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illie Holiday-I'm A Fool To Want You
I'm A Fool To Want You
I'm a fool to want you
당신을 원하는 난 바보랍니다.
I'm a fool to want you
당신을 원하는 난 바보랍니다.
To want a love that can't be true
사실 일리 없는 사랑을 원하는...
A love that's there for others too
다른 사람에게 향한 사랑을 (원하는)...
I'm a fool to hold you
당신을 잡으려는 난 바보에요
Such a fool to hold you
당신을 잡으려는 그런 바보
To seek a kiss not mine alone
홀로 내 것이 아닌 키스를 찾으려는...(그런 바보)
To share a kiss the Devil has known
악마가 알아챈 키스를 나누려는...(그런 바보)
Time and time again I said I'd leave you
몇번이고 난 당신을 떠날거라 말했어요.
Time and time again I went away
몇번이고 난 도망갔어요.
But then would come the time when I would need you
하지만 그때쯤엔 내가 당신을 필요로할 그 시간이 오네요.
And once again these words I'll have to say
그리고 다시 한번 난 이런 말을 해야 할거에요.
"I'm a fool to want you
난 당신을 원하는 바보랍니다.
Pity me, I need you
나를 가엾게 여겨주세요. 난 당신이 필요해요.
I know it's wrong, it must be wrong
잘못된 거란 건 알아요. 틀림없이 잘못됐어요.
But right or wrong I can't get along without you"
하지만 옳거나 그르거나, 난 당신없인 살아갈 수 없어요.
I can't get along without you
난 당신없인 살아갈 수 없어요.
앨범 "Lady in Satin"
Billie Holiday 빌리 홀리데이
...자신이 가장 아꼈던 앨범이라고..
1915년 미국 Pennsylvania의 Philadelphia에서 태어난 Billie Holiday(본명: Eleanora Harris)는 팝 역사상 유래를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불행한 삶을 살다 간 비운의 여가수이다.
그녀는 태어날 때부터 불행을 안고 태어났다.
그녀의 아버지인 재즈 기타리스트 Clarence Holiday와 그녀의 어머니인 Sadie Harris는 결혼을 하지 않았고
Clarence는 그녀를 Sadie에게 떠넘긴 채 떠나버린다. 결국 Billie는 미혼모인 Sadie와 함께 어린 시절을 보내게 된다.
더욱 충격적인 것은 Billie의 어머니인 Sadie 역시 그녀를 낳을 당시 13세의 어린 소녀였다는 것이다.
그녀는 Maryland의 Baltimore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게 된다. 당시의 심한 인종 차별 속에서 아버지도 없이 어린 어머니와 살아야 했던 그녀의 어린 시절은 가난과의 전쟁이었다.
그녀는 가난을 이겨낼 수 있는 길을 찾아야 했다.
11살의 나이에 강간을 당하기도 했던 그녀는 New York의 Brooklyn으로 이주한 뒤 어머니와 함께 매춘부 생활을 하게
되며 1929년에는 매춘 혐의로 체포되어 Ryker's Island에서 복역하기도 하였다.
15살에 접어든 그녀는 극심한 인종 차별 속에서 가난을 이겨낼 수 있는 방법을 찾아 나서게 된다.
그리고 그녀는 이 때부터 Louis Armstrong이나 Bessie Smith와 같은 재즈 뮤지션들의 음악을 접하고, 자신도 New
York의 나이트 클럽에서 가수로 활동하기 시작한다.
물론 매춘부 출신의 그녀가 정식 음악 교육을 받았을 리 만무하다.
더군다나 그녀는 선천적으로 좋지 않은 성량을 가지고 있어서 크고 힘있는 소리를 내지 못하는 가수였다.
하지만 오직 가난을 극복하기 위해 돈을 주는 곳이라면 가리지 않고 노래했던 그녀는 Pods' And Jerry's Log Cabin,
The Yeah Man, Monette Moore's Supper Club, The Hot-Cha, Alabama Grill And Dickie Wells' Place와 같은 클럽에서 노래하면서 그런 자신의 작고 끊어질 듯 한 보컬을 자신만의 독특한 스타일로 만들어 내었고, 그녀가 만들어 내는 깨어질 듯한 감성과 극도로 우울한 분위기는 차츰 사람들의 관심과 호기심을 자극하게 된다.
