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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DERNISM 음악

Mercedes Sosa - Mon Amour , Mercedes Sosa & Nilda Fernandez - Mon Amour

 

 

 

 

 

 

 

 

 

Ne promet pas

약속하지마

Ce que ton coeur n'a pas

네 맘속에 없는것들을

 

Ne regarde pas plus loin que tu n'iras

네가 가지 않을곳까지 너무 멀리 바라보지마

Mon amour mon amour

내 사랑, 내사랑

 

Je t'aime et je t'attends

 사랑해,,,그리고 기다릴께

Et ca fait mal dedans

마음이 너무나 아파와

 

Et ca s'arettera quand

언제쯤이면 끝날까

Mon amour

내 사랑

 

Quand sur tes murs

너의 벽 여기저기에
J'epinglais mes poemes

난 내 시들을 붙여놓을지도 모를때쯤


C'etait bien sur

물론 그건
Pour que tu me retiennes

너로하여금 날 붙잡게 하기 위해서일지도...


Mon amour, mon amour

내 사랑, 내 사랑

Je t'aime et je te veux

널 사랑해 그리고 널 원해
J'en ai des larmes aux yeux

내 눈에 눈물이 고이고


On se connait trop peu

우린 서로를 아주 조금밖엔 알지 못해
Mon amour

내 사랑

Si tu veux bien

네가 원한다면
Je m'en vais, je renonce

난 떠나리 그리고 모든걸 포기하리..


Avant les plaintes

불평이 있기전에
Avant tous les mensonges

모든 거짓말들이전에
Mon amour, mon amour

내 사랑, 내 사랑

Je t'aime et je t'appelle

사랑해 그리고 전화할께
Pourquoi n'es-tu pas celle

 

왜 넌
Qui m'est restee fidele

내게 충실한 그런 사람이 되지 않는거니?
Mon amour

내 사랑


(반복)

Ne promet pas

약속하지마

Ce que ton coeur n'a pas

네 맘속에 없는것들을

 

Ne regarde pas plus loin que tu n'iras

네가 가지 않을곳까지 너무 멀리 바라보지마

Mon amour mon amour

내 사랑, 내사랑

 

Mon amour

내 사랑


 

Je t'aime et je t'attends

 사랑해,,, 기다릴께

Et ca fait mal dedans

마음이 너무나 아파와

 

Et ca s'arettera quand

언제쯤이면 끝날까

Mon amour

내 사랑

 

 

 

 

 

 

Mercedes Sosa 의 앨범...."Misa Criolla"

 

 

 

메르세데스 소사

 

 

15세의 나이로 라디오 콘테스트에서 우승한 소사는 59년 최초의 레코딩을 했으나 가수의 길을 걷지 않았다.

 

하지만 60년대 초반 "새로운 노래" 운동, 즉 "누에바 칸시오네로" 대열에 참여했으며 65년에는 한 페스티벌에서

 우승하면서 필립스와 음반 계약을 이끌어 내기도 했다.

 

이 때가 가수 메르세데스 소사의 출발점이기도 하다. 67년에 최초로 유럽/북미 무대에서 공연을 했으며,

69년에는 아리엘 라미레즈와 "아르헨티나의 여인들"이라는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군사 독재 때문에 이 무렵 소사의 곡은 라디오 방송이 금지되었으나 그녀는 꾸준히 자신의 앨범을 발표했고,

몇몇 영화에 출연하기도 했다.

 71년에 발표된 비올레타 파라에 대한 헌정 앨범 "Homenaje a Violeta Parra" 은 오늘날까지도 그녀의 대표곡 중

하나로 남아 있는 "삶에 감사하며(Gracias A La Vida)"라는 유명한 레코딩을 남겼다.

 

76년, 아르헨티나 최고의 암흑기라 할 수 있는 군사독재가 다시 시작되면서 (83년 군정이 종식되기까지 무려 3만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다.)

소사는 감시는 물론 목숨까지 위협 받는 처지가 되었으나 계속해서 노래를 부른다.

