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0 민주항쟁 기념일을 하루 앞둔 9일 서울 서대문구 연세대학교 이한열 동산에 이한열
열사를 추모하는 시민들의 하얀 국화꽃이 놓여 있다. /문호남 기자 munonam@
대한민국을 뒤흔든, 대학교 2학년 청년의 죽음
청년이 있었다. 그는 어른과 아이의 경계, 생존과 꿈의 경계에 섰다.
같은 경계선을 무난히 혹은 우여곡절을 거쳐 넘은, 같은 시대에 던져진 다른 많은 이들과 달리 그는 경계선을 넘지 못했다.
세계의 폭력에 의해서든, 피하고 싶었지만 피하지 못한 불운에 의해서든 그의 죽음은 역사의 기록이자 시대의 고발이다.
해방을 앞두고 이역에서 숨을 거둔 윤동주부터 2020년의 어느 청년에 이르기까지, 지속가능바람 저널리스트들은 청죽통한사(청년의 죽음으로 통찰하는 대한민국 현대사)에서 한국 현대사의 분수령이 된 청년의 죽음을 취재했다
. 청년의 시각에서 새롭게 작성한 '청년의 죽음'은, 그 죽음의 애도이자 더 나은 세상의 모색이다.
<편집자말>
[박서윤 안치용 노수빈 송휘수]
한열이를 살려내라' 이한열 열사 추모식이 열린 7일 오후 서울 서대문구 연세대 학생회관 부근
한열동산에 1987년 6월 9일 고인이 경찰 직격최루탄에 피격된 직후 모습을 취재한 정태원
기자(당시 로이터 사진기자)의 사진을 본딴 조형물이 설치되어 있다. 2019.6.7
1987년 6월 9일 오후 5시 5분 한 청년의 시계가 멈췄다. 다음날 열릴 '고문 살인 은폐 규탄 및 호헌철폐 국민대회'의 출정식을 교내에서 마친 1000여 명의 연세대 학생은 이날 오후 4시경 연대 정문까지 진출하여 '직선제 쟁취' 등의 구호를 외쳤다.
정문에서 시위대와 이들을 막아선 전투경찰 사이에 공방과 대치가 이어졌고 여느 날처럼 터질 때가 되자 최루탄이 터졌다.
오후 5시를 5분 넘긴 시점에 푸른색의 경영학과 과 티셔츠를 입은 연세대 학생이 이 최루탄 중 하나에 맞아 쓰러졌다.
직격으로 발사된 최루탄에 맞아 피를 흘리며 쓰러진 청년은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이한열이었다.
한열은 "내일 시청에 가야 되는데…"라는 말만을 남긴 채 27일 후인 1987년 7월 5일 22살의 나이로 숨졌다.
대학생 이한열
대학 입학식. 오른쪽이 이한렬 ⓒ 이한열 기념사업회 제공
1986년 대학교 1학년 MT 가서 음식 준비하는 이한열 ⓒ 이한열 기념사업회 제공
광주에서 학창 시절을 보낸 한열은 진흥고등학교 전교 회장을 지낼 정도로 성적도 좋은 모범적인 학생이었다.
부모의 말을 잘 듣는 착한 아들이었던 그는 재수하고 1986년 20살에 연세대학교 경영학과에 입학했다.
한열이 대학에 입학한 해인 1986년의 5월 서울 명동성당에서는 해외에서 밀반입된 '광주 비디오'가 열흘간 시민에게 상영됐다.
뉴욕 교민인 목사 박상증과 뉴욕 한인회 단체 '민주구락부' 회장 민승연이 주축이 되어 1981년 5월 제작된 '오! 광주'는 '광주 비디오'로도 불렸다. 교민들에 의해 국내로 밀반입된 이 비디오는 대학과 성당 중심으로 비밀리에 배포되었다.
한열 역시 대학교 1학년인 1986년에 광주 시민학살에 관한 비디오와 사진전을 접한다.
6년이 지나서야 광주민주화운동을 진상을 알게 된 것이다.
