼 대표가 그러했듯이 김대중 대표가 찾아온다 해도 환영하겠다는 것"이라고 보도했다.
자신들이 김대중에 대한 호평을 흘려놓고도 '우리가 먼저 나서지는 않을 것'이라며 반응을 기대했던 것이다.
전두환은 5월 27일 연희동 자택을 방문한 김영삼처럼 김대중도 적극적 의사표시를 해주기를 기대했다. 그런 반응을 기대하고 위와 같은 내용을 언론에 내보냈던 것이다.
전두환은 좀 더 적극적인 방법으로도 시그널을 보냈다.
그해 봄에 있었던 둘째아들 전재용 결혼식에 화환을 보내준 데 대한 답례를 명분으로 전재용 부부뿐 아니라 장남 전재국 부부까지 동교동의 김대중 자택에 파견했다.
9월 4일자 <동아일보> 3면은 전두환의 며느리와 아들들이 약 40분간 동교동 자택에 머물렀으며, 김대중이 이들에게 "나라의 장래를 위해서도 정치보복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나의 소신"임을 강조했다고 보도했다.
전두환이 기대하는 '덕담'을 신혼부부를 통해 전달했던 것이다.
노태우의 '생명보험'
전두환뿐 아니라 노태우도 적극적이었다.
그 역시 김영삼뿐 아니라 김대중에게도 보험을 들어두려 했다.
현직 대통령인 그가 야당 후보에게 얼마나 적극적이었는지는 대선 자금을 제공해주겠다며 접근한 사실에서도 나타난다.
김영삼 정부 때인 1995년 10월 19일 민주당 박계동 의원이 국회 대정부 질문에서 노태우 비자금 4천억 원을 폭로한 뒤 크게 논란이 됐던 것처럼, 현직 대통령이던 1992년 당시의 노태우는 김대중에게 두 차례나 그 같은 제의를 했다.
1995년 10월 27일자 <경향신문> 1면은 김대중 측근의 말을 인용해 "지난 대선 때 노태우 전 대통령은 야당 후보였던 김대중 국민회의(1992년엔 민주당) 총재에게도 선거자금을 제공하겠다고 수차례 제의했던 것으로 26일 확인했다"고 보도했다.
위 신문 5면은 김대중 핵심 측근의 말을 인용해 그 두 번의 제의 중에 한 번은 김대중 본인에게 직접 표시됐다고 전했다. 하지만 김대중은 대선 자금을 거부했다고 밝혔다.
다만, 대선 자금과 관계없는 위로금 명목의 20억 원은 받은 사실이 있다고 시인했다.
"선관위는 전체회의에서 정당과 후보자가 부담하는 선거비용 제한액을 지난 13대 때의 139억여 원보다 164% 증가한 367억여 원으로 결정했다"(<매일경제> 1992.11.16.)는 보도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20억 원은 법정 대선 비용에 훨씬 못 미쳤다.
노태우 측은 20억보다 훨씬 많은 대선 자금을 제공하고 싶어 했으나, 김대중이 거절하는 바람에 위로금 명목의 돈을 제공하는 것으로 그쳤다.
김대중에 대한 노태우의 신호는 헌정 사상 최초로 대통령이 대선 전에 여당 당적을 버리는 사건으로도 나타났다고 볼 수 있다.
노태우는 대선을 앞둔 1992년 9월 18일 민자당 탈당과 중립내각 구성을 선언한 뒤(9·18 선언) 10월 5일 당적을 이탈하고 18일 현승종을 총리로 지명함과 함께 중립내각을 맡기는 초유의 정치행보를 선보였다.
대선 이틀 전인 12월 16일에 김기춘 전 법무부장관이 초원 복국집에 부산 지역 기관장들을 모아놓고 "우리가 남이가?"라며 관권선거를 획책한 데서도 느낄 수 있듯이, 현승종 중립내각은 당초의 표방과 달리 선거 중립을 제대로 실현시키지 못했다.
그런 한계가 있기는 했지만, 김영삼 입장에서는 9·18 선언이 상당한 타격이 됐다.
그로 인해 대선 자금을 모으는 데도 애로를 겪었다.
대통령이 여당 당적을 버린 데다가 중립내각까지 출범시킨 뒤인 11월 6일, 유창순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 회장이 '정치자금 불(不)모금'을 선언하는 일이 있었다.
전경련이 기업들로부터 선거자금을 모아 여당에 제공하는 일이 없을 거라고 선언한 것이다.
이로 인해 김영삼이 겪은 일을 12월 1일자 <동아일보> '재벌 총수, 어느 후보에 돈 대나'는 이렇게 보도했다.
"과거 역대 대통령선거에서 집권 여당은 자산 규모와 매출액을 기준으로 재벌 그룹별로 정치자금을 할당하는 식으로 거두어 들였다.
노태우 대통령의 중립선언으로 이제 집권 여당의 대선 자금을 기업에 떠맡기는 형태의 반강제 징수 방식은 사라졌다고 할 수 있다.
