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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과 시사

하와이 요양원서 쓸쓸히 떠난 94세 조선 마지막 세자빈


줄리아는 이혼 후에도 원래 성인 '줄리아 멀록'으로 돌아가지 않고 평생을
'줄리아 리'로 살았다.

[중앙포토]





1963년 시부모인 영친왕 내외의 요청으로 남편 이구(왼쪽)를 따라 한국에 온
줄리아 리. 이들은 이때부터 창덕궁 낙선재에 기거했다.
[중앙포토]



하와이 요양원서 쓸쓸히 떠난 94세 조선 마지막 세자빈


뉴욕 설계사무소서 일하던 줄리아
영친왕 아들 이구와 58년 결혼
63년 한국 와 낙선재 안주인 생활

종친들 종용으로 이혼 뒤 미국행
마지막 남긴 말 "이건 기적이야"


조선왕가 마지막 세자빈의 죽음은 처연했다. 타계 소식조차 열흘이 흐른 5일 뒤늦게 알려졌다.
대한제국 최후의 황태자 이은의 외아들인 고(故) 이구(李玖)의 부인 줄리아 리(본명 줄리아 멀록)가 지난달 26일 미국 하와이의 할레나니 요양병원에서 노환으로 별세했다. 94세. 
         
줄리아 리의 부음을 챙긴 이남주(78) 전 성심여대 음악과 교수는 “손전화도 못 쓸 정도로 거동이 불편해 누워만 있다가 쓸쓸하게 눈을 감았다”고 전했다.
이 교수는 이구 선생이 삼종숙부인(9촌) 조카다.
         


줄리아 리는 독일계 미국인으로 1950년대 후반 미국 뉴욕에서 이구 선생을 만났다.
중국계 미국인 건축가인 이오 밍 페이(I.M.Pei)의 설계사무소에서 인테리어 디자인을 담당했던 줄리아는 직장 동료 중에서 독특한 동양 청년을 발견했다.

MIT공대를 나온 건축가인 이구는 섬세하고 진중한 성격으로 줄리아를 매료시켰고, 27세 이구와 35세 줄리아는 58년
결혼했다.
이남주 교수는 “외롭게 타국을 떠돌던 이구 선생에게 8년 연상인 줄리아가 엄마나 누나같이 의지가 됐을 것”이라고
풀이했다.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세손인 이구와 줄리아 리 내외. 1970년대 이들이 기거했던 서울 창덕궁 낙선재에서 촬영한 사진이다. 82년 이혼 후에도 한국에 머물렀던 줄리아는 95년 하와이로 떠났다. [중앙포토]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세손인 이구와 줄리아 리 내외. 1970년대 이들이 기거했던
 서울 창덕궁 낙선재에서 촬영한 사진이다. 82년 이혼 후에도 한국에 머물렀던
줄리아는 95년 하와이로 떠났다.

[중앙포토]          




이구 부부는 63년 일본에 머물던 영친왕과 이방자 여사의 요청으로 함께 귀국해 서울 창덕궁 낙선재에 짐을 풀었다.
재주 많고 정이 많은 성품의 줄리아였지만 낯선 궁궐 생활과 종친들의 외면을 견디기는 힘들었다.

푸른 눈의 이방인 세자빈을 인정할 수 없었던 종친회는 후사를 잇지 못한다는 이유를 들어 이구 선생에게 이혼을
 종용했다.
낙선재가 싫다며 호텔 생활을 하던 남편과 별거상태였던 줄리아는 결국 82년 이혼서류에 도장을 찍는다. 




         
이구 내외의 낙선재 시절 모습. 왼쪽부터 이구, 순정효황후 윤씨, 이방자 여사, 줄리아 리.


이구 내외의 낙선재 시절 모습. 왼쪽부터 이구, 순정효황후 윤씨, 이방자 여사, 줄리아 리.          


이남주 교수는 “시어머니 이방자 여사와 불화했지만 낙선재에 바느질 방을 만들고 이 여사가 운영하던 사회복지법인 ‘명휘원’의 장애인을 고용해 기술훈련을 시키는 등 조선왕가의 마지막 여성으로서 도리를 다했다”고 설명했다.
그에게 일을 배운 장애인들은 줄리아를 ‘큰 엄마’라 부르며 따랐는데 이혼 뒤에도 ‘줄리아 숍’이란 의상실을 경영하며
 복지사업을 계속하게 된 인연이 됐다. 



         
낙선재에 머물던 시절 이구 부부의 모습이다. 한복차림으로 포즈를 취했다. [중앙포토]


낙선재에 머물던 시절 이구 부부의 모습이다. 한복차림으로 포즈를
취했다.

[중앙포토]      

    


아무 도움 없이 홀로 일하던 줄리아는 결국 95년 하와이에 새 정착지를 마련해 한국을 떠났다.
자식이 없었던 줄리아가 낙선재 시절 입양한 이은숙(미국명 지나 리)씨가 곁을 지켰다.
재혼하지 않고 일본으로 건너간 뒤 소식이 없는 전 남편 이구를 그리워했다는 게 이 교수의 전언이다. 
         

2000년 9월 일시 귀국한 줄리아는 한 달 여 머물면서 추억의 장소를 둘러봤다.

