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b Dylan-One More Cup Of Coffee
One More Cup Of Coffee
Your breath is sweet
Your eyes are like two jewels in the sky
Your back is straight
Your hair is smooth
On the pillow where you lie
But I don't sense affection
No gratitude or love
Your loyalty is not to me
But to the stars above
당신 숨결은 달콤해
당신 두 눈은 하늘에서 빛나는 두 개의 보석 같아
당신 등은 쭉 뻗었고, 당신 머리 결은 부드러워
당신 누워 있는 베개 위에서
하지만 애정은 느낄 순 없어
감사하는 마음도 사랑도
당신이 따르는 건 내가 아니라
저 하늘의 별들이지
One more cup of coffee 'fore I go
One more cup of coffee 'fore I go
To the valley below
길 떠나기 전에 커피 한 잔만 더
커피 한 잔만 더
저 아래 골짜기로 가기 전에
Your daddy he's an outlaw
And a wanderer by trade
He'll teach you how to pick and choose
And how to throw the blade
He oversees his kingdom
So no stranger does intrude
His voice it trembles as he calls out
For another plate of food
당신 아버지는 무법자에다
아주 타고난 방랑자지
당신에게 제대로 고르는 법과
칼 던지는 법을 가르쳐 주겠지
그는 자기 왕국을 철저히 감시해
어느 이방인도 들어오지 못하지
음식 한 그릇 더 달라고 외칠 땐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려대지
One more cup of coffee for the road
One more cup of coffee 'fore I go
To the valley below
길 떠나기 전에 커피 한 잔만 더
커피 한 잔만 더
저 아래 골짜기로 가기 전에
Your sister sees the future
Like your mama and yourself
You've never learned to read or write
There's no books upon your shelf
Your voice is like a meadowlark
But your heart is like an ocean
Mysterious and dark
당신 엄마와 당신이 그랬던 것처럼
당신 여동생도 미래를 바라보지
당신은 읽고 쓰는 걸 전혀 못 배웠고
당신 책꽂이엔 책도 한 권 없지
그리고 당신은 끝없이 쾌락을 추구하지
당신 목소리는 종달새 같지만
당신 마음은 대양처럼
미스테리하고 어둡지
One more cup of coffee for the road
One more cup of coffee 'fore I go
To the valley below
길 떠나기 전에 커피 한 잔만 더
커피 한 잔만 더
저 아래 골짜기로 가기 전에
Bob Dylan
미국의 대중음악 가수·작사가·작곡가. 포크송운동에 뛰어들어 공민권운동에서 널리 불리면서 이 운동의 상징적
존재가 되었다.
1965년부터 로큰롤의 요소를 대폭 도입해 음악적인 방향을 전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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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은 로버트 앨런 지머맨(Robert Allen Zimmerman)이다. 미네소타주(州)에서 출생하였다.
유대계이다.
고교시절부터 로큰롤을 부르고 기타를 쳤으며, 그 후 대학을 중퇴하고 뉴욕으로 나가 당시 유행했던 포크송운동에
뛰어들어 1962년 《바람에 날려서 Blowin’in the Wind》를 발표, 인기가 높아지면서 당대의 총아가 되었다.
이 노래는 딜런 자신의 본의와는 달리 공민권운동에서 널리 불리면서 그는 이 운동의 상징적 존재가 되었는데, 딜런은
이렇게 되는 것을 싫어한 듯 1965년부터는 로큰롤의 요소를 대폭 도입한 《미스터 탬버린 맨 Mr.Tambourine Man》 등으로 음악적인 방향전환을 명시하여 화제가 되었다.
그 후 젊은층의 많은 팬을 확보하고, 레코드도 히트하게 되었다. 1960년대 후반의 정력적인 음악활동은 1970년대에
들어서자 주춤해지고, 1980년대가 되면서는 작품에 종교적인 색채가 강해져, 데뷔 당시에 가졌던 반체제적인 이미지는 크게 사라졌다.
한 손에는 노랫말의 혁명, 다른 한 손에는 포크록
밥 딜런 이전에 사람들은 대중가요의 가사의 수준을 그 때의 쾌락과 슬픔을 담는 정도로만 여겼다.
심각하거나 어려운 것은 노래에 맞지 않는 줄 알았다. 밥 딜런은 이처럼 순간의 감각에 영합하는
가사 풍토에 종지부를 찍고 팝송의 노랫말을 '하루살이'로부터 '성경'의 수준으로 끌어올렸다.
록 평론가 데이브 마시(Dave Marsh)는 이 앨범을 밥 딜런의 앨범 가운데 최고라고 평하면서“이 무렵 그의 영향력은너무도 확산되어 정말 수천의 사람들이 그의 언어 하나 하나에 매달리는 실정이었다”고 말했다.
65년 8월 딜런의 전성기 때 발표된 이 작품이 가지는 의의는 바로 데이브 마시가 지적한 언어 즉 가사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딜런은 이 음반을 통해 '운율을 지닌 게티스버그연설'처럼 대중음악 분야에서 곡 만드는 사람의 두뇌를 자각시켰다.
작사자들은 보다 신중히 그리고 철학적으로 가사를 써야 했다.
