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이명박(MB) 전 대통령의 구속영장이 발부된 23일 오전 이 전 대통령이 서울 논현동
자택에서 검찰 관계자들에게 구인되어 서울동부구치소로 이동하기 위해 차량으로
향하고 있다.
ⓒ데일리안 홍금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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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찰, 다스 실소유주 퍼즐 완성..MB '60년지기' 자백
다스 지분 4% 소유한 김창대 "MB 소유" 진술
(서울=뉴스1) 심언기 기자,이유지 기자 = 이명박 전 대통령(77)의 다스 실소유를 입증할 마지막 퍼즐이 맞춰졌다.
최측근이자 다스 지분 4.2%를 소유한 청계재단 감사 김창대씨가 검찰에 차명보유 사실을 인정했다.
29일 사정당국에 따르면 해외에 머물며 수사망을 피해왔던 김씨가 최근 귀국해 검찰 조사를 받은 것으로 확인됐다
. 김씨는 이 전 대통령이 구속수감된 이후 태도를 바꿔 검찰에 협조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다스 지분은 이상은 회장이 47.26%, 이 전 대통령 처남댁 권영미씨가 23.60%, 기획재정부가 19.91%, 청계재단이
5.03%를 보유하고 있으며 김씨는 4.20%의 지분을 갖고 있다.
이 전 대통령과 동향인 김씨는 경북 포항에서 중학교에 이어 동지상고를 함께 다닌 동기동창이다. 17대 대선때는
이 전 대통령 후원회장을 맡기도 한 최측근이다.
검찰은 그간 조사를 통해 기획재정부 소유의 지분을 제외한 80%의 지분이 모두 이 전 대통령의 소유라고 결론내렸다. 친형인 이상은 회장조차 자신의 지분이 "이 전 대통령의 것"이라는 취지로 자백한 것으로 알려졌다.
여기에 최측근 김씨마저 검찰에 차명보유 사실을 털어놓으면서 이 전 대통령이 다스의 실소유주임을 입증하는 마침표를 찍게 됐다.
그러나 이 전 대통령은 여전히 "다스는 형의 것"이라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는 상황으로, 구속수감 이후에도 검찰의
대면조사를 거부하고 있다.
eonki@

이명박(MB) 전 대통령의 구속영장이 발부된 23일 새벽 이 전 대통령이 서울 논현동
자택에서 검찰 관계자들에게 구인되어 서울동부구치소로 이동하기 위해 차량으로
향하고 있다.
ⓒ데일리안 홍금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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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셋값 200만원 도와달랬더니 해고장"..'분신'마저 돌아섰다
최측근 김유찬·김희중 사례로 본 MB의 용인술
“운전기사 이모씨가 이명박 전 대통령을 7년을 모신 상황에서 갑자기 눈물을 흘리더라.
나 짤렸어 그러더라. 퇴근길에 어려운 부탁이 있다고, 전셋값을 올려달라고 주인이 얘기해서 200만원만 빌려달라고
그랬더니 다음날 바로 해고됐다.”
이 전 대통령의 국회의원 때 6급 비서관을 지낸 김유찬씨가 최근 SBS ‘김어준의 블랙하우스’에 출연해 밝힌 내용이다.
김씨는 그러면서 이 전 대통령을 가리켜 “사람을 귀하게 여길 줄 모른다,
권력을 가져서는 안 될 사람, 정치를 해서는 절대로 안 될 사람”이라고 평가했다.

김유찬
즉 그간 측근 인사들의 ‘엄호’ 속에서 위기를 벗어날 수 있었던 이 전 대통령이 이번에는 측근들이 줄줄이 돌아서면서
위기를 넘지 못하고 구속되고 말았다는 분석이 많다.
한 검찰 관계자는 “결국 이 전 대통령이 이전과 달리 구속을 피하지 못하게 된 건 그 동안 그에게 유리하게 또는 연루를 부인해오던 측근들이 말을 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측근들의 입장 선회로 ‘기술’이 통하지 않게 됐다는 거다.

김백준 전 청와대 총무기획관
실제 국가정보원 특활비 의혹 수사에 결정적 진술을 했던 김희중 전 청와대 1부속실장은 최근 언론 인터뷰에서 “섭섭함이 없다면 거짓말”이라고 털어놨다.

정두언 전 의원은 이와 관련, 김 전 부속실장의 섭섭함에 대해 “김 전 실장이 2012년 저축은행 사건으로 구속된 기간에 아내가 생활고로 목숨을 끊었다”며 “이 전 대통령이 장례식장에 나타나지 않아 섭섭해 했다”고 전했다.
이 전 대통령이 서울시장 때 정무부지사를 지냈던 정 전 의원도 일등 공신으로 정권 창출에 큰 공을 세웠지만
이 전 대통령의 둘째 형인 이상득 전 의원과 박영준 전 지식경제부 차관 등과의 갈등으로 권력에서 멀어졌다는
후문이다.
하정호 기자 southcross@segye.com

사진공동취재단

ⓒ pixabay
MB, 재임ㆍ퇴임 후 각각 2번 베트남 방문… ‘다른 의도’ 소문
UAE, MB가 가장 많이 찾은 중동 국가… ‘모종의 거래’ 의혹
MB 구속 시점에 문 대통령 베트남ㆍUAE 순방 놓고 ‘뒷말’ 무성
이 전 대통령은 수사 실무를 맡았던 신봉수 서울중앙지검 첨단범죄수사1부장, 송경호 특수2부장 등과 함께 자택을 나서 23일 0시 18분께 서울동부구치소에 수감됐다.
베트남과 UAE는 이 전 대통령이 재임 기간은 물론 퇴임 이후에도 각별히 관심을 가졌던 나라다.
베트남도 이 전 대통령이 퇴임 후 두 차례 찾았고, 경남기업의 랜드마크 72 건물 매입과 관련해 해외비자금 관련설 등이 거론돼 정치권 일각에서는 두 국가에 이 전 대통령의 해외 재산이 숨겨져 있는 것이 아니냐는 의혹이 꾸준히 제기됐다.
이 전 대통령이 전격 구속된 상황에서 문 대통령이 우연의 일치인지 MB와 관련돼 의혹이 일고 있는 두 국가를 연이어 방문해 정치권 에선 정부의 순방 취지 발표에도 불구하고 MB의 해외자금과 관련된 게 아니냐는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문 대통령의 두 국가 방문을 둘러싼 여러 해석을 짚어봤다.
