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태우 기자
6·25때 한은이 北에 뺏긴 금괴, 대구 동화사 뒤뜰에 묻혔다?
북한 인민군 한국은행 금고 들어가
미국 '승산 없다' 한반도 철수 준비
마오쩌둥 맏아들 미군 폭격에 전사
아이젠하워 "내 아들 후방으로 빼라"
1950년 6월 25일 새벽 파죽지세로 밀고 내려오는 북한 인민군 앞에 피란을 떠나기 바빴다.
한국은행 지하 금고에 보관하던 금 1.3tㆍ은 18.5tㆍ화폐 40억원은 어디로 사라졌을까.
1129일 동안 계속됐던 전쟁에는 숨겨진 이야기가 꽤 많다.
그해 여름 인민군이 서울에 들이닥치는 건 시간문제였다.
소련제 T-34 전차를 앞세운 기습 남침을 막아내는 게 버겁던 상황이었다.
게다가 38선에서 서울까지 거리는 불과 50㎞, 너무 가까웠다.
한국은행 금괴 수송에는 미군 GMC 트럭이 투입됐다. 2차세계대전 이후 1960년대
까지 쓰였던 대표적인 군용 차량이다. 6ㆍ25 전쟁 당시 한국군도 운용했다. 2차세계
대전 당시 작전 중인 차량. 중앙포토
개전 이틀만인 27일 새벽 2시 이승만 대통령은 대전행 특별 열차를 타고 서울에서 황급히 빠져나갔다. 이어 새벽 4시에 열린 비상 국무회의에서 정부는 수도를 수원으로 옮긴다고 의결했다.
한국은행도 금괴를 당장 후방으로 옮겨야 할 상황인데 방법이 없었다.
이미 모든 차량은 징발돼 이동 수단이 없어 은밀하고 신속한 수송이 불가능했다.
서울에 진입한 북한 인민군 [중앙포토]
결국 군에서 나섰다. 신성모 국방부 장관은 송요찬 헌병사령관에게 수송 작전을 지시했다.
27일 오후 2시 현금과 금·은괴 등 약 4t 분량을 89개 상자에 포장해 군 트럭 2대에 실어 대전 임시청사로 출발했다. 헌병 1개 소대가 호위를 맡았다.
정부는 28일 새벽 2시 30분경 한강철교와 인도교를 폭파했다.
금괴는 이날 오후 2시 대전역에서 피란민 열차로 위장한 뒤 다음날 오후 4시 진해 해군통제사령부에 무사히 도착했다.
금괴 수송 작전은 이처럼 극적으로 이뤄졌다.
열차에 올라 후방으로 떠나는 피란민 [중앙포토]
하지만 인민군은 벌써 27일 저녁 서울 외곽에 도착했고 다음 날 새벽 서울 시내로 전차가 진입했다.
금고에 보관하던 모든 재산을 꺼내지 못한 상황에서다.
한국은행에 남아 있던 금괴 0.2t과 은 16t은 그렇게 빼앗겼다.
인민군은 7월 20일 대전마저 점령하고 이내 대구를 지나 낙동강으로 향했다.
이대로 전쟁이 끝날 위기다.
이에 정부는 금괴를 8월 1일 진해에서 부산으로 옮긴 뒤 미국 연방준비은행으로 보내 기탁했다.
‘보물찾기’ 사라진 금괴가 사찰 뒤뜰에?
북한이 빼앗은 금괴는 어디로 갔을까.
2008년 탈북해 한국에 정착한 김 모 씨가 2011년 12월 대구 팔공산에 위치한 동화사 대웅전(보물 제1563호) 뒤뜰에 묻힌 금괴 40㎏을 꺼내겠다고 나섰다.
그는 전쟁 당시 양아버지가 피란 중 이곳에 금괴를 숨겨 둔 뒤 북한으로 올라왔다고 주장했다.
문화재청은 조건부 발굴 허가를 냈다.
