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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과 시사

제주 4.3 추념식, 문재인 대통령과 여야 지도부 총출동






70주년 4.3 추념식을 앞두고 제주도 서울본부 앞에서 열린 버스킹 공연

 <뉴시스>





기사이미지



문재인 대통령


 / 사진=스포츠투데이 DB









제주 4.3 추념식, 문재인 대통령과 여야 지도부 총출동





[시사위크=정계성 기자3 열리는 제주 4.3 추념식에 문재인 대통령이 참석한다

4.3 추념식에 현직대통령이 참석하는 것은 노무현  대통령에 이어 문재인 대통령이  번째다

 대통령뿐만 아니라 추미애 민주당 대표홍준표 자유한국당 대표박주선 바른미래당 공동대표  여야지도부가 모두

 참석할 예정이다.


이날 4.3 추념식은 행정안전부 주최제주특별자치도 주관으로 제주 4.3 평화공원에서 열린다.

 올해로 70주년을 맞아  의미가 특히 각별하기 때문에 행정안전부와 제주도가 준비에 만전을 기했다

무엇보다  대통령이 직접 참석하기로 결정하면서 행사의 무게감이 더해졌다.

관심은  대통령이 4.3 추념식에서 어떠한 메시지를 내놓느냐다


4.3 역사적 의의와 평가를 분명히 하는 한편피해자 위로에 방점을 찍을 것으로 예측된다

진상규명에 따른 국가책임과 배상은 이미 노무현 정부에서 천명한  있고국회에서 특별법으로 보완점을 논의 중이기

 때문에 조속한 처리를 촉구하는 수준이  것으로 보인다.


실제 2006 4.3 위령제에 참석했던 노무현  대통령은 국가권력은 어떠한 경우에도 합법적으로 행사되어야 하고

일탈에 대한 책임은 특별히 무겁게 다뤄져야 한다 국가권력에 의한 희생을 인정했다아울러 공식사과와 피해자

 국가배상 절차를 개시한  있다.


여야 정당지도부 인사들도 참석한다

민주당은 추미애 대표와 우원식 원내대표가 참석하고바른미래당은 박주선 공동대표가 자리한다

제주도 현역 지자체장인 원희룡 지사가 주축인 행사인 만큼바른미래당이  차원에서 적극적으로 나서는 모양새다.

홍준표 자유한국당 대표도 참석을 예고했다


홍준표 대표는 자신의 페이스북에 건국 과정에서 김달삼을 중심으로  남로당 좌익 폭동에 희생된 제주 양민들의 넋을

 기리기 위한 행사라며 참석을 결정한 이유를 적었다.




정계성 기자  under74@sisaweek.com


<저작권자 © 시사위크,





제주 4.3 사건




제주 4.3 사건





제주 4.3 사건, 12년 만에 현직 대통령 추념식 참석 '추념사 관심집중'




티브이데일리 최하나 기자] 제주 4.3 사건이 올해로 70주년을 맞았다.

3일 오전 방송된 KBS1 보도프로그램 '뉴스광장'에서는 제주 4.3 사건에 대해 다뤘다.


제주 4.3사건은 1947년부터 1954년까지 제주에서 발생한 남로당 무장대와 토벌대의 무력 충돌과 진압 과정에서 수많은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이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전에 제주도에 있었던 학살같은 토벌작전은 현대사의 비극이었다.

빼어난 경관을 자랑하며 관광지로 유명한 제주도 서귀포 정방폭포. 70년 전 폭포 아래 바다는 선혈로 물들었던 비극의 공간이었다. 제주 4.3 사건 당시 경찰서와 수용소가 주변에 밀집해 있었고 집단 학살이 자행됐기 때문

 이 일대에서 제주 4.3 사건으로 희생됐다고 밝혀진 사람은 247. 제주 4.3 사건 당시 매일 같이 학살이 있었다는 증언이 나오고 있어 희생 규모는 더욱 클 것으로 보인다.
 
오순명 정방 4,3 희생자유족회장은 "시신도 찾지 못한 분들의 많이 있다. 앞으로 그것에 대해서 좀 더 노력하고 확실

하게 규명을 해주길 바란다"고 호소했다 .
 제주 4.3 사건으로 행방불명자의 행적을 찾는 것도 시급하다. 제주 4.3 사건 행방불명된 사람만 5000명으로 추정되고 있지만, 그들이 어떻게 왜 희생됐는지 알지 못하는 상황이다.