딜런의 언어는 그야말로 철학이요, 사상이었다.
감상자의 가슴을 찌르는 통렬함을 지녔고 초현실적이었으며 이전의대중가요에서는 목격할 수 없는 사고의 깊이를
간직했다.
정확한 해독이 어려울 만큼 의미가 다중적이고 복잡했으며 이로 인해 많은 의문이 제기되기도 했다.
그가 인터뷰 때마다 가사를 쓴 배경을 모호하게 설명하여 판독의 어려움은 더 증폭되었다.
일례로 여기 수록된 '여왕 제인'(Queen Jane approximately)에서의 제인이 혹시 당시 연인관계로 소문난존 바에즈가 아니냐는 추측이 난무했고 한 뉴욕 시민은 '폐허의 거리'(Desolation row)를 정확히 설명하는 사람이
있다면 포상하겠다는 광고를 지하신문에 내기도 했다.
이 앨범을 대표하는 곡 중 하나인 '깡마른 자의 노래'(Ballad of a thin man)의 유명한 한 구절 '여기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데 하지만 그것이 무엇인지 모르지요, 존스씨?'(Something is happening here.
But you don't know what it is, do you Mr. Jones?)도 그렇다.
기성세대의 낡은 사고에 대한 비아냥으로 시위대 피킷의 슬로건이 된 이 대목을 두고 많은 사람들은 미스터 존스를
당시의 존슨대통령으로 해석했다.
그러나 정작 딜런은 “당신은 그를 알고 있지만 그 이름으로는 아니다”라고 언급, 특정인을 밝히지 않았다.
가장 중요한 곡은 물론 65년 7월에 싱글로 발표되어 미국 차트 2위, 영국 차트 4위에 오른 그의 생애 최대 히트곡
'구르는 돌처럼'이다.
이 곡이 대중음악사를 통틀어 몇 손가락 안에 드는 명곡으로 기록되는 이유는 포크가 아닌 록의 편성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포크의 영웅인 그가 통기타를 놔두고 일렉트릭 기타를 쥐었다는 것은 포크 팬들에게는 충격이자 일종의
배신이었다.
이 곡이 뜨기 직전인 5월 딜런은 뉴포트 포크 페스티벌에서 일렉트릭 기타를 연주했다가 분노한 관객들로부터 계란과
야유세례를 받는 수모를 당했다.
그러나 그는 일렉트릭 기타가 지배하는 록이야말로 일시적 유행이 아니라 '젊음의 영원한 청각 문법'임을 확신했다.
그것은 바로 밴드의 힘찬 사운드로 미국 땅을 공습해온 영국의 비트 그룹, 바로 비틀스와 애니멀스를 인정하는 것을
의미했다.
밥 딜런은 71년에 이 무렵의 상황을 이렇게 술회했다. “모든 사람들이 그들이 어린 10대에게 인기를 누리고 있으며그래서 곧 시들해질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내게는 그들이 지속력을 지니고 있는 것이 명백했다. 그들은 음악이 가야할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다.
비틀스가 바로 그들이었다.”
그가 비틀스처럼 일렉트릭 기타를 치고 드럼을 울려대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그 결과물이 '구르는 돌처럼'이었다.
딜런은 록의 에너지를 담아내기 위해 녹음 작업시 의도적으로 작렬하는 드럼 사운드 곁에서 연주하고 노래했다.
버즈(Byrds)에게 그가 써준 기념비작 '미스터 탬버린 맨'(Mr. tambourine man)과 함께 나중 이 곡은 모든 게역사와 전설이 되었다.
평론가들은 포크와 록을 뒤섞은 이 '뉴 뮤직'을 포크록이라고 명명했다.
'구르는 돌처럼'은 이를테면 이후 70년대에 주요 음악 어법이 된 포크록의 개막 축포였다.
문제는 그가 통기타만 처분한 것이 아니라 초기의 저항성, 정치적 행동성을 폐기했다는 점이었다.
그는 실제로 '나의 뒷 페이지'(My back pages)라는 곡에서 '그 땐 난 너무 늙어 있었지.
난 그 때보다 지금 더 젊어 있지'하며 스스로 자신의 행동성을 부정한 바 있었다.
하지만 그는 음악의 스트레이트한 표현이 아닌 '내적 성찰에 의한 의식혁명'을 주장하는 쪽을 택했다고 생각된다.실은 일반 대중의 속단처럼 저항을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구르는 돌처럼'과 '깡마른 자의 노래'는 느낌에 따라 초기 프로테스트 송보다 오히려 더욱 저항적 메시지로 해석할
수도 있다.
연주는 나중 전설이 된 마이크 블룸필드(Mike Bloomfield)가 기타를 맡았으며 바비 그레그가 드럼을, 폴 그리핀이
피아노를, 러스 사바커스가 베이스를 맡았다.
'초대받지 않은 손님' 알 쿠퍼(Al Cooper)가 하몬드 오르간을 연주한 것도 이 곡이 남긴 유명 에피소드다.