 시아버지 영친왕의 묘소를 참배하고한때 안주인으로 살림을 살았던 낙선재에 들러 장애인 제자들을 만났다.

이구 선생에게 직접 전해주고 싶었을 조선왕가의 유물과 한국 근대사 관련 사진 450여 점을 덕수궁박물관에 기증했는데 이때 모습을 담은 다큐멘터리가 ‘줄리아의 마지막 편지’라는 제목으로 방송되기도 했다.






이혼 후 그렇게 바라던 이구와의 재회는 이뤄지지 않았다. 장례행사에 초대받지 못한 줄리아 리는 먼 발치에서 운구행렬을 지켜봤다. 장례식이 끝난 뒤 홀로 이구의 묘 앞에서 절을 올렸다고 한다.[중앙포토]


이혼 후 그렇게 바라던 이구와의 재회는 이뤄지지 않았다. 장례행사에 초대받지
못한 줄리아 리는 먼 발치에서 운구행렬을 지켜봤다. 장례식이 끝난 뒤 홀로 이구의
 묘 앞에서 절을 올렸다고 한다.

[중앙포토]       


   


그토록 만나기를 원했던 전 남편과의 재회는 끝내 이뤄지지 못했다.
 2005년 7월 16일 일본 도쿄의 옛 아카사카 프린스 호텔(이구가 태어난 곳이기도 하다)에서 주검으로 발견된 이구 선생의 유해는 20일 국내로 들어와 장례를 치렀지만 줄리아는 초대받지 못한 손님이었다.
낙선재와 종묘를 거쳐 장지로 떠나는 장례행렬을 먼발치에서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2014년 성탄절에 말년까지 소식을 주고 받은 유일한 한국 친족 이남주 교수 가족과 하와이의 한 레스토랑에서 만난 줄리아 리. 왼쪽부터 이남주 교수, 이 교수의 외아들 윤희선씨, 줄리아, 이 교수의 며느리 김현주씨, 손자 윤성민군. [사진 이남주]


2014년 성탄절에 말년까지 소식을 주고 받은 유일한 한국 친족 이남주 교수
가족과 하와이의 한 레스토랑에서 만난 줄리아 리. 왼쪽부터 이남주 교수,
 이 교수의 외아들 윤희선씨, 줄리아, 이 교수의 며느리 김현주씨, 손자 윤성민군.

 [사진 이남주]  


        


지난해 10월 하와이 요양병원으로 찾아가 줄리아와 이별 인사를 나눴던 이 교수는 “나를 보고 처음에는 멍하니 있다가 ‘이건 기적이야’라고 중얼거리며 한없이 눈물을 흘리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고 했다.
 한 남자를 사랑했기에 비운의 황족이 외면받는 먼 이국땅이라도 운명처럼 따라나섰던 줄리아의 삶이 끝났다.
 100여 년 전 사라진 대한제국의 희미한 그림자가 언뜻 비친다.









/조선DB


         

영친왕 부부와 이구(좌), 이구와 줄리아 리(우).



영친왕 부부와 이구(좌), 이구와 줄리아 리(우).




이구 부부 `갈라놨던` 종친회..비난 여론 폭주

이구 부인 타계..하와이서 쓸쓸히 떠난 94세 조선 마지막 세자빈




이구 부인 줄리아 별세 소식이 전해져 안타까움을 주고 있다.

대한제국의 황태손 故 이구의 부인 줄리아 리가 지난달 26일 미국 하와이에서 별세했다고 복수의 언론들이 전했기

때문.
이구는 이 때문에 주요 포털 실검 상위권에 등극한 상태며 이에 대한 누리꾼들의 반응도 뜨겁다.

대한제국 최후의 황태자 이은의 외아들 고 이구의 부인이자 조선의 마지막 세자빈인 줄리아 리(본명 줄리아 멀록)는

94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이 같은 소식을 전한 인물은 이구 선생의 9촌 조카인 이남주 전 성심여대 음악과 교수.

그는 "줄리아 리는 휴대전화도 쓰지 못할 정도로 거동이 불편해 누워만 있다가 쓸쓸히 눈을 감았다"며라 "외롭게 타국을 떠돌던 이구 선생에게 8세 연상인 줄리아가 엄마나 누나 같이 의지가 됐을 것"이라고 말했다.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세손인 고 이구는 대한제국 최후의 황태자인 이은의 외아들로 일본인 부인 이방자 사이에서

태어났다. 독일계 미국인인 줄리아 리는 1950년대 후반 미국 뉴욕에서 이구 선생을 만나 1958년에 결혼했다. 

중앙일보는 6일 이 같은 소식을 단독 보도하며 이구 부부 삶을 조명했다.
중앙일보는 “이구 부부는 63년 일본에 머물던 영친왕과 이방자 여사의 요청으로 함께 귀국해 서울 창덕궁 낙선재에

짐을 풀었다”라며 “재주 많고 정이 많은 성품의 줄리아였지만 낯선 궁궐 생활과 종친들의 외면을 견디기는 힘들었다.