1979년. 처참한 현실을 노래한 이유로 관객 300여명과 함께 공연장에서 체포. 결국 조국을 떠나 파리를 거쳐 80년

마드리드로 망명을 떠난다.

 

이 무렵 소사는 인생의 버팀목이었던 남편을 잃었을 뿐더러 지병인 심장병을 얻었다.

군정이 종식되기 전임에도 불구하고 1982년 아르헨티나로 컴백한 그녀는 끊이지 않던 기립박수로 유명한 82년

오페라 극장 공연을 가지며 아르헨티나 민중의 희망이 되었다.

"나는 전세계 민중을 위해 노래해야 할 책임이 있다는 것을 압니다.

그건 나를 지지하고 지원해주는 사람들을 위하는 것이니까요. 노래는 변합니다.

 

투쟁과 단결의 노래도 있고 인간의 고통에 대해 호소하는 것도 있습니다.

 내가 1982년 아르헨티나로 돌아왔을 때, 나는 무대 위에서 국민들에게 새롭게 표현해야 할 방식이 있다는 걸

알았어요.

 

그건 국민들에게 용기를 잃지 않게 해주는 것이었어요. 왜냐구요? 아르헨티나에 산다는 게 투쟁이거든요.

아니,라틴 아메리카에 산다는 게 그렇지요.

나는 국민들에게 무슨 문제제기를 하고 싶진 않습니다. 하지만 새로운 에너지를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80년대에는 유럽과 북미/남미를 끊임 없이 순회하는 공연을 펼치며, 전세계적으로 그녀의 이름을 알렸고,

밀톤 나시멘투, 레온 히에코 등 남미를 대표하는 가수들과 함께 다양한 프로젝트를 벌이기도 했다. 89년에는

 프랑스 문화부에서 그녀에게 메달을 수여하기도 했다.

뉴욕의 센트럴 파크, 카네기 홀, 이태리 콜로세움 등 유명 공연장에서 매진 공연을 펼쳤고, 밥 딜런, 해리 벨라폰테,

스팅, 파바로티, 존 바에즈, 루치오 달라, 안드레아 보첼리 등 그녀를 극찬하고 함께 교류한 가수들로 인해 전세계적으로 더욱 많은팬들을 거느리게 되었다.

 

 유니세프 인권 대사, 문화 사절 등으로 사회적 활동을 펼쳤으며, 유럽 망명 시절에 얻은지병과 과로 등으로 인해

97년에는 병상에서 생사를 오가는 사투를 벌였음에도 불구하고

 

 98년에 다시 재기. 컴백 공연과 앨범을 발표했고, 2000년에 신설된 라틴 그래미에서 수차례 상을 수상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다시 보여줬지만 여전히 좋지 않은 건강 상태는 간혹 휴지기를 요구 했다.

 

일례로, 2003년 엘지아트센터에서 최초이자 아마도 마지막이었을 내한 공연이 예정 되어 있었으나 지병인 심장병이

 악화되면서 공연이 취소되었고 소사가 타계한 오늘날까지도 많은 팬들에겐 진한 아쉬움으로 남아 있다.

소사는 2009년 앨범"Cantora"가 발매되고 난 직후인 9월 18일, 신장과 폐 질환으로 인해 다시금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고, 이미 수차례 죽음의 고비를 넘겼던 그녀는 결국 7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시신은 국회로 옮겨져 일반인들의 조문을 받고 있으며, "의심할 바 없는 아르헨티나 음악계의 아이콘"이라는 말로

그녀를 기린 아르헨티나 정부와 페르난데스 대통령은3일간의 국가적 애도 기간을 선포함과 동시에 모든 빌딩이

조기를 게양하도록 조치했다.

 

 남미의 각국 정부는 물론, 프랑스 정부에서도 그녀를 애도하는 성명을 발표했고, 전세계 수많은 뮤지션들과 그녀의

 팬들이 메르세데스 소사를 추억하고 애도하는 글을 남기고 있다.