결국 그녀는 가수를 찾아다니던 John Hammond에게 깊은 감명을 심어주게 된다. 그리고 이 때부터 그녀의 전설적인
가수로서의 활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John Hammond는 언론에 최고의 가창력과 미모를 겸비한 새로운 여가수를
발견했다며 그녀에 대한 감동과 기대를 알려 나갔고, 그의 생각에 동조한 Benny Goodman과 함께 1933년 Billie
Holiday의 첫 레코딩 을 하게 된다.
(그녀는 당시 영화배우였던 Billie Dove의 이름을 따서 Billie Holiday로 개명했으며, 초창기에는 Billie Haliday,
Billie Halliday와 같은 철자로 쓰여지기도 했다. 37년에 사망한 그녀의 아버지 역시 Haliday, Halliday와 같은 확실치 않은 스펠을 사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녀는 이후 Holiday로 이름을 확실히 하고 활동을 이어 나간다.)
그녀는 Benny Goodman과 함께 'Your Mother's Son-in-Law'와 'Riffin' the Scotch' 두 곡을 녹음했는데 어린 흑인 소녀에게 첫 녹음은 큰 부담으로 작용했다.
그녀는 후에 '마이크 앞에 서는 것이 처음이라 많이 두려웠다.'라고 회고하기도 하였는데 그런 녹음 과정에서의 문제점들로 인해 첫 작품들은 큰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첫 레코딩에서 성공적인 결과를 보지 못한 그녀는 당시의 관습대로 로열티를 전혀 받지 못했으며, 겨우 35달러의 돈을 받는 데 만족해야 했다.
다시 클럽을 중심으로 활동을 시작한 그녀는 35년 대중 음악계에서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던 The Apollo Theatre와 계약을 체결하면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다.
그녀는 이전 레코딩에서의 부족함을 완전히 극복해 내며 자신이 가진 음악적 역량을 유감없이 보여주었고,
The Apollo Theatre 무대에서의 돋보이는 활동은 그녀가 다시 레코딩을 하게 하는 결정적인 역할을 해낸다.
당시 그녀는 'The Lady'라는 애칭으로 불리어졌으며 이름 또한 철자가 확실치 않았는데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이 때부터 자신의 이름을 Billie Holiday로 확정했으며, 후에 그녀의 애칭 또한 그녀와 각별한 음악적 동반자가 되는 Lester Young에 의해 'Lady Day'로 바뀌어지게 된다.
그녀는 두 번째 레코딩에서 감상적인 피아니스트 Teddy Wilson을 만나게 된다. 그녀와 Teddy Wilson의 만남은 Billie에게는 큰 행운이었다. Teddy가 지닌 감상적인 음악 스타일은 Billie가 지닌 감상적이고 음울한 보컬과 너무도 잘 맞아
떨어졌고, 결국 Billie는 Teddy Wilson과의 만남을 통해 처음으로 대중적인 히트를 기록하게 된다.
Teddy와 함께 'I Wished on the Moon', 'Miss Brown to You'등의 곡을 히트시킨 그녀는 드디어 자신의 정식
이름으로 레코드사와 계약을 체결하게 된다.
36년 그녀는 Vocalion 레코드와 계약을 체결하였고, 이후 Count Basie와 Artie Shaw의 그룹에서 노래하게 된다.
38년 그녀는 백인 그룹이었던 Artie Shaw의 그룹에서 인종 차별을 견디지 못하고 그룹을 떠나게 된다. 솔로 뮤지션으로서의 첫 발이었다.
그녀는 자신에게 첫 대중적 성공을 가져다 주었던 Teddy Wilson, 그리고 그녀에게 각별한 애정을 보여주었던 그녀의
음악적 동반자 Lester Young과 함께 재즈의 전설을 만들어 나가게 된다.
39년 발표한 'Strange Fruit'는 그녀에게 첫 세계적 히트를 가져다주었는데, 인종 차별에 반대하는 메시지를 담고 있기도 한 이 곡은 그녀에게 국제적인 명성을 안겨다 주었고, 이후 40년대 50년대 그녀의 활동은 재즈 역사상 처음으로 대중의
절대적 지지를 받은 뮤지션으로 음악 역사에 기록되게 된다.
성공적인 솔로 전향 이후 그녀는 'Fine And Mellow', 'Gloomy Sunday', 'God Bless the Child', 'Lover Man',
'Porgy', 'Good Morning Heartache', 'You Better Go Now', 'Now Or Never'와 같은 무수히 많은 히트곡을
만들어 내었으며, 자신의 음악적 우상이기도 했던 Louis Armstrong과 함께 'My Sweet Hunk O' Trash'를 부르기도
하였다.