15살에 광주민주화운동을 겪었지만, 당시 길거리의 시체를 볼까 걱정된 부모의 보호 아래 집에만 있어서 한열은 그때의 광주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몰랐다고 한다.
나의 어린 날의 추억, 광주사태가 끝난 후 6월 초순 아무런 의식이 없는 상태에서 나는 자연을 만끽했고 고풍의 문화재에 심취했다. 친구들과 찍은 몇 장의 사진이 있을 뿐, 사회의 외곽지대에서, 무풍지대에서 스스로 망각한 채 살아왔던 지난날이 부끄럽다.
- 이한열, 유고 <1987년 분단 42년 피맺힌 2월>
교내 집회, 가두시위를 지켜보며 1학년 1학기를 보낸 한열은 1학년 2학기부터 직접 학내 시위와 집회에 참여하고 현실의 문제를 직시하기 위해 '민족주의 연구회'에서 활동하기 시작한다.
1986년은 학생운동이 타격을 입은 해였다. 학생운동과 제도권 야당이 충돌한 5.3 인천 사태와 학생 1290명이 구속된 10월 건대 항쟁으로 학생운동권은 전두환 정권으로부터 집중적인 탄압을 받았다.
쓰러진 한열을 옆에서 부축한 연세대생 이종창은 한 인터뷰에서 "(1986년에) 운동권 동기 선배들과 어울리면 의식화 되고, 의식화되면 빨갱이 되고, 선배들의 지시에 따르는 노예적인 삶을 살게 된다"라고 운동권을 폄하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있었다고 말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도 한열은 1987년 '만화사랑' 써클을 결성하여 학생운동에 투신하는 한편 사회풍자 만화를 그리는 활동에도 참여했다.
한열 역시 20대 초반의 대학생이었다. 1987년 2월 13일 한열은 광주에서 서울로 편지 한 통을 보냈다.
그 무렵 한열은 당시 서울에서 교사로 근무 중인 셋째 누나와 함께 거주하고 있었는데, 한열의 누나는 2월 9일 월요일 저녁 서울에 도착한 남동생이 늦은 밤 학교로 향한 것을 수상하게 여겼다.
한열이 서울로 보낸 편지에는 "(내) 책상을 조사해 써클 가입 사실을 알게 된 누나가 부모님에게 연락을 드려, 그다음 날로 어머님이 광주에서 (서울로) 올라와 나를 데리고 광주로 내려갔다"는 것을 알리는 내용이 담겼다.
2월 중으로 써클 활동을 정리하지 않으면 휴학하고 군에 입대하라는 부모의 최후통첩을 받은 22살의 한열은 사회과학책 몇 권을 챙겨 광주로 내려갔다.
아들의 안위를 걱정하는 부모와 마찰을 겪고 미래를 고민하는 대학생이었던 한열의 일기에는 이 무렵 "젊음이란 하고 싶은 말을 할 수 있는 나이, 정의와 올바름을 위해 투쟁하고 싶다. 이로 인해 나의 궤도에 차질이 있다면 끝까지 감수하면서 투쟁할 것이다"라는 문장이 적혀있다.
대학생 박종철의 죽음
한열이 2학년이 된 1987년 초 전국은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으로 들썩였다.
1987년 1월 14일 서울대학교 언어학과 3학년 박종철이 남영동 치안본부 조사실에서 물고문과 전기고문을 받다
사망한 사건이다.
대학문화연구회 선배이자 민주화 추진위원회 지도위원으로 수배 중인 박종운을 잡기 위해 13일 자정에 6명의 수사관이 종철을 연행했고 종철은 다음 날 낮에 사망했다.
1월 15일 오전에 대검찰청 이홍규 공안 4과장으로부터 "경찰들 큰일 났어"라는 한마디를 들은 것을 시작으로 경찰 조사를 받던 서울대생이 사망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중앙일보 신성호 기자는 이날 자 중앙일보 7면에 '경찰에서 조사받던 대학생 쇼크사'라는 제목의 500자짜리 기사를 내보내 세상에 종철의 사망 사건을 알렸다.