하지만 동화사는 명확한 근거와 책임을 요구했다.
대구 팔공산에 위치한 동화사 대웅전 뒤뜰 [중앙포토]
한국은행은 “발굴할 때 참관하겠다”는 입장도 밝혔다.
국가정보원과 경찰도 발굴 논의에 합류했다.
탈북자 사회에선 인민군이던 김 씨의 양아버지가 한국은행에 남겨진 금괴를 옮기던 중 빼돌려 숨겼다는 주장도 나왔다.
주장이 엇갈리면서 발굴 허가는 취소됐다.
하지만 뒤뜰 콘크리트 바닥 1.2m 아래에 금괴가 묻혀있다는 ‘보물찾기’ 소문은 여전하다.
대웅전 주변은 폐쇄회로(CCTV) 감시 장치가 24시간 지켜보고 있다.
한반도 탈출 망명정부 비밀 계획
이처럼 금괴를 미국으로 보낼 정도로 급박했다.
이때 은밀하게 망명 정부 설치 논의도 나왔다.
미국은 승산이 없다고 판단했다.
당시 논의하던 인천상륙작전도 실패 가능성을 더 크게 봤다.
6·25 전쟁 직후 포로교환 모습으로 1953년 포로교환 과정에서 이승만 대통령
(앞줄 가운데)과 밴플리트 장군(앞줄 왼쪽)의 모습. [육군 제공]
미국은 9월 인민군이 영천까지 내려오자 ‘New Korea’ 계획을 검토했다. 한국 정부 요인과 군대 등 62만명을 한반도에서 탈출시켜 미국령 사모아 제도에 재배치한다는 계획이다.
한국의 반발을 우려해 비빌로 은밀하게 구상했다.
9월 8일 이 대통령은 미 정부의 철수 계획을 처음 알게 됐고 크게 격노했다.
전쟁에서 절대 물러서지 않겠다는 의지를 미국에 전달했다.
‘필사즉생 필생즉사(必死則生 必生則死)’ 1597년 명랑해전을 앞두고 이순신 장군이 했던 말이다.
인민군을 상대로 죽기로 싸웠던 때문일까. 마침 영천전투에서 승리하면서 철수 계획은 없던 일이 됐다.
1950년 9월 인천상륙작전 이후 서울 도심에서 저항하던 북한 인민군을 생포한
모습. 사진 Wikipedia
김일성은 훗날 영천에서의 패배가 전쟁의 승패를 바꿨다며 크게 후회했다고 한다. 개
전 석 달 만에 부산을 점령하고 전쟁을 끝내려던 계획은 물거품이 됐다
. 미군을 위시한 유엔군과 중공군이 본격으로 참전하며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됐다.
미ㆍ중 국가원수 아들, 6ㆍ25전쟁 참전
6ㆍ25 전쟁에는 중국 국가 주석 마오쩌둥의 아들 마오안잉(毛岸英)과 미국 대통령 드와이트 아이젠하워의 아들 존 아이젠하워도 참전했다.
하지만 두 아들의 운명은 같은 듯하면서도 다소 달랐다.
인천상륙작전 직후 마오쩌둥은 “내 아들을 보내지 않으면 누가 전쟁터에 간단 말이냐”며 맏아들을 전장으로 보냈다.
마오안잉은 후방지역에 배치됐지만, 참전 한 달여 만인 11월 25일 평안북도에서 미 공군 B-26 폭격기 네이팜탄 공격에 전사했다.
지난 2018년 7월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정전협정 체결 65주년을 맞아 6·25 전쟁
중 전사한 마오쩌둥 장남 마오안잉 묘를 찾아 헌화하고 있다. 사진 노동신문
마오쩌둥은 이듬해 1월에서야 사망 소식을 알게 됐다.
그 누구도 “잘 있냐”며 마오쩌둥이 먼저 묻기 전에 맏아들이 죽었다는 보고를 못 했다.
마오쩌둥은 며느리 부탁에도 불구하고 “특별대우를 할 수 없다”며 시신을 북한에 남겨두기로 했다.
