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언론과 시사

1500년 된 블랙박스 열렸다, 백제 비밀 담긴 무령왕 황금무덤

 

 

 

무령왕릉 출토 유물 중 왕의 금제관식(관 꾸미개). [사진 국립공주박물관]

 

 

 

 

1500년 된 블랙박스 열렸다, 백제 비밀 담긴 무령왕 황금무덤




무령왕릉 50년, 졸속 발굴이 문화재과학 초석 되다
 “이 무덤은 백제 사마왕과 왕비의 무덤입니다.”
[무령왕릉 발굴 50년, 역사를 바꾸다] ⓵
 
1971년 7월 8일 흥분을 억누르며 김원룡 발굴단장(당시 국립중앙박물관장)이 말했다. 벽돌로 덮어 쌓은 아치형 무덤 입구 한쪽을 가까스로 빠져나온 직후였다.

벌떼처럼 둘러싼 기자들이 “사마왕이 누구냐”고 물었다. 한국 역대 왕조 연표를 들어 확인시켜준 공식 시호는 백제 25대 무령왕. 521년 ‘갱위강국(更爲强國, 다시 강국이 되다)’을 선포한 백제 중흥의 군주 무령왕의 무덤이 약 1500년 만에 침묵을 깬 순간이었다.

2021년은 무령왕릉 발굴 50주년이자 무령왕의 갱위강국 선포 1500주년. “한국 고고·역사학을 바꾼 기념비적 발굴” “되풀이돼선 안 될 실패의 거울”로 동시 조명되는 무령왕릉을 통해 문화재 발굴과 보존과학 50년을 3회에 걸쳐 돌아본다.
 
천마총·황남대총·무용총·쌍영총…. 신라·고구려의 고분들은 대체로 ‘총’으로 끝나는데 왜 무령왕릉은 ‘능’일까.

이런 의문을 품은 적 있다면 1500년 된 고대사 ‘블랙박스’를 열어젖힐 준비가 됐다. 그만큼 무령왕릉은 백제사를 푸는 열쇠다. 1971년 7월 5일 배수로 공사인부의 삽날 끝에 무덤 벽돌이 걸리지 않았다면 백제사, 아니 삼국사 전체가 오래도록 암흑이었을지 모른다.  


“총 17점의 국보가 나왔는데, 단일무덤에서 이렇게 나온 경우가 없죠.
그 중 첫 손에 꼽는 게 지석입니다.
삼국시대 어느 무덤에도 없던 유물의 절대 편년을 제시함으로써 고고학과 고고미술사 발전의 결정적 계기가 됐습니다.”  

 
올 상반기 무령왕에 관한 대중역사서 『끝나지 않은 신화』를 출간하는 정재윤 공주대 교수(사학과)의 설명이다.
여기서 말하는 지석은 국보 163호로 묘지석, 능석이라고도 불리는 돌판이다.
땅을 사서 무덤을 쓴다는 내용도 들어 있어 매지권라고도 불린다. 무령왕릉에선 왕과 왕비의 지석이 각각 나왔다.

왕의 지석엔 ‘영동대장군 백제 사마왕’이라는 이름과 함께 계묘년(523년) 사망했다고 기록돼 있다.
출생, 재위, 사망 연도가 이렇게 확실한 삼국시대 고분은 무령왕릉이 유일하다.  

 
삼국시대 주인공이 밝혀진 유일한 왕릉
일반적으로 왕이나 왕비의 무덤은 능이라 하고(태릉, 정릉 등) 일반인의 무덤은 ‘~묘’라고 한다. 총은 왕에 준하는 사람 무덤 같긴 한데 주인공을 알 수 없는 경우 붙이는 이름. 예컨대 천마총 발굴 당시 경주 김씨 종친회에서 “신라 왕릉이 확실한데 왜 천마총이라 부르느냐”며 들고 일어났어도, 누구 무덤인지 알 수가 없어 묵살되기도 했다.

무령왕릉과 천마총 발굴에 잇따라 참여했던 지건길 전 국립중앙박물관장은 “신라 무열왕릉도 있긴 하지만 실제 위치가 특정되거나 발굴이 이뤄진 건 아니다.
고고·역사학계가 인정하는 삼국시대 ‘능’은 무령왕릉 뿐”이라고 강조했다.






 

무령왕릉 발굴 당시 연도 상부 세부 노출 상태. [사진 국립문화재연구소]

 

 

 

 

 

 

무령왕릉 출토 유물 중 석수(진묘수)와 지석(묘비석). [사진 국립문화재연구소]

 

 

 

 

 

 

무령왕릉 출토 유물 중 왕의 묘지석에 '영동대장군 백제 사마왕'이라고 적힌 부분.
'사마'는 무령왕의 생전 이름이다. [사진 국립공주박물관]




게다가 무령왕릉은 일제강점기 때 발굴·도굴되지 않은 유일한 백제 고분이다.(이렇게 손을 안 탄 무덤을 ‘처녀분’이라 불렀는데, 요즘 언어 사용에선 기피되는 단어다.) 널리 알려진 대로 공주 백제 유적은 일제강점기 공주고보교사로 일한 일본인 가루베 지온(輕部慈恩, 1897~1970)에 의해 샅샅이 털렸다.
가루베는 공주를 떠날 무렵인 1940년 스스로 “백제 고분 1000기 이상을 조사했다”고 말하기도 했다.

설사 가루베가 훼손한 게 아니라 해도 백제 고분 구조가 신라에 비해 도굴이 쉬운 편이다.
최병현 숭실대 명예교수는 “신라의 적석목곽분(돌무지덧널무덤)은 도굴꾼이 무너뜨리지 않고 유물을 빼돌리기 힘든 반면, 백제는 돌방무덤 아니면 전축분(벽돌무덤)이라 입구가 한번 노출되면 훼손이 쉽다”고 설명했다. 그런데 송산리 6호분 바로 옆에 위치했던 무령왕릉은 기적적으로 가루베 혹은 여느 도굴꾼의 눈을 피해, 1500년 만에 고스란히 실체를 드러냈다.