자금 사정도 여의치 않은 재벌 기업들은 노 대통령의 중립선언 이후 정치권의 자금 요구를 순순히 수용하지 않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에 따라 역대 집권당 후보들과는 달리 자금 문제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민자당 김영삼 후보는 요로에 SOS를 친 것으로 알려져 있다."
▲ 2006년 10월 10일 청와대에서 열린 전직 대통령 초청 간담회 자리에 참석하려고
노무현 대통령과 김대중, 김영삼, 전두환 등 전직 대통령들이 함께 오찬장으로
들어서고 있다. ⓒ 연합뉴스
5.18 학살 주범들의 위기감
노태우가 이렇게 제한적으로나마 김영삼에게 타격을 줌으로써 김대중에게 조금이나마 유리한 환경을 조성해준 것은, 그 역시 전두환과 마찬가지로 5·18 전과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해 대선의 결과가 김영삼 42.0%, 김대중 33.8%, 정주영 16.3%로 나타난 데서도 느낄 수 있듯이, 선거 전만 해도 민자당이 승리할지 여부를 확신하기 힘들었다.
그래서 그 역시 전두환처럼 기본적으로 민자당을 응원하되 김대중에게도 생명보험을 들어놓는 이중 행보를 걷지 않을 수 없었다.
노태우가 그런 선택을 내리는 데 결정적 영향을 끼친 것 중 하나는 전두환의 발언이다.
육사 동기의 동태를 관찰하면서 그 같은 결정을 내렸던 것이다.
위의 '대선 앞둔 정가에 연희동 파문' 기사는 전두환이 민주당 의원들과의 만찬 때 김대중을 격찬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청와대 쪽이 그 사실 여부를 확인하느라 법석을 떨었다"고 보도한다.
전직인 전두환이 현직인 노태우의 의중을 확인하는 게 아니라, 현직이 전직의 의중을 확인하느라 소동을 일으켰던 것이다.
김대중에 대한 전두환의 호감 표시가 노태우가 보여준 일련의 행보에도 영향을 끼쳤다고 말할 수 있는 근거가 될 것이다.
이처럼 1992년 대선은 5·18 진상규명에 대한 국민적 열기가 고조되는 속에서 위기감을 느끼게 된 전·노 두 학살 주범의 반응이 두드러지게 표출된 기회였다.
다른 시기에는 위압적이거나 도피하거나 뻔뻔한 모습을 보였던 전두환은 이때는 김대중을 향해 공개적으로 구애하는 듯한 모습을 노골적으로 선보였다.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 광장에서 거행된 대통령 취임식장에서 노태우 대통령이
선서하고 있다. 1988년 2월 25일./조선일보DB
[사설] 6·29 선언과 북방 외교, 노태우 전 대통령 서거
노태우(盧泰愚) 전 대통령이 89세를 일기로 눈을 감았다.
그의 별세로 우리 현대사는 또 하나의 장을 넘겼다.
노태우 집권기(1988~1993)는 대한민국이 산업화 시대를 거쳐 민주화 시대로 넘어가는 가교였다.
두 시대를 주도해온 양대 세력이 가슴에 품은 가치는 달랐지만 시선은 국가 발전이라는 똑같은 목적지를 향하고 있었다.
두 세력이 충돌하며 교차했던 그의 집권기는 한 가지 잣대로 재단할 수 없는 역동의 기록이다.
노 전 대통령의 생애 역시 그러하다.
노 전 대통령의 정치 역정은 12·12 쿠데타로 권력을 잡은 신(新)군부에서 비롯됐다.
육군사관학교 4년제 정규 첫 기수인 11기 출신으로 군인으로 승승장구하고 대통령이 되기까지 동기생 전두환 전 대통령의 뒤를 따랐다.
신군부의 5·18 유혈 진압 책임은 노 전 대통령 평생의 짐이 됐다.
대통령으로서 수천억 비자금 조성도 그의 삶에 드리운 그림자다.
6·29 선언을 빼놓고 노태우를 말할 수 없다. 6·29가 없었다면 우리는 문민 민주주의 시대 진입을 위해 더 큰 희생을 치러야 했을 것이다. 6·29를 누가 주도했느냐를 놓고 말이 엇갈린다.
다만 대선을 치러야 하는 당사자로서 승리가 담보된 간선제 대신 직선제를 받아들인 노태우의 결단이 없었다면 6·29는 없었을 것이다.
군사정권부터 문민정부를 거쳐 선거를 통한 평화적 정권 교체를 이루기까지의 대한민국의 민주 발전사는 6·29라는 징검다리를 딛고 이뤄진 것이다.
1987년 6월 전국의 거리를 달군 국민적 열망이 6·29와 새 헌법을 쟁취해냈다.
야권 분열 구도 속에서 치러진 13대 대선에서 노 전 대통령은 36.6%를 얻어 당선됐다.
10월 유신 이후 15년 만에 나온 직선 대통령이었다.