마모안잉 유해는 지금도 다른 중공군 전사자와 함께 평안북도 회창군 중국인민지원군 총사령부 열사릉원에 묻혀있다.
마오 “특별대우 없다”, 아이젠하워 “후방으로 빼라”
마오인잉이 전사한 지 2년 뒤, 1952년 12월 차기 미국 대통령으로 당선된 드와이트 아이젠하워(Dwight D. Eisenhower)가 한국에 도착했다.
그는 현장 시찰에서 “내 둘째 아들을 후방으로 빼달라”고 요구했다.
1952년 12월 4일 서울 근교에서 전투 중인 제3보병사단 15연대 사병들과 식사
중인 아이젠하워 대통령 당선인(맨 왼쪽). 사진 아이젠하워기념관
아이젠하워는 막역한 후배인 제임스 밴 플리트 미 8군 사령관에서 “내 아들 존, 지금 어디에 있냐?”며 물었고, 밴 플리트는 “존 소령은 3사단 예하 대대장으로 중부전선 최전선에서 있다”고 답했다.
이때 아이젠하워가 후방으로 재배치해달라는 부탁을 꺼냈다.
아이젠하워의 첫째 아들은 어려서 사망했기에 존 소령은 사실상 외아들이다. 그런데도 공과 사를 구분해야 하는 벤 플리트 사령관 입장에선 난처한 요구다.
1951년 6ㆍ25전쟁에 투입된 미 공군 B-26C 폭격기. 사진 미 공군
게다가 밴 플리트의 외아들 제임스 밴 플리트 주니어는 앞서 그해 4월 4일 B-26 폭격기 조종사로 참전 중 북한 순천 지역에서 실종됐다.
3월 14일 한국에 도착한 뒤 겨우 보름 만이다. 그는 2년 뒤 전사자로 처리됐다.
아이젠하워는 “아들이 전사한다면 나는 가문의 영예로 받아들이겠다”면서도 “대통령의 자식이 포로가 돼 작전에 차질을 주는 일이 없도록 최소한의 예방 조치만 요청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1952년 북한 지역을 폭격하는 미 공군 B-26 폭격기. 사진 미 공군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연합군 최고사령관이었던 아이젠하워는 한 수 앞을 내다본 것이다. 존 소령은 후방 정보처로 이동했고 전쟁 뒤 준장으로 군 생활을 마쳤다. 이후 벨기에 주재 미 대사를 지냈다.
최근 중국에선 마모안잉을 두고 논란이 뜨겁다. 그는 계란볶음밥을 만들다 폭격을 당해 최후를 맞았다고 알려져 있다. 미군 공습을 피해 방공호에 숨어있다 뒤늦게 밖으로 나와 아침을 준비하던 순간이다.
올해 공산당 창당 100주년 앞둔 중국 정부는 이게 못마땅한 것 같다.
방공호 안에서 작전 중 전사했다는 주장을 새로 꺼내며 ‘역사 재포장’에 나섰다. 전쟁 영웅으로 칭송하는 중국 국부의 아들이 밥 먹다 미군 공습에 전사한 게 창피하다는 얘기다. 중국은 무엇이 부끄러운 것인지 잘 모르는 것 같다.
박용한 기자 park.yongha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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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괴 2톤 매장설. 150조 보물선 인양서....이확천금 시미가 부붙인 헛소동
■ 역대 금괴 인양·발굴 사건들
익산 금괴 매장 소문에 市 “근거없는 낭설”…
9년전 대구 동화사 금괴설로 소동 일으킨 탈북민 또 등장
‘돈스코이호 인양 사기’ 거액 챙긴 일당 줄줄이 징역형…
2012년 군산 시마마루호, 金 아닌 중국 주화만 4t 발굴
지난 8일 전북 익산시에서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 농장주가 묻어 놓고 간 2t의 금괴를 발굴한다는 소문이 퍼지며 한바탕 소동이 벌어졌다. 무려 1400억 원대에 달하는 금괴라는 얘기가 돌았다.