 
국보 17점 쏟아진 '백제 고분예술의 정수' 
온전히 보존됐다 하더라도 백제 고분은 상대적으로 부장품이 적은 편이다.
가루베가 빼돌렸을 유물도 간 곳을 알길 없다.
그런데 무령왕릉에선 국보 17점을 포함한 유물 수천점이 쏟아졌다.
특히 얇은 금판을 자유자재로 구사한 정교한 금속 공예는 황홀한 예술성의 경지다.

엇비슷해 보여도 왕 관모장식(관 꾸미개)은 타오르는 여러 겹의 불꽃 모양이고 왕비 것은 막 피어오르는 연꽃을 닮았다.
총 5쌍의 금귀걸이와 2개의 금목걸이는 ‘검소하되 누추하지 않다’(儉而不陋, 검이불루)는 백제미의 진수가 배어 있다.
정교한 신수무늬거울(神獸鏡)과 은탁잔, 은팔찌의 자태까지 경이롭지 않은 게 없다.

 






무령왕릉 출토 유물 중 왕의 금귀걸이. [사진 국립공주박물관]







무령왕릉 출토 유물 중 왕비의 베개. [사진 국립공주박물관]

 

 

 

 

 

 

무령왕릉 출토 유물 중 글자를 새긴 용무늬 팔찌. 팔찌 안쪽에 대부인(大夫人)을 위해
‘다리’라는 장인이 만들었다고 새겼다. [사진 국립공주박물관]
이 같은 유물들은 묘지석의 절대편년에 힘입어 뚜렷한 역사성을 지니게 됐다. 나아가 후속 연구로 밝혀진 소재·양식 등은 당대 동아시아 무역교류에 중요한 시사점을 준다.
정재윤 교수는 “중국제 청자·동전꾸러미, 일본산 금송으로 된 관 재료, 동남아 원료인 구슬 유물 등을 통해 6세기 백제의 위상을 재확인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최장열 국립공주박물관 학예연구실장도 “고대 역사서인 『삼국사기』 『삼국유사』가 신라 위주로 쓰인데다 백제 유적이 극히 적은 편인데, 무령왕릉 덕에 공주시와 백제사 고고학자들이 먹고 살 수 있다”며 웃음기를 섞어 강조했다.

 
6세기 한·중·일 교류 밝힌 기념비적 발굴
권오영 서울대 교수(국사학)는 “6세기 전반은 백제, 양나라(중국), 일본 간에 유례없이 교류가 활발하던 시기”라면서 “한·중·일, 나아가 동남아까지 학문과 예술이 교류한 흔적이 무령왕릉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고 짚었다.
2015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송산리 고분군을 포함한 백제역사지구가 등재됐을 때도 이 같은 ‘백제 유물의 세계성’이 적극 강조됐음은 물론이다.

 
무령왕릉 발굴은, 그러나 빛과 어둠이 공존한다. 이렇게 화려하고 값진 유물을 무덤에서 내보내는 데 걸린 시간은 불과 12시간. “쓸어담았다”는 표현이 걸맞을 정도의 ‘초고속 발굴’이었다.

공사인부의 삽날 끝에 벽돌이 걸린 때로부터 발굴단이 손을 털고 나온 7월 9일 오전까지 불과 5일.
누가 등이라도 떠민 걸까.
1971년 7월 발굴단을 휘감았던 강박은 대체 무엇일까.
그날 밤 공주 송산리에선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백제 무령왕릉의 내부 모습. 1971년 발굴된 무령왕릉은 내부 보호를 위해
1997년 영구폐쇄됐다. [중앙포토]

 

 


취재·글=강혜란 기자, 그래픽·영상= 심정보·이세영
theother@joongang.co.kr
 

 

 

 

 

 

무령왕릉 발굴 50주년…백제왕도 복원 학술조사 본격 추진


무령왕릉 발굴 50주년 기념 행사 개최

백제 왕릉의 구조, 능원제 복원…왕궁·왕릉·왕사 고증 연구

 

[서울=뉴스핌] 이현경 기자 = 올해 무령왕릉 발굴 50주년을 맞아 다양한 기념행사와 더불어 백제왕도의 역사문화환경 복원을 위한 왕릉, 왕사에 대한 학술조사가 추진된다.
문화재청(청장 김현모)과 공주시(시장 김정섭)는 올해 무령왕릉 발굴 50년, 백제 '갱위강국' 1500년의 뜻깊은 해를 맞아 송산리고분군 등 공주시 일원에서 오는 25일 '무령왕의 해' 선포식을 시작으로 연중 다양한 기념행사를 개최하고 중장기 학술조사와 연구를 추진한다고 24일 밝혔다.
'갱위강국'은 '다시 강국이 되다'라는 뜻이다. 양서 '백제전'에는 '누파구려 갱위강국'(累破句驪 更爲强國)으로 기록돼 있으며, 이는 '고구려를 여러번 격파하고 다시 강한 나라가 됐다'는 의미다.
백제 25대왕 무령왕은 한강 유역을 고구려에 빼앗긴 후 국방 체제를 정비하고 백성의 삶을 보살피며 안정기를 이끈 인물이다.
◆ 주인공 확인한 유일한 왕릉…백제 유물 2900여점 출토
무령왕(재위 501~523)과 왕비가 합장된 무령왕릉은 송산리고분군(사적 제13호)에 위치하고 있으며 1971년 7월 5호분과 6호분의 침수를 방지하기 위해 배수로를 작업하던 중 우연히 발견됐다.
무령왕릉은 삼국시대의 왕 무덤 가운데 도굴되지 않고 능의 주인공을 알 수 있는 유일한 능이다.

