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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漢詩

시인의 대가 두보

 

 







 

부제: 길이 영웅의 옷깃을 적시누나!

 

두보는 실로 다정다감한 시인이었다. 그의 문학적 감수성을 말하기에 앞서 실제 삶에서도

정도 많고 눈물도 많은 사람이었다. 그는 슬픈 일을 당하면 담벼락 밑에 쪼그리고 앉아서

퍽퍽 울어대는 그런 사람이었다. 시성 두보가 추앙하던 인물은 촉상 제갈공명이었다.

성도에 살던 시절, 두보는 교외에 있는 무후사(武侯祠) -공명을 모신 사당-를 참배한 후에 그 감회를 영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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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丞相祠堂何處尋 (승상사당하처심) 승상의 사당을 어디서 찾으리오

     錦官城外栢森森 (금관성외백삼삼) 금관성 밖 잣나무 우거진 숲 속이로다

     映階碧草自春色 (영계벽초자춘색) 섬돌에 비친 푸른 풀 스스로 봄빛을 띠고

     隔葉黃麗空好音 (격엽황려공호음) 나뭇잎 새 꾀꼬리 소리 아름답도다

     三顧頻煩天下計 (삼고빈번천하계) 세 번 초려를 찾아 천하 계책을 물었고

     兩朝開濟老臣心 (양조개제노신심) 이대에 걸쳐 애씀은 노신의 마음이로다

     出師未捷身先死 (출사미첩신선사) 출정하여 이기지 못하고 몸이 먼저 가니

     長使英雄淚滿襟 (장사영웅누만금) 길이 영웅의 옷깃에 눈물 적시게 하누나!

 

 




 

 






 


 

 

 


 

 

불세출의 명재상이자 대전략가였던 공명, 그는 양양 서쪽 융중이라는 곳의 초려에 살던 중 유비의 삼고초려에 감동되어 난세를 평정하고자 출려한다. 공명 27세, 유비 47세 때의 일.

공명은 출려 당시에 진언했던 천하삼분지계에 따라 촉한에 근거, 천하 평정을 꾀하던 중에 유비가 병사하자 아들을 부탁한 유언을 받들어 나약한 군주 유선을 극진히 보필하며 나라에 충성을 다한다. 약소국 촉한의 승상으로 대업을 이루고자 고심참담하는가 하면 신기묘산(神機妙算)의 전술전략 으로 혼신의 힘을 다하여 사마의가 이끄는 위나라 군대와 싸우던 중에 오장원의 진중에서 병사하니 그의 나이 54세!

 

 

두보는 고난의 시인이기도 하였다. 그는 개인과 국가, 그리고 민족의 고난을 온몸으로 짊어지고 시를 썼다. 현실주의니 사실주의니 하는 고상한 표현보다는 ‘고난’이라는 말이 그의 삶과 문학을 가장 잘 설명해준다.

고난의 시인 두보, 중국 역사상 미증유의 전란이라 일컬어지는 ‘안사의 난’의

소용돌이 속에서 일정한 직업도, 거처도 없이 일가족을 대동하고 천하를 떠돌아다녔다. 그가 방랑하던 중에 일시적으로 정착한 곳이 바로 성도였다. 두보의 시를 좋아하며 따르던 성도 부윤(府尹)엄무의 물심양면에 걸친 도움에 힘입어 그의 일생을 통하여 비교적, 아니 가장 안정적인 생활을 하던 시절이었다. 성도 교외, 산자수명한 완화계곡 기슭에 삼간두옥- 후일 ‘두보초당’이 되었고 인근의 제갈공명 사당인 ‘무후사’와 함께 오늘날 인기 관광코스임-을 짓고 모처럼 온가족이 함께 살게 되었다. 게다가 성도부윤의 자상한 배려로

*공부원외랑(工部員外郞)이라는 유급이나 별로 일 없는 관직까지 얻게 되어

간혹 사무실에 나가기도 하면서 전란 중에 때 아닌 호사를 누리기도 한다.

