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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漢詩

한시(漢詩)와 술


 

 

 


 

한시(漢詩)와 술

 

“술 한 잔에 시 한 수(一觴一詠).”

 

난정집(蘭亭集) 서문에서 왕희지(王羲之)가 말한 것처럼 내로라하는 중국 시인들은 대부분 애주가였다. 고대 중국의 민요를 모은 시경(詩經)에 실린 시 305수 가운데 술과 관련된 시는 50수. 여섯 수 중 한 수꼴이다. 당(唐)대의 현존하는 한시 5만여 편 가운데 술을 소재로 한 주시(酒詩)의 비율은 10%다.

애주가로 유명한 이백(李白)은 자신이 지은 1500여 수 가운데 11.3%인 170수나 됐다. 두보(杜甫)는 더했다.

1400수 가운데 300수로 21.4%에 이른다. 도연명(陶淵明)과 송(宋)대의 여류시인 이청조(李淸照)도 각각 50수를 넘는다. 한시(漢詩) 속에 나타난 술 이야기를 살펴본다.

 

20세기 중국 화단의 대가 장다첸(張大千:1899~1983년)이 남송(南宋)의 화가 양해(梁楷)의 작품 ‘이백행음도(李白行吟圖)’를 보고 그린 작품이다. 장다첸은 지난해 전 세계 경매 총액 5억 달러(약 5600억원)를 기록했다.

 

 

‘달 아래 혼자 마시는 술(月下獨酌)’을 지은 이백은 애주가였다.

“이백은 한 말의 술에 시 백 편을 짓고, 장안의 저잣거리 술집에서 잠을 자네. 천자가 불러도 배에 오르지 않고, 스스로 술 취한 신선이라 부르네(李白斗酒詩百篇, 長安市上酒家眠. 天子呼來不上船, 自稱臣是酒中仙)”라고

두보는 ‘음주팔선인(飮酒八仙人)’에서 노래했다. 이 시의 배경에는 이백과 당 현종이 등장한다.

당 현종이 궁궐 뜰에 모란이 피자 양귀비의 손을 잡고 산책을 했다. 궁중음악가 이구년(李龜年)이 옆에서 노래를 부르며 흥을 돋웠다. 현종은 늘 듣던 곡이라며 싫증을 냈다. “한림학사 이백을 불러 새로운 노래를 만들게 하라”고 지시했다. 측근인 환관 고역사(高力士)가 한림원(翰林院)으로 사람을 보내 이백을 찾았지만 행방이 묘연했다. 장안(長安)성 전역에 비상이 걸렸다. 이백은 낮부터 술집에서 대취해 자고 있었다. 관리가 이백을 깨웠지만 여전히 인사불성이었다. 궁궐로 끌려온 이백을 본 현종은 그를 쉬게 한 뒤 직접 해장국까지 떠먹였다. 이백은 그제야 잠에서 깼다. 황제가 노래를 새로 지어 달라고 하자 이백은 “신은 한 말의 술로 시 백 편을 쓰고, 취한 뒤 시흥이 샘물과 같다”며 술부터 요청했다. 마지못해 현종이 술을 내렸다. 양귀비를 찬미해

“모란꽃과 경국지색 서로 반기니, 임금은 미소 짓고 바라보네(名花傾國兩相歡, 長得君王帶笑看)”라는

‘청평조(淸平調)’ 세 수가 이때의 작품이다.

한때 이백의 술친구였던 두보 역시 주당이었다. 궈모뤄(郭沫若)는 저서 이백과 두보에서 “술 취한 이백이 강물 위에 비친 달을 건지려다 죽었다는 전설은 거짓이지만 두보가 상한 쇠고기를 먹은 뒤 술을 마셔 독이 빨리 퍼져 죽은 것은 사실”이라고 주장했다. ‘민중시인’으로 불리는 두보이지만 그는 관복을 저당 잡히고 도처에 외상 술값이 널려 있을 정도로 애주가였다.

조정서 돌아오면 날마다 봄옷을 저당 잡혀(朝回日日典春衣)
매일 강가에서 만취해 돌아온다(每日江頭盡醉歸)
외상 술값은 가는 곳마다 있고(酒債尋常行處有)
인생 칠십은 예로부터 드물다네(人生七十古來稀)

(두보, ‘곡강(曲江)’)

취음선생(醉吟先生)으로 불린 백거이(白居易)는 대략 2800여 수의 시 중에서 800여 수의 음주시를 남겼다. 그에게는 친구가 셋 있었으니 술과 시, 거문고였다.

 

“오늘 북창 아래에서(今日北窓下),

무엇 하느냐고 스스로 묻네(自問何所爲).