이처럼 초유의 성공 행진을 거듭하고 있는 그녀였지만 타고난 그녀의 비운은 항상 그 뒤에서 그녀를 괴롭히고 있었다.
그녀의 곁에는 항상 술, 담배, 마약이 있었고, 성공 행진을 거듭하던 40년대 이미 그녀는 헤로인 중독에 걸려 있는
상태였다.
그녀의 결혼 생활 또한 불행의 연속이었는데 배우자에게 심한 학대를 받으며 살아간 것으로 전해지며 그녀가 마약과
술에 자신을 의지하게 된 이유를 배우자의 심한 학대 때문으로 이야기하고 있기도 하다.
극심한 가난을 탈출하기 위해 노래하기 시작한 그녀는 빈민가를 굴러다니던 보잘 것 없는 소녀의 신분 덕분에 레코드사로부터 부당한 돈을 받으며 음악 생활을 해 나갔는데, 세계적인 뮤지션으로 성장하고 진짜 많은 돈을 만질 수 있는 때가 되어서도 그녀의 경제적 여건은 좋아진 것이 별로 없었다.
그녀는 버는 돈의 대부분을 마약을 구입하는데 써버렸고, 결국 47년과 56년 마약 복용 혐의로 두 차례나 체포되었다.
하지만 놀라운 것은 육체적 정신적으로 최악의 상태로 향해 가는 그녀였지만 그녀의 음악이 전해주는 매력은 시들어
갈 줄 몰랐다는 것이다.
58년 발표된 그녀의 대표 앨범 「 Lady in Satin 」은 삶의 마지막에서도 그녀가 얼마나 강한 음악적 열정을 가지고 있는
지를 보여주는 앨범으로 수록곡인 'I'm a Fool to Want You', 'You've Changed', 'The End of Love Affair'와 같은 곡들은 40여 년이 넘게 지난 지금까지 최고의 재즈 명곡들로 대접받으며 그 음악적 가치를 뽐내고 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녀가 사망 1년 전인 58년 유럽 투어까지 감행했다는 점이다. 물론 그녀는 이 유럽 투어 이후 급속히
건강이 약해져 59년 7월 New York에서 헤로인 중독으로 사망하고 만다.
영화 속에나 나올 법한 비운의 삶을 살다 간 그녀는 그녀의 지독하게 우울한 삶과 같은 음울한 보컬을 통해 재즈계의 전설로 자리한 여성이다.
그녀의 사후에도 무수한 앨범들이 쏟아져 나와 정식 레이블을 통해 발매된 앨범만도 100여 장이 넘을 정도이며 그녀의
생애를 담은 영화까지 만들어 졌을 정도로 대중들이 그에게 갖는 애정과 신비감은 대단한 것이었다. 참고로 국내 구두 광고에 그녀의 곡 'I'm a Fool to Want You'가 삽입된 이후 그녀의 노래들은 한국에서도 큰 사랑을 받고 있다.
사라 본, 엘리 피츠제럴드와 더불어 3대 여성 보컬리스트로 불리는 빌리 홀리데이(본명 Eleanor Harris)는 1915년
4월 7일 펜실베이니아에서 태어나 1959년 7월 17일 마흔 넷의 한창 나이에 사망한 비운의 여가수다. 그녀가 약물과
알콜에 빠져든 것은 그녀의 불우했던 어린 시절과 무관하지 않다.
당시 10대였던 그녀의 아버지는 가정을 버렸고 일을 찾아 떠난 어머니와도 떨어져 사랑을 받지 못한채 자라야만 했던
것이다.
뛰어난 음악적 재능 덕에 위대한 보컬리스트로 성공하기는 했지만 개인적으로는 지독한 섹스광이며, 성격 파탄자라는
평가를 받을 만큼 비정상적인 행태를 보인 것이 사실이다.
결국 그 스스로를 파괴한 그녀는 비극적인 최후를 맞았지만 ‘디바’라는 이름으로 재즈사에 길이 남는 영광을 누리기도 했다.
초기에 베니 굿맨 밴드와 레코딩을 시작하며 재즈 신에서 주목받은 그녀는 20대 초반, 피아니스트 테디 윌슨
(Teddy Wilson)을 리더로 하는 밴드들과의 레코딩을 남기며 자리를 잡기 시작하지만 무절제한 생활 때문에 카운트
베이시 악단에서 해고당하는 등의 시련을 겪기도 한다.