6년전 제주 4.3 평화재단에서 자체적으로 조사를 실시했지만, 인력과 예산의 한계 등으로 인해 아직 결과물은 나오고 있지 않다 
국가 차원에서 제주 4.3 사건에 대해 밝혀야하는 진실이 많은 만큼 제주 4.3 사건 진상조사를 위한 국가의 전폭적인

지원이 있어야 한다.  

한편 정부는 이날 제주 4.3 평화 공원에서 '슬픔에서 기억으로, 기억에서 내일로'라는 주제로 70주년 제주 4.3 사건

희생자 추념식을 거행한다.

 이날 추념식에는 문재인 대통령이 참석해 추념사를 통해 제주 4.3 사건 희생자를 기리고 진상규명과 명예회복, 제주

 4.3 사건 특별법 개정안의 조속한 국회 통과 등을 당부할 것으로 보인다.


제주 4.3 사건 추념식에 현직 대통령이 참석하는 건 2006노무현 전 대통령 이후 12년 만이고, 2014년 국가 기념일 지정 이후 처음이다.  

[티브이데일리 최하나 기자 news@tvdaily.co.kr/사진=KBS1 방송화면 캡처]






이효리, 제주 4·3희생자 추념식 참석해 시낭송..네티즌들 ’멋지다 이효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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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수 이효리/사진=김창현 기자



이효리 제주 4·3 추념식 참석. /사진=JTBC




이효리, 제주 4.3 사건 희생자 추념식에 동참지상파 생중계






[SBS funE l 강경윤 기자] 가수 이효리가 70주년 4.3 희생자 추념식 사회를 맡는다.
3일 오전 10시 제주4·3평화공원에서 열리는 4·3 희생자 추념식KBS 제주방송총국 한승훈 아나운서로 진행된다.

제주4·3평화공연 일원에서 슬픔에서 기억으로, 기억에서 내일로주제로 열리는 이번행사에문재인 대통령이 참석한다.

이효리는 오늘 43일 제주4.3평화공원에서 열리는 70주년 4.3 추념식에서 행사 주제를 설명하는 해설자로서 참여

하고 가수 루시드폴은 추모 공연을 할 예정이다.

대중 가수들이 추념식 본행사에 참여하는 건 20144·3 희생자 추념일이 국가기념일로 지정된 이후 이번이 처음.

이효리와 루시드폴은 제주도에 거주하는 대표적인 연예인들이다.

앞서 이효리는 내레이션을 맡는다는 사실을 직접 밝히면서 부탁이 와서 맡기로 했다블랙리스트에 오르는 것

 아니냐는 걱정이 있었는데 괜찮다고 하더라.

 제주에서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싶어서 하게 됐다고 말했다.

SBS를 비롯해 지상파 방송 3사는 이날 오전 10시부터 70주년 4.3 추념식을 생중계할 예정이다.
한편 제주 4.3 사건은 194843일 발생한 제주지역의 소요사태로, 4·3사건위원회에 따르면 제주도 인구의 10%에 달하는 25∼3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kykang@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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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4.3사건, 180도 달라진 행사



제주4·3사건 70주년 국가추념식 거행오전 101분간 묵념 
추념식, 15천여 명 참석 예정...전국 생방송은 KBS1이 맡게 돼 



제주 4.3사건에 대한 국민적 관심이 지난 정부와 달리 무척 뜨겁다. 
화해와 상생의 미래로 가는 제70주년 제주 4·3사건 희생자 추념식이 3일 오전 제주4·3평화공원에서 거행되기 때문. 

행정안전부가 주최하고 제주도가 주관하는 이번 제주 4.3사건 추념식은 식전행사로 개신교와 천주교, 불교, 원불교의 종교의례, 진혼무, 합창, 공연이 이어진다.

특히 이효리는 해당 행사에서 사회를 맡고 루시드폴은 추모 공연을 펼칠 예정이다.

연합뉴스에 따르면 본행사가 시작되는 오전 10시부터 1분간 제주 4·3사건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묵념 사이렌이 추념식장을 비롯한 제주도 전역에 울린다. 추념식에 참석하지 못하는 제주도민들이 4·3 영령에 대한 추념의 시간을 갖게

하려고 사이렌을 울리는 것은 올해 처음이다.
제주 4.3사건을 바라보는 기념 행사가 과거 정부와 달리 180도 달라진 셈.