재임 중 2번, 퇴임 후 2번 베트남 찾은 MB
이번 순방의 첫 국가인 베트남에서 문 대통령은 아세안 주요 10개국 가운데 우리나라 최대 교역국인 베트남과 ‘전략적 협력동반자 관계’를 더 높은 수준으로 격상하는 방안을 논의할 예정이다.
문 대통령은 비즈니스 외교도 함께 이어간다. 대한상공회의소(회장 박용만)와 베트남상공회의소(회장 부 띠엔 록)가
이처럼 한국과 베트남은 수교 역사가 30년이 채 되지 않지만 급속도로 가까워지고 있다. 역설적이게도 현재 양국 관계를 ‘전략적 협력동반자 관계’로 격상시킨 인물이 이 전 대통령이다.
이 전 대통령은 이듬해인 2010년 2년 연속 베트남을 방문했으며 퇴임 후인 2014년과 2015년 당시 쯔엉 떤 상 국가주석의 초청으로 베트남을 찾았다. 현재 베트남 국가주석은 2016년 초 쩐 다이 꽝 당시 공안장관으로 교체된 상태다.
문 대통령의 순방국인 베트남이 주목받는 이유는 2015년 4원 자원외교 비리 수사를 받다 스스로 목숨을 끊은 성완종
당시 성 전 회장은 검찰 수사를 비롯해 자금난에 시달리자 ‘랜드마크 72’를 매각하려고 했다.
2014년 당시 경남기업 측은 회사 고문으로 있던 반기문 전 유엔총장의 동생 반기상 씨의 아들 반주현 씨가 근무하고
이는 건설사인 경남기업이 본업과 무관한 해외 유전개발에 참여한 것과 관련해 논란이 있었다.
2015년 당시 새정치민주연합 부좌현 의원에 따르면 2011년부터 지난해까지 감면된 성공불융자금은 모두 3677억 원인데 이 가운데 석유공사가 빌린 돈이 2245억 원에 달한다.
때문에 국제 금융계 일각에선 이명박 정부 시절 부정한 돈이 해외로 빠져나갔고, 이것이 특정 국가의 자금세탁을 거쳐 베트남으로 옮겨졌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이 전 대통령 구속 시점에 문 대통령이 베트남을 순방하는 것과 관련해 MB의 해외 비자금을 확인, 환수하기 위한 것
남북정상회담 앞두고 순방 동행하는 비서실장
이번 UAE 순방에 문 대통령을 수행하는 비서진 가운데 눈길을 끄는 인물은 임종석 청와대 비서실장이다.
현재 임 실장은 4월 말로 예정된 남북정상회담 준비위원장으로 의제 조정과 회담 형식 등 판을 짜느라 여념이 없는
지난해 12월, 임 실장의 UAE 방문이 뒤늦게 언론을 통해 알려지면서 방문 이유에 대해 갖가지 추측이 난무했다.
사태가 커지자 임 실장은 국회로 김 원내대표를 찾아 비공개 회동을 하면서 봉합됐다.
그러나 야당이 제기한 ‘MB와 UAE 간 원전 수주 관련 뒷조사’에 대해서는 여전히 의혹이 사그라들지 않고 있다.
MB, 재임기간 UAE 4번 방문…각별한 인연?
지난 연말 논란이 일었던 군사협정을 제외하더라도 이 전 대통령과 UAE는 각별한 인연을 맺어왔다.
특히 UAE는 이 전 대통령 재임 중 마지막 순방국이었을 정도로 신경을 많이 썼다.
그러나 정치권에서는 ‘이면 합의설’, ‘실적 부풀리기’ 등 UAE와 체결했던 계약에 대해 꾸준히 의혹이 제기됐다.
야당이 임종석 실장의 UAE행에 대해 ‘MB 뒷조사’를 성토하다 물러선 것이 실제 MB커넥션을 확인하고 불리하기 때문
문 대통령의 첫 중동 순방국으로 UAE가 정해진 이유에 또 다른 의미가 있다는 주장에 이런 추측이 밑바탕에 깔려 있다.
국내외 정보 관계자들 사이에선 MB 구속 시점에 문 대통령이 UAE를 방문하는 것과 관련해 ‘MB-UAE’ 커넥션에 무게를 두는 상황이다.
특별취재팀

[죽도시장] 포항에서 보낸 청소년기는 6.25 전쟁과 가난으로 점철된 고난의 시간들이었다.
[소망교회] 대학을 졸업한 후 MB의 인생역전이 일어났다.
[청와대] 그에게 찾아온 세속 권력의 정점은 청와대였다.
[감옥] 오사카에서 죽도시장으로 그리고 소망교회에서 청와대로 가는 동안 그가 겪었던 모든 고난과 영광의 중심에는 돈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구치소로 향하면서 비로소 자신의 성경을 챙겼다. 세평 남짓한 독방에 갇혀 성경을 읽는다고 한다.
조작된 신화 ‘MB 드라마’
이명박의 드라마 <야망의 세월> <영웅시대>와
이명박의 영화 <공범자들>
KBS 2TV에 <야망의 세월>이라는 이름의 화제의 주말드라마가 있었다.
1990∼91년에 방송된 이 드라마는 현대건설 평사원으로 입사해 30대에 건설회사 사장이 된 이명박 전 대통령을 모티브로 만든 작품이다.
방영 당시 45% 넘는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며 큰 반향을 일으켰다.
드라마 인기에 힘입어 이명박은 ‘샐러리맨 신화’의 주인공으로 세상에 이름을 널리 알렸다.
이명박을 모델로 한 드라마의 주인공 박형섭은 ‘개천에서 난 용’이다.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노력파에 수재로 명문대학에 입학해 학생회장까지 한다.
그러나 학생운동을 하다 감옥에 간다.
대학 졸업 후 건설회사에 입사한 그는 중동 건설·댐 건설 등 굵직한 사업을 도맡아 이끌며 입지전적 성공을 거둔다.
그는 1970∼80년대 한국 경제의 고도성장을 이끈 주역이 된다.
드라마에서 박형섭은 성공한 기업가이자 정의로운 영웅으로도 그려진다.
그 덕에 이 전 대통령에 대한 대중의 호감이 크게 올라간다. 여기엔 박형섭 역을 맡은 당대 인기배우 유인촌씨의 공도 적지 않았다(박형섭의 아내 역은 전인화씨였다). MBC 농촌드라마 <전원일기>에 출연해 ‘국민 아들’로 급부상한 유인촌은 안정적인 연기를 펼치며 박형섭이라는 인물에 지적이고 세련된 이미지까지 불어넣었다.