발굴된 유물은 국보로 지정된 금제관식, 금제뒤꽂이, 금제 심형이식(귀걸이), 지석, 석수, 청동신수경 등을 포함해 총 2900여 점에 이른다. 금은 장신구가 가장 많았으며 이를 통해 백제 금속공예의 면모를 확인할 수 있다.
우아함을 자랑하는 금제투작 초화문관식 백제 왕관과 금목걸이, 금팔찌, 금귀고리 등도 백제의 뛰어난 세공 기술을 보여주는 사례로 분석된다.
무령왕릉은 중국의 양나라의 문화를 받아 백제의 자체적인 기술로 소화한 건축물로도 가치가 있다. 이를 알 수 있는 것이 등을 놔두는 전불인데, 중국 남조시대 양나라에서 불꽃 모양으로 사용한다.
무령왕릉의 전불은 부여에서 직접 구워 제작했으며 이는 송산리, 교촌리의 고분에서 볼 수 있다. 백제는 이를 일본에도 전파했다.
이렇듯 무령왕릉은 축조연대, 내부구조, 부장유물을 온전히 확인할 수 있는 유일한 무덤이자 학술과 문화재적 가치가 뛰어나 발굴 당시부터 지금까지 온 국민의 관심을 받고 있다.
올해 무령왕릉 발굴 50주년을 맞아 문화재청과 공주시가 마련한 주요 행사는 '무령왕의 해' 선포식을 시작으로 ▲3월 송산리고분군 발굴조사 고유제 ▲4~8월 공주송산리고분군 발굴조사 현장 설명회 ▲7월 무령왕릉 탄생제 ▲송산리고분군 최신 조사·연구 성과 국제 학술대회 ▲'무령왕릉 발굴 당시와 현재' 사진 전시회 ▲초등학생 체험활동

▲8월 백제 고분정비의 어제와 오늘 학술대회 ▲9월 무령왕릉 동상 제작·설치 ▲10월 무령왕릉 다큐멘터리 제작·방영 ▲12월 무령왕릉 발굴 기념도서 제작·배포 등이 열린다.
◆ 백제문화권 중장기 학술조사·연구 추진
공주, 부여, 익산의 백제역사유적지구는 백제왕도의 찬란한 역사를 볼 수 있는 곳으로 2015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송산리고분군을 비롯해 부여 관북리유적, 부소산성, 능산리고분군, 익산 왕궁리유적 등이 올랐다.

문화재청은 백제 왕궁인 부여 관북리유적과 부여 부소산성, 익산 왕궁리유적과 왕릉인 공주 송산리고분군과 부여 능산리고분군의 체계적인 단계별 발굴조사를 진행한다.
백제 왕궁의 실체와 변천 과정, 활용방식 등을 규명하고 백제 왕릉의 구조와 능원제를 복원한다. 아울러 현재 정비된 왕릉의 모습과 위치가 백제 조성 당시와 차이가 있어 이를 바로잡아 왕릉의 진정성을 회복할 예정이다.
또한 백제왕도의 역사문화환경 복원을 위해 왕궁과 왕릉, 왕사 등 핵심유적에 대한 고증 연구와 더불어 백제의 물질문화 규명을 위한 동아시아 왕궁 비교 연구, 고대 도시구조 연구, 고환경 복원 연구, 왕릉 축조과정 연구, 왕릉 목관 복원 연구, 백제 후기 토기 연구 등 다양한 학제간 융복합 심화연구를 추진할 계획이다.
마지막으로 백제왕도 핵심유적의 고도화된 연구정보를 학계, 지역사회와 빠르게 공유하고 미래가치를 추구하는 문화재 조사부터 활용까지의 선순환 체계를 마련한다. 특히 문화재를 체험하고 향유하는 사업인 발굴조사 현장 설명회, 사진공모전, 백제 그리기 대회, 시민강좌 등 프로그램도 적극 개최한다.


89hklee@newspim.com




1971년 7월8일 무령왕릉 입구의 막음돌 개봉 작업 중인 모습. 오른쪽에서 두번째 흰 모자를
쓴 이가 지건길 당시 학예사보다. [사진 지건길 제공]



귀신 홀린 듯 가마니에 퍼담았다..1박2일 아수라장 무령왕릉


무령왕릉 발굴 50년, 역사를 바꾸다] ⓶
지건길 전 국립중앙박물관장 인터뷰

 


“시간에 쫓겨서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저질렀습니다마는, 그런 최악의 발굴을 거쳐서 최선의 유적이 나왔다는 건 역사의 아이러니죠.”
1971년 무령왕릉 발굴의 역사적 현장에 있었던 지건길(78) 전 국립중앙박물관장의 회고다.
당시 28세의 문화재관리국(현 문화재청) 소속 학예사보였던 그는 7월6일 긴급 호출을 받고 충남 공주로 내려갔다.
그때부터 휘몰아쳤던 2박3일을 그는 “얼얼하고 몽환적인 순간들”로 기억한다.

최근 서울 상암동 중앙일보 본사에서 만났을 때 “한국 고고학사의 기념비적 발굴이지만 또 한편으로 두고두고 욕먹게 한 아픈 실패담”이라며 너털웃음을 지었다.

설마 했는데, 도굴되지 않은 백제왕릉이…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 일단 본 기사에 곁들인 지 전 관장의 육성 인터뷰를 들어보자. 간추리면 다음과 같은 참변이 종합됐다. 첫째, 현장 공개. 둘째, 성급한 수습. 셋째, 준비 미흡이다.
반세기가 지난 2021년의 기준으로 보면 하나같이 금기에 해당한다.
그러나 여러모로 미숙했던 시절, 그들은 귀신에 홀리기라도 한 듯 최악의 수를 잇따라 뒀다.

당시 발굴단장이던 김원룡 전 국립중앙박물관장이 생전에 “여론에 밀려 이틀만에 무령왕릉 발굴을 끝낸 것은 내 생애 최대의 수치”라고 뼈아픈 반성문을 남겼을 정도다.






지난 1일 서울 상암동 중앙일보 본사에서 만난 지건길 전 국립중앙박물관장.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시계추를 돌려 1971년 7월5일로 가자. 공주 송산리 5·6호분 배수로 공사 도중 인부의 삽날에 느닷없이 벽돌이 걸렸다는 소식이 문화재관리국을 거쳐 문화공보부(문화체육관광부의 전신)로 긴급 보고됐다.
김원룡 단장을 필두로 한 발굴단이 현장을 찾은 때가 7일 오전. 긴가민가하며 파들어간 무덤 입구가 완연히 드러나자 바로 옆 6호분과 똑같은 양식의 전축분(벽돌무덤)임이 분명해졌다.