본행사가 시작되면 제주 4·3사건 당시 430여 명이 한꺼번에 희생된 북촌리 사건을 모티브로 한 `순이삼촌`이란 소설을 쓴 현기영 씨가 `4·3 70주년에 평화를 기원하면서`라는 제목의 추모글을 낭독한다.


제주4·3사건 피해 조사를 처음 시작한 제주도의회의 장정언 전 의장, 4·3 당시 임시수용소에서 태어난 송승문 제주

4·3희생자유족회 배보상특별위원장, 고희순 4·3희생자 유족부녀회장, 제주 출신 소프라노인 강혜명 4·3 홍보대사,

김은희 4·3 희생자 유해 발굴 기여자 등 10명이 애국가를 선창한다.

제주 4·3사건 희생자 유족인 이숙영 씨는 어머니를 그리는 편지를 낭독한다.

학교 교장이었던 이 씨의 아버지는 그때 총살당하고, 음악교사였던오빠는 행방불명됐으며, 그 와중에 어머니도 유명을 달리했다.

마지막으로 제주4·3유족합창단과 참석자들이 4·3의 아픔을 그린 노래 `잠들지 않는 남도`를 처음으로 합창한다. 
제주 4.3사건 희생자들과 유가족을 위로하기 위한 본행사가 끝나면 제주도민을 비롯한 전국 각지, 일본 등지에서 온

참배객들이 헌화·분향하고, 위패봉안실과 행방불명인 표석 등을 돌아보며 영령의 명복을 빈다.

추념식에는 제주 4·3사건 생존 희생자 100여 명과 희생자 유족 등 모두 15천여 명이 참석할 예정이다.

추념식 전국 생방송은 KBS1이 맡는다. 


행정안전부는 제주 4.3사건 추념식과 관련 `슬픔에서 기억으로, 기억에서 내일로`라는 주제로 예년의 어두운 느낌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희망과 감동을 전하고, 지금까지 4·3의 역사적 의미를 계승하도록 헌신해 온 분들께 감사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귀한 시간이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제주도는 제주 4.3사건 추념식 행사 참가자들을 위해 제주공항에서 4·3평화공원까지 정규 노선버스 운행을 늘린다.

 제주시와 서귀포시 주요 장소에서 출발하는 셔틀버스 19대와 유족용 버스 97대도 운행한다.
한편 여야 지도부도 이날 제주 4·3사건의 70주년 추념식에 참석하기 위해 일제히 제주를 찾는다.

더불어민주당 추미애 대표와 우원식 원내대표는 이날 오전 10시 제주 4·3 평화공원에서 열리는 `제주 4·3사건` 추념식에 참석한다. 
한국당 홍준표 대표와 바른미래당 박주선 공동대표도 제주 4·3 평화공원을 찾아 희생자들의 넋을 기린다.

민주평화당 조배숙 대표와 정의당의 이정미 대표. 노회찬 원내대표 역시 추념식에 참석하려고 제주로 향할 예정이다. 

제주 4·3사건은 1948년 이념 갈등이 정부의 과잉진압으로 이어지면서 무고한 수많은 사람이 희생된 비극을 말한다.

4·3사건위원회에 따르면 당시 제주도 인구의 10%에 달하는 25∼3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제주 4.3사건 이미지 = 연합뉴스 







제주4.3 70주년을 하루 앞둔 2일 제주도 제주문예회관에서 열린 ‘기억 속에 피는 평화의 꽃’ 전야제에 참석한 제주도민들이 LED 동백꽃의 불을 밝히고 있다. / 김창길 기자 cut@kyunghyang.com



제주4.3 70주년을 하루 앞둔 2일 제주도 제주문예회관에서 열린 기억 속에 피는 평화의 꽃

전야제에 참석한 제주도민들이 LED 동백꽃의 불을 밝히고 있다.


 / 김창길 기자 cut@kyunghyang.com






제주4.3평화공원의 조각 비설. 어린 아이를 안고 죽어간 희생자의 모습을 담은 등신대다.