타이틀에 사용된 하이웨이 61은 그의 고향인 미네소타 유리치의 북쪽에서 미네아폴리스, 세인트루이스, 멤피스를 거쳐 뉴 올리언스까지 달리는 고속도로를 가리킨다.어린 시절 꿈을 안겨준 이 도로를 내걸어 그는 '과거로 돌아가서 미래를 구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에게 과거는 무엇이었던가.
지금하고 있는 포크 음악이 아니라 한 때 그를 열광하게 했던 50년대의 로큰롤이었다.
그는 빌 헤일리의 '하루 종일 록을'(Rock around the clock)을 듣고 '바로 저거야!'라고 무릎을 쳤으며 음악 활동을
시작하면서 '엘비스보다 더 큰'(Bigger than Elvis) 가수가 되겠다는 포부를 밝히기도 했다.
그는 록으로 가야 했다. 비틀스가 그 감추어진 욕구를 자극했다.마침내 제대로 출발선을 잡은 밥 딜런의 '록 드라이브'는 숨가쁘게 고속도로를 내달렸다.
미네소타의 하이웨이 61만이 아닌 세계 곳곳의 도로를 달리며 록의 새로운 씨앗을 뿌렸다.
이제 딜런의 지구촌은 저항이 아닌 '록의 지구촌'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1960년대는 포크계에 있어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그리니치 빌리지의 모던 포크가 태동했으며 포크와 록이 결합한
것이 역시 60년대만이 지닐 수 있는 특수성일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가장 큰 의미는 밥 딜런과 비틀즈의 등장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팝 음악의 명반을 꼽을 때마다 비틀스와 1,2위를 다툰다.
1964년 초 비틀즈가 지구촌 팝 시장을 석권하기 시작했으나 이에 앞서 20세기의 밥 딜런이 1962년 초에 소위
프로테스트-포크의 기수로 등장해 멜로디로 듣는 음악의 상징은 비틀즈요 노랫말로 듣는 음악의 대명사는 딜런으로
1960년대의 팝계를 양분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Dylan과 Beatles는 50년대까지 주로 고찰되어 왔던 4분법(작사, 작곡, 반주, 노래하는 이들이 각각 다른)을 뛰어 넘어 소위 싱어송라이터의 시대를 열었을 뿐만 아니라 전무후무한 창작력을 발휘 팝, 록의 황금기로 알려지는 르네상스 시대를 열게 한 장본인들이다.
Bob Dylan은 첫 데뷔작 'Bob Dylan (1962)'을 필두로 20세기 최고의 음유시인으로서의 첫 발걸음을 내디게 된다.
이후 1963년작 'Freewheelin' Bob Dylan' 을 통하여 포크음악의 일대 변혁을 예고한다.
딜런은 두번째 앨범에서 자기 생각을 포크를 통해 자유자재로 표현할 수 있는 능력을 보여주면서 진보적 대학생들에게 최고의 우상이 되었다.
특히 'Blowing in the wind'와 'Masters of war' 등에서 월남전을 부추기는 정치인들에 대해 강한 비판적 인상을
남겼다.
음악을 통해 인종차별, 핵사용, 전쟁 등 지워지지 않는 오류를 고발하였고 더 나아가 사회문화 가치관 등을 변화시킨
밥 딜런. 반전(反戰)과 평화에 대한 갈구로 뜨거웠던 1960년대 미국 청년의 곁에도, 청바지와 맥주와 통기타가
어쩌면 유일한 ‘낙’이자 ‘벗’이었던 1970년대 한국 청년들의 곁에도 항상 그가 있었다.
그는 김민기 양희은 한대수 등 한국의 포크 음악에도 절대적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그는 자서전에서 자신에 대한 피상적이고 상투적인 평가들에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나는 그때나 지금이나 누구에게 속해본 일이 없다. 잘난 체 하는 인간들이 나를 대변자라느니 시대의 양심이라느니
하며 사람들을 속이고 있었다.”
“노래는 나의 개인교사였고, 변화된 의식으로 가는 안내자였고, 해방된 공화국이었다”
흔히들 Dylan의 음악은 크게 세 시기로 구별될 수 있다고 한다.
첫째로 61년부터 64년까지의 순수포크음악으로서의 시기이고, 둘째로 64년부터 75년까지의 포크락으로서의 시기,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후 81년까지의 크리스찬 가스펠로서의 포크시기로 구별될 수 있겠다.
삶을 관조하듯 인생의 단편들을 하나씩 풀어가는 그의 이야기속에는 자조 섞인 한탄과 관조적인 자아비판, 그리고
고독한 삶의 향기가 배어있다. 듣는 이들로 하여금 지나간 자신의 여정을 돌이켜보게 만드는 그의 음악에는 반항과
자유의 정신이 깊이 배어있고 사랑과 평화의 메시지가 들어있다.
그의 음악은 단지 교훈적이거나 현실비판적인 정치적 저항의 경계를 넘어서서 자유롭고도 다양한 삶의 진정성에 대한
경의와 탐험을 거침없이 보여 주고 있다.
뛰어난 작곡 능력과 환상적인 가사 만들기, 그리고 통기타 하나로 풀어나가는 완벽한 메시지 전달 능력은 그를 하나의
신화로 만들기에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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