종철의 시체가 화장된 1월 16일엔 경향신문에서 '경찰서 대학생 쇼크사 검찰, 진상규명 나서'라는 기사를 연이어 보도하였다. 이른바 탁하고 치니 억하고 죽었다는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의 본격화였다.
1986년 부천 성고문 사건 등으로 정권의 폭력성에 분노하고 있던 국민들에게 두 기사는 반향을 일으켰고, 이어 1월 17일 동아일보에 "오전 11시 45분경 조사실에서 도착했을 당시 박군은 바지만 입은 채 웃옷이 벗겨져 있었던 것으로 기억되며 약간 비좁은 조사실 바닥에는 물기가 있었다"라는 시체 부검의의 증언이 보도되자 물고문에 의한 사망 가능성이 제기되었다.
사건 발생 5일 후인 1월 19일 정부는 물고문 사실을 시인하며 고문 경관 조한경과 강진규를 구속하고 내무부장관 김종호와 치안본부장 강민창을 해임하며 민심을 달래려 했다.
하지만 무고한 대학생의 죽음을 본 국민들은 폭력 정권에 저항하기 시작했다.
1월 20일 서울대생들은 '고 박종철 학형 추모제'를 열고 아크로폴리스 광장에서 교문 앞까지 침묵시위를 벌였다. 2월 7일 전국에서 '고 박종철 국민추도대회'가 열렸고 8개 도시에서 798명이 경찰에 연행되었다.
고 박종철 범국민추도회 ⓒ 국가기록원
약 한 달 후 전두환 취임 6년째이자 박종철의 49재였던 3월 3일 서울·부산·대구·광주·대전·전주 등 전국 주요 도시에서 박종철 49재와 '고문 추방 민주화 국민평화 대행진'이 열렸다.
전두환 정권은 이를 불법 집회로 규정하며 3월 2일 밤부터 전국에 갑호 비상령을 내리고 전국에 6만 명의 경찰관을 배치했다.
경찰은 '독재 타도'와 '직선제 개헌'을 외치는 시위를 진압하며 전국에서 439명을 연행했다.
1985년에 시작된 대통령 직선제 개헌 논의는 더욱 거세졌고 두려움을 느낀 전두환은 1987년 4월 13일 모든 개헌 논의를 금지하는 4.13 호헌 조치를 단행했다.
이 조치는 지금까지 일어난 그 어떠한 개헌논의도 모두 중단하고, 이듬해인 1988년 2월 현행 헌법에 따라 정부를 이양하겠다는 내용을 담았다.
'호헌'이라는 가면을 쓴 이 발표는 이승만 정권의 제1공화국과 박정희 제4공화국의 장기 독재정권을 또다시 반복하는 것이 아니냐는 의혹을 불러일으켰으며 전두환의 기대와 달리 개헌을 요구하는 시위가 전국적으로 폭발했다.
1987년 5월 18일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김승훈 신부(당시 홍제동성당 주임신부)는 '박종철 군 고문치사사건의 진상이 조작되었다'라는 제목의 사제단 성명을 통해 치안감 박처원과 경정 유정방·박원택 등 대공 간부 3명이 이 사건을 축소·조작하였고 고문 가담 경관이 5명이었다는 사실을 밝혔다.
사제단의 폭로 이후 전두환 정권은 관련자 추가 구속과 문책 인사를 통해 사태를 수습하려 했지만 속수무책이었다.
같은 달 23일 '박종철군 국민추도 준비위원회'는 '박종철 군 고문살인 은폐조작규탄 범국민대회 준비위원회'로 개편되었고 27일에는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가 결성되어 '박종철 고문 은폐조작 및 호헌선언 반대 범국민대회'를 6월 10일에
개최하고자 했다.
한열은 다른 많은 대학생과 함께 종철의 죽음과 호헌조치에 분노하며 거리로 나섰다. 각 대학은 6월 10일에 열릴 전국적인 시위를 위한 출정식을 준비하였다. 한열 역시 열 기운이 있는 몸을 이끌고 6월 9일 열린 6.10 대회 출정을 위한 연세인 결의대회에 참가했다.