이 작품으로 유인촌은 1990년 KBS 연기대상을 거머쥐었고, 이명박과 기나긴 인연을 맺게 된다.
그는 이명박이 서울시장에 오르자 서울문화재단 대표, 대통령이 되자 문화체육관광부 초대 장관에 임명되는 등 출세
가도를 달리게 된다.
<야망의 세월>과 샐러리맨 신화
<야망의 세월>은 1987년 시청률 70%를 돌파하며 큰 인기를 끌었던 MBC 드라마 <사랑과 야망>을 잇는 ‘야망
시리즈’다.
<사랑과 야망>은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난 박태준(남성훈)과 박태수(이덕화) 형제를 중심으로 남자들의 성공과 야망을 그렸다.
태준은 서울 일류대학에 다니는 수재형 엘리트고, 태수는 몇 번의 실패를 거듭한 끝에 굴지의 건설업체를 설립해
큰 성공을 거두는 자수성가형 사업가다. 황진미 대중문화평론가는 “<사랑과 야망>의 첫째 아들 태준과 둘째 아들
태수의 매력을 합쳐놓은 인물이 바로 <야망의 세월>의 박형섭”이라고 말했다.
< 야망의 세월>의 주인공인 ‘야망의 남자’ 박형섭은 직장인들의 우상이 되었다.
이 드라마가 큰 인기를 얻은 요인을 드라마가 방영된 시기인 ‘1990년대 초’라는 시대적 배경에서 찾을 수 있다.
전쟁과 가난을 체험한 세대의 꿈은 잘 먹고 잘 사는 것이었다.
오로지 성공이었다.
그런 성공 신화를 체현한 롤모델이 필요한 시대였다.
박형섭의 실존 인물인 이명박은 산업화 시대를 일군 ‘성공’의
표상으로 적합해 보이는 인물이었다.
“시청자는 드라마와 현실을 동일시했다”
이명박은 어떻게 신화의 주인공이 될 수 있었을까.
홍기빈 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장은 계간지 <자음과 모음>(2018년 봄호) ‘이명박’이라는 글에서 “1987년에 시작된
민주화의 소름 끼치는 두 얼굴이 나온다.
정치적 민주화가 이루어지고 나면 내가 할 일은 내 개인과 내 핏줄의 부귀영화이다.
그게 보장되는 사회가 자유민주주의 사회”라며 “그런 사회 안에서 각자 알아서 자기의 이익을 최대한 챙겨갈 수 있고
그를 통해 사회 전체가 잘살게 되는 게 1987년의 정신”이라고 썼다.
결국, 대통령 직선제라는 정치적 민주화를 이룬 한국 사회는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서로 연대하는 경제적·사회적 민주화로 나아가지 못하고 각자도생과 무한경쟁이 사회의 이념이 되는 ‘자유민주주의’ 사회에 머물게 됐다. 이명박은
그 아수라장 속에서 가장 화려한 빛을 발한 성공의 화신이었다.
드라마 덕분에 성공 신화의 주인공이 된 이명박은 자서전 <신화는 없다>(1995)에서 이 드라마를 회상했다.
“나를 주인공으로 한 드라마 <야망의 세월>이 TV에 방송될 때의 일이다.
그 드라마에서는 내가 결혼 후에도 대학 때 만나던 여자를 계속 만나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시청자들은 드라마와 현실을 동일시해버렸다. ‘당신 남편이 저렇게 다른 여자를 만나고 다니는데 괜찮으냐?’라는
전화가 아내에게 심심찮게 걸려왔다.” 이명박에 대한 대중의 높은 관심을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결국 <야망의 세월>은 이명박에게 ‘야망의 시대’를 열어주었다.
그는 이후 ‘컴퓨터 달린 불도저’(컴도저) ‘샐러리맨의 우상’ 등으로 불리며 1992년 정계에 입문한다. 그는 이 무렵
내놓은 자서전 <신화는 없다>에 야간상고를 나온 가난한 학생이었던 자신이 거대 건설회사 대표에서 국회의원으로
변신하기까지의 이야기를 담았다.
배고픈 MB의 끝없는 탐욕
또 한 편의 이명박 드라마가 있다.
2004년 MBC에서 방영된 <영웅시대>다.
이명박이 서울시장으로 재임하던 시절이었다.
이 드라마는 ‘한강의 기적’이라 불린 고도성장기 기업의 중심에 있던 이들의 삶을 다뤘다.
이명박을 모델로 한 박대철을 유동근이 연기했다. 박대철은 전 세기건설 회장이자 국회의원으로 나온다.
현대그룹과 삼성그룹의 얘기지만, 중심축은 기업가 박대철의 활약상이었다.
방영 내내 실존 인물 미화 논란이 끊이지 않았다. 결국 100부작으로 기획된 <영웅시대>는 70부를 끝으로 조기
종영했다.
이명박의 드라마 <야망의 세월>과 <영웅시대>에 대해 한민 문화심리학자는 책 <슈퍼맨은 왜 미국으로 갔을까>에서 “<영웅시대>는 산업화의 영웅들을 그린, 10여 년 전 <야망의 세월>의 확장판이었다.
전작보다 시청률은 낮았지만 서울시장이던 이명박에게 ‘영웅’이라는 이미지를 부여하며 그의 업적을 재조명하는 효과를 낳았다”고 썼다.
두 번째 드라마가 끝난 지 3년 만에 이명박은 대한민국의 제17대 대통령이 됐다.
도곡동 땅, 다스, BBK 등 그를 둘러싼 온갖 잡음이 이어졌지만, ‘경제 살리기’에 대한 대중의 높은 기대 속에서
대권을 잡았다.
드라마가 이명박 신화를 만들어냈다면, 영화는 그의 실체를 낱낱이 파헤친다.
이명박을 다룬 첫 영화는 대통령 재임 시절인 2012년에 개봉한 김재환 감독의 《MB의 추억》이다.
영화는 ‘친서민 경제대통령’이라는 캐치플레이즈를 내걸고 선거 유세를 하는 2007년 당시 이명박을 보여준다.
영화엔 유세장에 지지자로 나온 유인촌이 “<영웅시대> 보셨습니까?
우리는 영웅이 필요합니다”라고 목소리를 높이는 장면도 나온다.
영화에 자주 나오는 건 이명박이 먹는 장면이다.
반복해 “이명박은 배고픕니다”라는 내레이션을 들려준다.