기쁘게도 세 친구를 얻었는데(欣然得三友),

세 친구는 누구인가(三友者爲誰)

거문고를 뜯다가 술을 마시고(琴罷輒擧酒),

술을 마시다 문득 시를 읊으며(酒罷輒吟詩).

세 친구가 번갈아 이어받으니(三友遞相引),

돌고 돎이 끝이 없구나(循環無已時).”

(백거이, ‘북창삼우(北窓三友)’)

주시(酒詩)는 난세에 더욱 유행했다. 당에 앞서 위진남북조 시대에는 죽림칠현(竹林七賢)과 풍류시인의 전성기였다. 도연명은 술을 마시기 위해 관직에 나갔다고 토로할 정도였다.

 

“팽택은 집에서 백 리쯤 되고, 공전(公田)의 수확으로 족히 술을 빚어 마실 수 있어 팽택의 지방관직을 얻었다(彭澤去家百里, 公田之利, 足以爲酒, 故便求之).”(도연명, ‘귀거래사(歸去來辭)’)

 

그는 ‘음주(飮酒)’라는 20수 연작시에서 술을 ‘망우물(忘憂物·근심을 잊게 하는 물건)’이라고 명명했다. 또 “잔 하나로 홀로 마시다 취하니, 빈 술단지와 더불어 쓰러진다(一觴雖獨進, 杯盡壺自傾)”고 노래했다. 술 취해 쓰러진 자신을 넘어진 술병에 빗대 노래한 것이다. 절묘한 표현이다.

그가 ‘술을 끊으며(止酒)’라는 시에 밝힌 음주의 변이 흥미롭다.

 

“평생 술을 끊지 않은 것은(平生不止酒),

술을 끊으면 즐거움이 없기 때문이고(止酒情無喜),

저녁 무렵 끊으면 잠을 이룰 수 없고(暮止不安寢),

새벽에 끊으면 자리에서 일어날 수가 없음이라(晨止不能起).”

 

이 시는 사실 탐탁지 않아했던 이가 초대한 술자리에 가기 싫어 지었던 것이다.

술을 남자처럼 사랑했던 미녀 시인 송나라의 이청조도 유명하다. 대표작 ‘여몽령(如夢令)’은 주시의 백미다.

 

“어젯밤 비는 드문드문 바람은 세찼지, 깊은 잠에도 술기운은 남아 있네.

발을 걷는 이에게 물어보니, 도리어 해당화는 전과 같다고 하네.

아는가, 아는가. 잎사귀는 무성해도 꽃은 시드는 것을

(昨夜雨疏風驟, 濃睡不消殘酒.

試問捲簾人, 却道海棠依舊.

知否知否. 應是綠肥紅瘦).”

 

흘러가는 봄을 아쉬워하는 심경을 담은 시구 ‘녹비홍수(綠肥紅瘦)’가 압권이다.

중국에서 술은 망국(亡國)의 소재로도 자주 인용됐다. 그래서 국정 운영을 재정비하려는 통치자들은 곧잘 금주령을 내리곤 했다. 성군의 대명사인 우(禹)임금은 신하가 올린 술을 마신 뒤 “후세에 반드시 술로써 나라를 망치는 자가 있을 것”이라고 경계했다. 과연 하(夏)의 걸(桀) 왕, 은(殷)의 주(紂) 왕이 모두 술과 미녀에 빠져 나라를 잃었다. 주지육림(酒池肉林)의 고사가 이때 나왔다.

하·은의 멸망을 거울 삼아 주(周)나라는 술을 금했다. 주나라 역사를 담은 서경(書經)에는 술이 초래하는 재앙을 경계한 ‘주고(酒誥)’ 편이 나온다. 특히 무리 지어 술 마시는 군음(群飮)은 죽음으로써 벌했다는 기록까지 있다. 이후 한(漢), 후조(後趙), 북위(北魏), 원(元), 명(明), 청(淸) 시기에도 금주령이 내려졌다는 기록이 있다. 정치적 혼란과 흉작 등으로 인해 일시적으로 내린 조치였다.

'삼국지'의 영웅 조조(曹操)가 군량미를 아끼려 금주령을 내렸을 때였다. 수하의 장수 서막(徐邈)이 금주령에 아랑곳하지 않고 몰래 술을 마시고 대취했다.

마침 조사 나온 검사관이 추궁하자 서막은 “성인에 빠졌소(中聖人)”라고 대답했다.

보고를 들은 조조가 크게 화를 냈다. 곁에 있던 장군 선우보(鮮于輔)가 “술꾼들은 종종 청주(淸酒)를 성인(聖人)에, 탁주(濁酒)를 현인(賢人)에 비유합니다. 서막이 술에 취한 행동은 우발적 사건일 것입니다”며 변호했다. 이때부터 술은 성인(聖人)이란 별칭을 얻었다.