이날 오후 2시 약 1000여 명의 학생들은 동아리 깃발을 들고 도서관 앞 민주 광장에 모였고 2시간 후 결의대회를 마친 이들은 '호헌철폐 독재타도' 구호를 외치며 정문으로 향했다.
▲ 피격 직후의 이한열 ⓒ 네이선 밴, 이한열 기념사업회
▲ 시위 당시 이한열이 입은 옷 ⓒ 지속가능바람
전국적으로 갑호 비상근무령이 내려진 상태였다.
시위대 진압을 위해 이미 오전 9시부터 수백 명의 전투경찰이 연세대학교 앞과 신촌 로터리 일대에 배치되었다. 경찰은 정문에 도달한 학생들에게 최루탄을 발포했다.
최루탄을 피해 교내로 뛰어가던 한열은 뒤통수에 SY-44탄을 맞았다.
한열의 얼굴과 코에서 피가 쏟아졌고, 쓰러지는 한열을 발견한 도서관학과 2학년 이종창이 그를 부축하여 학교로 들어갔다.
한열은 세브란스 병원으로 옮겨지는 동안 의식을 완전히 잃지는 않았으나 약 1시간 후 "내일 시청에 나가야 하는데…"라는 말을 남기고 혼수상태에 빠졌다.
한열의 최루탄 피격 사건은 다음 날 중앙일보 1면에 보도되었고 피를 흘리는 한열의 사진은 6월 항쟁의 기폭제가 되었다.
이한열의 6월, 대한민국의 6월
1987년 6월 9일 5시 30분경, 한열의 광주 본가에서 전화가 울렸다.
한열이 위독하다는, 세브란스 병원에서 온 연락이었다. 한열의 부모는 7시 막차를 타고 세브란스 병원으로 갔다.
고작 이틀 전인 7일 밤 서울로 올라간 아들이 위독하다는 소식은 믿을 수가 없었다. 밤 12시 넘어 한열의 어머니는 신경외과 중환자실에 의식 없이 누워있는 한열을 보고 정신을 잃었다.
신경외과 정상섭 박사는 한열의 상태가 위독해 수술조차 불가능하다 했다.
병원 밖에는 한열의 동료, 친구들, 한열의 지도교수 이완수가 그를 밤낮으로 지켰다.
1987년 6월 10일 오후 6시 예정대로 '박종철 고문 은폐조작 및 호헌선언 반대 범국민대회'가 개최되었고 22개의 도시에서 참여자가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앞서 정부는 시위를 원천 봉쇄하기 위해 버스와 택시 경음기를 떼도록 했고 직장인의 조기 퇴근을 독려해 6시에 맞춰 시작하는 시위의 참여를 막으려 했다.
옥외방송 마이크를 꺼버리고 서울 지하철 1·2호선이 통과하는 도심의 역들도 폐쇄해 열차가 정차 없이 통과하도록 했다.
시위를 막으려는 이러한 여러 방책과 서울에서만 2만 3000여 명을 동원한 경찰력으로도 군중의 분노를 잠재울 수 없었다.
택시 운전사들은 서행하며 경적을 울렸고 시내버스에서 시민들은 흰 손수건을 흔들었다.
다음날 오전 10시 세브란스 병원은 기자회견을 열어 한열의 병세를 좌측 후두부 두개골 골절, 골절 부위 뇌타박상, 뇌출혈 등이라고 설명하며 12일이 고비가 될 것이라고 밝혔다.
같은 날 밤 9시 30분 연세대학교는 이한열 군 대책위원회를 구성하였고 학생들도 수십 명씩 경비 조를 짜 경찰의 병실 접근을 조직적으로 감시하였다.
세브란스 병원 역시 인턴 1명, 레지던트 2명, 간호사 1명이 번갈아서 24시간 한열의 병상을 지켰고 12명의 전담 의료진을 구성하여 한열의 병세를 살폈다.
세브란스병원과 명동성당에서 1000여 명의 학생들이 철야 농성하며 시위했다. 이들은 "우리 민주 학우 한열이를 살려내라"라는 구호를 외쳤다.