 

 

두보는 보금자리를 마련하자마자 평소에 흠모해 오던 공명의 사당-금관성 (성도의 옛 이름)밖에 있음-에 찾아가 참배하고 나서 추모시 ‘촉상’을 지었다. 두보는 일생을 통하여 충신 제갈공명을 존경하여 그에 관한 시가 십여 수나 되며, 이 시는 그 중에 한 편이다.

 

 

 

 

 


 

 

이제 시구를 감상해보자 !

 

제1,2구; 꿈에도 그리던 승상의 발자취를 찾아 보고자 하건만 ‘승상의 사당을 어디서 찾을까? 아!금관성 밖 잣나무가 우거진 곳에 있구나!’라며 자문자답하고 있다. 드디어 사당에 도착하여 승상이 손수 심었다는 잣나무를 목격하였을 때의 그 감회란 이루 다 형언할 수 없었으리라.

제3, 4구; 때는 바야흐로 화창한 봄날이어서 푸른 잎과 노란 꾀꼬리를 색으로, 봄빛과 아름다운 소리를 시각과 청각으로 하여 대비를 이루고 있다.

섬돌(階)과 나뭇잎(葉), 푸른 풀(碧草)과 노란 꾀꼬리(黃려), 봄빛(春色)과 아름다운 소리(好音)는 각각 호응하고 있으며, 전체적으로 대구를 이루고 있다.

제5, 6구;삼고초려 후에 전란을 종식시키고 천하안정을 이루기 위하여 남정북벌하는가 하면, 선주 유비를 도와 한실중흥이라는 캐치프레이즈 아래 촉한

을 건국하였다. 선주 사후에는 부족한 임금-후주 유선을 보좌하여 노구를 이끌고 *육출기산, 대업을 완수코자 몸을 돌보지 않고 혼신의 힘을 다한다.

제7, 8구;허나 천운은 승상 공명의 편이 아니었던지 뜻을 이루지 못한 채 소슬한 가을바람 불던 날 마지막 싸움터, 오장원에서 그는 진몰(陣沒)한다.

애석하고 비통하기 그지없는 승상의 죽음, 그가 끝내 이기지 못하고 허망하게 죽은 것을 보고 후세의 영웅들은 흠뻑 옷깃을 적시며 눈물을 흘렸더란다.

 

 

진충보국(盡忠報國)! 승상 공명의 올곧은 충성심을 한마디로 표현한 단어다.

충성을 다하여 나라에 보답함-물론 여기서 충성의 대상인 나라는 임금이며 동시에 백성이기도 하다. 공명은 몸과 마음을 다 바쳐 마침내 죽음에 이르도록 충성을 다 하였다. 하여 후세 사람들이 그를 존경하며 숭앙하는 게 아니겠는가. 두보 또한 예외가 아니다. 아니 어쩌면 두보는 그 누구보다도 승상 공명을 추앙하고 흠모하였으며 자신의 롤 모델로 삼고자 간절히 열망하였다.

승상 공명은 진충보국할 자리(벼슬)와 기회를 얻었으나 애석하게도 시인 두보는 벼슬자리도 기회도 얻지 못하였다. 뜻을 이루지 못하고 몸이 먼저 간 승상의 죽음을 생각해 보면 애통하기 그지없는 일인데다가, 의기는 하늘을 찔렀으나 충성할 기회조차도 얻지 못했던, 이제는 늙마에 이른 두보 자신을 생각해 보면 더욱 한스럽고 비통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시인은

네 설움, 내 설움에 겨워 옷깃을 적시며 흠뻑 눈물을 흘리고 있음이리라.

 

                                             (끝, 2011.2)

 

 






 

 





*공부원외랑(工部員外郞): 두보가 성도 시절에 지냈던 관직 이름. 후세에 ‘두공부(杜工部)’라는 별칭으로 불리기도 함.

 

*육출기산(六出祁山): 제갈공명이 위나라를 공격하고자 요충지 기산에 여섯 번 출정했던 일, 곧 ‘공명의 북벌’ 을 이르는 말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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