그리고 그가 대통령에 당선된 뒤의 모습을 교차해 보여준다.
여전히 배고픈 이명박의 모습은 끝없는 탐욕을 의미한다.
김재환 감독은 “영화는 이명박뿐 아니라 그 인물에 투영된 우리의 욕망을 보여준다.
‘너희를 잘살게 하리라’고 말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찍어줄 수 있고 받아줄 수 있는 시대였다.
우리 모두 그런 시대를 함께 살았다”고 회고했다.
희대의 캐릭터로 남은 이명박
2017년 개봉한 다큐멘터리 영화 <공범자들>도 이명박 주연작이다.
이명박 정부 시절 시작된 방송 장악 음모와 여기에 가담한 공범자들의 실체를 밝히는 작품이다.
영화는 주로 공범을 화면에 비추지만, 누가 주범인지는 우리 모두 안다. 주범은 영화 제일 마지막 부분에 나온다.
영화를 만든 최승호 PD(현 MBC 사장)는 오랜 잠복 끝에 가까스로 마주친 이명박에게 “언론을 망쳤다는 비판이 있는데, 어떻게 생각하시냐”라고 묻는다.
이명박은 물론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잘 모르겠다”고 답한다.
최 PD가 “김재철 사장이 와서 MBC를 많이 망가뜨렸어요”라고 외치지만, 이명박은 “그건 그 사람한테 가서
물어보세요”라며 책임을 회피할 뿐이다.
샐러리맨의 우상에서 ‘탐욕의 결정체’가 된 이명박.
3월23일 새벽 서울 동부구치소에 수감되며 모두가 부끄러워하는 이름이 됐다.
한때 야망이었던 인물의 신화는 사라지고, 탐욕만을 좇은 희대의 잡범 캐릭터가 우리 곁에 남았다.
허윤희 기자 yhher@hani.co.kr
이명박 전 대통령은 대통령 돼선 안될 사람
한겨레21] 한겨레 기자들이 직접 겪은 이명박 “거짓말, 파렴치 행진…
비판엔 고개 돌려”
취재 현장에서 이명박(MB) 전 대통령을 지켜봤던 <한겨레> 기자들이 MB를 추억했다.
여현호 <한겨레> 선임기자는 정치 초년병이던 MB, 김규원 기자는 청계천 복원 사업으로 한참 주가를 올리던 MB,
길윤형 편집장은 서울시장 MB, 이명박 정부 첫 청와대 출입기자인 황준범 기자는 대통령 MB를 회상했다.
네 기자가 내린 공통된 결론은 ‘그는 절대 대통령이 돼서는 안 될 사람’이라는 것이다.
_편집자
늘 뭔가를 속에 품은 초선의원
초선의원 이명박은 여의도 정치판과 잘 맞지 않아 보였다.
1990년 3당 합당으로 만들어진 민주자유당이 신한국당으로 당명을 바꿀 즈음인 1995년의 어느 날이다.
여의도에서 행사를 마친 민자당 의원들이 다음 행사를 위해 광화문 세종문화회관으로 이동해야 했다.
의원들은 자기 차를 부르느라, 혹은 동료 의원 차에 함께 타느라 부산했다. 기자들도 교통편을 찾아야 했다.
다행히 의원 두 사람이 탄 승합차에 편승했다.
서로 막역했던 현대가 정몽준 의원과 인권변호사 출신 강신옥 의원이었다.
차창 밖을 내다보니, 전국구(지금의 비례대표) 초선이던 이명박 의원이 멀뚱히 혼자 서 있었다.
호들갑스럽게 동료의 손을 끌던 다른 의원들이 그를 못 본 듯 스쳐 지나간 뒤였다. 누군가 ‘태워주자’고 했다.
“저 사람은 친하게 지내려는 이도 없는 딱한 사람이니, 우리라도 챙겨줘야지”라는 말도 있었다.
차 안에서 그는 잠시 넉살 좋게 얘기를 나눴지만, 그보다 더 오래 의자 속에 웅숭그린 채 말이 없었다.
스냅사진 같은 그날의 기억처럼, 그는 동료 의원들과 잘 어울리지 못했다.
재선인 이상득 의원의 친동생이라는 인상만 강했다. 현대그룹 출신인데도 정주영 회장의 통일국민당 창당에 합류하지 않았고, 되레 민자당 의원으로 정 회장의 대통령 출마를 비난했다.
현대가로선 배신자라고 생각할 만했다.
초선의원 이명박은 정계 입문 때부터 재산을 숨긴 일로 입길에 올랐다.
1993년 첫 국회의원 재산공개에서 그는 재산 총액을 62억3240만원으로 신고했다. 하지만 재산공개 엿새 전 압구정동의 80평대 현대아파트를 다른 사람 명의로 돌리고, 몇몇 땅은 아예 누락한 사실이 금세 드러났다.
양재동 건물을 불과 5억9천만원으로, 서초동 땅은 공시지가의 절반 이하로 신고하기도 했다.
약속 시간 넘기고도 태연자약
부실한 재산공개로 조사 대상에 오르자 이 의원은 급히 재산 줄이기에 나섰다.
서초동 검찰청사 앞 1554m²(470평) 땅을 반값인 60억원에 대한변호사협회에 ‘급매물’로 넘겼고, 경기도 화성시 임야
1만 평은 고려대 교우장학회에 기증했다.
그런데도 지금의 영포빌딩 터 등 서초동 땅 184억9천만원을 추가해 수정 신고한 재산은 1차 신고액의 4배인 247억2천만원이나 됐다.
‘도곡동 땅’은 그때도 큰 문제가 됐다. 한 신문은 1993년 3월, “이 의원이 시가 150억원대 도곡동 땅을 처남 명의로 은닉해 재산공개에서 고의로 누락했다”고 보도했다.
하지만 이 의원은 이 땅을 수정 신고에서도 빼놓았다.
속인 것은 더 있다. 이 의원이 자신의 차를 몰고 가다 같은 민자당 소속 다른 의원의 비서관 차와 부딪치는 교통사고를 낸 뒤, 자신의 운전기사가 차를 몬 것으로 조작해 보험 처리를 했다는 의혹이 1995년 제기됐다.
가끔 마주치던 그는 항상 뭔가를 속에 품고 탐색하는 눈빛이었다.
초선의원 이명박은 1995년 첫 민선 서울시장 후보 경선에 나섰다.
경선을 앞두고 그가 기자 여럿을 점심에 초대했다.