1945년 일제 패망 후 이곳에 살던 오하시 요이치(大橋與市)라는 일본인 농장주가 자산을 처분해 모아온 대량의 금괴를 농장 터 깊숙한 곳에 묻어 놓고 일본으로 돌아갔는데 그 일본인 손자로부터 매장된 금괴를 비밀리에 발굴해 달라는 의뢰를 받았다는 탈북민 김모 씨가 행정 절차를 밟는 등 동분서주하고 있다는 그럴듯한 소문까지 덧붙여졌다.
최근 방영 중인 드라마 ‘빈센조’와 얘기가 비슷하다.
김 씨는 지난 2012년 대구 동화사 대웅전 뒤뜰에 40㎏의 금괴가 묻혀 있다며 발굴 소동을 빚은 탈북민과 동일 인물이다.
하지만 이 소동은 ‘가짜 뉴스’로 판명 났다. 금괴 매장 유무를 떠나 발굴에 나선 주체가 없고 경찰이 ‘사기 주의보’를 알리기 위해 소문을 파악하는 과정에서 나온 해프닝으로 밝혀졌다.
익산시 대교(大橋)농장 금괴 매장설과 대구 동화사 대웅전 금괴 발굴 소동, 러시아 군함 돈스코이 보물선 발굴 주가 조작 사건, 전북 군산 앞바다 보물선 사건 등을 보면, 대부분 거액을 노린 투자 사기, 금괴 인양·발굴을 빌미로 주변인들에게 투자금을 받아 가로챈 형사사건으로 마무리돼 씁쓸한 뒷맛을 남겼다.
특히 경제가 어려워지고 사회가 불안해지면 일종의 ‘일확천금’ 심리가 작용해 나타나는 사회적 현상으로 풀이된다.
◇익산 대교농장 2t 금괴 매장설의 전말 =
금괴가 매장돼 있다는 곳은 익산시 주현동 105-27번지 옛 대교농장 터다.
일본인 오하시의 오하시(大橋)농장에 소속된 사무실로 건축면적 41.32㎡, 연면적 75.2㎡다.
1948년 익산 화교(華僑)협회가 부지를 매입한 후 학교로 운영해 왔으며 2000년대 초반부터는 이 학교가 폐교되면서 방치되던 곳이다.
지난 8일, 금괴가 매장돼 있다는 소문을 다룬 지역 언론 보도가 사실 여부를 따질 겨를도 없이 중앙 언론과 통신사까지 가세하며 전국망을 타고 퍼져 나갔다.
2t 무게의 금괴 발굴 움직임을 포착한 경찰이 사기나 강력 사건 발생 우려 등 긴급 상황 관리에 나섰다는 소식까지 더해졌다. 사실관계 확인에 나선 익산시청과 경찰서는 하루 만에 근거 없는 잘못된 ‘정보 유통’이 낳은 ‘가짜 뉴스’로 판단했다.
구체적인 정황도 없이 탈북민끼리 주고받은 대화 내용이 지역 주민들 사이 구전으로 전해지며 벌어진 ‘해프닝’으로 결론 냈다.
익산시 관계자는 “문화재 관련 부서도, 탈북민 관리 기관도, 지역 주민도 2t 금괴의 실체는 물론 발굴 관련 움직임 등 소문의 근원지조차 확인할 수 없었다”며 “현재 소문으로 떠도는 대교농장 금괴 매장설에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고 있으며, 근거가 희박한 ‘낭설’이라는 것이 공식 입장”이라고 밝혔다.
◇대구 동화사 대웅전 뒤뜰 금괴 발굴 소동 =
2012년 동화사 대웅전 뒤뜰에 금괴가 묻혀 있다며 한바탕 발굴 소동이 벌어졌다. 2008년 12월 탈북한 김 씨가 월북한 남한 출신의 양아버지에게서 ‘6·25전쟁 당시 기름종이에 싼 40㎏의 금괴를 철모에 넣어 동화사 대웅전 뒤편 기단 부근에 묻었다’는 말을 듣고 발굴을 추진했다며 빚은 ‘소동’이었다.