(사진=이정현 기자













대한민국 현대사 최악의 학살극 제주 4.3사건



숨겨진 제주의 아픔…“색깔론으로 시작된 비극

이승만 정권·묵인 하에 7년동안 벌어졌던 학살극 
삼일절 기념 대회서 시작된 비극경찰의 총격 참사 
남조선노동당 활동시작계엄령 선포로 시작된 학살 
1/8 학살된 제주도민역사에서 잊혀진 최악의 참사 



김범준 기자



    지금은 국내 최고의 관광지인 제주도는 과거 큰 아픔을 겪은 지역이다.

    해방된지 얼마되지 않아 공산당 숙청이라는 명목으로 도민의 1/8 가량이 학살되는 사건을 겪었기 때문이다.

    이같은 학살극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에게 제주 4·3학살극에 대한 인식은 매우 낮다. 특히 5.18 민주화운동, 부마항쟁,

    4.19혁명, 6월항쟁 등과 비교해보면 참담할 정도로 인지도가 낮고, 심지어 공교육에서도 언급되는 일이 적다.


     그나마 지난 2003년에서야 정부차원의 제주4·3진상조사보고서가 확정되어 노무전 전 대통령이 과거사 정리를 약속

    하며 사과를 한 게 대한민국 정부 최초의 공식 사과였다.

     그리고 지난 201748제주 4.3 70주년 범국민위원회가 출범했다.

    진상은 명명백백히 밝혀져야한다.

     


     




     



    사살되어 십자가에 내걸린 제주도민의 시신.


     <사진출처=4.3사건 진상보고서>






    제주 4·3사건은 지난 194843일부터 1954921일까지 제주도에서 일어난 대규모 학살로, 일본제국의 패망이후 남북한의 이념갈등 발단이 되어 봉기한 남로당 무장대와 미군정과 국군, 경찰 간의 충돌 과정과, 이승만 정권 이후

    미국 정부의 묵인 하에 벌어진 초토화작전 및 무장대의 학살로 많은 주민이 억울하게 희생당한 사건이다. 


    43일 남로당 제주도당에서 단독으로 무장대 조직, 기습에서부터 시작됐기에 제주 4.3 사건이라고 불리지만,

    그 날에만 일어난 일이 아니다. 말하자면, 194731일부터 한국전쟁이 휴전될 때까지 계속된, 제주도 역대 최대의

     참사 중 하나로 보도연맹 학살사건과 더불어 민간인 학살의 대표적인 사건으로 꼽힌다. 

     

    매카시즘 시작 


    사건의 발단은 이렇다.

    지난 194731일에 제주 북국민학교에서 삼일절 기념 제주도 대회가 열려 3만여 명의 주민이 모였다.

     이 날 행사를 끝낸 군중들이 가두시위에 들어갔다.


    시위대가 미군정청과 경찰서가 있던 관덕정을 지나가고 기백 명 정도의 군중이 시위행렬을 구경하고 있던 도중 사건이 하나 터졌다.

    오후 245분 경, 기마경찰이 타던 말에 아이가 말굽에 채었는데 경찰이 이를 모르고 지나가버린 것이다.

     분노한 군중들이 경찰을 비난하며 몰려들었고 기마경찰은 황급히 도망쳤다.


    군중들은 도망가는 기마경찰을 향해 돌을 던졌다.

    그러자 경찰서에 있던 경찰들은 군중이 경찰서를 습격하는 줄 알고 관덕정 주변의 사람들에게 총을 쏘기 시작했다.

    이 일로 6명이 죽고 6명이 부상을 입었다.


    경찰의 발포는 분명 문제가 있었다.

    시위에 참여한 사람 가운데 사망자는 하나도 없었고, 경찰서와 상당히 떨어진 곳에서 희생자가 발생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사망자 6명 중 5명이 등 뒤에서 총을 맞은 것으로 확인되었다.


    이는 사망자들이 시위가 관련이 없으며 경찰의 발포가 과잉 대응이었음을 말하고 있었다.

    미군 정보보고서도 이들의 발포를 비이성적이라 규정할 정도였다.


    그럼에도 경찰은 자신들의 이 발포를 정당화하기에 급급했다.

     관덕정 앞에서의 발포가 치안을 위한 정당방위라고 주장한 것이다.

    그리고 31일의 군중들이 경찰서를 습격하려 했다는 미확인 정보를 사실인 것처럼 흘렸다.