1930년대 후반 ‘Gloomy Sunday’, ‘Strange Fruit’ 등 우울한 감성 모드의 노래들로 대중적인 인기를 구가하지만
한편으로는 뭇 남성들과의 끊임없는 애정편력으로 스캔들을 일으키기도 했고 그러면서도 진정한 사랑을 얻어내지
못하는 비운의 여주인공이기도 했다.
하지만 진한 블루스적인 감성에 자신의 쓰라린 개인사를 담아내 강렬한 감동으로 대중을 포획한 거의 최초의 대중적인
재즈 보컬리스트인 그녀는 지금까지도 장르를 불문하고 많은 여성 보컬리스트들에게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위대한
인물이다.
비록 철저한 아웃사이더로 살다가 마흔 네살의 어느날 혼자 쓸쓸히 술을 마시던 중 쓰러져 세상을 등지기는 했지만...
'I'm a fool to want you'.
수년 전, 국내 모 CF의 배경음악으로 사용된 이 곡 하나로 빌리 홀리데이는 재즈가수의 대명사가 됐다.
물론 빌리 홀리데이에게는 더 많은 노래가 있다.
하지만 이 곡만큼 아름답게, 심지어 지독하다 싶을 정도로 담담하게 사랑의 슬픔을 노래한 곡도 드물다.
무언가에 잔뜩 긴장된 것 같으면서도 이내 체념한 듯한 읊조림, 특유의 갈라질 듯 젖어 있는 목소리는 '흑인과 재즈'라는
이미지와 그 분위기를 맛보기에 대단히 좋은 텍스트였다.
가사의 속내를 알지 못한다 하더라도 지극히 고단한 감성이 느껴지는 이 노래는 피곤함 마저 잊고 살아가는 도시인들의
메마른 정서를 자극하기에 충분했고, 연인처럼 속삭이기보다는 인생의 선배로서 들려주는 따듯한 위안처럼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상대적으로 여성 재즈싱어의 거성들인 '사라 본', '엘라 피츠제랄드'에 비해서 빌리 홀리데이의 인기가 높은 것은 첫째로
재즈라는 이미지에 대한 사람들의 막연한 상상 때문이었다.
불행했던 것으로 전해지는 그녀의 삶을 온전히 파악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녀의 노래는 그것을 충분히 대변하고 있을뿐
더러 나아가 흑인의 애환을 대변하는 텍스트로 여겨지면서
재즈의 본질과 연동하게 되었던 것이다.
확실히 빌리 홀리데이라는 이름은 그 자체로 재즈와 닮아있는 것 같다. 삶을 관통하는 그 어두운 곡조가 '재즈의 무드
(mood)'에 바로미터가 되었다면 그것이 바로 재즈라는 음악의 아이러니일지도 모른다.
빌리 홀리데이의 첫 독집 음반은 1936년에 취입된 [빌리 홀리데이 스토리/CBS 컬럼비아]였다. 즉, 그녀가 본격적으로
활동한 시기는 30년대 중반부터였다.
그런데도 그녀의 창법이나 노래 스타일은 한참이나 옛것에 머물러 있었다.
1927년에 상영된 최초의 유성영화 [재즈 싱어] 이후 '재즈 싱어'라는 용어가 본격적으로 유행되기 시작했다면 빌리
홀리데이는 그 이전까지의 블루스 가수로서의 역할을 유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말하자면 악기를 연주하듯 목소리만으로 즉흥적인 솔로를 펼치던 재즈싱어로서의 혁신성 보다는 블루스의 원초적인 정서를 재즈 사운드에 보태는 가수였던 셈이다.
그리고 그것은 언제까지나 유지되었다.
"나는 어렸을 때 들은 베시 스미스나 루이 암스트롱을 빼고는 어느 누구에게도 음악을 배운 적이 없어요. 사람들은 내 노래 스타일이 어디서부터 발전된 것이냐고 묻는데 어떻게 대답하면 좋을까요?
나는 단지 내 느낌을 솔직하게 표현하려고 하고 그렇게 할 때 사람들도 뭔가를 느끼게 되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때로는 스스로 지나치게 감성적인게 아닐까 고민할 정도죠" 빌리 홀리데이가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그 자신이 말했듯, 정규교육을 받지 못했던 빌리 홀리데이의 음악적인 해석은 대부분 천부적인 감각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리고 그녀의 노래는 지나칠 정도로 감성적이다.