푸른 눈의 이방인 세자빈을 인정할 수 없었던 종친회는 후사를 잇지 못한다는 이유를 들어 이구 선생에게 이혼을

 종용했다. 낙선재가 싫다며 호텔 생활을 하던 남편과 별거상태였던 줄리아는 결국 82년 이혼서류에 도장을 찍었다”고 전했다.

이 매체는 또 “아무 도움 없이 홀로 일하던 줄리아는 결국 95년 하와이에 새 정착지를 마련해 한국을 떠났다”라며

“자식이 없었던 줄리아기 낙선재 시절 입양한 이은숙(미국명 지나 리)씨가 곁을 지켰다. 재혼하지 않고 일본으로

건너간 뒤 소식이 없는 전 남편 이구를 그리워했다는 게 이 교수의 전언이다”고 전했다. 

2000년 9월 일시 귀국한 줄리아는 한 달 여 머물면서 한때 안주인으로 살림을 살았던 낙선재에 들러 장애인 제자들을 만났으며, 이구 선생에게 직접 전해주고 싶었을 조선왕가의 유물과 한국 근대사 관련 사진 450여 점을 덕수궁박물관에 기증했던 것으로 이 매체는 전했다.

 

물론 이구와의 재회는 이뤄지지 않았다. 장례행사에 초대받지 못한 줄리아 리는 먼 발치에서 운구행렬을 지켜봤다. 
이구 부부 소식을 접한 누리꾼들은 “나라 팔아 먹고 백성들 피폐에 빠지게 하고도 자기들만 호위호식 했던 소위

조선왕족과 허세 가득한 그 추종자들 보다,


장애인도 보살피고 했던 벽안의 부인이 더 고귀한 삶을 산 듯 하네” “아픈 역사의 현실” “이혼 강요한 종친이 상놈들” “왕이니 황제니 다 떠나서 전남편을 그렇게 그리워 했으면 만났을 법도 한데. 살아서는 그렇다 치고 2005년이면 옛날도 아닌데 왜 장례식에도 못 갔을까. 진짜 종친들이 문제” “인성 거지같은 왕족 집에 시집와 이혼 당하고도 도리를 다하고 쓸쓸한 인생을 살다간 줄리아 멀록 불쌍하네요. 명복을 빕니다” 등의 반응이다. 




이구 이미지 = 연합뉴스 





파일:external/pimage.design.co.kr/1276972871143.jpg


가운데의 인물이 이구. 그 외 왼쪽부터 의민황태자, 이방자.




파일:external/www.royalark.net/korea-Yi%20Ku.jpg


종묘제례에서 황제면류관곤복 차림인 이구.



이구




의민황태자 이은자행황태자비 이방자 사이에서 태어난 차남으로, 대한제국황족이었다.

주 이씨 대동종약원이 올린 사시(私諡)는 자인온유덕성순수회은황세손(慈仁溫裕德性純粹懷隱皇世孫)이며 흔히

 줄인 말인 회은황세손으로 불린다.

아버지 영친왕은 대한제국이 아직 존재하던 시절, 고종이 살아 있을 때 '황태자'로 봉해졌지만 이구는 대한제국 멸망

이후, 그것도 순종 사후에 태어났기 때문에 공식적으로 황태손이 된 적이 없으므로 대중들에게 '황세손'이라고 거의

 불리지 않는다.


황제의 손자라는 의미인 황태손과 왕의 손자인 왕세손이 합쳐진 이름, 바로 이도저도 아닌 이 시호에 논란이 많다.

 어찌되었든 현재 문화재청에서는 회은황세손을 사용하고 있다.


그의 형 이진은 아직 아기였을 때 사망했고, 그로부터 10년 뒤에 태어났기 때문에 사실상 외아들로 성장했다.

태어날 때부터 그는 이왕 은(李王 垠)의 후계자로서 이왕세자(李王世子)라 불렸다.

        

그는 1953년에 미국으로 유학을 가 MIT에서 건축을 전공해 유명 건축가 이오밍 페이의 회사에 취직했다.

유학 중 만난 줄리아 리[4]1959년 결혼한다. 유학하려고 했을 당시 이방자가 도미를 말렸으나 영친왕이 "구는

아버지를 딛고 넘어 넓은 세계로 가라.

나처럼 되지 말고 너의 길을 찾으라"라고 적극 지원했다고 한다.


 이후 1963년 귀국해 한동안 성공을 했으나 1973년 사업에 실패한 뒤 일본으로 갔고, 아내와 별거하다가 1982년

이혼했다.

 불임 때문에 이혼하게 되었다는 말도 있지만 실제로는 불명.


 일단 이혼하게 된 결정적인 이유는 이구의 바람끼와, 종친들이 이구더러 줄리아와 이혼하고 한국 여성과 결혼하라고 오랫동안 요구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 후 1990년대에 일본인 무당 아리타 키누코와 혼인신고를 올렸다고 한다.

그는 주로 미국 아니면
일본에서 지냈다.

한국에 거주할 생각이 없던 건 아니지만, 종친들과 갈등을 겪은데다 한국에 적응하지 못해 포기했다고 한다.

무엇보다도 그는 한국어를 잘 구사하지 못했다. 그래서 가끔 일이 있을 때 아니면 거의 한국에 오질 않았다고 한다.