조조의 금주령에 당시의 문인클럽인 건안칠자(建安七子)의 한 사람인 공융(孔融)이 반발했다.

 

“노(魯)나라는 유가(儒家)로 손상을 당했지만 문학을 포기하지 않았고, 하·상은 부인으로 인해 천하를 잃었지만 혼인을 중단시키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술을 금한다는 것은 곡식을 아끼려는 것일 뿐 망국의 경계로 삼으려는 것은 아닙니다.”

 

촉(蜀)나라의 유비(劉備)도 천하통일을 위해 금주령을 내렸다. 민간에서 사사로이 술을 담글 수 없도록 옹기를 모두 몰수하는 조치까지 내렸다고 한다.

중화인민공화국을 세운 혁명 1세대는 술을 즐겼다. 마오쩌둥(毛澤東·모택동)은 술과 파티를 즐긴 편이었다. 하지만 1979년 권력을 잡은 덩샤오핑(鄧小平·등소평) 이후 제3세대의 장쩌민(江澤民·강택민) 시대, 제4세대인 후진타오(胡錦濤·호금도) 시대에 지도층 인사의 음주 추태와 관련한 뒷담화는 사실상 없는 편이다. 언론 통제도 작용했겠지만 그만큼 위정자가 술을 조심한다는 이야기다.

2007년에는 현대판 금주령이 화제에 올랐다. 주인공은 허난(河南)성 신양(信陽)시. 시 정부는 공무원들이 오찬에 술을 곁들이는 관행을 전격 금지했다. 전국적으로 찬반 양론이 격화됐다. 베이징대 법학원 교수가 “(공무원) 금주령은 법치정신에 부합된다”고 결론지으면서 논란은 잦아들었다. 이후 산둥(山東)·구이저우(貴州)·산시(山西)·저장(浙江)·장쑤(江蘇) 등의 여러 지방으로 ‘오찬 금주령’이 확대됐다.

중국 사회에선 술에 대해 험담과 예찬이 교차한다. 애주가 구양수(歐陽脩)는 이렇게 말했다.

 

“취옹의 뜻은 본래 술에 있는 것이 아니다. 바로 산수 자연에 있다. 산수 자연의 정취를 마음으로 느끼고 술에 기탁한 것이다(醉翁之意不在酒. 在乎山水之間也. 山水之樂, 得之心而寓之酒也).”

 

술은 수단일 뿐 술에 사로잡혀 본말을 전도하면 안 된다는 메시지다.

 

 

중앙SUNDAY

 

 

 

 

武陵春(무릉춘) / 이청조(李淸照)

 

風住塵香花已盡 풍주진향화이진

日晩倦梳頭 일만권소두

物是人非事事休 물시인비사사휴

欲語淚先流 욕어루선류

聞說雙溪春尙好 문설쌍계춘상호

也擬汎輕舟 야의범경주

只恐雙溪??舟 지공쌍계책맹주

載不動許多愁 재부동허다수

 

바람에 먼지 머무르고 아름다운 꽃 이미 시드니

날이 저물어도 머리 빗기 귀찮아요

자연이 본디 사람일 아니지만 만사가 쉬는구나 

말을 하려니 눈물 먼저 흘려 내려요

듣자니, 쌍계의 봄은 한참이라는데

가벼운 배라도 띄워 볼까

다만 걱정되는 것이 쌍계의 조각배로는

이 많은 시름 실어내지 못할 것 같아요

 

 

塵 황사먼지. 세속의 일.

香花 :아름다운 꽃. 향기로운 꽃.

也 : 발어사.

??책맹 : 거룻배.

 

 

 

중국 산둥 성[山東省] 지난[濟南]~ 1150경 저장 성[浙江省] 진화[金華]. 중국 송대(宋代)의 시인.

 

그녀의 작품은 극히 일부만이 남아 있지만 그녀가 살았을 때와 다름없이 지금도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이청조는 문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1011년 이름난 골동품 수집가였던 조명성(趙明誠)과 결혼하여 행복한 생활을 했으나 여진족이 카이펑[開封]을 점령했을 때 피난을 가던 중 1129년 남편이 죽었다.

계속 피난길에 오른 그녀는 1132년 항저우[杭州]에 도착했다. 2년 후 다시 진화로 피난가서 1150년경 그곳에서 죽은 것으로 추정된다. 이청조는 7권의 수필과 6권의 시집을 냈으나 모두 없어지고 지금은 몇 편의 시만 전해지고 있다. 그녀는 송대에 크게 유행했던 서정적인 운문(韻文)으로서 음률에 맞추어 노래로 불리는 사(詞)를 주로 지었다. 그녀의 시는 여성 특유의 예리함과 강렬한 어법(語法) 구사로 유명하다.