6월 12일 오전 4시 40여 명의 신부가 서울 교구 사제단 회의를 열어 명동성당에서 농성하는 학생들을 끝까지 보호할 것을 결의했다. 이날 서울 명동 거리에 나선 시위대를 향해 시민들은 박수를 보냈고, 점심시간에는 명동의 사무직 노동자들이 학생들과 함께 시위를 벌였다.
오후 2시경 명동 입구부터 신세계 백화점 사이의 도로 주변에 넥타이 부대를 포함한 시민 2000여 명이 모여 '독재
타도'를 외쳤다.
연세대생들은 14일 '사경에 처한 이한열 군의 비극을 직시하면서'라는 성명을 발표하고 최루탄 사용금지 및 이한열 군 사건 책임자의 사퇴를 요구했다.
이날 오후 3시 30분 연세대생 7000여 명은 교내 노천극장에서 이한열군 사건에 대처하기 위한 제3차 비상 학생총회를 열었고, 오후 5시부터는 신촌 로터리를 점거하여 최루탄을 쏘는 경찰에 맞서 돌을 던지며 시위를 이어갔다.
이날 연세대생 2명이 머리를 다쳐 수술을 받았다.
15일 명동성당. 오전 1시부터 6시까지 농성단 해산을 두고 토론이 진행됐다.
토론 후 해산 찬반에 대한 1차 투표에는 과반수 의견이 나오지 않았고 2차 투표에서는 투표에 문제가 있다는 지적이 있어 3차 투표까지 실시되었다.
명동성당 청년 단체 연합회가 합류한 3차 투표는 농성단 해산으로 최종 결론이 났고 낮 12시 20분 농성단은 대형 태극기를 앞세우며 명동성당을 나섰다.
오후 8시 정의구현전국사제단 주최로 '나라의 민주화를 위한 특별 미사'가 명동성당에서 거행되었다. 특별 미사 후 5000명의 종교인이 촛불을 들고 행진했고, 성당 밖의 1만여 명의 시민이 그 뒤를 따르며 6월 항쟁의 중심적인 투쟁이었던 명동 투쟁은 마무리됐다.
명동성당 농성의 영향으로 6월 15일 전국 59개 대학에서 9만여 명이 시위를 벌였다.
경찰 발표만으로도 이날 전국에서 10만 4000여 명이 시위에 참여했다. 1987년 들어 최대 인원이 독재정권에 몸으로
저항한 셈이다.
한열이 19일째 혼수상태에서 깨어나지 못한 6월 26일 오후 6시 전국 37개 시에서 6.26 국민 평화 대행진이 열렸다. '국민의 힘으로 민주화를 쟁취하자'라는 플래카드를 내세운 이 시위에는 전두환 정권 아래 가장 많은 인원이 참여하였다.
국민운동본부는 이날 시위 군중을 130만 명으로 집계하였고, 경찰은 5만 8천 명으로 발표하였다. 이날 3400여 명이
경찰에 연행되었다.
마침내 6월 29일 민주정의당 대통령 후보 노태우는 대통령 직선제 개헌, 김대중 사면복권 등 민주화 요구를 반영한 8개 항목의 시국수습방안을 발표하고 전두환에게 건의하였다.
▲ 6.29 선언을 하는 노태우 민주정의당 대통령 후보' 자료사진
1987년 6월 29일, 민정당 노태우 대표위원의 6.29 선언이 있던 날 서울 북창동의 한 다방은
'오늘은 기쁜 날'이라는 환영 대자보를 유리창에 붙이고 손님들에게 무료로 커피를 대접하고 있다.
연합뉴스
7월 1일 전두환은 노태우의 6.29 선언을 전폭 수용한다는 특별담화를 발표했다. 민주화의 열망이 뜨겁던 1987년 7월 한열은 여전히 사경을 헤매고 있었다.
합병증으로 찾아온 폐렴 증세가 악화하여 한열은 중환자 격리실로 옮겨졌다. 담당 의사는 한열의 병세가 입원 당시보다 매우 깊어졌다고 밝혔다.