포부를 밝히고 속내를 털어놓는 자리였는데, 약속 시각 30분을 훌쩍 넘겨 도착했다.
늦을 만한 이유도 대지 않았지만, 미안한 기색도 전혀 없었다.
그 태연자약한 모습이 오래 기억에 남았다.
여현호 <한겨레> 선임기자 yeopo@hani.co.kr
영악한 장사꾼의 청계천 거짓말

2005년 이명박 서울시장 시절. 박근혜 당시 한나라당 대표와 함께 복원된 청계천을
둘러보고 있다.
국회사진기자단
내가 이명박 전 대통령을 처음 만난 것은 2002년 2월25일이었다. 서울시장 예비후보였던 그는 서울시 출입기자들과
함께 광통교 네거리쯤에서 복개된 청계천으로 들어갔다. 말이 청계천이지 당시엔 하수도였다.
그는 허리까지 오는 장화를 신고 더러운 하수 속에 들어가 광통교 기둥 앞에서 기자들에게 이렇게 외쳤다.
“광교다, 광교! 여러분, 광교를 찾았습니다.
수십 년 동안 여기 묻혀 있던 광교를 처음 발견했습니다.
” 그것은 그가 내게 한 첫 거짓말이었다.
옛 광통교가 청계천1가에 남아 있다는 사실은 이미 알려진 것이었다.
그날 그는 내게 두 번째 거짓말도 했다.
“이렇게 고통받는 광통교를 복원하고 장충단공원에 있는 수표교를 제자리에 옮기는 것이 청계천 복원 사업의 중요한 부분입니다”라고.
2년7개월 뒤 청계천 복원이 ‘완공’됐을 때 광통교는 원래 자리에서 150m 상류로 강제 이전됐고, 1958년 장충단공원
으로 강제로 옮겨진 수표교는 그 자리에 그대로 남았다.
서울시장이 된 뒤 청계천 복원 과정에서 주변 노점상들이 강하게 반대할 때 그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걱정하지 않습니다. 장사꾼들은 판단이 빠릅니다.
청계천 복원이 확실하면 장사꾼들은 태도를 바꿀 겁니다.
” 드물게도 그것은 거짓말이 아니었다. 다만 그가 말한 장사꾼은 청계천 노점상들이 아니라, 그 자신처럼 느껴졌다.
청계천 복원이라는 친환경 사업에 도전한 영악한 장사꾼.
2005년 9월 청계천 복원 사업이 끝난 뒤 그의 거짓말 시리즈는 계속됐다.
그는 많은 인터뷰에서 1999년 미국 조지워싱턴대학에서 객원연구원으로 지낼 때 보스턴의 ‘빅딕’ 사업을 보고 청계천 복원을 구상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 의제를 한국에서 처음 제기했고, 그에게 아이디어를 제공한 노수홍 연세대 교수(청계천살리기연구회장)는 “이명박 캠프에서 청계천 복원에 대해 처음 문의해온 것은 2001년 8월이었다”고 했다.
비판하자 <한겨레> 구독 끊어
청계천 복원이 착공되기 전인 2002~2003년 사이 잠깐 동안, 그는 시민단체나 <한겨레>와 우호적 관계였다.
그는 선거 기간에 <한겨레>의 청계천 복원 시리즈 기사를 홍보물로 사용했고, 당선된 뒤에는 많은 시민단체 활동가들을 청계천복원시민위원회에 참여시켰다.
그러나 딱 거기까지였다.
경찰이 반대하던 청계천 고가도로 폐쇄를 노무현 대통령의 도움으로 풀자마자 그는 폭주족으로 돌변했다.
2003년 7월 청계천 복원 사업 착공 뒤, 그는 친환경 복원, 역사 복원을 요구하던 시민위원회와 계속 충돌했다.
시민위원회가 역사 공간의 복원을 요구하자, 그는 역사 유적들을 뜯어내 중랑하수처리장 공터로 옮겨버렸다.
청계천을 상류의 백운동천, 삼청동천과 연결하는 방안도 완전히 배제됐다. 모두 시간과 비용, 정성이 많이 드는
일이었다.
청계천 복원을 사회적 이슈로 만든 <한겨레>와도 적이 됐다.
<한겨레>에서 그의 일 추진 방식을 계속 비판하자 그는 서울시청에서 <한겨레> 구독을 끊고, 광고도 끊었다.
한겨레신문사가 상암동 디지털미디어시티에 새 사옥 부지를 신청하자 그는 1년 넘게 결정을 미루다 탈락시켰다.
그는 외국 출장을 나갈 때 우호적인 매체에만 몰래 비용 전액을 지원했다가 들통이 나기도 했다.
이 일로 서울시청 기자실이 발칵 뒤집히자, 그는 항의하는 기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모든 언론사를 똑같이 대우할 이유가 있느냐?” 그는 ‘공공성’이나 ‘공정성’이 무엇인지 전혀 모르는 사람이었다.
오랫동안 그를 지켜보면서 몇 가지 깨달음을 얻었다.
첫째, 상습적으로 거짓말하는 사람을 중요 공직자로 뽑아서는 안 된다.
시민들과 매체가 그의 거짓말을 제대로 검증했다면 그는 서울시장도, 대통령도 될 수 없었을 것이다.
둘째, 선출직 공직자에 대한 엄격한 사후 통제가 필요하다.
그가 서울시장과 대통령이 돼서 폭주할 때 아무도 그를 통제할 수 없었다.
이것은 주권자의 실패이며, 정부의 실패다. 셋째, 횡재를 바라면서 지도자를 선출해서는 안 된다.
그런 허황된 욕심이 가져오는 것은 이명박과 박근혜와 같은 재앙뿐이다.
물론 그에게도 배울 점이 없지는 않다. 그것은 결단과 행동력이다.
서울시장 시절, 그의 대표적 업적으로 ‘청계천 복원’과 ‘버스 개혁’을 꼽는다.
또 그는 시청광장과 숭례문광장을 만든 사람이기도 하다.
김규원 <한겨레> 기자 che@hani.co.kr
경박하게 휘두르는 서울시장의 악수

2007년 12월 대통령 당선인 시절. 이명박 당선인이 서울 여의도 전경련회관에서 열린
경제인 간담회에 참석해 재벌 총수들과 악수를 나누고 있다.
국회사진기자단
이명박 전 대통령을 생각하면 떠오르는 것은 특유의 악수법이다.
2~3년차 기자 초년생이던 나는 2003년 봄부터 이듬해 봄까지 1년 동안 서울시청을 출입했다.