    31일 저녁부터 통행금지령이 제주도에 선포되었고, 다시 수백 명의 응원경찰이 육지로부터 파견됐다.

     여기에 31일의 시위와 관련하여 여러 명이 경찰에 끌려가자 제주도의 민심은 크게 동요했다. 


    발포사건으로 격앙된 민심은 남조선노동당에게는 좋은 기회로 다가왔다.

    남조선노동당은 제주도 내의 좌익 세력을 이끌면서 경찰의 만행을 규탄하는 운동을 주도했다.

    대다수의 시민들은 여기에 호응했다.


    거기에 3.1 발포사건의 진상을 아는 우익 세력들도 우려를 나타내며, 점차 경찰을 향해 광범위한 비판적 여론이 형성

    되기에 이른다.  


    310일부터 중앙정부에 사과를 요구하는 민관합동파업이 도내에서 대대적으로 일어났다.

     관공서는 물론이고 공장, 회사, 학교 등에서 공무원, 노동자, 학생들은 일제히 파업했고, 이는 313일까지 제주도

    전역으로 퍼졌다.


     파업 참여자들은 3.1 발포사건에 대한 사과와 발포자 및 책임자 처벌, 희생자 유가족 지원 등을 주장했다.

     심지어 제주도 출신의 경찰들도 파업에 참여하여 직장을 이탈하는 일도 벌어졌다.

    이 총파업에 참여한 직장과 사람들은 166개 기관, 41211명이었다. 


    하지만 중앙정부인 미군정은 이런 요구조건을 무시해버렸다.

     미군 보고서는 총파업의 원인이 3.1 발포사건에 대한 분노와 남조선노동당의 선동에 있다고 봤지만, 제주도는 인구의

     70%가 좌익단체에 동조자이거나 관련이 있는 좌익분자의 거점이라며 제주도민들을 좌익으로 몰아갔다.


    미군정은 사태를 수습하기는커녕 좌익을 탄압해 총파업을 와해시키려고만 했다.

    곧 파업에 참여한 66명의 경찰이 해임되고 그 자리는 육지에서 온 서북청년회 소속 사람들로 충원되었다.

    그러면서 경찰은 파업 본부를 습격하고 파업 참여자들을 잡아가며 총파업을 적극적으로 탄압했다.


    탄압으로 총파업은 3월 말부터는 가라앉았다.

    하지만 탄압은 계속되었다.


    육지에서 온 응원경찰과 서북청년회원들을 중심으로 파업 참여자들에 대한 검거 선풍이 한동안 이어졌고, 검거된 사람들은 경찰에 의해 모진 고문을 당했다. 19473.1 발포사건 이후부터 194843일까지 2500여 명이 감옥에 갇혔다.

     이들을 수용하기에 제주도의 감옥은 너무 좁았고, 수용자들의 상태는 기본적으로 최악이었다.


    감옥에 갇히지 않은 사람들도 괴롭기는 마찬가지였다.

     1947년 유해진이 도지사로 부임했는데, 그는 미군정에게도 극우파로 규정된 인물로서 도민들의 의견을 듣지 않고

    정치적 반대파만 탄압하려고 애썼다.


    그에 맞춰 도내 곳곳에서 서북청년회원들은 태극기와 이승만 사진을 강매하거나, 주민들의 재산을 강탈하는 등 여러

    만행을 저질렀다. 이렇게 되면서 점차 제주도민과 경찰 사이의 충돌도 빈번하게 발생했다.


    1948년에 접어들면서 경찰에 고문으로 인한 사망자가 속출했다.

    경찰에 끌려간 20대 젊은이 3명이 잇달아 사망한 것이다. 경찰에 부인에도 불구하고 사망한 이들은 모두 고문으로

     죽은 것이 확실해 보였다.


    고문치사 사건이 터지자 제주도의 민심은 더욱 흉흉해졌다. 지속적인 탄압을 받던 남조선노동당 제주도당은 이런

     상황들을 놓치지 않았다.

    1948년 초부터 격렬한 찬반 논의 끝에 남로당 제주도당은 무장투쟁을 하기로 결정하고 준비에 들어갔다.

    하지만 이 결정은 남로당 중앙과의 협의를 하지 않은 상태였다.




     



    제주도 토벌에 나섰던 경찰과 군인 등을 격려하는 이승만.