김 씨는 2012년 2월 처음 국가문화재로 등록된 동화사 대웅전 뒤뜰에 대해 지표투과레이더(GPR)와 자력탐사 등을 통해 지하 이상대(異常帶·물리탐사 자료 해석 결과 이상이 나타나는 곳)를 파악했고, 깊이 1.2~1.7m 지점에 금속성 물질이 매장된 것을 확인했다며 문화재청에 굴착 허가를 요청했다.
문화재청도 당시 금괴 굴착을 위해 김 씨가 낸 국가지정문화재 현상변경 허가 신청 사항에 전문가 입회와 출토물 안전사고 대책 등 조건부 허가를 내줬다.
그러나 김 씨는 기본 조건부 요건조차 이행하지 못하고 발굴이 무산되며 흐지부지됐다.
◇러시아 군함 ‘돈스코이호’ 인양 사기 사건 =
울릉도 근해를 항해하다 침몰한 러시아 군함 돈스코이호 사건은 해저 보물선 발굴을 미끼로 한 전형적인 투자 사기였다.
지난 2018년 한 기업이 150조 원 규모의 금괴가 실린 돈스코이호를 울릉도 인근에서 발견해 금괴를 인양하려 한다며 금괴 인양을 전제로 발행된 암호화폐를 사면 금괴 인양으로 얻은 수익금을 받을 수 있다고 투자자를 끌어모았다.
‘보물선 테마주’라는 미명 아래 발굴에 나선 관련 기업들의 주식도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주가 조작과 함께 법망을 피해 회사명까지 바꿔가며 거액을 챙긴 일당은 결국 줄줄이 법정에 섰다.
돈스코이호는 1905년 러일전쟁 당시 일본군 공격을 받고 침몰했으며 현재 가치로 150조 원가량의 금화와 금괴가 실려 있다는 소문이 나돌았지만 지금까지 사실 확인이 되지 않고 있다.
◇군산 앞바다 금괴 실은 일본 보물선 인양설 =
군산 앞바다에 침몰한 일본 금괴 운반선 인양 소동은 2000년 이후 2차례 있었다.
투자금 7억 원을 갈취한 쾌창호 사기 사건(2002년)과 근대 중화민국과 홍콩의 주화 4068㎏을 인양한 시마마루 12호(2012년) 소동이다.
군산경찰서는 2002년 당시 보물선 발굴작업을 미끼로 동업자로부터 7억여 원을 받아 가로챈 혐의(사기)로 발굴작업을 주도한 조모(당시 44세) 씨를 붙잡아 구속했다.
2000년 11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금괴를 싣고 가다 군산 앞바다에서 침몰한 것으로 알려진 쾌창호를 인양하면 금괴의 지분 17%를 주겠다”고 속여 투자자 최모 씨로부터 7억 원을 받아 가로챈 혐의다.
당시 조 씨는 쾌창호의 위치를 파악하지도 못한 상태였다.
“침몰한 배에는 1조3000억 원 상당의 금괴와 은괴가 실려 있는데, 발굴작업이 90% 진척돼 조만간 인양할 것”이라고 속였다.
쾌창호 사건이 발생한 뒤 10년이 지난 2012년 금괴를 싣고 일본으로 향하다 침몰한 보물선 인양 소동이 또 일어났다.
해방 직전 보물을 싣고 가다 군산시 고군산군도 해역에서 침몰한 것으로 알려진 235t급 일본 화물선 시마마루 12호 소동이다.
최첨단 장비를 동원한 인양팀은 군산시 옥도면 선유도리 일대의 바다 밑바닥을 뒤지다 그해 5월 해저 15m 모래에 묻혀 있던 침몰선을 찾아냈다.