노태우 재임기는 3김(金) 할거 시대였다.
1988년 총선에서 여소야대(與小野大)가 되자 그는 1990년 김영삼·김종필과 손잡는 3당 합당으로 민주자유당을 출범시켰다.
김대중의 평민당을 소외시켜 “지역 구도를 심화한 야합”이란 비판도 받았으나 과거 민주화 운동의 한 축이었던 김영삼과 연대했고 이는 군사정권의 종지부와 문민정권의 탄생으로 연결됐다.
여기에 “군 출신 대통령은 내가 마지막”이라는 노 대통령의 결심도 역할을 했다.
노태우 시대는 대외적으로 사회주의권이 붕괴하고 국제 질서가 탈냉전으로 재편되는 격변기였다.
그는 북방 외교로 이 역사적 기회를 잡았다.
각각 동서 진영의 반쪽 올림픽으로 치러졌던 1980년 모스크바, 1984년 LA 올림픽과 달리 1988년 서울 올림픽은 공산권을 포함해 160국이 참여한 최대 규모로 치러졌다.
1989년 2월 공산권 국가로는 최초로 헝가리와 대사급 외교 관계를 맺은 것을 시작으로 1990년 9월 소련, 1992년 2월 중국과 수교함으로써 북방 외교는 그 정점을 찍었다.
사회주의권 국가로의 진출이 막혀있던 반도 국가 대한민국은 북방 외교로 우리의 경제, 생활, 문화권을 전 지구적으로 확장했다.
한국 외교 최대 업적 중의 하나라 불러도 손색이 없다.
남북한 유엔 동시 가입, 남북 기본합의서 및 한반도 비핵화 공동 선언 채택 등도 노태우 정부의 업적이다.
경제·사회적 측면에서 노태우 시대 대한민국은 국민 넷 중 셋이 자신을 중산층이라고 분류할 정도로 경제성장의 과실이 국민에게 분배되며 안정을 누린 시절이었다.
연평균 7~8%대의 고속 성장을 계속하면서도 소득 불평등 지수도 낮은 수준으로 유지됐다.
노 대통령이 많은 반대를 무릅쓰고 추진한 고속철도와 인천국제공항은 이제 없어서는 안될 국가 기간 시설로 자리 잡았다.
그의 집권기 대한민국은 많은 성취를 이뤘다.
노 대통령은 전임자이자 평생의 동지였던 전두환 전 대통령 부부를 백담사에 보내면서 5공 청산 작업을 벌였지만 결국 퇴임 후 자신도 전 전 대통령과 나란히 법정에 서는 운명을 맞았다.
비자금 2628억원 조성, 12·12 군사 반란 및 5·17 내란 혐의 등으로 유죄가 확정됐다.
노태우 정부는 국민에게 가장 초라한 평가를 받아왔다. 천문학적 규모의 비자금 조성 죄과에다 ‘물태우’로 상징되는 그의 리더십에 대한 불만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다.
그는 대통령 직선제의 결단으로 민주화의 계기를 마련했지만 임기 내내 운동권의 과격 시위는 그칠 줄 몰랐다.
하지만 노 대통령은 특유의 인내로 극단적 조치를 피하며 상황을 관리했다.
이런 노태우 시대의 과도기를 디딤돌 삼아 김영삼, 김대중 시대가 올 수 있었다.
지금 대한민국은 중대한 전환기를 맞고 있다.
노 전 대통령의 6·29 선언을 계기로 성립된 1987년 체제는 이제 수명을 다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당시 민주화 운동을 했다는 현 집권 세력은 군사 독재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독선과 독주로 민주주의를 위협하고 있다.
제왕적 대통령제는 수명을 다했다는 평가를 받지만 이를 바꿀 방법이 없는 실정이다.
성장과 복지, 시장과 노동 사이의 균형점은 아직도 보이지 않는다.
미·중 충돌은 1990년대 동구 공산권 붕괴에 버금가는 충격파를 전 세계에 던지고 있다.
우리 안보의 근간이던 한·미 동맹도 예전 같지 않은데 북은 사실상 핵 보유국이 됐다.
이런 전환기적 위기를 맞은 나라 사정이 한 세대 전 노태우 시대를 재평가하게 만든다.
국내적인 세력 교체기를 관리했던 인내의 리더십, 동서 대결의 낡은 질서가 무너지는 세계의 변화를 앞서 읽었던 혜안의 통찰력이 어느 때보다 절실한 시점이다.
조선일보
국군보안사령관 노태우 대장 전역식
(서울=연합뉴스) 대한민국 제13대 대통령을 지낸 노태우 전 대통령이 26일 숨졌다.
사진은 1981년 국군보안사령관 노태우 대장 전역식. 2021.10.26 [연합뉴스 자료사진] photo@yna.co.kr
1990년 당시 노태우 대통령(가운데)이 김영삼(왼쪽), 김종필 민주자유당
최고위원과 골프를 치고 있다. (사진=국가기록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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