     <사진출처=4.3사건 진상보고서>  






     

    시작된 봉기 


    그리고 194843, 새벽 2시 즈음, 제주도 각지의 오름마다 봉화가 솟아올랐다.

    그것은 남로당을 주축으로 한 무장대가 봉기를 일으키겠다는 신호였다.

    350여 명의 무장대가 제주도 내의 전 경찰지서 24개 중 12개 지서와 우익 인사의 집, 우익 청년 단체 등을 일제히

    습격했다.


     무장대는 무기를 들고 경찰, 우익 인사, 우익 청년 단체 단원, 경찰 가족 등을 공격했다.

     이 일로 경찰 4, 우익인사 등 민간인 8, 무장대 2명이 목숨을 잃었다. 이 무장봉기는 무장대가 경찰과 우익을

    기습 공격한 것이기에 군경은 일동 긴장하였다. 


    이 날 봉기를 일으킨 무장대는 경찰과 군인에 비하면 상당히 약체였다. 처음 봉기에 참여한 대원들은 300여 명에

    불과했고, 이들이 가진 무기는 일제 99식 총, 권총, 수류탄, , 죽창, 몽둥이이었다.

    그것도 총기가 턱없이 부족하여 대다수가 칼, 죽창, 몽둥이만 들고 나섰을 정도였다.

     물론 이후에 군경에 대한 습격과 충돌을 통해 무기를 보강하기는 했지만 인력과 무기의 부족은 여전했다.


    한편 이들은 게릴라와 유격대 방식으로 운영된 일종의 빨치산이었다. 무장대는 치고 빠지는방식으로 군경과 우익

     인사들을 괴롭혔고, 제주도민들을 향해서 끊임없이 5.10 총선거 거부와 공산주의를 선동했다.


    5.10 총선거를 1달 정도 앞두고 있던 상황이라 군경은 민감하게 반응했다.

    군경은 43일의 무장봉기를 빨갱이들의 선동으로 이루어진 무장폭동으로 규정했다.


    45, 미군정은 제주경찰감찰청 내에 제주비상경비사령부를 설치했다.

    곧이어 응원경찰들과 우익 청년 단체 단원들이 증파되었고, 통행금지령이 내려져 오후 8시 이후의 통행을 금지됐다.

    경찰과 우익은 좌익을 격렬하게 탄압하고자 했다.


    이 때문에 이들은 제주도민들과 또 다시 충돌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경찰은 진압에 보다 소극적으로 나왔던 경비대를 의심하여 일부러 방화 사건을 조작해 경비대를 출동시키려고까지

     하며 광적으로 무장대 진압에 집착했다. 


    지속적인 갈등을 벌이던 중 1948815,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9일 후인 24일 대한민국과 미국은 양자 간에 한미군사안전잠정협정을 맺었다.

     이 협정에 의거하여 미군이 완전 철수할 때까지 주한미군사령관은 한국군의 작전통제권을 계속 쥐게 되었다.


    한국군을 지휘하고 통제하기 위해서, 주한미군으로부터 임시군사고문단이 파견됐다.

    그러는 사이 10월에는 제주도로의 파견을 반대하며 좌익 성향의 군인들이 여순사건을 일으켰다. 또 이 때 제주도

     근해에 소련 선박이나 잠수함이 출현했다는 낭설이 퍼졌다.

    그리하여 점차 대대적인 토벌전이 준비되기 시작했다.  


    9월부터 소강상태는 종료되고 군인들과 경찰들이 육지로부터 제주도로 차츰 파견되었으며, 그나마 제주도민들에게

    호의적인 태도를 보이던 김봉호 경찰청장이 경질되었다.

    1011일에는 제주도경비사령부가 설치되어 사령관으로는 김상겸, 부사령관으로는 송요찬이 각각 임명됐다.

     

    잔혹한 학살극 


    1017일 송요찬은 포고문을 발표하여, 해안선 5km 이외 지역에 통행금지령을 내리고 그곳에 있는 사람은 폭도로

    간주해 총살하겠다는 무시무시한 결정을 내렸다.

     하지만 이 결정은 제주도에 살고 있는 중산간마을(산쪽에 위치한 마을) 거주민들에게는 청천벽력같은 말이었다.