침몰선에선 4t가량의 중국 주화 등이 인양됐다.
당시 금괴로 추정되는 대형 상자의 위치가 확인됐다는 소문도 파다했지만 결국 ‘노다지’를 찾지 못하고 허망하게 뱃머리를 돌려야 했다.
전주 = 박팔령 기자 park80@munhwa.com
사진=조선DB
금괴, 보물선, 구권화폐, 대통령비자금... 역대 황당무계 사기 사건들
논란의 돈스코이호 사태를 계기로 본 '괴소문 사기들
최근 러시아 보물선 '돈스코이호'를 발견했다는 모 기업의 주장이 논란을 일으키고 있다.
이 기업은 돈스코이호 내부에 150조 원 상당의 금화, 금괴가 있다며 인양 비용 마련을 위해 가상화폐를 찍어내 투자자를 모집했다.
소유권 논란, 가치의 비현실성 등 의혹이 커지자 회사는 지난주 기자회견을 열어 "우리도 보물선의 가치가 정확히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없다"고 번복했다.
경찰은 현재 '투자 사기'라는 지적이 빗발침에 따라 관련 수사에 돌입한 상태다.
이 사건의 진상을 파악하려면 아직 시간이 더 필요하다. 하지만 이와 유사한 수법의 사기 사건은 그동안 많았다. 괴소문을 퍼뜨리거나 비밀자금이 있다는 말로 투자자를 속여 돈을 챙겨온 것이다.
소설 같은 이 미끼에 걸려든 피해자들은 일반 직장인부터 전문직까지 다양했다.
2015년 10월 붙잡힌 한 사기단은 자신을 청와대 소속 비밀자금 관리요원이라고 소개, 피해자들에게 총 37억 원을 받아 챙겼다.
조직원 김모씨는 2012년 50대 사업가에게 접근, "금괴 60개를 대신 매입해 주겠다"고 속여 돈을 편취했다.
김씨는 "(우리는) 일제시대 때 일본인들이 국내에 두고 간 자금과 역대 정권의 해외 비자금을 관리한다"며 "엄청난 보물과 현금, 금괴가 있다"고 속였다.
전과 37범인 또 다른 조직원 김씨는 피해자들에게 "나는 전직 대통령의 숨겨진 아들"이라는 말까지 했다.
이들에게 당한 사람 중에는 사업가부터 대학교수, 대기업 임원, 회계사, 외국인까지 있었다.
같은 해 9월에 붙잡힌 한 사기단은 구권화폐를 미끼로 걸었다.
군사정권 시절 대통령이 조성한 비자금이 구권으로 남아 있는데, 구권 비자금을 바꾸려면 '300억 원이 입금된 계좌를 빌려야 한다'며 피해자를 꼬드겼다.
사기단은 허술해 보이지 않도록 정부요원, 비자금 보관 창고 대리인, 약정서 작성자 등 역할을 분담해 피해자를 철저히 속였다.
앞서 한 사기범이 '대통령 아들'을 운운했던 것처럼, 유력 인사를 사칭하는 경우도 많았다.
1957년에는 자신을 당시 이승만 대통령의 양아들이자 이기붕 국회의장의 친아들인 이강석이라고 밝힌 인물이 경주경찰서로 찾아왔다.
깜빡 속은 서장은 그를 관광까지 시켜주며 극진히 대접했다. 3일 만에 정체가 탄로난 인물은 그 자리에서 체포됐다.
2003년에는 40대 중고차 딜러가 당시 유인태 청와대 정무수석을 사칭해 손길승 SK 회장에게 돈을 요구하려다 체포됐다.
이듬해에는 전직 증권사 직원이 당시 김우식 청와대 비서실장을 사칭하기도 했다.
재계 인사들에게 축의금을 계좌로 받으려다 적발됐다.
'보물선 신화'는 대형 사기의 단골 소재다.