하지만 그런 감정의 표현이 아니었다면 빌리 홀리데이의 존재감은 쉽게 무너지고 만다. 블루스와 재즈의 상관관계를
이해할 수 있다면, 마찬가지로 블루스와 소울의 영역이 지배했던 그녀의 스타일만으로 재즈싱어로서의 역할이 적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빌리 홀리데이가 '레이디데이'라는 별명을 갖게 된 것에 대해서는 다양한 설이 전해진다. 가장 보편적인 이야기는 지난
회(최고의 색소폰 연주자, 레스터 영)에 다루었던 레스터 영(Lester Young)이 붙여주었다는 설, 이때 빌리 홀리데이는 '프레지던트 레스터' 라는 애칭을 레스터 영에게 답례했다고 한다.
또 한가지는 클럽 무대에서 관객들에게 절대 허리를 굽혀 인사하지 않는 도도한 모습 때문에 붙여졌다고 한다.
여기에 항상 머리에 치자꽃 한 송이를 꽂고 출연했다는 그녀의 모습을 머릿속에 더해본다면 그 어떤 것이 사실이든, 모두가 그녀의 이미지를 반영한 것인 만큼 흥미롭지 않을 수 없다.
추측해 보건데 노래하는 빌리 홀리데이는 거칠었던 삶과는 다르게 소위 '요조숙녀' 가수였던 것이다.
그녀의 대표곡 중 하나인 '이상한 과일(Strange Fruit, 1939)'은 미국 남부의 백인 폭도들에게 살해되어 나뭇가지에
매달렸던 가련한 흑인을 비유한 노래였다.
억눌린 분노와 슬픔을 담고 있는 이 노래와 더불어 루이스 앨런의 시를 노래한 'God bless the child(1941)' 역시 재즈의 저항주의를 메시지로 담아낸 곡이었다.
인종차별이 극심했던 시대를 살아간 빌리 홀리데이의 노래들은 그 자체로 '흑인과 재즈의 역사'를 반추하는 한 편의
서사시라 할 수 있다.
1959년 7월 17일.
44세의 나이로 사망한 그녀의 진료 기록에는 '마약중독 말기증상'이라고 적혀 있었다.
몇 번의 불행했던 결혼을 거치며 여자로서 누릴 수 있는 평범한 결혼생활조차 허락되지 않았던 빌리 홀리데이는 최후의
명연으로 전해지는 작품 [Lady In Satin](1958) 을 뒤로하고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불행한 삶을 살다간 비운의 재즈보컬리스트 빌리 할리데이.재즈 기타리스트였던 아버지는 두 모녀를 남겨둔채 떠나버리고
빌리 할리데이 어머니는 그당시 13세.
빌리 할리데이 나이 11세때 강간을 당하고어머니와 함께 생계를 위해 창녀촌으로 간다.
심한 인종차별 속에서도 빌리 할리데이는 재즈 보컬로서 성공한다.
하지만,첫번째 남편은 바람둥이에다 아편중독자.
두번째 남편은 빌리의 수입을 모두 갈취했고세번째 남편은 불법무기, 마약 소지 혐의자였다.
계속해서 몰아닥친 불행으로 빌리는 정서불안과 음주, 마약 등으로 황폐해질대로 황폐해지고 만다.
이제 그녀의 목소리는 망가져 가고 있었지만 그녀는 무리해서 공연과 음반 취입을 계속했다.
결국 그녀는 쓰러지고 입원한다.
마약을 소지하고 있으리라는 추정만으로병원에 누워있는 그녀는 마지막 체포를 당한다.
다섯 차례에 걸친 투옥과 전직 창녀, 마약상습복용자 블랙 리스트에 올라있는그녀에게 인권따위는 없었다.
마약에 찌들린 채로 누워있는 그녀는매일 진정제만 투여될 뿐이었고44세의 나이로 그녀는 떠났다.
그녀의 진료 기록판에는 "병명: 마약 중독 말기 증상, 치료 방법: 없음"이라고 쓰여 있었다.
그녀는 영감에 넘치는 목소리는 끊임없이 차별없는 자유를 염원했고, 그녀의 곡 해석 능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것이었다.
엘라 피츠제랄드, 사라 본과 더불어 3대 여성 재즈 보컬이라고 일컫는 빌리 할리데이.
그녀는 자신의 모든 것을 활활 불태우고 떠나버렸다.
할렘가의 흑인으로 태어나 평생에 걸쳐 계속된 흑인으로서의 차별과 모욕을 피해 그녀는 죽음으로 평화와 안식을
얻을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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