    이 포고문은 그들에게 있어서 거주 자체를 금지하는 명령이나 다름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해안으로 내려와야 살 수

     있는데도 내려오지 못했다.

    그럼에도 다음 날부터 해안은 전면적으로 봉쇄되었고, 군경은 중간산마을을 비롯한 산악지역을 적지(敵地)로 간주했다.  


    여순사건이 터진 후에는 더욱 심해져서, 서북청년회 회원들이 대거 제주도로 내려와 군인과 경찰 행세를 했다.

     또 제주도민들을 대상으로 민보단을 조직해 무장대를 막으려고도 했다.

     마침내 19481117, 이승만 대통령은 제주도에 계엄령을 선포했다.

    이승만 정권은 대통령령 제31호로 계엄령을 내리고 송요찬을 계엄사령관으로 임명했다. 


    계엄령을 토대로 군경토벌대는 본격적인 진압에 들어갔다.

    토벌을 위해 군경은 해안을 통제하고, 언론에 재갈을 물렸다.

    제주도는 외부로부터 고립되었다. 194811월 중순부터 초토화작전이라고 불리는 강경 진압이 시행됐다.

    중산간지대의 마을들과 주민들이 주요한 진압 작전 대상이었다.


    군경토벌대는 중산간마을을 돌아다니면서 닥치는대로 주민들을 폭도로 간주해 학살했다.

    그리고 마을에 불을 질렀다. 상상을 초월하는 끔찍한 일들이 학살 도중에 벌어졌다.

     토벌대는 주민들을 집결시키고 가족끼리 말을 태우게 하거나 뺨을 때리게 했다.


    만약 조금이라도 주저한다면 마구 구타했다. 반항하면 그 자리에 총살하는 일도 있었고, 총살자 가족에게 총살당하는 사람을 보게 하며 만세를 부르고 박수를 치게 했다.  


    그런가하면 무장대로 변장하여 들어가 도움을 요청한 다음, 도움을 주면 바로 본색을 드러내 사살해 버리는 함정

    토벌, 자수를 종용하며 명단이 있으니 거짓말하면 재미없다며 으름장을 놓다가 사람들이 자수를 하면 바로 처형해버리는 자수 사건도 있었다.


    처형 대상인 사람이 없자 그 사람의 가족을 데려다가 대신 죽여버리는 대살(代殺)과 마을주민들을 모아놓고 학살을

     벌이는 관광총살도 횡행했다.

    심지어는 군경토벌대가 주민들을 대상으로 사살연습을 벌이기도 했다.

    그렇게 마구잡이로 학살한 사람들은 토벌대에 의해 모두 사살된 폭도가 되었고, 학살행위는 공적으로 치하되었다.


    한편 학살을 피해 마을을 탈출한 사람들은 한라산 인근을 떠돌아다니면서 동굴이나 숲에 숨어야 했는데, 군경토벌대는 이런 사람들까지도 색출해 학살했다.

    이런 끔찍한 일들로 인해 제주도에서는 이름 빼앗기지 말라는 유행어가 나돌았다.


    이 말은 토벌대에 끌려가는 사람 눈에 띄였다간 공연히 그 사람이 자기 이름을 불어 자신도 끌려가 죽을 수 있을테니 조심하라는 뜻이다.


    토벌대 중에서는 서북청년회 소속 대원들이 가장 악랄했다.

    이들은 노인, 어린이, 아기 등 성별을 가릴 것 없이 일반 서민들을 빨갱이와 한통속으로 치부하여 모조리 죽여버렸다고 전해진다.


    이들 서북청년회는 월남한 지주나 이북 출신 조직폭력배, 극우세력 장정들이 주류로서 제주에서 화풀이와도 같은 만행을 저질렀고, 진압군 중에서도 가장 악질적으로 악명높았다. 


    가장 대표적인 사건이 49117일에 벌어진 북촌리 학살사건이다.

     북촌리 부근의 제2연대 3대대의 일부 병력이 무장대의 기습을 받아 2명이 목숨을 잃었다.


     이에 놀란 마을 원로들이 시신을 싣고 직접 대대 본부로 찾아갔다. 군인들은 흥분하여 마을 원로들을 무참히 살해한 후, 북촌리에 나타났다.

    북촌리에 살고 있던 1000여 명의 마을 사람들을 집결시킨 군인들은 억지 핑계를 대며 민보단 책임자를 제일 먼저

    사살했다.  