고려시대 값진 유물을 싣고 가다 침몰한 배, 금은보화를 싣고 가다 가라앉은 서양 선박 등이 대표적이다.
사진=영화 '캐리비안의 해적' 스틸컷
1969년에는 전북 옥구군 내초도 부근에서 두 사람이 "마을 앞바다에 380억 원(현 1조 8000억 원 수준)어치의 금덩이가 실린 옛 일본 선박이 가라앉아 있다"며 인양을 신청했다.
석 달 넘게 수색이 이어졌지만 보물선은 없었다.
1980년대에도 보물선 소동이 일었다.
그즈음 전남 신안 해저에서 유물들이 발굴되거나, 일본의 한 부호가 나가사키 앞바다에서 러시아 선박을 인양해 170여㎏의 백금을 건져올린 뉴스들로 환상이 더 커졌다.
실제 1981년 충남 태안 안흥항 앞바다에 보물선이 있다는 소문이 퍼졌다.
일부 언론은 사실이라며 오보를 냈기도 했지만, 정부 당국은 한 달 만에 '괴소문'으로 판단했다.
1999년에는 한 50대 남성이 경남 거제 앞바다에 보물선이 있다며 "(내가) 일제시대 때 일본군 통역으로 일한 선친에게 들은 이야기"라고 소문을 퍼뜨렸다.
이에 주민들은 "동네에서 수십 년 동안 들은 이야기"라며 "그 소문을 믿고 바닷속을 헤집다가 가산을 탕진한 사람이 한둘이 아니다"라고 일축했다.
같은 해 모 기업은 "쥐꼬리만 한 은행 이자 모아서 언제 돈 모으는가"라며 군산 앞바다에 묻힌 보물선 인양에 투자하라고 사람들을 속여 1140명에게 총 172억 원을 뜯어내기도 했다.
글=신승민 월간조선 기자
입력 : 2018.07.30 2021년 6워27일 재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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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북 칠곡 송림사 대웅전 전경. 문화재청 제공
대구 동화사 극락전 전경.
대구 동화사 수마제전 전경.
칠곡 송림사 대웅전, 대구 동화사 극락전. 수마제전 보물된다
문화재청 지정 예고… 경북 팔봉산 주변 불전 3건
“17~18세기 지역 특색 살린 불교건축물로서 가치 높아”
경북 팔공산 주변의 불교 건축물 3건이 보물이 된다.
문화재청(청장 김현모)은 25일 칠곡 송림사 대웅전(漆谷 松林寺 大雄殿), 대구 동화사 극락전(大邱 桐華寺 極樂殿)과 수마제전(須摩提殿) 등 3건을 국가지정문화재 보물로 지정 예고했다.
칠곡 송림사의 주불전인 대웅전은 임진왜란의 전란을 겪은 후 1649년에 중수됐다.
이후 1755년, 1850년 두 차례의 중수를 거쳐 현재 모습으로 남아 있다.
정면 5칸, 옆면 3칸 규모이다.
17세기 이후 재건한 불전이 정면 3칸, 옆면 2칸을 채택했던 추세와 달리 이전의 규모를 지키고 있다.
평면 규모뿐 아니라 실내구성에서도 당대 흐름인 중앙에 대형 불단을 설치하고 후불벽을 두어 예불공간을 확장시키는 방식을 따르지 않고 옛 방식을 취하고 있다.
공포의 짜임은 비교적 시기가 올라가는 교두형(끝을 각지게 깎아 낸 모양의 형식) 공포로 짰다.
이런 유형의 공포는 팔공산 일대 사찰 등에서 집중적으로 나타나는 지역 특색이다.
17세기 중엽 중수된 이후 18세기 말, 19세기 중엽 두 차례의 중수를 거치면서 주칸의 크기를 재조정하고 외관이 달라지는 수준의 큰 변모가 일어났다.
그런데도 팔공산 일대 사찰건축의 특징이 반영된 옛 부재를 최대한 재사용하여 역사성을 잘 계승하고 있다는 것이 문화재청 설명이다.