 어쨌든 마지막 황태자의 하나뿐인 아들이므로 대한제국 황실의 적손으로서 전주이씨대동종약원 명예총재 직책을 갖고 있었다.


과거 자신이 살던 저택을 개조한 아카사카 프린스 호텔에 묵고 있을 때 사망했다. 

 향년 73세. 일본 황가에 이구의 친손이라며 대한제국 황실가에 들어가야 한다는 주장을 하는 이들이 있다고 한다.


(실제로 이구씨는 일본 왕실로부터 약간의 연금과 생활보조비를 지급받긴 했다.

 이방자를 통해서 모계로 아키히토6촌관계 이기도 하고.) 이들은 이구의 시신 유품 일부를 몰래 일본에 가져가기도 해 조선황실복원 관계자들을 격분하게 했다. (2008년 월간 중앙 참조)

알려진 바로는 그에게 자식은 없다.

다만 양녀가 있다는 기록은 있다고 한다.

어쨌든 대를 이을 아들이 없으므로 그의 사후, 회사원 이원씨가 전주이씨 대동종약원에 의해 이구의 양자

지명되었다.

이를 정식으로 인정해야 할지는 논란이 있는데, 현행 민법상 사후양자 제도가 폐지되었기 때문이다.


일단 대동종약원에서는 생전 이구 씨가 이상협 씨를 양자로 지명하는데 동의했다고 했는데, 사실이라 하더라도 법적

절차는 이구의 사후에 이루어졌으니 논란이 될 수 밖에 없다.

참고로 이석씨는 황실인사들과 상의없이 종약원회장과 이구 씨가 일방적으로 이상협 씨를 양자로 지명했다는 것,

종약원 자체가 황실과 혈통상 거리가 멀다는 것 등으로 인해 이 양자 지명을 강력 반대했다고 한다.


어쨌든 이원은 이구의 후손으로서 현재 조선왕릉이나 종묘에 대한 제사를 맡고 있다.

대한제국 시절 예법에 따라 창덕궁에서 장례를 치르고, 홍유릉 권역으로 운구된 후에 아버지 영친왕의 묘역인 영원

인근에 마련된 조선 왕조 최후의 왕실 묘역 회인원(懷仁園)에 안장되었다.


이구의 장례는 조선왕조 왕실 예법으로 거행된 마지막 '진짜 장례식'으로, 사실상 그가 대한제국 황실의 마지막 직계손이기 때문에 이후로는 무형문화재 전승 차원에서 흉내(?)를 내는 일이 있을지는 몰라도 진짜 장례식으로 거행되지는

 않을 가능성이 높다







                                              



영친왕 

                                        




이토 히로부미와 영친왕 이은





1907년 대한제국의 황제 고종은 일제의 병탄 야욕에 대한 최후의 승부수로 제2차 만국평화회의가 열리는 네덜란드의

헤이그에 이준·이상설·이위종을 파견하여 일본의 기만적인 횡포를 세계 만방에 알리고자 했다.

1905년에 일본과 맺은 보호조약은 자신의 뜻이 아니므로 무효라는 것이다.


하지만 밀사들은 열강의 외면과 일본 대표단의 방해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때 고종의 밀명을 받은 선교사 호머 헐버트는 현지에서 헤이그 밀사들을 측면 지원한 다음 미국으로 건너가 워싱턴 당국에 구원을 요청했지만 반응이 없었다.


이 사건이 수면 위로 드러나지자 조선통감 이토 히로부미는 고종에게 헤이그 밀사 파견을 힐난하며 퇴위를 강요했다. 고종은 어쩔 수 없이 순종에게 보위를 물려주는 대신 총애하던 순헌황귀비 엄씨 소생의 영친왕 이은을 황태자로 들어

앉혔다.

고종으로서는 그가 훗날 보위에 올라 국권을 회복해주길 바랐겠지만 이미 불 꺼진 등잔에 기름 붓기였다.


대한제국의 운명이 바람 앞의 촛불처럼 흔들리던 그 시절, 영친왕은 황태자가 되자마자 볼모로 일본에 끌려가 일본식 군사교육을 받았다.

조국이 일제에 병탄된 뒤에는 일본 황족과 정략결혼을 당했으며, 일본 육군 장교로서 중일전쟁태평양전쟁의 선전

선동 임무에 동원되었다.


전후에는 그의 정치적 영향력을 경계한 미군정과 대한민국 정부의 외면으로 국적마저 얻지 못했다.

그 때문에 오랫동안 일본에서 생활고와 병고에 시달리던 그는 뒤늦게 조국 땅을 밟았지만 영혼은 이미 육신 밖에

 있었다.

      









영친왕 / 사진=온라인 백과사전


↑ 영친왕


 / 사진=온라인 백과사전



영친왕 그는 누구인가?



망국의 황태자, 볼모가 되다


영친왕(英親王) 이은(李垠)은 조선의 26대 국왕이자 대한제국 초대 황제인 고종의 일곱째 아들이다.

1897년 경운궁 숙옹재에서 태어났다.

순종과 의친왕 이강, 덕혜옹주와는 이복형제 사이다.