    주민들이 동요하자 위협사격을 가했는데, 이 때 사격으로 젖먹이를 안고 있는 여인들이 목숨을 잃었다.

    공포에 잠긴 주민들에게 토벌대는 군경 가족을 골라낸 다음, 나머지는 수십명 씩 끌고가 마을 주변의 밭에서 모조리

     총살했다. 이 일로 300~400여 명의 주민들이 목숨을 잃었다.


    또 군인들이 불을 지르는 바람에 마을 전체가 불에 타 잿더미로 변했다.

    이 사건은 제주 4.3 사건 당시에 일어난 학살사건으로는 최대 규모였고, 이 일로 인해 북촌리의 성비는 한동안 여초

     현상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군경은 이런 자신들의 학살행위를 무장대의 행위라고 왜곡해 서술해놓았다.


    또 다른 사례로는 다랑쉬굴에서 일어난 일이 있다. 구좌읍 종달리와 하도리에서 살고 있는 주민들은 194812월 경에 구좌읍 세화리에 있는 다랑쉬 오름 근처의 굴로 피난을 와 있었다.

     그런데 군경토벌대가 그 위치를 알고 안에 있던 사람들 보고 나오라고 했다.


    사람들이 나오지 않자 토벌대는 굴 입구에 불을 지폈다. 결국 연기에 질색하여 11명이 목숨을 잃었다.

    사망자 중 3명이 여성이었고 아홉 살 아이도 포함되어 있었다. 다랑쉬굴은 1992년에야 발굴되어 그 전모가 알려졌다. 

    초토화작전은 19492월까지 계속되었다.

    토벌대의 학살은 수많은 마을을 파괴시키고 제주도의 인구 수를 급감시켰다.  


    미군 보고서는 지난 한 해 동안 1400015000명의 주민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며, 이들 중 최소한 80%

     토벌대에 의해 살해됐다. 섬에 있는 주택 중 약 1/3이 파괴됐고, 주민 30만 명 중 약 1/4이 자신들의 마을이 파괴당한 채 해안으로 소개당했다면서 그 참혹한 실상을 보고했다.


    제주 4.3 사건 동안 발생한 대부분의 인명,재산 피해는 이 초토화작전 때문이라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이같은 학살극은 1954921일 마침내 한라산에 내려진 금족령이 해제되면서 완전 종료됐다.






    ▲ 제주 4·3 사건에 대한 정부의 공식사과는 50여년이 훌쩍 지난 노무현 정부때

     이뤄졌다.


    <사진출처=유튜브 영상 캡처>



     



     

    학살극의 결과 


    이 사건으로 인한 총 희생자 수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최대 제주도민 8분의 1이 죽거나 행방불명(추정치는 3만명에서 최대 8만명)된 것으로 추정된다.

     제주 평화포럼에서는 1949년 제주도민 사망자가 6만명 발생한 것으로 당시 임관호 제주도지사가 미 정보국에 전달

    했다는 전문가의 주장이 나오기도 했다. 결국 친척 몇 다리만 건너면 4.3사건 희생자라는 뜻이다. 


    그 후유증은 아직도 지대하여, 나이 지긋하신 어르신들과 대화하다 그쪽 화제가 나오면 진저리 칠 정도다.

    심지어 그 사건으로 인해 보통 제주 밖을 일컫는 육지(한반도 측) 사람들에 대한 인식마저 극도로 악화되었다.

    그래서 사건 이후 1990년대까지 육지에서 제주로 시집오거나 장가온 사람들은 괜히 그런 이미지를 덧씌어 고생한

    일이 많다고 한다. 그리하여 레드 컴플렉스가 극심했다.


    이 사건으로 인해 바다를 건너 부산으로 피난을 떠난 제주도민들이 상당수 있었는데, 뭍으로 건너온 피난민들의 대부분은 영도 쪽에 정착해서 살았다.

    제주은행 부산지점이 부산의 중심가가 아닌 영도구 남항동에 있는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며, 영도에는 여전히 많은

     제주 출신 해녀가 활동하고 있다. 덤으로 제주도민회관도 영도구에 있다. 



     












    제주4.3사건 추념식./사진=뉴스1







    제주 4.3사건. 4·3 70주년. /자료사진=뉴시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