눈치를 챈 한국일보 기자가 공주 현장에서 ‘새 백제왕릉 발견’이라는 특종기사를 8일자 1면 톱으로 냈다.
‘물 먹은’(낙종을 뜻하는 언론계 은어) 기자들이 도처에서 몰려들었다. 아기를 들쳐 업은 새댁까지 공주 시민 수백명도 고분 주위를 에워쌌다.

부풀어오르는 흥분과 기대감. 8일 오후 상황에 떠밀리듯 위령제를 지내고 무덤 진입을 시도할 즈음, 발굴단은 이미 현장 통제력을 잃은 상태였다.
“지금 생각하면 당시 김원룡 단장께 ‘이래선 안 됩니다.

시간을 갖고 천천히 해야 됩니다’라고 하지 못한 게 후회스럽기 그지없다.
그러나 하늘같은 스승님이 서두르는데 방법이 없었다(두 사람은 서울대 사제지간). 학문으로 배운 것과 현장은
너무 달랐다.”(지건길)







1971년 7월8일 무령왕릉 무덤 입구 개봉에 앞서 발굴단이 위령제를 지내는 모습. 요즘은
발굴 시작 전에 위령제를 관례이지만 당시 경황 없이 진행된터라 작업 중에 뒤늦게 제상을
차렸다.  [사진 국립문화재연구소]


이 같은 ‘판단 착오’엔 발굴단의 경험 부족도 한몫했다. 한반도 고분이 본격 조사된 것은 알려진대로 일제강점기다.
광복 후 신라 호우총 발굴(1946) 등이 이뤄지긴 했어도 일본인·미국인 전문가의 조력을 얻어야 했다.
무령왕릉 발굴에 참여했던 조유전 박사는『발굴 이야기』(1996)에서 “1970년대만 해도 한해 유적 발굴 건수가 많아야 20건 안팎이었지만 80년대 들어 50건 넘었고, 90년대 들어선 100여건에 이르렀다”고 회고했다.

이들 대부분이 급속한 산업화 및 도시·도로 개발 과정에서 불가피했던 구제발굴(방치할 경우 파손 위험이 있는 유적을 발굴)이었다. 지 전 관장도 공주 파견에 앞서 소양강 댐 구제발굴을 마치고 온 터였다.
1971년만 해도 학술 혹은 문화재 조사 목적 하에 차근차근 계획을 세워 접근하는 고고학적 발굴 방식이 뿌리내리지 못한 상태였단 얘기다.

삽으로 퍼서 가마니에 담아 유물 수습

게다가 발굴단이 설마 하며 들어가 본 무덤은 1500년 간 사람의 손을 타지 않은 ‘노다지’ 그 자체. 도굴되지 않은 백제 고분만 해도 기적인데, 널길 위에 놓인 지석은 심지어 무덤 주인공이 제25대 무령왕이라고 알려줬다.

당시만 해도 무령왕에 대한 정보가 많진 않았지만 웅진(공주)에서 사비(부여)로 천도를 감행한 26대 성왕의 아버지란 사실만으로도 흥분할 만했다. 맨 먼저 무덤에 들어갔던 김원룡 단장과 김영배 국립공주박물관장이 그야말로 얼이 빠진 안색으로
나온 이유다.

꽁무니에서 이를 지켜보던 지 전 관장은 “예사로운 일이 아니구나 직감”했고. 기자들 역시 난리가 났다.
서로 먼저 내부를 찍겠다고 나서는 통에 발굴조사상 전무후무하게 ‘실측조사에 앞선 사진기자들 입실’이 이뤄졌다.









1971년 7월8일 발굴단이 무령왕릉 내부에 발을 들였을 때 가장 먼저 이들을 맞은 석수(진묘수).
그 앞에 지석(묘비석) 두 개가 나란히 놓여있다. 무덤 주인공이 백제 25대 무령왕과 그 왕비
라는 내용이 적혀 있다. 뒤쪽으로 1500년 세월을 이기지 못해 무너져내린 관재가 보인다.
[사진 국립문화재연구소]



한바탕 야단법석 끝에 이제야 발굴단 차례. 이미 흐트러진 무덤 안에서 촬영도, 실측도, 유물 수습도 정석대로 이뤄질 분위기가 아니었다. 바깥의 아우성에다 일생일대의 ‘대박’을 만난 전율에 발굴단은 유물을 쓸어담다시피 싸고 날랐다. 밤샘 작업 내내 물 한모금 못 마신 채 몽롱한 상태였지만. 아무도 졸음을 호소하지 않았다. 그만큼 혼미하고 급박했다.
“굵은 거, 크게 눈에 띄는 것만 차곡차곡 유물상자에 집어넣고, 나머지 것들은 광목으로 싸서 들어냈다.
자잘한 것들은 실측할 엄두가 나지 않아서,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공사용) 오삽으로 퍼서 포대 가마니에 담았다.
다 수습하는 데 12시간이나 걸렸나.
고고학자로서 있을 수 없는 일, 사실상 도굴이나 마찬가지였다.”








무령왕릉 발굴 당시 어지러운 무덤방 모습. 왼쪽에 왕비 베개가 반쯤 묻힌 게 보인다. 상면 봉황
장식은 따로 발견돼 이후 복원해 붙였다. [사진 국립문화재연구소]








무령왕릉 출토 유물 중 왕비의 베개. [사진 국립공주박물관]








무령왕릉 발굴 당시 1500년 세월이 고스란히 드러난 무덤방 바닥에 풀뿌리가 뒤엉킨 왕의 금제
관식(관 꾸미개, 표시 부분)이 보인다. [사진 국립문화재연구소]







무령왕릉 출토 유물 중 왕의 금제관식(관 꾸미개). [사진 국립공주박물관]

 

 

 

만약 오늘날 이와 같은 ‘노다지’ 고분이 발견된다면? “수습에 최소한 6개월은 걸릴 것”이라고 문화재 전문가들은 입을 모은다. 발굴조사단 구성부터 달라진다. 유재은 국립완주문화재연구소장은 “지질학, 환경학, 금속·석재·목재 등 다양한 재질의 보존처리전문가와 생물학, 화학 등 전문가가 초기 단계부터 참여한다”고 설명했다.
무덤 개방 시 미지의 미생물 등으로부터 안전하기 위해 방진복, 마스크 등 착용도 필수적이다.