어머니 엄씨는 8세 때 입궐하여 나인이 되었는데 명성황후를 모시던 중 고종의 승은을 입은 것이 발각되어 쫓겨났다가 을미사변으로 명성황후가 시해되자 다시 입궐하여 고종의 총애를 받았고, 이은을 낳은 뒤 귀인, 순빈, 순비 등를 거쳐

 1903년황귀비에 책봉되었다.


을미사변 이후 가중되는 일본의 압박을 아관파천으로 극복한 고종은 1897년 러시아공사관에서 경운궁으로 이어한 다음 대한제국을 선포했다.

 황제에 즉위한 그는 중국의 전례에 따라 왕자들을 모두 친왕으로 책봉했다.

이때 이은이 영친왕으로 책봉되었고, 궁내부 관제로 영친왕부도 설치되었다.


이은은 1902년 고종이 근대화의 일환으로 설립한 대한천일은행의 제2대 은행장으로 추대되었지만 실질적인 운영은

 내장원경 이용익이 도맡았다.

 1905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고종에게 을사늑을 강제하여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함으로써 보호국으로

 삼았다.


사실상 대한제국을 식민지로 만드는 데 성공한 일본은 경성에 통감부를 설치하고 이토 히로부미를 초대 통감으로

임명하여 내정을 장악했다.

영친왕 이은은 1906년부터 서울에 황족과 귀족 자제들을 위해 세운 근대식 교육기관 수학원에서 공부했다.

 1907년 고종이 퇴위와 함께 그를 황태자로 책봉하자 유림에서는 연잉군의 경우처럼 황태제로 해야 한다며 반발했다.


그러자 고종은 건국 초기 태종이 정종으로부터 왕위를 계승할 때 왕세제가 아니라 왕세자 자격으로 받았다는 전례를

 내세워 황태자란 명칭을 고집했다.

 당시 순종은 후사가 없었고, 김홍륙 독차사건의 후유증으로 건강이 나빴으므로 이 문제는 전적으로 고종의 뜻에

따라 결정되었다.


그와 함께 고종은 여흥 민씨 가문이던 민영돈의 딸 민갑완을 황태자비로 간택했다.

민영돈은 명성황후의 먼 조카뻘로 1898년 고종의 특명전권공사로 임명되어 영국·미국·벨기에 공사를 지냈으며,

을사늑약으로 국권을 빼앗겼을 때 고종의 밀지를 해외에 전했던 인물이다.


그러나 민갑완은 그해 12월 영친왕이 일본 유학을 떠나고 일제에 의해 파혼 당하자 상하이로 가서 평생 혼자 살았다.

 후손들의 회고에 따르면 그녀는 어두운 옷을 입었으며 자신이 드러나길 원치 않았는데, 죽을 때까지 영친왕을

원망하지 않았다고 한다.


고종이 이은을 황태자로 책봉하자 통감 이토 히로부미는 재빨리 이은의 일본 유학을 제안했다.

그것은 일본의 막부시절 지방 번주와 가족을 인질 차원에서 일정 기간 에도에 살게 하던 참근교대제를 원용한 것

이었다.


이에 고종과 엄비는 완강하게 반대했다.

 사랑하는 아들이라 언제까지나 곁에 두고 보살피려 했는데 아닌 밤중에 홍두깨로 맞은 격이었다.

하지만 고귀한 황태자에게 전례대로 최상의 교육을 실시해야 한다는 이토 히로부미의 논리를 뒤엎을 묘책이 없었다.

결국 엄비는 황태자가 방학 때마다 조선을 방문하는 조건으로 유학을 허락했다.







창덕궁 낙선재 


 사적 제122호, 서울시 종로구 율곡로




그해 겨울 낙선재에 머물던 이은은 12월 초 태자태사로서 자신의 교육을 전담하던 이토 히로부미와 함께 만주환

(滿洲丸)을 타고 현해탄을 건녔다.

 수행원은 동궁대부 고의경, 시종무관 조동윤, 경학원 학생 조대호와 서병갑, 외사촌 엄주명 등이었다.

도쿄에 도착한 이은은 시바 이궁에 머물다 이듬해 2월 아자부 도리이자카(麻布鳥居坂)의 저택으로 거처를 옮겼다.


도일 초기 일본은 한국인들의 시선을 의식한 듯 황태자를 극진하게 대접했다.

메이지 천황은 이토 히로부미를 보육총재로 임명했고, 자주 입궐시켜 선물을 주기도 했다.

1909년 이토 히로부미가 하얼빈에서 안중근 의사에게 죽임을 당하자 이은은 새로 보육총재가 된 이와쿠라 도모사다와 함께 일본 각처를 여행하면서 근대화된 일본의 변화를 체험했다.


1910년 일본의 강제병탄으로 조선 황제의 칭호가 왕으로 격하되자 이은의 칭호 역시 황태자에서 왕세자로 내려앉았다. 1911년 학습원 중등과 1학년 재학 시절 순헌황귀비 엄씨가 전염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당시 이은은 장례식을 치르기위해 귀국했지만 전염의 위험이 있다는 이유로 어머니의 시신조차 뵙지 못하고 돌아가야 했다.


황족 마사코와 결혼하다

이은은 1915년 일본 육군사관학교 제29기로 입학하여 2년 뒤인 1917년에 졸업한 다음 육군 소위로 임관했다.