대구 동화사 극락전은 1600년(선조 33년)에 중건을 시작했다.
그중 사찰의 본당인 금당(金堂)을 제일 먼저 건립했는데 지금의 극락전으로 판단된다.
이후 문헌 기록을 통해 1622년에 중창됐음을 확인했다.
임진왜란 이후에 재건된 조선후기 불전 중에서는 건립 시기가 빠른 편에 속한다.
처마와 창호, 단청 등에서 일제강점기 이후의 변화가 확인되지만, 전체적인 구조와 의장은 건립 당시의 상태를 잘 유지하고 있다.
또한, 통일신라 당시 창건 당시의 위치, 기단과 초석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상부에 17세기 전반의 목조건축을 세워 현재까지 전하고 있다.
기둥을 줄이거나 뒤를 물리는 일 없이 동일한 기둥 간격의 평면을 구성하고 있으며, 마룻바닥 하부에 네모난 벽돌인 방전(方塼)이 깔려 있는 등 옛 기법이 많이 남아 있다.
극락전의 공포는 미세한 첨차 길이의 조정을 통해 공포와 공포의 간격을 일정한 비례로 구성하고 있다. 추녀와 선자연이 걸리는 모서리 부분 퇴칸의 공포에 병첨(다포계의 공포에서 귀공포와 옆의 공포가 서로 맞닿아지는 각각의 첨차를 하나의 부재로 연결한 첨차)을 사용하는 방식에서 이 건물을 조영한 목수의 탁월한 실력을 엿볼 수 있다.
이러한 기법은 17~18세기 팔공산을 중심으로 영남지역에 집중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특정 지역에서 활동했던 기술자 집단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어 학술적으로도 매우 가치가 높다.
동화사 수마제전은 극락전의 뒤쪽에 있으면서 고금당(古金堂)이라고 전한다.
1465년(세종 11년)에 건립되었고, 임진왜란 뒤 1702년(숙종 28년)에 중창되었다는 기록이 전한다.
현재의 건물도 17세기 이후의 기법과 옛 기법이 공존하고 있다.
사방 1칸 규모로, 다포식 공포를 가지며 맞배지붕으로 된 불전이다.
이처럼 사방 1칸의 다포계 맞배지붕 불전은 현재 국내에서 수마제전이 유일하다.
이전에 다포계 팔작지붕 건물이었던 것을 해체해 일부 부재를 재사용해 다시 지으면서 지붕형태가 변경되었을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수마제전의 공포 의장은 극락전과 마찬가지로 교두형으로 돼 있다.
이런 공포 의장 기법은 앞서 살핀 송림사 대웅전, 동화사 극락전 등과 함께 17~18세기에 걸쳐 팔공산을 중심으로 한 지역 특징을 보여준다.
지붕가구는 중도리를 사용하여 마치 오량가 구조처럼 보인다.
실제는 중도리 없이 하나의 서까래만 걸친 삼량가의 독특한 방식으로 되어있다.
이런 지붕가구 기법은 다른 문화재에서는 볼 수 없는 것으로 전통 목조건축 지붕가구 기법의 다양성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라 평가할 수 있다.
문화재청은 “이들 3건의 문화재는 17~18세기에 걸쳐 팔공산을 중심으로 영남지역에서 집중적으로 나타나는 지역적 특성을 보여주는 불교 건축물”이라며 “역사, 학술적 조형예술적 측면에서 국가지정문화재로 승격하여 보존할 만한 가치가 충분한 것으로 판단했다”고 밝혔다.
이번에 예고한 3건에 대하여 30일간 의견을 수렴해 검토하고, 문화재위원회 심의 절차를 거쳐 국가지정문화재 보물로 지정할 예정이다.
장재선 선임기자
대구 동화사 수마제전. 문화재청 제공
원문보기:
https://www.khan.co.kr/culture/scholarship-heritage/article/202105251103001#csidx3c3e74830c4c310bb5681d100c809a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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