 

 

출처 : http://www.yes24.com/2.0/AuthorFile/AuthorFileD.aspx?authno=10764

 

 

Nilda Fernandez (닐다 페르난데즈)

 


본명이 Daniel Fernandez인 닐다 페르난데즈(Nilda Fernandez)는 1957년 

 10월 27일 스페인의 바르셀로나에서 태어났다.

 

 스페인 특히 바르셀로나가 있는 안달루시아 지방은 카톨릭이 지배하는 지방인데

닐다의 부모들은 신교도였다.

 

그래서 여러가지 어려움을 느낀 부모들이 닐다가 7살 때 프랑스의 리용으로

이주하게 된다.

 

 어릴 때 아버지가 음악과 피아노를 배우기를 강요해지만 닐다는 기타와 플라멩코에 관심이 더 많아지고 배웠고, 잊어 먹었던 스페인어도 다시 배우게 되었다.


음악과 연극에 관심을가지고 심취했던 닐다는 24살이 되던 1981년까지 리용과

 

툴루즈의 작은 무대에서 기타를 들고 노래를 불렀다.

 

 이 때 혼자서 기타치며 노래부른 테이프를 프랑스의 제작자 Pathe Marconi에게 보냈더니 훌륭한 목소리라고

 앨범을 내자는 제의 받게된다.

 

그러나 이 첫 앨범은 여지없이 실패로 끝나고 닐다는 다시 리용의 작은 무대로 돌아와 노래를 부르다가, 1987년 드디어 "Madrid, Madrid"를 도너츠 싱글로 내면서 대중들의 주목을 받았다. 이무렵 닐다는 이름을 Daniel에서 Nilda로

바꾸었다고 한다.


1991년 앨범 [Nilda Fernandez]를 발매 후 앨범에 실린 "Nos Fiancailes(우리들의 약혼)"가 프랑스 전국 라디오

방송을 강타하였고, 계속해서 "Entre Lyon et Barcelona", "La invitacion a Venecia"가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이 특이한 목소리에 유럽 전역에 알려지고 캐나다의 불어권인 퀘벡까지 이름이 알려진다.


1992년 스페인어로 부른 "Mi amor en tu querer"가 스페인어권 까지 휩쓸며 1993년 4월 20일 드디어 닐다는

올렝뻬아 극장에 서게 된다.

 

1993년 싱글 "Sinfanai Retu"이 8주간 차트를 달리면서 두 번째 앨범 [NIlda Fernandez]를 발매했다.
1994년에는 남미 특히 아르헨티나를 순회하며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Mercedes Sosa와 공연을 하는 영광을

얻기도 했다.

 

이후 집시의 유랑벽을 가진 닐다는 캐나다 북미 유럽을 순회하고 특히 미국의 인디언들에 관심이 많아 인디언 마을에서 살기도 했다.


잠시 음악을 손에서 놓고 소설도 쓰면서 휴지기를 가졌던 닐다는 1998년 1월달에 빠리의 Casino극장에서 콘서트를 열며 다시 음악활동을 시작한다.


스페인의 시인 Federico Garcia Lorca(1899-1936)에 오랫동안 감명을 받았던 닐다는 1999년 로르카의 시에 곡을 붙인 앨범 [Castelar 704]를 발매하였다. 또한 쿠바의 난민 보트 피플에 동정하던 닐다는 화물선을 빌려 식량과

약품을 싣고 쿠바의 하바나 항 밖에 정박시키고 하바나의 혁명궁에서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프랑스어와 스페인어 두 개의 언어를 구사하며 두 문명 사이를 헤치고 다니면서, 또 타고난 유랑의 끼를 버리지 못하는 닐다 페르난데스의 음악세계는 고독과 유랑과 사랑과 이별을 예술적 독창성으로 프랑스권과 스페인어권 뿐만아니라

세계의 모든 음악팬에게 다가선다.

 

 그는 모험을 좋아하고 새로운 것을 항상 추구하며 독창성을 발휘하는 진정한 예술의끼를 타고 난 천재인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