이듬해인 1916년 8월 조선의 왕세자 이은과 나시모토노미야 마사코(梨本宮方子, 한국명 이방자)의 약혼 소식이 언론에 대서특필되었다.


마사코는 황족 나시모토미야(梨本宮)의 장녀로 일찍이 일본의 황태자비 후보로 물망에 올랐지만 한일융화의 초석이

되라는 천황의 명령으로 정략결혼에 내몰린 것이었다.


조선에서 15년 동안 이왕직 궁내관을 지낸 곤도 시로스케의 《대한제국황실비사》에는 고종이 두 사람의 결혼에 쌍수를 들어 환영했다고 씌어 있다. 반대로 이방자 여사의 회고록 《세월이여 왕조여》에 따르면 고종은 명성황후를 암살

하고 대한제국을 멸망시킨 일본의 황녀를 며느리로 받아들일 수 없다며 강경하게 반대했다.

하지만 이미 나라를 잃고 허수아비로 전락한 고종이나 볼모가 된 이은으로서는 아무런 결정권이 없었다.

 

결혼식은 1919년 1월 25일로 정해졌는데 1월 21일 갑자기 고종이 의문의 죽음을 당하면서 혼사가 무기 연기되었다.

그러다 이듬해 4월 28일에 이르러서야 도쿄에 있는 이은의 저택에서 예식이 치러졌다.

당일 이들의 결혼에 불만을 품은 유학생 서상일이 마사코가 타고 있던 마차에 사제폭탄을 던졌지만 불발되었다.


조선 총독 사이코 마코토는 특별 포고문을 통해 두 사람의 결합을 내선일체(內鮮一體)의 표본으로 선전했다.

이에 대하여 상하이에서 발행된 독립신문에서는 이은을 ‘원수의 여자와 결혼한 금수(禽獸)이며 적자(賊子)’라고 강력

히 비난했다.


이은은 마사코와의 사이에서 1921년 8월 장남 이진(李晉)을 얻었지만 조선 방문 도중 병사했고, 10년 뒤인 1931년에

차남 이구(李玖)를 얻었다.



이왕가를 계승하다

이은은 일본에 머무는 동안 정체성에 심한 혼란을 겪어야 했다.

일본에 온 지 3년만에 대한제국이 병탄되자 한국인들은 그를 나라를 팔아먹고 호의호식하는 매국노라며 손가락질했다. 반대로 일본인들은 그를 위험 인물이라 여기고 가까이하려 들지 않았다.

원하든 원치 않든 그는 일본과 조선 사이에 끼어 있는 불안정한 존재였다.


그런 막막한 상황에서 그는 나름의 생존법을 터득했다.

1915년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한 뒤 좌고우면하지 않고 공부에열중하여 모범생 소리를 들었다. 어학에 소질이 있어

영어와 불어에 능통했다. 그는 또 수시로 집에 일본인이나 한국인 장교들을 초대하여 신뢰감을 쌓았다.

당시 부인 마사코는 손님들을 위해 청주와 냉육, 샌드위치, 과자, 홍차 등을 대접했다고 한다.


이은은 그렇듯 다양한 방식으로 자신의 존재 의의를 찾고자 했지만 내면의 고독은 쌓여만 갔다.

날이 갈수록 조국에 대한 그리움도 짙어졌다.

 견디다 못한 그는 조선에 편지를 보내 낙선재에 있을 때 가지고 놀던 조약돌을 보내달라고 청했다.

 얼마 후 조약돌을 전해 받은 그는 향수병이 몰려올 때마다 그 돌을 만지작거리며 위안거리로 삼았다.


1919년 아버지 고종이 승하했지만 일본 정부의 허락을 받지 못해 장례식에도 참가하지 못했다. 이듬해 3월, 조선 땅에서는 고종의 인산일을 기해 독립을 염원하는 만세운동이 벌어졌다.

한데 그는 핍박받는 동포들을 위해 아무런 의사표명도 할 수 없었다.

인질로서 적지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소경에 벙어리가 되어야 했다.







순종 장례식, 영친왕과 이방자 여사 



                        

참담한 세월은 덧없이 흘러갔다. 이은이 일본 육군대학교를 졸업하고 참모본부 소속으로 근무하던 1926년 4월.

순종이 창덕궁 대조전에서 승하했다.

이은은 다이쇼 천황의 칙령에 따라 순종이 갖고 있던 ‘이왕(李王)’ 직위를 계승했다.


아울러 순종이 갖고 있던 쇼토쿠노미야(昌德宮)의 호칭도 물려받았다.

이왕가는 명목상 일본의 왕공족에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이은의 정식 칭호는 창덕궁 이왕(昌德宮 李王)이었지만 이왕직 내부에서는 사왕 전하(嗣王殿下)라고 불렀다. 하지만 그는 1년에 며칠 동안만 종묘제례를 위해 조선에 갈 수 있었다.

그래서 조선에서는 그를 도쿄 이왕(東京 李王)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1927년 5월 이은 부부는 수개월 일정으로 유럽 여행을 떠났다.