입구를 전면 개방하기 전에 내시경을 넣어 관, 유물 등 위치를 파악하는 과정도 거친다.
수습할 때도 풀뿌리로 얽히고설킨 유물들은 잔가지 하나하나 가위로 잘라내며 층층이 촬영·기록·수습한다.
유물 전체를 흐트러짐 없이 확보하기 위해 모의 출토를 하거나 수십t 규모의 주변 흙더미 전체를 퍼올리기까지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같은 절차가 자리잡게 된 게 무령왕릉의 패착 때문이었다.
국보급 유물이 와르르 쏟아진 데 따른 환희가 가실 즈음, 학계와 언론에서 너도나도 비판과 자성의 목소리를 높였다.
누구보다 발굴단 스스로 뼈저린 자책에 시달렸다.
“발굴 당시만 해도 잘못이라는 생각을 할 여유도 없었지만, ‘유물 발굴은 그렇게 해선 안 된다,
충분히 시간을 가지고 해야 된다’는 인식이 차츰 학계에 퍼져갔다.
나 역시 2년 뒤 책임자로 참여한 경주 천마총 땐 1년 가까이 신중을 기해 체계적으로 조사했다.”

“역사는 역사…후배들이 거울로 삼길”

왜냐하면 “아무리 잘 된 발굴이라도 결국 유산의 파괴행위이기 때문”(지건길)이다.
유적·유물은 결국 죽은 자의 흔적. 한번 훼손되면 되돌릴 수 없다
. 게다가 무덤은 죽은 이를 안치한 곳이지만, 그걸 만든 이는 또 다른 사람이다.

발굴 과정에서 세세하게 기록한 것들이 먼 훗날 첨단 기술과 결합해 뜻밖의 정보를 더해 줄 수 있다.
제사 그릇에 들러붙은 찌꺼기가 당대 사람들의 식재료를 알려주는 것처럼.
이종훈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장은 “유적·유물의 정보가 촘촘할 수록 더 많은 스토리텔링이 가능해지고, 이 모든 게 후손에겐 자산이고 자원”이라고 설명했다.
이 소장은 “요즘은 아예 문화유적이 가진 콘텐트를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를 염두에 두고 십수년짜리 장기 발굴이 추진될 정도”라고 덧붙였다.

예컨대 무령왕릉 땐 무방비 개방, 천마총 땐 엄격한 통제였다면 요즘 경주 쪽샘지구 44호분의 경우 개방형 전시관을 조성해 관광객들이 발굴 과정을 엿볼 수 있게 한다.
발굴 결과만이 아니라 과정 자체를 우리 시대 자산으로 활용하는 방식이다.







무령왕릉 발굴 2년 후인 1973년 7월 경주 155호분(천마총) 발굴 당시 조사단 일행. 왼쪽부터
남시진 지건길 최병현 박지명 김정기(단장) 소성옥 김동현 윤근일. [사진 지건길 제공]

 


“과거를 부정하는 게 아니고, 역사는 역사다. 무령왕릉라는 거울이 있었기 때문에 2년 뒤 천마총 같은 성공적 발굴이 가능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발굴 당시 태어나지도 않았을 젊은 학예사들이 수장고 유물들을 새롭게 보존처리하고 연구해서 성과를 내고 있단 점이다. 윗세대의 과오가 거울이 돼 후배들이 잘 해줬으면 하는 바람이다.
좋든 나쁘든 무령왕릉은 한국 고고학사에서 꾸준히 하나의 거울 역할을 할 것이다.”
역사의 아이러니 하나 더. 지 전 관장은 당시 발굴단 막내로서 현장 촬영 담당자였다.
급하게 호출 받아 최신식 카메라를 챙겨갔지만 사용법을 익히지 못한 탓에, 무덤 내부 사진을 인화했을 땐 쓸만한 게 절반도 되지 못했다.

그나마 각 언론사 기자들이 찍었던 게 이후 보고서·사진집 제작 때 결정적 근거가 됐다.
괴테가 말한대로 역사는 ‘신의 신비스러운 작업장’이 아닐 수 없다.

취재·글=강혜란 기자, 영상=심정보·이세영
theother@joongang.co.kr※참고도서: 『직설 무령왕릉』(김태식 지음, 메디치), 『발굴 이야기』(조유전 지음, 대원사)
Copyrightⓒ중앙일보 All Rights Reserved.

 





역사적인 무령왕릉 발굴을 보도한 1971년 7월9일자 신문들. 고분의 주인공이 백제 무령왕임을
알리는 획기적인 성과라고 앞다퉈 보도했다. 이기환 선임기자 lkh@kyunghyang.com








발견당시 무령왕릉 내부의 복원도. 무령왕임을 알리는 석판이 놓여있었다.
이기환 선임기자 lkh@kyunghyang.com





무령왕릉 지석. 무령왕을 가리키는 ‘백제 사마왕’의 명문이 보인다.
이기환 선임기자 lkh@kyunghyang.com





국보만 17점 ‘백제 블랙박스’…12시간 만에 날림 발굴



무령왕릉 발굴 50년 ①
1971년 배수로 공사 인부 삽에 발견
일제 때 발굴·도굴 피해 살아남아
삼국시대 신분 확인된 유일한 ‘능’


졸속 조사, 유물 처리 미흡 반성
2년 뒤 천마총 제대로 발굴 계기로
“무령왕릉에선 총 17점의 국보가 나왔는데, 단일 무덤에서 이렇게 나온 경우가 없죠.
그중 첫손에 꼽는 게 지석입니다.
삼국시대 어느 무덤에도 없던 유물의 절대 편년을 제시함으로써 고고학과 고고미술사 발전의 결정적 계기가 됐습니다.”