당시 서울시 기자실은 지금은 서울도서관으로 변한 옛 서울시청 1층에 있었다. 월요일치 신문을 만들기 위해 일요일에 기자실에 나와 있으면 이따금 이명박 시장이 내려와 기사 쓰고 있던 기자들과 인사했다.
대통령이 된 뒤 변했는지 알 수 없으나, 그의 악수법은 특이했다. 일단 성큼성큼 상대 앞으로 다가온다.
그리고 (굉장히 경박하게) 두 손으로 짧게 박수를 친 뒤, (‘이거 뭐지’ 당황해하는) 상대의 손을 덥석 잡고 45도 각도로 강하게 휘둘러댄다.
20대 후반의 젊은 기자였던 나는, 이것이 바로 건설업계 ‘쌈마이 악수’인가 싶어 살짝 감동하기도 했다.
대담하고 경박했던 악수답게 이 전 대통령은 말도 시원시원하게 해댔다. 건설업체 사장으로서는 호탕한 말이었는지
모르겠으나, 1천만 시민을 대표하는 시장으로서는 대부분 부적절한 발언이었다. 대표작 몇 개를 꼽아본다.
그는 고교평준화 정책을 유지하려는 당시(2003년) 윤덕홍 교육부총리를 향해 “윤덕홍 교육부총리는 시골 출신으로
진정한 서울의 교육을 모른다”고 했고,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을 향해서는 “우리끼리 평준화해서 뭐하나.
전교조를 극복해야 교육이 산다”고 주장했다.
또 서울시 산하 지하철 기관사들을 향해서는 “(지하철) 기관사가 얼마나 쉬운 자리인지 모른다.
이 점이 드러날까봐 (노조가) 파업도 못할 것”이라고 비아냥댔고, 청계천 복원 공사가 본격 시작된 뒤 쏟아져나오던
문화재에 대해선 “문화재적 가치가 없다”는 감식안을 뽐냈다.
그중 최고 명언은, 2004년 5월 서울 장충체육관에서 열린 한 기도회에서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은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거룩한 도시이다.
서울을 하나님께 봉헌한다”는 ‘수도 봉헌’ 발언이었다.
“내가 해봐서 아는데…”
이런 ‘히트작’들 외에 그가 입에 달고 다니던 말은 “내가 해봐서 아는데”와 “반대를 위한 반대”였다.
전자는 자신이 남 일에 간섭하며 훈수를 둘 때 쓰는 말이고, 후자는 자신이 하는 일을 누가 비판할 때 내놓던 말이었다. 자기가 비판할 땐 ‘해봐서 안다’, 남이 비판할 땐 ’반대를 위한 반대’! 일찌감치 ‘내로남불’을 체현한 이 전 대통령의
양수겸장에 기자들은 할 말을 잃어갔다.
개인적으로 기억에 남는 이 전 대통령의 최고 발언은 <한겨레> 비하 발언이었다.
2003년 서울시 송년회가 있던 날,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젊은 기자(필자다) 하나가 이 시장에게 쓴소리를 내뱉었다.
이 시장의 윤덕홍 총리 관련 발언에 대해 “그렇게 말하면 지방 사람들이 상처받는다”고 했다.
돌아온 답변은 “<한겨레>, 사람들이 만 명이나 보는가?”
내가 본 이명박 전 대통령은 자신을 칭찬하는 사람과는 소통하지만, 비판하는 말엔 귀찮은 고개를 돌리는 인물이었다. 청계천 공사로 영업이 어려워진 한 시장 상인이 “우리를 도우소서”라는 유서를 남기고 자살했는데, 그는 이에 대해
일언반구 언급한 적이 없다.
이 전 대통령은 이기적이고, 자기객관화가 안 되며, 남의 고통에 공감능력이 떨어지는 인물이었다.
압축적 경제성장을 이뤄낸 한국 사회가 만들어낸 기린아이자, 우리가 반드시 극복하고 넘어야 할 흉물이기도 했다.
길윤형 기자 charisma@hani.co.kr
“나도 돈 먹는다는 얘기냐” 버럭
“어떻게 대통령 재임 중에 이런 파렴치한 짓을 하나.
이명박 정권에서 벌어진 일 중 가장 치졸한 일이 될 거다.”
MB가 대통령 재임 중에 다스가 BBK에 떼인 투자금 140억원을 돌려받은 일을 두고 정두언 전 의원이 이렇게 말했다.
최근 수개월 사이 검찰 수사 국면에서 한 얘기가 아니라 2011년 봄, MB가 김경준 전 BBK투자자문 대표를 상대로 소송을 벌여 투자금을 회수해 다스로 집어넣었다는 <한겨레21>의 보도가 나왔을 때 사석에서 한 얘기다.
지금 보듯 다스는 MB를 통째로 무너뜨려 구치소로 보내는 결정타가 됐다.
MB는 후보 시절부터 일관되게 “다스는 내 것이 아니다”라면서도, 대통령 자리에 앉은 뒤에도 끔찍이 다스를 챙겼다.
자신의 행위에는 전혀 죄의식을 보이지 않으면서, 주변에는 “행동 잘하라”고 큰소리친 일이 있다.
2011년 가을의 일이다.
그해 9월, 당시 한나라당 지도부의 한 의원이 MB와 함께 아침 식사를 했다.
그 의원이 말했다.
“이○○, 박△△ 이러다 감방 갈 겁니다. 조심하십쇼.” MB 주변에서 측근 비리가 터져나오던 때다.
MB는 “나도 돈 먹는다는 얘기냐”며 버럭댔다.
“아뇨, 각하는 돈 많잖습니까. 그래서 돈 먹는다고 생각 안 해요.”
“나는 재산도 다 기부했다.”
“에이~, 사람들이 그걸 믿습니까. 돈 많잖아요.”
그 직후 청와대에서 MB가 참석한 가운데 열린 한 회의에서 ‘컵이 날아다녔다’고, 한 인사가 말했다.
임태희 대통령실장 주재로 열린 확대비서관회의 말미에 MB가 예정도 없이 들러 “냉철”과 “고통”을 강조하며 군기를 바짝 잡은 것이다. 당시 청와대 대변인을 통해 공개된 MB의 정제된 발언은 이렇다.
“이번 정권은 돈 안 받는 선거를 통해 탄생한 점을 생각해야 한다. 도덕적으로 완벽한 정권인 만큼 조그마한 흑점도
남기면 안 된다.”