7월 5일 새벽 12시 10분 한열의 혈압은 갑자기 떨어졌고, 새벽 1시 15분경에는 심폐 기능이 정지했다. 담당 의사는 심폐소생술 등 응급조치를 취했으나, 약 1시간 후 새벽 2시 5분 한열은 사망했다.
주요사인은 뇌 손상이었고 직접 사인은 심폐기능 정지였다. 중환자실밖에서 경비를 서고 있던 연대생 20여 명은 한열의 사망 소식을 듣고 "한열이를 살려내라"라고 울부짖었다.
한열이 사망한 5일 새벽 3시 경찰은 4500여 명의 전경을 병원과 신촌 로터리 일대에 배치했고, 학생의 접근을 막기 위해 불심검문을 했다. 같은 날 경찰은 '압수할 물건 : 이한열의 시체 1구'라고 적힌 압수 수색 검증 영장을 들고 왔다.
이날 오전 8시 50부터 2시간에 걸쳐 한열의 시신 부검이 실시되었고, 검찰은 사체 부검과 이물질 성분 분석 결과 최루탄 뇌관인 구리 성분 파편에 의해 한열이 사망한 것으로 인정된다고 결론을 내렸다.
5일 세브란스 병원의 영안실에 마련된 한열의 빈소는 6일 새벽 학생회관 1층 로비로 옮겨 정식 설치되었다.
4일간 약 8만 명의 조문객이 한열의 빈소를 찾았다.
▲ 이한열의 장례 행렬 ⓒ 이한열 기념사업회 제공
9일 '민주 국민장'이라는 이름으로 한열의 장례식이 진행됐다. 새벽 6시 한열의 경영학과 동기 24명과 만화사랑 회원 16명이 유해를 영결식장으로 운구했다. 오전 9시에 거행된 영결식에는 7만여 명이 참석하였다.
조사를 하러 단상에 나온 문익환 목사가 민주화 과정에서 희생된 열사 25명의 이름을 부르짖었고, 한열의 어머니가 절규하며 살인 정권을 규탄하자 추모객들은 대성통곡하였다.
약 10만 명이 노제를 지켜보기 위해 신촌 로터리에 모였고, 시민들은 시청을 향해 행진하는 운구행렬을 따라 '독재 타도 민주 쟁취'의 구호를 외쳤다.
아침부터 모여있던 시민들로 시청의 교통은 이미 마비되었고 사람들은 시청 근처의 빌딩에서 하얀 손수건을 흔들었다.
운구 행렬이 시청광장에 들어서자 20만 명의 군중이 시민묵념에 참여했다.
▲ 이한열의 관을 덮은 붉은 색 덮개 ⓒ 이한열 기념사업회 제공
서울에서의 영결식이 끝나고 한열의 유해를 실은 영구차와 운구행렬은 한열의 모교 진흥고등학교로 향했다.
노제가 끝난 뒤 전남도청으로 출발한 운구행렬 뒤를 시민 5만 명이 뒤따랐고, 운구행렬이 도청 앞 광장에 도착했을 때 광장 앞 6차선 도로는 20여만 명의 시민으로 메워졌다.
대한민국의 민주화를 앞당긴 한열의 시신은 5·18 묘역에 안장되었다. 같은 해 10월 27일 대한민국의 민주주의 시작을 알린 대통령 직선제를 위한 국민 투표가 진행되어 직선제 개헌(제9차 헌법개정)이 이뤄졌다.
이한열 열사 어머니 찾아온 경찰청장 민갑룡 경찰청장이 9일 오후 서울 서대문구 신촌동
연세대학교 한열 동산에서 열린 고 이한열 열사 33주기 추모식에 참석해 행사 시작 전 이
열사의 어머니 배은심 여사에게 인사하고 있다. 2020.6.9 연합뉴스
은 기자다' 오마이뉴스,
글박서윤 안치용 노수빈 송휘수
▲광주진흥고 교정에 세워진 이한열 민주열사 흉상 광주진흥고 ⓒ광주진흥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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