정보를 입수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는 상하이에서 그들을 납치하려 했지만 일제에게 사전 탐지되어 실패하고 말았다. 두 사람은 이집트, 프랑스, 영국, 이탈리아, 독일, 모나코 등지를 순회한 다음 이듬해 4월 일본으로 돌아갔다.


오랫동안 일본에 체류하면서 현지 생활에 안정을 찾은 이은은 조국을 위한 봉사활동을 시작했다. 1933년 일본 육사에 다니는 한국인 생도를 위해 일요하숙을 마련해 주었고, 1940년에는 사재를 털어 재일 한국인 여학생들을 위해 기숙사인 홍희료를 지어주었다. 또 재일유학생을 지원하기 위해 이화회(李花會)를 설립했다.


훗날 종묘제례 때문에 귀국한 이은이 이화회 회원들과 만났을 때 정확한 발음의 한국어로 학생들의 근황을 묻고 정답게 대화를 나누어 주변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당시 조선에서는 미나미 지로 총독이 창씨개명과 함께 일본어 상용 정책을 강요하고 있었지만 그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고 한다.


중일전쟁이 한창이던 1937년 이은은 육군 장성으로서 화북 등 주요 전선에서 선전활동을 했고, 일본 본토 후방을

 지키던 제1항공군의 지휘를 맡았다.

엄혹한 시기에 이은은 조카 이우를 통해 조선의 민요와 창극이 수록된 레코드판과 민속품 등 각종 문화재를 사들였다. 아울러 당대 일본 유명화가들의 작품을 수집하기도 했다.


또 서울 종묘에 있는 역대 선조들의 위패 81위를 똑같이 복제하여 도쿄 아카사카(赤坂)의 저택에 모셨다.

그는 자신이 5백년 조선 왕조의 후예임을 잊지 않았던 것이다.



경계인의 고독

1941년 12월, 일본의 하와이 기습공격으로 촉발된 태평양전쟁이 장기화 되면서 이은은 황망한 나날을 보냈다.

일본 육군의 현역 중장으로서 일선을 시찰하며 전쟁을 독려했고 이왕의 신분으로 조선으로 건너와 정신무장을

 역설했다.

하지만 초강대국 미국에 대한 일본제국의 무리한 도전은 필연적으로 패배를 예고하고 있었다.


1945년 8월 12일 이은은 도쿄에서 열린 황족들의 긴급회의에 불려가 히로히토 천황의 무조건 항복 방침을 통보받았다. 러시아의 선전포고,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떨어진 두 발의 원자폭탄이 이미 갈갈이 찢겨진 욱일승천의 깃발을 태워

버린 것이다.


 이때 이은은 히로시마의 참모본부에서 근무하고 있던 조카 이우가 목숨을 잃었다는 소식을 듣고 넋을 잃었다.

7월 13일 도쿄에서 만난 지 불과 한 달만에 들려온 비보였다.


종전 이후 일본의 황족들은 연합군 최고사령부(GHQ)의 신적강하(臣籍降下), 즉 ‘황족의 특권을 포기하고 평민이

된다는 결정’에 따라 연금을 비롯한 각종 면세 특권을 박탈당했다. 이왕가 역시 황족으로 간주되었으므로 졸지에

수입이 끊긴 이은은 전전긍긍하게 되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집안의 곳간이 바닥을 드러내자 궁지에 몰린 그는 도쿄의 저택을 참의원 의장 공권으로 빌려주고 집세를 받아 생활했다.

생활고로 인해 그 동안 모아두었던 조선의 문화재와 장신구들도 모두 팔아치웠다.

그는 자포자기 상태에 빠진 듯 고급요정에 틀어박혀 게이샤를 모델로 누드화를 그리다 부인과 다투기까지 했다.

              

당시 그의 희망은 조국으로 돌아가 일정한 정치적 위치를 보장받는 것이었지만 친일파라는 멍에가 그의 발목을 잡았다. 대한민국에서는 그가 대한제국의 황태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일본 육군에 복무했고, 일본 황족과 결혼했으며, 일본

 황족에 준하는 대우를 받았다는 것이 문제시 되었다.


 국회에서 반민족행위처벌법을 토의할 때 의열단 출신의 박건웅은 “동경의 이왕은 민족 반역자인데 왜 자살하지

않았는가?”라고 성토하기까지 했다.

이런 조국의 뒤틀린 시선 때문에 이은은 괴로웠다.


일본 육사 출신으로 육군참모총장을 역임한 이형근의 증언에 의하면 당시 그는 과거 조선 동포들을 나락으로 떨어뜨린 선조들의 잘못을 사과하겠다는 뜻을 표명하며 이제라도 해방된 조국을 수호할 수 있는 강력한 군대를 갖추어야 된다고 역설했다고 한다. 그 말에 감명받은 자신이 귀국한 뒤 국군 창설을 주도했다는 것이다.


종전 후 미군에게 배포된 한국 관련 팜플렛에 영어로 번역된 아리랑이 수록되어 있었는데 추적 결과 번역자가 바로

이은이었다. 이로 미루어볼 때 그는 일본 육사에서 정식 군사교육을 받았던 자신이 신생 조국의 군무에 일정한 역할을 기대했던 것 같다. 하지만 미군정은 정치적으로 민감한 그의 귀국을 허락하지 않았다.