 

1971년 무령왕릉 발굴은 배수로 공사 도중 우연히 이뤄진 대사건이다. 사진은 발굴 초기에
무덤 입구의 흙더미를 제거하는 모습. [사진 국립문화재연구소]



올 상반기 무령왕에 관한 대중 역사서 『끝나지 않은 신화』를 출간하는 정재윤(사학과) 공주대 교수의 설명이다.
1971년 7월 5일 배수로 공사 인부의 삽날 끝에 무덤 벽돌이 걸리지 않았다면 백제사, 아니 삼국사 전체가 오래도록 암흑이었을지 모른다는 얘기다. 여기서 말하는 지석은 국보 163호로 묘지석, 능석이라고도 불리는 돌판이다. 땅을 사서 무덤을 쓴다는 내용도 들어 있어 매지권이라고도 불린다.

무령왕릉에선 왕과 왕비의 지석이 각각 나왔다. 왕의 지석엔 ‘영동대장군 백제 사마왕’이라는 이름과 함께 계묘년(523년)에 사망했다고 기록돼 있다. 출생, 재위, 사망 연도가 이렇게 확실한 삼국시대 고분은 무령왕릉이 유일하다.
무령왕릉과 천마총 발굴(1973년)에 잇따라 참여했던 지건길 전 국립중앙박물관장은 “신라 무열왕릉도 있긴 하지만 실제 위치가 특정되거나 발굴이 이뤄진 건 아니다. 고고·역사학계가 인정하는 삼국시대 ‘능’은 무령왕릉뿐”이라고 강조했다.


  
관모장식·금귀걸이 부장품 수천 점


 

무덤 내부 널길에서 발견된 진묘수(무덤을 지키는 상상의 동물)와 그 앞에 나란히 놓인 왕과
왕비의 지석. [사진 국립문화재연구소]


무령왕릉은 일제강점기 때 발굴·도굴되지 않은 유일한 백제 고분이기도 하다.
공주 백제 유적은 일제강점기 공주고보 교사로 일한 일본인 가루베 지온(輕部慈恩, 1897~1970)에 의해 샅샅이 털렸다. 가루베는 공주를 떠날 무렵인 1940년 스스로 “백제 고분 1000기 이상을 조사했다”고 말하기도 했다.

최병현 숭실대 명예교수는 “신라의 적석목곽분(돌무지덧널무덤)은 도굴꾼이 무너뜨리지 않고 유물을 빼돌리기 힘든 반면, 백제는 돌방무덤 아니면 전축분(벽돌무덤)이라 입구가 한번 노출되면 훼손이 쉽다”고 설명했다.
그런데 송산리 6호분 바로 옆에 위치했던 무령왕릉은 이들 눈을 피해 1500년 만에 기적적으로 실체를 드러냈다.

 
온전히 보존됐다 하더라도 백제 고분은 상대적으로 부장품이 적은 편이다. 그런데도 무령왕릉에선 국보 17점을 포함한 유물 수천 점이 쏟아졌다.

특히 얇은 금판을 자유자재로 구사한 금속공예는 삼국 안에서도 탁월한 경지다. 엇비슷해 보여도 왕 관모장식(관 꾸미개)은 타오르는 여러 겹의 불꽃 모양이고 왕비 것은 막 피어오르는 연꽃을 닮았다. 총 5쌍의 금귀걸이와 2개의 금목걸이, 신수무늬거울(神獸鏡)과 은탁잔, 은팔찌 등은 ‘검소하되 누추하지 않다’(儉而不陋, 검이불루)는 백제미의 진수를 드러낸다.

  
6세기 한·중·일 무역·예술 교류 밝혀

 


그래픽=정근영 디자이너


 

이 밖에 다양한 부장품은 당대 동아시아 무역 교류에 중요한 시사점을 안긴다.
정재윤 교수는 “중국제 청자·동전꾸러미, 일본산 금송으로 된 관 재료, 동남아 원료인 구슬 유물 등을 통해 6세기 백제의 위상을 재확인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 권오영(국사학) 서울대 교수도 “6세기 전반은 백제, 양나라(중국), 일본 간에 유례없이 교류가 활발하던 시기”라면서 “한·중·일, 나아가 동남아까지 학문과 예술이 교류한 흔적이 무령왕릉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고 짚었다.
2015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송산리 고분군을 포함한 백제역사지구가 등재됐을 때도 이 같은 ‘백제 유물의 세계성’이 적극적으로 강조됐음은 물론이다.

최장열 국립공주박물관 학예연구실장은 “고대 역사서인 『삼국사기』『삼국유사』가 신라 위주로 쓰인 데다 백제 유적이 극히 적은 편인데, 무령왕릉 덕에 백제사 연구가 비약적으로 성장했다”고 강조했다.

무령왕릉 발굴은, 그러나 빛과 어둠이 공존한다.

무덤 내부 유물 촬영부터 최종 수습까지 불과 12시간밖에 걸리지 않은 ‘초고속 발굴’ 때문이다. 당시만 해도 우리 힘으로 대규모 고분 발굴을 한 적 없던 데다 ‘도굴되지 않은 백제 왕릉’이라는 대사건 앞에 언론·여론은 물론 발굴단도 냉정을 유지할 수 없었다. “쓸어담았다”는 표현이 걸맞을 정도의 속도전이었다.
이 때문에 찬찬히 발굴했다면 놓치지 않았을 숱한 고대사의 실마리가 그대로 실종됐다.

50년이 지나도록 무령왕릉이 ‘반면교사’의 대표 사례로 꼽히는 이유다. 반면에 그런 패착 때문에 바로 2년 뒤 경주 천마총 발굴 때부터 유적 조사의 ABC가 정립된 계기도 됐다.
최병현 명예교수는 “당시 성급·미흡한 유물 보존 처리에 대한 반성으로 이후 보존과학에 대한 관심과 투자가 늘어날 수 있었다”면서 “반성은 반성대로 하되, 새로운 관점의 탐구로 더 많은 ‘고대사의 비밀’을 밝혀내야 할 때”라고 말했다.