그 유명한 ‘도덕적으로 완벽한 정권’ 발언은, 자부심의 표현이 아니라 사고 위험성이 있는 주변 인사들에게 한 공개적
경고였던 것이다. 그리고, 모두 알다시피 그 경고는 실패했다.
‘일머리’가 박근혜 비교우위
2007년 치열했던 한나라당 경선과 대선을 거쳐 2008년 이명박 정부 출범부터 중반까지 3년6개월가량 청와대를 출입
하며 지켜본 MB의 모습은 막대한 사명과 책임을 지닌 지위에 걸맞지 않았다.
MB는 ‘자신에 대한 무딘 도덕감각’을 가진 인물이었고, 그래서 주변을 단속해도 영이 서지 않았다.
‘일만 잘하면 과정은 괜찮다’는 결과지상주의가 몸에 깊이 밴 개발독재 시절 건설사 최고경영자(CEO)의 행동 유형을 그는 끝내 버리지 못했다.
물론 MB에게도 장점은 있었다.
경쟁했던 박근혜 전 대통령에 견줘, 실물경제를 다뤄본 경험이 있었다.
‘일머리’를 알았고, 이념 기반에 얽매이지 않고 실용적으로 움직였다.
그래서 비교적 합리적·개혁적 인사들이 주변에 포진했다.
그가 박근혜 전 대통령보다 먼저 대통령이 될 수 있었던 이유다.
하지만 검찰 수사로 드러난 MB의 삶은 알량한 ‘박근혜 비교우위’마저 무너뜨렸다.
‘새빨간 거짓말’이라던 BBK·다스 의혹, 사회 환원이라던 청계재단 설립, 경제 활성화와 평창겨울올림픽 유치를 위한 것이라던 ‘이건희 사면’, 서민과 함께하겠다던 중도실용 정책….
도대체 MB가 진심과 선의를 갖고 한 일은 무엇이었을까.
황준범 <한겨레> 기자 jaybee@hani.co.kr
MB는 갔지만 MB의 시대는…
MB 같은 정치인 또 나오면 이를 거부할 수 있을까…
MB의 진짜 적폐는 물신을 신봉했던 우리의 얄팍함일지도
이명박(MB)은 엄청난 인물이었다.
파상공세로 밀어닥치는 의혹 제기에 “이게 다 거짓말인 줄 아시죠”라고 외치며 뻔뻔하게 버텼다.
자주 파안대소를 했고, 영문을 알 수 없는 엉뚱한 소리를 해댔다. 거짓말을 하기 전에는 꼭 혀를 내밀었다.
그래서였을까. 모두 그의 추락을 기다렸지만, 정말 추락하기 시작하자 뭔가 시시해졌다.
그의 구속은 6개월 전만 해도 ‘기적’ 같은 일이었지만, 이젠 모두 예정된 일인듯 당연해 보인다.
MB를 만든 절댓값, 시각화
MB가 37살에 현대건설 사장이 됐을 때, 사람들은 난생처음 ‘샐러리맨의 신화’를 보았다.
야간상고를 나온 저 사람도 했는데, 혹시 나도? ‘누구나’는 아니겠지만, ‘누군가’는 그처럼 될 수 있다는 희망을 보았다. 서울시장 시절 그가 ‘청계천’을 복원했을 때 사람들은 개발시대 이후 토건의 미래를 봤다.
손학규 전 경기도자사의 ‘저녁이 있는 삶’ 같은 구호가 아직 유행하기 전이었다.
인공적이긴 했지만 그래도 남달랐던 청계천 주변을 걸으며 사람들은 조금 더 여유롭고 행복해지는 상상을 했다.
그가 ‘희대의 악법’이라는 세간의 비난을 뭉개며 종합편성채널(종편)을 출범시켰을 때, 어떤 사람들은 보수의 영구집권 가능성을 점쳤다.
가뜩이나 기울어져 있던 운동장을 보수세력이 완전히 장악해버리자 MB를 향한 보수 기득권 세력의 찬양하는 목소리는 ‘도덕적으로 완벽’해 보였다.
눈에 보이게 하는 힘. 시각화(visual- ization)는 오늘의 MB를 만든 절댓값이다.
그는 보여줬고, 보여줘서 믿게 했고, 보이는 것만이 우리가 이르러야 하는 곳임을 설파했다.
MB가 이룬 대부분의 성공이 그랬다. 건설회사 사장 시절은 물론 정계에 입문한 뒤 그는, 목표를 가시적으로 제시하고 시각적으로 재현해간 독특한 유형의 정치인이었다.
<야망의 세월>(그를 모델로 한 KBS 드라마다)을 건너 개천에서 솟아난 진짜 용이라는 세간의 인물평이 이 독특함에 환상을 보탰다.
서울시장 시절 MB는 행정을 시각화하는 전략으로 모든 지방자치단체장들에게 영감을 줬다.
짧은 정치 경력에도그가 박근혜 전 대통령을 꺾고 당내 경선에서 승리한 과정은 ‘한때 배고팠지만 부자가 된’ 그의 삶을
시각화한 전략이었다.
예컨대, 서울시장이 된 지 딱 1년 되던 날 MB는 두 가지를 보여줬다. ‘G-R-Y-B’라는 알파벳 기호(새로 개편된 버스의 색깔을 딴 앞글자. 당시 누리꾼들은 ‘지랄염병’의 약자라고 했다)로 형상화한 버스운영체제 개편안과 청계천이었다.
당시, 버스운영체제 개편과 청계천 공사 시공이 취임 1주년에 맞춰 발표된 것을 두고 일부 전문가들은 “행정을 시각
기념일로 대체한다”고 비판했다.
하지만 그때만 해도 이런 비판은 ‘반대를 위한 반대’이자 진보 진영의 딴지걸기로 치부됐다.
MB는 “대안도 없이 무조건 반대만 해서는 발전이 없다”며 “반대를 위한 반대”라는 말로 그를 향한 비판에 귀를 닫았다.
재개발 건설 현장에서 일방적으로 공사를 밀어붙이는 작업반장의 수완으로는 손색없을지 몰라도, 1천만 시민의 삶을
좌지우지하는 행정 책임자로서는 분명 함량 미달인 자세였다.
그렇지만 누구도 그걸 제대로 따지지 못했다. 뭔가를만들어 보여주는 MB의 힘이 너무 셌기 때문이다.
익숙한 낡은 것의 부활
행정을 시각 기념일로 만드는 것이 MB가 시작한 특별한 전략은 아니다.