1946년부터 시작된 과도입법위원회 시절에는 그를 정적으로 인식한 이승만의 견제 때문에 발이 묶였다.

1946년 5월 미국의 뉴욕 타임스는 이은이 대통령이 될 것이라는 기사를 실었다. 그 때문이었을까. 이은이 도쿄에서

 미군정이 주최한 만찬에 참석했을 때 만난 이승만에게 귀국 의향을 밝혔지만 “오던 가던 마음대로 하시오.”라고

냉랭한 응답을 받았을 뿐이다.


1948년 8월, 남쪽에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자 이은은 재차 귀국을 타진했지만 그의 정치적 영향력을 우려한 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 외면당했다.


그렇듯 이은은 미군정과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귀국 허가를 받지 못하고 고립상태에 빠졌다.

아들 이구의 미국유학을 결정한 뒤 대한민국 정부에 아들의 여권 발급을 요청했지만 역시 반응이 없었다.

 그 때문에 1950년 8월 이구가 미국유학을 떠날 때 일본 정부가 발급한 임시 여권을 사용해야 했다.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그는 유엔군을 위해 학습원 교수 블라이드와 함께 《A First Book of Korean》이라는

 한국어 교본을 저술했다.

 아울러 주일 공사 김용주의 부탁으로 재일교포를 대상으로 하는 의용군 모집과 구호물자 수집에 나섰다.


그는 또 일본에 밀항한 한국인 학생을 돕기 위해 동분서주했지만 일본 내에서 특별한 수입원이 없었으므로 1952년

도쿄의 저택을 세이부(西武) 그룹의 창업자인 쓰쓰미 야스지로에게 팔아 자금을 마련했다. 고난에 빠진 조국을 위해

 뭔가 조금이라도 기여할 수 있었던 보람찬 시기였다.

      

쓸쓸한 환국, 침묵의 영면

1954년 대한민국에서는 구황실재산처리법을 제장하여 대한제국 황실의 재산을 모두 국유화했다.

그 대신 황족의 직계와 배우자에게 매월 생활비가 지급되었지만 일본에 머물고 있던 이은은 제외되었다.

대한제국의 실질적인 후계자였던 그로서는 황망한 일이었다.


1955년, 그는 여동생 덕혜옹주와 소 다케유키와의 이혼을 성사시켰다.

자신과 마찬가지로 일찍부터 일본으로 끌려와 고독하게 살다가 정략결혼의 희생자가 되었던 불쌍한 동생이었다.

 고향에 대한 그리움으로 정신질환을 앓고 있던 그녀는 당시 의사 결정 능력이 전무했다.

 그래서 아내인 이방자 여사가 도맡아 일을 추진했다.


이은 부부는 1957년 아들 이구가 매사추세츠 공과대학교를 졸업하자 미국으로 건너가 한동안 뉴욕에 머물렀다.

 한데 이은이 1959년 3월 갑자기 뇌일혈로 쓰러졌다가 가까스로 회복되자 5월에 일본으로 돌아갔다.

 그 탓으로 그해 10월 25일 이구는 부모가 불참한 가운데 우크라이나계 미국인 줄리아 멀록과 결혼식을 올렸다.


1960년, 4·19 혁명으로 이승만과 자유당 정권이 붕괴되고 장면의 민주당 정부가 수립되면서 이은에게 새로운 기회가

 열렸다. 장면은 그를 통해 민심을 얻으려는 생각으로 주영 대사직을 제안했지만 건강상의 이유로 고사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귀국길이 활짝 열리자 마음이 설렜다.


1961년 5월, 이은은 이구가 살던 하와이를 다녀온 뒤 지병이 재발하여 성 누가 병원에 입원했다.

그의 병명은 뇌혈전증으로 인한 실어증이었다.

그 무렵 카톨릭 신부의 권유로 영세를 받아 요셉이란 본명을 얻었다.


그해 5.16 군사정변으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는 이구의 소식을 듣고 치료비와 생활비를 지원했지만 병세는 악화일로를 걸었다.

1963년 11월 22일에 이은은 드디어 고대하던 귀국길에 올랐다.


 하지만 곧 혼수상태에 빠져 곧장 성모병원에 입원했다. 그 후 오랫동안 고독한 투병 생활을 하던 그는 1970년 5월 1일 창덕궁 낙선재에서 세상을 떠났다.

 향년 73세였다. 그날 임종을 지키던 이방자 여사는 60여년 간 함께 했던 고독한 황태자 이은에게 작별인사를 했다.

“안녕히 가세요.”


일국의 왕자로 태어나 평생 한 번도 자신의 뜻대로 살아보지 못했던 비운의 황태자 이은, 그의 마지막 소망은 고국에서 평범한 나날을 보내는 것이었지만 그조차 격변하는 시대의 회오리바람 속에서 산산히 부서졌다.

그의 부음이 알려지자 전주 이씨 대동종약원에서는 의민황태자(懿愍皇太子)란 시호를 바쳤다.

‘의민(懿愍)’이란‘평생 고난의 길을 걷다’라는 뜻이다.






  1960년대 미국에서 찍힌 이구(왼쪽)와 줄리아의 모습.


 [사진=국립고궁박물관 홈페이지 캡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