 
강혜란 기자 theother@joongang.co.kr

[출처: 중앙일보] 

 

 

 

 

 

 

  1921년 경주 노서리에 있는 주막 확장 공사 중에 발견된 국보 제87호 금관총
금관. 높이 44.4cm, 지름 19cm의 금관총 금관은 국내에서 발견된 금관 중 제일 크고
화려한 것으로 신라 금관 양식을 대표하는 걸작으로 평가받고 있다 문화재청

 

 

 

 

개 목걸이도 금으로 만든 황금 왕국 유물도 찬란하네

 


서기 935년. 경순왕 김부(金傅)가 고려 태조 왕건에게 백기 투항하면서 '천년 왕국' 신라가 망했다.
그로부터 219년이 지난 1154년. 아랍 지리학의 거장, 무함마드 알 이드리시(Muhammad Al Idrisi 1100~1166)가 만든 세계지도에 최초로 우리나라의 지명 '신라(silla)'가 여섯 개의 점으로 부활한다.


이는 네덜란드 지리학자 '메르카토르'가 만든 지도보다 400여 년 앞선 시기에 우리의 지명이 세계지도에 표기된 것으로 역사적 가치가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
이라크 바그다드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는 '이드리시 지도'는 그 당시 만들어진 가장 정확한 세계지도로 평가되고 있다.


12세기 지리학자 알 이드리시는 신라가 그려진 지도와 함께 그가 저술한 세계 인문지리서 <극지 횡단 모험가의 산책>(일명 로제르의 서)에서 신라를 조그만 '은둔의 나라'가 아닌 모두가 살고 싶어 하는 '동방의 이상향'이자 '황금의 나라'로 묘사하고 있다.
     




▲  관테 양 옆으로 길게 늘어 뜨린 관 드리개. 부활을 상징하는 푸른 곡옥(曲玉)이 달려있다
문화재청

 

"신라를 방문한 여행자들은 누구나 그곳에 정착해 나오고 싶어 하지 않는다. 모든 것이 풍요롭고 이로운 것들이 많다.
금(金)은 너무도 흔하다. 그곳 사람들은 개의 목걸이나 원숭이의 목줄도 금으로 만든다..."


서역의 지리학자 이드리시뿐만 아니었다. 고려 때 일연 스님이 쓴 우리 역사서 <삼국유사>에도 "신라 전성기 때 서라벌에는 17만 9000여 채의 집이 있었고, 그중에 35채는 '금입택(金入宅)'이었다"는 기록이 있다.
금입택이란 집에 금테를 두른 신라 진골 귀족들의 호화 저택을 말한다.


우리의 고대국가 고구려·백제·신라 삼국 중 신라는 가장 장구한 천년의 역사를 자랑한다. 기원전 57년경부터 935년 고려에 흡수 병합될 때까지 1000년. 세계사적으로도 유례가 드문 '천년의 왕도' 경주에는 수많은 문화유산들이 남아 있다.


 

▲  신라 금관이 발견된 대릉원 일대. 국가사적 제512호로 지정됐다
문화재청

 

신라 금관의 맏형, '금관총 금관'

집에다 휘황 찬란하게 금테를 두르고 심지어 개와 원숭이의 목줄까지도 금으로 만들었던 '황금 왕국' 신라의 대표 유물을 꼽으라면 누구든지 '금관'을 첫손가락에 꼽을 것이다.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금관은 모두 8점이 있다

. 그중에서 6점은 5~6세기 신라의 고분에서 나온 것이고 나머지 2점은 가야의 금관이다.
고구려와 백제 땅에서는 공식적으로 금관이 출토되지 않았다.

     
고구려 고분에서는 금동관이 나왔고, 백제 무령왕릉에서는 금관 대신 검은 비단관에 장식으로 꽂았던 왕과 왕비의 금제 관 꾸미개가 출토됐다.
경북 고령에서 출토된 가야 금관 중 1점은 삼성미술관 '리움'에 있고, 1점은 '오구라 컬렉션'이라는 이름으로 일본 도쿄국립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

 
고대 삼국 중 유일하게 발견된 신라의 금관 6점은 모두 경주 대릉원 일대의 고분인 금관총, 금령총, 서봉총, 천마총, 황남대총 북분에서 출토됐으며 나머지 한 점은 도굴범에게 압수한 것으로 교동 고분에서 출토된 것이다.

무덤의 주인이 왕으로 밝혀졌다면 '왕릉(王陵)'이라고 명명됐겠지만 고분의 주인을 모르니 '~총(塚)'이라 이름 붙였다.
6개의 신라 금관 중 국보 제87호로 지정된 '금관총 금관'이 맨 먼저 세상에 나왔다.
신라 금관의 '맏형'이라 불러도 무방하다.


높이 44.4cm, 지름 19cm의 금관총 금관은 국내에서 발견된 금관 중 제일 크고 화려한 것으로 신라 금관 양식을 대표하는 걸작으로 평가받고 있다.  
 

 

 

 

 

 

▲  외관은 원형의 머리띠 위에 山자 모양 3개가 연속적으로 이어져 있다. 외관의
뒤쪽에 사슴뿔 모양 장식 2개를 세웠다
문화재청
금관에 숨겨져 있는 '미스터리'

금관총 금관은 외관(外冠)과 내모(內帽)로 이루어져 있다. 얇은 금판으로 만들어진 외관은 형태가 독특하고 화려하다.
원형의 머리띠와 그 위로 솟아오르는 나뭇가지 모양에 뫼산(山) 자 3개를 붙여놓은 형태의 장식을 앞면과 좌·우 양측에 붙였다.


뒤쪽에는 사슴뿔 모양 장식 2개를 세웠다. 뿔에는 나뭇잎과 푸른 열매를 상징하는 굽은옥(曲玉)이 규칙적으로 매달려 있다.
세모꼴 모양의 내모는 금판에 구멍이 뚫린 고깔 모습을 하고 있다.
모자 앞쪽에 양 날개를 펼친 새 모양의 장식을 달았다.
이러한 장식들이 같고 있는 의미는 무엇일까.