특정 기념일에 볼거리를 만들던 행정은 권위주의 정부 시절에 질리게 반복됐던 풍경이다(기념일에 맞춰 주요 토목공사를 벌이거나 끝내는 것은 이명박 이전에 ‘원조 불도저’로 불렸던 김현옥 시장(재임 기간 1966~70년)의 전매특허였다).
그럼에도 MB의 시도는 낯설었다.
당시는 ‘참여민주주의’라는 긍정적 분위기가 사회를 지배하던 때였다.
참여민주주의와 공존하는 불도저 서울시장. MB는 오지 말았어야 할, 익숙한 낡은 것의 부활이었다.
그러나 희한하게 그렇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MB가 만든 서울광장을 생각해보자.
2002 월드컵을 경유하며 한국 사회에 벼락처럼 쏟아졌던 열정을 MB는 스프링클러가 돌아가는 잔디광장으로
박제화했다.
민주사회에서 광장이 지녀야 하는 의미를 한낱 시장 집무실의 푸르른 풍경으로 조경한 돌이킬 수 없는 퇴행이었다.
하지만 속수무책이었다.
왜? 보기에 그럴싸했기에.
이렇게 된 데는 언론의 역할이 컸다.
행정을 시각화하는 MB의 전략을 언론은 호의적으로 다뤘다.
반대자들은 그것을 ‘신개발주의’ ‘네오파시즘’ ‘불도저 리더십’ ‘유사 박정희 모델’ ‘졸속 행정’ ‘밀어붙이기’ ‘고삐 풀린 개발주의’ ‘포클레인의 후예’라고 했지만, 보수언론은 MB의 남다른 추진력에 감복하며 구심점을 잃은 보수정치를
구할 새 이름으로 그를 호명했다. MB의 실제와 현상 사이에 메울 수 없는 괴리는 이때부터 시작됐다.
그 괴리에서 지난 10여 년 동안 한국 사회에서 발생한 모든 비극이 잉태됐다. MB의 서울시가 반대자를 배척하고,
비판자를 배제하는 방식의 토목 행정을 부활시키자 한 외신은 “서울시가 ‘어린(young) 민주주의’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고 비판했다.
임기 내에 어떻게든 청계천 공사를 완료시키겠다는 속도전의 욕심 탓에 민주적 토의나 민관 합의는 들어설 자리가
없었다.
MB식 ‘총동원 체제’는 사실 이해관계 대립과 갈등이 첨예한 현대 도시에선 성립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이런 서울시의 모습을 민주주의 미성숙이 낳은 풍경으로 꼬집은 것이다. 하지만 국내 언론은 이 비판이 무슨 의미인지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그때 간파했어야 하는 MB의 실체를 못 봤거나 혹은 고의적으로 외면했다. 어쨌든 속도전 끝에 2005년 10월 청계천이 완공되자 누구도 저항하지 못했다.
도심을 서에서 동으로 꿰뚫는 5.4km의 그 인공 물길은 MB를 청와대 앞으로 데려간 환상의 물길이 됐다.
취임 100일 만에 쌓은 ‘명박산성’
MB가 언론의 힘을 알아챈 것은 역설적으로 이때부터였던 것 같다.
보수언론은 2008년 MB를 흡사 한국 사회에 찾아온 마법사처럼 묘사했다.
‘비즈니스 프렌들리’라는 정체불명의 외래어 한마디에 모두가 열광했다.
1% 부자 ‘고소영·강부자’를 위한 마술이 시대정신처럼 격상됐다.
민주주의 같은 것이 이미 지나간 버스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보편적 권리와 형평성을 주장하는 목소리는 비루해 보였다.
삶의 여러 가치가 경제적 이익으로 대체되고, 대통령과 국민의 거리가 위계적 질서로 재조직되는 과정은 민주화를
되돌리는 퇴행이었지만, MB는 흡사 ‘돈의 신’처럼 이 모든 비판에서 자유로웠다.
물론 반작용도 있었다. MB는 취임 100일 만에 ‘명박산성’을 쌓았다. 2008년 5월 느닷없이 일어난 미국산 쇠고기
반대 집회는 취임 초 MB를 위기로 몰아넣었다.
MB는 청와대 앞 사거리를 시위대에 내주고 인왕산에서 홀로 눈물을 흘렸다고 고백했다.
그 뒤 겨우 상황을 수습할 수 있었다. 그리고 가차 없는 반격이 시작됐다. 시민의 외침에 휘청했던 이때의 경험은
MB 정부 내내 반대자를 잔인하게 박멸하는 근거가 됐다.
MB 정부가 시행한 공영방송 장악과 종편 출범은 ‘매체의 문제’가 아닌 ‘정치의 문제’였다.
단순히 미디어 수를 늘리고 줄이는 것이 아니라 보수정치의 몫을 키우는 기획이었다.
종편 출범을 가능하게 한 입법을 대다수 언론 종사자들은 ‘언론 악법’이라고 했다.
그 법안만큼 입법 전부터 반대 여론이 뜨거웠던 법률은 일찍이 없었다. 종편을 둘러싼 범정부 차원의 ‘특혜’와 범언론적 ‘투쟁’이 서로를 노려보던 형국에서, MB는 ‘글로벌 미디어’와 ‘일자리 창출’이란 경제 논리를 앞세웠다.
불가능한 미래를 호기롭게 당겨쓰는 MB의 화법에서 종편은 태생부터 극단적인 정치 ‘편향’을 갖게 됐다.
이후 지금까지 종편은 ‘의무 전송, 광고 협찬 영업 혜택’ 등 정치적 수혜를 거둬들이면 도무지 생존이 불가능한 집단
으로 남았다.
진짜 적폐는 우리의 얄팍함일지도
MB의 시대는 진정 끝난 것일까. MB 같은 정치인이 다시 등장하면 한국 사회는 이를 거부할 수 있다고 자신할 수
있을까. 우린 여전히 수단과 방법이 좀 어긋나더라도 들통나지만 않는다면 부자가 되는 지름길을 원하진 않는가.
전에 없었던 것이란 이유만으로 열광하진 않는가. 세속적 욕망을 자극하는 누군가들의 약속에 정녕 홀리지 않을 수
있을까.
MB의 진짜 적폐는 보이는 것을 믿었던, 물신을 신봉했던 우리의 어떤 얄팍함일지도 모른다.
MB가 만들어놓은 세계를 부수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MB는 우리가 만든 세계에서 성공했다는 것을 기억하는
일이다. .
김완 기자 funnybon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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