   

 

 

 

  내모(內帽)는 얇은 금판에 구멍이 뚫린 세모꼴 형태의 모자로 앞쪽에 새가 양 날개를
펼친 모양의 장식을 꽂았다
문화재청

 




▲  내모 앞에 꽂은 새 날개 모양의 장식물
문화재청

 

명쾌하게 밝혀진 바는 없지만, 출(出) 자 모양 장식은 '천상과 지상'을 연결하는 나무를 형상화한 것으로 보고 있다. 사슴과 새 또한 하늘과 땅을 이어주는 메신저로 해석하고 있다.
금관에 달려있는 태아 모양의 비취색 곡옥은 '생명의 씨앗'을 상징하는 것으로 '부활'을 꿈꿨던 신라인의 염원이 담긴 것으로 볼 수 있다.


순금 함유량 85.4%. 세련된 디자인과 독특한 조형미. 푸른 곡옥(曲玉)이 달린 화려한 장식. 관테 양 옆으로 길게 늘어 뜨린 드리개. 금실에 매달린 달개들이 흔들리면서 사방으로 부서지는 황금빛은 찬란함의 극치를 보여준다.
저 화려한 금관의 주인은 누구였을까.
실제로 왕들이 사용했던 실용품일까 아니면 의례용품일까.

1500여 년 동안 어둠에 묻혀 있다가 세상에 나온 신라 금관은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신비로움과 함께 무한한 상상의 나래를 펼치게 한다.

'영원불멸'을 꿈꿨던 신라인들의 염원이 담긴 금관에는 아직도 풀어야 할 미스터리가 많이 숨겨져 있다.
 

 

 

 

▲  뒤쪽에는 사슴뿔 모양 장식 2개를 세웠다. 뿔에는 나뭇잎과 푸른 열매를 상징하는
굽은옥(曲玉)이 규칙적으로 매달려 있다 문화재청

 

주막 뒤뜰에서 나온 금관이 미국 은행으로 간 사연

약 천년 동안 한반도의 동남부 지역을 지배하며 화려한 문화·예술을 꽃피웠던 신라의 왕도 경주에는 "밭고랑에서 김매는 농부의 호미자루에도 보물이 걸려 나온다"라는 말이 있다.
도시 전체가 박물관이라 해도 무방할 정도로 유물이 많은 곳이다.


신라 금관의 맏형, 금관총 금관도 주막 확장 공사 중에 우연히 발견되었다.
지금으로부터 딱 100년 전인 1921년 9월 일제 강점기 시대. 경주시 노서리에서 주막을 운영하던 박문환씨는 장사가 잘 되자 뒤편 언덕배기를 헐어내고 주막 확장공사를 하고 있었다.

 

 

▲  발굴되기 전 금관총의 옛 모습  국립박물관
이때 주막 근처를 지나던 일본인 순사가 공사장 인근에서 아이들이 신기하게 생긴 구슬을 가지고 노는 것을 발견했다.
예사 물건이 아님을 직감한 순사는 즉각 상부에 보고했다.
공사는 중단되었고 조선총독부에서 고적 조사단이 내려왔다. 조사 결과 주막 뒤뜰 언덕은 신라 왕의 무덤으로 밝혀졌다.


고분에서는 금관과 금제 허리띠(국보 제88호), 금팔찌, 금동 신발, 귀걸이 등의 장신구로 치장한 유해와 함께 환두대도, 덩이쇠, 철도끼 등 유물이 쏟아져 나왔다.

일본인들이 주축이 된 조선총독부 고적조사위원회의 발굴은 아마추어 수준이었다. 전문가 한 사람 없이 진행된 조사는 발굴이라기보다는 도굴에 가까웠다.
비전문가들의 준비 없는 발굴은 4일 만에 끝났다.


세계적으로 유래가 없는 놀라운 발굴이었지만 그들은 눈에 보이는 유물들만 수습하고는 금관이 나왔다 하여 '금관총'이라 명명하고 무덤을 덮어 버렸다.
이렇게 세상에 나온 금관총 유물은 많은 수난을 당한다.



 

▲  금관총 금관과 함께 출토된 국보 제88호 금제 허리띠. 길이 109㎝ 과대에 늘어뜨린
장식인 요패는 17줄로 길게 늘어뜨리고 끝에 여러 가지 장식물을 달았다
문화재청
 

1927년 11월 경주박물관에 도둑이 들었다. 금제 허리띠와 유물들을 싹 쓸어 갔지만 금관은 무사했다.
도둑맞은 유물은 6개월 후 경찰서장의 관사 앞에서 발견됐다. 사람들은 일본인 서장이 범인일 거라고 수군거렸다.
1956년에 또다시 도둑이 들었으나 다행히 진품이 아닌 모조품 금관을 훔쳐갔다.


이렇게 살아남은 금관총 금관은 6・25 전쟁이 터지자 또다시 위기에 처한다.
북한군의 남하로 국립중앙박물관 서울 본관과 부여 분관 등 주요 박물관이 북한군 치하로 넘어갔다.

이에 위기감을 느낀 이승만 정부에서는 경주 분관의 주요 문화재라도 지키기 위해 금관총 금관과 금제 허리띠 등 140여 점을 급하게 미국 은행으로 피신시켰다.
미국으로 건너간 금관은 미국은행(Bank of America) 샌프란시스코 지점에 보관됐다.


전쟁이 끝나고 금관총 유물은 '마스터피시스 오브 코리안 아트(Masterpieces of Korean Art)'라는 전시회로 미국 대도시를 돌며 한국 문화의 우수성을 널리 알린 후 무사히 돌아왔다.
고향으로 돌아온 금관은 국립경주박물관에서 찬란했던 신라 천년, '황금의 역사'를 증언하고 있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격월간 문화잡지 <대동문화>123호(2021년 3,4월호)에도 실릴 예정입니다.

 

 

 

능산리 고분을 비롯한 능산리사지, 나성 등이 함께 어우러져 있었던 백제왕릉원 전경.
왼쪽 넓은 터가 능산리사지 터고 오른쪽 위에 보이는 고분이 능산리 고분군이다.

 

 

 

 

능산리고분 출토 유물인 금동방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